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현 (후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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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현은 후한 시대의 학자로, 금고문과 고문 경학을 아울러 연구하여 훈고학을 집대성했다. 낙양 태학에서 수학하고 마융에게 사사했으며, 당고의 금으로 인해 고향에서 학문을 연구했다. 이후 하진, 공융 등의 초빙을 받았으며, 황건적의 난을 피해 서주로 피난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원소에게 초빙되었으나, 관도 전투 중에 병으로 사망했다. 그의 학문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특히 예학 연구와 청대 고증학에서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도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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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충은 후한 시대의 사상가이자 유물론 철학자로, 참위설과 음양오행설을 비판하며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태도를 강조하고 경험적 인식과 논리적 추론을 중시하는 사상을 담은 《논형》을 저술하여 중국 철학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한나라의 유학자 - 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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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태는 후한 시대의 학자로, 굴백언에게 학문을 배우고 이응과 교류하며 명성을 얻었으며, 사도 황경의 초빙을 거절하고 교육에 전념하여 제자 1,000명을 배출했으며, 채옹은 그의 비문만이 부끄럽지 않다고 평했다. - 당고의 화 - 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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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 (후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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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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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정현 (鄭玄) |
자 | 강성 (康成) |
시호 | 선정군 (先鄭君) |
생몰년 | 약 127년 ~ 약 200년 |
출생지 | 중국 산둥성 웨이팡시 |
사망지 | 중국 |
생애 | |
학문 | 경학 연구에 몰두함. 후한 시대의 대표적인 유학자 중 한 명 |
스승 | 경학을 장우에게, 고문경학을 마융에게 사사 |
사상적 영향 | 정현의 경학은 후대 유학에 큰 영향을 미침. 위진 시대 왕숙과 함께 경학의 양대 산맥을 이룸 |
저서 | 주례주 (周禮注) 의례주 (儀禮注) 예기주 (禮記注) 모시전 (毛詩傳) 상서대전 (尚書大傳) 효경주 (孝經注) 논어주 (論語注) 건위도 (乾緯度) 자찬 (字贊) |
주요 업적 | 고문경학과 금문경학을 융합하여 경학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열음. 방대한 주석을 통해 유교 경전의 이해를 심화시킴. 후한 말 혼란기에 학문을 보존하고 발전시키는 데 기여함.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정탁 (鄭卓) |
아들 | 정익 (鄭益) |
손자 | 정소 (鄭韶) |
기타 | |
관련 인물 | 하휴 노식 최원 마일제 손숭 왕랑 관녕 화흠 병원 조기 국옹 서간 |
2. 생애
정현은 8대조 애제 시대에 상서 복야까지 승진한 정숭의 후손이다. 정숭 이후 선조는 잠시 평릉에 거주했지만, 수대 후에 고밀로 돌아왔다. 정현의 집안은 넉넉하지 못하여, 지방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작은 관리 일을 했다. 정현은 관리 일에 열심이지 않았으므로 아버지는 화를 냈지만, 학문을 금지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5]
정현은 학문에 정진하여 당대 최고의 학자로 이름을 날렸지만, 정치적 격변 속에서 순탄치 않은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당고의 화로 인해 학문 활동에 제약을 받았고, 이후 황건적의 난 등 혼란스러운 시기를 겪으며 여러 지역을 떠돌아다녀야 했다.
정현의 문인으로는 희려, 왕기, 최염 등이 있다. 국연과 임가가 어렸을 때, 정현은 "두 사람은 성장하여 훌륭한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고, 훗날 적중했다.[22] 유비가 서주를 다스릴 때, 문인인 손건을 등용하기도 했다. 유비 또한 정현에게 가르침을 받았으며, 훗날 가신인 제갈량에게 "지금까지 진기와 정현 선생의 문하에 나아가 늘 정치에 대한 훌륭한 가르침을 받았지만, 대사(大赦)에 대한 이야기는 두 분 모두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라고 말하며, 해마다 대사를 시행했던 유표와 유장 등을 비판했다.[23]
2. 1. 수학 시대
젊을 적부터 금고문(今古文)의 경학 외에 천문역수(天文曆數)에 걸쳐 광범위한 지식욕을 갖고 낙양의 태학(太學)에 진학하였다. 이후 당시 최고의 학자 마융을 사사(師事)하고 수년 후 향리에 귀환할 때 선생으로부터 “나의 학문은 정현과 함께 동으로 갔다”고 탄식할 정도로 면학하였다. 유학(遊學) 십여 년에 향리의 학생을 교수하였다.13세(영화 4년) 때 오경을 암송하고, 천문·점술 등을 배웠다.[6] 21세에는 널리 전적을 익히고, 역수도위의 서적과 산술을 익혔다.[7]
그 후, 태학에 유학했다. 경조의 제오원에게서 『경씨역』, 『공양춘추』, 『삼통력』, 『구장산술』을 배웠다. 더 나아가 동군의 장공조에게서 『주관』, 『예기』, 『좌씨춘추』, 『한시』, 『고문상서』를 배웠다.[8] 유학한 연령에 대해서는 『정현별전』에는 21세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은 『후한서』 정현전에 "정현은 유학하고 나서, 십여 년 만에 향리로 돌아왔다", "나이가 40을 넘겨, 고향에 제사를 지내러 돌아왔다"[9]라는 것과 맞지 않는다.
그리고 정현은 노식의 소개로, 당시 일류 유학자였던 마융의 문하에 유학했다.[10] 마융은 400명의 제자를 거느린 대학자였지만, 자만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정현은 3년간 마융을 만나지 못하고, 그 제자에게 지도를 받았다. 후에 마융과의 대면이 겨우 이루어진 정현은, 마융의 질문에 잘 대답했기 때문에, 마융에게 감탄을 받았다. 정현이 향리로 돌아가게 되었을 때, 마융은 이를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11]
2. 2. 귀향과 당고의 화
정현은 젊은 시절 낙양의 태학에서 마융을 스승으로 모시고 학문을 배웠다. 십여 년간 유학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당고의 화로 학문이 금고(禁錮)되자, 문을 닫고 집에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5]40세가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를 받아 학문을 지도했다. 생활은 가난하여 동래에서 밭을 갈았는데, 수백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동행했다.[12] 당시 정현은 학숙을 유지하고 경영하기 위해 학생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연구와 생산 노동을 함께 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고의 금이 일어나, 같은 군(郡)의 손송(孫嵩) 등 40명 정도가 금고 처분을 받자, 정현도 그 영향을 받아 문을 닫고 외출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건녕 4년(171년) 정현이 45세 때의 일로, 그 후 당고가 해제된 중평 원년(184년)까지 정현은 학숙을 경영하면서 『주례(周禮)』, 『의례(儀禮)』, 『예기(禮記)』에 대한 주석을 집필했다. 이 무렵 하휴(何休)는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했는데, 정현은 이들 저서에 반론을 제기했고, 이에 하휴는 정현의 학식에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3]
2. 3. 유랑과 귀환
젊을 적부터 경학 외에 천문역수(天文曆數)에 걸쳐 광범위한 지식욕을 갖고 낙양의 태학(太學)에 진학하였다. 이후 당대 최고의 학자 마융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수년 후 고향으로 돌아갈 때 스승이 “나의 학문은 정현과 함께 동쪽으로 갔다”고 탄식할 정도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10여 년간 유학하며 고향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당고의 화로 학문이 금지되자 문을 닫고 집에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14년 후 금지가 풀리면서 하진, 공융, 동탁, 원소 등에게 초빙받았다. 만년에 초빙에 응해 대사농이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떠나 연구와 교육에 생애를 바쳤다.[5]40세가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를 받아 학문을 지도하였다. 생활은 가난하여 정현은 동래에서 밭을 갈았는데, 이에 수백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함께하였다.[12]
당고의 금이 일어나 같은 군(郡)의 손송(孫嵩) 등 40명 정도가 금고 처분을 받자, 정현도 그 영향을 받아 문을 닫고 외출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건녕 4년(171년), 정현이 45세 때의 일로, 그 후 당고가 해제된 중평 원년(184년)까지 정현은 학숙을 경영하면서 『주례』, 『의례』, 『예기』에 대한 주석을 집필하였다. 이 무렵 하휴(何休)는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했는데, 정현은 이들 저서에 반론을 제기했고, 이에 하휴는 정현의 학식에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3]
정현이 58세 때 당고의 금이 해제된 이후, 정현은 비참한 유랑 생활을 해야 했다.
중평 3년(186년), 하진이 정현을 초빙하려 하였다. 주군이 하진의 권위를 방패 삼아 정현을 위협했기 때문에, 정현은 어쩔 수 없이 초빙을 받아들였다. 하진이 정현을 후하게 대우하며 정중히 대했지만, 정현은 하룻밤만 묵고는 곧 도망쳤다.[14] 중평 5년, 원외가 정현을 시중에 임명하려 하자, 정현은 아버지의 상을 이유로 사퇴했다.[15]
같은 해, 황건적의 난을 피해 학숙을 고밀에서 동래의 불기산으로 옮겼다. 이듬해, 공융의 지원을 받아 다시 고밀로 돌아왔다. 당시의 유력자였던 공융은 정현을 깊이 존경하여 저택을 건축하고, 정현을 위해 고밀현에 포고를 내려 '정공향'이라는 향을 특별히 설치하게 했다고 한다.[16]
초평 2년(191년),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하자, 공경들은 정현을 조나라의 상으로 천거했지만, 길이 끊겨 명령이 정현에게 닿지 않았다. 이때 청주에서 황건의 잔당이 봉기하여, 정현은 서주로 피난하여 서주목 도겸의 보호를 받았다.[17]
건안 원년(196년), 정현은 서주를 떠나 고밀현으로 돌아왔다. 도중에 황건적 잔당 수만 명과 마주쳤지만, 도적들은 정현을 보자 모두 엎드려 절을 했고, 서로 현 경계에 침입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그 후, 정현은 병이 깊어져 아들에게 글(계자서)을 남겼다.[18]
2. 4. 사망
건안 5년, 원소는 정현을 빈객으로 초빙했다. 원소는 정현을 무재로 천거하고 좌중랑장에 임명하려 했으나, 정현은 모두 사퇴했다. 이윽고 대사농으로 추천되었지만, 정현은 병을 이유로 집으로 돌아갔다.[19] 이 무렵, 꿈에 공자가 나타나 정현은 자신의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내 눕게 되었다. 이때는 원소와 조조가 관도에서 다투던 시기였으며, 원소는 아들 원담에게 명하여 정현을 수군시키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정현은 원성현에 이르러 병이 깊어져, 그 해 6월에 사망했다.[20] 향년 74세였다. 장례는 박장으로 할 것을 유언했다고 한다.[21]3. 학문
정현은 금문학(今文學)과 고문학을 겸수하여 수많은 경서에 주석을 저술한 후한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특히 『주례』, 『의례』, 『예기』에 대한 정현의 주석은 "삼례주"(三禮注)로 총칭되며, 현재도 그 지위를 잃지 않고 있다.
정현은 13세(영화 4년)에 오경을 암송하고, 천문·점술 등을 배웠으며,[6] 21세에는 널리 전적을 익히고 역수도위의 서적과 산술을 익혔다.[7] 그 후 태학에 유학하여 경조의 제오원에게서 『경씨역』, 『공양춘추』, 『삼통력』, 『구장산술』을 배웠고, 동군의 장공조에게서 『주관』, 『예기』, 『좌씨춘추』, 『한시』, 『고문상서』를 배웠다.[8] 유학 연령에 대해서는 『정현별전』에는 21세라고 되어 있지만, 『후한서』 정현전에 "정현은 유학하고 나서, 십여 년 만에 향리로 돌아왔다", "나이가 40을 넘겨, 고향에 제사를 지내러 돌아왔다"[9]라는 기록과 맞지 않아, 청나라 고증학자 정진은 20세가 넘어 관리를 맡고 25세 무렵에 태학 유학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현은 노식의 소개로 당시 일류 유학자였던 마융의 문하에 유학했다.[10] 마융은 400명의 제자를 거느린 대학자였지만, 자만심이 강한 성격이었다. 정현은 3년간 마융을 만나지 못하고 그 제자에게 지도를 받았다. 후에 마융과 대면한 정현은 마융의 질문에 잘 대답하여 그를 감탄시켰다. 정현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마융은 이를 매우 아쉬워했다고 한다.[11]
당고의 금이 일어나 동군(同郡)의 손송(孫嵩) 등 40명 정도가 금고 처분을 받자, 정현도 그 영향을 받아 문을 닫고 외출하지 않게 되었다. 이는 건녕 4년(171년), 정현이 45세 때의 일로, 그 후 당고가 해제된 중평 원년(184년)까지 정현은 학숙을 경영하면서 『주례』, 『의례』, 『예기』에 대한 주석을 집필했다. 이 무렵 하휴(何休)는 공양학(公羊學)을 좋아하여 『공양묵수(公羊墨守)』, 『좌씨고황(左氏膏肓)』, 『곡량폐질(穀梁廢疾)』을 저술했는데, 정현은 이들 저서에 반론을 제기했고, 이에 하휴는 정현의 학식에 감탄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13]
정현은 상서, 모시, 주례, 의례, 예기, 논어, 효경 외에 상서대전, 위서에도 주석을 붙였다. 저작으로는 『노례체합의』, 『육예론』, 『모시보』 외에 허신에게 반론한 『박오경이의』, 하휴에게 반론한 『발묵수』, 『침고황』, 『석폐질』 등이 있다. 또한, 정현의 제자가 정현과의 문답을 정리하여 『정지』를 만들었다.[25] 이 중 완전한 형태로 현존하는 것은 『모시』에 대한 주석(정현전)과 삼례(『주례』, 『의례』, 『예기』)에 대한 주석이다. 이 밖의 저작도 다른 책에서 인용된 산실된 문헌을 모으는 집일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며, 그 일부를 엿볼 수 있다.
3. 1. 학문적 방법
전한의 경학은 금문학(今文學)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하나의 경전(一經)을 전공하고 스승의 학설(師說)을 엄격히 지키는 경향이 강했다. 특히 공양가(公羊家)를 중심으로 체계적인 교학(體制敎學)이 관학(官學)으로 자리 잡았다. 그러나 후한 시대에 들어서면서 고문학이 새롭게 주목받기 시작했고, 원문의 이동(移動)을 중시하는 훈고(訓詁) 해석 방법을 통해 여러 경전(數經)을 함께 연구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정현은 고문학을 중심으로 연구하면서도 금문학의 참위설 등을 종합하여 자신만의 학문 체계를 확립했다. 그는 훈고를 통해 모든 경전을 통일적으로 해석하는 작업을 완성하여, 한나라와 당나라 시대 훈고학의 기준을 제시하고 경학의 권위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24]'''정현'''은 금문과 고문을 모두 익혀 수많은 경서에 주석을 단, 후한 시대를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이다. 특히 『주례』, 『의례』, 『예기』에 대한 정현의 주석은 "삼례주"(三禮注)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전한 시대에는 금문학이 널리 퍼져 하나의 경전을 전수하고 스승의 학설을 계승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후한 시대에 들어 마융을 필두로 고문학이 발전하면서, 한 사람이 여러 경전을 함께 공부하는 등 학풍에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시기에 등장한 정현은 다양한 경전을 폭넓게 연구하며 금문과 고문의 여러 학설을 통합하여 독자적인 학설을 수립했다.
정현의 학문 방법은 텍스트를 교정하고 훈고학적 기술을 활용하는 등 여러 특징을 보이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점은 특정 경서를 주석할 때 반드시 다른 경서를 인용하여 논지를 뒷받침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그는 각 경서가 서로를 보완하며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러한 접근 방식에는 주석을 통해 경학의 완전하고 오류 없는 세계를 구축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평가된다. 더불어 정현은 《주례(周禮)》를 특히 중요하게 여겨 예학(禮學)의 중심에 두고 이해했다.
4. 가계
정현의 8대조는 전한 애제 때 상서 복야를 지낸 정숭이다. 정숭 이후 선조는 잠시 평릉에 거주했지만, 수대 후에 고밀로 돌아왔다. 정현의 집안은 유복하지 않아, 정현은 지방에서 세금을 징수하는 하급 관리로 일했다.[5]
5. 영향
정현은 금문과 고문을 모두 아울러 수많은 경서에 주석을 달아 후한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특히 『주례』, 『의례』, 『예기』에 대한 정현의 주석은 "삼례주"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그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정현은 텍스트 교정과 훈고학적 기술을 활용하여 주석을 작성했는데, 특히 어떤 경서를 주석할 때 반드시 다른 경서를 인용하여 증명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를 통해 경서들이 서로 보완하며 모순되지 않음을 보이려 했고, 주석을 통해 경학의 완전한 체계를 구축하고자 했다.[24] 정현은 특히 《주례》를 예학의 중심으로 삼았다.
정현은 『모시』, 삼례(『주례』, 『의례』, 『예기』) 외에도 상서, 논어, 효경, 상서대전, 위서 등 다양한 경전에 주석을 달았다. 저서로는 『노례체합의』, 『육예론』, 『모시보』, 허신에게 반론한 『박오경이의』, 하휴에게 반론한 『발묵수』, 『침고황』, 『석폐질』 등이 있다. 또한, 정현의 제자가 문답을 정리한 『정지』가 있다.[25] 이 중 『모시』 주석(정현전)과 삼례주는 현존하며, 다른 저작들은 다른 책에 인용된 형태로 일부 전해진다.
정현의 경전 해석은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예학 연구에서 정현의 주석은 당, 송 시대는 물론이고, 청대 고증학에서도 중요한 자료로 활용되었다.
6. 대중문화 속 정현
정현은 소설 《삼국지연의》 22장에 등장하는데, 이는 한 왕조의 멸망과 뒤이은 삼국 시대를 극화한 것이다. 정현은 서주에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유비는 정현에게 원소에게 편지를 써서 군벌 조조에 대항하는 동맹을 제안하도록 부탁한다.[5]
유비가 원술을 토벌한 후, 조조로부터 자립하여 원소와 손을 잡는 데 협력하고, 의뢰를 받아 원소에게 추천장을 써준다. 원소는 원술을 토벌한 유비를 원망했지만, 정현의 편지를 보고 유비에 대한 태도를 바꾸어 동맹 관계를 맺게 된다.[5]
- 삼국지 외전 「정현」(소설, 궁성곡 창광, 문예춘추)
7. 관련 자료
- 鄭氏佚書|정씨일서중국어 (원균집(袁鈞輯) 저)
- 通德遺書所見錄|통덕유서소견록중국어 (공광림(孔廣林) 저)
- 漢學堂叢書|한학당총서중국어 (황석(黃奭) 저)
- 鄭志|정지중국어 (정현의 언행록, 제자들이 묶음)
- David R. Knechtges영어의 Ancient and Early Medieval Chinese Literature: A Reference Guide, Part Four|고대 및 초기 중세 중국 문학: 참고 안내서, 파트 4영어
- 《후한서》 정현 열전, 《정현별전》(실서)
참조
[1]
서적
Book of the Later Han
Houhanshu
0200-06-30
[2]
서적
Houhanshu
[3]
서적
Classicism, politics, and kingship: the Chang-chou school of New Text Confucianism in late imperial China
[4]
서적
入門 中国思想史
勁草書房
[5]
서적
後漢書
[6]
서적
世説新語
[7]
서적
世説新語
[8]
서적
後漢書
[9]
서적
後漢書
[10]
서적
後漢書
[11]
서적
後漢書
[12]
서적
後漢書
[13]
서적
後漢書
[14]
서적
後漢書
[15]
서적
後漢書
[16]
서적
後漢書
[17]
서적
後漢書
[18]
서적
後漢書
[19]
서적
後漢書
[20]
서적
英雄記
[21]
서적
後漢書
[22]
서적
後漢書
[23]
서적
華陽国志
[24]
서적
中国思想辞典
研文出版
[25]
서적
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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