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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 십국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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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대 십국 시대는 당나라 멸망 이후 907년부터 979년까지 중국에서 일어난 혼란스러운 시기를 일컫는다. 당나라의 쇠퇴와 절도사의 독립으로 시작되었으며, 다섯 왕조(오대)와 열 개의 독립 국가(십국)가 난립했다. 이 시기에는 주전충의 후량 건국을 시작으로, 다양한 군벌들이 각축전을 벌였으며, 오(吳), 남당, 오월, 민, 초, 남한, 전촉, 후촉, 형남, 북한 등의 국가가 등장했다. 송나라의 통일 과정에서 오대 십국 시대는 종결되었으며, 북송은 960년에 건국되어 979년에 중국을 통일했다. 이 시기는 문화적으로도 중요한 변화를 겪어 산수화가 발전하고, 북방과 남방의 문화적 특징이 융합되었다. 후대의 역사학자들은 이 시대를 혼란과 분열의 시대로 평가하며, 송나라의 통일이 더욱 강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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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 십국 시대
개요
후량(노란색)과 당시 왕국들
후량(노란색)과 당시 왕국들
시기907년 ~ 960년
다른 표기중국어 간체: 五代十国
중국어 정체: 五代十國
병음: Wǔ dài shí guó
광둥어: Ng5 doi6 sap6 gwok3
웨이드-자일스: Wu3 tai4 shih2 kuo2
역사적 배경
이전 시기당나라
이후 시기송나라
주요 국가
오대후량 (오대)
후당
후진 (오대)
후한 (오대)
후주 (오대)
십국오 (십국)
전촉
오월
민 (십국)
초 (십국)
남평
후촉
남당
남한
북한 (오대)
기타 정보
주요 사건진교병변
조광윤의 송나라 건국

2. 역사

오대 십국 시대는 907년 당나라가 멸망하면서 시작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875년부터 884년까지 일어난 황소의 난으로 인해 당나라는 이미 멸망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후 당나라는 장안(長安)을 중심으로 관중 지역을 지배하는 일개 지방 정권으로 전락했고, 돌궐족 출신 이극용(李克用)과 주전충절도사 세력이 난립하는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당나라 중앙 정부는 755년부터 763년까지 이어진 안사의 난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다. 각지의 절도사들은 자립하여 세금을 내지 않는 등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황제들은 절도사를 억제하려 했지만, 오히려 환관 세력이 강해져 정치에 과도하게 개입하면서 중앙 정부는 더욱 약화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황소의 난이 일어났다. 황소군은 장안을 함락했고, 황제 희종으로 피신했다. 돌궐 사타족 출신의 이극용과 황소군의 간부였다가 당나라에 투항한 주온(후에 당나라로부터 전충(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음)이 활약하여 장안을 되찾았지만, 이 사건으로 당나라의 허약함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이 시기, 변주를 중심으로 산동·하남을 지배한 주전충, 태원을 중심으로 산서 일대를 지배한 이극용, 하북을 지배한 유인공, 섬서 일대를 지배한 이무정 등이 세력 다툼을 벌였다. 이 외에도 많은 군벌이 자립하여 훗날 10국의 기원이 되었다.

이극용의 군대는 검은색 옷을 입어 '갈가마귀군(鴉軍)'이라 불렸고 전투력이 강했지만 횡포가 심했다. 반면 주전충은 뛰어난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여 당나라 조정을 장악하고 황제를 괴뢰화했다. 907년, 주전충은 황제에게 선양을 강요하여 후량(국호는 단순히 (梁)이었다. [후](後) 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구별하기 위해 붙여진 것이다.)을 건국했고, 이로써 당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주전충이 황제가 된 것을 인정하지 않은 각지의 세력들은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반면, 후량과 대립을 원치 않았던 화남의 여러 나라는 후량에 신하의 예를 갖추기도 했다.

주전충의 숙적이었던 이극용은 908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이존욱(후당의 장종)은 후량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후량은 주전충의 실정과 내분으로 인해 영토를 빼앗겼다. 923년, 이존욱은 을 칭하던 유인공을 병합하고 당나라국호를 바꾸어 황제자칭한 후, 후량의 수도 개봉부를 함락시켜 후량을 멸망시켰다.

이극용의 이(李)씨 은 당나라로부터 받은 국성(國姓)이었기 때문에, 장종은 스스로를 당나라의 후계자라고 칭하며 후당을 건국했다. 후량을 멸망시킨 후, 이무정의 항복을 받고, 사천을 지배하던 전촉을 멸망시켜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장종은 낙양으로 천도하고 환관을 군대에 파견하는 등 당나라의 위세를 되살리려 했고, 이는 무장들의 불만을 샀다. 926년, 무장들은 이사원(훗날의 명종)을 옹립했고, 이사원의 군대가 낙양에 가까워지자 장종은 금군들에게 살해당했다.

명종은 환관을 배제하고 검소한 정치를 펼치며 토지 검사를 실시해 불공평을 바로잡고, 새로운 재무기관인 삼사사를 창설했다. 또한, 자신과 같은 유력 군인에 의한 찬탈을 막기 위해 직속 군인 시위친군(侍衛親軍)을 창설하여 금군을 강화했다. 이 삼사사는 훗날 송나라에도 이어졌다. 명종은 오대 국가 중 후주의 세종(시영) 다음가는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933년, 명종이 사망하고 3남 이종후가 즉위했지만, 곧 양자인 이종가에게 찬탈당했다. 이종가는 권력을 안정시키기 위해 명종의 사위이자 실력자인 매부 석경당을 제거하려 했다. 석경당은 거란에 원조를 요청하고 연운십육주를 할양하겠다고 약속했다. 거란의 황제 야율덕광(야율요골)은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여 후당군을 격파했다.

936년, 석경당(고조)은 즉위하여 후진을 건국하고 거란에 신하로서 복종했다. 이로 인해 후진은 거란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 중앙의 상황을 본 지방 세력들은 남쪽의 오나라 및 그 후신인 남당으로 넘어가거나 반란을 일으켰다. 942년, 고조는 병사했고, 조카 석중귀가 즉위했다. 석중귀는 거란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고, 946년 거란(다음 해 국호를 요나라로 변경)의 태종은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후진을 멸망시켰다.

요나라는 중국을 지배하려 했지만, 개봉부 주민들의 저항과 거란 본토의 반대로 인해 북쪽으로 돌아갔고, 태종은 도중에 병사했다.

석경당의 측근이었던 유지원947년 태원에서 즉위하여 후한을 건국하고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여 947년 개봉부를 점령했다.

그러나 유지원은 이듬해 사망하고, 차남 유승우가 즉위했다. 젊은 황제를 보필하던 측근들은 유력자들을 제거하려 했고, 추밀사 곽위군사를 일으켜 개봉부를 점령하고 유승우와 그 측근들을 제거했다. 곽위는 유윤을 옹립했으나, 곧 풍도를 시켜 유윤을 살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했다. 유윤의 아버지 유숭은 북쪽에서 자립하여 북한을 건국했다.

태조 곽위는 형벌 완화, 자작농 육성, 세제 개혁 등 내정에 힘쓰며 전란으로 황폐해진 중원을 부흥시키려 했다. 954년 즉위한 시영(후에 세종)은 이러한 노력을 이어받아 천하 통일을 목표로 했다. 세종은 군인들을 억누르기 위해 시위친군(侍衛親軍)을 분할하여 전전군(殿前軍)을 창설하고 강화하여, 절도사 및 금군대장들도 황제에게 대항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병력을 바탕으로 남당·후촉·북한·요나라 등을 공격해 영토를 빼앗았다. 특히 남당에게서 빼앗은 소금 산지는 남당의 생명줄과 같았다.

또한 세종은 군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폐불 운동을 벌였다. 세금을 피하기 위해 승려로 위장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이들을 가려내 징세하면 막대한 수입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화폐 주조에 필요한 이 부족했기 때문에 불상 등을 녹여 '''주원통보'''(周元通寶)라는 동전을 주조했다. (이것은 삼무일종의 법난의 하나이다.)

959년, 세종은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병사했고, 7살의 시종훈이 즉위했다. 이 상황을 틈타 북한은 요나라의 지원을 받아 후주를 침공했다. 이를 막기 위해 나선 인물은 세종의 측근이자 전전도점검(殿前都點檢, 금군의 총대장)이었던 조광윤(훗날의 송나라 태조)이었다.

어린 황제를 대신해 요나라와 싸우는 것에 불안을 느낀 군인들은 조광윤을 강제로 옹립했다.(진교의 변) 수도로 돌아온 조광윤은 시종훈을 보호하며 선양을 받아 송나라를 건국했다. 오대에서는 이러한 선양이 자주 일어났고, 양위한 황제를 죽이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조광윤은 시종훈을 죽이지 않았고, 그의 자손은 남송 멸망 때까지 보호받았다.

태조는 군인이 정치를 주도하던 오대의 경향을 바꾸고 문치주의를 내세웠다. 과거를 정비하고 지방 군대를 약화시키는 한편 중앙군을 강화하고, 절도사직을 무력화하는 등 내부를 강화한 태조는 후주 세종의 노선을 이어받아 통일을 추진했다.

963년,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하고, 965년에는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여 전쟁 비용을 충당했다. 971년에는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고, 975년에는 화남 최대 세력이었던 남당을 멸망시켰다.

이제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 뿐이었지만, 태조는 갑자기 사망했다. 이 죽음에는 태조의 동생이자 2대 황제 태종이 된 조광의의 독살 의혹이 있었다.(천극불결의 의) 태종은 태조의 정책을 이어받아 978년 오월을 병합하고, 979년 북한을 멸망시켜 천하 통일을 완수했다. 당나라 멸망 후 약 70년 만의 일이었다.

2. 1. 당나라 멸망과 오대의 등장

755년부터 763년까지 일어난 안사의 난으로 당나라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었다. 이 틈을 타 각지의 절도사 세력은 자립성을 강화하여, 자신들의 임지를 스스로의 재량으로 다스리게 되었고, 먼 지역의 절도사 중에는 중앙에 세금을 납부하지 않는 자도 있었다. 이에 대해 역대 황제들은 억제책을 강구하여 부분적으로 성공했다. 그러나 절도사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 이용했던 환관 세력이 힘을 얻어 정치에 간섭하여 황제의 폐립마저 결정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부패한 중앙 정부는 절도사 세력을 억누를 힘이 쇠퇴하여, 다시 절도사들이 세력을 키웠다.[1]

이러한 상황 속에서 황소의 난이 발발했다. 정부군은 타락해 있었고, 황소군에게 고전했으며, 그 중에는 황소군을 격멸하면 자신의 입지가 위태로워질 것을 두려워하여 소극적으로 대응한 자도 있었다고 한다.

황소군은 장안을 함락시키고, 황제 희종으로 도망갔다. 황소군은 장안에서 폭정을 펼쳐 장안 시민들의 실망을 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나라 정부만으로는 장안을 회복할 실력이 없었고, 여기서 활약한 것은 돌궐 사타부 출신의 이극용과, 황소군의 간부였지만 배신하여 당나라 측에 붙은 주전충(후에 당나라로부터 전충이라는 이름을 받음)으로, 이 두 사람의 분전으로 장안이 회복되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황제는 명목만 이용당하는 존재로 전락했다. 이 상황은 주나라의 동천 이후(춘추 시대)나 후한 말기의 헌제 등을 생각하면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이 시기에 중앙을 다투었던 것은, 개봉을 중심으로 산동성·하남성을 지배했던 주전충과 진양을 중심으로 산서성을 지배한 이극용이다. 이 외의 유력자로는, 하북성을 지배한 유인공이나 섬서의 일부를 지배한 이무정 등이 있다. 그 외의 지역에서도 자립하는 자가 많아, 후의 십국의 근원이 되었다.

이극용의 군대는 검은색 의복으로 통일했기 때문에 통칭 '까마귀 군대'라고 불렸으며, 전투는 매우 강했지만 거친 행동이 많았고, 주전충에게는 정략으로 한 수, 두 수 뒤쳐졌다. 당나라 조정(중앙 정부)을 장악한 주전충은 황제를 괴뢰화하고, 907년에는 마침내 선양을 받아 후량 (국호는 단순히 "량"이다. "후"라는 글자는 후세의 역사가들이 구별하기 위해 붙였다. 이하 모두 같다)을 세웠고, 이로써 당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2]

무명, 오대 십국 시대의 ''궁정 연회''

2. 2. 십국의 난립과 발전

남중국의 정권들은 이 시기 동안 대체로 더 안정적이고 효과적인 정부를 운영했다.[9] 남부 국가 통치자들 역시 거의 대부분 북부 출신의 군사 지도자였고, 주요 장교와 정예 부대도 당나라 군대의 주력이 북부에 있었기 때문에 북부 출신이었다.[10] 전촉의 창시자는 각각 회남(淮南)과 허창(許昌) 출신의 '무뢰한'이었고, 민의 창시자는 회남 출신의 하급 관리였으며, 오월의 창시자는 항저우(杭州) 출신의 '무뢰한'이었고, 의 창시자는 (한 자료에 따르면) 허창 출신의 목수였으며, 형남의 창시자는 산주(陝州) 출신의 노예였고, 남한의 창시자는 남부 부족의 추장이었다.[11] 이들은 낮은 사회적 지위에서 뛰어난 군사적 능력으로 일어섰으며, 후대 학자들은 이들을 "산적"이라고 폄하했다. 그러나 이들은 일단 자리를 잡은 후에는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문화와 경제 발전을 촉진하는 모습을 보였고, 많은 이들이 전(前) 조정의 신하들을 영입하여 국가를 다스리게 했다.[12]

당나라 말기, 광둥(廣東)과 푸젠(福建)은 이국적인 상품을 거래하는 중요한 항구 도시였고, 양쯔강 중류와 쓰촨(四川)은 차와 도자기 생산의 중심지였으며, 양쯔강 삼각주는 매우 높은 농업 생산의 중심지이자 다른 지역의 중계 무역항이었다. 이 지역들은 경제적으로 상호 의존적이었다. 와 당의 정책은 남부 개발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지만, 남부 지역이 엄격한 행정 통제에서 벗어나 혁신할 수 있는 여지를 주었다. 당나라 시대에 지배적인 북부 관리들은 남부에서 봉사하기를 꺼렸고, 따라서 남부인들이 "남부 선발" 보충 제도를 통해 지방 차원에서 봉사하도록 당나라에 의해 채용되었다. 이들 남부 관리들은 십국의 행정 핵심이 되었고, 후에는 중기에 관료 사회를 지배했다.[13]

동원 (932–962)의 ''강변''


북중국의 왕조들이 급속도로 교체된 것과는 달리, 남중국의 정권들은 일반적으로 동시대에 존재하며 각자 특정 지역을 통치했다. 이들을 "십국"이라고 불렀다(사실, 전촉후촉과 같이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 나라도 있었다). 각 궁정은 예술적 탁월함의 중심지였다. 이 시기는 시의 활력과 경제적 번영으로 유명하다. 상업이 급속도로 성장하여 금속 화폐가 부족해졌는데, 이는 "비전(飛錢)"과 예금 증서의 창출로 해결되었다.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보다 500년 앞선 이 시기에 목판 인쇄가 보편화되었다.

십국은 다음과 같다.

나라존속 기간
양오907–937
오월907–978
909–945
마초907–951
남한917–971
전촉907–925
후촉934–965
형남924–963
남당937–976
북한951–979



보양과 같은 일부 역사가들은 과 제를 포함하여 11개로 계산하지만, 북한은 후한의 연장선으로 보아 포함하지 않는다. 이 시대는 또한 북쪽의 요나라, 남서쪽의 대리국의 건국과도 일치한다. 이 시기의 다른 정권으로는 , 의무절도사, 정난절도사, 무평절도사, 청원절도사, 음, 감주 위구르 왕국, 귀의군 및 서량부가 있다.

십국 중 가장 강대한 나라는 중국에서도 가장 비옥한 지역에 자리 잡은 였다. 건국자인 양행밀은 군도에서 시작하여 양주 일대를 제압하고, 906년에는 당나라로부터 "오왕"에 임명되었다. 오의 군대는 전쟁에 능하여 한때 북쪽의 후량과 대등하게 다툴 정도의 세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양행밀 사후, 그의 부하 서온의 세력이 커졌고, 결국 서온의 양자인 서지고에 의해 찬탈당했다(937년). 서지고는 찬탈 후 이름을 바꾸어 이변이라고 칭하며, 당의 후계자를 자처하고 국호를 "당"으로 고쳤다. 이 나라는 후세의 역사가들에게 남당으로 불린다.

같은 시기에 남쪽의 절강에서는 오월이 세력을 떨쳤다. 건국자인 전유는 소금 장수(소금 밀매인)에서 시작하여 절강 일대를 제압했다. 북쪽에 강대한 오, 남당과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항상 북쪽의 오대 제국에 신종하여 오, 남당에 대항했다.

오월의 남쪽 복건에서는 위무군 절도사 왕심지가 이곳을 제압하여 민을 세웠다. 왕심지는 내정에 힘썼고, 복건의 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시켰다. 그러나 왕심지 사후 국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틈을 노린 남당에 의해 945년에 멸망했다.

서쪽으로 눈을 돌리면 호북에는 형남(남평), 호남에는 , 광동에는 남한이 할거하고 있었다. 형남은 십국 중 가장 작은 나라였으며, 주변 국가 모두에 신종하며 교역의 중계점으로 번성했다. 초는 무역으로 번성한 나라로, 건국자 마은이 살아있을 때는 경제적으로 크게 발전했지만, 사후 내분에 휘말려 951년에 남당에 의해 멸망했다. 남한의 통치자 유은은 아랍계라고 전해지며, 그 궁정에서는 전란의 오대십국에서는 드물게 문관의 힘이 강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그 정치도 타락하여 환관 정치로 변질되었다.

사천은 양주와 함께 비옥한 땅으로, "천부"라고 칭해졌다. 여기에 할거한 것이 전촉과 후촉 양촉 정권이다. 전촉의 건국자 왕건은 원래 소금 장수였지만, 사천에 들어가 이곳을 제압하고, 현지의 풍부한 물산을 바탕으로 문인의 보호와 경서의 인쇄 등을 행하는 등 문화적 시책을 펼쳤다. 전촉은 925년, 후당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이 지역 통치를 맡은 무장 맹지상이 자립하여 934년에 후촉을 세웠다. 후촉은 전촉과 마찬가지로 문화 진흥에 힘썼으며, 특히 당 말기부터의 를 모은 『화간집』의 편찬은 이 시대의 문화를 전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북한은 유숭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태원을 수도로 삼아 현재의 산서성 북부를 지배했다. 북한은 국력이 적었기 때문에 후주에 대항하기 위해 의 원조를 구했고, 사실상 요의 위성 국가가 되었다. 요의 병력에 의해 후주에 대해 우위를 유지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시적인 것에 그쳤다. 북송이 성립되자, 북송의 압력으로 국내는 혼란에 빠졌고, 979년에는 결국 북송에 굴복하여 북한은 멸망했다.

2. 3. 송나라의 통일

송 태조 조광윤은 후주 세종의 노선을 이어받아 통일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963년 호북성의 형남을 합병하여 십국을 동서로 분리시켜, 단결하여 송에 대항하기 어렵게 만들었다.[20] 965년 사천성의 후촉을 병합하고 그 땅의 풍부한 물산을 빼앗아 전쟁 비용을 보충하였으며, 971년 광동을 지배하던 남한을 멸망시켰다.[20] 975년 화남에서 최대 세력을 자랑하던 남당을 멸망시켰다.[20]

이제 남은 것은 북쪽의 북한과 남쪽의 오월 뿐이었지만, 태조는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이 죽음에는 태조의 동생이자 2대 황제 태종이 되는 조광의에 의한 독살 의혹이 있었다.(천극불결의 의)[20] 태종은 태조의 방침을 이어받아 통일을 진행해 978년 오월을 병탄하고,[1] 979년 북한을 멸망시킴으로써 천하 통일을 완성하였다.[20] 당나라 멸망 후 약 70여 년 만의 일이었다.

송나라중국 정복 (960–979)

3. 주요 국가





'''십국 이외 세력'''

나라명시조
이무정
유수광


902년 당나라 멸망 전 군벌 ("절도사") 지도

3. 1. 오대

907년의 후량


926년의 후당


939년의 후진


949년의 후한


951년 후주


thumb경의 세력 지도]]

당나라 말기, 황소의 난 진압에 큰 공을 세운 군벌 주전충907년 당 애제를 폐위시키고 후량을 건국했다.[7] 그러나 각지의 군벌들은 주전충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 화남의 여러 나라들은 후량과 대립을 피하고자 신하의 예를 갖추기도 했다.

주전충의 숙적이었던 이극용908년 사망했지만, 그의 아들 이존욱(후당 장종)은 후량에 맹렬히 공격했다. 주전충의 실정과 내분으로 후량은 영토를 빼앗겼다. 923년, 이존욱은 (후당)을 건국하고 후량을 멸망시켰다.[7]

이극용의 '이(李)'는 당나라에서 하사받은 것이었다. 이를 명분으로 이존욱은 스스로를 당나라의 후계자로 칭하며 후당을 건국했다. 후량을 멸망시킨 후, 왕 이무정과 사천의 전촉을 멸망시켜 영토를 넓혔다. 그러나 이존욱은 환관을 군 감찰로 부활시키는 등 무장들의 불만을 샀고, 926년 이사원(후당 명종)이 옹립되면서 살해당했다.

명종은 환관을 배제하고 토지 검사를 실시하는 등 개혁을 추진했으며, 재무기관 삼사사를 창설했다. 또한 시위친군(侍衛親軍)을 창설해 군권을 강화했다. 명종은 오대에서 후주의 세종 다음가는 명군으로 칭송받았다.

그러나 933년 명종이 사망하고, 양자 이종가에게 제위가 찬탈되었다. 이종가는 명종의 사위 석경당을 제거하려 했고, 석경당은 거란에 원조를 요청하며 연운십육주 할양을 약속했다. 936년 거란의 야율덕광이 후당을 멸망시키고, 석경당은 후진을 건국했다.

후진은 거란의 위성국이 되었고, 지방 세력들은 이반했다. 942년 석경당이 사망하고, 석중귀가 즉위했으나 거란에 강경하게 대처하여 분노를 샀다. 946년 거란(후에 요나라)이 후진을 멸망시켰다.

거란은 중국 지배를 시도했으나, 개봉부 주민들의 저항과 본토의 반대로 철수했다. 947년 유지원후한을 건국했으나, 950년 곽위후주를 건국했다. 유숭북한을 건국했다.

954년 즉위한 시영(세종)은 군사력을 강화하고 남당, 후촉, 북한, 요나라를 공격해 영토를 넓혔다. 특히 남당의 소금 산지를 확보하여 생사여탈권을 쥐었다. 또한 군사비 마련을 위해 삼무일종의 법난 중 하나인 폐불 운동을 단행하고, 불상을 녹여 '''주원통보'''(周元通寶)라는 동전을 주조했다.

959년 세종이 사망하고, 960년 조광윤이 북송을 건국하며 오대 시대는 막을 내렸다.


3. 2. 십국

는 10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였다. 건국자 양행밀양주 일대를 장악하고 북쪽의 후량과 대등하게 맞설 정도의 세력을 자랑했다. 그러나 양행밀 사후, 부하 서온의 힘이 커져 결국 서온의 양자 서지고에게 찬탈당한다(937년). 서지고는 찬탈 후 이변으로 이름을 바꾸고 남당을 건국했다.

같은 시기 남쪽 절강 지역에는 오월이 세력을 확장했다. 건국자 전류는 소금 밀매상에서 시작하여 절강 일대를 장악했다. 북쪽의 강력한 오나라·남당과 대치했기에 항상 화북의 오대 국가들에게 신종하면서 이들에게 대항했다.

오월의 남쪽 복건성 지역에는 절도사 왕심지을 건국했다. 왕심지는 내정에 힘써 복건 지역의 생산성을 크게 발전시켰다. 그러나 왕심지 사후 내분이 일어났고, 이 틈을 타 침략한 남당에 의해 945년 멸망했다.

호북성에는 형남(남평), 호남성에는 , 광동성에는 남한이 할거했다. 형남은 10국 중 가장 약소국으로 주변 모든 나라에게 신종하여 교역의 중계점으로 번영했다. 초는 차 교역으로 번영한 국가로 건국자 마은의 치세에는 경제적으로 부유했으나, 사후 내분으로 951년 남당에 의해 멸망했다. 남한의 통치자 유은은 아랍계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궁정은 오대 십국의 전란 속에서도 문관의 힘이 강했다. 그러나 후기에는 환관 정치로 변질되었다.

사천성은 양주와 함께 부유하여 천부(天府)라 불렸다. 이곳에는 전촉·후촉이 할거했다. 전촉의 건국자 왕건은 소금 밀매상이었으나, 사천성을 장악하고 풍부한 산물을 바탕으로 문인을 보호하고 경서를 인쇄하는 등 문화 정책을 실시했다. 전촉은 925년 후당에 의해 멸망했다. 그 후 이 땅에 부임한 무장 맹지상이 자립하여 후촉을 건국했다. 후촉도 전촉과 마찬가지로 문화 진흥에 힘썼고, 특히 당나라 말기부터 당대까지의 (詞)를 모아 화간집을 편찬하여 이 시대의 문화를 전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중원의 오대 왕조는 옛 당나라 영토의 6할을 차지했으나, 국내 정세 불안정과 거란 등의 외적 때문에 10국 평정에 나설 수 없었고, 불안정한 세력 균형이 유지되었다. 다만 오대 최후의 왕조 후주가 형남·남당의 영역을 잠식하면서 이런 균형은 무너지게 되었다.

십국
국가수도건국멸망군주초대최종대
전촉청두907년925년황제2대왕건(고조)왕연(후주)
후촉청두934년965년황제2대맹지상 (고조)맹창 (후주)
강도902년937년4대양행밀 (무충왕, 태조 무제)양보(예제)
남당강녕남창937년975년황제3대이변 (열조)이욱 (후주)
형남강릉912년963년5대고계흥 (무신왕)고계충
오월전당907년978년5대전유 (태조 무숙왕)전홍숙 (충의왕)
장락909년945년6대왕심지 (태조)왕연정
장사907년951년6대마인 (무목왕)마희숭
남한흥왕부909년971년황제4대유엄 (고조)유창 (후주)
북한태원951년979년황제4대유숭 (세조 신무제)유계원 (영무제)
기간902년 양행밀오왕 배명부터, 979년 북송에 의한 북한의 멸망까지



국명시조
이무정
유수광


4. 문화

오대 십국 시대는 당나라의 국제적인 문화에서 벗어나 송나라의 민족 문화로 전환되는 시기였다.[15] 이 시기에는 문화적, 경제적 쇠퇴보다는 눈에 띄는 성장이 있었다.[16]

북방 왕조들은 동북 지역에서 기원하였고, 중앙 집권화로 인해 지방 엘리트들이 수도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대도시 문화가 만들어졌다.[3]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남당, 오월, 후촉 등 남방 국가의 문화, 예술, 문학이 통합되었다. 송나라는 남중국 문화적 관점을 채택했고, 남방의 문화 전통은 북방의 문화를 재건하는 데 사용되었다. 남방의 도서관은 북쪽으로 옮겨졌고, 동남아 건축이 장려되었으며, 불교 관련 유물들이 수도에 집중되어 제국 문화에 재통합되었다. 오대 북방 왕조는 수도원 네트워크를 제한하고 경제적, 군사적 자원에 의존하려 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17]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여러 분야에서 문화적 혁신이 일어났다. 도자기에서는 "백자"가 등장했고, 회화에서는 중국의 "다양한 풍경"이 도교의 영향을 받아 산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자연을 조화의 근원으로 묘사했다.[18]

4. 1. 회화

당나라 문화가 쇠퇴하면서 산수화가 발전하기 시작했다. 목적이 있는 회화에서 감상용 회화로 넘어오게 되는 시기로, 이는 송나라에서 절정을 이루게 된다. 동양화 회화사에서 절정은 송나라 때이다.

인물화의 배경이었던 산수화가 독립적인 장르로 발전하고, 수묵화가 발전하게 된다. 또한 사실적인 표현을 중점으로 그렸던 이전과 달리, 자신의 생각을 담는 '사의(寫意)' 시대로 넘어오게 된다. 당나라 때 불교에 심취했던 문인들의 영향으로 시와 서법이 들어오게 되고, 그림에 시를 짓는 풍조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감상용 회화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화가들의 수도 증가하였다.

수묵 산수화는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북방산수 양식(형호, 관동)과 강남산수 양식(동원, 거연)으로 나뉜다. 이를 형관동거(荊關董巨)라고 한다.

  • 형호관동은 바위산이 많은 북방 지역의 산수를 주로 그렸다. (북방산수화)
  • 동원거연은 흙산이 많은 남방 지역의 산수를 주로 그렸다. (남방산수화)


형호는 필법기에서 그림을 그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6가지 요소인 육요(六要: 기, 운, 사, 경, 필, 묵)를 제시했다. 특히, 묵(墨)을 중요한 요소로 격상시켰다. 또한, 근경, 중경, 원경의 3단 구성을 통해 웅대한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을 제시했다.

  • 형호의 관려도는 북방산수의 대표적인 양식인 거비파(皴法)를 보여준다.
  • 관동은 형호의 필법을 이어받아 산수화를 더욱 발전시켰다.
  • 동원의 소상도는 평담하고 꾸밈없는 남방 산수를 보여준다.

허희 (886–974)의 그림 ''나비와 등나무 꽃''

  • 거연은 동원의 제자로, 물안개 표현이 뛰어나고 동원의 그림을 계승했다.


화조화황전의 화려하고 장식적인 채색화(부귀체)와 서희의 자유분방한 스타일(야일체)로 나뉜다.

4. 2. 기타

당나라의 국제적인 문화적 분위기에서 벗어나 송나라의 확고한 민족 문화로의 전환을 보여주는 시기이다.[15] 이 기간 동안 문화적, 경제적 쇠퇴보다는 눈에 띄는 성장이 있었다.[16]

여러 북방 왕조가 동북 지역에서 기원했으며, 북방의 중앙 집권화로 인해 지방 엘리트, 특히 동북 출신들이 수도로 이주하여 새로운 대도시 문화를 창출했다.[3] 송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 남방 국가의 문화, 예술 및 문학이 새로운 정권에 통합되었다. 송나라는 뚜렷한 남중국 문화적 관점을 채택했다. 남당, 오월, 후촉의 보존된 문화 전통은 북방의 문화적 지형을 재건하는 데 사용되었다. 남방의 도서관은 북쪽으로 옮겨졌고, 동남아 건축은 새로운 수도에서 장려되었으며, 동남아 불교 아이콘, 성직자 및 유물이 새로운 수도에 집중되어 이러한 전통을 제국 문화에 재통합했다. 이는 오대 북방 왕조와는 뚜렷이 달랐는데, 이들은 광범위한 수도원 계보 네트워크를 결코 지원하지 않고 대신 이를 제한하고 경제적, 군사적 자원에 의존하려 했다.[17]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이 시기에는 여러 분야에서 문화적 혁신이 있었다. 도자기에서는 "백자"가 등장했다. 회화에서는 중국의 "다양한 풍경"이 도교에서 영감을 받아 하늘과 땅 사이의 장소로서 산의 신성함을 강조하고 자연 세계를 조화의 근원으로 묘사했다.[18]

5. 오대 십국 시대에 대한 평가와 연구

오대 십국 시대에 대한 평가는 시대와 관점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난다.

송나라 시대에는 구양수사마광 등의 유학자들이 이 시대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이들은 오대 십국 시대를 당나라의 쇠퇴와 혼란, 그리고 분열의 시대로 규정했다. 이러한 관점은 "중국" 중심의 천하 통일 사상에 기반한 것으로, 통일 왕조인 송나라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다.

반면, 현대에는 오대 십국 시대를 당나라에서 송나라로 이어지는 과도기적 시대로 보는 시각이 존재한다. 이 시기에는 중앙 집권 체제와 문치주의가 강화되었고, 경제, 사회, 문화적으로 큰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 오대 십국 시대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오대 십국 시대가 통일되지 않고 분열된 상태로 유지되었을 경우, 중국이 유럽과 유사한 형태로 발전했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5. 1. 후대의 평가

오대 십국 시대는 사법 남용과 과도한 처벌이 만연했던 시기로 평가된다. 이러한 평가는 정의 집행의 실제 문제와 더불어, 이 시대의 분권화와 군사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본 유교 역사가들의 편견을 반영한다. 당나라에서는 사형 집행 전 항소를 모두 검토하도록 했으나, 오대 시대에는 이러한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다.[19] 가혹한 고문의 사용도 빈번했다. 특히 후한은 잔혹한 고문으로 악명이 높았는데, 용의자들은 긴 칼과 못을 이용한 고문으로 사망하기도 했다.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던 군 장교는 심문 없이 용의자를 처형하기도 했다.[19]

당나라의 법전은 737년에 제정된 것으로, 이 시기에도 기본적인 법률로 사용되었으며, 추가적인 칙령 및 법전과 함께 적용되었다.[19] 후량은 909년에 법전을 공포했으나, 이 법전은 정의 집행을 지연시키는 원인으로 지목되었고, 경제 범죄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당, 후진, 후주 역시 법전을 재편집하여 제작했다. 그러나 후한은 짧은 통치 기간으로 인해 법률 체제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19]

북송 성립 직후, 설거정 등은 정사인 『구오대사』를 편찬했다. 그러나 이후 구양수춘추 필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신오대사기』를 저술했다. 구양수의 사후, 이 책은 국자감에 납입되어 인정받아 널리 퍼졌다. 금은 1207년에 『오대사기』만을 정식 정사로 취급하기로 결정했다. 남송에서도 『오대사』는 정사였지만, 실제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청나라 시대에 『오대사기』는 정사에 추가되어 『신오대사』로 개칭되었고, 사라진 후 『영락대전』 등 다양한 문헌을 바탕으로 복원된 『오대사』는 『구오대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양수는 이 시대를 당나라의 쇠퇴로 인해 천하가 분열되고, 전쟁과 기근으로 백성들이 고통받으며, 질서가 문란했던 시대로 해석했다. 즉, 정치 실패로 인한 질서 붕괴("란")와 천하 분열("리")이 함께 전개된 "난리"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계승되어 후세 역사관에 영향을 미쳤다. 명나라의 유학자 왕부지는 오대 왕조를 당나라의 수도였던 낙양과 장안을 우연히 지배한 세력에 불과하다고 평가하며(『독통감론』), 왕조로 인정하는 것 자체를 부정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는 송나라 시대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다.[21]

구양수와 사마광 등의 송나라 시대 역사관은 천하에 여러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시대 자체를 무질서한 시대로 부정적으로 파악했다. 반면, 통일된 천하만이 올바른 세계이며, 이를 실현한 송나라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중국" 중심의 천하 개념에 강하게 영향을 받았다.[21][22] "십국"이라는 지방 정권의 수를 세는 방식도 북송 성립 직후 성립된 『구오대사』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현존하는 『구오대사』는 완전한 형태가 아니지만, 적어도 "십국세가"와 같은 세가를 세우지 않고, 기 등을 "십국" 이외의 군웅과 함께 "세습열전"·"참위열전"에 분산하여 기록한 것으로 보아, "십국"이라는 규정 자체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22]

구양수보다 조금 앞선 인물인 노진이 편찬한 제국에 관한 역사서도 북초(형남)를 제외한 『구국지』였다. 형남을 포함한 "십국"이라는 개념은 『오대사기』에서 처음 등장했으며, 이후 조정에 헌상된 『구국지』에도 북초 관련 내용이 추가되었다. 남평왕·형남절도사인 고계흥과 그 자손들은 세습 통치를 했고, 송나라의 군사력에 의해 통일된 후 다른 제국의 왕들과 비슷한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중앙 정부나 자사 임명권을 갖지 못한, 오대의 절도사에 불과했다. 구양수는 이러한 애매한 존재를 무질서의 상징으로 여겨 북초(형남)를 포함시켜 "십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22] 이러한 역사관은 일본의 이 시대에 대한 인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당나라에서 오대 십국 시대를 거쳐 통일 국가를 이룩한 송나라는 오대 및 그 이전의 당나라와는 다른 중앙 집권 체제와 문치주의를 확립했다. 이는 경제, 사회, 문화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당송변혁"). 오대 십국 시대는 이러한 변혁 속의 과도기로,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가 진행되는 경우가 많다.[21]

고지마 쓰요시와 요나하 준은 오대 십국 시대가 북송에 의해 통일되지 않고, 중국이 분열된 상태로 유지되었다면, 유럽처럼 여러 국가가 탄생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지적한다. 또한, 북송 이후의 전제 군주와 같은 중국 전역을 통일하는 세속 권력이 형성되지 않고, 분열된 중국 각지의 왕권이나 군벌이 미니 국가를 건설하여, 유럽베스트팔렌 체제와 유사한 국제 관계가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러한 분기점이 동서양 역사의 가장 큰 차이를 만들었다고 본다.[23]

5. 2. 현대의 연구

후대의 전통에서 오대 시대는 사법 남용과 과도한 처벌의 시기로 여겨진다. 이는 정의 집행의 실제 문제와 이 시대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유교 역사가들의 편견을 모두 반영한다. 당나라에서는 항소가 모두 끝날 때까지 처형을 미루도록 했지만, 오대 시대에는 이것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19] 가혹한 고문 사용과 같은 다른 문제점들도 있었다. 후한은 이 점에서 가장 악명 높은 왕조였다. 용의자들은 긴 칼과 못으로 고문을 당해 죽기도 했다. 수도의 치안을 담당하는 군 장교는 심문 없이 용의자를 처형하기도 했다.[19]

737년의 당나라 법전은 이 시기의 기본 법률이었으며, 추가적인 칙령 및 법전과 함께 사용되었다.[19] 후량은 909년에 법전을 발표했다.[19] 이 법전은 정의 집행의 지연을 야기한다고 여겨졌으며, 경제 범죄에 대해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후당, 후진, 후주도 법전을 다시 만들었다. 후한은 너무 짧은 기간 동안 권력을 잡았기 때문에 법률 체제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19]

북송 성립 직후 설거정 등은 정사인 『구오대사』를 편찬했지만, 후에 구양수춘추의 필법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신오대사』를 저술했다. 구양수의 사후에 국자감에 납입되어 인정받아 널리 퍼졌기 때문에, 금에서는 1207년에 『오대사기』만을 정식 정사로 취급하기로 했다. 『오대사』는 남송에서는 계속 정사였지만, 실제로는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결국 사라질 정도였다. 시대에 『오대사기』는 정사에 더해져 『신오대사』로 개칭되었고, 사라진 후에 『영락대전』 등 다양한 문헌을 바탕으로 복원된 『오대사』는 『구오대사』라고 불리게 되었다.

구양수는 이 시대를 당의 쇠퇴로 천하가 분리되고, 전쟁과 기근이 사람들을 괴롭히고, 질서가 문란한 시대라고 해석했다. 즉, 정치 실패로 인한 질서 붕괴("란")와 천하가 분열된 상태("리")가 함께 전개된 "란리"의 시대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사마광의 『자치통감』에 의해 계승되어, 후세의 역사관으로 이어졌다. 의 유학자인 왕부지는 오대의 왕조를 우연히 당의 수도(낙양·장안)를 지배한 세력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독통감론』), 왕조로 인정하는 것 자체를 부정했지만, 기본적으로는 송대의 역사관을 따르고 있다.[21]

구양수와 사마광 등에 의한 송대의 역사관은, 천하에 여러 국가가 존재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그 시대 자체를 질서 없는 시대로 부정적으로 파악하는 한편, 통일된 천하만이 올바른 세계이며 그것을 실현한 송 왕조를 평가하는, "중국"에서의 천하 개념에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21][22]

"십국"이라는 지방 정권의 수를 세는 방법도, 북송 성립 직후에 성립된 『구오대사』에서는 확인할 수 없다. 구양수보다 조금 앞선 인물인 노진이 편찬한 제국에 관한 역사서도 북초(형남)를 제외한 『구국지』였다. 형남을 더한 "십국"의 첫 등장은 『오대사기』이며, 그 후 조정에 헌상된 『구국지』에도 북초의 분량이 추가되었다. 남평왕·형남절도사인 고계흥 및 그 자손은 세습을 했고, 송의 군사력에 의해 통일되었으며, 통일 후에는 다른 제국의 왕과 마찬가지의 대우를 받았지만, 실제로는 중앙 정부도 자사 임명권도 갖지 못한 오대의 절도사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러한 애매한 존재를 무질서의 상징으로 싫어한 구양수는 북초(형남)를 포함시켜 "십국"으로 만들었다고 한다.[22] 이러한 역사관은 일본에서의 이 시대에 대한 시각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주고 있다.

당 왕조에서 오대 십국 시대를 거쳐 통일 국가를 실현한 송 왕조는, 오대와 그 전의 당 왕조 이전과도 다른 중앙 집권 체제와 문치주의를 확립했고, 경제와 사회, 문화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당송변혁"). 오대 십국 시대는 이러한 변혁 속의 과도기로 위치 지어져, 이러한 관점에서 연구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21]

고지마 쓰요시와 요나하 준은, 오대 십국 시대가 북송에 의해 통일되지 않고, 중국이 분열된 채였다면, 유럽과 마찬가지로 복수의 국가가 탄생했을지도 모르고, 북송 이후의 전제 군주와 같은 중국 전토를 통일하는 세속 권력이 만들어지지 않고, 분열된 중국 각지의 왕권이나 군벌이 미니 국가를 만들어, 유럽베스트팔렌 체제에 가까운 국제 관계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으며, 거기가 동서 역사의 최대 분기점이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23]

참조

[1] 서적 Historical Records of the Five Dynasties https://books.google[...] Columbia University Press
[2] 논문 Demographic, Political, and Social Transformations of China, 750–1550 1982
[3] 서적 A Companion to Chinese History John Wiley & Sons, Ltd 2017
[4] 서적 The Destruction of the Medieval Chinese Aristocracy Harvard University Press 2014
[5] 논문 Demographic, Political, and Social Transformations of China, 750–1550 1982
[6] 서적 The Origins of the Chinese 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7] 서적 The Origins of the Chinese Nati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7
[8] 서적 Power and politics in tenth-century China: the Former Shu regime Cambria Press 2011
[9] 서적 A History of China
[10] 서적 Power and politics in tenth-century China: the Former Shu regime Cambria Press 2011
[11] 서적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The Chinese University of Hong Kong Press 2011
[12] 서적 Patrons and Patriarchs: Regional Rulers and Chan Monks during th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5
[13] 서적 China during the Tang-Song Interregnum, 878–978: New Approaches to the Southern Kingdoms Routledge 2021
[14] Wikisource
[15] 서적 The Culture of China https://books.google[...] Britannica Educational Publishing
[16] 서적 A Portrait of Five Dynasties China: From the Memoirs of Wang Renyu (880–956)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17] 서적 Patrons and Patriarchs: Regional Rulers and Chan Monks during the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University of Hawaii Press 2015
[18] 웹사이트 Five Dynasties and Ten Kingdoms http://www.museocine[...] Museum of Chinese Art and Ethnography, Parma 2018-02-04
[19] 간행물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Volume 5, The Five Dynasties and Sung China, 960–1279 AD, Part 2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5-03-05
[20] 문서 もともとの諱は、「匡義」であったが、兄が皇帝になったので避諱して「光義」とした。
[21] 문서 山崎覚士「五代政治史研究の成果と課題」(『中国五代国家論』(思文閣出版、2010年)序章)
[22] 문서 山崎覚士「五代の〈中国〉と平王」(初出:宋代史研究会研究報告第九集『「宋代中国」の相対化』(汲古書院、2009年/所収:山崎『中国五代国家論』(思文閣出版、2010年))
[23] 서적 "「日本史」の終わり" PHP研究所 2015-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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