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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의 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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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연의 맹은 1004년 송나라와 요나라 사이에 체결된 평화 조약이다. 960년 송나라 건국 이후 요나라와의 관계가 우호적이었으나, 연운 16주를 요나라가 점유하면서 두 나라 간의 긴장이 고조되었다. 송나라는 요나라의 침입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협상을 통해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요나라에 제공하고, 두 황실이 동등한 지위를 인정하는 내용의 조약을 맺었다. 전연의 맹은 두 나라 사이에 대규모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가져왔지만,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상실하고, 요나라는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이 조약은 이후 송나라와 금나라 사이의 해상동맹으로 이어졌으며, 동아시아 국제 질서에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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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연의 맹
개요
명칭전연의 맹
유형강화 조약
체결일1005년
위치전연(현재의 허난성 푸양시 칭펑현)
교전국
교전국 1북송
교전국 2요나라
주요 내용
북송요나라에 매년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을 제공
양국 관계형제 관계를 맺고 군사적 충돌을 피함
요나라북송을 침략하지 않음
영향
정치적 영향북송과 요나라 간의 평화 유지, 동아시아 국제 질서 안정
경제적 영향북송의 재정적 부담 증가, 요나라의 경제적 이익 증대

2. 배경

960년 오대 십국 시대 이후 송나라가 건국된 초기에는 송과 요나라 간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979년 남쪽을 통일한 송나라는 북한을 멸망시킨 후, 전략적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점유하고 있던 요나라와 갈등을 겪게 되었다.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되찾기 위해 979년986년 두 차례에 걸쳐 요나라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1][2] 997년 진종이 즉위한 후 송과 요나라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999년부터 요나라 성종은 송나라에 대한 연례 공격을 시작했다. 이러한 공격들은 1004년까지 이어졌지만 큰 변화는 없었다.[2]

2. 1. 10세기 동아시아 정세

960년 오대 십국 시대 이후 송나라가 건국된 초기에는 송과 요나라 간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송나라는 남쪽과 북쪽에 남아있는 다른 왕국들을 정복하는 등 더 중요한 일들을 처리해야 했다. 979년 남쪽을 통일한 후 송나라는 요나라를 주시했다. 송나라는 979년 북한을 멸망시켰다. 북한은 950년에 멸망한 후한 왕조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한 사타 돌궐 왕국이었다. 요나라의 보호를 받던 북한은 두 국가 간의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나 송나라가 더욱 우려한 것은 오늘날의 베이징을 포함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요나라가 계속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북한이 송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황제는 연운 16주에 대한 요나라의 영토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 송나라군은 패배했고 황제는 치욕스럽게 후퇴해야 했다.[1]

송나라는 986년에 다시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요나라 황제가 소년이라는 점을 이용하려 했다.[2] 송나라는 세 방향으로 연운 16주를 공격했다.[2] 그러나 요나라는 세 전선 모두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고, 곧 외교 관계가 재개되었다.[2] 진종 황제는 997년에 송나라의 황위에 올랐다.[2] 10년 동안 송과 요나라 간의 관계는 악화되었다.[2] 999년, 요나라의 성종 황제는 송나라에 대한 연례 공격을 시작했다.[2] 이러한 공격들은 각각 승리를 거두었지만, 1004년까지 큰 변화는 없었다.[2]

오대십국 시대의 후진에 의해 요나라에 할양된 연운 16주는 그 후 후주에 의해 막주, 영주와 영주( 말기·북송의 건녕군)가 송나라 측에 빼앗겼고, 요나라 측과 송나라 측 모두 빼앗아야 할 땅으로 인식되었다.[3] 북송이 건국된 후 태종 (조광의)에 의해 탈환 작전이 시도되었으나, 이는 실패로 끝났다.[3] 그 후, 북송에서는 문치주의 정책이 추진되어 이 문제는 일시적으로 미뤄졌다.[3] 요나라 측에서는 태종 (야율요골)의 사후 내분이 계속되어 남쪽에 간섭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3]

982년, 요나라에서 성종이 즉위한다.[4] 내분을 수습한 성종과 그의 어머니 승천황태후는 1004년, 20만이라고 칭하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를 시작했다.[4]

2. 2. 송나라의 북벌과 실패

979년 송나라는 남쪽을 통일한 후 연운 16주를 주시했다. 같은 해 송나라는 북한을 멸망시켰다. 북한은 요나라의 보호를 받으며 후한 왕조의 정통 후계자를 자처했고, 이는 두 국가 간의 마찰을 일으켰다. 그러나 송나라가 더욱 우려한 것은 오늘날의 베이징을 포함하는 전략적 요충지인 연운 16주를 요나라가 계속 점유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송 태종은 북한이 송나라에 의해 멸망한 후, 연운 16주에 대한 요나라의 영토를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송나라군은 패배했고 황제는 치욕스럽게 후퇴해야 했다.

986년, 송나라는 요나라 황제가 어리다는 점을 이용해 다시 연운 16주를 공격했으나, 요나라는 세 전선 모두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이후 외교 관계가 재개되었고, 997년 진종이 송나라 황위에 올랐다. 이후 10년 동안 송과 요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으며, 999년 요나라 성종은 송나라에 대한 연례 공격을 시작했다. 이러한 공격들은 1004년까지 큰 변화를 가져오지는 못했다.

2. 3. 요나라의 남침과 전연 대치

982년, 요나라에서 성종이 즉위한다. 성종과 그의 어머니 승천황태후는 내분을 수습하고, 1004년 20만이라고 칭하는 군대를 이끌고 남하를 시작했다.[2] 오대십국 시대의 후진이 요나라에 연운 16주를 할양하였고, 그 후 후주에 의해 막주, 영주와 영주( 말기·북송의 건녕군)가 측에 빼앗겼다. 이 때문에 요나라와 송 양측 모두 이 지역을 반드시 되찾아야 할 땅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북송 건국 후 태종 (조광의)에 의해 탈환 작전이 시도되었으나 실패로 끝났다. 이후 북송은 문치주의 정책을 추진하여 이 문제는 일시적으로 미뤄졌다. 요나라 측에서는 태종 (야율요골) 사후 내분이 계속되어 남쪽에 간섭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3]

1004년 여름, 황성종은 직접 송나라를 상대로 황제 원정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거란 기병을 이끌고 송나라 수도 개봉 북쪽 약 160km 지점에 진을 쳤다. 진종은 마지못해 북쪽으로 진군하여 찬연에서 요나라 군과 대치했다. 진종이 찬연을 선택한 이유는 이곳이 황하 건너편에 있는 첫 번째 대도시였기 때문이다. 황제는 황제 원정에서 황하를 건너는 것이 상징적이고 심리적으로 큰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송나라는 거란 군이 하북로에서 맹렬한 기세를 보이자, 이 원정이 황제에게 안전하지 않다고 우려하기 시작했다. 찬연을 지키기 위해 송나라 원정의 주도적인 계획가인 구준은 참호와 같은 방어 조치를 시행했지만, 격렬한 전투로 인해 이러한 방어 시설은 이미 약화되었고, 많은 장군을 포함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황제의 도착은 송나라 군대의 사기를 진작시키는 동시에, 뒤따른 전투가 영원히 유명해지도록 만들었다.

1005년 1월 전투에서 송나라의 거대한 쇠뇌가 요나라 거란 지도자 소달린을 사살했다. 이는 거란 군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었고, 그들의 공세에 대한 기여를 약화시켰다.

3. 전연의 맹 체결 과정

송나라 조정은 왕흠약 등이 금릉(난징)으로 피난할 것을 제안할 정도로 크게 당황하였다. 그러나 구준은 강경하게 주전론을 주장하며 황제 진종에게 친정을 권했고, 진종도 이를 받아들여 선주 (현재의 허난성푸양시푸양현)로 향했다.[2]

양측 군대가 교착 상태에 빠지면서 화평 협상이 시작되었다. 요나라 측은 영토 할양을 요구했으나, 송나라는 재물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화평을 모색했다. 구준은 강경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결국 타협하게 되었다. 송나라 사신 조이용이 요나라로 갈 때, 진종은 "100만 냥까지는 줘도 좋다"고 했지만, 구준은 조이용에게 "30만 량을 넘으면 너를 베겠다"고 압박했다.[3]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요나라에 보내고, 진종은 승천황태후를 숙모로 삼아 송나라가 요나라의 형이 되는 것, 그리고 국경을 현상 유지하는 조건으로 합의하였다. 조이용이 귀국 후 진종에게 세폐 액수를 묻자 손가락 세 개를 펼쳐 보였는데, 진종은 300만 냥으로 오해했다가 30만 냥이라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 1. 화의 논의

송나라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왕흠약 등은 금릉(난징)으로의 피난을 제안했다. 이에 대해 구준은 강경하게 주전론을 주장하며, 황제 진종에게 친정을 주장했고, 진종도 이를 받아들여 선주 (현재의 허난성푸양시푸양현)로 향했다.[2]

양 군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화평 협상이 열렸다. 처음 요나라 측은 영토 할양을 요구했지만, 송나라로서는 그것만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재화를 보내는 방식으로 화평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구준은 오히려 요나라가 영토를 할양하고, 요나라가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의 참언으로 인해 타협했다. 사자 조이용이 요나라로 갈 때, 진종은 "100만 냥까지는 줘도 좋다"는 말을 했지만, 구준은 조이용에게 "30만 량을 넘으면, 너를 베어버리겠다"고 협박했다.[3]

화평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요나라에 보내는 것, 진종은 승천황태후를 숙모로 삼는 것 (송나라가 요나라에 대해 형이 되는 것), 국경의 현상 유지 등이 합의되었다.

조이용이 귀국한 후, 진종이 세폐의 금액을 묻자,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이를 본 진종은 300만 냥이라고 생각하고 놀랐지만, 30만 냥이라는 말을 듣고 안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3. 2. 협상 진행

양측 군대가 교착 상태에 빠지자, 화평 협상이 시작되었다. 요나라는 처음에 관남 지역의 영토 할양을 요구했으나, 송나라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재물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화평을 모색했다. 구준은 요나라가 영토를 할양하고 신하를 칭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의 참언으로 인해 결국 타협하게 되었다.

송나라 사신 조이용이 요나라로 갈 때, 진종은 "100만 냥까지는 줘도 좋다"고 말했지만, 구준은 조이용에게 "30만 냥을 넘으면 너를 베어버리겠다"고 압박했다.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세폐로 요나라에 보내는 것, 진종은 승천황태후를 숙모로 삼는 것(송나라가 요나라에 대해 형이 되는 것), 국경의 현상 유지 등이 합의되었다.

조이용이 귀국한 후, 진종이 세폐의 액수를 묻자 조이용은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진종은 이를 300만 냥으로 오해하고 놀랐지만, 곧 30만 냥이라는 사실을 알고 안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4. 전연의 맹 내용

송나라는 요나라에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지급하기로 하였다. 이는 송나라에 굴욕적인 조약이었지만, 이후 요나라는 문화와 경제 발전을 이루었다. 1005년 1월 13일부터 18일까지 양측은 평화 조약을 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1] 요나라는 초기에 관남 지역 영토 할양을 요구했지만, 결국 철회되었다.[1]

조약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번호내용
1송나라는 요나라에 매년 생사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공물로 제공한다.
2국가 재정 위원회는 이러한 공물을 웅주로 운송해야 했다.
3민간인과 군대는 현재의 영토 경계를 준수한다.
4어느 측도 체포를 피해 도망간 강도나 산적을 보호하지 않는다.
5남북 어느 쪽도 쟁기질된 밭을 파종하거나 수확할 수 있는 면허를 발급하지 않는다.
6이미 존재하는 모든 해자와 성벽은 유지할 수 있지만, 새로운 것은 건설할 수 없다.
7어느 측도 이 조약 외의 요구를 하지 않는다.



양국 군주는 형제 관계가 되며, 진종이 성종보다 나이가 많으므로 진종이 형이 되었다. 요나라 황제는 송나라 황제를 "형님"이라고 불렀고, 송나라 황제는 요나라 황태후를 "이모"라고 불렀다.[1] 양국의 국경은 현 상태로 하고, 양국의 포로 및 월경자는 서로 송환하기로 하였다.

송나라 조정은 크게 당황하여, 왕흠약 등은 금릉으로 피난을 제안했다.[2] 그러나 구준은 강경하게 주전론을 주장하며 황제 진종에게 친정을 주장했고, 진종도 이를 받아들여 선주로 향했다.[2]

양 군은 교착 상태에 빠졌고, 화평 협상이 열렸다.[2] 처음 요나라 측은 영토 할양을 요구했지만, 송나라로서는 그것만은 받아들이기 어려워 재화를 보내는 방식으로 화평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2] 구준은 요나라가 영토를 할양하고, 요나라가 스스로를 신하라고 칭하는 등 강경한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의 참언으로 인해 타협했다.[2] 화평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요나라에 보내는 것, 진종은 승천황태후를 숙모로 삼는 것 (송나라가 요나라에 대해 형이 되는 것), 국경의 현상 유지 등이 합의되었다.[2]

5. 전연의 맹의 영향과 평가

전연의 맹은 송나라요나라 모두에게 긍정적, 부정적 영향을 동시에 가져다주었다.

송나라는 요나라에 매년 비단과 은을 공물로 바쳐야 했지만,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는 전쟁 비용보다 적은 부담이었으며, 외교 발전과 경제 성장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그러나 이 조약으로 송나라는 연운 16주 상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고,[4] 이는 훗날 민족주의적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요나라는 송나라로부터의 정기적인 공물을 통해 재정적 안정을 확보하고, 이를 바탕으로 중앙 수도 건설과 국제 무역 네트워크 구축에 힘썼다. 송나라와의 평화는 요나라가 내부 문제와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이러한 안정은 거란족의 숭무 정신을 약화시키고 사치를 조장하는 부정적인 결과로 이어지기도 했다.

후세에는 송나라가 재물을 통해 평화를 산 것을 재정적, 민족주의적 측면에서 비난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주변국에 재물을 제공하여 평화를 유지하는 것은 조공 무역이라는 중국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이었으며, 송나라와 요나라의 관계에서는 양국의 상하 관계 차이가 줄어든 것뿐이었다. 다만, 남송 시대에 금나라와의 관계에서 상하 관계가 역전되어 남송이 신하의 입장이 된 것은 굴욕적인 사실로 평가된다.

한편, 요나라와 송나라 모두 상대국에서 생산하기 어려운 물품(비단, 도자기, 차 등)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는 양국 간 교역량을 증가시켜 송나라로 더 많은 재화가 유입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송나라의 경제력 강화와 세수 증대에 기여했다는 시각도 있다.

5. 1. 동아시아 국제 질서 재편

전연의 맹은 스스로를 중원(中原)의 정통 후계자로 여겼던 송나라요나라를 동등한 관계로 인정하도록 강요한 첫 번째 사례였다. 이 관계는 송나라가 여진족(이후 만주족으로 알려짐)을 초청하여 요나라를 공격하면서 맹약을 파기한 1125년까지 지속되었다.[4] 여진족의 공격은 요나라와 북송의 관계를 모두 종식시켰다.

이 조약은 두 왕조 간의 대규모 군사적 충돌을 종식시키고 이후 수십 년 동안 평화로운 관계를 촉진한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된다.[4] 이러한 평화는 송나라와 여진 금나라가 거란 요나라를 공동으로 침공하기로 합의한 해상동맹까지 지속되었다.[4]

1042년, 송 인종, 요 흥종 때, 송이 서하에 시달리는 것을 본 요는 송에게 다시 영토 할양을 요구하고 비단과 은을 각각 10만씩 증액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이 맹약은 훗날 송과 금이 맺은 해상의 맹까지 이어진다.

이 맹약으로 송은 평화를 얻고 높은 경제력을 바탕으로 번영을 구축했다. 그러나 문치주의가 과도해져 군대의 약화를 초래했다. 요는 매년 보내지는 막대한 재화를 바탕으로 경제력을 발전시켜 북아시아 최강국으로 성장했고, 문화를 발전시켰지만, 거란의 숭무적인 기풍이 쇠퇴하고 사치로 흘러간 점도 부인할 수 없다.

5. 2. 송나라의 입장

송나라는 요나라에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세폐로 보내기로 합의하였다.[4] 이러한 물질적 손실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피하고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 실제로 전연의 맹약 이후 송나라는 요나라와 대규모 군사적 충돌 없이 비교적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4]

이 조약을 통해 송나라는 국경 분쟁 지역을 확보하고, 군사적 지출을 줄여 다른 문제에 집중할 수 있었다. 외교 관계를 발전시키고 경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연간 지불하는 세폐는 요나라에 대항하는 군사 비용보다 훨씬 적은 부담이었다.

그러나 전연의 맹약은 송나라가 요나라를 동등한 관계로 인정하고, 연운 16주 상실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사건이었다.[4] 이는 문치주의를 강화하여 군사력 약화를 초래하고,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편, 송나라가 요나라에 보낸 세폐는 조공 무역의 형태로, 요나라로부터 더 많은 재화를 환류받아 송나라의 경제력 강화와 세수 증대에 기여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5. 3. 요나라의 입장

요나라는 송나라로부터 안정적인 세폐를 확보하여 중앙 수도 건설과 국제 무역 네트워크 구축에 활용하였다.[4] 송나라와의 평화는 요나라가 내부 문제와 다른 민족과의 관계에 더 집중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세폐는 요나라의 경제 발전에 기여했지만, 한편으로는 거란족의 숭무(崇武) 정신이 약화되고 사치가 만연해지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5. 4. 왕계충의 역할

1003년 왕투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포로로 잡힌 송나라 출신 왕계충은 카이펑 출신으로, 거란 황제로부터 거란 관료 체제 내에서 관직을 받았다.[1] 왕계충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거란에게 송나라와의 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것이 유리하다고 설득했다.[1] 당시 거란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섭정 황후 승천은 전쟁에 지쳐 왕계충의 제안을 경청했다.[1]

요나라 황태후의 승인을 받은 왕계충은 모주(莫州)의 송나라 태수를 통해 송나라 황제에게 요나라 조정이 우호 관계를 회복하기를 원한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1] 그리하여 왕계충은 두 제국 간의 첫 평화 회담을 성사시켰다.[1] 그는 양국에 대한 내부 정보를 가지고 있었기에 각 국가가 평화를 위해 무엇을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고, 그에 맞는 제안을 양쪽에 했다.[1] 결국 왕계충은 황후가 영토 주장을 포기하도록 설득하여 전연의 맹으로 이어지게 했다.[1]

6. 한국사에 미친 영향

전연의 맹은 고려, 요나라, 송나라 간의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고려는 요나라의 침입을 막아내고 송나라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복잡한 외교전을 펼쳐야 했다. 특히, 전연의 맹 이후 요나라와 송나라의 관계가 안정되면서, 고려는 요나라의 압박에 더욱 직면하게 되었다. 이는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강화하고, 동시에 요나라와의 관계에서도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외교적 과제를 안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전연의 맹은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을 변화시켰고, 고려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생존과 발전을 위한 전략을 모색해야 했다.

7. 전연의 맹 이후

1042년, 요나라(요 흥종)는 송나라(송 인종)가 서하에 시달리는 틈을 타 세폐 증액을 요구했고, 송은 이를 수용하여 비단과 은을 각각 10만씩 증액했다.[4] 1076년에는 송나라가 요나라에 하동 국경 일부를 할양하기도 했다.[4] 전연의 맹은 훗날 송과 금이 맺은 해상의 맹으로 이어진다.

참조

[1] 논문 FRONTIER, FORTIFICATION, AND FORESTATION: DEFENSIVE WOODLAND ON THE SONG–LIAO BORDER IN THE LONG ELEVENTH CENTURY https://www.academia[...] 2018-07
[2] 논문 NOMADIC POWER, SEDENTARY SECURITY, AND THE CROSSBOW https://archive.org/[...] Centre for Military and Strategic Studies 2008
[3] 논문 The Sung-Kitan War of A.d. 1004-1005 and the Treaty of Shan-Yüan https://www.jstor.or[...] 1998
[4] 서적 Beyond Power Transitions: The Lessons of East Asian History and the Future of U.S.-China Relations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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