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일본 프로레슬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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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전일본 프로레슬링(AJPW)은 1972년 자이언트 바바에 의해 설립된 일본의 프로레슬링 단체이다. 바바의 사망 이후 미사와 미쓰하루, 바바 모토코, 무토 케이지 등을 거쳐 운영되었으며, 2014년 아키야마 준 체제 이후 현재 후쿠다 쓰토무키가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1990년대 초 텐류 겐이치로 등의 선수 이탈, 2000년 미사와 미쓰하루를 포함한 선수들의 대거 이탈로 프로레슬링 노아 창단, 2013년 무토 케이지 퇴단 등으로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으나, 신일본 프로레슬링, 프로레슬링 노아 등과의 교류를 통해 활로를 모색해왔다. 현재 트리플 크라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세계 태그팀 챔피언십, 월드 주니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 등을 포함한 여러 챔피언십과 챔피언 카니발, 주니어 배틀 오브 글로리 등의 토너먼트를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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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일본 프로레슬링 - [회사]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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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올 재팬 프로레슬링 주식회사 |
영어 이름 | All Japan Pro-Wrestling Co., Ltd. |
약칭 | AJPW (가끔 AJP) |
설립일 | 1972년 10월 21일 |
분리 | 일본 프로 레슬링 동맹 |
스타일 | 킹스 로드 스타일 |
위치 | 도쿄도 분쿄구 유시마 |
설립자 | 자이언트 바바 |
소유자 | 후쿠다 츠요키 |
웹사이트 | all-japan.co.jp |
법인 형태 | 주식회사 |
본사 우편번호 | 113-0034 |
본사 위치 | 도쿄도분쿄구유시마 3초메 14번 9호 유시마 빌딩 8층 |
설립일 (법인) | 2014년 7월 1일 |
산업 | 서비스업 |
사업 내용 | 프로레슬링 흥행, 관련 기획 운영 |
대표자 | 대표이사 사장 후쿠다 츠요키 |
주요 관련 인물 | 자이언트 바바 (창업자) |
특기 사항 | 1972년 9월 9일, 전일본 프로 레슬링 주식회사 설립 2012년 11월 1일, 전일본 프로레슬링 시스템즈 주식회사에 업무 계승 2014년 7월 1일, 올 재팬 프로레슬링 주식회사에 업무 계승 |
기타 정보 | |
로마자 표기 | Zen Nihon Puroresu |
2. 역사
1972년 9월 9일, 자이언트 마장(馬場正平)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하여 전일본 프로레슬링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10월 21일, 도쿄도 마치다시 아사히초 체육관(현: 마치다시립 산마치다 아사히 체육관)에서 창립 전야제를 개최했다.
10월 22일, 료고쿠 니치다이 강당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1990년 4월부터 10월에 걸쳐 텐류 겐이치로를 포함한 다수의 선수가 퇴단하여 SWS에 입단하는 제1차 대량 이탈 사건이 발생했다.
1999년 1월 31일, 마장이 사망했다.
5월, 미사와 미쓰하루가 새롭게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2000년 6월, 미사와를 포함한 다수의 선수, 스태프가 퇴단하여 프로레슬링 노아를 설립하는 제2차 대량 이탈 사건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1972년 10월 창립 이후 방영해 온 일본텔레비전의 전일본 프로레슬링 중계가 방영 종료되었다.
7월, 마장의 부인인 마장 모토코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2002년 2월 26일, 신일본 프로레슬링을 퇴단한 무토 케이지, 코지마 사토시, 켄도 카신, WWF를 퇴단한 카즈 하야시가 입단했다.
10월, 무토가 전일본 프로레슬링 주식회사의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또한, 모토코로부터의 주식 양도에 의해 무토가 오너가 되었다.
2011년 5월 29일, 히일 유닛 "VOODOO-MURDERS"의 일부 선수에 의한 스퍼 헤이트(히라이 노부카즈)에 대한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108]
6월, 우치다 마사유키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25]
2012년 11월, '''전일본 프로레슬링 시스템즈 주식회사'''로 운영 회사를 이전했다. 우치다가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하고, 시라이시 노부오가 주식 양도에 의해 오너가 되었다.[27][28][29][111]
2013년 2월, 전년 12월에 노아를 퇴단한 아키야마 준, 시오자키 고, 카나마루 요시노부, 스즈키 코타로, 아오키 아츠시가 프리 참전(7월에 입단)했다.[30]
6월, 무토를 포함한 다수의 선수, 스태프가 퇴단하여 WRESTLE-1을 설립하는 제3차 대량 이탈 사건이 발생했다.[45][46]
8월, 단체 사무소를 분쿄구 유시마로 이전했다.
2014년 7월, '''올 재팬 프로레슬링 주식회사'''로 운영 회사를 이전했다. 또한, 동사의 지주회사로서 '''전일본 프로레슬링 이노베이션 주식회사'''가 설립되었다. 양사의 대표이사 사장으로 아키야마 준(선수명: 아키야마 준)이 취임했다.[63][64]
7월, 단체 사무소를 예전부터 합숙소로 사용하고 있던 가나가와현 요코하마시 아오바구 우츠쿠시가오카니시로 이전했다. 참고로, 과거 사무소는 도쿄도 미나토구 롯폰기나 치요다구 규단키타에 있었다.
2019년 7월, 후쿠다 쓰토무키가 올 재팬 프로레슬링 주식회사의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2020년 7월, 단체 사무소를 분쿄구 유시마로 재이전했다.
2. 1. 자이언트 바바 체제 (1972년 ~ 1999년)
자이언트 바바와 리키도잔의 아들인 미츠오, 요시히로 형제가 이 단체를 설립했다. 전직 프로야구 투수였던 바바는 1960년 일본 프로레슬링 연맹(JWA)에 합류했다. 1972년 10월, JWA를 떠나 자신의 그룹인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결성했다. 9월 9일, 자이언트 마장을 대표이사 사장으로 하여 전일본 프로레슬링 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첫 경기는 10월 21일 일본 도쿄의 마치다 시티 체육관에서 열렸다. 10월 22일에는 료고쿠 니치다이 강당에서 창립전을 개최했다. 창립 멤버에는 바바, 미츠오 모모타, 아키오 사토, 삼손 쿠츠와다, 오쿠마 모토시, 코마 마시오가 포함되었다. 국제 레슬링 기업을 최근에 떠난 썬더 스기야마도 도와주기 위해 합류하여 프리랜서로 몇몇 하위 IWE 레슬러들을 데려왔다. 도리 펑크 시니어, 테리 펑크, 브루노 사마르티노, 도미닉 드 누치, 프레디 블래시, 디스트로이어 등 북미의 몇몇 인물들도 몇몇 경기에 도움을 주었다.바바는 전일본의 모든 미래 타이틀을 위한 지배 기구로 '''태평양 레슬링 연맹'''(PWF)을 설립했다. 초기에 PWF는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과 어떤 지역 출신인지에 따라 외국 스타들에게 부여되는 여러 "지역 챔피언십"을 인정했지만, 전일본이 내셔널 레슬링 얼라이언스(NWA)에 합류한 후 PWF 세계 타이틀은 지역 챔피언십으로 강등되었다. NWA의 충실한 회원으로서 전일본은 외국인을 초청할 수 있었고,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십은 자주 방어되었다. 초기에는 챔피언십에 대해 일본 대 외국인 공식을 계속 사용했지만, 점차 도리 펑크 주니어와 그의 형제 테리 펑크뿐만 아니라 멕시코의 밀 마스카라스가 다른 외국인과 레슬링을 할 때 팬들의 사랑을 받았고, 결국 일본에서 아이콘이 된 몇 안 되는 외국인 레슬러 중 한 명이 되었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NWA 지역 시스템이 붕괴되자, 바바는 국내외 다른 프로모터들과 거리를 두고, 자사에서만 경쟁하는 (일본인과 외국인) 선수들을 육성하는 시스템을 시작했다. 타이틀 통합을 통해 올 재팬의 타이틀이 트리플 크라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과 월드 태그팀 챔피언십으로 통합되고, 점보 츠루타, 겐이치로 텐류, 아키라 타우에, 미쓰하루 미사와, 토시아키 카와다, 켄타 코바시 등의 선수들을 육성하면서 1990년대 내내 충성스러운 팬층을 확보할 수 있었다.

올 재팬은 1998년 5월 1일 도쿄 돔에서 58,300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세 번째로 높은 관객 수를 기록했다.[1] 1992년 3월 4일에는 일본무도관을 처음으로 매진시키며 16,300명의 관중을 기록했다.[2] 올 재팬의 최고 관객 기록은 1999년 5월 2일 자이언트 바바 기념 유료 시청 경기로, 도쿄 돔을 65,000명의 관중으로 매진시켰다.[3]
1990년 4월부터 10월에 걸쳐 텐류 겐이치로를 포함한 다수의 선수가 퇴단하여 SWS에 입단하는 제1차 대량 이탈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바바는 미사와, 카와다, 타우에, 코바시를 새로운 스타로 밀어올릴 수 있도록 했다. 1999년 1월 31일, 마장이 사망했다. 5월, 미사와 미쓰하루가 새롭게 대표이사 사장에 취임했다.
2. 2. 미사와 미쓰하루 체제 (1999년 ~ 2000년)
1999년 1월 31일, 자이언트 바바가 간부전으로 사망하면서, 그의 부인 바바 모토코의 의향에 따라 가족과 측근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병세가 비밀에 부쳐졌다. 같은 해 4월 17일 일본무도관에서 자이언트 바바 추모 행사가 열렸고, 5월 2일에는 도쿄돔에서 "자이언트 바바 은퇴 기념 경기"가 개최되었다.자이언트 바바의 사망 직후, 쓰루타 줌보 역시 현역에서 은퇴하고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2000년 5월 17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간 이식 수술 중 의료 사고로 사망했다.
1999년 5월, 미사와 미쓰하루가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사장으로 취임했다. 그러나 자이언트 바바 생전의 경영 방식과 미사와 미쓰하루가 추구하는 현대적인 스타일의 프로레슬링 간의 차이로 인해, 바바 모토코와의 갈등이 발생했다. 자이언트 바바는 생전에 외국인 선수들에게 많은 수당을 지급했지만, 일본 선수들에 대한 지급은 상대적으로 적었고, 단체의 수익은 모토코의 사업에 사용되기도 했다. 선수들의 치료비도 자이언트 바바의 사비로 충당되는 등, 일본 선수들의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결국 2000년 5월 28일, 미사와 미쓰하루는 이사회의 다수결에 의해 사장직에서 해임되었다. 이후 6월 13일, 미사와 미쓰하루를 비롯한 대부분의 선수와 스태프가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탈퇴하여, 프로레슬링 노아를 설립했다. 이는 일본 프로레슬링 역사에 큰 파장을 일으킨 사건이었다. 프로레슬링 노아는 노아의 방주에서 이름을 따왔으며, 8월 5일과 6일, 도쿄 디퍼 아리아케에서 데뷔전을 치렀다.

일본TV는 27년간 중계해 온 전일본 프로레슬링 방송을 중단하고, 프로레슬링 노아의 중계를 시작했다. 이로 인해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큰 위기를 맞게 되었지만, 후치 마사노부 등의 노력으로 단체를 유지해 나갔다.
2. 3. 바바 모토코 체제 (2000년 ~ 2002년)
미사와 미쓰하루 등 주요 선수들이 프로레슬링 노아를 설립하며 대거 이탈한 후,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선수 부족으로 큰 위기를 맞았다. 자이언트 바바의 부인 바바 모토코는 텐류 겐이치로(Genichiro Tenryu)의 복귀를 발표했는데, 이는 1990년 슈퍼 월드 오브 스포츠(Super World of Sports) 탈퇴 이후 자이언트 바바가 복귀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던 선수였다.선수층이 얇아진 상황에서, 신자키 진생 등 외부 선수들의 영입과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교류를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2000년 8월 10일, 후치 마사노부가 신일본 프로레슬링 무대에 등장하여 양 단체 간의 교류를 선언했고,[6] 이후 선수들이 상호 단체에 출전하며 경기를 치렀다. 가와다 토시아키는 2000년 10월 9일 도쿄돔에서 신일본의 사사키 켄스케를 꺾기도 했다.[6]
2001년 1월 28일, 무토 케이지가 전일본에 처음으로 참전하여 BATT를 결성했다. 무토 케이지는 삼관 헤비급 챔피언과 세계 태그 챔피언을 획득하는 등 활약했다. 그러나 이러한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제휴 관계는 2002년 9월 30일자로 종료되었다.
2. 4. 무토 케이지 체제 (2002년 ~ 2013년)
2002년, 신일본 프로레슬링에서 무토 케이지(武藤敬司), 코지마 사토시(小島聡) 등이 이적해 오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이들은 안토니오 이노키의 격투기 노선에 반발하여 신일본을 탈퇴하고 전일본 프로레슬링으로 이적했다.[35] 무토 케이지는 바바 모토코로부터 사장직을 넘겨받고,바바 모토코의 "정도 프로레슬링"을 버리고 엔터테인먼트 스타일의 프로레슬링을 도입했다.[35] 이는 "프로레슬링 러브" 시대로 불리며,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교류전이 중단되기도 했다.
무토는 사장 취임 후 챔피언 카니발과 월드 스트롱기스트 태그 디터미네이션 리그를 연례 행사로 유지하는 등 전통을 이어갔지만, "밝고, 즐겁고, 격렬하고, 새로운" 프로레슬링을 메인 컨셉으로 하는 "패키지 프로레슬링"을 제창하며 변화를 추구했다.[35]
조니 에이스(ジョン・ロウリネイティス)와의 관계를 통해 자말(エディ・ファトゥ) 등 WWE에서 해고된 레슬러들이 많이 참전하여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전통인 "일본인 선수 대 외국인 선수"를 계승했다.
프로레슬링 ZERO-ONE과의 단체 대항전, 타카 미치노쿠(TAKAみちのく)가 이끄는 "RO&D", 타루(TARU)가 이끄는 "VOODOO-MURDERS" 등과의 대립을 통해 새로운 팬층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
{{다중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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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age1 = Jamal_2003.jpg
| image2 = Taiyō_Kea.jpg
| footer = 자말(우마가)(Jamal (Umaga)) (왼쪽)과 타이요 케아(Taiyō Kea) (오른쪽)는 2000년대 중반 러프리 오브세스 앤드 디스트로이(R.O.D.) 스테이블의 일원으로서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가장 중요한 외국인 선수가 되었다.
}}
A BATHING APE와의 콜라보레이션, 팬 감사제, F-1 태그 챔피언십 등 팬들을 위한 다양한 이벤트를 개최했다. 나츠메 나나(夏目ナナ)의 프로듀스 공연이나[107] 요시자와 아케호(吉沢明歩) 등이 참가한 섹시 여배우와의 콜라보 공연을 개최하기도 했다.
후지텔레비(フジテレビジョン)가 프라임 타임에 "판타지 파이트 WRESTLE-1"을 방송했지만, 프로레슬링 중계보다는 밥 샙(ボブ・サップ)을 중심으로 한 프로그램으로 방송되었다.
무토 쥬쿠를 통해 프로레슬러식 트레이닝 방법과 영양학을 공개하고, 신인 오디션을 개최하기도 했다.
요요기 제2 체육관과 료고쿠 국기관에서의 공연 "프로레슬링 LOVE in 료고쿠"를 제작 위원회 방식으로 개최하고, 도쿄TV(テレビ東京)에서 "프로레슬링 LOVE ~밤의 샤이닝 임팩트~"를 방영했다.
지바텔레비(千葉テレビ放送)에서 "전일본 프로레슬링 마더"가 방송을 시작했고, GAORA와 FIGHTING TV 사무라이에서도 중계되었다.
프로레슬링 노아와의 교류는 2004년 7월 무토와 미사와의 태그 매치를 통해 재개되었고, 이후 미사와가 4년 만에 전일본에 복귀했다.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교류는 2003년부터 재개되어, 2005년에는 IWGP 헤비웨이트 챔피언과 트리플 크라운 헤비웨이트 챔피언 간의 사상 최초의 W 타이틀 매치가 류고쿠 국기관에서 열렸다.
2006년 사사키 켄스케의 데뷔 20주년 기념 공연에 전일본과 노아가 협력했다.
2009년2월 6일, 카즈와의 선수권 시합에서는 흥행 사상 처음으로 주니어 헤비급의 선수권 시합이 메인으로 행해졌다.
2011년, 동일본대지진 발생 후 신일본, 노아와의 관계가 개선되어 교류가 부활했다.
2011년 5월, 슈퍼 헤이트(平井伸和)가 경기 후 "급성 경막하혈종" 진단을 받고 긴급 수술을 받았다. VOODOO-MURDERS의 리더 TARU(다류 요이치)가 슈퍼 헤이트를 폭행한 사실이 밝혀져 무기한 출장 정지 처분을 받았고,[108] 이 사건으로 인해 무토 케이지가 사장직에서 물러나고 우치다 마사유키가 사장으로 취임했다.[25]
2012년, 전일본 프로레슬링과 가오라 TV는 가오라 TV 챔피언십을 도입한다고 발표했다.
"프로레슬링 러브"라는 이름과 테마는 2013년 7월 5일에 폐지되어 해당 시대가 끝났다.[26]
2. 5. 시라이시 노부오 체제 (2012년 ~ 2014년)
2012년 11월 1일, IT 기업 스피드 파트너스(후에 하치조보리 투자로 사명 변경) 사장 시라이시 노부오가 무토 케이지와 가오라 TV 등으로부터 전일본 프로레슬링의 모든 주식을 2억 엔에 매입하며 오너가 되었다.[27][28][29][111] 기존의 전일본 프로레슬링 주식회사는 콘텐츠 저작권 관리 등의 역할만 남기고, 전일본 프로레슬링 시스템즈가 사업을 이어받아 새로운 운영 회사가 되었다. 시라이시는 페이스북에서 과격한 발언을 반복하여 신일본 프로레슬링 등 외부 인사들의 항의를 받았고, 이는 전일본 프로레슬링 분열 및 신일본과의 관계 악화의 원인이 되었다.2013년 6월 1일, 시라이시는 신임 사장에 취임했고,[112] 무토 케이지는 이사회장직을 사임하고 전일본을 퇴단했다.[113] 무토 측은 시라이시와 주식 매입 협상을 했으나 결렬되었고, 후나키 마사카츠, 코노 마사유키, 카이, 사나다 세이야, 하마 료타, 타나카 미노루, 카즈 하야시, 곤도 슈지, 야마토 히로시, 앤디 우 등 다수의 선수와 스태프가 퇴단을 표명했다.[114] 이들은 7월 10일 신단체 레슬-1을 창단하였다.[45][46]
반면, 오모리 타카오, 스와마, 조 도링 등은 전일본에 잔류했고, 태양 케어, 와다 쿄헤이는 제한적으로 복귀 의사를 밝혔다.[115] 7월 5일, 아키야마 준, 시오자키 고, 가네마루 요시노부, 스즈키 코타로, 아오키 아쓰시가 정식 선수로 입단했고(아키야마, 가네마루는 13년 만의 복귀),[30] 와다 쿄헤이는 명예 레퍼리로 복귀했다. 7월 14일에는 후치 마사노부가 이사 컨설턴트로 잔류했다.[116] 9월 1일에는 아케보노 다로가 입단했다.[117]
시라이시는 다른 단체에 대해 도발적인 태도를 보여 프로레슬링 ZERO1, 대일본 프로레슬링 등과의 교류가 중단되고, DDT, 드래곤 게이트, KAIENTAI-DOJO 등과 교류하게 되었다. 2013년 8월 1일, 시라이시는 스피드 파트너스사의 모든 주식을 매각하고, 전일본 프로레슬링 시스템즈를 자신의 자산 관리 회사인 주식회사 레드월 재팬으로 이전했다.[118] 9월 11일, 이노우에 히로타가 대표로 승격하고 시라이시는 오너로서 후방 지원을 계속했다.[119]
2. 6. 아키야마 준 체제 (2014년 ~ 2020년)
2014년 6월 5일,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7월 1일부로 기업 구조조정을 발표했고, 아키야마 준이 새로운 사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63][64] 7월 1일, 회사는 사명을 "전일본 프로레슬링 주식회사"(일본어 명칭 "전일본 프로레슬링" 제외)로 변경하고 본사를 도쿄에서 요코하마로 이전했다.[65] 아키야마는 새로운 회사인 전일본 프로레슬링 이노베이션을 설립하여 새로운 전일본 프로레슬링을 운영하게 되었으며, 대표이사를 역임하며 이사회에 보고하는 체계를 갖추었다. 바바 모토코도 자문으로 참여했다.[66][67][68] 아키야마 준 체제는 과거 자이언트 바바 체제의 노선으로 회귀를 시도했다.하지만 아키야마 준의 단체 운영에 대한 부정적인 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2015년에는 시오자키 고, 스즈키 고타로, 가네마루 요시노부가 전일본을 탈퇴했다.[69][71][72] 아케보노 타로도 단체를 탈퇴하며[70] 위기를 맞았다. 선수들의 이탈은 전일본 프로레슬링이 선수 계약을 출전료 기반 계약으로 변경했기 때문이었다.[73]
이러한 위기 속에서도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Wrestle-1, 카이엔타이 도장 등 다른 독립 단체들과 활발한 교류를 추진하고, 미야하라 겐토, 제우스 등을 정식 소속으로 영입하며 선수층을 보강했다. 신인 선수 육성과 외부 단체 선수 참전을 통해 일본 현지 팬들에게 좋은 반응을 얻으며 운영되었다.
2015년, 스와마는 IGF의 후지타 카즈유키와의 대결을 희망하며 IGF 대회에 참가해 어필했지만, IGF 측은 교류를 회피했다. 대일본 프로레슬링과의 교류는 2015년 12월 20일 스와마가 대일본 프로레슬링 행사에 출전하면서 재개되었다. 2016년에는 대일본 프로레슬링과 다시 교류를 진행, 양 단체의 젊은 선수들을 중심으로 한 합동 행사를 매달 1회 번갈아 개최했다.
2016년 5월 4일 WRESTLE-1 후라쿠엔 홀 대회에서 무토 케이지가 아키야마 준을 대결 상대로 지명했고, 8월 11일 WRESTLE-1 요코하마 문화체육관 대회에서 무토와 태그팀으로 대결했다. 7월 20일에는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프로레슬링 NOAH의 공동 주최로 열린 제6회 "슈퍼 J컵"에 아오야기 유마가 출전했다. 이후 2017년 4월 13일 라이온즈 게이트에서 아오야기 유마와 이와모토 코우스케가 출전하여 자도 & 게도와 대결하며 신일본 프로레슬링과의 교류가 재개되었다.[6]
2016년 10월, 전일본 프로레슬링은 일본 BS 방송과 하이라이트 프로그램 "일레븐"에 대한 계약을 체결했다.[74] 2016년 11월 27일에는 3년 만에 료고쿠 국기관에서 이벤트를 개최했다.[75]
프로레슬링 NOAH와는 직접적인 교류가 없었지만, 2018년 챔피언 카니발에 마루후지 나오미치가 출전하면서 교류가 재개되었다. 2018년 3월 19일에는 인터넷 동영상 배포 사이트 "전일본 프로레슬링 TV" 서비스를 시작했다.[77]
2019년 6월, 아오키 아츠시가 불의의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전일본은 6개월 동안 아오키를 챔피언으로 인정하고, 그 사이에는 챔피언십 경기를 하지 않기로 했다.[133]
2019년 10월 10일, 아키야마 준은 사장직에서 물러나 사장 직무대행이 되었고,[78] 이후 후쿠다 쓰토무키가 전일본 프로레슬링 사장으로 취임했다.
2. 7. 후쿠다 쓰토무키 체제 (2020년 ~ 현재)
2020년, 전일본 프로레슬링(AJPW) 사장 후쿠다 쓰토무키(福田綴己)는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해 2020 챔피언 카니발을 취소하고, 2AW의 2AW 스퀘어 경기장에서 무관중 경기를 시작했다.[79] 6월에는 아키야마 준(秋山準)이 DDT 프로레슬링(DDT Pro-Wrestling)으로 이적하며 프로모션 운영을 후쿠다 쓰토무키에게 이관했다.[79] 11월에는 AJPW TV 6인 태그팀 챔피언십을 신설하고,[79] 여성 부문 "에볼루션 걸스(Evolution's Girls)"를 출범하여 Ice Ribbon과의 협력을 통해 후지모토 쓰카사/藤本つかさ일본어를 고문으로 임명했다.[79]2021년에는 일본 정부의 긴급사태 선언 연장으로 이벤트가 연기되기도 했지만, 트리플 크라운 헤비웨이트 챔피언십을 도모에 배틀(Tomoe Battle) 방식으로 결정하며 1997 챔피언 카니발 이후 처음으로 세 명의 레슬러 간의 연속적인 싱글 매치를 진행했다.[79] 10월에는 제우스(Zeus)가 오사카 프로레슬링(Osaka Pro Wrestling)의 주식을 매입하며 전일본을 떠났고,[79] 노무라 나오야와 이와모토 코지도 계약 만료로 프로모션을 떠났지만, 노무라는 2022년 6월 복귀했다.[79]
2022년 7월, AJPW는 일본무도관(Nippon Budokan)에서 50주년 기념 이벤트를 개최하며 18년 만에 복귀했다.[79] 같은 해 9월 18일 일본무도관 대회에는 AEW의 크리스토퍼 다니엘스가 참전했다.[161]
2023년에는 유나이티드 재팬 프로레슬링(United Japan Pro-Wrestling)의 창립 멤버로 참여하고,[79] GLEAT와의 전면 대항전을 개최했다. 또한 신일본 프로레슬링과 노아의 합동 대회 "ALL TOGETHER AGAIN"에 미야하라 겐토가 참가했고, 안자이 유마는 노아의 리그전 "N-1 VICTORY"에 출전했다.[160] 12월에는 MLW 소속의 데이비 보이 스미스 주니어가 참전했다.[162]
2024년에는 WWE・NXT 소속의 찰리 뎀프시가 삼관에 도전하고,[162] EC3가 NWA 세계 헤비급 챔피언 방어전을 치르는 등 해외 단체와의 교류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162] 특히, NWA 세계 헤비급 타이틀 매치는 1989년 이후 35년 만에 전일본 프로레슬링에서 개최되었다.
하지만 2023년 후반부터 오오모리 타카오, 요시-타츠, 이시카와 슈지, 블랙 멘소레 등 주력 선수들과 스태프들이 퇴단하는 상황이 발생했다.[148][149][150][151] 이는 여자 단체 Actwres girl'Z와의 갑작스러운 업무 제휴 발표 등 후쿠다 고우키(福田剛紀) 사장의 일방적인 운영 방침과 언행에 대한 불신이 원인으로 지적되었다.[148][149][150][151] 또한, 사이먼 켈리의 존재가 단체 내 혼란을 야기한다는 의혹도 제기되었다.[148][149][150][151] 2024년 3월에는 요시에 유타카가 경기 후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기도 했다.[152]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2024년 4월 이후 아야베 렌,[153] MUSASHI,[154] 니토 유지[155]가 입단하고, NEXTREAM 해산 및 ELPIDA 결성 등 새로운 세대 투쟁이 시작되고 있다.
3. 챔피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