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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영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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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 영공은 춘추 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기원전 606년에 즉위하여 기원전 605년에 시해당했다. 그는 젊은 시절 초나라에 인질로 보내져 초 장왕의 신임을 얻었으며, 즉위 후 친진 외교에서 친초 외교로 전환하려 했으나, 재상 자가, 자공 등과 갈등을 겪었다. 영공은 자송과의 일화인 식지(食指) 고사로 유명하며, 자송에게 자라국을 주지 않은 일로 자송의 반감을 사 시해당했다. 사후에는 동생 공자 견이 정 양공으로 즉위했으며, 영공은 처음 유공으로 불리다가 이후 영공으로 시호가 변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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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영공
기본 정보
이름희이 (姫夷)
칭호공 (公)
왕조
시호영공 (霊公)
희이 (姫夷)
재위 기간기원전 605년
수도신정 (新鄭)
출생년도불명
사망년도기원전 605년
아버지목공
어머니불명
왕후불명
능묘불명
연호없음

2. 생애

鄭靈公|정 영공중국어은 기원전 606년 아버지 정 목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정나라 군주가 되었다.[2]

기원전 605년, 정나라의 경 공자 거질과 자송에게 시해당했다. 《사기》와 《좌전》 선공 4년조에 관련 기록이 전해진다.

정영공 사후, 정나라 국인은 정영공의 아우 공자 거질을 옹립하려 했으나, 공자 거질이 사양하고 나이순대로 형 공자 견을 지목하니 공자 견이 즉위했다. 곧 정 양공이다.[2]

죽은 후에는 시호를 유공(幽公)이라 했으나, 기원전 599년에 공자 거질의 일족을 축출한 후에 개장하고 영공이란 시호를 바쳤다.[3]

2. 1. 인질 생활

鄭靈公|정 영공중국어은 젊은 시절 초나라에 인질로 보내졌으며, 초 장왕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1] 정목공 18년(기원전 610년), 정나라는 진나라와 화친하면서 진나라에 조천과 지를 볼모로 보냈고, 鄭靈公|정 영공중국어은 대부 석초와 함께 진나라에 볼모로 갔다.[1]

2. 2. 즉위와 갈등

鄭靈公|정 영공중국어 원년(기원전 605년), 아버지 정 목공이 죽자 그 뒤를 이어 정나라 군주가 되었다.[2] 즉위 후, 기존의 친진(親晉) 외교 정책을 친초(親楚) 정책으로 전환하려 시도하였다. 이 과정에서 재상 자가(공자 귀생) 및 자공(공자 송) 등과 대립하였다.

《사기》에서는 영공 원년의 사건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좌전》 선공 4년조에도 거의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2. 3. 식지(食指) 고사와 시해

정 영공 원년(기원전 605년), 초나라에서 영공에게 큰 자라를 바쳤다. 공자 거질(公子去疾)과 자송(子宋)이 영공에게 조현하려는데, 자송의 식지(食指, 둘째 손가락)가 움직였다. 자송은 공자 거질에게 "예전에 손가락이 움직인 일이 있었는데, 반드시 기이한 것을 먹을 것"이라고 말했다. 마침 자라국을 영공에게 바치는 것을 보고 자송이 웃자, 영공은 그 까닭을 물었다. 영공은 자송에게만 자라국을 주지 않았다. 자송은 노하여 손가락을 솥에 담갔다가 맛보고 나왔다. 영공은 자송을 죽이려 했으나, 자성(子成)은 공자 거질과 모의하여 여름에 영공을 시해했다.[2]

이 고사는 '식지(食指)'라는 고사성어로, 어떤 일에 대한 징조나 욕구를 의미하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초나라 장왕이 보낸 자라를 요리하여 신하들에게 대접하는 연회에서, 자공은 "이 손가락이 움직일 때면 진미를 맛볼 수 있다"고 말했고, 자라를 보며 자가와 함께 웃었다. 영공이 이를 불쾌하게 여겨 자공에게만 자라 요리를 주지 않자, 자공은 굴욕감을 느끼고 자라 냄비에 손가락을 넣었다 핥고 퇴실했다. 자공의 무례에 분노한 영공은 그를 죽이려 했으나, 자가의 만류로 그만두었다. 그러나 앙심을 품은 자공은 자가를 꾀어 영공을 시해했다.

2. 4. 사후

정나라 사람들은 영공의 동생 자량(공자거질)을 군주로 추대하려 했으나, 자량이 이를 거절하고 공자 견을 지목하여 공자 견이 정 양공으로 즉위하였다.[2] 처음에는 유공(幽公)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나, 기원전 599년 자가의 일족이 축출된 후 영공(靈公)으로 시호가 바뀌었다.[3]

참조

[1] 서적 역주 춘추좌씨전 전통문화연구회
[2] 서적 사기
[3] 서적 좌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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