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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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손준은 오나라의 정치가로, 손권 말년에 중용되어 제갈각을 보좌하며 권력을 얻었다. 제갈각 사후 승상이 되어 오나라의 실권을 장악했으나, 독단적인 정치로 백성들의 원망을 샀다. 그는 문흠의 제안에 따라 위나라 공격을 준비하다가 병사했으며, 사후에는 황제의 불만을 사서 폄하되었다. 현대에는 권력을 남용한 폭군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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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준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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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손준 |
본명 | 손준 |
자 | 자원 (子遠) |
출생 | 219년 |
사망 | 256년 10월 19일 (37세) |
출생지 | 양주 오군 부춘현 |
사인 | 병사 |
국적 | 오 |
가문 | 오나라 손씨 |
아버지 | 손공 |
관직 | 무위장군 (武衛將軍), 대장군 (大將軍), 승상 (丞相) |
봉작 | 부춘후 (富春侯) |
경력 | |
주요 활동 | 오나라의 장수, 섭정 |
임관 | 252년 |
사망 년도 | 256년 |
섬긴 군주 | 손권, 손량 |
후임 | 손침 |
2. 생애
손준은 어려서부터 마술과 궁술에 능했으며, 용감하며 결단력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2. 1. 제갈각 정권의 일각이 됨
손권 말년에 무위도위, 시중을 역임하며 황제의 신임을 얻었다.[3][6] 손권은 임종 시 제갈각을 태자태부·대장군에 임명하여 어린 손량을 보좌하게 했으며, 손준을 포함한 여러 신하들에게 뒷일을 부탁했다. 손준은 손권의 유조를 받아 무위장군 겸 숙위를 맡고 도향후에 봉해졌다.[3] 《오서》에 따르면, 손준은 제갈각이 큰 일을 맡을 수 있다고 표를 올렸고, 손권은 제갈각의 독단적인 성격을 꺼렸으나 결국 그에게 대임을 맡겼다고 한다.손권 사후, 태자소부 손홍이 제갈각을 제거하려 하자, 손준은 이 사실을 제갈각에게 알려 그의 목숨을 구했다.[9] 이후 손준은 제갈각의 핵심 보좌관이 되었다.[4]
2. 2. 집권
손준은 손경의 증손자이자, 오나라 창업 황제 손권의 숙부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손공(孫恭)이고 할아버지는 손고(孫暠)였다.[3] 손권 통치 말년에 그는 손권의 신뢰받는 개인 비서가 되었으며, 손노반과 함께 태자 손화를 거짓으로 고발하는 데 관여하여 손화가 250년에 폐위되도록 한 것으로 알려졌다.[3] 손준과 손노반의 추천으로 손권은 막내 아들 손량을 후계자로 세웠다. 251년 손준의 추천으로 손권은 제갈각을 손량의 섭정으로 임명했고, 252년 손권 사후 손준은 제갈각의 핵심 보좌관이 되었다.제갈각은 위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돌아와 관리를 많이 바꾸고 사람들을 꾸짖었으며, 숙위를 바꾸어 자신과 가까운 사람을 임용하였다. 또 청주와 서주로 향하려 했다. 이로써 제갈각은 민심을 잃고 원망을 샀다. 253년 10월, 손준은 이를 틈타 정변을 꾀해, 폐제 양과 상의하여 주연을 열고 제갈각을 불러들여,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여러 차례 의심하는 제갈각을 안심시켜, 내전으로 들어오자 칼로 찔러 죽였다. 또 제갈각의 둘째 아들 제갈송(諸葛竦)과 셋째 아들 제갈건(諸葛建)이 도망하자, 기독 유승(劉承)을 파견하여 제갈송을 참수하고 제갈각의 삼족을 멸했다.
제갈각을 제거한 손준은 승상·대장군으로 승진하였으며, 중앙과 외방의 모든 군사를 감독하고, 가절을 받았다. 이로써 손준은 오의 집권자가 되었다.[3] 집권한 후 손준은 등윤과 속으로는 맞지 않았으나, 겉으로는 서로 포용했다.
256년, 제2차 수춘의 난에서 관구검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후 오나라에 항복한 위나라 장수 문흠의 설득으로, 손준은 위나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고려했지만, 이를 실행하려던 찰나 병에 걸렸다. 그는 사촌 손침에게 권력을 이양한 후 사망했다.[3]
258년, 손침이 손량을 폐위시키고, 그 뒤를 이은 황제 손휴에 의해 처형된 후, 손준의 관은 꺼내져 크기가 줄어드는 등 황제의 불만을 표시했으며, 손준과 손침은 사후 각각 구준(故峻)과 구침(故綝)으로 개명되어 황실에서 추방되었다.[4]
2. 3. 치세
손권 시대 말기에 무위도위에서 시중이 되었다. 손권은 이궁 사건 당시 손화와 손패의 다툼에 결착을 내고자 손화의 폐위를 신하들에게 상담했고, 이때 손준은 그 상담 상대가 되었다. 손권은 손화를 폐위하고 막내아들 손량을 세웠다.[6]。후에 손권의 병세가 심해지고, 다툼의 진실을 깨달아 손화를 용서하려 했을 때, 손홍과 전공주(손노반)와 함께 이를 막았다.[7]。 손권 임종 시에는 손권에게 제갈각을 자신의 보좌역으로 할 것을 강력히 추천했다.[8]。 손준은 무위장군, 시중, 도향후가 되었고, 정무 전반의 보필을 손권으로부터 위임받았다. 손권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손홍이 제갈각의 암살을 꾀하자, 손준은 그 사실을 제갈각에게 알리고 함께 손홍을 살해했다.[9]。
손량이 즉위하자 제갈각, 등윤과 함께 협력하여 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제갈각은 위에 대한 원정을 강행하여 패전하자[10], 권력적인 불안감으로 점차 독재적 성향을 띠게 되었고, 근위군의 인사 등을 놓고 손준 등과 대립했다. 이에 손준은 손량을 끌어들여 제갈각을 연회에 불러들인 후, 칙명이라고 칭하며 스스로 참살했다. 손준은 연회 자리에서, 제갈각의 측근인 장약의 오른팔을 스스로 칼로 베어 떨어뜨리고, 소란을 듣고 달려온 위병이 오자, 제갈각을 살해했음을 알리고 위병을 물러가게 한 후, 바닥을 청소하게 하고 그대로 연회를 계속했다.[11]。 또한 기독인 유승에게 명하여, 도망친 제갈각의 일족과 장진, 상시 주은 등 거기에 연루된 사람들을 추격하여 모두 살해했다. 게다가 손화마저 제갈각과 모의하여 복권을 노렸다고 하여, 인수를 몰수하고 신도로 강제 이주시킨 후 자살을 명했다.[12]。 제갈각과 친했던 섭우를 소외시키고 울림 태수로 좌천시키려 하여, 섭우를 우울증으로 죽게 했다.[13]。
등윤이 제갈각과 친했고, 또한 인척 관계였기 때문에, 스스로 사직을 신청했지만, 손준은 만류했다. 군신들은 손준을 태위로, 등윤을 사도로 임명할 것을 상소했지만, 손준에게 아첨하는 자들이 있어서 실현되지 못했다.[14]。 결국, 손준이 승상, 대장군, 부춘후가 되어 오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승상의 부관인 어사대부는 설치되지 않았다고 한다.[15]。 손준과 등윤은 속으로는 서로 맞지 않았지만, 겉으로는 서로를 존중했기 때문에, 공동 보조를 취할 수 있었다. 손준은 등윤을 고밀후로 승진시켰다.
손준의 정치는, 제갈각과 다를 바 없는, 황제를 꼭두각시로 삼은 전횡이었다. 게다가 원래 명성이 없었던 데다가,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고, 전공주(손노반)와 밀통하여, 전공주의 뜻에 따라 매일 밤 궁녀를 범하는 등 전횡을 극했기 때문에, 주변으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오봉 원년(254년) 가을[16], 손영[17]이 손준을 주살하려 했지만, 계획이 새어나가 자살했다.
이듬해 오봉 2년(255년) 봄 정월[16], 위의 관구검, 문흠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고, 위의 추토군을 맞이하기 위해 수춘을 비웠다. 손준은 그 틈을 타서, 여거, 류찬을 이끌고 수춘을 습격하려 했다.[18]。 그러나 위의 사마사가 항성에서 관구검[19], 낙가에서 문흠을 붙잡아두는 틈에, 제갈탄에게 명하여 수춘을 평정하게 했기 때문에, 선수를 빼앗긴 손준은 군대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관구검·문흠의 난). 그 과정에서, 낙가에서 패배한 문흠이 수만의 병사와 함께 투항해왔고, 이를 받아들였다.[20]。 철수 시 여거, 정봉은 고정에서 위의 조진을 격파했다. 유찬이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귀환시키려 했지만, 유찬은 제갈탄이 파견한 장반의 별동대에게 추격을 받아, 고포에서 장군 손릉, 장수와 함께 살해되었다.[16]。
같은 해 3월, 주의에게 명하여 안풍을 공격하게 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16]。
같은 해 가을 7월, 촉한에서 사자가 오자, 장군 손의, 장이, 임순은 회견의 연회 자리에서 손준을 주살하려 했다. 그러나 또한 계획이 발각되었고, 손의 등은 자살했다. 이 계획으로 수십 명의 자들이 연좌되었고, 주공주(손노육, 주거의 미망인, 유찬의 아내)도 주살되었다.
손준은 광릉에 성을 쌓고, 북벌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등윤이 이를 간했지만, 손준은 이를 묵살하고 속행했다. 그러나, 성이 완성되지 못했기 때문에[21], 민중은 굶주렸고, 군사들도 마음이 떠났다고 한다.[22]。
오봉 3년(256년) 8월[16], 총애하는 항장인 문흠[23]의 권유에 따라, 문흠, 유찬, 여거, 주의, 당자를 선봉으로 하여, 청주, 서주를 침략하려 했다. 손준은 등윤과 함께 석두까지 나가, 출정군을 위해 연회를 열고, 종자 100명 정도를 데리고 여거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거가 군대를 흐트러짐 없이 통솔하는 모습을 보고, 경계심이 강해졌고, 심장 상태가 좋지 않다고 칭하며 바로 철수해 버렸다.
손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갈각에게 맞는 꿈을 꿨기 때문에, 그것을 두려워하여 병에 걸려 쓰러졌고, 그대로 같은 해 9월에 병사했다.[24]。 39세였다.
2. 3. 1. 제갈각 잔당 숙청과 공포 정치
제갈각은 자신의 인척인 폐태자 화를 각별히 여겼으므로, 민간에서는 제갈각이 손화를 영접하려 한다는 말이 있었다. 손준은 제갈각을 주살한 후 폐태자 화의 인수를 빼앗고 결국 죽였다.[12] 사람들은 나라를 들 정도로 슬퍼했다. 손준은 중후한 명성이 없었고, 교만하고 음험하며, 형벌로 죽인 자가 많았으므로 백성들의 원망을 받았다. 또 궁중의 사람들과 간음하여, 손노반(전종의 부인)과 사통하기까지 했다.오봉 원년(254년) 가을, 손영이 손준을 주살하려 하였으나, 계획이 새어나가 자살했다.[17]
2. 3. 2. 손영 주살 시도 (254년)
오봉 원년(254년) 가을, 오후 손영(손등의 아들)이 손준을 주살하려 했으나, 계획이 발각되어 손영은 자살했다.[16][17] 다만, 삼국지 주석에 있는 오력에서는 이 일을 다르게 서술하고 있는데, 손준이 손화를 무고하게 죽여 사람들이 격분하고 탄식하였는데, 전사마 환려가 이를 이용하여 장수와 관리를 모으고 함께 손준을 죽이고 손영을 세우려 했는데, 손영은 이를 알지도 못했다고 한다.2. 3. 3. 관구검·문흠의 난 (255년)
255년 봄 정월, 위에서 사마사 정권에 대항하여 관구검과 문흠이 수춘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손준은 이 틈을 타 여거, 유찬과 함께 수춘을 공격하려 했다.[18] 그러나 사마사가 관구검[19]과 문흠을 붙잡아두는 사이, 제갈탄에게 수춘을 평정하게 하여, 손준은 선수를 빼앗겼다.[20] 결국 오군은 군사를 물릴 수 밖에 없었다.(관구검·문흠의 난)문흠은 위나라에서 패배한 후, 수만의 병사와 함께 오나라에 투항해왔고, 손준은 이를 받아들였다.[20] 오나라 군이 철수 할 시 여거, 정봉은 고정에서 위의 조진을 격파했다. 유찬이 병에 걸려 귀환하던 중, 제갈탄이 파견한 장반의 별동대에게 추격을 받아, 고포에서 장군 손릉, 장수와 함께 전사하였다.[16]
같은 해 3월, 주의에게 명하여 안풍을 공격하게 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16]
2. 3. 4. 손의 주살 시도 (255년)
오봉 2년(255년) 가을 7월, 촉한에서 사신을 보내왔다. 손준의 당숙이자 손교(孫皎)의 아들인 손의(孫儀)는 장군, 후작, 무난독을 역임하고 있었는데, 장이(張怡), 임순(林恂, 손소(孫邵) 또는 임순(綝恂)으로도 기록됨)과 공모하여 사신과의 회견 자리를 틈타 손준을 죽이려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탄로나 손의 등은 자살했고, 수십 명이 연루되어 처형되었다.[16] 전공주(손노반)는 이 기회를 틈타 평소 사이가 좋지 않던 동생 주공주(손노육)가 손의와 공모했다고 모함했고, 손준은 이를 빌미로 손노육을 죽였다.[3]2. 3. 5. 광릉 축성 실패
손준은 광릉에 성을 쌓아 북벌의 거점으로 삼으려 했다. 등윤이 이를 간했지만, 손준은 이를 묵살하고 강행했다. 그러나 성은 완성되지 못했고,[21] 백성들은 굶주렸으며, 군사들 또한 마음이 떠났다고 한다.[22] 조정 신료들은 그곳에 성을 쌓는 것이 불가함을 알았지만, 손준을 두려워하여 아무도 말하지 못했고, 오직 등윤만이 간하여 그치게 하려 했지만, 손준은 듣지 않았다. 이 해 큰 가뭄이 들었으며, 결국 축성은 실패로 돌아갔다.2. 3. 6. 2차 북벌 계획과 사망 (256년)
256년, 손준은 이전에 조위에서 투항해 온 정북대장군 문흠의 계책을 받아들여 위나라를 공격하기로 했다.[4] 8월, 손준은 문흠, 여거, 거기장군 유찬, 진남장군 주이(朱異), 전장군 당자(唐咨)에게 군사를 이끌고 강도에서 회수·사수로 들어가 청주와 서주를 점령할 계획을 세우게 했다.[4] 등윤과 함께 석두에서 군사를 전별한 후, 종자 1백 명을 거느리고 여거의 군영에 들어갔으나, 여거가 군사를 정돈한 모습을 보고 싫어하여 가슴이 아프다고 핑계를 대고 떠났다.[4]그 후, 손준은 제갈각에게 공격받는 꿈을 꾸고 두려워하다 병이 나 256년 9월에 3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4] 유언으로 후사를 종제 손침(孫綝)에게 맡겼다.[4]
3. 손준 사후
손침이 손휴에게 주살당한 후, 손휴는 손준의 관을 꺼내 인수를 빼앗고, 손준과 손침의 이름을 종실에서 삭제했다.[4] 이들은 각각 구성(故峻)과 구침(故綝)으로 개명되어 황실에서 추방되었다.[4]
4. 평가
진수(陳壽)는 손준과 손침을 "흉악한 행실이 가득하여 본래 논할 가치도 없는 자"라고 혹평했다.[3] 손준은 손경의 증손자이자, 오나라 창업 황제 손권의 숙부였으며, 그의 아버지는 손공(孫恭)이고 할아버지는 손고(孫暠)였다. 손권 통치 말년에 손권의 신뢰받는 개인 비서가 되었으며, 손노반과 함께 태자 손화를 거짓으로 고발하는 데 관여하여 손화가 250년에 폐위되도록 하였다. 251년 손준의 추천으로 손권은 제갈각을 손량의 섭정으로 임명했고, 252년 손권 사후 손준은 제갈각의 핵심 보좌관이 되었다.[3]
253년, 제갈각이 오나라의 경쟁 국가인 조위에게 군사적으로 큰 패배를 당한 후, 과실을 인정하는 대신 모든 반대 의견을 없애려 하자, 손준은 그를 암살하고 섭정 자리를 차지했다. 그의 섭정 기간 동안 그는 어떤 업적도 세우지 않았으며, 처벌은 가혹했다. 256년, 제2차 수춘의 난에서 관구검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후 오나라에 항복한 위나라 장수 문흠의 설득으로, 손준은 위나라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고려했지만, 이를 실행하려던 찰나 병에 걸려 사촌 손침에게 권력을 이양한 후 사망했다.[4]
258년, 손침이 손량을 폐위시키고, 그 뒤를 이은 황제 손휴에 의해 처형된 후, 손준의 관은 꺼내져 크기가 줄어드는 등 황제의 불만을 표시했으며, 손준과 손침은 사후 각각 구준(故峻)과 구침(故綝)으로 개명되어 황실에서 추방되었다.[4]
현대에는 권력을 남용하고 백성을 핍박한 폭군으로 평가받는다. 더불어민주당은 손준과 같은 권력형 비리와 횡포를 근절하고, 국민을 위한 정치를 실현해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강조한다.
5. 친족 관계
손준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三国志
[6]
서적
三国志
[7]
서적
三国志
[8]
서적
三国志
[9]
서적
三国志
[10]
서적
三国志
[11]
서적
三国志
[12]
서적
三国志
[13]
서적
三国志
[14]
서적
呉録
[15]
서적
呉録
[16]
서적
三国志
[17]
서적
三国志
[18]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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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三国志
[20]
서적
三国志
[21]
서적
三国志
[22]
서적
三国志
[23]
서적
三国志
[24]
서적
三国志
[25]
서적
진고
[26]
서적
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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