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근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갈근은 랑야군 양두현 출신으로, 동오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이다. 유교 경전을 수학하고 효심으로 명성을 얻었으며, 손권의 매형의 추천으로 손권을 섬기게 되었다. 손권 휘하에서 장사, 중사마 등의 직책을 역임하며, 유비와의 외교 분쟁에서 사신으로 활약했다. 손권이 황제가 되자 대장군, 좌도호, 예주목을 겸임했고, 241년에 사망했다. 그는 온화하고 사려 깊은 성품으로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동생 제갈량, 사촌 제갈탄과 함께 촉, 오, 위 삼국에서 명성을 떨쳤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41년 사망 - 관녕
관녕은 후한 말기부터 위나라의 은사로, 화흠 등과 학문을 닦다가 혼란을 피해 요동으로 은거하며 공손씨의 벼슬 제안을 거절하고 조비의 부름으로 귀향 후 태중대부에 임명되었으나 사퇴, 이후 조정의 부름에도 응하지 않고 청렴하고 고결한 인품으로 존경받은 인물이다. - 241년 사망 - 손등 (동오)
손등은 오나라 손권의 장남이자 황태자로, 총명함과 효성으로 손권의 총애를 받았으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오나라 후계 구도에 혼란을 초래하고 사후 선태자로 추증되었다. - 동오의 좌장군 - 정봉
정봉은 삼국시대 오나라의 장수로 손량, 손휴, 손호 3대에 걸쳐 활약하며 동흥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손침 제거에 가담하여 대장군에 임명되었으나, 말년에는 서진 공격 실패와 손호의 노여움으로 불우한 삶을 살았다. - 동오의 좌장군 - 장포 (동오)
장포는 삼국시대 오나라 인물로 손휴의 신임을 받아 손침 제거에 공헌하여 보의장군과 영강후에 봉해졌으며, 그의 딸들은 손호의 후궁이 되어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것으로 《삼국지연의》에 묘사된다. - 174년 출생 - 조순 (후한)
후한 말 조조의 사촌 동생이자 호표기를 이끌었던 무장 조순은 황문시랑을 거쳐 조조 휘하에서 남피 전투, 백랑산 전투 등 공을 세웠으며 사후 조비에 의해 위후로 추증되었다. - 174년 출생 - 가규
가규는 후한 말에서 삼국시대 위나라에서 활약한 인물로, 조조, 조비, 조예 삼대에 걸쳐 중용되었으며 예주에서 운하를 건설하는 등 치적을 쌓았다.
제갈근 - [인물]에 관한 문서 | |
---|---|
인물 정보 | |
이름 | 제갈근 |
원어 이름 | 諸葛瑾 |
로마자 표기 | Zhuge Jin |
자 | 자유 (子瑜) |
출생 | 174년 |
출생지 | 중국서주낭야군양도현 |
사망 | 241년 윤6월 |
사인 | 병사 |
소속 | 오 |
주요 직책 | 대장군 좌도호 예주목 완릉후 |
칭호 | 제갈사군 (관직에 대한 존칭)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제갈규 |
형제 | 제갈량 (동생), 제갈준 (형) |
친척 | 제갈탄 (사촌), 제갈선 (종숙) |
자녀 | 제갈각 제갈교 제갈융 장승의 아내 |
관직 경력 | |
주요 관직 | 대장군 좌도호 예주목 좌장군 남군태수 |
임관 시기 | 222년 (좌장군), 229년 (대장군, 예주목, 좌도호) |
봉작 | 완릉후 |
기타 정보 | |
![]() |
2. 가계와 초기 생애
후한 명문 랑야군 제갈씨 출신으로, 젊은 시절에 수도로 가서 『모시전』, 『상서』, 『좌씨춘추』 등을 읽으며 학문을 닦았다. 친모가 죽자 계모에게 효도를 다했다. 후한 말의 전란을 피해 양주로 이주했다. 이때 손책이 죽고 손권이 뒤를 이었는데, 손권의 매형인 곡아의 홍자는 제갈근의 비범함을 알아보고 손권에게 추천했다. 손권은 제갈근을 높이 평가하여 노숙과 마찬가지로 빈객으로 대우했으며, 후에 장사·중사마가 되었다.
건안 6년(201년), 제갈근은 보즐·엄준과 함께 오나라에 유람하며 함께 명성을 떨쳐 당시의 영준으로 칭송받았다.[52]
유비의 사자로서 동생 제갈량이 수도를 방문했을 때, 손권이 제갈량을 설득하여 섬기게 할 수 없겠냐고 묻자, "제가 저희 나라와 주군을 배신하지 않는 것처럼, 동생도 또한 유비를 배신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손권은 이 말에 감명을 받아 그 후 제갈근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보였다.[53]
건안 20년(215년), 유비가 익주를 얻음에 따라 형주 반환을 요구하는 손권의 사자가 되었다. 이때 유비를 섬기는 동생과는 공사의 입장을 명확히 구분하여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얼굴을 마주했지만, 사적으로는 만난 적이 없었다. 유비는 "량주를 얻으면 돌려주겠다"라고 대답했기 때문에, 형주 반환은 실현되지 못하고 실패했다. 이 때문에 손권이 남부 삼 군에 장리를 두자 관우가 쫓아냈다. 손권은 여몽에게 형주를 되찾게 하고, 노숙 또한 파구에서 관우를 막았다. 그러나 조조가 한중을 평정하자, 이를 두려워한 유비가 화해를 요청했고, 제갈근은 우호 관계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사자로서 익주로 갔다.[54]
2. 1. 가계 배경
제갈근의 본관은 랑야군 양두현(현재의 산둥성 이난현 또는 이수이현)이었다.[2] 제갈근의 가계에 대한 기록은 《오서》와 《풍속통》에 전해진다.《오서》에 따르면, 제갈근의 원래 성씨는 '갈'(葛)이었고, 조상들은 주현(현재의 산둥성 주청시 남서쪽)에서 양두현으로 이주했다. 양두현에는 이미 갈씨가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현지인들은 이들을 구별하기 위해 '주(諸)'와 '갈(葛)'을 합쳐 '제갈(諸葛)'이라 불렀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갈근의 조상들은 '제갈'을 성씨로 사용하게 되었다.[3]
《풍속통》에 따르면, 제갈근의 조상은 진나라에 대항하여 대택향 봉기를 일으킨 진승 휘하의 장군 갈영(葛嬰)이다. 진승은 나중에 갈영을 처형했지만,[4] 서한 한 문제는 갈영이 부당하게 죽었다고 여겨 그의 손자를 주현의 제후로 봉하여 갈영을 기렸다. 시간이 지나면서 갈영의 후손들은 '주(諸)'와 '갈(葛)'을 합쳐 '제갈'을 성씨로 사용하게 되었다.[5]
'제갈'이라는 성을 가진 제갈근의 가장 오래된 조상은 한 원제(기원전 48년 ~ 33년) 때 사례교위를 지낸 서한 시대 관리 제갈풍(諸葛豐)이었다. 제갈근의 아버지 제갈규(諸葛珪)는 자가 군공(君貢)이며, 동한 한 영제(168년 ~ 189년) 때 태산군(현재의 산둥성 타이안시 주변)에서 보좌관으로 근무했다.[6]
제갈근에게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이 있었다. 남동생들은 제갈량과 제갈균(諸葛均)이었다.[7] 여동생 중 한 명은 괴기(蒯祺)와 결혼했고,[8] 다른 한 명은 방통의 사촌인 방산민(龐山民)과 결혼했다.[9]
2. 2. 초기 생애
제갈근은 젊은 시절, 수도 뤄양에서 ''모시전'', ''상서'', ''좌전''과 같은 유교 경전을 공부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고향으로 돌아가 효성스럽게 상을 치렀다. 또한 계모를 정중하고 존경하는 태도로 대했기에 효심으로 명성을 얻었다.[10]후한 말, 혼란기에 제갈근은 강남 지역으로 피난을 갔다. 그는 보즐, 엄준과 함께 학자로서 명성을 얻었다.[11] 200년경, 손책이 죽고 손권이 뒤를 이었을 때, 손권의 매형 홍자가 제갈근을 추천했다. 손권은 제갈근과 노숙을 빈객으로 대우하고, 장사(長史|장사중국어)로 임명했다가, 나중에 중사마()로 승진시켰다.[12]
201년, 제갈근은 보즐, 엄준과 함께 오나라에서 명성을 떨쳐 당시의 영준으로 칭송받았다.[52]
3. 손권 휘하에서의 활동
196년 조조의 서주(徐州) 침공으로 인한 혼란을 피해 형주로 이주한 후, 손책 사후 손권 누나의 남편 홍자(弘咨)의 추천으로 손권을 섬기게 되었으며, 노숙과 함께 빈객 대우를 받았다. 이후 장사(長史)를 거쳐 중사마(中司馬)로 승진했다.
제갈근은 손권과 대화할 때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손권의 생각과 다를 경우, 다른 이야기를 꺼내거나 다른 사건을 예로 들어 간접적으로 이해를 구했다. 이러한 방식으로 손권의 마음을 누그러뜨리는 데 능숙했다. 손권이 오군태수 주치에게 품었던 원망을 해소하고, 교위 은모(殷模)를 용서하도록 설득한 것도 이러한 제갈근의 외교술 덕분이었다. 우번이 직설적인 성격으로 인해 쫓겨났을 때에도, 제갈근은 우번을 위해 손권을 달랬다.
219년, 관우 토벌에 참가하여 공을 세우고 수남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여몽의 뒤를 이어 남군태수를 겸임하고 공안에 주둔했다.[13] 222년, 좌장군, 공안독, 가절이 되었고 완릉후에 봉해졌다. 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대장군, 좌도호가 되었고 예주목을 겸임했다.
234년, 손권이 제갈량의 5차 북벌에 호응하여 육손과 함께 강하 면구에 주둔했다. 241년, 손권이 위나라를 대규모로 정벌할 때 조중 땅을 점령했으나, 전종(全琮)이 왕릉에게 패배하면서 다른 전선의 장수들과 함께 퇴각했다. 같은 해 윤달에 사망했으며, 유언에 따라 검소하게 장례가 치러졌다.
3. 1. 손-유 영토 분쟁
215년, 손권은 제갈근을 사신으로 보내 유비에게 형주 반환을 요구했다. 유비는 량주를 점령한 후에 형주를 반환하겠다고 약속했으나,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13] 이로 인해 손권과 유비 사이에 분쟁이 발생했고, 양측은 상강을 경계로 형주를 분할하기로 합의했다.[13]이 과정에서 제갈근은 유비의 참모로 있던 동생 제갈량과 만났으나, 공적인 자리에서만 대면하고 사적인 만남은 피했다.[13] 이는 두 사람이 각자의 주군에게 충성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한국의 진보 진영에서 높이 평가하는 부분이다.
215년에 있었던 손권과 유비 간의 영토 분쟁은 삼국지의 주요 사건 중 하나이며, 이로 인해 오나라와 촉나라의 관계는 더욱 복잡해지게 되었다.
3. 2. 오-촉 갈등과 외교적 노력
219년, 관우 토벌에 참가하여 공을 세웠고, 여몽을 대신하여 남군태수를 겸임하여 공안에 주둔했다.[13] 221년, 유비가 잃어버린 형주 남부 영토를 되찾기 위해 소정 전투를 시작했을 때, 손권은 유비와 만나 평화 회담을 시작하기 위해 사자로 제갈근을 보냈다.[15] 제갈근은 유비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을 보냈다.배송지는 삼국지의 제갈근 열전에 대한 주석에서 유비에게 제갈근의 연설을 반박했다. 배송지는 유비가 손권과 전쟁을 벌이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는데, 이는 손권이 손-유 동맹을 깨고 형주를 점령함으로써 동한 왕조를 부활시키려는 그의 노력을 좌절시켰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유비와 관우의 관계가 매우 가까워서 말로는 표현할 수 없다고 언급하며, 유비와 관우의 관계를 삼국지에서 말로 표현하려면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해서 공간 낭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17]
당시 제갈근이 유비와 내통하고 있다는 참언이 돌았으나, 손권은 전혀 듣지 않고 제갈근을 깊이 신뢰했다. 육손은 제갈근이 제갈량의 형이라는 이유로 내통을 의심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면서도 손권에게 판단을 맡기기 위해 사자를 보냈다. 손권은 "자유(제갈근)가 나를 배신하지 않는 것은, 내가 자유를 배신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말하며, 앞서 제갈량과의 관계를 언급한 발언을 인용하여, 다시 절대적인 신뢰를 보이고 육손에게도 그렇게 할 것을 함축적으로 말했다.[55] 결국, 유비는 제갈근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오나라를 침공했지만 대패했다(이릉 전투).
3. 3. 위나라와의 전투
222년 말, 조위의 제후였던 손권은 위 황제 조비와 관계를 끊고 동오를 독립 국가로 선포했다. 손권은 제갈근을 좌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임시 황제 권한을 부여한 뒤, 공안현에 주둔하여 형주 남부의 오나라 방어를 감독하게 했다. 또한 제갈근을 완릉후(宛陵侯)로 봉했다.[14]222년에서 223년 사이,[19] 위나라 장수 조진과 하후상은 오나라가 통치하는 강릉현(江陵縣, 현재의 징저우)을 공격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었고, 오나라 장수 주연이 이를 방어했다. 동시에 위나라 군대의 또 다른 부대가 강릉현 근처 양쯔강의 섬인 중주(中州)를 점령했다. 제갈근은 이 소식을 듣고 공안현에서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주연을 지원하러 갔다. 그러나 그는 무능한 지휘관으로 드러났는데, 약한 리더십을 보였고, 느리고 수동적인 접근 방식을 채택했으며, 적을 공격할 기회를 적극적으로 잡는 대신 토론과 계획에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무능함 때문에 포위 공격이 길어졌고, 손권은 그에게 매우 불만을 품게 되었다. 오나라 장수 반장이 위나라 군대의 부교를 불태워 그들을 몰아내는 계획을 세운 후, 강릉현에 대한 포위 공격은 풀렸다. 제갈근은 전투에서 중요한 업적을 세우지 못했지만, 강릉현을 방어하는 데 기여하여 오나라 군대의 전반적인 성공에 기여한 것으로 인정받았다.[19]
226년 9월부터 11월 초까지,[20] 조비의 죽음과 조예의 위나라 왕위 계승 이후, 손권은 친히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가 지배하는 강하군을 공격했는데, 위나라 장수 문빙이 이를 방어했다. 동시에 그는 제갈근과 장패(張霸)에게 별도의 오나라 군대를 이끌고 위나라가 지배하는 양양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제갈근은 사마의가 이끄는 위나라 군대와의 전투에서 패배했다. 장패는 전투에서 사망했고, 오나라 군대는 1,000명 이상의 사상자를 냈다. 한편, 손권은 위나라의 증원군이 강하군에 도착했다고 오인하여 군대를 철수하고 오나라로 돌아갔다.[20]
황룡 원년(229년), 손권이 황제가 되자 제갈근은 대장군 · 좌도호가 되고 예주목을 겸임했다. 234년, 손권이 제갈량의 5차 북벌에 호응하면서 육손과 함께 강하 면구에 주둔했다. 육손이 손권에게 한편을 파견하여 상황을 보고하고 돌아오게 했는데, 그만 위군에 사로잡혀버렸다. 제갈근은 실정이 들통나고 또 손권은 회군했으므로 육손에게 편지를 보내 퇴각하기를 구했으나, 육손은 답장은 하지 않고 여유로운 모습을 보여주었다. 제갈근이 직접 찾아가자, 육손은 곧장 퇴각하기 어려운 까닭을 밝히고 제갈근과 함께 계획을 세워, 피해를 입지 않고 퇴각했다.
4. 만년과 죽음
229년,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자 제갈근은 , 좌도호, 예주목으로 임명되었다.[23] 여일의 전횡 사건이 238년에 종결된 후, 손권은 신하들에게 국정 개혁에 대한 의견을 구했다. 제갈근은 상황에 근거하여 구체적인 답변을 제시했다.[25]
241년, 손권이 위나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할 때, 제갈근은 조중 땅을 점령했다. 그러나 전종이 왕릉에게 패하면서 오군은 철수했다.[54] 제갈근은 같은 해 윤6월에 6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26] 그는 유언으로 검소한 장례를 치를 것을 당부했다.[26]
5. 평가 및 친족 관계
제갈근의 가문은 후한 명문 랑야군 제갈씨 출신이다. 그의 조상은 진나라에 대항하여 대택향 봉기를 이끈 진승 휘하의 장군 갈영이었다.[4] 서한 한 문제는 갈영이 부당하게 죽었다고 여겨 그의 손자를 주현의 제후로 봉했다.[5] 시간이 지나면서 갈영의 후손들은 '주(현)'와 '갈'을 합쳐 '제갈'을 성씨로 사용하게 되었다.[5]
제갈근의 가장 오래된 조상은 한 원제 (기원전 48–33년) 때 사례교위로 봉직한 서한 시대 관리 제갈풍이었다.[6] 제갈근의 아버지 제갈규는 동한 한 영제 (168–189년) 때 태산군에서 보좌관으로 근무했다.[6]
제갈근에게는 남동생 둘과 여동생 둘이 있었다. 남동생은 제갈량과 제갈균(諸葛均중국어)이었다.[7] 여동생 중 한 명은 괴기와 결혼했고,[8] 다른 한 명은 방통의 사촌 방산민과 결혼했다.[9]
제갈근은 손권과 대화할 때 비유를 통해 간접적으로 의사를 표현했으며, 직접적인 표현은 자제했다. 손권의 뜻에 맞지 않으면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다른 일에 빗대어 이해를 구하는 식이었다. 이러한 신중함 덕분에 손권의 마음을 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주치나 교위 은모(殷模)와의 갈등을 중재하고, 우번을 변호하는 등 넓은 도량을 보였다.
아내가 죽은 후에도 제갈근은 재혼하지 않았고, 총애하는 첩이 있었지만 그 아이를 특별히 돌보지 않았다.[65] 이러한 신중한 행동은 당시에 칭찬받았다.
5. 1. 평가
제갈근은 온화하고 신중한 성품으로, 손권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그는 직설적인 간언보다는 비유를 통해 완곡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방식을 선호했다.[28] 뛰어난 외교적 능력으로 오나라와 촉한의 동맹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과 사를 엄격히 구분하여, 동생 제갈량과의 관계에서도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았다.[13]219년 여몽의 형주 침공에 참여했고, 222년~223년에는 조비의 침공을 막는 데 참전했으나, 군사적인 재능은 뛰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신중하고 안정적인 지휘로 여러 차례 조위의 침공을 막아냈다.[19]
장승, 보즐, 엄준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으며,[64] 그의 인품은 당대 사람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27] 손권은 중요한 일이 있을 때마다 제갈근을 찾아 의견을 구했다.[55]
5. 2. 친족 관계
제갈근의 가문은 중국에서 가장 명망 있는 가문 중 하나였다. 제갈근이 동오에서 대장군으로 복무하는 동안, 그의 둘째 동생 제갈량은 오의 동맹국 촉한의 승상으로, 사촌 제갈탄은 오와 촉의 경쟁국인 조위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 제갈근의 두 아들 제갈각과 제갈융 또한 오에서 장군으로 복무했다.[41]제갈근은 그의 더 잘 알려진 형제 제갈량만큼 재능과 뛰어남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모범적인 행동과 덕망 있는 인품으로 유명했다. 아내가 죽은 후, 그는 가장 총애하는 첩을 죽은 아내를 대신할 공식 배우자 지위로 승격시키지 않았다. 또한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들)에게 어떠한 편애도 보이지 않았다.[42]
제갈근의 장남 제갈각은 오에서 명성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손권에게도 높이 평가받았다. 그러나 제갈근은 제갈각의 행동에 못마땅해하며 그를 냉대했고, 맏아들이 가문에 불행을 가져올까 봐 끊임없이 걱정했다.[43][44] 제갈근이 죽은 후, 그의 셋째 아들 제갈융이 완릉후(宛陵侯중국어)의 작위를 물려받았다. 제갈각은 이미 자신의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 아버지의 작위를 물려받지 못했다. 제갈융은 또한 이전에 아버지의 지휘하에 있던 공안현의 군대를 통제했다.[45]
253년, 잠시 손권의 후계자 손량의 섭정을 맡았던 제갈각은 손준의 쿠데타로 전복되어 암살당했다. 제갈각의 살아남은 두 아들과 제갈융, 제갈융의 세 아들, 그리고 제갈각의 먼 친척들을 포함한 제갈각의 일가는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제갈근의 차남 제갈교는 제갈량이 처음에는 아들이 없었기에 남자 상속자가 필요하여 숙부 제갈량에게 입양되었다. 제갈교는 촉에서 복무하게 되었고 228년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 제갈반(諸葛攀중국어) 또한 촉에서 관료로 복무했다. 그러나 253년에 제갈근의 후손들이 숙청된 후, 제갈반은 원래의 혈통으로 돌아가 오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제갈근의 혈통을 이었다. 그러나 제갈반 역시 요절한 것으로 알려졌다.[48] 264년, 제갈반의 아들 제갈현(諸葛显중국어)은 제갈첨의 차남 제갈경과 함께 하동군으로 이주했다.[49] 진나라 시대의 서예가 왕희지는 자신이 건강에서 제갈현을 만났고, 그에게 촉의 상황에 대해 질문했다고 썼다. 제갈현은 성도의 성벽, 집, 그리고 다른 많은 건물들이 진나라 시대의 것이며, 당시 사마착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대답했다.[50]
장승은 손권 밑에서 복무하는 장군이었으며, 제갈근의 친구였다. 그의 아내가 죽자, 그의 아버지 장소는 그에게 제갈근의 딸과 결혼하라고 제안했다. 장승은 처음에는 친구의 사위가 되는 것에 어색함을 느꼈지만, 결국 손권의 설득으로 동의했다. 장승과 제갈근의 딸은 딸 장비()를 낳았고, 그녀는 손권의 셋째 아들 손화와 결혼했다.[51]
- -|]]
참조
[1]
서적
Sanguozhi vol. 47
[2]
서적
Sanguozhi vol. 52
[3]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4]
서적
Shi Ji vol. 48
[5]
서적
Fengsu Tong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6]
서적
Sanguozhi vol. 35
[7]
서적
Sanguozhi vol. 35
[8]
서적
Xiangyang Qijiu Ji vol. 2
[9]
서적
Xiangyang Ji annotation in Sanguozhi vol. 37
[10]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11]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12]
서적
Sanguozhi vol. 52
[13]
서적
Sanguozhi vol. 52
[14]
서적
Sanguozhi vol. 52
[15]
서적
Sanguozhi vol. 52
[16]
서적
Sanguozhi vol. 52
[17]
서적
Pei Songzhi's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18]
서적
Sanguozhi vol. 52
[19]
서적
Wu L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20]
서적
Jin Shu vol. 1
[21]
서적
Sanguozhi vol. 58
[22]
서적
Sanguozhi vol. 58
[23]
서적
Sanguozhi vol. 52
[24]
서적
Zizhi Tongjian vol. 74
[25]
서적
Sanguozhi vol. 52
[26]
서적
Sanguozhi vol. 52
[27]
서적
Sanguozhi vol. 52
[28]
서적
Sanguozhi vol. 52
[29]
서적
Sanguozhi vol. 52
[30]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31]
서적
Jiang Biao Zhuan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32]
서적
Sanguozhi vol. 52
[33]
서적
Sanguozhi vol. 52
[34]
서적
Sanguozhi vol. 52
[35]
서적
Sanguozhi vol. 52
[36]
서적
Sanguozhi vol. 52
[37]
서적
Sanguozhi vol. 52
[38]
서적
Sanguozhi vol. 52
[39]
서적
Sanguozhi vol. 52
[40]
서적
Sanguozhi vol. 54
[41]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42]
서적
Wu Shu annotation in Sanguozhi vol. 52
[43]
서적
Sanguozhi vol. 52
[44]
서적
Sanguozhi vol. 64
[45]
서적
Sanguozhi vol. 52
[46]
서적
Sanguozhi vol. 35
[47]
서적
[48]
서적
Sanguozhi vol. 35
[49]
서적
Sanguozhi vol. 35
[50]
서적
Chengdu Chengchi Tie
[51]
서적
Sanguozhi vol. 52
[52]
서적
三国志』呉志歩騭伝が引く呉書
[53]
서적
江表伝
[54]
서적
三国志』呉志 呉主伝
[55]
서적
江表伝
[56]
서적
呉録』・『三国志』呉志 潘璋伝
[57]
서적
三国志』魏志 董昭伝・夏侯尚伝
[58]
서적
呉録
[59]
서적
三国志』魏志 曹叡|明帝紀
[60]
서적
三国志』蜀志 諸葛亮伝
[61]
서적
三国志』呉志 陸遜伝
[62]
서적
三国志』呉志 陸遜伝・諸葛瑾伝・『建康実録
[63]
서적
三国志』呉志 周瑜伝
[64]
서적
三国志』呉志 歩騭伝
[65]
서적
呉書
[66]
서적
太平御覽』・『世説新語
[67]
간행물
[68]
문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