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타운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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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타운 학살은 1622년 3월 22일, 오페차나카노가 이끄는 포우하탄 전사들이 제임스 강 유역의 잉글랜드 정착촌을 기습 공격한 사건이다. 잉글랜드 정착민과 포우하탄 부족 간의 갈등이 배경이 되었으며, 1607년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 이후 잉글랜드인들의 영토 확장과 기독교 개종 정책이 갈등을 심화시켰다. 이 공격으로 347명의 잉글랜드인이 사망하고 여러 정착촌이 파괴되었으며, 이후 잉글랜드 측의 보복과 포우하탄 족의 쇠퇴를 가져왔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 본국에서 원주민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확산시켰고, 1644년 제2차 앵글로-포우하탄 전쟁으로 이어져 포우하탄 연방의 몰락을 가속화했다.

제임스타운 학살
사건 개요
사건 명칭1622년 인디언 학살
사건 분류대학살
관련 전쟁영국 식민지 시대 및 앵글로-포하탄 전쟁
발생 위치버지니아 식민지
목표 대상영국 정착민
날짜1622년 3월 22일
가해자포하탄족 부족민
동기포하탄족 영토에 대한 식민지 확장
피해
사망자 수347명
부상자 수알려지지 않음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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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607년 제임스타운 식민지 건설 이후, 잉글랜드 정착민들은 포우하탄 부족의 땅을 잠식하며 영토를 확장했다. 이들은 평화협정을 맺었지만, 백인들은 이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고 인디언의 땅을 침범했다. 이러한 백인 정착촌의 팽창은 원주민 부족을 불가피한 식민지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1610년, 런던 회사는 식민지 총독에게 원주민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식민지에 동화시키라는 정책을 지시했다. 그러나 포우하탄 연방은 합의제, 연방제 사회였으며, 포우하탄 추장은 연방 중 한 조정자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인디언에게는 '땅을 거래하는'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땅을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백인 문화의 강요는 인디언의 반발만 초래했다.

포우하탄 추장 와훈세나카우는 잉글랜드인들이 교역이 아닌 침략을 목적으로 왔다고 경고했다. 그는 잉글랜드인과의 평화를 원했지만, 잉글랜드의 침략적 태도에 위협을 느꼈다. 그는 “너희는 교역을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부족과 우리 나라를 침략하러 온 것이다.”, “나는 평화와 전쟁 차이가 무엇인지 다른 어떤 부족보다 더 잘 알고 있다"라고 말했다.

1614년, 포우하탄 추장의 딸 포카혼타스와 잉글랜드 정착민 존 롤프의 결혼으로 잠시 평화가 찾아왔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다.

2.1. 잉글랜드-포우하탄 전쟁 (1609-1613)

1610년 런던 컴퍼니는 식민지 지사에게 현지 모든 인디언 부족을 기독교화하고 식민지에 동화시키는 정책을 지시했다. 그러나 포우하탄 연방은 합의제, 연방제 사회였으며, 포우하탄 추장은 연방 중 한 조정자에 지나지 않았다. 원래 인디언에게는 '땅을 거래하는'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땅을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백인 문화의 강요는 인디언의 반발만 초래했다.

포우하탄 추장은 영국인들과의 평화를 원했지만, 백인 정착촌의 팽창은 원주민 부족을 불가피한 전쟁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포우하탄 족의 추장 와훈세나카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너희가 온 것은 무역을 위해서가 아니라 내 백성을 침략하고 내 나라를 소유하기 위해서이다…내 백성의 죽음을 세 번이나 보았으니… 나는 평화와 전쟁의 차이를 다른 어떤 나라보다 더 잘 안다. [만약 그가 영국인과 싸운다면, 포우하탄은 예측하기를], 그는 스미스에게 시달려 쉴 수도, 먹을 수도, 잠을 잘 수도 없으며, 피로한 그의 부하들은 감시해야 하고, 나뭇가지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모두가 "존 스미스 대위가 온다!"라고 외칠 것이며, 그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도망가야 하고, 이렇게 비참한 두려움 속에서 비참한 생을 마칠 것이다.

1609년부터 1613년까지 ‘제1차 앵글로 - 포우하탄 전쟁’이 발발했다. 1610년 7월, 웨스트는 게이츠를 케코탄족에게 보냈는데, "게이츠는 자신의 드러머가 연주하는 음악과 춤으로 인디언들을 유인한 다음 학살했다". 새뮤얼 아갈이 이끄는 식민지 개척자들은 포우하탄의 딸인 포카혼타스를 붙잡아 그가 그들의 요구에 동의할 때까지 인질로 잡았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모든 포우하탄 포로들을 석방하고, 그의 전사들이 빼앗은 모든 영국 무기를 반환하며, 지속적인 평화를 약속할 것을 요구했다".

포카혼타스가 영국인에게 붙잡혀 있는 동안 그녀는 존 롤프를 만나 나중에 결혼했다. 감금된 동안 포카혼타스는 영어, 관습, 성공회 종교를 배웠다. 그녀는 기독교로 세례를 받고 레베카라는 이름을 받았다. 롤프는 포우하탄과 영국인 사이의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은 "육체적 애정의 무절제한 욕망이 아닌 식민지의 번영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포카혼타스와 결혼하는 것이라고 썼다. 1614년포카혼타스와 담배 재배를 확립한 영국인 정착민 존 롤프의 결혼으로, 잉글랜드 정착민과 포우하탄 족 사이에는 일시적인 평화가 찾아왔다.

2.2. 새로운 통치와 갈등 심화

1618년 와훈세나카우 추장이 사망하면서 포우하탄 족 추장의 자리는 동생 오페차나카노에게 양위되었다. 그러나 오페차나카노는 잉글랜드와의 평화 유지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제1차 앵글로 - 포우하탄 전쟁에 참여했던 파문키 족 전사단이 패배에서 회복되자, 오페차나카노는 백인 정착민의 파괴를 계획했다. 1622년 네마타뉴 추장이 영국인에게 살해되자, 오페차나카노는 제임스 강에 있는 31개 정착촌과 농장에 대한 기습 공격을 검토했다.

포우하탄 추장은 영국인들과 인디언 사이의 평화를 원했다. 그는 “나는 평화와 전쟁 차이가 무엇인지 다른 어떤 부족보다 더 잘 알고 있다"라고 말하며, 평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인디언에게 '땅을 거래하는' 문화는 없었기 때문에, 인디언들은 땅을 산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인디언에게 땅은 모두의 것이며,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백인 문화의 억지는 인디언의 반발만 초래했다.

3. 1622년 인디언 학살

1622년 3월 22일, 오페차나카노가 이끄는 포우하탄 부족 전사들이 제임스 강 유역의 잉글랜드 정착촌들을 기습 공격했다. 이 공격으로 347명의 잉글랜드인들이 사망했는데, 이는 당시 잉글랜드인 정착민 인구의 약 1/3에 해당했다.

제임스타운은 한 인디언 소년의 경고 덕분에 미리 대비할 수 있었지만, 헨리커스, 마틴스 헌드레드, 월스텐홀름 타운 등 다른 정착촌들은 큰 피해를 입었다.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많은 잉글랜드인들이 목숨을 잃었고, 20명의 잉글랜드인 여성들이 포로로 잡혀갔다.

3.1. 학살의 영향

이 사건으로 인디언과 그 문화에 대한 영국 본토의 평가는 뒤집혔다. 버지니아 식민지에서뿐만 아니라 본국인 잉글랜드에서도 '인디언은 야만인'이라는 이미지가 다시 굳어져 버렸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영국 식민지 개척자들은 보복 공격을 계획했다. 평의회와 플랜테이션 소유주들은 더 나은 방어를 위해 사람들을 더 적은 정착지로 모으는 데 만장일치로 동의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사람들 중 3분의 2는 여성과 어린이, 그리고 일하거나 인디언에 대항할 수 없는 남성들이었다고 한다.

1623년 5월, 오페차나카노와 평화를 협상하고 실종된 여성들을 석방하기 위한 계획이 세워졌다. 그는 선의의 표시로 보이세 부인을 석방했으며, 나머지 여성들의 석방을 위해 협상하겠다는 암시를 했다. 5월 22일 터커 대위와 포우하탄 마을의 오페차나카노 및 구성원들은 포토맥 강을 따라 만났다. 이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존 포트 박사는 독이 든 포도주를 준비했다. 터커 대위와 다른 사람들은 의례적인 건배를 제안했고, 포도주를 마신 후 200명의 포우하탄인이 사망했다. 다른 50명이 살해되었다. 오페차나카노는 탈출했지만, 많은 부족 지도자들이 살해되었다. 그해 5월부터 11월까지 무장한 식민지 개척자들은 타이드워터 지역의 포우하탄 정착지를 공격했으며, 특히 포우하탄이 "엄청나게 많이" 심은 옥수수 작물을 표적으로 삼았다. 이러한 습격은 포우하탄 사회의 붕괴를 거의 초래했을 뿐만 아니라 제임스타운의 옥수수 폭리자들에게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1622년 학살을 향후 10년 동안 포우하탄의 땅을 점유하는 정당화로 사용했다. 역사학자 베티 우드는 다음과 같이 썼다.

> 일반적으로 "1622년 학살"이라고 불리는 원주민의 공격으로 영국인 정착민 347명이 사망하고 제임스타운이 거의 전멸했는데, 이는 정착민들의 행동을 촉발한 촉매였다. 1622년 학살 생존자들에게는, 이 부당한 공격을 시작함으로써 원주민들은 이전에 점유했던 토지의 소유권에 대해 주장할 수 있었던 모든 법적, 도덕적 권리를 포기한 셈이었다.

우드는 버지니아 정착민의 말을 인용했다.

> 지금까지 그들의 황무지와 우리 구매 외에는 더 많은 토지를 소유하지 못했고 그들의 만족을 위해 가치 있는 고려를 했다면 (...) 이제 전쟁의 권리와 국가의 법에 의해, 우리는 그 나라를 침략할 수 있고 우리를 파괴하려 했던 자들을 침략할 수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들의 경작지를 누릴 것이다.

식민지 개척자들은 학살에 대한 복수로, "무력 사용, 기습 공격, 옥수수 소각으로 인한 기근, 보트, 카누, 집 파괴, 낚시 둑 파괴, 사냥 원정 공격, 말로 추격하고 블러드하운드를 사용하여 그들을 찾고, 그들을 붙잡기 위해 마스티프를 사용하고, 다른 부족들 사이에서 그들의 적들의 손이 닿는 곳으로 도망치게 하고, '그들의 적들을 흡수하고 조장하는 것'을 통해 포우하탄을 공격했다."

4. 보복과 포우하탄의 쇠퇴

살아남은 백인 정착민들은 보복으로 여름과 가을에 포우하탄족들의 옥수수밭을 습격했다. 그 결과, 추장(중재자)인 오페차나카노는 마지못해 협상 자리를 마련했다. 이주민과 포우하탄 족 사이에는 인디언 중개인을 통해 평화협정을 맺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윌리엄 터커 대위와 존 포트 박사 등 이주민 측 일부 지도자들은 평화를 축하하는 자리에서 인디언에게 제공한 술에 독을 넣었다. 이로 인해 200여 명의 인디언이 독살되었고, 50명의 인디언이 정착민의 손에 의해 죽었다. 오페차나카노는 이 현장에서 도망칠 수 있었다.

1624년, 버지니아는 영국 왕실령이 되었다. 이로써 버지니아 회사를 거치지 않고 왕실이 직접 버지니아에 통치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대부분의 정착촌에서 정착민들은 영국 왕실의 이익만을 우선시 했으며, 개인의 이익은 고려되지 않았다. 정착민들은 포우하탄 족의 땅을 계속 침해했고, 식민지 정부는 인디언들과 맺은 평화 협정을 쉽게 바꾸거나 무시했다.

오페차나카노의 죽음은 포우하탄 연방의 몰락과 백인 정착민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포우하탄 족은 땅에서 쫓겨났고, 일부는 정착민에 동화되거나 버지니아에 설립된 유보지에 강제 이주되었다. 그 유보지마저도 이민자들의 증가로 인해 축소되었다. 현재 포우하탄 연방에 속한 부족은 7개 밖에 남지 않았고, 보호구역도 킹 윌리엄 카운티(리치몬드 도시 내)의 파문키족 보호구역 및 맛타포니족 보호구역 2개만 남아있다.

반면 백인 정착민은 버지니아 땅에 지배 기반을 굳혀 갔다. 학살 사건으로 헹리카스 정착촌과 대학이 파괴되었지만, 71년 후인 1693년에는 미들 플랜테이션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학교는 하버드 대학에 이어 미국 내 현존하는 대학 중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이다. 1698년에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가 제임스 타운에서 미들 플랜테이션으로 옮겨졌으며, 이름도 현재의 윌리엄스버그로 바뀌었다.

4.1. 제2차 잉글랜드-포우하탄 전쟁 (1644)

1644년 제2차 앵글로-포우하탄 전쟁이 일어났다. 잉글랜드 측은 500여 명의 사망자를 냈으나, 당시 정착민 인구의 10%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22년 전 학살 사건 때보다는 정착민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작았다. 이 전쟁에서 오페차나카노는 체포되었다. 이미 상당히 늙은 오페차나카노는 들것에 실려 가야 했다. 그는 제임스타운에 투옥되어 감옥 벽에 붙어 있던 정착민에게 살해되었다.

5. 포우하탄 연방의 몰락과 유산

오페차나카노의 죽음은 한때 강력했던 포우하탄 연방의 급격한 쇠퇴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포우하탄 부족민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쫓겨났다. 일부는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고, 일부는 정착민 사회에 동화되었으며, 나머지는 버지니아에 설치된 보호구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러나 이 보호구역마저도 계속 늘어나는 이민자들 때문에 강제로 빼앗기거나 축소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원래 포우하탄 연맹에 속했던 부족 중 7개 부족만이 버지니아 주에서 인정받고 있다. 파문키와 맛타포니는 17세기에 설립된 보호구역을 여전히 통제하고 있으며, 각 보호구역은 현재의 킹 윌리엄 군 경계 내에 있는 동명의 강 사이에 있다.

한편, 백인 정착민들은 버지니아에 대한 지배 기반을 확고히 했다. 제임스타운 학살로 헨리카스 정착촌과 대학이 파괴되었지만, 71년 후인 1693년에는 미들 플랜테이션에 윌리엄 & 메리 대학교가 설립되었다. 이 대학교는 하버드 대학교에 이어 미국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대학교이다. 1698년에는 버지니아 식민지의 수도가 제임스타운에서 미들 플랜테이션으로 옮겨졌으며, 그 이름도 현재의 윌리엄스버그로 바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