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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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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동 6주는 고려가 요나라의 침입을 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해 확보한 지역으로, 흥화진, 용주, 철주, 통주, 곽주, 귀주를 아우른다. 이 지역은 군사적, 교통상의 요충지였으며, 고려는 이곳에 천리장성을 쌓아 북방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1차 고려-거란 전쟁 이후 요나라의 재침입 시도와 강화 조약을 거쳐 고려는 강동 6주를 계속 영유했다. 이후 금나라와의 관계를 통해 보주를 수복하며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을 확정했다. 강동 6주의 확보는 고려의 영토 확장에 기여했으나, 북진 정책의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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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6주
강동육주
고려 서북단(황록색 부분)이 강동육주
고려 서북단(황록색 부분)이 강동육주
한글강동 6주 (강동 육주)
한자江東六州
히라가나고토로쿠슈
가타카나가: 카ンドン류크추
나: 카ンドン뉴크추
로마자 표기Gangdong Yukju
매큔-라이샤워 표기법Kangtong Yukchu

2. 역사적 배경

강동 6주는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일시적으로 당나라가 지배한 후 발해의 지배하에서 여진족이 거주했다. 993년 거란의 고려 침공 이후 강화에서 고려는 송나라와 관계를 단절하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며 조공을 바치기로 했지만,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는 여진의 존재가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이로써 고려는 이전까지 청천강이 북쪽 경계였던 영토를 압록강까지 넓힐 수 있었다.

2. 1. 강동 6주 확보 과정

고려는 요나라의 1차 침입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와 통교하는 조건으로 강동 6주의 주권을 인정받는 화약을 체결하였다.[3]

한반도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육로에 위치한 강동 6주는 군사상·교통상의 요지였으나, 고려 건국 이후 줄곧 생여진이 차지하여 고려의 북방 진출에 장애가 되었다. 고려는 서희의 담판 이듬해인 994년(성종 13년)에 대령강압록강 사이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거나 포섭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4] 강동 6주는 압록강 동쪽 280여 리, 곧 흥화진(백마산성), 용주(용천), 철주(철산), 통주(선천), 곽주(곽산), 귀주(구성)에 이른다.[2]

고려는 압록강 동쪽을 차지한 뒤 994년 장흥진(長興鎭, 태천), 귀화진(歸化鎭, 천마 추정), 귀주, 곽주에 성을 쌓았고, 995년 다시 안의진(安義鎭, 정주시 신봉리),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宣州, 선천)·맹주(孟州, 맹산)에 성을 쌓았다.

이후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이어가며 요나라와 교류하지 않자 요나라는 불만을 가졌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강동 6주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1010년요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 요나라 군대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퇴로가 끊길 수도 있음을 염려한 요나라 군대는 고려와 강화하고 퇴각하였다. 이를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라 한다.

이 지역은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일시적으로 당나라가 지배한 후, 발해의 지배하에서 여진족이 거주했다. 993년의 거란의 고려 침공 강화 시, 고려는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며, 거란에 조공하게 되었지만,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는 여진의 존재가 장애가 된다고 하여,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고려는 이 지역에 살던 여진을 정복하고 성을 쌓았다. 이로 인해 고려는 지금까지 청천강이 북쪽 경계였던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대했다.

1009년에 강조가 고려 목종을 살해하고 고려 현종을 옹립하자(강조의 정변),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1010년에 다시 거란의 침공을 받았다. 강조는 거란에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거란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했다. 이 강화 조건으로 강동 6주를 거란에 넘겨주게 되었지만, 고려는 조건을 지키지 않고 강동 6주를 계속 영유했다.

2. 2. 고려-거란 전쟁과 강동 6주

고려는 요나라의 1차 침입 때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요나라와 통교하는 조건으로 강동 6주의 주권을 인정받는 화약을 체결하였다.[3]

한반도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육로에 위치한 강동 6주는 군사상·교통상의 요지였으나, 고려 건국 이후 줄곧 생여진이 차지하여 고려의 북방 진출에 장애가 되었다. 고려는 서희의 담판 이듬해인 994년(성종 13년)에 대령강압록강 사이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거나 포섭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4] 강동 6주는 압록강 동쪽 280여 리, 곧 흥화진(백마산성), 용주(용천), 철주(철산), 통주(선천), 곽주(곽산), 귀주(구성)에 이르며,[2] 이 땅의 북쪽 국경을 따라 쌓은 성들이 고려의 천리장성이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을 차지한 뒤 994년 장흥진(長興鎭, 태천), 귀화진(歸化鎭, 천마 추정), 귀주, 곽주에 성을 쌓았고, 995년 다시 안의진(安義鎭, 정주시 신봉리), 흥화진에, 996년에는 선주(宣州, 선천)·맹주(孟州, 맹산)에 성을 쌓았다.

이후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이어가며 요나라와 교류하지 않자 요나라는 불만을 가졌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강동 6주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1010년요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 요나라 군대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퇴로가 끊길 수도 있음을 염려한 요나라 군대는 고려와 강화하고 퇴각하였다. 이를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라 한다.

이 지역은 옛 고구려의 영토였으며, 일시적으로 당나라가 지배한 후, 발해의 지배하에서 여진족이 거주했다. 993년의 거란의 고려 침공 강화 시, 고려는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며, 거란에 조공하게 되었지만, 고려와 거란 사이에 있는 여진의 존재가 장애가 된다고 하여, 강동 6주를 고려의 영토로 인정받았다. 고려는 이 지역에 살던 여진을 정복하고 성을 쌓았다. 이로 인해 고려는 지금까지 청천강이 북쪽 경계였던 영토를 압록강까지 확대했다.

1009년에 강조가 고려 목종을 살해하고 고려 현종을 옹립하자(강조의 정변),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1010년에 다시 거란의 침공을 받았다. 강조는 거란에 사로잡혀 처형당하고, 거란은 고려의 수도인 개경을 점령했다. 이 강화 조건으로 강동 6주를 거란에 넘겨주게 되었지만, 고려는 조건을 지키지 않고 강동 6주를 계속 영유했다. 이 때문에 1018년에도 거란의 침공을 받지만, 귀주에서 고려가 거란을 격파하고(귀주대첩), 거란은 고려의 강동 6주 영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3. 서희 담판의 의의

고려와 요나라의 1차 전쟁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고려는 요나라와 통교하는 조건으로 강동 6주의 주권을 인정받는 화약을 체결하였다.[3] 한반도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육로에 위치한 강동 6주는 군사·교통의 요지였으나, 고려 건국 이후 줄곧 생여진이 차지하여 고려의 북방 진출에 장애가 되었다. 고려는 서희의 담판 이듬해인 994년(성종 13년)에 대령강압록강 사이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거나 포섭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4]

이후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이어가며 요나라와 교류하지 않자 요나라는 불만을 가졌다. 이에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강동 6주를 내놓을 것을 요구하며 1010년요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다시 침입하였다. 이때 요나라 군대의 뒤에서 양규가 선전하자 퇴로가 끊길 수도 있음을 염려한 요나라 군대는 고려와 강화하고 퇴각하였다. 이를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라 한다.

그러나 서희의 담판은 당대에는 동아시아 최강국인 요나라를 외교 담판을 통해 물리쳤다는 점뿐만 아니라, 이후 조선을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 및 만주와의 경계를 압록강으로 확립하는 근거를 만들어 국경의 안정을 가져왔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3. 1. 서희 담판에 대한 비판적 시각

서희의 담판은 서희만의 공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안융진 전투(청남군 신리)에서 중랑장 대도수와 낭장 유방소손녕의 요나라 군대와 맞서 싸워 이겼기 때문에 소손녕이 담판에 응하였다.[5]

담판 내용도 고려에 일방적으로 유리하지 않았다.[2] 요나라는 고려에 정삭을 받아들이도록 요구했고, 대신 압록강 이동(以東) 280리(강동 6주)에 대한 고려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고려가 요나라의 정삭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요나라에 사대하여 그 연호를 쓴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다.[2] 요나라는 압록강 동쪽의 고려 주권을 인정한 것이지, 땅을 내준 것은 아니었다. 당시 강동 6주 지역은 요나라 땅이 아니라 생여진이 차지하고 있었다.[2]

4. 강동 6주 수복 이후

고려-거란 전쟁에서 '''서희의 외교담판'''으로, 고려는 요나라와 통교하는 조건으로 강동 6주의 주권을 인정받았다.[3]

한반도에서 중원으로 가는 육로에 위치한 강동 6주는 군사적, 교통상 요지였으나, 고려 건국 이후 생여진이 차지하여 고려의 북방 진출에 장애가 되었다. 994년(성종 13년), 고려는 대령강압록강 사이에서 여진족을 몰아내거나 포섭하여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4] 강동 6주는 압록강 동쪽 280여 리에 위치하며, 흥화진(백마산성), 용주(용천), 철주(철산), 통주(선천), 곽주(곽산), 귀주(구성)를 포함한다.[2] 고려는 이 땅의 북쪽 국경을 따라 천리장성을 쌓았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을 차지한 뒤 994년 장흥진(長興鎭, 태천), 귀화진(歸化鎭, 천마 추정), 귀주, 곽주에 성을 쌓았고, 995년 안의진(安義鎭, 정주시 신봉리), 흥화진, 996년에는 선주(宣州, 선천)·맹주(孟州, 맹산)에 성을 쌓았다.

이후 고려가 송나라와 친선 관계를 유지하며 요나라와 교류하지 않자 요나라는 불만을 품었다. 1010년, 요나라는 강조의 정변을 구실로 강동 6주 반환을 요구하며 요 성종이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양규가 요나라 군대 뒤에서 선전하자 퇴로가 끊길 것을 염려한 요나라 군대는 고려와 강화하고 퇴각하였다. 이를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라 한다.

고구려의 옛 영토였던 이 지역은 일시적으로 당나라가 지배한 후, 발해의 지배하에 여진족이 거주했다. 993년 거란의 고려 침공 강화 시, 고려는 송나라와 단교하고 거란의 연호를 사용하며 조공하게 되었지만, 고려와 거란 사이의 여진이 장애가 된다는 이유로 강동 6주를 고려 영토로 인정받았다. 고려는 여진을 정복하고 성을 쌓아 청천강 이북 압록강까지 영토를 확장했다.

1009년 강조가 고려 목종을 살해하고 고려 현종을 옹립하자(강조의 정변), 1010년 거란은 불의를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다시 침공했다. 강조는 처형되고 개경이 점령되었으나, 고려는 강화 조건인 강동 6주 할양을 지키지 않고 계속 영유했다. 1018년 거란이 다시 침공했지만, 귀주대첩에서 고려가 격파하면서 거란은 고려의 강동 6주 영유를 인정하게 되었다.

4. 1. 보주 수복

991년 요나라압록강 검동도(黔同島)에 내원성(來遠城)을 쌓았고, 1014년에는 내원성의 압록강 동쪽 맞은편인 '''보주'''(의주)에 부교를 설치하고 성을 쌓아 고려를 침공하고 통제할 군사적 요충지로 삼았다. 고려는 여러 차례 보주성의 군사시설 철거와 그 땅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요는 이를 거부하였다.[6] 금나라 건국 이듬해인 1116년 고려는 완안아골타에게 보주를 요구하였고, 금은 고려가 스스로 탈환하는 것을 용인하였다.[6] 같은 해 금이 내원성을 공격하여 거란군의 식량이 고갈되었고, 1117년 3월 거란군이 성을 비우고 도망치자 고려는 보주와 내원성을 귀순시키고 '''의주'''(현 의주군 의주읍)로 이름을 고쳤다. 1126년(고려 인종 4년) 금은 고려가 사대의 예를 취하여 사신을 보내자 고려에 보주의 주권을 인정하였다. 다만, 보주 주민에 관한 양측의 협상은 이후 1130년까지 이어졌다.

4. 2. 북진 정책의 한계와 영향

이후 고려와 요나라는 압록강을 경계로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의 영토권을 인정받고 사대를 조건으로 화친을 맺었다. 아울러 고려는 요나라와 여진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흥화진 서쪽의 압록강 인근인 인주(麟州, 현 신의주시)로부터 동해안의 도련포에 이르는 국경을 따라 천리장성을 쌓았다. 보주(의주)를 제외하고는 사실상 고려 북진 정책의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으며, 북진 전진 기지인 서경의 입지는 크게 약화되어 훗날 묘청의 난고구려 부흥 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참조

[1] 서적 고려사 세가 권제3 성종 13년 2월
[2] 서적 소손녕이 전후 처리 문제에 대해 글을 보내다 http://db.history.go[...] 2020-06-17
[3] 뉴스 서희의 강동 6주, 정말 거란이 준 것일까?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6-06-07
[4] 백과사전 북계(北界) http://encykorea.aks[...] 1996
[5] 백과사전 대도수(大道秀) http://encykorea.aks[...] 2012
[6] 서적 수국(收國) 2년(1116) 윤정월〉 고려가 사신을 보내어 (요나라를 이긴) 승첩을 축하하고, 또 보주(保州)를 요구하였다. 스스로 취하라고 조서로 허락하였다. (〈收國二年閏月〉 高麗遣使來賀捷, 且求保州. 詔許自取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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