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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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화는 오나라의 황족으로, 손권의 셋째 아들이자 손등의 뒤를 이어 황태자가 되었으나, 권력 다툼과 아버지 손권의 의심으로 인해 폐위되고 죽음을 맞이했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과 인품으로 칭찬받았으며, 황태자 시절에는 손패와의 권력 다툼, 이복 누이 손노반의 모함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폐위되어 유배된 후 자살했으며, 그의 아들 손호가 황제가 된 후에야 소헌황제로 추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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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화 | |
---|---|
기본 정보 | |
이름 | 손화 |
휘 | 화 |
자 | 자효(子孝) |
작위 | 남양왕(南陽王) |
시호 | 문황제(文皇帝) |
추존 연도 | 태원 원년(太元元年, 251년) |
생년 | 224년 |
몰년 | 253년 |
사인 | 자살 |
아버지 | 손권 |
어머니 | 왕부인 |
배우자 | 장비(張妃) 하고황후 |
자녀 | 손준 손호 손덕(孫徳) 손겸(孫謙) 육경의 아내 |
생애 | |
출생 | 224년 |
황태자 책봉 | 242년 2월 또는 3월 |
황태자 폐위 | 250년 9월 또는 10월 |
남양왕 책봉 | 252년 1월 또는 2월 |
사망 | 253년 |
사망 장소 | 이현, 안휘성 |
가계 | |
조부 | 손견 |
조모 | 오부인 |
부 | 손권 |
모 | 왕부인 |
형 | 손등 손려 손패 |
동생 | 손분 |
아들 | 손준 손호 손덕(孫徳) 손겸(孫謙) |
딸 | 육경의 아내 |
주요 사건 | |
황태자 책봉 | 손등 사후 황태자로 책봉됨. |
양파 사건 | 손화와 손패 간의 황위 계승 분쟁 발생. |
황태자 폐위 | 양파 사건으로 인해 황태자에서 폐위됨. |
남양왕 강등 | 황태자 폐위 후 남양왕으로 강등됨. |
자살 | 제갈각 사후 손준에 의해 자살 명령을 받음. |
기타 | |
시호 | 문황제(文皇帝) (추증) |
묘소 | 명릉(明陵) (추증) |
2. 생애
손화는 손권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낭야 사람 대의황후 왕씨이다. 241년 그의 형인 태자 손등이 요절하고, 작은 형 손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손화는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손권이 손화와 손패에게 황태자와 번왕의 구별을 없애면서, 오나라의 신료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나뉘어 격렬하게 대립했다. 많은 이들이 손권에게 손화의 황태자 지위를 공고히 할 것을 간언하였으나, 손권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12]
결국 손권은 250년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손패에게는 자살을 강요하는 극단적인 조치를 취했다. 이후 손화는 남양왕에 봉해져 장사로 귀양 보내졌다.[23][24] 손량 시대에 정권을 잡은 제갈각이 손화의 정비 장씨의 외삼촌이었기 때문에, 민간에서는 제갈각이 손화를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26] 손준이 제갈각을 암살한 후, 손준은 이 소문을 빌미로 손화의 인수를 빼앗고 신도로 보내 사사했다. 손화는 30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27]
손화의 폐위와 죽음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궁의 변'과 '폐위와 죽음' 하위 섹션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2. 1. 어린 시절
손화는 후한 말의 군벌이자 삼국 시대 동오의 초대 황제인 손권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손권의 후궁 중 한 명인 대왕부인(王夫人|왕부인중국어)이었으며, 264년에 "대의황후"(大懿皇后|대의황후중국어)로 추존되었다.[3] 왕부인이 당시 손권의 총애를 받았기에 손화 또한 아버지의 총애를 받았다.237년, 손화가 13세였을 때 손권은 몇몇 관리를 손화의 개인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간택에게 손화의 개인 교사로 궁중 서기직을 맡도록 명령했다. 당시 어린 십대였던 손화는 학구적이고 공손한 것으로 알려져 그를 만난 관리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다.[3]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왕씨의 총애를 받아, 14세 때에는 직속 관료와 병사를 두었다고 한다. 교육 담당으로 간택이 붙어 서적과 훈련[43]에 힘썼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 있는 인물과 정중히 접하여 명성을 얻었다.
손화는 태자 손등과도 친했다.
2. 2. 황태자 시절
손화는 손권의 셋째 아들로, 어머니는 낭야 사람 대의황후 왕씨이다. 241년에 그의 형인 태자 손등이 요절하자, 작은 형 손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으므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3]어린 시절부터 어머니 왕씨의 총애를 받아, 14세 때에는 직속 관료와 병사를 두었다. 간택이 교육을 담당하여 서적과 훈련[43]에 힘썼으며, 학문을 좋아하고 재능 있는 인물과 정중히 교류하여 명성을 얻었다. 당시 어린 십대였던 손화는 학구적이고 공손한 것으로 알려져 그를 만난 관리들은 모두 그를 칭찬했다.[3]
242년 19세에 손권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태자가 되었다. 간택, 설종이 태자의 교육을 담당했고, 채영, 장순, 봉보, 엄유와 같은 인물이 친구 역할을 했다. 종리목도 같은 해에 태자보의 태위로 임명되었다.[44]
손화는 현장 관리들의 상신이 정치 부패의 온상이 되고 있다며 이를 금지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태자중서자 정안이 도독 유보와 다퉜을 때, 이를 중재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회복시켰다.
손화는 인물들이 문무 수양을 게을리하고 박역(육박이나 바둑)에 열중하는 것을 걱정하여, 그 자리에 있던 8명에게 이 설을 보강하는 논의를 짓게 했다. 위소는 『박역론』을 저술하여 박역을 비판했는데,[45] 이는 손화의 측근 중 한 명인 채영이 박역을 좋아했던 것을 간접적으로 경계하는 의미도 있었다.
손권 재위 기간 동안, 일부 오나라 관료들은 관료 제도를 악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찾아냈다. 손화는 이러한 행위가 개인적인 이익을 위해 제도를 악용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보고, 해로운 관행을 근절하기 위해 조치를 취할 것을 촉구하는 상소를 황실에 올렸다.[9]
같은 해 8월, 손권은 손패를 노왕으로 삼아 손화와 같은 궁에 거주하게 하고 두 사람을 거의 동등하게 대우했다. 이에 비판이 제기되자 손권은 거주하는 궁을 আলাদা하고 각자에게 막료를 붙이는 조치를 취했다. 이로 인해 입태자를 기대하는 손패파와 폐태자를 막으려는 손화파의 대립을 초래했다.
2. 2. 1. 이궁의 변
241년에 손화의 형인 태자 손등이 요절하고, 작은 형 손려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기 때문에, 손화는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손권이 손화와 손패에게 황태자와 번왕의 구별을 없애면서, 오나라의 신료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었다.[13] 많은 이들이 손권에게 손화의 황태자 지위를 공고히 할 것을 간언하였으나, 손권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12]240년대에 손화는 넷째 형제인 노왕 손패와 권력 투쟁을 벌였는데, 손패는 손화에게서 태자 자리를 빼앗고자 하였다. 손권은 242년에 손화를 태자로 임명했지만, 손패 역시 특별히 잘 대우했다. 일부 관리들은 손권에게 유교적 예법을 지키고 유지해야 한다고 강력히 촉구했다. 손화는 다른 왕자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태자이므로 손패보다 더 큰 영예와 특권을 부여받아야 했다. 그러나 손권은 아들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손화와 손패는 아버지의 총애와 관심을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권력 투쟁이 격화되었다.[13]
이에 따라 손권의 신하들 사이에서도 두 개의 반대 세력이 나타났다. 육손, 제갈각, 고담, 주거, 등윤, 사적, 정밀(丁密), 오찬 등은 손화를 지지했고, 보즐, 여대, 전종, 여거, 손홍(孫弘), 전기(全寄), 양의(楊笁), 오안(吳安), 손기(孫奇) 등은 손패를 지지했다. 특히 전기와 양의는 손권 앞에서 손화에 대해 자주 나쁘게 말했으며, 권력 투쟁이 격화되자 손권은 이 상황이 원소의 아들들 사이의 내전과 같이 번질까 걱정하였다.[13]
역사가 배송지는 ''삼국지''에서 손화의 전기에 주석을 달면서 손화-손패의 후계자 경쟁과 원소의 아들들과 유표의 아들들 사이의 갈등과 같은 다른 유사한 갈등을 비교했다. 그는 손권이 원소와 유표보다 더 나쁜 인물이라고 평가했는데, 그 이유는 손권이 이미 손화를 후계자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손패를 편애하면서 모호성과 불확실성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배송지는 손패를 지지한 보즐, 여대, 전종을 비판했는데, 그는 손패의 후계 주장을 부당하다고 여겼다.[16]
손권은 얼마 동안 신중하게 고려한 후, 손화에게 가택 연금을 명령했다. 주거, 굴황(屈晃) 및 다른 몇몇 관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고 묶인 채 손권을 찾아가 손화를 풀어주도록 간청했다. 그러나 손권은 그들을 보고 분노하여 소란을 피운다고 꾸짖었다. 그는 손화를 폐하고 막내 아들인 손량으로 교체하려는 의도를 갖게 되었다. 두 관료인 진정(陳正)과 진상(陳象)은 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신생과 서기의 역사적 사례를 인용하여 태자를 바꾸는 것이 미래에 내전을 초래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주거와 굴황 역시 손권에게 손화를 용서해 달라고 반복적으로 압박했다. 손권은 그들에게 질려서 진정과 진상을 처형하고 주거와 굴황에게 100대의 태형을 가했다.[17] 굴황은 나중에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보내졌고, 주거는 강등되었으며 나중에 손패의 지지자인 손홍(孫弘)에게 속아 자살했다.[18] 손화를 위해 손권에게 반복적으로 간청했던 장순(張純)은 투옥되어 나중에 처형되었다.[19]
250년 9월 또는 10월, 손권은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고장현(故鄣縣; 현재의 안지현, 저장성 북서쪽)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손패에게는 자살을 강요했다. 손화의 개인 측근은 수십 명에 달했는데, 일부는 처형되고 다른 일부는 유배되거나 해임되는 등 서로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 손화와 그의 개인 측근에게 심각한 불의라고 생각했다.[20] 250년 12월 또는 251년 1월, 손권은 막내 아들인 손량을 손화의 뒤를 이을 새로운 태자로 지명했다.[21]
손화의 어머니인 왕부인은 손권의 장녀인 손노반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12] 손노반은 손화를 싫어하여, 손권이 병으로 황실 사당 의식에 참석할 수 없게 되자 손화에게 그 자리를 대신하도록 명령했을 때, 손화를 모함했다. 장휴는 손화의 부인이자 장태자비의 숙부였는데, 황실 사당 근처에 살았기 때문에 손화를 그 기간 동안 자신의 저택에 머물도록 초대했다. 손노반은 자신의 하인들을 보내 손화를 감시했고, 손화가 황실 사당에 있지 않고 장인의 집에서 무언가를 꾸미고 있다고 아버지에게 보고했다. 또한 손권이 아팠을 때 왕부인이 기뻐했다고 말함으로써 왕부인을 비방했다. 손권은 딸의 말을 믿고 왕부인에게 격노했고, 왕부인은 비통함 속에 죽었다. 손화 또한 아버지의 호의를 잃었고, 아버지가 자신을 태자 자리에서 제거할까 봐 걱정하게 되었다.[12]
2. 3. 폐위와 죽음
241년에 형인 태자 손등이 요절하고 작은 형 손려는 이미 사망했기 때문에, 손화는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손권이 손화와 손패에게 동등한 대우를 하면서 오나라 신료들은 손화파와 손패파로 나뉘었다. 많은 이들이 손권에게 손화의 황태자 지위를 공고히 할 것을 간언하였으나, 손권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12] 이후 손권은 손패를 죽이고 손화를 황태자에서 쫓아낸 후, 남양왕에 봉하여 장사로 귀양보냈다.[23][24] 손량 시대에 정권을 잡은 제갈각은 손화의 정비 장씨의 외숙이었고, 민간에서는 제갈각이 손화를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26] 손준이 제갈각을 암살한 후, 손준은 손화의 인수를 빼앗고 신도로 보내 사사했다. 손화는 향년 30세였다.[27]240년대에 손화는 넷째 형제인 노왕 손패와 권력 투쟁을 벌였는데, 손패는 태자 자리를 빼앗고 싶어했다.[13] 손권은 242년에 손화를 태자로 임명했지만, 손패에게도 특별한 대우를 했다. 일부 관리들은 손화가 다른 왕자들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태자이므로 손패보다 더 큰 영예와 특권을 받아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나 손권은 아들들 사이에 명확한 구분을 하지 않았고, 손화와 손패가 아버지의 총애를 얻기 위해 경쟁하면서 권력 투쟁은 격화되었다. 손권의 신하들 사이에서는 두 개의 세력이 나타났다. 육손, 제갈각, 고담, 주거, 등윤, 사적, 정밀(丁密), 오찬 등은 손화를 지지했고, 보즐, 여대, 전종, 여거, 손홍(孫弘), 전기(全寄), 양의(楊笁), 오안(吳安), 손기(孫奇) 등은 손패를 지지했다. 특히 전기와 양의는 손권 앞에서 손화에 대해 자주 험담했다.[13]
역사가 배송지는 ''삼국지'' 손화전 주석에서 손화-손패의 후계자 경쟁을 원소와 유표 아들들 간의 갈등과 비교했다. 배송지는 원소와 유표는 어린 아들을 후계자로 삼겠다고 명확히 밝혔지만, 손권은 손화를 후계자로 지명하고도 손패를 편애하여 모호성을 만들었다며 손권을 비판했다. 또한 손패의 후계 주장이 부당하다고 여겨 보즐, 여대, 전종을 비판했다.[16]
손권은 신중하게 고려한 후 손화에게 가택 연금을 명령했다. 주거, 굴황(屈晃) 등은 이 소식을 듣고 머리에 흙을 뒤집어쓰고 묶인 채 손권을 찾아가 손화를 풀어주도록 간청했다. 손권은 분노하여 소란을 피운다고 꾸짖었다. 이후 손화를 폐하고 막내 아들 손량을 태자로 세우려 하자, 진정(陳正)과 진상(陳象)은 상소를 올려 신생과 서기의 예를 들며 태자를 바꾸면 내전이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주거와 굴황도 손화를 용서해 달라고 압박했다. 손권은 진정과 진상을 처형하고 주거와 굴황에게 100대의 태형을 가했다.[17] 굴황은 관직에서 해임되어 고향으로 보내졌고, 주거는 강등되었다가 손홍(孫弘)에게 속아 자살했다.[18] 손화를 구명하기 위해 간청했던 장순(張純)은 투옥되어 처형되었다.[19]
250년 9월 또는 10월, 손권은 손화를 태자 자리에서 폐하고 고장현(故鄣縣; 현재의 안지현 북서쪽)으로 이주시켰다. 또한 손패에게 자살을 강요했다. 손화의 측근 수십 명은 처형, 유배, 해임 등 서로 다른 운명을 맞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손화와 측근들에게 심각한 불의라고 생각했다.[20] 250년 12월 또는 251년 1월, 손권은 막내 아들 손량을 새 태자로 지명했다.[21]
250년에서 252년 사이, 손권은 위독해지자 손화를 폐위시킨 결정을 후회하며 복위시키려 했다. 그러나 손노반, 손준, 손홍(孫弘) 등이 반대하여 생각을 접었다.[22]
252년 1월 말 또는 2월 초, 손권은 손화를 남양왕(南陽王)으로 봉하고 장사군(현재의 창사 일대)을 봉지로 주었다.[23][24]
252년 5월 손권이 죽자, 막내 아들 손량이 즉위했고, 제갈각이 섭정이 되었다. 제갈각은 손화의 아내였던 전 황태자비 장씨의 외삼촌이었다. 전 황태자비는 진천(陳遷)을 건업(현재의 난징)으로 보내 제갈각을 만났다. 제갈각은 "시간이 지나면 그녀를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제갈각이 손량을 폐위하고 손화를 옹립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가 건업에서 무창(현재의 어저우)으로 황도를 옮기려 하면서 의심은 더욱 커졌다.[26]
253년 11월 또는 12월, 제갈각이 쿠데타로 암살된 후, 손준이 손량의 새 섭정이 되었다. 손준은 손화를 평민으로 강등시키고 신도군(新都郡, 현재의 이현, 안후이성 일대)으로 이주시킨 다음, 사자를 보내 자살을 강요했다. 손화가 자결하기 전 장씨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그녀는 "고락을 함께 할 것이며, 혼자 살아남지 않겠다"라며 따라 죽었다.[27]
3. 사후
손준이 제갈각을 암살한 후, 손화의 인수를 빼앗고 신도로 보내어 사사했다. 향년 30세였다.[29]
그의 아들 손호는 손휴 대에 오정후에 봉해지고, 손휴 사후 황제에 올랐다. 손호는 황제 즉위 후 손화를 소헌황제(昭獻皇帝)로 추존하였고, 얼마 후 문황제(文皇帝)로 바꾸었다.
264년, 손호가 동오의 제4대 황제가 되자, 그는 아버지에게 "문황제"(文皇帝중국어)라는 시호를 내리고, 명릉(明陵중국어)에 다시 장례를 치르게 하여 관리와 200가구를 배치해 묘를 관리하게 했다.[29] 266년 2월 또는 3월, 그는 오군과 단양군()에서 9개의 현을 분리하여 새로운 군인 오흥군()을 만들었고, 그 수도는 오성현(烏程縣, 현재의 후저우, 저장성) 남쪽에 위치했다. 그는 오흥군을 다스릴 태수(太守중국어)를 임명하고, 계절마다 아버지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을 주관하도록 했다.[29]
267년 8월, 손호는 신하의 건의에 따라 황도 건업 (현재의 난징, 장쑤성)에 아버지의 사당을 짓기로 했다. 그는 설서에게 사당 건설을 감독하게 하였고, 사당의 이름은 "청묘"(清廟중국어)로 정했다.[30] 268년 1월, 그는 태상 맹인(孟仁중국어)과 의례부 시랑 요신(姚信중국어)에게 2,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명릉으로 가서 손화의 혼을 사당으로 "호송"하는 행렬을 맡도록 했다.[30] 손호는 행렬이 건업에 도착했을 때, 제사를 집행하는 승려에게 아버지의 혼의 상태를 계속 물었다. 승려가 아버지의 모습이 살아있을 때와 똑같다고 말하자, 손호는 슬픔과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후에 신하들에게 상을 내렸다.[31] 손호는 또한 재상 육개에게 인근 마을에서 동물을 잡아 아버지의 혼에게 제물로 바치는 것을 감독하도록 했다. 그날 밤, 손호는 건업 밖에서 잠을 잤다. 다음 날, 손호는 아버지의 혼이 사당에 안치될 때 매우 슬픈 모습을 보였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는 사당을 일주일에 세 번 방문하여 아버지의 혼에게 경의를 표했으며, 심지어 가수를 불러 밤낮으로 아버지의 혼을 즐겁게 하도록 했다. 그는 한 신하가 의식을 과도하게 수행하면 성스러움을 잃게 될 것이라고 말하자 그만두었다.[32]
손화의 자식들은 손호의 생모인 하희에 의해 양육되었다. 하지만 장남인 손호는 제위가 손량에서 손휴로 바뀌자 신도로부터 불려가 오정후로 복권되었다. 손호는 즉위하자 아버지를 문황제로 시호하고, 묘의 정비나 새로운 군의 설치, 묘의 신설 등 명예 회복을 위한 조치를 취했다. 손호는 아버지를 매우 존경했던 것 같으며, 즉위했을 때 아버지를 모시는 제사를 연달아 행했기 때문에, 측근으로부터 "거듭되는 제사는 오히려 예에 어긋납니다"라고 간언받을 정도였다. 또한 위소에게 《오서》에 손화의 본기를 세우도록 명령했지만, 위소에게 거절당했다.[51] 이 일이 위소 주살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4.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손권 | |
어머니 | 대의황후 왕씨 | |
정비 | 장씨(張氏) | 장승의 딸, 장소의 손녀, 제갈근의 외손녀. 손화 사후 자살. |
아들 | 손준(孫俊) | 총명하여 널리 칭찬받았으나, 손호에게 죽임을 당함.[33][37] |
첩 | 하희 | 기병 하수(何遂)의 딸, 손호의 생모. 손호 즉위 후 황태후가 됨. |
아들 | 손호 | 동오의 4대 황제.[34] |
아들 | 손덕(孫德) | 손휴에 의해 전당후(錢唐侯)에 봉해짐.[36] 최후는 불분명. |
아들 | 손겸(孫謙) | 손휴에 의해 영안후(永安侯)에 봉해짐.[36] 반란에 연루되어 손호에 의해 어머니와 함께 독살됨.[39] |
딸 | (이름 불명) | 육경과 결혼. 육경은 육항과 장승의 딸 사이의 아들로, 손화의 딸과 육경은 모두 장승의 외손.[40] |
5. 평가
진수는 "뛰어난 자질을 갖추고 스스로 수양에 힘썼으나,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슬픈 일이다."라고 평했다.[1]
참조
[1]
인용
[2]
Sanguozhi
[3]
Sanguozhi
[4]
Sanguozhi
[5]
Sanguozhi
[6]
Sanguozhi
[7]
Sanguozhi
[8]
Wu Shu
[9]
Sanguozhi
[10]
Sanguozhi
[11]
Sanguozhi
[12]
Sanguozhi
[13]
Tongyu
[14]
Sanguozhi
[15]
Sanguozhi
[16]
Pei Songzhi
[17]
Sanguozhi
[18]
Wu Li
[19]
Wu Shu
[20]
Sanguozhi
[21]
Sanguozhi
[22]
Wu Shu
[23]
Sanguozhi
[24]
Sanguozhi
[25]
Wu Shu
[26]
Sanguozhi
[27]
Sanguozhi
[28]
Sanguozhi
[29]
Sanguozhi
[30]
Sanguozhi
[31]
Wu Shu
[32]
Sanguozhi
[33]
Wu Li
[34]
Sanguozhi
[35]
Sanguozhi
[36]
서적
Wu L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9
[37]
서적
Wu L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9
[38]
서적
Sanguozhi vol. 48
[39]
서적
Wu L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9
[40]
서적
Sanguozhi vol. 58
[41]
서적
図解 三国志
西東社
[42]
서적
正史 三国志 7巻
筑摩書房
[43]
서적
呉書
[44]
서적
三国志 呉志 鍾離牧伝
[45]
서적
三国志 呉志 韋昭伝
[46]
서적
三国志 呉志 闞沢伝
[47]
서적
資治通鑑
[48]
서적
三国志 呉志 呉主伝
[49]
서적
三国志 呉志 呉主伝
[50]
서적
呉書
[51]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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