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빈 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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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1차 빈 중재는 1938년 11월 2일, 독일과 이탈리아의 중재로 헝가리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슬로바키아 남부와 카르파토루테니아 일부 지역을 할양받은 사건이다. 헝가리는 1930년대 트리아농 조약으로 잃은 영토 회복을 위해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뮌헨 협정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에 중재를 요청했다. 코마르노에서 열린 양자 협상이 결렬된 후,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와 이탈리아 외무장관 치아노가 빈에서 중재를 진행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압력에 굴복하여 할양을 수용했다. 그러나 이 중재는 국제법상 무효로 판결되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파리 조약으로 최종적으로 무효화되었다. 빈 중재는 슬로바키아 내 반헝가리 정서를 강화하고, 중앙 유럽의 급진화를 초래했으며, 할양된 지역에서 비헝가리인에 대한 박해와 유대인 추방을 야기했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인에 대한 차별 정책을 펼쳤으나, 1948년 공산주의 쿠데타 이후 관계가 점차 정상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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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빈 중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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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제1차 빈 중재 |
서명일 | 1938년 11월 2일 |
서명 장소 | 벨베데레 궁전, 빈 |
협정 당사국 | |
서명국 | |
관련 국가 (비서명국) |
2.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는 많은 영토를 잃었다. 특히 헝가리는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지역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며 영토 회복을 강력히 원했다.
2. 1. 국제 정세
1930년대 헝가리는 트리아농 조약으로 잃은 영토를 되찾기 위해 나치 독일과 긴밀하게 협력했다. 헝가리 총리 귈라 겡뵈스는 아돌프 히틀러와 만나 체코슬로바키아가 중앙 유럽 재편의 가장 큰 걸림돌이라는 데 뜻을 같이했다.[5] 미클로시 호르티 또한 히틀러와의 회담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유럽의 심장"에 있는 "암 덩어리"로 묘사하며 공동 공격을 주장했다.[5]1938년 뮌헨 협정에서 헝가리는 주데텐란트 문제와 함께 자국의 영토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히틀러는 헝가리의 소극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고 이를 거부했다. 그러나 베니토 무솔리니의 중재로 뮌헨 협정 부록에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양자 협상을 통한 문제 해결 조항이 포함되었다.[5]
뮌헨 협정 이후, 헝가리는 평화 조약 개정을 위한 열강의 합의를 얻어냈다고 판단, 이를 통해 1918년 이전의 영토 회복과 폴란드와의 공동 국경 형성을 목표로 삼았다.[5] 그러나 헝가리는 단독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군사적으로 압박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하여 외교적 노력을 통해 영토 분쟁을 해결하고자 했다.[5]
헝가리는 뮌헨 협정에서 정한 3개월의 기간을 기다리지 않고 즉시 협상을 시작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헝가리는 국경 분쟁과 사보타주를 통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압박했다. 1938년 10월 5일, 헝가리 왕립군은 예센스케 근처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지를 공격하여 리마브스카 소보타를 점령하려 했으나 실패했다.[5] 롱요스 가르다라는 준군사 조직은 카르파토루테니아 지역에서 체코슬로바키아로 침투하여 보르자바 강의 다리를 폭파하는 등 테러 행위를 자행했다.[5] 이러한 군사적, 비군사적 압박은 양자 협상 기간과 제1차 빈 중재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2. 2. 체코슬로바키아 내부 상황
뮌헨 협정 이후 슬로바키아의 모든 정치 주체는 슬로바키아의 입장을 변경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1938년 10월 6일에 자치를 선언했다. 새로운 자치 정부는 국경의 정의를 최우선 과제로 이해했으며, 슬로바키아 인민당은 협상 참여를 요청했다.[1] 프라하 중앙 정부는 슬로바키아인이 대표단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밀란 호자 또는 임리흐 카르바시를 고려했다. 그러나 자치 정부가 수립된 후 외무부 장관 프란티셰크 흐발코프스키는 요제프 티소 또는 페르디난트 듀르찬스키를 대표로 제안했다. 두 정치인은 처음에는 역할이 중앙 정부와 경쟁 관계에 있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슬로바키아의 이익이 우선이라는 점이 강조된 후, 그들은 수락하기로 결정했다.[2] 게다가 티소는 헝가리 측에서 중앙 정부 대표와 협상하지 않는 경우 양보를 더 쉽게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했다.[3]체코슬로바키아 내부의 불안정화 위협과 헝가리의 상황이 더욱 급진화되면서 체코슬로바키아는 10월 9일에 협상을 시작하기로 동의했다.
2. 3. 국경 분쟁과 사보타주
헝가리는 협상 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지역에서 군사적 충돌과 사보타주를 일으켜 압력을 가했다. 1938년 10월 5일 이른 아침, 헝가리 왕립군 병력이 국경을 넘어 예센스케 근처의 체코슬로바키아 진지를 공격하여 리마브스카 소보타를 점령하려 했다.[1] 체코슬로바키아 증원군이 도착한 후 헝가리군은 철수했으며, 이 과정에서 헝가리인 9명이 사망하고 포로가 발생했다.[1] 이틀 후, 헝가리군은 다시 파르칸 근처의 다뉴브강을 건너려 했다.[1]카르파토루테니아에서는 요새화가 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더 심각했는데, 롱요스 가르다의 준군사 조직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침투했다.[1] 롱요스 가르다의 처음 두 부대는 1938년 10월 6일에 국경을 넘었고, 이틀 후에는 보르자바 강의 다리를 폭파했다.[1]
이러한 행위는 협상 기간과 제1차 빈 중재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양자 협상의 둘째 날(1938년 10월 10일) 헝가리군은 보르자바에서 철도 공무원을 살해하고 철도 시설을 파괴했다.[1]
3. 협상 과정
1938년 10월 9일부터 10월 13일까지 도나우강의 슬로바키아 북쪽 강변에 위치한 코마르노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간의 양자 협상이 열렸다. 요제프 티소 총리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에는 페르디난트 듀르찬스키 법무부 장관, 루돌프 비에스트 장군 등이 포함되었고, 헝가리 대표단은 칼만 카냐 외무 장관과 팔 텔레키 교육부 장관이 이끌었다.
헝가리는 1910년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헝가리인이 최소 50% 이상 거주하는 지역을 요구했다. 여기에는 데빈, 브라티슬라바, 니트라 등 여러 도시와 슬로바키아인, 루테니아인에게 헝가리 합병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양측은 인구 조사 수치를 놓고 이견을 보였다. 헝가리는 1910년 수치를 제시한 반면, 체코슬로바키아는 1930년 수치를 제시하며 1910년 조사가 마자르화의 영향으로 왜곡되었다고 주장했다. 티소는 자신이 1910년 조사에서 헝가리인으로 계산되었다고 언급했다. 헝가리는 1880년 인구 조사를 타협안으로 제안했고, 코시체 귀속 문제를 놓고 양측은 대립했다.
헝가리의 국민 투표 요구는 뮌헨 협정에서 다루지 않은 내용이며, 체코슬로바키아 주권 침해라는 이유로 거부되었다.[1] 체코슬로바키아는 대 라이 섬 양도, 코마르노에 자유 항구 건설, 국경 지역 인구 교환을 제안했지만 헝가리는 거절했다.
10월 13일, 체코슬로바키아는 양국에 균형 잡힌 소수 민족을 가진 국경을 제안했지만, 헝가리는 "유머러스한 국경"이라며 거부했다. 결국 헝가리는 추가 논의를 거부하고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1]
협상 결렬 후, 헝가리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중재를 요청했으나, 독일은 헝가리의 군사 행동 가능성을 우려하여 중재를 거부했다.[3]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이 새로운 국경선("리벤트로프 선")을 제시했지만, 양측 모두 만족하지 못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리벤트로프 선"을 수용했음에도 헝가리가 거부하면서 독일은 중재에서 물러났다.[3]
3. 1. 코마르노 협상
1938년 10월 9일부터 10월 13일까지 헝가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도나우강의 슬로바키아 북쪽 강변에 위치한 코마르노에서 협상이 열렸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은 요제프 티소 총리가 이끌었으며, 페르디난트 듀르찬스키 법무부 장관, 루돌프 비에스트 장군이 포함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중앙 정부는 이반 크르노 외무부 정치 국장이 대표했고, 자치 카르파토-루테니아는 이반 파르카니 무임소 장관이 대표했다. 헝가리 대표단은 칼만 카냐 외무 장관과 팔 텔레키 교육부 장관이 이끌었다.헝가리 정부의 협상 전략은 1910년 인구 조사에 따르면 헝가리인이 최소 50% 이상 거주하는 지역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헝가리는 데빈(헝가리어: ''Dévény''), 브라티슬라바(''Pozsony''), 니트라(''Nyitra''), 틀마체(''Garamtolmács''), 레비체(''Léva''), 루체네츠(''Losonc''), 리마브스카소보타(''Rimaszombat''), 옐샤바(''Jolsva''), 로주냐바(''Rozsnyó''), 코시체(''Kassa''), 트레비쇼프(''Tőketerebes''), 파블로브체나드우홈(''Pálóc''), 우즈호로드(우즈호로드|Uzhhorodsk, 헝가리어: ''Ungvár''), 무카체베(''Mukačevo'', ''Munkács''), 비노흐라디우(''Nagyszőlős'')로 정의된 선까지의 영토와 더불어 슬로바키아인과 루테니아인이 헝가리에 합병되기를 원하는지 여부를 묻는 국민 투표를 나머지 영토에서 요구했다.
양측의 주요 의견 차이는 헝가리가 1910년 인구 조사 수치를 제시한 반면, 체코슬로바키아는 1930년의 최신 수치를 제시하고 1910년 인구 조사의 유효성에 이의를 제기했다는 점이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10년 인구 조사가 마자르화의 절정에 해당하며, 이전 및 이후의 인구 조사와 다르기 때문에 수용할 수 없다고 간주했다. 예를 들어 티소는 자신이 그 인구 조사에서 헝가리인으로 계산되었다고 언급했다.
헝가리 대표단은 체코슬로바키아 인구 조사의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1880년 헝가리 인구 조사를 타협안으로 사용할 것을 제안했다. 또한 코시체와 같은 도시의 귀속 문제를 놓고 양측은 대립했다.
헝가리에 재가입하기 위한 슬로바키아인과 루테니아인에 대한 국민 투표 요구는 뮌헨 협정이 이 문제를 다루지 않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주권을 침해한다는 이유로 체코슬로바키아에 의해 거부되었다.[1]
헝가리 대표단은 슬로바키아 내에 자치 헝가리 영토를 창설하겠다는 제안과 같은 몇 가지 체코슬로바키아 제안을 거부했다.[1] 체코슬로바키아는 대 라이 섬 (슬로바키아어: ''Žitný ostrov'', 헝가리어: ''Csallóköz'')의 양도, 코마르노 마을에 자유 항구 건설, 그리고 나머지 국경 지역의 인구 교환을 제안했지만 헝가리는 이 제안도 거절했다.
10월 13일,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은 양국에 균형 잡힌 소수 민족을 가진 국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는 또 다른 해결책을 제안했지만, 헝가리 대표단은 "유머러스한 국경"이라는 이유로 이 제안을 거부했다. 결국 헝가리 대표단은 추가 논의를 거부했고,[1] 10월 13일 저녁, 협상이 실패했음을 선언했다.
3. 2. 독일의 중재 시도
코마르노에서 열린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협상이 결렬된 후, 헝가리는 독일과 이탈리아에 중재를 요청했다. 그러나 독일은 헝가리의 군사 행동 가능성에 대한 지지를 철회하고 중재자 역할을 맡는 것을 거부했다.[3] 독일은 헝가리가 체코슬로바키아와 협상을 계속하고 민족적 원칙을 준수할 것을 권고했다.[3]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독일 외무장관은 새로운 국경선("리벤트로프 선")을 제시했지만,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양측 모두 이 안에 만족하지 못했다.[3] 체코슬로바키아는 "리벤트로프 선"을 수용하고 10월 22일에 공식적으로 제안했지만, 헝가리가 이를 거부하면서 독일은 중재자 역할에서 물러났다.[3]
3. 3. 양자 협상의 최종 결렬
코마르노에서 열린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양자 협상은 1938년 10월 13일에 최종 결렬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양국에 균형 잡힌 소수 민족을 보장하는 국경선을 제안했지만, 헝가리는 이를 "유머러스한 국경"이라며 거부했다.[25] 헝가리 대표단은 추가 논의를 거부하고 중재를 요청했다.체코슬로바키아는 대 라이 섬 (슬로바키아어: ''Žitný ostrov'', 헝가리어: ''Csallóköz'') 양도, 코마르노에 자유 항구 건설, 국경 지역 인구 교환 등을 제안했지만 헝가리는 이 역시 거절했다. 헝가리는 1910년 인구 조사를 기준으로 영토를 요구했고, 슬로바키아 내 자치 헝가리 영토 창설 제안도 거부했다.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고, 헝가리는 뮌헨 협정 서명국들에 중재를 요청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중재에 참여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결국 독일 외무 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이탈리아 외무 장관 갈레아초 치아노가 중재를 맡게 되었다.
4. 빈 중재
1938년 11월 2일, 독일의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이탈리아의 외무장관 갈레아초 치아노는 빈에서 중재를 통해 헝가리 왕국에 남부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일부 지역을 할양하는 결정을 내렸다.
중재는 빈의 벨베데레 궁전에서 열렸으며, 독일의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와 이탈리아의 갈레아초 치아노가 주도했다. 헝가리 대표단은 외무 장관 칼만 카냐와 교육부 장관 팔 텔레키가 이끌었고,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은 외무 장관 프란티šek 흐발코프스키와 이반 크르노가 이끌었다. 카르파토루테니아 대표 아우구스틴 볼로신과 슬로바키아 대표 요제프 티소, 페르디난트 듀르찬스키도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에 포함되었으며, 헤르만 괴링도 참석했다.
1938년 11월 2일 정오에 시작된 중재에서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대표단은 각자의 주장을 발표했다. 흐발코프스키는 간략하게 발표를 마치고 크르노에게 입장을 맡겼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티소와 볼로신의 참여는 거부되었는데, 리벤트로프와 치아노는 중앙 정부 대표만 참여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협상은 형식적으로 진행되어 반나절 만에 새로운 국경선이 결정되었다. 오후 7시에 발표된 중재 결과에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단은 큰 충격을 받았고, 티소는 리벤트로프와 흐발코프스키의 설득으로 서명해야 했다.[6]
4. 1. 중재 결과
체코슬로바키아가 슬로바키아 남부와 카르파토루테니아 남부 지역을 헝가리에 할양해야 했다. 헝가리가 획득한 지역에는 세네츠, 갈란타, 브라블레, 레비체, 루체네츠, 리마브스카 소보타, 옐샤바, 로즈냐바, 코시체, 미할랴니, 벨케 카푸샤니, 우시호로드, 무카체보 등의 도시가 포함되었다.[6] 헝가리는 10390km2의 영토와 854,277명의 인구를 얻었다. 1930년 체코슬로바키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 인구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6]민족 | 인구 | 비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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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인 | 503,980명 | 58.99% |
슬로바키아인 또는 체코인 | 272,145명 | 32.43% |
유대인 | 26,151명 | 3.06% |
독일인 | 8,947명 | 1.05% |
루테니아인 | 1,825명 | 해당 자료에 비율 없음 |
기타 민족 | 14,617명 | 해당 자료에 비율 없음 |
외국인 | 26,005명 | 해당 자료에 비율 없음 |
평균 인구 증가를 고려하면 중재 당시 총 인구는 약 935,000명으로 추산되며, 이 중 30만 명 정도가 슬로바키아인 또는 체코인이었다.[6]
체코슬로바키아는 카르파토루테니아와 루마니아로 가는 직접적인 철도 연결을 상실했다. 헝가리 정부와 연합 헝가리당은 헝가리군의 점령을 기념하는 행사를 열었는데, 이는 히틀러의 주데텐란트 진입을 모방한 것이었다. 헝가리군은 1938년 11월 5일부터 10일까지 양도된 영토를 점령했고, 11월 11일 호르티는 코시체에 공식 입성했다. 군정은 1938년 12월 21일 민정으로 전환되었고, 회복된 상 헝가리 영토는 1938년 11월 12일 헝가리 의회의 법에 의해 헝가리에 병합되었다.[6]
5. 중재의 영향
제1차 빈 중재는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관계를 더욱 악화시켰다. 중재 발표 직후 슬로바키아 내 헝가리 소수 민족 지도자인 야노시 에스테르하지는 양국 간 평화 유지를 위해 헝가리가 슬로바키아에 영토 일부(주로 슈라니와 팔라리코보 사이)를 반환할 것을 제안했으나, 헝가리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5] 헝가리의 이러한 태도와 1939년 3월 슬로바키아 공격은 슬로바키아인들의 반(反)헝가리 정서를 고조시켰다.[5] 중재 기념일마다 반헝가리 시위가 열렸고, 헝가리 가옥이나 문화 시설이 훼손되기도 했다. 3주년에는 코먓티체에서 헝가리 경찰이 슬로바키아인을 사격한 것에 분노한 폭도들이 헝가리 문화 회관을 파괴하는 사건도 발생했다.[5]
5. 1. 슬로바키아-헝가리 관계
뮌헨 협정 이후 슬로바키아의 모든 정치 주체는 슬로바키아의 입장을 변경해야 한다고 결론 내리고 1938년 10월 6일에 자치를 선언했다. 새로운 자치 정부는 국경의 정의를 최우선 과제로 이해했으며, 슬로바키아 인민당은 협상 참여를 요청했다.[3] 프라하의 중앙 정부는 슬로바키아인이 대표단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요제프 티소를 대표로 제안했다. 티소는 그 결과를 개인적으로 받아들였는데, 특히 코시체 철수에 실패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늦은 저녁 라디오를 통해 수상 결과를 발표하고 중앙 정부의 장기적인 정책을 비난했지만 결과를 받아들였다.[4]제1차 빈 중재는 슬로바키아인들의 반헝가리 정서를 악화시켰다. 중재 발표 직후, 슬로바키아 헝가리 소수 민족 지도자였던 야노시 에스테르하지는 헝가리가 헝가리가 받았던 1000km2의 영토, 주로 슈라니(Nagysurány)와 팔라리코보(Tótmegyer) 사이의 슬로바키아 땅을 슬로바키아에 반환하여 양국 간의 장기적인 평화로운 공존을 보장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헝가리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헝가리가 수년 전에 반복적으로 지지했던 양국 소수 민족 간의 민족 균형에 대한 명백한 침해와 1939년 3월 헝가리의 슬로바키아 공격 사이의 짧은 기간은 반헝가리 정서와 사회 운동이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슬로바키아인들에게 중요한 통합 요소가 되도록 만들었다. 반헝가리 시위는 중재 기념일마다 열렸고, 반헝가리 구호가 외쳐지고 헝가리 가옥이나 문화 시설이 훼손되었다. 3주년에는 헝가리 경찰의 코먓티체(Komjatice)에서의 슬로바키아인 사격에 분노한 폭도들이 헝가리 문화 회관을 파괴했다.[5]
5. 2. 중앙 유럽의 급진화
헝가리는 제1차 빈 중재를 통해 영토를 획득했지만, 이는 트리아농 조약의 제27조 4항을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이 조항은 조약으로 확정된 새로운 국경을 존중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데아크(Deák)에 따르면, 헝가리는 새로운 체코슬로바키아 국가의 독립과 권리를 보장하는 조약의 48조와 49조도 위반했다. 헝가리는 빈 중재 결과에 만족하지 않고, 몇 주 뒤 카르파토루테니아를 병합하려 시도했다.[25]중세 시대부터 18세기까지 헝가리와 폴란드는 역사적으로 국경을 맞대고 있었으며, 항상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8] 1938년 9월 30일 뮌헨 협정 이후, 두 나라는 역사적인 공동 국경을 회복하기 위해 함께 노력했다.[9] 제1차 빈 중재(1938년 11월 2일)는 이러한 목표를 향한 한 걸음이었다.
히틀러의 압력으로 슬로바키아는 1939년 3월 14일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고, 체코슬로바키아는 멸망했다. 이틀 전, 히틀러는 헝가리에게 24시간 이내에 카르파토루테니아의 나머지 지역을 점령하도록 허가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은 병합하지 말라고 경고했다. 그는 슬로바키아를 폴란드 침공을 위한 전략적 요충지로 활용하고자 했다. 3월 14~15일, 카르파토루테니아의 남은 지역은 카르파토-우크라이나로 독립을 선언했지만, 3월 15일부터 18일 사이에 헝가리에 점령되었다. 헝가리는 카르파토-우크라이나를 점령한 후, 3월 15일에 슬로바키아의 작은 지역도 점령했다.
헝가리는 이에 그치지 않고 3월 23일 동부 슬로바키아에 더 큰 공격을 시작했다. 이들의 목표는 "가능한 한 서쪽으로 진격하는 것"이었다. 몇 차례의 헝가리 공습 이후, 헝가리는 독일에 의해 중단되고 협상을 강요받았다. 협상 (3월 27일 - 4월 4일) 결과, 헝가리는 슬로바키아 동부 (1897km2)에서 69,630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영토를 추가로 얻었다. 이전의 빈 중재와 달리, 이번에 병합된 영토는 민족적 근거로 정당화되지 않았다. 헝가리는 빈 중재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중재였고, 후자가 며칠 전에 멸망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했다.
5. 3. 할양된 영토에서의 삶
헝가리는 제1차 빈 중재로 할양된 영토에서 슬로바키아인과 체코인 등 비(非)헝가리인들을 차별하고 추방하는 정책을 시행했다.[16]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의 토지 개혁으로 토지를 얻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을 이방인으로 취급했다.[18] 이들 중 일부는 중재 이전에 떠났지만, 많은 수가 강제와 위협으로 추방되었다.[18]1938년 11월 5일, 헝가리 참모부는 슬로바키아인과 체코인 식민지 개척자 및 그 가족, 후손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8] 11월 11일에는 이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했다.[18] 이 명령에 따라 비헝가리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군인과 경찰은 허가 없이 가택 수색을 하고 식량, 가축 등을 압수했다. 강제 추방은 체포, 투옥, 신체 고문을 동반했고, 군사 지원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식민지 개척자뿐만 아니라 국가 직원, 슬로바키아 농부, 신뢰할 수 없는 사람들도 추방 대상이었다. 이 목록은 중재 전에 헝가리 연합당이 작성했다. 이러한 조치는 총격, 사상자, 슬로바키아 및 체코 상점과 재산 약탈과 함께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많은 슬로바키아인과 체코인들은 영토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했으며, 모든 재산은 헝가리 소유라는 성명에 서명했다. 그벨체(Köbölkút)에서는 체코 식민지 개척자 3명이 총에 맞아 죽고 1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공무원은 48시간 안에 영토를 떠나야 했고, 헝가리인으로 교체되었다.
호르티 미클로시는 슬로바키아어와 문화의 자유를 보장했지만,[16] 헝가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모든 비헝가리 단체는 해산되었고, 재산은 몰수되거나 헝가리 단체에 기증되었다. 슬로바키아 리그가 건설한 약 150개의 학교는 헝가리 국가 재산으로 선언되었다. 1938년 말까지 1,119명의 교사 중 862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이후 몇 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16] 슬로바키아는 초등학교 386개(슬로바키아 학생 45,709명)와 시립 학교 29개(10,750명)를 잃었다. 코시체(Kassa)에서는 4개의 중등학교가, 다른 도시에서는 6개의 중등학교가 문을 닫았다.
교사 추방은 종종 폭력과 굴욕을 동반했다. 루체네크(Losonc)에서는 헝가리가 54명의 슬로바키아 교사를 경계선으로 추방했다. 여러 마을에서 경찰은 학부모 협회를 해산시켰고, 슬로바키아 학교를 요구하는 학부모들은 구타당했다. 루스코프(Regeteruszka)와 블라지체(Balogd)에서 슬로바키아 학교를 요구한 학부모들은 2주 동안 투옥되었다. 여러 곳에서 헝가리 경찰은 슬로바키아 학교 용품을 불태우거나, 교장에게 불태울 것을 요청하거나, 단순히 압수했다.[20]
5. 3. 1. 인구 통계
헝가리는 할양된 영토에서 새로운 인구 조사를 실시하여 헝가리인 비율을 과장하고 슬로바키아인 비율을 축소하려 했다.[14] 이 인구 조사는 헝가리 당국의 추방, 박해, 시민권 제한 및 심리적 강압이라는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으며,[14] 군사 기관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수행되어 국적 조사를 위한 여러 원칙을 위반했다.[14] 공식 결과에 따르면 인구의 86.5%가 헝가리인이고 9.8%가 슬로바키아인이었다.[14]1930년 체코슬로바키아 인구 조사와 비교했을 때, 헝가리 인구 조사에서는 슬로바키아인 전체 인구가 121,603명으로 감소했고,[14] 67개 마을이 슬로바키아인 다수를 잃었으며 슬로바키아인 인구는 74,100명 감소했고 헝가리인 인구는 77,715명 증가했다.[14] 이는 헝가리의 강압적인 정책과 추방의 결과였다.
헝가리 인구 조사는 시민이 신고한 국적이 아닌, 인구 조사 위원이 기록한 "모국어"를 집계했는데, 이는 1910년 헝가리 인구 조사와 같았다.[15] 두 인구 조사는 유대인 인구에 대한 관점에서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유대인들이 별도의 유대인 국적을 선언할 수 있었지만, 헝가리 인구 조사에서는 그들이 자신의 모국어를 사용할 수 없었고, 그들의 실제 수는 그들이 신고한 종교를 통해서만 추정할 수 있었다.[15]
5. 3. 2. 유대인 추방
제1차 빈 중재는 슬로바키아에서 유대인에 대한 최초의 추방으로 이어졌다. 요제프 티소와 그의 협력자들은 희생양을 찾았는데, 중재 전날 저녁 브라티슬라바가 헝가리의 일부가 되는 것을 지지하는 시위를 벌인 유대인들에게서 그 희생양을 찾았다.[6] 1938년 11월 4일부터 5일 사이에 슬로바키아 자치 정부는 7,500명의 유대인을 새로운 헝가리-슬로바키아 국경으로 추방했다. 티소는 이 조치를 "그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게 하는 것"이라고 정당화했다. 헝가리는 노인이나 어린이를 포함한 이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추방된 유대인들은 추운 가을 날씨 속에 아무도 없는 땅에 갇히게 되었다. 수백 명의 유대인들은 벨키 키르와 밀로슬라보프에 있는 수용소에 머물렀고, 그들은 슬로바키아나 헝가리의 거주지로 이동할 수 없었다.[6]5. 3. 3. 비헝가리인에 대한 박해
헝가리는 할양된 영토에서 슬로바키아인과 체코인 식민지 개척자들을 추방하고, 슬로바키아 학교를 폐쇄하는 등 차별 정책을 시행했다.[16]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민족주의 체코슬로바키아 토지 개혁을 통해 토지를 얻은 체코 및 슬로바키아 식민지 개척자를 이방인으로 간주했다.[18] 이들 중 일부는 중재 전에 떠났고, 다른 사람들은 그 자리에 머물렀지만, 많은 수가 강제 및 위협에 의해 추방되었다.[18]1938년 11월 5일, 헝가리 참모부는 모든 슬로바키아 및 체코 식민지 개척자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여기에는 가족 구성원과 후손도 포함되었다. 11월 11일에는 이들을 국가의 적으로 규정하는 새로운 칙령을 발표했다.[18] 이 명령에 근거하여 비헝가리인에 대한 조직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군인과 경찰은 공식적인 허가 없이 가택 수색을 하고 식량, 가축, 곡물 재고를 압수할 수 있었다. 강제 추방은 종종 체포와 투옥, 신체 고문을 동반했으며, 군사 지원과 함께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으로 이송되기도 했다.
식민지 개척자들뿐만 아니라 국가 직원, 슬로바키아 농부(토지를 상속받거나 구매한 사람 포함), 그리고 신뢰할 수 없다고 지정된 사람들도 추방 대상이었다. 이들의 목록은 제1차 빈 중재 전에 헝가리 연합당 구성원들이 준비했다. 이러한 조치는 총격, 사상자, 슬로바키아 및 체코 상점과 재산 약탈과 함께 폭력적으로 진행되었다.
많은 슬로바키아인과 체코인들은 이러한 상황에서 영토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이들은 자발적으로 이주했으며, 모든 재산은 헝가리의 소유로 넘어간다는 공식 성명에 서명했다. 그벨체(Köbölkút)에서는 체코 식민지 개척자 세 명이 총에 맞아 죽고 한 명이 교수형에 처해졌다. 공무원은 48시간 이내에 영토를 떠나야 했고, 헝가리인으로 교체되었다.
호르티 미클로시는 슬로바키아어와 문화의 자유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지만, 헝가리는 새로운 소수 민족을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 모든 비헝가리 단체는 해산되었고, 재산은 몰수되거나 헝가리 단체에 기증되었다.
슬로바키아 리그가 건설한 약 150개의 학교는 헝가리 국가의 재산으로 선언되었다. 1938년 말까지 1,119명의 교사 중 862명이 일자리를 잃었고, 이후 몇 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슬로바키아는 45,709명의 슬로바키아 아이들이 다니는 386개의 초등학교와 10,750명의 아이들이 다니는 29개의 시립 학교("부르거 학교")를 잃었다. 코시체(Kassa)에서는 4개의 중등학교가 문을 닫았고, 다른 도시에서는 6개가 문을 닫았다.
교사 추방은 종종 폭력과 대중적 굴욕을 동반했다. 루체네크(Losonc)에서는 헝가리가 54명의 슬로바키아 교사를 경계선으로 추방했다. 여러 슬로바키아 마을에서 경찰은 학부모 협회를 해산시켰고, 슬로바키아 학교를 요구하는 학부모들은 구타를 당했다. 루스코프(Regeteruszka)와 블라지체(Balogd)에서 슬로바키아 학교를 요구한 학부모들은 2주 동안 투옥되었다. 여러 곳에서 헝가리 경찰은 슬로바키아 학교 용품을 불태우거나, 학교 교장에게 불태울 것을 요청하거나, 단순히 압수했다.[20]
5. 3. 4. 사회적 권리와 경제
헝가리 정부는 반환된 영토 내 유대인들의 상업 면허를 재검토하라고 명령하여, 유대인의 80%가 면허를 잃고 경제에 큰 타격을 입었다. 코시체(Kassa), 노베 잠키(Érsekújvár), 루체네츠(Losonc) 같은 도시에서는 상점의 절반이 문을 닫았다.[21]슬로바키아는 농토의 41%를 잃었는데, 이는 식량 공급에 필요한 제품의 약 80%를 생산하던 곳이었다.[21] 과잉 생산으로 인해 지역 농민들과 헝가리의 경제 정책에 문제가 발생했다. 남부 슬로바키아에서 생산된 40만 톤의 밀 중 절반만 지역에서 소비되었고, 나머지는 소비자가 없었다.[21] 군정 기간 동안 반환된 영토와 헝가리 본토 사이의 국경이 폐쇄되었고, 민간 행정 기간 동안 곡물과 가축 가격이 낮게 유지되면서 상황이 부분적으로만 개선되었다. 헝가리 정부는 국가 개입 구매를 통해 상황을 개선하려 했지만, 농산물 가격은 20~30% 하락했다.[21] 헝가리의 기존 카르텔은 사탕무와 담배 등 수익성이 높은 작물 재배 기회가 제한되었고, 니트라 카운티 경제 협회는 "체코 통치 당시와 동일한 조건으로 사탕무를 재배할 권리"를 요구했으나 거부되었다.[21] 1939년 2월 24일, 정부는 붉은 고추 재배를 노베 잠키(Érsekújvár) 주변의 제한된 지역으로만 한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도로 건설, 강 규제, 건설 프로젝트를 통해 제공했던 일자리가 중재 이후 중단되면서 실업률이 증가했다. 헝가리는 체코슬로바키아와 달리 농업 노동자에게 실업 수당이나 국가 건강 보험을 제공하지 않았고, 퇴직 및 장애 연금도 더 낮았다.[21] 체코슬로바키아 통치하에서 지원을 받았던 실업자들은 헝가리에 동일한 지원을 요청했다.[21] 급여와 근로 조건은 악화되었지만, 세금은 증가했다. 환율은 지역 시민에게 불리하게 작용하여(7-1) 급여를 자동적으로 20% 삭감했다.[21] 헝가리 군인들은 환율을 이용하여 저렴한 체코슬로바키아 상품을 구매했고, 헝가리에서 수입된 상품은 20~30% 더 비쌌다. 전기, 라디오, 철도 티켓 가격도 상승했다.
헝가리인들은 전시 선전에서 민족 헝가리 영토의 재통합을 양측에 유리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체코슬로바키아는 헝가리보다 헝가리인에게 더 많은 시민 및 사회적 권리를 부여했다. 헝가리 정부는 헝가리 애국심에 호소했고,[22] 1939년 4월, 헝가리 교수들은 가격 인상과 열악한 사회적 상황에 항의하며 헝가리 정부에 요구 사항을 작성했다.[21]
1939년 12월 22일 각료 회의에서 사회 문제가 논의되었다. 페렌츠 케레스테스-피셔 내무부 장관은 통합을 기반으로 한 해결책을 제안했지만, 안도르 야로스 상부 국가 장관은 반환 지역에 체코슬로바키아 복지 시스템을 제공하는 과도 기간을 제안했다.[21]
결국 각료 회의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획득한 영토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법률을 점진적으로 폐지하고, 퇴직 연금을 헝가리 수준으로 낮추는 과도기를 거쳤다. 농업 노동자를 위한 건강 보험은 체코슬로바키아 규정 형태로 유지되었지만, 의무에서 자발적 형태로 변경되었다. 슬로바키아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 붕괴 후에도 체코슬로바키아 복지 시스템이 유지되었다.[21]
6. 무효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1차 빈 중재는 국제법상 무효로 판결되었다.[1] 체코슬로바키아는 중재인인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위협과 헝가리의 압력에 굴복하여 중재를 수락했으며, 뮌헨 협정과 마찬가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이익은 무시되었다.[1] 1947년 파리 조약 제1조 (4a)항은 "1938년 11월 2일의 빈 중재 결정은 무효로 선언된다"고 명시하여 이를 재확인했다.
6. 1. 국제법적 무효화
제1차 빈 중재는 국제법상 무효로 판결되었다. 표면적으로는 두 주권 국가 간의 자발적인 중재 행위로 보였지만,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중재인인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위협과 헝가리의 강력한 요구에 굴복하여 중재를 수락하였다.[1] 데아크에 따르면, 국제법상 이러한 행위는 불법이며, 그 결과는 유효한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1] 뮌헨 협정과 마찬가지로 체코슬로바키아의 이익은 무시되었고, 중재인들은 군사력을 사용하여 협정에 압력을 가했다.[1] 이러한 이유로 제1차 빈 중재는 제2차 세계 대전 말기에 불법으로 판명되었으며, 법적으로 유효한 행위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1]1940년 12월 11일, 영국 외무부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영국이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관한 뮌헨 협정에 구속되지 않는다고 확인했다. 영국은 뮌헨 협정이 적법하게 서명되었지만 1939년 3월 15일에 무효가 되었다고 해석했다. 영국의 입장에 대한 협상은 1942년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1942년 6월 9일, 소련 외무장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는 뮌헨 협정 이전의 국경으로 체코슬로바키아를 복원한다고 확인했다. 1944년 9월 26일, 이탈리아 외무장관 카를로 스포르차는 체코슬로바키아 대표에게 이탈리아가 뮌헨 협정과 제1차 빈 중재를 처음부터 무효로 간주했음을 알렸다.[2] 이는 1947년 2월 10일에 서명된 헝가리와의 평화 조약(파리 조약)에서 확인되었다. 제1조 (4a)항은 "1938년 11월 2일의 빈 중재 결정은 무효로 선언된다"고 명시했다. 이 조약은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 간의 국경을 1938년 1월 1일에 존재했던 국경선으로 고정했으며, 브라티슬라바 남쪽의 세 마을은 체코슬로바키아에 교두보로 주어졌다.
7. 전후 박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에서 뮌헨 협정과 제1차 빈 중재, 소수 정당들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참여는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수 민족 정책 재정의를 야기했다. 전전 체코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인들에게 비교적 많은 수의 소수 민족 권리를 보장했지만, 전쟁 이후 헝가리인들은 심각한 차별 대상이 되었다.[1] 헝가리 문제는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 간의 인구 교환, 슬로바키아화, 체코슬로바키아 내 헝가리인 추방으로 해결해야 했다.[1] "반파시스트 투쟁 중에 수행된 행위에 대한 사면"은 헝가리 소수 민족에 대한 가장 잔혹한 범죄에 대한 처벌을 막았다.[3]
1949년 4월 16일,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는 우호 및 협력 협정에 서명했다. 1949년 7월 25일, 헝가리 정부는 제1차 빈 중재 이후 압수된 예술 및 역사적 유물을 반환하기로 약속했다. 최종 협정은 1951년 11월 11일에 서명되었으며 10년 동안 유효했지만 완전히 준수되지는 않았다.[7]
7. 1. 체코슬로바키아의 헝가리인 박해
체코슬로바키아의 역사에서 뮌헨 협정과 제1차 빈 중재, 그리고 소수 정당들의 체코슬로바키아 해체 참여는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의 소수 민족 정책을 다시 정의하는 결과를 낳았다. 전전의 체코슬로바키아는 헝가리인들에게 비교적 많은 수의 소수 민족 권리를 보장했지만, 전쟁 이후 헝가리인들은 심각한 차별의 대상이 되었다.[1]1945년 4월 5일 코시체 정부 프로그램은 독일 및 헝가리 소수 민족에 대한 집단적 죄책감의 원칙을 받아들였다. 제10조와 제11조는 그들의 재산 몰수를 명령했고, 제15조는 소수 민족 학교 폐쇄를 명령했다. 이러한 조치는 "독일 및 헝가리 소수 민족과의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의 끔찍한 경험"을 이유로 정당화되었다.[2] 정부 프로그램에 이어 같은 정신의 일련의 규정이 시행되었다. 반파시스트 투사를 제외하고, 헝가리인들은 1945년 8월 2일 대통령령에 의해 체코슬로바키아 시민권을 잃었다.[3]
두 나라는 인구 교환을 실시하여 헝가리인 68,407명과 슬로바키아인 59,774명이 교환되었다.[4] 추가로 31,780명의 헝가리인이 빈 중재 이후 해당 지역에 정착했다는 이유로 추방되었다.[5]
1948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쿠데타는 헝가리인의 지위를 즉시 개선하지는 않았지만, 1948년 하반기에 관계가 정상화되기 시작했다.[6] 194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 의회는 1938년 11월 1일에 슬로바키아에 거주하고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헝가리인들에게 체코슬로바키아 시민권을 회복시켰다.[7] 공산주의 집산화의 맥락에서 재산 반환 문제는 사라졌고, 따라서 무의미해졌다.[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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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1934-1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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