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직방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장직방은 당나라 시대의 인물로, 노룡군 절도사를 거쳐 금군 대장, 그리고 황소의 난 당시 황소에게 투항한 인물이다. 장중무의 아들로, 849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노룡군 절도사가 되었으나 포악한 성격으로 인해 반란을 겪고 도주했다. 이후 금군 대장, 좌금오위대장군 등을 역임하며 여러 차례 좌천되었고, 황소에게 투항하여 관직을 받았으나 황소를 배신하려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880년 사망 - 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
카를로마누스 바바리아이는 동프랑크 왕국의 왕 루트비히 2세의 아들로 바이에른을 상속받고 이탈리아 왕이 되었으나, 반란, 왕위 획득 실패, 건강 악화 등으로 복잡한 정치적 행보를 보이다 사망했다. - 880년 사망 - 후고 (동프랑크 왕자)
후고는 독일인 루트비히의 손자이자 루트비히 3세 청년의 서자로, 작센 백작이었으며 마자르족, 노르만족과의 전투에 참여하여 동프랑크 왕국을 수비하다가 880년 바이킹족과의 전투에서 전사했다. - 노룡군 절도사 (당) - 사사명
사사명은 안사의 난에 가담하여 세력을 키우다 아들에게 살해당한 당나라의 장군이자 연나라 황제로, 본래 이름은 사사간이었으며 돌궐과 소그드인 혼혈로 뛰어난 언어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 노룡군 절도사 (당) - 안록산
당나라 현종의 총애를 받던 안록산은 안사의 난을 일으켜 당나라 쇠퇴의 원인을 제공한 반란 지도자였으나, 2년 후 아들에게 암살당했다. - 사형된 중국 사람 - 추근
추근은 청나라 시대의 여성 혁명가, 시인, 교육자로, 일본 유학을 통해 혁명 사상에 심취하여 여성 해방 운동과 청나라 타도를 위한 활동을 펼치다 무장봉기 실패 후 처형되었으나, 사후 중국 혁명운동의 정신적 지주로 추앙받으며 그의 삶은 여러 작품으로 재해석되고 있다. - 사형된 중국 사람 - 반악
반악은 서진 시대의 문인으로, 빼어난 문학적 재능과 외모로 명성을 얻었지만 사마륜의 쿠데타로 처형되었으며, 슬픔과 비애를 섬세하게 표현한 작품으로 태강문학을 이끌었다고 평가받는다.
장직방 | |
---|---|
기본 정보 | |
이름 | 장직방 |
간체자 | 张直方 |
정체자 | 張直方 |
병음 | Zhāng Zhífāng |
생몰 | |
사망 | 881년경 |
활동 | |
소속 | 당나라 |
직업 | 군벌, 장군 |
2. 생애
장직방(張直方)은 중국 당나라 말기의 군벌이자 무장이다. 아버지 장중무의 뒤를 이어 노룡군 절도사가 되었으나, 포악한 성격과 실정으로 인해 부하들의 반란 위협을 받고 수도 장안으로 도주하였다.[14][5] 이후 선종에게 금군 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여전히 불법 행위와 직무 태만을 일삼아 여러 차례 좌천되었다.[15][6][7] 말년에는 희종 때 복직되었으나,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황소에게 항복하였다.[10][2] 그러나 당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고 당나라 관리들을 숨겨주고 황소 암살을 계획하다 발각되어 처형되었다.[10][15][2][6]
2. 1. 출신 배경
장직방의 출생 연대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12][4] 그의 아버지 장중무는 841년, 당 무종의 승인을 받아 장강張絳중국어으로부터 노룡군盧龍軍중국어 (현 허베이성 베이징 시 일대) 번진藩鎭중국어을 실질적인 관군 지원 없이 장악하였다.[12][4] 이후 장중무는 절도사로서 사실상 조정으로부터 독립적인 상태로 노룡군을 지배하였으나, 무종이 추진한 위구르 칸국 잔여 세력 소탕전이나 군벌 유진劉稹중국어 (소의군昭義軍중국어, 현 산시성 창즈시) 절도사) 토벌전에서는 무종의 명을 따르며 조정과의 관계를 유지했다.[12][13][4]이 무렵 장직방은 아버지 밑에서 절도압아節度押牙중국어 (절도사의 의장과 시위侍衛중국어를 담당하는 직책이자 근위대 사령관에 해당)로 임명되었다.[12][4] 아버지 장중무는 849년, 무종의 뒤를 이은 당 선종의 치세에 사망하였다.[14][5] 노룡군의 장병들은 장직방을 후임으로 추대하였고, 이에 선종은 그 해 4월 장직방을 유후留後중국어에 임명하였으며, 6월에는 정식으로 절도사에 임명하였다.[14][5]
2. 2. 노룡군 절도사 시대
장직방은 성격이 포악하고 잔인했으며, 사냥과 유흥, 술을 즐기며 사병들을 모욕하고 학대하였다.[14][5] 이 때문에 노룡군 장병들과 급속도로 멀어졌다.[14] 849년 11월, 장병들이 장직방을 타도하기 위해 반란을 획책했다.[14][5] 반란 계획을 알게 된 장직방은 두려움을 느껴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가족들을 데리고 수도 장안으로 달아났다.[14][5] 이에 노룡군 장병들은 아장(牙將) 주침을 유후로 추대하였다.[14][5]2. 3. 금군 대장 시대
장직방이 장안에 도착하자, 선종은 사자를 보내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였고, 좌금오위대장군에 임명하였다. 그는 대가족을 부양해야 했기에, 선종은 그에게 검교 공부상서 직을 주었고, 오래지 않아 검교 상서우복야로 승진시켰다.[15][6]하지만 그는 여전히 불법 행위를 일삼았고 포악하고 잔혹한 성격도 고쳐지지 않았다. 한번은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금오사(金吾使)를 몽둥이로 때려죽인 일이 있었는데, 이는 사형에 처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 사건으로 그는 좌금오위대장군에서 우우림통군으로 좌천되었다.[15][6] 그는 말을 타고 사냥하는 것을 좋아하여 가는 곳마다 길에 그물을 쳤다.[15] 사냥에 몰두하여 숙위에도 제때 돌아오지 않는 등 금군(禁軍) 대장으로서의 임무를 소홀히 하였다.[6] 결국 851년에는 더 낮은 직급인 좌효위장군으로 좌천되었다.[15][7] 그의 폭력적인 성향은 계속되어, 집안 하인들이 사소한 잘못을 하면 종종 때려 죽이기까지 했다. 죄가 쌓여 852년에는 은주사호(恩州司戶, 현 광둥성 장먼 시)로 강등되었다.[16][7]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장직방은 조정으로 소환되어 우우림통군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부하들이 강도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죄목으로 강주사마(康州司馬, 현 광둥성 자오칭 시)로 좌천되었다.[15][6] 이후 그는 동도(東都) 낙양에서 살게 되었는데, 그곳에서도 사냥으로 유명했다. 사냥이 매우 심해져 낙양의 새들이 그를 알아보고 떼 지어 지저귈 정도였다고 한다.[15][6]
선종의 손자인 희종 때인 건부 연간(874년 ~ 879년)에 장직방은 장안으로 소환되어 좌효위대장군에 임명되었다. 당시 호부(戶部)에서는 많은 급여를 제때 지급하기 어려웠다. 이에 재상 정전(鄭畋)이 장직방을 위해 나서서, 무종 때 장직방의 아버지 장중무의 공적이 으뜸이었고 지금 장직방이 가난하게 살고 있으니 아버지의 공적을 기려 그를 마땅히 우대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주장을 받아들여 희종은 조서를 내려 장직방을 검교 상서우복야로 임명하고 좌금오위대장군으로 복직시켰다.[15][6]
2. 4. 황소에게로 투항, 그리고 죽음
880년, 황소의 난이 일어나자 희종은 수도 장안을 버리고 성도로 피난했다.[10][2] 그해 말, 황소가 이끄는 군대의 선봉 부대가 장안에 입성하자, 장직방은 수십 명의 문무 관료들을 이끌고 패상(霸上, 현재 산시성 시안 동부)에서 황소를 맞이하며 항복했다.[10][2] 장안을 점령한 황소는 스스로 황제에 올라 새로운 나라인 대제(大齊) 건국을 선포했다.[10][2] 황소는 항복한 관리들에게 관직을 주었고, 장직방 역시 대제 정권 하에서 벼슬을 받았다.[10][2]하지만 장직방은 당나라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장안을 탈출하려 했으나 미처 희종을 따라가지 못한 많은 당나라 관리들을 자신의 집 벽 안에 숨겨주었다.[10][2] 여기에는 전직 재상 유업과 당시 재상이던 두로전, 최항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17][8] 나아가 그는 희종의 복위를 바라며 황소를 기습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10][6] 그러나 이 음모가 사전에 발각되면서, 장직방은 그의 가족들과 함께 처형당했다.[10][15][2][6]
참조
[1]
웹사이트
Academia Sinica Chinese-Western Calendar Converter
http://db1x.sinica.e[...]
2010-05-22
[2]
서적
Zizhi Tongjian vol. 254
https://zh.wikisourc[...]
[3]
문서
The chronology in the Zizhi Tongjian implied, but did not state outright, that Zhang Zhifang was executed by Huang Chao's Qi state on the same day as many other Tang officials, so the January 23 date may not be exact.
[4]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80
https://zh.wikisourc[...]
[5]
서적
Zizhi Tongjian vol. 248
https://zh.wikisourc[...]
[6]
서적
New Book of Tang vol. 212
https://zh.wikisourc[...]
[7]
서적
Zizhi Tongjian vol. 249
https://zh.wikisourc[...]
[8]
서적
Old Book of Tang vol. 177
https://zh.wikisourc[...]
[9]
웹사이트
중국력(中國曆) ↔ 서력(西曆) 변환기
http://sinocal.sinic[...]
[10]
서적
자치통감 권 254
https://zh.wikisourc[...]
[11]
문서
이것은 《[[자치통감]]》에서 나타나는 편년체(編年體)의 연대이지만, 장직방이 [[황소]]의 대제(大齊)에 의해 대다수의 다른 당나라 관리들과 함께 동시에 처형되었다는 것은 완전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래서 [[1월 23일]]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12]
서적
구당서 권 180 - 열전(列傳) 제130
https://zh.wikisourc[...]
[13]
서적
자치통감 권 247
https://zh.wikisourc[...]
[14]
서적
자치통감 권 248
https://zh.wikisourc[...]
[15]
서적
신당서 권 212 - 열전 제212 번진노룡(藩鎭盧龍)
https://zh.wikisourc[...]
[16]
서적
자치통감 권 249
https://zh.wikisourc[...]
[17]
서적
구당서 권 177
https://zh.wikisour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