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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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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정 양공은 춘추 시대 정나라의 군주로, 목공의 아들이자 영공의 동생이다. 기원전 605년 영공 사후, 자량의 권유로 정군이 되었으며, 재위 기간 동안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어려움을 겪었다. 초나라의 공격과 포위 속에서 항복과 배신을 반복하며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고, 결국 기원전 587년에 사망하여 아들 비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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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양공
기본 정보
희견 (姬堅)
호칭공 (公)
시호양공 (襄公)
국가정나라
재위 기간
재위 기간기원전 604년 - 기원전 587년
대수13대
가족 관계
부친목공

2. 사적

정 양공은 정 목공의 아들로, 기원전 605년 정 영공이 시해된 후 동생 공자 거질의 사양으로 정나라 임금(정백)이 되었다.[3] 즉위 후 정 영공을 시해한 자공의 집안을 몰살하려 했으나 공자 거질의 반대로 그만두었다.[3]

정 양공은 재위 기간 동안 진나라와 초나라 사이에서 외교적 줄타기를 하였다.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 기원전 604년: 초나라의 공격에 진나라와 연합하여 대응.[3][4][5][6]
  • 기원전 600년: 초나라의 재공격.[3][4][5][8]
  • 기원전 599년: 진나라와 송나라의 공격으로 초나라에서 진나라로 전향.[9]
  • 기원전 598년: 초나라의 공격에 진나라와 함께 초나라에 복종.[12][13]
  • 기원전 597년: 초나라에 항복하고 볼모를 보냈으나, 진나라 구원군이 필 전투에서 패배.[3][14]
  • 기원전 595년: 진나라의 공격에 초나라에 방책 모색.[3][15]
  • 기원전 594년: 진나라 사신을 초나라에 넘김.[3]

2. 1. 즉위 전

정 양공은 정 목공의 아들로 태어났다.[3]

기원전 618년, 정 목공 10년에 공자 견, 공자 방, 악이가 초 목왕에게 사로잡혀 정나라가 화친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두예는 《춘추좌전집해》에서 '세 사람은 정나라 대부다'라고 주석을 달았다. 이때 양공(이름이 견이므로 정백 즉위 전에는 공자 견이다)의 아버지인 정 목공의 나이는 32세였다.[1][2]

기원전 605년, 정 영공 원년에 정 영공이 경 자가와 자공에게 시해당했고, 정나라 국인은 영공의 아우 공자 거질을 정백으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공자 거질이 자기보다 나이 많은 공자 견에게 사양하니, 공자 견이 정백으로 즉위했다. 곧 정 양공이다.[3]

2. 2. 재위 기간: 진(晉)과 초(楚) 사이에서

정 양공은 즉위 후 정 영공을 죽인 자공의 집안인 목씨(繆氏)를 모두 죽이려 했으나, 공자 거질의 반대로 그만두었다.[3]

정 목공 21년(기원전 607년), 송나라 경 화원이 쳐들어오자 정나라에서 사로잡았는데, 송나라가 뇌물을 바쳐 화원을 풀어준 일이 있었다. 초 장왕이 재위 10년을 맞이하고 있던 초나라는 이 일에 원한을 품고 정 양공 원년(기원전 604년)에 정나라를 공격했다. 그러자 정나라는 초나라와 등을 돌리고 진나라 편에 붙었다. 진나라에서는 경 순림보를 보내 정나라를 구원했다.[3][4][5][6]

정 양공 5년(기원전 600년)에는 진나라가 주도한 회맹에 참가했다.[7] 이해 다시 초나라의 공격을 받았다. 진나라는 순림보에게 정나라를 구원하고 진나라를 공격하게 했으며, 진나라의 아경 극결이 정나라를 도와 유분(柳棼)에서 초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정나라 사람들은 기뻐했으나 자량(공자 거질)만은 후일을 근심했다.[3][4][5][8] 이해 초 장왕과 패권을 겨루던 진 성공이 죽었다.[4]

정 양공 6년(기원전 599년), 초나라와 화평을 맺었으나, 이해 막 진 경공이 새 임금이 된 진나라가 송나라와 함께 공격해 와 또 초나라를 배신하고 진나라에 붙었다.[9] 초나라가 바로 보복 공격해 오자 진나라에서는 사회를 보내 정나라를 구원하고 영북에서 초나라 군대를 쫓아냈다.[10] 정 영공을 시해한 주범 중 하나인 자가(공자 귀생)가 이해에 죽었다. 정나라에서는 영공을 시해한 죄를 물어 자가를 부관참시하고 자가의 일족을 추방했으며, 영공을 개장하고 새로 시호를 지어 올렸다(원래 정 영공의 시호는 '유공'이었다).[11][3]

정 양공 7년(기원전 598년), 초나라가 또 쳐들어와 정나라의 별도인 약(櫟) 땅에 미치자, 자량의 주장을 받아들여 초나라와 화친하고 진(陳)나라와 함께 초나라에 복종했다. 그러나 정나라는 진(晉)나라에 두 마음을 품고 있었고, 초나라는 정나라를 굴복시키고자 했으나 이때까지 이루지 못했다.[12][13]

정 양공 8년(기원전 597년), 초나라는 다시 정나라를 포위했다. 정 양공은 석 달 간 맞서 싸웠으나 결국 초 장왕에게 항복했다. 초 장왕은 황문(정나라 도성의 문 중 하나)을 통해 들어왔고, 정 양공은 몸을 묶고 을 끌며 자신을 낮추어 초 장왕에게 항복을 청했다. 초나라 신하들은 왕에게 정나라를 차지할 것을 권했으나 초 장왕은 정 양공의 청을 받아들여 정나라의 복종을 받아냈다. 정나라는 자량을 볼모로 초나라에 보냈다.[3] 진나라에서는 순림보를 중군원수로 삼아 정나라를 구원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더구나 중군 보좌 선곡이 명령을 듣지 않고 멋대로 강을 건너 초나라와 싸우러 가는 등 군의 통제가 되지 않는 상태에서 초나라와 싸워 참패했다(필 전투). 이로써 초 장왕은 패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 싸움에서 정나라는 초나라 편에 섰다.[3][14]

정 양공 10년(기원전 595년), 진 경공은 연합군을 조직해 정나라를 쳤다. 정 양공은 두려워서 초나라에 직접 찾아가 이를 막을 방책을 모색했고, 자장을 자량 대신으로 새 볼모로 보내고자 했다. 초 장왕은 새 볼모를 받지 않고, 자량을 돌려보냈다.[3][15]

정 양공 11년(기원전 594년), 초나라송나라를 공격하자 진나라에서는 해양을 사자로 송나라에 보냈는데, 정나라가 사로잡아다가 초나라에 넘겼다.[3]

3. 가정

참조

[1] 서적 역주 춘추좌씨전 전통문화연구회
[2] 문서 정문공 24년([[기원전 649년]])에 태어났다는 《사기》 정세가의 기록에서 역산
[3] 사기 사기 정세가
[4] 사기 위와 같음, 권39 진세가
[5] 사기 위와 같음, 권14 십이제후연표
[6]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5년 경 : 楚人伐鄭; 전 : 楚子伐鄭。陳及楚平。晉荀林父救鄭伐陳。
[7]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9년 경 : 九月。晉侯宋公衞侯鄭伯曹伯會于扈。
[8]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9년 경 : 楚子伐鄭。晉郤缺帥師救鄭。; 전 : 楚子爲厲之役故。伐鄭。晉郤缺救鄭。鄭伯敗楚師于柳棼。國人皆喜。唯子良憂。曰。是國之災也。吾死無日矣。
[9]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10년 경 : 晉人。宋人。衞人。曹人。伐鄭。; 전 : 鄭及楚平。諸侯之師 伐鄭。取成而還。
[10]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10년 경 : 楚子伐鄭。; 전 : 楚子伐鄭。晉士會救鄭。逐楚師于潁北。諸侯之師戍鄭。
[11]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10년 전 : 鄭人討幽公之亂。斲子家之棺而逐其族。 改葬幽公。諡之曰靈。
[12]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11년 경 : 夏楚子陳侯鄭伯盟于辰陵 ; 전 : 春楚子伐鄭及櫟。子良曰。「晉楚不務德而兵爭。與其來者可也。晉楚無信。我焉得有信。」乃從楚。夏。楚盟于辰陵。陳鄭服也
[13]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11년 전 : 厲之役。鄭伯逃歸。自是楚未得志焉。鄭既受盟于辰陵。又徼事于晉。
[14]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12년
[15] 춘추좌씨전 춘추좌씨전 선공 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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