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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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량은 301년부터 376년까지 량주 지역을 중심으로 존속했던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의 국가이다. 서진의 관료였던 장궤가 301년 량주 자사를 자처하며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한 것을 시작으로, 장궤의 아들 장식, 장무를 거쳐 장준 대에 전성기를 맞았다. 이후 내분과 혼란을 겪다 376년 전진에 의해 멸망했다. 전량은 서진, 동진 등의 연호를 사용하며, 독립적인 연호를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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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량 - 장요령
장요령은 전량의 제5대 국왕으로, 353년에 즉위했으나 355년에 폐위되어 살해되었고 시호는 애공이다.
전량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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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일반 명칭 | 전량 |
공식 명칭 | 량 (涼) |
존속 기간 | 301년 - 376년 |
지위 | 속국 |
종주국 | 동진, 한조, 후조, 전진 |
정치 체제 | 군주제 |
역사 | |
시작 사건 | 장궤의 량주 자사 임명 |
시작 사건 발생일 | 301년 |
종료 사건 | 장천석의 사망 |
종료 사건 발생일 | 376년 9월 26일 |
주요 사건 1 | 장식의 민제 연호 유지 |
주요 사건 1 발생일 | 318년 |
주요 사건 2 | 장무의 량왕 칭호 수락 |
주요 사건 2 발생일 | 323년 |
주요 사건 3 | 장준의 섭정 량왕 선포 |
주요 사건 3 발생일 | 345년 |
주요 사건 4 | 장좌의 동진 종주권 공식 거부 |
주요 사건 4 발생일 | 354년 |
주요 사건 5 | 장현정의 동진 종주권 공식 수락 |
주요 사건 5 발생일 | 361년 |
망명 시작 | (기록 없음) |
망명 종료 | (기록 없음) |
수도 | |
수도 | 고장 |
망명 수도 | (기록 없음) |
통용 언어 | |
통용 언어 | (기록 없음) |
종교 | |
종교 | (기록 없음) |
화폐 | |
화폐 | 중국 주화, 오수전 |
지도자 | |
지도자 칭호 | 공작/왕 |
장궤 | 재임 시작: 301년 재임 종료: 314년 |
장식 | 재임 시작: 314년 재임 종료: 320년 |
장무 | 재임 시작: 320년 재임 종료: 324년 |
장준 | 재임 시작: 324년 재임 종료: 346년 |
장숭화 | 재임 시작: 346년 재임 종료: 353년 |
장요령 | 재임 시작: 353년 재임 종료: 353년 |
장좌 | 재임 시작: 353년 재임 종료: 355년 |
장현정 | 재임 시작: 355년 재임 종료: 363년 |
장천석 | 재임 시작: 363년 재임 종료: 376년 |
현재 국가 | |
현재 국가 | 중국 키르기스스탄 몽골 |
지도 | |
![]() |
2. 역사
장궤는 서진의 관료로,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301년 양주자사를 자청하여 양주에 부임하였다. 그는 양주를 장악한 이후에도 서진의 신하를 자처하였으며,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고 장안이 전조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원군을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서진에서는 장궤를 서평공에 봉하였다.[5]
314년 장궤가 죽자 아들 장식이 뒤를 이었다. 장식 역시 서진의 신하를 자처하였으며, 317년 서진이 멸망하고 사마예가 동진을 건국하자 동진에 복종하였다. 다만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서진의 건흥을 계속 사용하였다. 320년 장식이 암살당한 후, 그의 동생 장무는 동진의 허가 없이 즉위하였는데, 보통 이때부터 전량 정권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장무는 동진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5]
323년 전조의 유요가 28만 대군을 이끌고 전량을 침공하자 장무는 항복하여 전조에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전조는 장무를 양왕에 봉했다. 324년 장무는 병사하고, 그 뒤를 장식의 아들 장준이 계승했다.[9]
장준은 전조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남쪽의 성한과 왕성하게 교류하고 전조로부터 독립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329년 전조는 후조에게 멸망하였으며, 후조는 장준에게 관직을 수여하려 했으나, 장준은 이를 거부하였다. 또한 구자, 선선 등 서역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 농서 지역을 경략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 양왕을 자칭하기도 하였다.[9]
346년 장준이 죽고, 차남 장중화가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후조의 석호가 대군을 동원하여 쳐들어와 진주 지역을 상실하였으나 사애를 등용하여 후조의 침입을 막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후 후조가 멸망하고 관중 지역에서 전진이 세력을 확대하자 장중화는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였다. 353년에는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9]
353년 장중화가 죽자 아들 장요령이 뒤를 이었으나 숙부 장조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354년 장조는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화평으로 정하였다. 355년 자사 장관(張瓘)이 반정을 일으켜 장조를 살해하고 장현정을 옹립하였다.[9]
장관은 정권을 전횡하여 송혼(宋混)에게 살해되었으며, 송혼이 죽자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송징(宋澄)·장옹(張邕) 등도 차례로 살해되었다. 363년 장준의 막내아들 장천석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량은 전진에 복속하였으며, 363년 장천석이 장현정을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장천석은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세력확대를 꾀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371년 다시 전진에 복속하였다. 376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전량을 멸망시켰다.[9]
2. 1. 건국 배경
장궤는 서진의 관료였다.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301년 양주자사를 자청하여 양주에 부임하였다. 그는 양주를 장악한 이후에도 서진의 신하를 자처하였으며,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고 장안이 전조의 공격을 받을 때에는 원군을 파견하여 돕기도 하였다. 이러한 공로로 서진에서는 장궤를 서평공에 봉하였다.[5]314년 장궤가 죽자 아들 장식이 뒤를 이었다. 장식 역시 서진의 신하를 자처하였으며, 317년 서진이 멸망하고 사마예가 동진을 건국하자 동진에 복종하였다. 다만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서진의 건흥을 계속 사용하였다. 320년 장식이 암살당한 후, 그의 동생 장무는 동진의 허가 없이 즉위하였는데, 보통 이때부터 전량 정권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장무는 동진과의 관계를 계속 유지하였다.[5]
2. 2. 초기 발전
장궤는 서진의 관료로,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301년 양주자사를 자청해 부임하였다. 그는 양주를 장악한 후에도 서진의 신하를 자처하였으며,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될 때 원군을 파견하기도 하였다. 314년 장궤가 사망하자 아들 장식이 뒤를 이었다. 장식 역시 서진의 신하를 자처하였고, 317년 서진이 멸망하고 동진이 건국되자 동진에 복종하였다. 다만,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서진의 건흥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다. 320년 장식은 암살당했고, 그의 동생 장무가 뒤를 이었다. 장무는 동진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전조와 대립하다 323년 항복하여 전조의 량왕에 봉해졌다.장궤는 량주 명문가 출신으로, 유학에 능통하고 재능과 인망이 높았다. 10세에 숙부의 관직을 이어 낙양에서 여러 요직을 역임했고, 장화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팔왕의 난으로 낙양이 혼란스러워지자, 301년 량주 자사·호강교위에 임명되어 고장에 부임했다. 그는 선비의 반란을 토벌하고, 현지 호족들을 등용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등 안정에 힘썼다. 또한, 비단을 기준으로 한 교역 제도를 정비하여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켰다.
304년 낙양이 혼란에 빠지자 장궤는 군사를 파견하여 혜제를 호위했다. 305년에는 농서군 태수 한치의 반란과 약라발능의 반란을 진압하여 위세를 떨쳤다. 308년 장궤는 중풍으로 아들 장무에게 주사를 대행하게 했다. 량주 호족 장월이 장궤의 지위를 빼앗으려 했으나, 장식이 이를 진압했다. 이후 장궤는 왕미와 유총의 공격을 격퇴하고, 낙양에 물자를 지원하는 등 서진에 충성을 다했다.
310년 한나라 군대가 낙양을 공격하자 장궤는 군사를 보내 구원했으나 실패했다. 312년에는 배포와 왕숙의 반란을 진압했다. 313년 민제가 즉위하고 유요가 장안을 공격하자 장궤는 군사를 보내 방어했다. 314년 민제는 장궤를 서평군공에 봉했다. 장궤는 같은 해 사망했고, 아들 장식이 뒤를 이었다.
314년 민제는 장식을 서평공에 봉하고 부친의 지위를 잇게 했다. 315년 전량에서 '황제 행인'이라는 인장이 발견되었으나, 장식은 이를 민제에게 보냈다. 316년 장식은 자신의 과실을 지적하는 자에게 포상하겠다고 선언했다. 같은 해, 장식은 장안에 공물을 바치고, 유요의 공격에 맞서 민제를 지원했다.
317년 장식은 군사를 일으켜 전조를 공격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민제가 사망하자, 장식은 사마예를 천자로 추대하고 건강에 사자를 보냈다. 사마예는 대흥으로 개원했지만, 장식은 서진의 연호 건흥을 계속 사용했다. 319년 사마보가 자립하여 장식을 정서대장군·의동삼사에 임명했다. 장식은 사마보를 지원했으나, 그가 양주로 도주하려 하자 이를 막았다. 320년 유홍이 장식을 살해하고 군주가 되려 했으나, 장무가 유홍 일당을 처형하고 장식의 뒤를 이었다.
2. 3. 전성기
323년 전조의 유요가 28만 대군을 이끌고 전량을 침공하자 장무는 항복하여 전조에게 신하의 예를 취했다. 전조는 장무를 양왕에 봉했다. 324년 장무는 병사하고, 그 뒤를 장식의 아들 장준이 계승했다.[9]장준은 전조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남쪽의 성한과 왕성하게 교류하고 전조로부터 독립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329년 전조는 후조에게 멸망하였으며, 후조는 장준에게 관직을 수여하려 했으나, 장준은 이를 거부하였다. 또한 구자, 선선 등 서역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 농서 지역을 경략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내부적으로 양왕을 자칭하기도 하였다.[9]
346년 장준이 죽고, 차남 장중화가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후조의 석호가 대군을 동원하여 쳐들어와 진주 지역을 상실하였으나 사애를 등용하여 후조의 침입을 막는 데는 성공하였다. 이후 후조가 멸망하고 관중 지역에서 전진이 세력을 확대하자 장중화는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였다. 353년에는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장준은 324년에 숙부 장무의 뒤를 이어 전량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후조가 329년에 전조를 정복한 후, 그는 처음에는 후조의 권위에 저항했지만, 결국 복종할 수밖에 없었다.[9] 그럼에도 불구하고, 335년에 그의 군대는 사막을 건너 영토를 확장하여 구자와 같은 서역의 여러 오아시스 국가들이 그에게 복종하게 했다.[4] 4세기 중반, 전량은 오늘날의 간쑤성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 그리고 칭하이성과 닝샤 후이족 자치구의 일부 지역까지 통제할 수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4] 장준은 또한 중국 남서부의 성한과 관계를 맺었다.[10]
그의 치세 하에, 전량은 황실의 관직과 작위를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그의 통치 21년쯤에는 황제의 깃발, 장식, 마차를 모방했다.[11] 그의 국가의 막대한 부는 그가 고장 남쪽에 건설한 5개의 궁궐과 같은 사치스러운 건축 사업으로 잘 나타났다.[9] 345년, 그는 여전히 동진을 상국으로 인정하면서 스스로를 양왕으로 칭했다.
장준은 사지절(使持節)·대도독(大都督)·대장군(大將軍)·량주자사(刺史)·령호강교위(領護羌校尉)·서평공(西平公)이 되었고, 영내에 대사(大赦)를 내렸다. 전조에서 사자가 와서 장준을 상대장군·량주목·량왕(涼王)으로 임명했다. 전량은 전조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계속해서 서진의 연호인 건흥(建興) 12년(서진 자체는 건흥 5년에 멸망했다)을 칭했고, 더 나아가 동진과도 관계를 유지했다.
324년 12월, 부한(枹罕)을 통치하던 신안(辛晏)은 장준을 따르기를 거부하고 부한을 거느리고 반기를 들었지만, 이듬해 2월에 항복했다.
326년 12월, 전조의 습격을 두려워하여 장군 송집(宋輯)·위찬(魏纂)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농서군(隴西郡)·남안군(南安郡)의 백성 2천여 가구를 고장(姑臧)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성한과 수호를 맺기 위해 사자를 성도로 파견했고, 이후에도 사자를 왕래하게 되었다. 333년에는 성한의 번국을 칭했다.
327년 5월, 전조가 후조에게 대패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장준은 전조로부터 받은 관작을 폐하고 무위군 태수 두도(竇濤)·금성군(金城郡) 태수 장랑(張閬)·무흥군(武興郡) 태수 신암(辛岩)·양렬장군 송집·한박(韓璞) 등에게 전조의 진주(秦州) 여러 군을 공략하도록 명령했다. 유요는 아들 남양왕 유윤(劉胤)을 파견하여 요격하게 했고, 적도성에 주둔시켰다. 7월, 한박·신암은 옥간령(沃干嶺)에서 유윤과 대치했다. 10월, 70여 일에 걸쳐 대치하는 동안 군량이 바닥나자, 한박은 신암을 파견하여 금성에서 식량을 수송해 오려고 했다. 유윤은 호연나새(呼延那奚)에게 병사 3천을 주어 량도를 끊게 하고, 유윤은 기병 3천을 이끌고 옥간령을 습격하여 신암을 격파했다. 게다가 한박의 진영을 핍박하자, 한박군은 궤주하고 말았다. 유윤은 승세를 타고 추격하여 강을 건너 영거현(令居)을 공략하고, 더 나아가 진무(振武)까지 진출했다. 하서회랑(河西)의 백성은 크게 동요했고, 장랑·신안은 수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전조에 항복했다. 이렇게 장준은 하남의 땅을 잃었다.
330년 5월, 전조가 멸망하자 장준은 군대를 파견하여 다시 하남의 땅을 지배하에 두고, 적도현(狄道)까지 이르러 무가(武街)·석문(石門)·후화(候和)·강천(漒川)·감송(甘松)에 오둔호군(五屯護軍)을 두고 후조와의 국경으로 삼았다. 6월, 후조가 홍려 맹의(孟毅)를 파견하여 장준을 정서대장군·량주목으로 임명하고 구석[16]을 더했다. 장준은 장사 마선(馬詵)을 사자로 입공시켜 후조의 신하를 칭했다.
333년, 동진에 사자를 파견하여 표(表)를 받들었다. 동진에서도 또한 사자가 오게 되었고, 장준은 동진의 신하를 칭했지만, 아직 서진의 연호를 계속 사용했고, 그 통치에 복종하지 않았다. 334년 2월, 동진 조정은 장준에게 대장군(大將軍)·도독섬서옹진량주제군사(都督陝西雍秦涼州諸軍事)로 임명하는 인수를 수여했다. 이 시기에 량주·량주의 교통이 열리게 되면서, 전량은 매년 동진 조정에 사자를 보냈다.
335년 12월, 장준은 서호교위·사주자사 양선(楊宣)에게 병사를 주어 서역(西域)에 파견하여 유사를 넘어 구자(龜茲)·선선(鄯善)을 토벌하게 했다. 부하 장군 장식(張植)이 군의 선봉이 되어 진군하자, 가는 곳의 국가들은 모두 항복하고 고장으로 조공하게 되었다. 12월, 선선왕 원맹(元孟)[17]이 딸을 헌상해 오자, 이를 미인이라 칭하고 빈하관(賓遐觀)을 세워 살게 했다. 또한, 언기(焉耆)·거사(車師) 전부·호탄(于闐) 왕은 함께 사자를 파견하여 방물을 바쳐 왔다.
339년 10월, 우장사 임처(任處)를 영국자제주(領國子祭酒)[18]로 임명하고, 벽옹(辟雍)·명당을 건립하게 하고 예를 행하게 했다.
340년 10월, 후조 군주 석호(石虎)는 전량에 군대를 침공하게 하자, 장준은 장군 사애(謝艾)에게 요격을 명령했다. 사애는 출격하여 하서에서 대전을 벌여 후조군을 격파했다.
345년 12월, 서역에 있는 언기에 침공하여 이를 항복시켰다.
이 해[19], 장준은 무위를 시작으로 한 11군[20]으로써 량주로 삼고, 흥진을 시작으로 하는 8군[21]으로써 하주(河州)[22]로 삼고, 돈황을 시작으로 하는 3군[23]과 서역도호·무기교위·옥문대호군(玉門大護軍)의 3영으로써 사주(沙州)로 삼았다. 장준 자신은 대도독·대장군·가량왕(假涼王)·독섭삼주(督攝三州)라 칭하고, 수레와 복장, 정기는 모두 군왕을 모방한 양식으로 했다. 백관을 설치하고 관호와 부저도 또한 군왕에 준했으며, 명칭만은 구별했다. 처음으로 제주·낭중·대부·사인·알자 등의 관직을 두었고, 관료는 모두 장준에게 신(臣)을 칭했다.
346년 5월, 장준은 병에 걸려 이윽고 세상을 떠났다.
2. 4. 내분과 쇠퇴
장궤는 서진의 관료로 팔왕의 난으로 서진이 혼란에 빠지자, 301년 양주자사를 자청해 양주에 부임하여 반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 영가의 난으로 낙양이 함락되고 장안이 전조의 공격을 받을 때 원군을 파견하기도 하였다.[9]314년 장궤가 죽자 아들 장식이 뒤를 이었다. 장식은 317년 서진이 멸망하고 사마예가 동진을 건국하자 동진에 복종하였으나, 동진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서진의 건흥을 계속 사용하였다. 320년 유홍이 종교 반란을 일으켜 장식이 진압하였으나, 유홍의 신자인 염섭(閻涉)에 의해 암살당했다.[9]
장식의 동생 장무는 동진의 허가를 구하지 않고 즉위하였다. 보통 이때부터 전량 정권이 독자적으로 성립된 것으로 본다. 장무는 323년 전조의 유요가 침공하자 항복하여 전조의 신하가 되었다. 324년 장무는 병사하고, 장식의 아들 장준이 계승했다.[9]
장준은 전조가 쇠약해진 틈을 타서 성한과 교류하고 전조로부터 독립하여 진주를 공격하였다. 329년 전조는 후조에게 멸망하였으며, 후조는 장준에게 관직을 수여하려 했으나, 장준은 이를 거부하였다. 구자, 선선 등 서역 여러 나라를 지배하고 농서 지역을 경략하여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였다.[9]
346년 장준이 죽고, 차남 장중화가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후조의 석호가 쳐들어와 진주 지역을 상실하였으나 사애를 등용하여 후조의 침입을 막았다. 353년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9]
353년 장중화가 죽자 아들 장요령이 뒤를 이었으나 숙부 장조가 왕위를 찬탈하였다. 354년 장조는 황제를 자칭하고 연호를 화평으로 정하였다. 355년 자사 장관(張瓘)이 반정을 일으켜 장조를 살해하고 장현정을 옹립하였다.[9]
장관은 정권을 전횡하여 송혼(宋混)에게 살해되었으며, 송혼이 죽자 뒤를 이어 정권을 잡은 송징(宋澄)·장옹(張邕) 등도 차례로 살해되었다. 363년 장준의 막내아들 장천석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전량은 전진에 복속하였으며, 363년 장천석이 장현정을 살해하고 즉위하였다. 장천석은 전진으로부터 독립하여 세력확대를 꾀하였으나 실패하였으며, 371년 다시 전진에 복속하였다. 376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전량을 멸망시켰다.[9]
2. 5. 멸망
376년 부견은 요장을 보내 전량을 멸망시켰다.[12] 전량은 내부 분열로 국력이 약화되었고, 356년에는 친(親) 동진 반란이 여러 차례 발생하여 황하 이남의 영토를 모두 잃었다. 전진의 압박에 직면한 전량은 전진의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장천석은 통치 기간 동안 '건흥' 연호를 버리고 동진의 연호를 채택하여 동진에 대한 주권을 인정했다. 이후 장천석은 환온에게 전진에 대한 공동 작전을 제안했지만 무시당했다.376년 7월, 부견은 무위장군(武衛將軍) 구창, 좌장군 모성, 중서령 양희, 보병교위 요장 등에게 13만 명의 병사를 주어 전량을 정벌하게 했다. 또한 진주자사 구지, 하주자사 이변(李弁), 양주자사 왕통에게 삼주의 병력을 이끌고 후속 부대를 맡게 했다. 부견은 염부와 양수를 전량에 보내 장천석에게 장안으로 입조할 것을 권했으나, 장천석은 사자 두 명을 살해하고 용양장군 마건에게 2만 명의 병력을 주어 전진군을 막게 했다.
8월, 양희, 요장, 왕통, 이변은 청석진(清石津)에서 황하를 건너 하회성(河會城)을 공격했고, 하회성을 지키던 효렬장군(驍烈將軍) 양제는 전진에 항복했다. 구창은 석성진(石城津)에서 황하를 건너 양희 등과 함께 전축성(纏縮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마건은 청새(清塞)까지 후퇴했고, 장천석은 정동장군 상거에게 3만 명의 병력을 주어 홍지(洪池)로 파견하고 자신도 5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금창성(金昌城)으로 출정했다.
구창은 요장에게 3천 명의 병사를 주어 선봉으로 삼았고, 마건은 1만 명의 병력으로 요장 등을 막았으나 대패하여 전진에 항복했다. 이로 인해 다른 전량 병사들은 도망쳤다. 구창이 홍지로 진격하자 상거가 맞서 싸웠지만 패배하여 전사했고, 군사 석력(席仂)도 전사했다. 전진군이 청새로 진격하자, 장천석은 사병(司兵) 조충철, 중위장군 사경에게 5만 명의 병력을 주어 맞서게 했지만, 적안(赤岸)에서 조충철은 요장에게 패배했다. 이 전투에서 전량군은 3만 8천 명의 병력을 잃었고 조충철과 사경은 전사했다. 장천석은 크게 두려워하며 성을 나와 직접 출격했으나, 성을 지키던 유수(留守)가 반란을 일으켜 어쩔 수 없이 수천 기(騎)를 이끌고 고장으로 후퇴했다. 전진군이 고장까지 진격하자, 장천석은 항복을 결심하고 스스로 몸을 묶고 관을 곁에 둔 채 구창의 군문에 항복했다. 구창은 장천석의 결박을 풀고 관을 불태운 뒤, 장천석을 장안으로 보냈다. 이로써 양주의 모든 군현은 전진에 항복했고, 전량은 멸망했다.
3. 역대 군주
시호 | 성 및 이름 | 재위 기간 | 연호 및 해당 기간 |
---|---|---|---|
무(武) | 장궤 | 301년–314년 | |
명(明) | 장식 | 314년–320년[3] | 건흥 318년–320년 (진 민제의 연호) |
성(成) | 장무 | 320년–324년[3] | 건흥(建興) 또는 영원(永元) 320년–324년 |
중성(中成) | 장준 | 324년–346년[3] | 건흥(建興) 또는 태원(太元) 324년–346년 |
환(桓) | 장충화 | 346년–353년[3] | 건흥(建興) 또는 영락(永樂) 346년–353년 |
- | 장요령 | 353년 | 건흥(建興) 353년 |
위왕(威王) | 장작 | 353년–355년[3] | 화평(和平) 354년–355년 |
경도(景悼) | 장현정 | 355년–363년[3] | 건흥(建興) 355년–361년 |
도(悼) | 장천석 | 364년–376년[3] | 승평(昇平) 363년–372년 |
4. 건국 시점에 대한 여러 설
전량의 역대 군주들은 그 통치 기간 동안 명확하게 독립을 표방하는 일이 거의 없었다. 기본적으로 서진·동진의 신하로서의 입장을 유지했으며, 때로는 전조·후조·전진과 같은 중원을 지배했던 왕조에도 종속되어 반독립국 또는 속국과 같은 입장에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타국에 복속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독립해 있다는 미묘한 국가 체제가 구축되어 있었고, 무엇을 건국으로 정의할 것인지가 매우 어려우므로 그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 일반적으로는 301년에 장궤가 량주 자사로 고장(姑臧)에 부임한 것을 전량의 건국으로 보고 있지만, 장궤는 일관되게 서진의 신하 입장을 관철했고, 관작을 자칭하는 일도 일절 없었으며, 부여받은 작위도 서평공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장씨의 량주 통치가 장궤의 량주 부임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중요시하여 건국년으로 정의되는 경우가 많다.
- 317년에는 동진이 수립되었지만, 장식은 동진의 연호를 받들지 않고 서진의 연호인 건흥을 계속 사용했다. 이는 동진의 신하로서의 입장을 부정하고 독립 세력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것을 건국년으로 보기도 한다. 다만, 장식은 사마예의 황제 즉위에도 협력했으며, 동진과의 관계가 단절되었던 것은 아니다.
- 320년에 장무가 영원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세운 것을 건국년으로 보는 설도 있다. 다만, 이 연호는 송나라때의 굉영이 저술한 『운력도』 등 일부 서적에 기재되어 있을 뿐이며, 진서·자치통감·십육국춘추에서는 모두 서진의 연호인 건흥을 계속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어, 사실 여부는 불명이다.
- 323년에는 전조에 칭번하고, 장무는 량왕에 봉해졌다. 전조로부터의 봉호라고는 하지만, 전량 군주가 왕위를 얻는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다만, 동진과도 계속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 장준 시대가 되자, 여러 신하들이 왕으로 칭하는 것이 반쯤 관례화되는 듯하며, 345년에는 가량왕을 자칭했다. 동진을 배려하여 가(假)라고는 하지만, 왕위를 자칭하는 것은 전량 정권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장준은 수레, 복식, 정기를 모두 군왕을 모방한 양식으로 하고, 백관을 설치하는 등 국가로서의 제도를 정비했다.
5. 연호
연호 | 기간 | 비고 |
---|---|---|
건흥 | 317년 - 354년, 355년 - 361년 | 서진 민제의 연호를 계속 사용. |
영안 | 317년 - 320년 | 장식 시대에 사용되었다고도 함. |
영원 | 320년 - 324년 | 장무 시대에 사용되었다고도 함. |
태원 | 324년 - 346년 | 장준 시대에 사용되었다고도 함. |
영락 | 346년 - 353년 | 장중화 시대에 사용되었다고도 함. |
화평 | 354년 - 355년 | 대외적으로도 사용된 유일한 독자적인 연호. |
태시 | 355년 - 361년 | 장현량 시대에 사용되었다고도 함. |
승평 | 361년 - 376년 | 동진 목제의 연호를 계속 사용. |
영안 등의 연호는 일부 사서에 그 기재가 있지만, 실재했는지는 불명이다. 국내에서는 영안 등의 연호가 사용되고, 대외적으로는 건흥의 연호를 사용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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