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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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중화는 전량의 제3대 군주로, 330년에 태어나 346년에 즉위하여 353년에 사망했다. 그는 장준의 차남으로, 관대하고 온화한 성품을 지녔으며, 후조의 침략에 맞서 사애를 등용하여 방어전을 펼쳤다. 하지만 말년에는 측근을 신뢰하고 유흥에 빠져 평범한 통치자로 평가받았다. 장중화는 아들 장요령을 후계자로 지명했으나, 장조가 유언을 숨기고 찬탈을 시도하면서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이했다. 사후에는 경열공, 명왕으로 추존되었으며, 묘호는 궐조로 칭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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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중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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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장중화 (張重華) |
자 | 태림 (泰臨) |
작위 | 시평공 (西平公) |
시호 | 경렬공 (敬烈公, 동진에서 추증), 환왕 (桓王, 장좌가 추증) |
묘호 | 세종 (世宗, 장좌가 추증) |
시대 | 전량 |
연호 | 건흥 (建興) |
재위 기간 | 346년–353년 |
즉위 이전 칭호 | 346–347: 사진절(使持節), 대도독(大都督), 태위(太尉), 호강교위(護羌校尉), 양주목(涼州牧), 시평공(西平公), 가량왕(假涼王) 347–353: 가절(假節), 시중(侍中), 대도독(大都督), 독농우관중제군사(督隴右關中諸軍事), 대장군(大將軍), 량주자사(涼州刺史), 시평공(西平公) 353년 이후: 가절(假節), 시중(侍中), 대도독(大都督), 독농우관중제군사(督隴右關中諸軍事), 대장군(大將軍), 양주목(涼州牧), 시평공(西平公) |
생애 | |
출생 | 327년 |
사망 | 353년 |
부친 | 장준 |
모친 | 마씨 |
배우자 | 배왕후, 곽씨 (첩) |
자녀 | 장요령, 장현정 |
2. 생애
330년 장준의 차남으로 태어난 장중화는 346년 아버지 장준이 죽자 16세의 나이로 뒤를 이었다.[3] 즉위 직후 후조의 침공으로 진주(간쑤성 동부) 지역을 빼앗겼으나, 사애를 등용하여 5차례에 걸친 후조의 침공을 모두 막아냈다.[3] 그러나 황하 이남 지역은 모두 후조에 복속되었다.[3]
353년 관중 지역에서 세력을 확대한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3] 하지만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하였다.[3]
같은 해 말, 장중화는 병에 걸려 아홉 살 된 아들 장요령을 태자로 지명했다. 353년 10월, 춘방(태자의 거처. 동궁이라고도 한다)에서 좌장사 마급을 파견하여 장요령을 세자로 세우고, 영내에 대사령을 내렸다.[1]
장중화는 공신인 사애를 총애했으나, 측근들의 참언으로 주천군 태수로 좌천시켰다.[1] 사애는 "권신, 능신이 전단하고 있으며, 공실의 위기입니다. 부디 신을 입시하게 해주십시오. 또한, 장녕후 조와 조장 등은 장차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를 내쫓아야 합니다."라고 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11월, 장중화의 병세가 깊어지자, 사애를 불러 위장군·감중외제군사로 임명하여 장요령을 보정하게 하는 칙서를 직접 썼으나, 장조와 조장이 이를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장중화는 평장전에서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재위 기간은 8년이었다.[1] 장요령이 뒤를 이었고, 현릉에 장례를 치른 후 소공(昭公)으로 시호되었으며, 이후 환공(桓公)으로 개칭되었다.[1] 동진의 목제는 경렬(敬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후에 장조가 왕위를 참칭하면서 환왕(桓王)으로 추시되었으며, 묘호는 궐조(闕祖)로 칭해졌다.[1]
2. 1. 초기 생애
330년에 장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332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는 관대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온화한 인물이었다. 또한 행동거지가 매우 훌륭했으며, 침착하고 의연했다. 339년 11월, 12세의 장중화는 장준의 명으로 양주(涼州, 현재의 간쑤성 중부 및 서부)의 행주자사 직함을 받고 주의 사무 일부를 처리하게 되었다. 345년 12월에 양주 자사에 정식으로 임명되었다.346년, 장중화의 아버지 장준이 사망했다. 약 19세의 장중화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서평공 등의 작위와 스스로 칭한 양왕 직함을 물려받았다. 장중화는 아버지의 부인인 염씨를 태후로, 어머니인 마씨 부인을 태비로 존경했다.
2. 2. 즉위와 통치
346년 장준이 죽자 16세의 나이로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즉위 직후 후조가 침공해와 진주(秦州 : 간쑤성 동부) 지역을 빼앗기고 양주(凉州 : 간쑤 성 중서부)를 방어하였다. 이때 장중화는 사애를 등용하여 후조의 대군을 막도록 하였으며, 사애는 5차에 걸친 후조의 침공을 모두 막아내는데 성공하였으나 황하 이남 지역은 모두 후조에 복속되었다.[3] 후조가 멸망하고 관중(關中) 지역에서 전진이 세력을 확대하자 353년에 전진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하였다. 그러나 황하 이남의 일부 지역을 확보하는데 성공하였다.353년 말에 장중화는 병에 걸렸고, 어린 아들 장요령을 후계자로 삼았다. 당시 사애는 참소를 받아 주천(酒泉) 태수로 좌천되어 있었는데, 장중화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사애에게 정치를 보필하도록 하였으나 장조가 유언을 감추고 발표하지 않았다.[5] 354년에 장조가 추존하여 명왕(明王)으로 시호를 올렸다.
장중화는 게임과 유흥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낸다는 비판을 받았다. 아첨하는 측근들을 신뢰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잔인하거나 사치스럽다는 비판은 받지 않았다. 349년, 삭진(索振)은 그에게 게임에 시간을 덜 쓰고 측근들에게 너무 많은 돈을 보상하지 말라고 설득하려 했지만, 장중화는 그에게 감사를 표하고 보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방식을 크게 바꾸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장중화 즉위 직후, 후조의 장군 왕탁(王擢)과 마구가 이끄는 군대가 전량을 기습 공격하여 황하 이남의 전량 영토를 점령했는데, 여기에는 중요한 도시인 금성(金城, 현재 간쑤성 란저우)이 포함되었다. 장중화는 사애에게 군대를 이끌도록 지시했고, 사애는 346년과 347년에 마구와 왕탁의 군대를 격파하여 전량 파괴 계획을 포기하게 만들었지만, 황하 이남의 땅은 되찾을 수 없었다.
347년, 동진의 사신 유귀(俞歸)가 전량에 도착하여 장중화에게 여러 관직을 수여했지만, 장중화가 찾고 있던 량왕(涼王)은 아니었다. 그는 유귀에게 그 칭호를 수여해 달라고 설득했지만, 유귀는 거절했고, 결국 유귀를 억류했다(유귀는 장중화 사후 한참 뒤인 363년에 풀려났다).[4]
장중화는 349년부터 351년까지 후조가 붕괴되는 동안 대체로 관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조의 서부 영토 대부분은 저족 장군 부견의 손에 들어갔고, 부견은 351년에 전진을 건국했다. 352년 말 또는 353년 초, 현대 간쑤성 동부 지역을 점령하고 전연에 충성을 맹세했던 전 후조 장군 왕탁은 전진 군대에 저항하지 못하고 장중화에게 항복했다. 장중화는 그를 잘 대우하며 전진에 대항하는 장수로 활용하려 했다. 353년 봄, 그는 왕탁, 장홍(張弘), 송수(宋修)에게 1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전진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지만, 큰 손실을 입었다. 보고에 따르면 군대의 80%인 12,000명이 사망했다. 장홍과 송수는 포로로 잡혔고, 왕탁은 수도 고장(姑臧, 현재 간쑤성 우웨이)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여름에 왕탁은 2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상규(上邽, 현재 간쑤성 톈수이)를 공격하여 진주(秦州, 현대 간쑤성 동부) 대부분을 점령했다. 장중화는 이후 진 목제에게 전진에 대한 공격을 요청하는 청원을 제출했다. 목제는 사신을 보내 장중화를 칭찬하고 더 많은 명예를 수여했지만, 진 정부는 당시 전진을 공격하는 데 관심이 없는 것으로 보여 계획은 실행되지 않았다.[6]
2. 3. 죽음과 후계
353년 말, 장중화는 병에 걸려 어린 아들 장요령(張耀靈)을 후계자로 삼았다. 당시 사애는 참소를 받아 주천 태수로 좌천되어 있었는데, 장중화는 죽으면서 유언으로 사애에게 정치를 보필하도록 하였으나 장조가 유언을 감추고 발표하지 않았다.[1] 장중화 사후 시호는 환공(桓公)이며, 동진 목제(穆帝)는 경열공(敬烈公)이라는 시호를 하사하였다.[1] 354년에 장조가 추존하여 명왕(明王)으로 시호를 올렸다.[1]353년 10월, 장중화는 병을 앓게 되자 춘방(태자의 거처. 동궁이라고도 한다)에서 좌장사 마급을 파견하여 당시 10세였던 아들 장요령을 세자로 세우고, 영내에 대사령을 내렸다.[1]
장중화의 서형인 장녕후 장조는 무예와 정치적 재능이 뛰어났으나, 몰래 나라를 어지럽힐 생각을 품고 장중화의 총신 조장, 위집 등과 결탁하여 이성 형제가 되었다.[1] 도위 상거는 장조를 위험시하여 조정 밖으로 내보낼 것을 권했으나, 장중화는 "나는 조에게 주공과 같이 어린아이를 보좌해주기를 바라고 있는데, 그대는 어찌 그런 말을 하는가!"라며 격노했다.[1]
장중화는 공신인 사애를 총애했으나, 측근들의 참언으로 주천군 태수로 좌천시켰다.[1] 사애는 장중화에게 상소를 올려 "권신, 능신이 전단하고 있으며, 공실의 위기입니다. 부디 신을 입시하게 해주십시오. 또한, 장녕후 조와 조장 등은 장차 난을 일으킬 것입니다. 이를 내쫓아야 합니다."라고 말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1]
11월, 장중화의 병세가 깊어지자, 장중화는 사애를 불러 위장군·감중외제군사로 임명하여 장요령을 보정하게 하는 칙서를 직접 썼으나, 장조와 조장이 이를 숨기고 발표하지 않았다.[1] 얼마 지나지 않아 장중화는 평장전에서 2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며, 재위 기간은 8년이었다.[1] 장요령이 뒤를 이었고, 현릉에 장례를 치른 후 소공(昭公)으로 시호되었으며, 이후 환공(桓公)으로 개칭되었다.[1] 동진의 목제는 경렬(敬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후에 장조가 왕위를 참칭하면서 환왕(桓王)으로 추시되었으며, 묘호는 궐조(闕祖)로 칭해졌다.[1]
3. 연호
4. 가족 관계
참조
[1]
서적
晋書
327
[2]
기타
또는 영락
[3]
서적
晋書・資治通鑑
[4]
서적
晋書
[5]
서적
十六国春秋
351-12
[6]
서적
十六国春秋
352-02
[7]
서적
晋書・十六国春秋
[8]
서적
晋書
[9]
서적
晋書
[10]
서적
晋書
[11]
기타
세종と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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