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임스 3세 (스코틀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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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임스 3세는 1452년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났으며, 제임스 2세의 사망으로 1460년 8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는 섭정 시대 이후 친정을 시작했으나, 귀족들과의 갈등, 외교 정책 실패 등으로 인해 불만을 샀다. 1469년 덴마크의 마가레타와 결혼했으며, 1488년 소치번 전투에서 패배하여 사망했다. 그의 치세 동안 문화적 발전이 있었지만, 정치적으로는 불안정했으며, 아들 제임스 4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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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3세 (스코틀랜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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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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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 | 스코틀랜드 국왕 |
통치 | 1460년 8월 3일 – 1488년 6월 11일 |
대관식 | 1460년 8월 10일 |
선임자 | 제임스 2세 |
후임자 | 제임스 4세 |
섭정 유형 | 섭정 |
섭정 | 마리 드 겔드르 (1460–1463) 제임스 케네디, 세인트 앤드루스 주교 (1463–1465) 길버트 케네디, 초대 케네디 경 (1465–1466) 로버트 보이드, 초대 보이드 경 (1466–1469) |
배우자 | 덴마크의 마르그레테 (1469년 7월 결혼, 1486년 7월 14일 사망) |
자녀 | 제임스 4세 제임스, 로스 공작 존, 마 백작 |
왕가 | 스튜어트 |
아버지 | 제임스 2세 |
어머니 | 마리 드 겔드르 |
출생일 | 1451년 7월 10일 또는 1452년 5월 |
출생 장소 | 스털링 성 또는 세인트 앤드루스 성 |
사망일 | 1488년 6월 11일 (36세) |
사망 장소 | 스털링셔, 소키번, 스코틀랜드 |
매장지 | 캠버스케네스 수도원 |
2. 생애
제임스 3세의 정확한 출생 연도와 장소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1452년 5월 10일 에든버러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으나, 1451년 7월 또는 1452년 5월에 스털링 성 또는 세인트앤드루스 성에서 태어났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전기 작가 노먼 맥두갈은 1452년 5월 말 세인트앤드루스 출생설을 지지한다. 그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2세 국왕과 왕비 겔데른의 메리 사이의 아들로, 아버지가 제8대 더글러스 백작 윌리엄 더글러스를 살해한 직후의 혼란기에 태어났다.[1]
1460년 8월 3일, 아버지 제임스 2세가 록스버그 성 포위전 중 사고로 사망하자 8살(또는 9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당시 국왕이 스코운 수도원으로 이동하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아버지 사망 일주일 후 켈소 수도원에서 대관식을 치렀다.[2] 어린 국왕을 대신해 어머니 메리와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제임스 케네디 등이 포함된 섭정 회의가 정치를 이끌었다.[49]
성장한 제임스 3세는 귀족들을 멀리하고 자신과 가까운 인물들을 중용하며 독자적인 통치를 시도했으나, 이는 귀족들의 큰 불만을 샀다. 1469년 8월 10일,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1세의 딸 마르가레타와 결혼했다.[50] 당시 덴마크는 지참금을 현금으로 지불하기 어려워 그 대신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를 스코틀랜드에 담보로 넘겼고, 이 두 제도는 결국 스코틀랜드 영토로 편입되었다.[51]
귀족들과의 계속된 갈등은 결국 1488년 반란으로 이어졌다. 제임스 3세는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귀족들과 장남 제임스가 연합한 군대와 소치번 전투에서 맞서 싸웠으나 패배하고 전투 중에 사망했다.[52][53]
정치적으로는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문화와 예술에는 깊은 관심을 보여 그의 치세 동안 스코틀랜드 예술 분야가 발전하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도 받는다.[54][55]
2. 1. 섭정 시대
제임스 2세가 사망했을 때 제임스 3세는 9살의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그의 통치 초기에는 섭정이 필요했다. 처음에는 국왕의 어머니인 메리 오브 겔더스가 정부를 이끌었으며[49], 제임스 3세는 국무장관이자 고전 학자인 아치볼드 화이트로에게 교육을 받았다.[2] 1461년 3월, 제위 첫 의회에서는 세인트앤드루스 주교인 제임스 케네디, 글래스고 주교, 앵거스의 얼 앵거스 백작, 헌틀리의 헌틀리 백작, 아길의 아길 백작, 오크니의 오크니 백작으로 구성된 섭정 위원회를 임명했다.[3]메리 오브 겔더스는 영리하고 유능한 통치자로 평가받으며, 잉글랜드 왕국에서 벌어진 장미 전쟁 동안 실용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1461년 3월 토턴 전투에서 랭커스터 왕가가 패배하자, 망명한 잉글랜드의 헨리 6세, 앙주의 마가렛, 웨일스 공 에드워드를 린리스고 궁전과 에든버러의 도미니크 수도원에 머물게 하며 영접했다.[4] 메리는 랭커스터 왕가를 돕기 위해 스코틀랜드 군대를 파견하는 대신, 그들로부터 최대한의 이익을 얻으면서 승리한 요크 왕가와도 협상 가능성을 열어두었다.[5] 이러한 외교 정책의 결과로, 1461년 4월 랭커스터 측은 스코틀랜드의 지원과 대출에 대한 대가로 베릭어폰트위드를 스코틀랜드에 넘겨주었다.
이 시기 메리와 세인트앤드루스 주교 제임스 케네디 사이에는 어린 국왕 제임스 3세의 신병 확보와 외교 정책 방향을 두고 갈등이 있었다. 케네디 주교는 랭커스터 가문과의 동맹을 선호했지만, 메리는 결국 요크 가문을 지지하는 방향으로 기울었다.[6] 자료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1462년 가을 케네디 주교와 그의 지지자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당시 10세였던 제임스 3세를 확보한 것으로 보인다.[7] 메리 오브 겔더스는 1463년 12월에 사망했고, 이후 케네디 주교가 정부를 완전히 장악했다.[49]
케네디 주교는 1465년 5월 사망했고, 그의 형인 길버트 케네디 로드 케네디가 제임스 3세의 후견인이 되었다. 그러나 로드 케네디는 의회의 승인을 받지 않았고, 자신의 이복 동생 패트릭 그레이엄을 새로운 세인트앤드루스 주교로 임명하는 등 케네디 가문을 편애하여 점차 인기를 잃었다.[8]
1466년 7월, 로버트 로드 보이드와 그의 아들 토마스가 이끄는 무장 세력이 린리스고 궁전에서 사냥 중이던 제임스 3세를 납치하여 에든버러 성으로 데려가는 쿠데타를 일으켰다.[9] 당시 14세였던 국왕은 같은 해 10월 스코틀랜드 의회 앞에서 자신은 불쾌하지 않으며, 로드 보이드를 자신이 21세가 될 때까지 총독으로 임명한다고 선언해야 했다.[9] 보이드 파벌은 권력을 장악한 후 로드 보이드의 아들 토마스를 애런 백작으로 만들고, 1467년에는 국왕의 13세 여동생인 메리와 결혼시키는 등 권력을 남용하여 국왕과 삼부회의 반감을 샀다.[10]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보이드 가문은 외교적 성과를 노렸고, 1468년 8월 덴마크에 사절단을 보내 왕실 결혼을 추진했다. 협상 결과,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세 국왕(노르웨이와 스웨덴 국왕 겸임)의 외동딸인 마거릿과 제임스 3세의 결혼이 성사되었다.[11][50] 당시 북유럽 3국은 칼마르 동맹 하에 있었기에 이는 스코틀랜드에게 유리한 동맹이었다.[50] 마거릿의 지참금은 60,000 라인 길더로 정해졌으나, 크리스티안 1세는 현금이 부족하여 약속된 선금 10,000 길더 중 2,000 길더밖에 마련하지 못했다. 결국 1469년 5월, 지참금 미납액에 대한 담보로 노르웨이 국왕으로서 크리스티안 1세가 가지고 있던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를 스코틀랜드에 전당으로 넘겼다.[11][51] 제임스 3세는 이 섬들을 돌려줄 생각이 없었고, 결국 두 제도는 스코틀랜드 영토가 되었다.[12][51] 제임스 3세와 마거릿은 1469년 8월 10일에 결혼했다.[49]
보이드 가문이 토지와 관직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자 그들에 대한 반감이 커졌다. 1468년 4월에는 국왕의 이모부인 애솔 백작과 오흐터하우스의 제임스 스튜어트 등이 에든버러 성을 점거하여 국왕을 보이드 가문으로부터 구출하려 시도하기도 했다.[13] 1469년, 당시 17세였던 제임스 3세의 결혼은 그의 미성년 통치가 끝나는 시점임을 의미했다. 국왕은 보이드 로드가 잉글랜드에 사절로 가고 애런 백작 토마스가 덴마크 사절단으로 떠난 틈을 타 보이드 가문에 대한 복수를 계획하기 시작했다.[14] 이로써 긴 섭정 시대가 끝나고 제임스 3세의 친정이 시작될 기반이 마련되었다.
2. 2. 친정 시작과 잉글랜드와의 관계
1469년 친정을 시작한 제임스 3세는 스코틀랜드 역사상 성인이 되어 왕위를 계승하고 적법한 형제들을 둔 몇 안 되는 스튜어트 군주 중 한 명이었다. 당시 그에게는 두 남동생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당시 14세)와 마 백작 존(당시 12세), 그리고 세 명의 이모부(애솔 백작, 뷰켄 백작, 모레이 주교)가 있었으며, 이들의 존재는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정치적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었다.[16]친정 초기, 제임스 3세는 보이드 가문의 세력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다. 보이드 가문은 1466년 쿠데타를 일으켜 어린 국왕을 장악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많은 귀족들의 반감을 샀다.[9][10] 1469년, 제임스 3세가 덴마크의 마거릿 공주와 결혼하게 되면서 성년이 임박하자, 그는 보이드 가문에 대한 복수를 계획했다.[14] 로드 보이드와 그의 아들 애런 백작은 국왕의 계획을 미리 알고 해외로 도주했으며, 남은 보이드 가문 인사들은 반역죄로 처벌받았다.[15] 제임스 3세는 1469년 7월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수도원에서 마거릿과 결혼식을 올렸고, 이 결혼을 통해 제임스 4세, 로스 공작 제임스, 마 백작 존 세 아들을 얻었다.
제임스 3세와 마거릿의 결혼은 오크니 제도와 셰틀랜드 제도가 스코틀랜드 영토로 편입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마거릿의 아버지인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1세는 지참금 60,000 라인 길더 중 일부만 지불할 수 있었고, 미납된 지참금에 대한 담보로 1469년 5월 두 제도를 스코틀랜드에 전당했다.[11] 제임스 3세는 이 섬들을 돌려줄 의사가 없었고, 1472년 2월 스코틀랜드 의회는 코펜하겐 조약에 따른 협상을 마무리하며 두 제도를 스코틀랜드 왕령으로 공식 병합했다.[21] 이론적으로 덴마크는 지참금 잔액을 지불하고 섬을 되찾을 수 있었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21]
친정 초기 제임스 3세의 정책은 왕권과 스튜어트 왕조의 위상을 높이고, 영토를 확장하며,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모색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그는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프랑스의 루이 11세 사이를 중재하거나[17], 브르타뉴 공국[17] 및 겔레르 공국[19]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하는 등 야심찬 대륙 정책을 추진하려 했다. 또한 프랑스에 군사 지원을 제안하며 과거 페르트-시농 조약에서 논의되었던 상토뉴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기도 했다.[19] 그러나 이러한 비현실적인 계획들은 의회의 비판에 직면했으며, 특히 국왕이 국내의 사법 행정 등 기본적인 통치 업무를 소홀히 한다는 불만이 제기되었다.[20] 제임스 3세와 의회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어 그의 외교 및 국내 정책에 대한 반대와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이는 훗날 두 차례의 큰 반란(1482-1483년, 1488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6]
1474년 10월, 제임스 3세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와 45년간의 휴전 협정을 맺고, 자신의 아들인 로스세이 공작과 에드워드 4세의 딸 요크의 세실리의 혼인을 약속했다. 이 결혼 동맹의 대가로 잉글랜드는 신부의 지참금 20,000 마르크 스털링을 17년에 걸쳐 분할 지급하기로 했으며, 이는 제임스 3세에게 상당한 재정적 이득을 안겨주었다.[22] 1479년까지 그는 지참금으로 8,000 마르크를 확보했는데, 이는 당시 스코틀랜드 왕실의 연간 정기 수입과 맞먹는 금액이었다.[22] 제임스 3세는 남은 통치 기간 동안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22], 이러한 평화 정책은 전통적인 적대 관계에 익숙했던 스코틀랜드 귀족들 사이에서 인기가 없었으며, 특히 그의 동생 올버니 공작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국내적으로 제임스 3세는 1475년, 강력한 게일 스코틀랜드 영주인 아일스 영주 겸 로스 백작 존 맥도날드를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존 맥도날드는 과거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와 비밀리에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어 스코틀랜드를 분할하려 했던 반역 혐의로 기소되었다.[23] 군사적 압박 끝에 존 맥도날드는 1476년 국왕에게 항복했고, 로스 백작령을 포함한 상당 부분의 영지와 권한을 박탈당한 채 의회 영주로 지위가 격하되었다.[25] 보이드 가문 축출, 오크니 및 셰틀랜드 제도 병합, 아일스 영주 복속 등을 통해 제임스 3세의 권력은 정점에 달한 것으로 보였다.[25]
그러나 1470년대 후반부터 잉글랜드와의 관계는 다시 악화되기 시작했다. 스코틀랜드 측의 국경 침범과 약탈이 빈번해지자[28], 1480년 에드워드 4세는 사실상의 선전 포고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제임스 3세에게 휴전 위반에 대한 배상, 베릭 등 국경 지역 반환, 그리고 잉글랜드 왕에 대한 신종 서약을 요구했다.[28] 1480년 여름,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이끄는 스코틀랜드 군대가 노섬벌랜드를 침공하여 밤버러 성을 불태우는 등[29] 양국 간의 군사적 긴장은 고조되었다. 1481년에는 잉글랜드 함대가 포스 강을 공격하고 스코틀랜드 군대가 잉글랜드를 세 차례 습격하는 등 충돌이 이어졌다.[31]
결국 1482년, 에드워드 4세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훗날 리처드 3세)를 총사령관으로 삼아 스코틀랜드를 대대적으로 침공했다. 이때 제임스 3세의 동생인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도 "알렉산더 4세"를 칭하며 잉글랜드 군대와 함께했다. 제임스 3세는 침공에 맞서 군대를 이끌고 나섰으나, 1482년 7월 로더 다리에서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게 체포되어 에든버러 성에 감금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귀족들이 이미 올버니 공작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국왕이 감금된 사이, 올버니 공작이 이끄는 새로운 정권이 수립되었다. 한편, 잉글랜드 군대는 에든버러를 점령하지 못하고 자금 부족으로 철수했지만, 철수 과정에서 베릭어폰트위드를 최종적으로 점령하여 잉글랜드 영토로 만들었다.
2. 3. 귀족과의 갈등과 반란
제임스 3세는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귀족들이 번갈아 섭정을 맡았으나, 성장 후에는 귀족들을 멀리하고 음악가 등 자신과 가까운 인물들을 중용하면서 귀족들의 큰 불만을 샀다. 이는 결국 귀족들의 반란으로 이어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1469년 제임스 3세가 친정을 시작할 무렵, 그의 통치 기반은 불안정했다. 왕의 여동생 메리는 남편인 에어런 백작에게 왕이 그를 체포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렸고, 이들 부부는 덴마크로 도피했다가 브뤼헤로 갔다. 그곳에서 망명 중이던 로드 보이드와 합류했다. 같은 해 11월 의회는 로드 보이드, 그의 형제 알렉산더 경, 에어런 백작에게 반역죄를 선고하고 작위를 몰수했다. 알렉산더 경은 사형을 선고받고 참수되었다.[15] 제임스 3세는 1469년 7월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수도원에서 덴마크의 마거릿과 결혼했으며[15], 이 결혼으로 제임스, 로스 공작 제임스, 마 백작 존 세 아들을 두었다.
제임스 3세에게는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와 마 백작 존이라는 두 남동생과 세 명의 강력한 이모부(애솔 백작, 뷰켄 백작, 모레이 주교)가 있었는데, 이들의 존재는 그의 통치에 복잡성을 더했다.[16] 친정 초기에는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나, 제임스 3세의 외교 및 국내 정책은 의회와의 지속적인 마찰을 빚었다. 왕이 의회의 불만을 무시하거나 약속을 지키지 않는 태도는 1482-1483년과 1488년에 일어난 두 차례의 주요 반란의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16]
1475년, 제임스 3세는 게일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강력한 영주였던 존 맥도날드(아일스 영주 겸 로스 백작)를 제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22] 존 맥도날드는 1462년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와 웨스트민스터 조약을 맺어 스코틀랜드 정복 시 왕국 북부를 자신과 더글러스 백작이 나누어 갖기로 모의한 바 있었다.[23] 1475년 9월, 존 맥도날드는 잉글랜드 및 더글러스 백작과의 반역적 거래, 로테세이 성 포위 등 여러 혐의로 기소되었고, 재판 불출석으로 재산 몰수형을 받았다.[23] 레녹스 백작 존 스튜어트, 아가일 백작 콜린 캠벨, 애솔 백작 존 스튜어트, 헌틀리 백작 알렉산더 고든 등이 존 맥도날드 토벌 명령을 받았다.[24] 결국 1476년 7월, 존 맥도날드는 에든버러에서 왕 앞에 항복했고, 재산 몰수는 취소되었으나 로스 백작령은 왕실에 병합되었으며 킨타이어, 냅데일 등의 영지와 셰리프 직위를 잃고 단순한 의회 영주로 격하되었다.[25] 이 사건은 제임스 3세의 권력을 일시적으로 강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25]
그러나 제임스 3세의 독단적인 정책과 통치 방식은 귀족들의 반감을 계속 키웠다. 특히 왕이 사법 순회를 직접 돌지 않고 임명된 재판관에게 위임하는 관행[26], 심각한 범죄에 대한 사면을 남발하며 돈을 챙긴다는 의혹, 잦은 과세 요구 등은 의회로부터 지속적인 비판을 받았다.[26] 또한 왕은 윌리엄 스키브스, 존 램지, 토마스 코크란 등 "천한 출신"으로 여겨지는 측근들을 중용하여 기존 귀족 세력을 소외시켰다.
1479년에는 왕과 그의 두 동생 사이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마 백작 존은 뚜렷한 이유 없이 크레이그밀러 성에 투옥되었다가 의문스럽게 사망했다. 동생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와의 갈등 원인은 명확하지 않으나, 올버니가 앵글로-스코틀랜드 동맹에 반대하고 국경 지역에서 왕권을 넘보는 행위를 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27] 1479년 5월, 올버니 공작은 던바 성을 무장시키고 잉글랜드와의 휴전을 위반하는 등 반역죄로 기소되자[27] 프랑스로 망명하여 루이 11세의 환대를 받았다.[27]
한편, 잉글랜드와의 관계도 악화되었다. 제임스 3세는 1478년 여동생 마가렛과 앤서니 우드빌, 리버스 백작의 혼인을 제안하며 동맹 강화를 시도했으나, 이후 스코틀랜드의 국경 침략이 발생하며 관계가 틀어졌다. 1480년 에드워드 4세는 사실상 선전 포고를 하며 베릭 등의 반환을 요구했다.[28] 앵거스 백작 아치볼드 더글러스가 노섬벌랜드를 침공하여 밤버러 성을 불태웠고[29], 제임스 3세는 프랑스에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30] 1481년에는 잉글랜드 함대가 포스 강을 공격하는 등 양국 간의 군사적 충돌이 이어졌다.[31]
1482년, 에드워드 4세는 글로스터 공작 리처드(훗날 리처드 3세)를 사령관으로 삼아 대규모 침공을 감행했다. 이때 망명 중이던 올버니 공작 알렉산더도 "알렉산더 4세"를 자칭하며 침공군에 합류했다. 제임스 3세는 군대를 이끌고 맞서려 했으나, 1482년 7월 로더 다리에서 불만을 품은 귀족들에게 체포되어 에든버러 성에 감금되었다. 일부 귀족들은 이미 올버니 공작과 내통하고 있었다는 설도 있다. 왕이 갇힌 사이 그의 이복 삼촌 2명(그중에는 앤드루 스튜어트)이 그의 동생인 알렉산더 올버니 공작을 섭정으로 내세워 잠시 동안 대리 정부를 구성했다. 그는 결국 1482년 9월 말에 풀려났다. 풀려난 후 제임스는 올버니 정부의 구성원들을 매수하여 권력을 되찾을 수 있었고, 1482년 12월까지 올버니 정부는 붕괴되었다. 1483년부터 그는 올버니에 대한 지지를 꾸준히 줄여나갔다. 특히 올버니가 공석이 된 마 백작령을 주장하려 하자 강력한 조지 고든, 2대 헌틀리 백작이 국왕 편에 서서 개입했다. 한편, 잉글랜드 군대는 에든버러 성을 점령할 수 없었고, 자금이 고갈되어 마지막으로 베릭어폰트위드를 점령한 후 잉글랜드로 돌아갔다.
1483년 1월, 올버니는 던바에 있는 자신의 영지로 도망쳤다. 4월 9일, 그의 후원자인 에드워드 4세가 사망하자 올버니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그는 잉글랜드로 도망쳐 자신의 요새인 던바 성에 잉글랜드 수비대를 들였다. 1년 후 그는 오랫동안 망명했던 제9대 더글러스 백작과 함께 또 다른 침략을 시도하기 위해 돌아왔다. 로크마벤 페어 전투 이후 그는 두 번째로 잉글랜드로 도망쳐야 했다. 그의 작위와 영지는 왕실에 몰수되었다. 이후 그는 1485년에 다시 스코틀랜드로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으며, 제임스가 투옥되었던 바로 그 성에서 체포되어 감금되었다는 연구도 있다. 연대기 작가 아담 아벨은 올버니가 경비병을 죽이고 침대 시트로 만든 밧줄을 사용하여 성벽을 타고 에든버러 성에서 탈출했다는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정황상 뒷받침할 증거가 있다. 이는 올버니의 마지막 침략이었고, 이후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기록에 따르면 결투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한편 제임스 3세는 1470년대부터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정책으로 돌아갔다. 1484년 8월 제임스 3세는 리처드 3세와 휴전 및 동맹을 제안하고, 로테세이 공작과 리처드의 조카인 앤 드 라 폴의 결혼을 제안했다.
사순절 넷째 주 일요일인 1486년 3월 5일,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황금 장미를 축복하여 제임스 3세에게 보냈다. 이는 매년 자격 있는 군주에게 장미를 보내는 관습이었다. 이몰라 주교인 자코모 파사렐리는 장미를 스코틀랜드로 가져와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결혼에 대한 면제를 완료하기 위해 런던으로 돌아갔다.[32] 1486년과 1487년 제임스는 잉글랜드와 휴전을 제안하고, 그의 둘째 아들인 제임스, 오몬드 후작을 잉글랜드의 헨리 7세의 처제인 요크의 캐서린과 결혼시키려 했다. 1487년 4월 교황은 제임스 3세에게 사면장을 발급하여 교회 임명에 대한 스코틀랜드 왕실의 권한을 강화하여, 국왕과 그의 후계자들이 대성당과 수도원에서 공석이 발생할 경우 효과적으로 자신들의 후보자를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33]
1482년에 운 좋게 죽거나 아들을 왕위에 앉히려는 시도에서 처형될 수도 있었지만, 제임스는 1480년대에도 자신의 행동을 고치지 않았다. 그는 지배적인 정치 상황을 고려할 때 별 의미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확보하려는 집착적인 시도를 계속했다. 그는 더 강력한 마그나테들에게 인기가 없는 "측근" 그룹을 계속해서 선호했다. 그는 정의를 시행하기 위해 여행을 가지 않았고, 항상 에든버러에 머물렀다. 그는 또한 부인인 덴마크의 마가렛, 스코틀랜드 여왕과 소원해졌고, 그녀는 아들들과 함께 스털링 성에 살고 있었다.
2. 4. 웨일스 정복 시도와 실패
1437년, 제임스 3세는 군대를 이끌고 웨일스 정복에 나섰다. 당시 스코틀랜드 귀족들은 웨일스 정복에 반대했지만, 제임스 3세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침공을 강행했다. 결국 웨일스를 군사적으로 굴복시켜 스코틀랜드 영토로 편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확보한 영토는 웨일스 전체의 3분의 1에 그쳤다. 이는 이미 1288년 잉글랜드의 국왕 에드워드 1세가 웨일스를 침공하여 상당 부분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2. 5. 소치번 전투와 죽음
1488년 초, 제임스 3세는 의회 회의를 이용하여 과거 자신에게 충성을 보였던 이들에게 공개적으로 보상하고 4명의 새로운 의회 귀족을 창설하는 등 지지 세력을 확보하려 했다. 또한 차남 제임스를 로스 공작으로 승격시켰는데, 이는 왕위 계승자인 장남 제임스, 로테세이 공작을 제치고 차남을 편애한다는 인식을 강화하여 귀족들의 반발을 더욱 키웠다.[34]앵거스 백작과 아길 백작, 그리고 홈 가문과 헵번 가문 등이 반대 세력의 중심이 되었다. 1488년 2월 2일, 15세의 왕세자 제임스가 아버지 모르게 스털링 성을 떠나 반란군에 합류하면서 제임스 3세에 대한 반란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반란군은 왕세자를 자신들의 명목상 지도자로 내세우며, 왕세자를 '복수심에 불타는 아버지와 사악한 친잉글랜드 고문들'로부터 보호하고 왕을 감시하는 섭정 위원회를 세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35][36] 많은 귀족들은 제임스 3세의 통치 아래에서 자신들의 안전을 우려했다.[37] 제임스 3세가 스코틀랜드 대법관이었던 아길 백작을 해임하고 그 자리에 애버딘 주교 윌리엄 엘핀스톤을 임명한 것 역시 귀족들의 반감을 더욱 키웠다.[38]
제임스 3세는 잉글랜드의 헨리 7세에게 군사 지원을 요청했고[39], 북동부 지역에서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반란군과 협상을 시도했지만, 부칸 백작의 조언에 따라 약속을 어기고 무력으로 반란을 진압하려 하면서 일부 귀족들의 지지를 잃었다.[40] 블랙니스 성에서 왕당파 군대와 반란군 사이에 결정적인 교전이 벌어졌으나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제임스 3세는 에든버러 성으로 후퇴하여 지지자들에게 보상을 분배하며 세력을 규합하려 했다.[41]
1488년 6월, 제임스 3세는 에든버러 성을 떠나 군대를 이끌고 스털링으로 향했다. 6월 11일, 스털링 남쪽의 '스털링 벌판'이라고 불리던 곳에서 왕당파와 반란군은 소치번 전투를 벌였다.[41][42]

제임스 3세는 이 전투 중에 사망했으나, 그의 정확한 사망 경위는 불분명하다. 16세기 연대기 작가 아담 아벨과 존 레슬리는 제임스 3세가 배넉 번 근처의 밀턴 밀(Milltown)에서 살해되었다고 기록했다.[43] 후대의 기록들은 더 극적인 설명을 덧붙였다. 피트스코티의 로버트 린제이는 왕이 도주하다 말에서 떨어져 인근 방앗간에서 도움을 받던 중, 자신을 사제라고 속인 반란군 측 인물에게 암살당했다고 전했다. 조지 뷰캐넌은 왕이 배를 타기 위해 도망치다 말에서 떨어졌고, 방앗간에 피신했으나 추격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록들은 왕의 비겁함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을 수 있으며, 당시 의회 기록에는 왕이 "살해되었다"거나 자신의 "잘못된 결정의 결과"로 사망했다고만 언급되어 있다. 다른 의회 기록에서는 왕이 측근 존 로스의 조언에 따라 전장을 이탈했다가 "알려지지 않은 사악한 자들"에게 살해되었다고도 한다.[44]
제임스 3세는 왕비 마거릿과 함께 캠버스네스 수도원의 제단 앞에 묻혔다. 그의 아들이자 계승자인 제임스 4세는 장례식에 참석했으며,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자신의 연루를 속죄하기 위해 1496년부터 부모의 영혼 구원을 위해 기도할 사제를 임명했다. 이 관행은 스코틀랜드 종교 개혁 때까지 이어졌다.[45] 1865년에는 빅토리아 여왕의 지원으로 제임스 3세와 마거릿 왕비의 유해 위에 새로운 석조 기념물이 세워졌다.[46]
3. 유산과 평가
귀족들에게 패배한 제임스 3세는 포로로 잡혀 '악마의 왕'이라는 오명을 쓴 채 죽음을 맞이했다. 죽기 직전 "나는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내 노력이 다 쓸모없이 돌아가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그의 죽음으로 웨일스가 독립했으며, 제임스 3세의 노력은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4. 가족 관계
제임스 3세는 1469년 7월 에든버러의 홀리루드 사원에서 덴마크의 마르그레테와 결혼했다. 그들은 세 명의 자녀를 두었다.[56]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제임스 4세 | 1473년 3월 17일 | 1513년 9월 9일 | 제임스의 스코틀랜드 왕위 계승자 |
제임스 스튜어트 (로스 공작) | 1476년 3월 | 1504년 1월 | 세인트앤드루스 대주교(1497–1504) 스코틀랜드 대법관(1502–1504) |
존 스튜어트 (마 백작) | 1479년 12월 | 1503년 3월 11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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