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고려-거란 전쟁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은 993년 거란의 침략으로 시작되었다. 거란은 고려가 송나라와 교류하는 것을 막고, 형식적인 사대 관계를 맺기 위해 침략했다. 고려는 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해 강동 6주를 획득하며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고려는 송나라와 교류를 지속했고, 거란은 강동 6주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여 이후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993년 분쟁 - 고려-거란 전쟁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인 고려-거란 전쟁은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 주요 인물들의 활약과 고려군의 저항으로 거란의 침략을 격퇴하고 동아시아 세력 균형에 기여했다. - 993년 한국 - 고려-거란 전쟁
10세기 말부터 11세기 초 고려와 요나라 사이에 벌어진 세 차례의 전쟁인 고려-거란 전쟁은 서희의 외교 담판과 강감찬의 귀주대첩 등 주요 인물들의 활약과 고려군의 저항으로 거란의 침략을 격퇴하고 동아시아 세력 균형에 기여했다. - 고려-거란 전쟁 - 제3차 고려-거란 전쟁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은 1018년부터 1019년까지 고려와 거란 사이에 벌어진 전쟁으로, 강감찬의 활약으로 고려의 승리로 종결되었으며, 이후 고려는 거란과 평화 협정을 맺고 형식적으로 복속하는 모양새를 취했으나 실질적으로는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송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지속했다. - 고려-거란 전쟁 - 강동 6주
강동 6주는 993년 서희의 담판으로 고려가 요나라로부터 확보한 압록강 동쪽의 여섯 지역으로, 과거 고구려 영토였으나 여진족이 거주하던 곳을 고려가 외교 및 군사적 정복을 통해 편입하여 영토를 확장하고 거란의 침입을 막아 영유권을 확고히 한 지역이다.
| 제1차 고려-거란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제1차 고려-거란 전쟁 | |
![]() | |
| 개요 | |
| 분쟁 | 제1차 고려-거란 전쟁 |
| 일부 | 고려-거란 전쟁 |
| 날짜 | 993년 11월 - 993년 12월 |
| 장소 | 한반도 북부 |
| 원인 | 불명 |
| 결과 | 외교적 해결 |
| 결과 상세 | 요나라는 전투 없이 전략적 목표 달성 후 철수 고려는 요나라의 조공국이 됨 994년에 요나라의 달력을 채택함 요나라는 고려에게 요나라와 고려 국경 사이의 땅을 합병할 수 있도록 허락함. 그리고 고려는 요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그 지역을 요새화함.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고려 |
| 교전국 2 | 요나라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고려 | 서희 태도수 |
| 요나라 | 소손녕 |
| 병력 | |
| 고려 | 불명 |
| 요나라 | 요나라 주장 800,000명, 실제 추정 병력은 더 적음 |
| 사상자 | |
| 고려 | 불명 |
| 요나라 | 불명 |
2. 배경
2. 1. 국제 정세
2. 2. 고려와 거란의 관계
3. 제1차 고려-거란 전쟁 (993년)
993년 5월과 8월의 두 차례에 압록강 부근의 여진으로부터 거란이 고려를 침입할 것이라는 통고가 있더니,[12] 10월에 소손녕의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였다.[13]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박양유와 서희 등을 보내 이를 막는 한편, 성종이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지휘하였다.[13] 하지만 봉산군을 빼앗기고 선봉장 윤서안이 사로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돌아왔으며, 조정에서는 이몽전(李蒙戩)을 청화사(請和使)로 하여 내침의 진의를 타진케 했으나, 소손녕은 항복만 요구할 뿐 명분없는 침입이었다.[14]
또한 고려 조정에서는 “임금께서 서울의 대궐에 돌아가서 중신(重臣)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항복을 청해야 합니다.”(항복론)[14]와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서 거란에게 주고 황주(黃州)부터 절령(岊嶺)까지를 국경으로 삼는 것이 좋겠습니다.”(할지론)[14] 등의 의견이 나왔고, 할지론이 대세로 굳어가는 경향을 보였다. 하지만 서희와 이지백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므로[15] 성종도 이에 따르게 되었다.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을 공격하다 실패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 고려 조정에서는 서희를 급파해 소손녕의 화친 제의에 답하였다.
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자 서희는 이에 대해 소손녕의 말을 반박하였다.
이에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귀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의 이른바 강동 6주를 설치하여 그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시켰다. 결국 제1차 고려-거란 전쟁의 목적은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요와 교류하게 하려는 목적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로써 요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실제로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3. 1. 거란의 침입과 고려의 대응
993년 5월과 8월, 압록강 부근의 여진으로부터 거란의 고려 침입을 알리는 경고가 두 차례 있었다.[12] 그해 10월,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였다.[13]이에 고려 조정은 박양유와 서희 등을 보내 거란군을 막게 하고, 고려 성종은 안북부까지 나아가 전선을 직접 지휘하였다.[13] 그러나 봉산 전투에서 고려군이 패배하고 선봉장 윤서안이 포로로 잡히자, 성종은 서경으로 후퇴하였다.[14] 고려 조정은 이몽전을 청화사로 보내 거란의 침입 의도를 파악하려 했으나, 소손녕은 항복만을 요구하였다.[14]
고려 조정 내에서는 항복론과 서경 이북의 땅을 거란에 넘겨주자는 할지론이 대두되었으나, 서희와 이지백 등이 항전을 강력히 주장하여 성종도 이들의 의견에 따르게 되었다.[14][15] 한편, 소손녕은 안융진 전투에서 패배한 후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고, 고려는 서희를 보내 이에 응하였다.
3. 2. 서희의 외교 담판
993년 10월, 소손녕이 이끄는 거란군이 고려를 침략하자, 고려 조정은 박양유와 서희 등을 보내 이를 막는 한편, 성종이 직접 전선을 지휘하였다.[13] 봉산군 전투에서 패배하고 선봉장이 사로잡히는 등 초기에는 어려움을 겪었으나,[14] 안융진 전투에서 거란군이 패배하자 고려에 화친을 제안하였다.[14] 이에 고려 조정은 서희를 보내 소손녕과 담판을 짓게 하였다.소손녕은 서희와의 담판에서 고려가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는 거란의 소유인데 고려가 침략하여 차지했으며, 거란과 국경을 접하고 있음에도 송을 섬기기 때문에 침략했다고 주장했다.[14]
이에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기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며, 요나라의 동경도 고려 땅에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또한 압록강 안팎은 본래 고려 땅인데 여진족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길을 막고 있어 거란으로 가는 것이 어렵다고 주장하며, 여진을 쫓아내고 고려의 옛 영토를 돌려주면 조빙을 잘 할 것이라고 설득했다.
결국 고려는 거란과의 협상을 통해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하는 실리를 얻었다. 거란은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고려는 이후에도 비공식적으로 송과의 교류를 지속했고, 거란은 강동 6주의 가치를 인식하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3. 3. 전쟁의 결과와 강동 6주
993년 서희와 소손녕의 담판 이후, 고려는 동여진을 몰아내고 강동 6주를 설치하여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장했다.[14] 강동 6주에는 흥화진(興化鎭), 통주(通州), 귀주(龜州), 곽주(郭州), 용주(龍州), 철주(鐵州) 등이 포함되었다. 이로써 요나라는 고려에 대해 형식적인 사대의 예를 받아 침공의 목적을 달성했으며, 고려는 강동 6주를 획득하여 실리를 얻었다.하지만 고려는 요나라와의 약조와는 달리 비공식적으로나마 송나라와 계속 교류하였고, 요나라 또한 강동 6주가 동여진 정벌과 고려 압박에 가치가 크다는 사실을 알고 재침략의 기회를 엿보게 되었다.
참조
[1]
서적
[2]
서적
[3]
서적
[4]
서적
[5]
서적
[6]
서적
[7]
서적
[8]
서적
[9]
서적
[10]
서적
[11]
간행물
요사
[12]
역사서
고려사
[13]
역사서
고려사
[14]
역사서
고려사절요
[15]
역사서
고려사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