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언신
1. 개요
정언신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66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검열을 시작으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1571년 춘추관 기사관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했으며, 경기도관찰사를 거쳐 1583년 이탕개의 난을 이순신, 신립 등과 함께 진압했다. 이후 함경도관찰사, 병조판서를 역임하고 1589년 우의정에 올랐으나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되었고, 갑산에서 사망했다. 사후 문경의 소양사에 제향되었으며, 드라마 《징비록》과 《불멸의 이순신》에서 관련 인물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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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인물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한국사 인물 -
윤증
윤증은 조선 중기 문신이자 소론의 영수로 우의정까지 역임한 정치가였으며, 성리학적·정치적 갈등으로 스승 송시열과 결별하고 탕평책을 지지했으나 당쟁 속에서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실천적 삶을 강조한 무실학을 추구하며 조선 후기 정치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다. -
동래 정씨 -
정진석 (정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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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 정씨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16세기 한국 사람 -
정유길
정유길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거쳐 명종 때 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윤원형 탄핵에 앞장서 훈구파, 소윤파, 사림파 모두에게 존경받아 좌의정에 이르렀다. -
16세기 한국 사람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2. 생애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記事官)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 1583년 이탕개가 쳐들어오자 우찬성으로서 도순찰사를 겸하여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 쟁쟁한 무관들을 막하(幕下)로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북변을 방비하고 병조판서에 승진,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의 사주를 받은 대간(臺諫)으로부터 정여립과 3종(從)간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 후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고, 사사(賜死)의 왕명까지 내렸으나 감형되었다. 갑산에 이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고,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
2.1. 관직 생활과 이탕개의 난 진압 (1566년 ~ 1583년)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記事官)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 1583년 이탕개가 쳐들어오자 우찬성으로서 도순찰사를 겸하여 이순신, 신립, 김시민, 이억기 등 쟁쟁한 무관들을 막하(幕下)로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2.2. 함경도 관찰사와 병조판서 (1583년 ~ 1589년)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이 되고 1571년(선조 4) 호조좌랑으로 춘추관기사관(記事官)이 되어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그후 경기도관찰사를 역임, 1583년 이탕개(尼湯介)가 쳐들어오자 우찬성으로서 도순찰사를 겸하여 이순신(李舜臣)·신립·김시민·이억기 등 쟁쟁한 무관들을 막하(幕下)로 거느리고 적을 격퇴하였다.
이어 함경도관찰사로 나가 북변을 방비했다. 1589년 병조판서에 승진했다.
2.3. 정여립 모반 사건과 유배 (1589년 ~ 사망)
1589년 우의정이 되어 정여립의 모반 후 그 잔당에 대한 옥사를 다스리는 위관(委官)에 임명되었으나 서인 정철의 사주를 받은 대간(臺諫)으로부터 정여립과 3종(從)간이므로 공정한 처리를 기대할 수 없다는 탄핵을 받아 사직하였다. 그 후 계속 정여립의 일파로 모함을 받아 남해에 유배되었고, 사사(賜死)의 왕명까지 내렸으나 감형되었다. 갑산에 이배되어 그 곳에서 죽었고, 문경의 소양사(瀟陽祠)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