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 (동오)
1. 개요
정병은 후한 말 ~ 삼국 시대 동오의 유학자이다. 정현의 제자로서 교주로 피란하여 유희와 함께 오경에 통달했고, 사섭에게 장사로 등용되었다. 손권에게 태자태부로 초빙되어 손등의 혼례를 주관했으며, 진수는 그를 엄준, 감택과 함께 당대의 학자로 평가했다. 저서로는 《주역적》, 《상서박》, 《논어필》 등이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에게 항복을 주장하거나 유비에게 사자로 파견되는 인물로 묘사된다.
| 이름 | 정병 |
|---|---|
| 본관 | 불명 |
| 자 | 덕추(德樞) |
| 출생지 | 양성(襄城) |
| 사망지 | 미상 |
| 섬긴 세력 | 손권 |
|---|---|
| 주요 관직 | 오군도독(吳郡都督) 태자태부(太子太傅) |
| 주역선(周易 selections from the Book of Changes) 상서대론(尙書大論 Discussions on the Book of History) 논어지귀(Guide to the Analects) |
| 부모 | 미상 |
|---|---|
| 배우자 | 미상 |
| 자녀 | 미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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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삼국 시대의 유학자 -
왕필
왕필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관료이자 현학 연구가로, 『노자』와 『주역』에 대한 주석을 통해 중국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하안의 사상을 비판하며 자신만의 철학적 견해를 드러냈고, 젊은 나이에 요절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사상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중국 삼국 시대의 유학자 -
위소
위소는 삼국시대 오나라의 학자이자 관료로서, 손량, 손휴, 손호 3대에 걸쳐 벼슬을 지냈으며 《오서》 편찬을 주도하고 손호에게 직언을 하다 처형당했지만, 《국어주》 등의 저서를 남겼다. -
동오의 정치인 -
사일
사일은 후한 말부터 삼국시대 초 교주 지역에서 활동하며 정궁을 보좌하여 두각을 나타냈고 합포 태수를 역임했으나, 손권에게 귀순 후 사휘의 반란에 연루되어 처형당하며 격변기의 사씨 가문의 흥망성쇠를 보여주는 인물이다. -
동오의 정치인 -
제갈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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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년 미상 -
유급
유급은 전한 말기에 신양후에 봉해졌으나, 전한 멸망으로 작위를 잃은 유영의 아들이다. -
생몰년 미상 -
야스케
야스케는 16세기 일본에 기록된 최초의 아프리카인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가신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며, 혼노지의 변에서 함께 싸웠으나 이후 행적은 불확실하고, 다양한 대중문화 작품에서 소재로 활용된다.
2. 생애
정현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이후 난을 피해 교주로 피난하여, 유희와 함께 경전의 대의를 논하며 오경에 통달하게 되었다. 교지 태수 사섭에게서 장사로 등용되었다.
손권은 정병이 이름 높은 유학자라는 소문을 듣고 예를 갖추어 초빙하여 태자태부로 삼았다. 황무 4년(225년), 손권이 선태자의 아내로 주유의 딸을 맞이하면서 정병에게 태상을 맡아 오군에서 태자비를 데려오게 하였다. 손권은 친히 정병의 배에 탔다. 정병은 돌아온 후 선태자에게 조용히 혼인의 소중함을 강조하고 규방에서도 예의와 교화를 존숭하기를 권했으며, 선태자는 이를 좋게 여겼다. 재직 중에 병으로 죽었다.
정병은 《삼국지》에 열전이 수록된 인물들 중, 자신의 열전을 제외한 어떤 곳에도 기록이 없는 유일한 인물이다. 진수는 "엄준, 감택과 더불어 일대의 학자였다"고 평했다.
정병은 평생 동안 《주역》에서 발췌한 《주역적(周易摘)》, 《상서》에 대한 논의를 담은 《상서박(尚書駮)》, 그리고 《논어》를 안내하는 《논어필(論語弼)》 등 세 가지 주요 저작을 남겼다.
3. 저술
《주역적(周易摘)》, 《상서박(尚書駮)》, 《논어필(論語弼)》 등 3만여 말의 저서를 남겼다.
4. 평가
진수는 엄준, 감택과 함께 정병을 한 시대의 유자로 평가했다. 정병은 정현에게 학문을 배웠고, 난을 피해 교주의 사섭에게 의탁했다. 교지에서 유희와 함께 학식을 쌓아 오경에 통달하게 되었고, 사섭으로부터 장사에 임명되었다.
이후 학자로서 명성을 얻어 손권의 초빙을 받아 막료가 되었고, 태자 손등의 교육 담당인 태자태부를 맡았다. 225년(황무 4년), 손등의 혼례 때에는 태상이 되어 손등의 비 (주비)를 맞이하는 역할을 맡았다. 손권과 손등에게 정중한 대우를 받았으며, 병으로 인해 재관으로 있던 중 사망했다.
정병은 『주역적』, 『상서박』, 『논어필』 등 3만 자가 넘는 저서를 남겼다. 진수는 "엄준, 감택과 더불어 일대의 학자였다"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