뮌헨 협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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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뮌헨 협정은 1938년 9월 29일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가 체결한 협정으로, 독일의 주데텐란트 병합을 승인했다. 이 협정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역사적 배경과 나치 독일의 팽창 정책, 주데텐란트 문제를 둘러싼 위기 상황에서 체결되었다. 뮌헨 협정의 결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영토와 주요 산업 시설을 상실했으며,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과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으로 이어졌다. 뮌헨 협정은 유화 정책의 실패 사례로 평가받으며, 국제 관계에서 힘의 논리와 국가 안보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교훈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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뮌헨 협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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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약 정보 | |
이름 | 뮌헨 협정 |
서명일 | 1938년 9월 30일 |
서명 장소 | 뮌헨, 독일 |
서명 당사자 | : 아돌프 히틀러 : 네빌 체임벌린 : 에두아르 달라디에 : 베니토 무솔리니 |
참여 국가 | : 독일 : 영국 : 프랑스 : 이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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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
관련 용어 | : 뮌헨의 배신 : 뮌헨의 배신 |
독일어 | Münchner Abkommen (뮌헤너 압코멘) |
프랑스어 | Accords de Munich (아코르 드 뮌히) |
문화어 | 뮨헨 협정 / 뮨헨 공모 |
배경 | |
주요 내용 | 체코슬로바키아의 독일어 사용 지역을 나치 독일에 할양 |
2. 역사적 배경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성립된 베르사유 조약 체제는 독일에 막대한 배상금과 영토 상실을 안겨주었으며, 이는 독일 내 불만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33년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이러한 불만을 바탕으로 베르사유 조약 파기와 '동방 생존권(Lebensraum)' 확보를 내세우며 공격적인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1936년 라인란트 재무장화, 1938년 3월 오스트리아 병합(안슐루스) 등 일련의 조치를 통해 베르사유 조약을 무력화시키며 국제 사회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히틀러의 다음 목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이었다. 주데텐란트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신생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에 편입된 지역으로, 약 300만 명의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이 지역 독일계 주민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로부터 박해받고 있다는 선전을 펼치며,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왜곡하여 주데텐란트의 독일 귀속을 정당화하려 했다. 독일은 이미 1937년부터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인 '녹색 작전(Fall Grün)'을 준비하고 있었다.
한편,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의 위협에 맞서 1924년 프랑스와, 1935년 소련과 상호 방위 조약을 체결하며 안보를 도모하고자 했다. 그러나 영국과 프랑스는 또 다른 세계 대전 발발을 우려하여 독일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피하려는 유화 정책을 펼쳤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지역을 두고 헝가리와, 북부 국경 지역을 두고 폴란드와 영토 분쟁을 겪고 있어 주변국과의 관계도 복잡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국제 정세 속에서 주데텐란트 문제는 1938년 여름, 유럽을 전쟁 직전의 위기로 몰아넣는 핵심 쟁점으로 부상했다.
2. 1. 나치 독일의 팽창 정책
1933년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와 나치당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잃은 영토를 회복하고, 독일 민족의 생존권(Lebensraum)을 확보한다는 명분 아래 팽창 정책을 추진했다. 1937년 11월 5일 호스바흐 각서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멸시켜 독일의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 동방의 위협을 줄여야 한다는 구체적인 계획이 논의되었다. 같은 해 6월 24일, 독일 육군 참모 본부는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인 그린 작전(Fall Grün) 수립에 착수했다. 독일에게 특히 중요한 목표는 서부의 주데텐란트 지역이었는데, 이곳은 슈코다 재벌을 비롯한 군수 공장이 밀집한 공업 지대이자 많은 독일계 주민이 거주하는 곳이었다.제1차 세계 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1918년 건국된 체코슬로바키아는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국경이 확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약 300만 명 이상의 독일계 주민(전체 인구의 약 22.95%)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내에 거주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주로 독일 및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댄 서부 국경 지역, 즉 주데텐란트에 집중되어 있었다.[10]

주데텐 독일인들은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이 되었고, 헌법상 평등이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부와 군대 등에서 소외되는 경향이 있었다.[11]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독일인의 독립 움직임을 경계하여 공무원 임용 제한 등의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특히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산업화된 주데텐란트 지역에 더 큰 타격을 주어, 1936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실업자의 60%가 독일계 주민일 정도로 경제적 어려움이 심화되었다.[12]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3년 콘라트 헨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대해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주데텐 독일인당(SdP)을 창설했다. SdP는 독일계 주민들의 불만을 등에 업고 빠르게 성장하여, 1935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제2당으로 부상했다.[13][14] SdP는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의 분리와 독일 병합을 주장하며 점차 나치 독일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13] 히틀러는 주데텐 독일인이 박해받고 있다고 주장하며, 민족 자결주의 원칙을 내세워 이 지역의 해방을 외쳤다.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주데텐란트는 다음 목표로 부상했다. 헨라인은 3월 28일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만나,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이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4월 24일, SdP는 독일계 주민의 완전한 자치 등을 요구하는 카를스바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13]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독일 소수 민족에게 더 많은 권리를 제공할 의향이 있었지만, 자치권 부여는 꺼렸다.[13] 5월에는 SdP가 독일계 유권자의 88% 지지를 확보하며 긴장은 계속 고조되었다.[15] 독일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 간의 긴장이 고조되자 베네시는 9월 15일 비밀리에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6000km2를 독일에 제공하는 대신, 독일이 추방된 150만에서 200만 명의 주데텐 독일인을 받아들이는 안을 제안했으나 히틀러는 답변하지 않았다.[16]
체코슬로바키아는 독일의 위협에 맞서 프랑스(1924년), 소련(1935년)과 각각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다. 그러나 에두아르 달라디에가 이끄는 프랑스 정부는 전쟁 준비가 미흡하여 군사 개입을 주저했고, 위기를 외교적으로 해결하려 했다.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은 체코슬로바키아 방어 협력 의사를 밝혔으나, 폴란드는 자국 영토를 통한 소련군의 이동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17] (폴란드는 프랑스가 독일에 맞서 싸울 경우 참전할 의사가 있다고 여러 차례 밝혔으나[18], 영토 통과 문제와 서방의 유화 정책으로 인해 실질적인 도움으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동부의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지역은 과거 헝가리 왕국 영토였기에 헝가리가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고, 북부에는 폴란드와의 분쟁 지역도 존재하여 주변국과의 관계도 복잡했다.
긴장이 고조되자 베네시 대통령은 5월 19일 부분적인 동원령을 발동했다. 이에 히틀러는 5월 20일 그린 작전 계획을 제시하고, "도발"이나 "유리한 기회", "정치적 정당화" 없이는 군사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하면서도, 5월 28일에는 유보트 및 신형 전함(비스마르크, 티르피츠) 건조 가속과 기존 전함(샤른호르스트, 그나이제나우)의 화력 증강을 명령하며 전쟁 준비를 다그쳤다. 5월 30일, 히틀러는 10월 1일까지 그린 작전을 실행하라는 비밀 지령에 서명했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75만 명의 병력을 배치하고, 언론을 통해 주데텐 독일인에 대한 탄압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국제 여론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성하려 했다.[13]

한편,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주데텐 독일인의 불만이 정당하며 히틀러의 요구가 제한적일 것이라 믿는 유화 정책을 추진했다. 영국 정부는 프랑스와 함께 체코슬로바키아에 독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압박했고, 중재자로 전 자유당 각료였던 로드 런시먼을 파견하여 베네시를 설득하려 했다. 베네시 정부는 9월 초 독일의 요구를 거의 수용한 네 번째 계획을 제출했으나, 히틀러로부터 타협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SdP는 9월 7일 오스트라바에서의 시위와 체포 사건, 그리고 다른 잔혹 행위에 대한 허위 주장을 핑계로 더 이상의 협상을 중단했다.
1938년 9월 12일,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연설에서 민족 자결주의를 내세우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주데텐 독일인을 탄압하고 있다고 맹비난했다.[13][19][20] 그는 체코슬로바키아가 독일인을 비롯한 소수 민족을 박해하는 "사기 국가"이며, 독일은 동포인 주데텐 독일인의 자결권을 지지할 것이라고 선언하며 전쟁 분위기를 고조시켰다.[19] 그는 베네시 정부가 독일 시위대를 처형하고 독일에 대해 호전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독일 공격 기지로 이용하려 한다고 주장했다.[19][20] 9월 15일,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체임벌린 총리가 직접 독일 베르히테스가덴의 베르크호프로 히틀러를 찾아갔다.

2. 2. 주데텐란트 문제
1938년 3월 나치 독일이 오스트리아를 병합하자, 다음 목표는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는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인 주데텐란트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나왔다. 주데텐란트의 정치인 콘라트 헨라인이 이끄는 친(親)독일계 정당인 주데텐 독일인당(SdP)은 처음에는 독일인의 자치권을 주장했지만, 히틀러는 한발 더 나아가 이 지역 독일인들이 고국 독일에 통합되어야 한다고 선동하였다.제1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은 제1차 세계 대전 말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된 후 1918년에 건국되었다. 생제르맹 조약과 트리아농 조약을 통해 독립을 인정받고 국경이 확정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300만 명 이상의 독일계 주민(전체 인구의 약 22.95%)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내에 포함되었다. 이들은 주로 독일,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맞댄 체코 영토의 국경 지역에 거주했으며, 이 지역을 주데텐란트라고 불렀다.[10]
주데텐 독일인들은 자신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시민이 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묻는 절차 없이 편입되었고, 헌법상 평등이 보장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코 민족주의와 슬로바키아 민족주의 중심의 국가 운영 경향 속에서 소외감을 느꼈다.[11] 정부와 군대 등에서 독일계의 참여는 저조했으며,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산업화된 주데텐란트 지역에 더 큰 타격을 주어 경제적 불만도 커졌다. 1936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실업자의 60%가 독일인이었을 정도였다.[12]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33년, 콘라트 헨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노골적으로 적대적인 주데텐 독일인당(SdP)을 창설했다. SdP는 독일계 주민들의 지지를 빠르게 확보하여 1935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 제2당으로 부상했다.[13] SdP가 처음부터 나치의 전선 단체였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지만[13][14], 독일의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헨라인은 1938년 3월 베를린에서 히틀러를 만나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의 민주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4월 24일, SdP는 카를스바더 프로그램으로 알려진 일련의 요구 사항을 발표하며 독일인의 완전한 자치를 요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소수 민족 권리 확대 의사를 밝혔지만 자치권 부여는 꺼렸다.[13] 1938년 5월 선거에서 SdP는 독일계 유권자의 88% 지지를 얻었다.[15]
한편, 국가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나치당)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잃은 영토 회복과 독일 민족의 생활 공간 확보(동방 생존권)를 목표로 하고 있었다. 1937년 11월 비밀 회의(호스바흐 각서)에서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멸시켜 동방의 위협을 제거하고 그 영토를 확보할 필요성을 주장했다. 독일 육군 참모 본부는 이미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인 녹색 작전을 수립하고 있었으며, 공업 지대이자 군수 공장(슈코다 재벌 등)이 밀집한 주데텐란트는 핵심 목표였다. 히틀러는 윌슨의 14개조에 담긴 민족 자결 원칙을 내세워 주데텐 독일인이 박해받고 있으며 해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1924년 프랑스와, 1935년 소련과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다. 히틀러의 위협이 커지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프랑스와 소련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전쟁 준비가 미흡하여 외교적 해결을 선호했고,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히틀러의 요구가 제한적일 것이라 믿으며 주데텐 독일인의 불만이 정당하다고 여기는 유화 정책을 펼쳤다. 영국과 프랑스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독일의 요구를 수용하라고 압력을 가했다. 베네시 대통령은 이에 저항하며 1938년 5월 19일 부분적인 동원령을 발동했다.
히틀러는 5월 20일 군 수뇌부에 녹색 작전 초안을 제시했고, 5월 28일에는 해군력 증강(신형 전함 비스마르크, 티르피츠 건조 가속화 등)을 지시하며 영국에 대한 견제 의도도 드러냈다. 5월 30일에는 10월 1일까지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개시하라는 비밀 지령에 서명했다. 루드비히 베크 독일 육군 참모총장 등 일부 군부는 히틀러의 계획에 반대하거나 우려를 표했다.
국제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폴란드는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를 도울 경우 참전하지 않을 것이며 소련군의 자국 영토 통과도 반대한다는 입장을 프랑스에 전달했다.[17] (다만 폴란드 정부는 여러 차례 서방 열강이 독일과의 전쟁을 결정한다면 정책의 급격한 변화를 수행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시사했다는 주장도 있다.[18]) 헝가리 왕국 역시 트리아농 조약으로 잃은 슬로바키아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 지역의 영유권을 주장하며 독일 편에 설 가능성이 높았다.
영국 정부는 중재를 명분으로 전 자유당 각료였던 로드 런시먼을 사절단으로 파견하여 베네시 대통령에게 양보를 설득하도록 했다. 8월, 독일 언론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 독일인 탄압 관련 허위 보도를 쏟아내며 국제 여론을 조작하려 했고, 독일군은 군사 훈련을 명목으로 75만 명의 병력을 국경에 집결시켰다.[13] 9월 초, 베네시 대통령은 SdP의 요구를 거의 수용한 네 번째 계획을 제출했지만,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SdP는 오스트라바에서의 시위와 체포 사건을 빌미로 협상을 중단했다.
9월 12일,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연설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자결주의 원칙을 위반한 사기 국가로 규정하고, 베네시 정부가 독일인을 포함한 소수 민족을 박해하고 몰살하려 한다고 맹비난했다.[19][20] 그는 독일 국가 원수로서 주데텐 독일인의 자결권을 지지하며, 체코슬로바키아가 프랑스의 피보호국으로서 독일을 공격할 기지를 제공하고 있다고 주장했다.[19][20] 이 연설로 주데텐란트 문제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으로 치달았다. 베네시 대통령은 9월 15일 비밀리에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6000km2를 독일에 할양하는 대신 독일이 주데텐 독일인 150만~200만 명을 받아들일 것을 제안했으나, 히틀러는 응답하지 않았다.[16]
2. 3.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 관계
체코슬로바키아는 나치 독일의 팽창 위협에 대비하기 위해 국제적인 동맹 관계 구축에 힘썼다. 1924년 1월 25일에는 프랑스와 상호 방위 원조 조약을 체결했으며, 1935년 5월 16일에는 소비에트 연방(소련)과도 유사한 내용의 상호 방위 원조 조약을 맺었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공격이 있을 경우, 해당 동맹국들이 군사적으로 지원할 것을 약속하는 내용을 골자로 했다. 또한 1935년에는 프랑스와 소련 사이에서도 나치 독일의 군사적 위협에 공동으로 대응한다는 별도의 조약이 체결되어, 체코슬로바키아를 중심으로 한 집단 안보 체제의 가능성을 시사했다.그러나 1938년 주데텐란트 위기가 고조되면서 이러한 동맹 관계는 실제적인 효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정부는 당시 군사적, 정치적으로 전쟁 준비가 미흡하다고 판단하여 독일과의 직접적인 군사 충돌을 피하고 외교적으로 위기를 해결하려 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에게도 동맹 조약에 따른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소련은 프랑스가 먼저 군사적 지원에 나설 경우 체코슬로바키아를 지원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으나, 소련군이 체코슬로바키아로 진입하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폴란드와 루마니아 양국이 소련군의 자국 영토 통과를 거부하면서[30] 실질적인 군사 지원은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9월 25일과 26일 사이, 영국과 프랑스 정상은 회담을 갖고 "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와의 동맹 관계에 따라 독일에 참전할 경우, 영국은 프랑스를 지원한다"는 원칙을 재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프랑스의 참전을 전제로 한 조건부 약속이었으며, 결국 프랑스가 군사 개입을 포기하면서 영국의 지원 약속 또한 의미를 잃게 되었다. 이러한 복잡한 동맹 관계와 강대국들의 소극적인 태도는 결과적으로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의사가 반영되지 못하고 영토 할양이 결정되는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동맹국들이 잠재적인 세계 대전 발발을 우려하여 독일의 요구에 유화적인 태도를 취했기 때문이다.
3. 뮌헨 위기
1938년 4월 24일, 주데텐란트의 독일계 정당인 주데텐 독일당(SdP) 당수 콘라트 헨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에 독일계 주민의 자치권 보장과 지위 향상을 요구했다. 이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 직후 체코슬로바키아를 압박하기 위해 계획한 것이었으며, 히틀러는 이 문제를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의 빌미로 삼고자 국방군 최고사령부에 침공 계획인 '녹색 작전'(Fall Gründe) 수립을 지시했다.[13]
5월 20일, 독일군의 동원 움직임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예비역 병력을 동원하며 부분적인 동원령을 발동하자 국제 사회에서는 작은 체코슬로바키아가 히틀러의 야욕을 꺾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그러나 이는 오히려 히틀러를 자극하여[103] 5월 28일 '체코슬로바키아를 지도에서 말소한다'는 결의를 다지게 했고, 5월 30일에는 10월 2일까지 전쟁 준비를 완료하라는 '녹색 작전' 준비 명령을 내렸다.
독일 육군 참모 총장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을 비롯한 군 수뇌부는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으로 인한 유럽 전쟁 확대를 우려하여 히틀러의 계획에 반대했으나, 히틀러를 막지 못하고 베크는 8월 18일 참모총장직에서 물러났다. 반대파는 런던에 밀사를 보내 영국 정부의 강경 대응을 촉구했지만,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유화 정책 기조 아래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내부 공작과 군사적 압박을 강화했다. 9월 12일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연설에서 주데텐란트 독일계 주민들의 민족 자결권을 요구하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맹비난했고, 다음 날 주데텐란트에서는 독일계 주민 시위와 충돌이 발생해 프라하에 비상사태가 선포되었다.
위기가 고조되자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가 직접 중재에 나서 히틀러와 회담했으나, 히틀러의 강경한 요구로 협상은 난항을 겪었다. 9월 23일, 얀 시로비 장군이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새 정부는 총동원령을 선포했고,[110] 9월 24일에는 프랑스도 부분 동원령을 발동했다. 히틀러는 9월 26일 연설에서 9월 28일까지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군사 행동에 나서겠다고 최후통첩하며 유럽은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치달았다.[31][29]
9월 27일, 체임벌린은 라디오 연설을 통해 전쟁 위기의 심각성을 알렸다.[32] 최후통첩 시한을 하루 앞둔 9월 28일, 체임벌린의 요청을 받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가 중재에 나서 히틀러로부터 군사 행동 개시를 24시간 연기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33][34] 이어 체임벌린은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4개국 정상회담을 제안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동의하면서 극적으로 뮌헨 회담 개최가 결정되었다.[34][21]
3. 1. 히틀러의 요구와 협상 과정
1938년 4월 24일, 주데텐 독일당(SdP) 당수 콘라트 헨라인은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를 상대로 주데텐란트 내 독일인의 자치권 확대와 지위 향상을 요구하는 카를스바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13] 이는 나치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 직후인 3월 28일,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이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수용하기 어려운 요구를 하도록 헨라인에게 지시한 데 따른 것이었다.[13]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소수 민족 권리 확대 의사를 밝혔으나 자치권 부여는 주저했다.[13]히틀러는 이 상황을 이용하여 국방군 최고사령부에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인 녹색 작전Fall Gründe의 수립을 지시했다. 5월 20일 계획 초안이 제출되었으나, 군부는 전쟁 확대 가능성을 우려하며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히틀러는 "도발"이나 "특히 유리한 기회", 또는 "적절한 정치적 정당화" 없이는 군사 행동을 하지 않겠다고 주장했지만, 같은 날 독일군의 동원 정보를 입수한 체코슬로바키아는 예비역 1만 7천 명을 동원하며 부분적인 동원령을 발동했다. 국제 사회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가 히틀러의 의도를 꺾었다는 평가가 나왔으나, 이는 오히려 히틀러를 자극하여 5월 28일, 그는 군 간부들을 소집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지도에서 말소한다'는 결의를 다졌다.[103] 5월 30일, 히틀러는 10월 1일까지 전쟁 준비를 완료하라는 비밀 지침에 서명했다. 이와 함께 유보트 건조 가속, 신형 전함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 건조 일정 단축 등을 명령하며 전쟁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독일 육군 참모 총장 루트비히 베크 상급대장은 프랑스와 영국의 개입으로 인한 유럽 전체의 전쟁 확대를 우려했다. 그는 발터 폰 브라우히치 육군 총사령관 등 다른 군 간부들과 함께 히틀러에게 침공을 단념시키려 했으나, 히틀러에 대한 반기를 들 동조자를 충분히 확보하지 못하고 결국 8월 18일 참모총장직을 사임했다. 베크 등 일부 반대파는 히틀러 체포 계획까지 세우고 런던에 밀사를 보내 영국의 강경 대응을 촉구했지만,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히틀러만이 전쟁을 막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한편, 히틀러 유화 정책 기조 아래 영국과 프랑스는 전쟁을 피하고자 했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과의 단독 전쟁을 원치 않아 영국 보수당 정부의 입장을 따랐다. 체임벌린 총리는 주데텐 독일인의 불만이 정당하며 히틀러의 요구가 제한적일 것이라 믿고, 체코슬로바키아에 독일의 요구 수용을 압박했다. 영국 정부는 베네시 대통령에게 중재자 파견을 요청하도록 요구했고, 베네시는 마지못해 동의하여 전 자유당 각료였던 런시먼이 이끄는 런시먼 사절단이 8월 3일 프라하에 도착했다. 그러나 런시먼 사절단의 중재 노력에도 불구하고, 히틀러의 지시를 받은 주데텐 독일인당은 협상을 거부했다. 8월, 독일은 군사 훈련을 명분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국경에 75만 명의 병력을 집결시키고, 언론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가 주데텐 독일인을 탄압한다는 선전을 강화했다. 9월 초, 베네시 대통령은 독일 측 요구를 거의 수용하는 네 번째 계획을 제출했지만, 주데텐 독일인당은 9월 7일 오스트라바에서 발생한 시위 충돌을 빌미로 협상 결렬을 선언했다.
9월 12일, 히틀러는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연설에서 체코슬로바키아를 민족 자결주의를 위반한 사기 국가로 규정하고, 베네시 정부가 주데텐 독일인을 탄압하고 몰살시키려 한다고 격렬하게 비난하며 독일 동포의 자결권을 지지할 것이라고 천명했다.[13][19][20] 다음 날인 9월 13일, 주데텐란트에서 독일인 시위대와 경찰 간의 충돌이 발생하자 프라하에 비상사태 선언이 내려졌다. 위기를 느낀 체임벌린은 전쟁을 막기 위해 히틀러에게 개인적인 만남을 요청했다.
9월 15일, 체임벌린은 비행기로 독일 베르히테스가덴의 오버잘츠베르크에 있는 히틀러의 별장을 방문하여 첫 회담을 가졌다.[21][22] 히틀러는 주데텐 독일인의 자결권 행사와 주데텐란트의 독일 합병을 강력히 주장하며,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독일인 300명을 살해했다는 거짓 주장을 반복했다.[21] 히틀러는 체임벌린이 자결 원칙을 수용한다면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고, 다음 회담까지 무력 행사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체임벌린은 이 문제를 내각과 논의하기 위해 영국으로 돌아갔다.[22]
9월 16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가 런던을 방문하여 영국 측과 협의했다.[23] 그 결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계 인구가 50% 이상인 주데텐란트 영토를 독일에 할양하도록 체코슬로바키아에 공동으로 요구하기로 결정했다. 그 대가로 양국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제안했다.[24] 9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공사는 베네시 대통령에게 이 권고안을 전달하며, 수용하지 않을 경우 체코슬로바키아의 운명에 더 이상 관여하지 않겠다는 강경한 입장을 통보했다. 결국 9월 21일,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마지못해 이 제안을 수락했다.[24] 이 결정에 반발하여 미란 호자 내각은 총사퇴하고 얀 시로비 장군을 중심으로 한 새 내각이 들어섰다.

한편, 히틀러는 9월 17일, 체코슬로바키아 내에서 테러 활동을 벌이던 독일계 민족주의 조직을 통합하여 주데텐도이체 자유군Sudetendeutsches Freikorpsde이라는 준군사 조직 창설을 명령했다. 이 조직은 독일 당국의 보호와 지원 아래 체코슬로바키아 영토에 대한 국경 테러 작전을 수행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는 이 날을 선전포고 없는 독일-체코슬로바키아 전쟁의 시작일로 간주하게 된다.[25][26] 9월 18일,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는 트리에스테 연설에서 독일 지지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22]

9월 22일, 체임벌린은 다시 독일로 가 바트 고데스베르크에서 히틀러와 두 번째 회담을 가졌다. 체임벌린은 영국과 프랑스가 합의한 양도안을 전달했지만, 히틀러는 이를 불충분하다며 거부하고 주데텐란트의 즉각적인 독일군 점령과 9월 28일까지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철수를 요구했다.[24]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완전한 해체와 영토 분할까지 언급하며 체임벌린을 압박했다.[24] 회담 중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더 많은 독일인이 살해되고 있다는 거짓 보고를 받는 연극까지 벌이며 강경한 태도를 보였다.[24] 회담이 결렬될 위기에 처하자 히틀러는 그날 밤 체임벌린에게 전화하여, 체코슬로바키아가 9월 26일까지 독일계 주민이 다수인 지역에서 철수를 시작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아 수데텐란트 합병만을 요구하는 것처럼 태도를 누그러뜨렸다. 체임벌린의 요청으로 최종 시한은 10월 1일로 연기되었지만, 이는 이미 계획된 '녹색 작전' 개시일과 동일했다.[29] 히틀러는 수데텐란트 합병 후에는 더 이상 영토 요구를 하지 않고 국경 보장 협정에 참여하겠다고 약속했다.[29]

9월 23일, 얀 시로비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새 정부는 총동원령을 선포했고, 24시간 안에 100만 명 이상의 군인이 소집되어 독일의 침공에 대비했다.[110] 체코슬로바키아군은 현대적인 장비와 잘 구축된 체코슬로바키아 국경 요새를 갖추고 결연한 항전 의지를 보였다. 소련은 프랑스가 군사적으로 지원할 경우 체코슬로바키아를 돕겠다고 밝혔으나, 폴란드와 루마니아가 자국 영토 통과를 거부하여 실질적인 지원은 어려웠다.[30] 9월 24일, 프랑스도 부분 동원령을 발동했다. 같은 날 히틀러는 고데스베르크 각서를 발표하여 9월 28일까지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할양하고 일부 지역에서 주민투표를 실시할 것을 요구하며, 불응 시 무력 점령하겠다고 최후통첩했다. 체임벌린은 영국으로 돌아와 히틀러의 요구를 전했고, 이는 영국과 프랑스 내에서 히틀러에 대한 강경론을 확산시켰다.[29]
9월 25일, 체코슬로바키아는 고데스베르크 이전의 영-프 제안 조건을 수락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다음 날인 9월 26일, 히틀러는 폴란드와 헝가리 내 소수 민족 문제 해결까지 요구하며 조건을 더욱 강화했다. 체임벌린은 호레이스 윌슨 경을 통해 히틀러에게 평화적 해결을 촉구하는 친서를 보냈으나,[29] 히틀러는 같은 날 저녁 베를린 스포츠궁전 연설에서 주데텐란트가 자신의 "유럽에서의 마지막 영토 요구"라고 주장하면서도, 9월 28일 오후 2시까지 요구가 수용되지 않으면 전쟁에 돌입하겠다는 시한을 못 박았다.[31][29]
9월 27일, 협상이 교착 상태에 빠지자 체임벌린은 영국 국민에게 라디오 연설을 통해 "우리가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의 싸움 때문에 참호를 파고 방독면을 착용해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하고 환상적이며 믿을 수 없는 일입니까."라고 말하며 전쟁 회피의 어려움을 토로했다.[32]
최후통첩 시한이 임박한 9월 28일 오전, 체임벌린은 이탈리아 주재 영국 대사를 통해 무솔리니에게 중재를 요청했다.[29]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 역시 무솔리니에게 중재를 요청하는 친서를 보낸 상태였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에게 연락하여 적대 행위 시작을 24시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고, 히틀러는 이를 수락했다.[33][34] 이어 체임벌린은 무솔리니에게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4개국 정상회담을 9월 29일 뮌헨에서 개최할 것을 제안했고, 무솔리니와 히틀러 모두 이에 동의했다.[34] 체임벌린은 영국 하원에서 연설 도중 이 소식을 전달받고 회담 참석을 발표했으며, 이는 의원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21]
3. 2. 뮌헨 회담
1938년 9월 22일 고데스베르크에서 열린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와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 간의 회담이 결렬되면서 유럽의 전쟁 위기는 최고조에 달했다. 히틀러는 주데텐란트의 즉각적인 할양과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철수를 요구했고, 이는 영국,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이에 9월 23일, 얀 시로비가 이끄는 체코슬로바키아 새 정부는 총동원령을 선포하여 100만 명 이상의 군대를 동원해 독일의 침공에 대비했다.[110] 9월 24일에는 프랑스 역시 부분 동원령을 내렸다.전쟁 발발 직전의 상황에서, 이탈리아의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가 중재에 나섰다. 9월 28일, 무솔리니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4개국 정상이 만나 회담을 열 것을 제안했다. 히틀러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군사 행동 개시를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임박했던 전쟁의 위협이 잠시나마 해소되자 영국 의회에서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뉴욕 증권 거래소의 주가도 급등했다.

9월 29일, 독일 뮌헨의 퓌러바우에서 히틀러, 체임벌린, 에두아르 달라디에 프랑스 총리, 무솔리니가 참석한 4개국 정상회담이 시작되었다.[105] 그러나 정작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표단(주영 대사 얀 마사리크, 주독 대사 보이테흐 마스트니)은 회담장에 들어가지 못하고 옆방에서 결과를 기다려야 했다. 달라디에 총리는 회의 직전 "모든 것은 영국인에게 달려 있다. 우리는 그들을 따를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영국의 결정에 의존하는 태도를 보였다.
회담은 다음 날인 9월 30일 새벽 1시 30분까지 이어졌고, 마침내 뮌헨 협정이 체결되었다. 협정 내용은 사실상 독일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한 것으로, 주데텐란트의 독일 할양이 결정되었다. 또한 헝가리 왕국과 폴란드의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요구도 고려되었다. 회담 결과를 기다리던 체코슬로바키아 대표들에게는 체임벌린이 직접 찾아와 협정 내용을 전달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얀 마사리크 대사는 큰 충격과 실망감에 눈물을 흘렸으나, 체임벌린은 크게 하품을 했다고 전해진다.[103] 이 일련의 과정을 뮌헨 회담이라고 부른다.
4. 뮌헨 협정의 내용
1938년 9월 29일, 독일의 히틀러,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이탈리아의 무솔리니,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는 뮌헨에서 만나 협정에 서명했다.[111] 이 협정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데텐란트 지역을 독일에 넘겨주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하며, 세부 조항은 다음과 같다.[111]
# 주데텐란트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와 관료의 철수는 1938년 10월 1일부터 시작한다.
#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는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1938년 10월 10일까지 해당 지역 내 시설이나 재산을 파괴하지 않고 철수를 완료하도록 보장할 책임을 진다.
# 철수의 세부 사항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독일 대표로 구성된 국제위원회가 결정한다.
# 독일군의 주데텐란트 점령은 1938년 10월 1일부터 시작되며, 미리 정해진 4개 지역을 10월 7일까지 순차적으로 점령한다. 그 외 독일인이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은 앞서 언급한 국제위원회의 승인을 받아 10월 10일까지 점령을 완료한다.
# 국제위원회는 주민 투표를 실시할 지역을 결정하며, 투표가 완료될 때까지 해당 지역은 국제기구가 관리한다. 주민 투표 방식은 자르 지역의 투표 방식을 참고하여 정하며, 투표일은 11월 말까지 설정한다.
# 국경의 최종 확정은 국제위원회가 담당한다. 위원회는 4개의 열강(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에 특정 지역 편입을 권고할 수 있으며, 민족 분포를 고려하여 주민 투표 없이 국경을 확정할 수도 있다.
# 할양 지역 안팎으로 주민이 이주할지를 선택할 권리는 협정 체결일로부터 6개월 이내에 행사되어야 한다. 독일계 주민 위원회는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검토하고 해결한다.
# 협정 체결 후 4주 이내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와 경찰은 제대를 원하는 주데텐 독일인을 제대시켜야 한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정치범으로 수감된 모든 주데텐 독일인을 석방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협정에 따라 주데텐란트는 1938년 10월 1일부터 독일에 즉시 할양되었고, 독일인이 다수인 다른 지역의 귀속은 국제위원회가 결정하거나 주민 투표를 통해 정해지게 되었다.
5. 뮌헨 협정의 결과
뮌헨 협정으로 인해 당장의 전쟁 위기는 피할 수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총리 얀 시로비는 9월 30일 협정 수락 성명을 발표했다. 같은 날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은 프랑스에 알리지 않고 히틀러와 추가 회담을 가졌고, 영독 해군 협정을 양국 상호 불가침의 상징으로 하는 영독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체임벌린과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이탈리아 총리 베니토 무솔리니는 각국에서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귀국했다. 9월 30일, 런던의 Heston Aerodrome|헤스턴 비행장eng에 도착한 체임벌린은 환영 인파에게 영독 공동 선언 문서를 흔들어 보였다. 같은 날 밤, 수상 관저 발코니 연설에서는 "우리 역사상 명예로운 평화가 돌아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이다. 이는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10월 1일, 나치 독일 군대는 수데텐란트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10월 5일, 독일 외무장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는 영국과 프랑스에 협정에 명시된 '독일인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의 기준을 1918년 당시 독일계 주민 비율이 50% 이상인 지역으로 확인해 줄 것을 요구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이 요구에 응하자, 체코슬로바키아는 주민 투표 실시를 포기했다.
같은 날인 10월 5일, 베네시 대통령은 체코슬로바키아의 몰락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여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그는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런던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를 수립했다. 1938년 12월 6일에는 프랑스 외무장관 조르주 보네와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가 파리에서 프랑스-독일 불가침 조약에 서명했다.[68][69][70]
나치 독일은 1938년부터 1945년까지 수데텐란트를 점령했다.[71]
5. 1. 체코슬로바키아의 분할
뮌헨 협정에 따라 독일은 1938년 10월 10일까지 주데텐란트의 점령을 완료하기로 하였다. 이 협정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 지역에서 전체 면적의 약 38%를 독일에 할양했으며, 이 지역에는 약 280만 명의 독일계 주민과 51만 3천 명에서 75만 명[73][74] 사이의 체코계 주민이 거주하고 있었다. 또한 국경 지대의 요새와 스코다 같은 주요 군수 공장을 포함한 공업 지대도 독일에 넘어가면서 국가 방위 능력을 크게 상실했다. 전체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는 국토의 약 30%와 약 500만 명의 인구를 잃었다.


독일 외에도 다른 국가들이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분할에 참여했다. 폴란드는 1938년 10월 2일, 체스키테신 마을을 포함한 자올지에 지역(약 906km2, 주민 25만 명 중 폴란드계 약 36%[76])을 합병했다. 또한 슬로바키아 북부의 스피슈와 오라바 지역의 두 작은 국경 지역(총 226km2, 주민 4,280명 중 폴란드계 0.3%)도 폴란드에 넘어갔다.

헝가리는 뮌헨 협정 부속서의 권고에 따라 진행된 제1차 빈 중재(1938년 11월 초)를 통해 남부 슬로바키아와 남부 카르파티아 루테니아에서 11882km2를 할양받았다.[72] 1941년 헝가리 인구 조사에 따르면, 이 지역 인구의 약 86.5%가 헝가리인이었다. 슬로바키아는 이 과정에서 10390km2의 영토와 854,218명의 주민(1930년 체코슬로바키아 인구 조사 기준 약 59%가 헝가리인, 32%가 슬로바키아인 및 체코인[75])을 잃었다.
뮌헨 협정 직후, 독일, 폴란드, 헝가리에 합병된 영토에서 11만 5천 명의 체코인과 3만 명의 독일인이 체코슬로바키아 잔여 지역으로 피난했다. 난민 지원 연구소에 따르면, 1939년 3월 1일까지 실제 난민 수는 거의 15만 명에 달했다.[77]

영토 분할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완전한 해체로 이어졌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내부의 분리주의 운동을 부추겨 슬로바키아 공화국과 카르파토-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유도했다. 슬로바키아는 독일의 보호 아래 사실상의 괴뢰국으로 독립했으며, 카르파토-우크라이나는 선포 직후 헝가리에 병합되었다. 헝가리는 또한 남부 슬로바키아를 추가로 침공하여 영토를 확보했다. 3월 15일, 독일은 에밀 하하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을 베를린으로 소환하여 협박했고, "체코슬로바키아가 보호국화를 요청하고 독일이 이를 받아들였다"는 형식의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이를 근거로 독일군은 남은 체코 영토로 진주하여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을 수립했다. 이로써 체코슬로바키아는 완전히 소멸되었고, 뮌헨 협정을 통해 얻고자 했던 평화는 반년도 채 지속되지 못하고 종언을 고했다.
5. 2. 국제 정세의 변화
1937년, 국방군(Wehrmacht)은 체코슬로바키아 침공 계획인 "녹색 작전"(Fall Grün)을 수립했으며, 이 작전은 1939년 3월 15일 슬로바키아 국가 선포 직후 실행되었다. 3월 14일 슬로바키아가 나치의 위성 국가로 독립하고, 다음 날 카르파토우크라이나도 독립을 선언했으나 3일 만에 헝가리에 점령, 합병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에밀 하하는 베를린으로 불려가 히틀러로부터 프라하 폭격 위협을 받으며 독일 점령을 수용하는 성명서에 서명했다.[79] 독일군은 프라하로 진입하여 체코슬로바키아의 남은 영토를 점령하고 보호령으로 만들었다.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가 초대 보호령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점령 직후 독일에서 온 난민, 유대인, 체코 공직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체포가 시작되었다. 11월에는 유대인 아동의 등교 금지 및 부모 해고 조치가 내려졌고, 시위 이후 대학이 폐쇄되었으며 1,200명 이상의 학생이 강제 수용소로 보내지고 9명의 학생 지도자가 11월 17일 (국제 학생의 날) 처형되었다.[80]
나치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을 통해 숙련된 노동력, 중공업, 그리고 체코슬로바키아군의 모든 무기를 확보했다. 1940년 프랑스 공방전 당시 독일 무기의 약 25%가 이 보호령에서 생산된 것이었다. 또한 영국 은행에 보관된 금을 포함한 체코슬로바키아의 금괴도 독일에 넘어갔다. 전쟁 후 소금 광산에서 발견된 총 227ton의 금 중 1982년 체코슬로바키아에 반환된 금은 18.4ton에 불과했지만, 그 대부분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것이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또한 의 전후 가격으로 국방군(Wehrmacht)에게 전쟁 물자를 "판매"해야 했다. 이 부채는 상환되지 않았다.[81]
뮌헨 협정의 결과로 할양된 영토에 국경 방어 시설의 대부분이 위치해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많은 양의 현대식 무기를 비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지역은 추가 침략에 완전히 노출되었다. 히틀러는 국회 연설에서 독일군의 강화를 위해 점령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하며,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으로 독일이 2,175문의 야포와 곡사포, 469대의 전차, 500문의 대공포, 43,000정의 기관총, 1,090,000정의 군용 소총, 114,000정의 권총, 약 10억 발의 소구경 탄약, 3백만 발의 대공포 탄약을 획득했다고 언급했다. 이 무기들은 독일 국방군(Wehrmacht)의 절반가량을 무장시킬 수 있는 양이었다.[85] 체코슬로바키아의 무기는 이후 독일의 폴란드 침공과 프랑스 전투에서 주요한 역할을 했는데, 프랑스는 1938년에 체코슬로바키아에게 주데텐란트를 포기하도록 종용했었다.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는 독일의 프라하 병합이 베르사유 조약의 불만을 넘어서는 "완전히 다른 범주"의 행위라고 비판했다.[82] 한편, 독일의 소유물로 둘러싸인 폴란드가 나치 팽창주의의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는 우려가 영국에서 제기되었다. 이는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 자유시에 대한 분쟁으로 분명해졌으며, 영국-폴란드 군사 동맹의 체결로 이어졌다. 그 결과 폴란드 정부는 폴란드 회랑과 단치히의 지위에 대한 독일의 협상 제안을 거부했다.[83] 체임벌린은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배신감을 느끼고, 히틀러에 대한 유화 정책이 실패했음을 깨달았으며, 독일을 상대로 훨씬 더 강경한 입장을 취하기 시작했다. 그는 즉시 영국군을 전시 체제로 동원하기 시작했고, 프랑스도 같은 조치를 취했다. 이탈리아는 영국과 프랑스 함대에 의해 위협받는다고 생각했고, 1939년 4월 자체적인 알바니아 침공을 시작했다.[84]
이탈리아는 뮌헨에서 독일을 강력하게 지지했으며, 몇 주 후인 1938년 10월, 이점을 이용하여 프랑스에 새로운 요구를 하려 했다. 무솔리니는 지부티의 자유 항구 확보, 아디스아바바-지부티 철도 통제, 수에즈 운하 회사 경영에 이탈리아의 참여, 튀니지 보호령에 대한 프랑스-이탈리아 간의 일종의 공동 통치, 그리고 프랑스가 점유한 코르시카에서 프랑스인에 의한 동화 없이 이탈리아 문화를 보존할 것을 요구했다. 프랑스는 이러한 요구를 거부하고 이탈리아에 대한 경고로 해상 기동을 위협했다.[87]
파리에서는 거리 중 하나에 "체임벌린"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거리에는 달라디에와 보네의 이름이 붙여졌다. 프랑스의 대중지 '파리 소와르'는 협정 성립을 실현한 영불 각료들에게 별장을 보내자는 캠페인을 벌여 며칠 만에 가 모였다. 한편 프랑스 공산당과 각 당의 일부에는 반 뮌헨 협정파도 존재했다. 12월 6일에는 선린 우호를 나타내는 불독 공동 선언이 서명되었다.
영국에서는 체임벌린에 대한 지지가 높아졌지만, 노동당 지도부와 보수당의 윈스턴 처칠이나 앤서니 이든과 같은 대독 강경파의 반감은 커졌다. 각료 중에서도 협정에 반대했던 더프 쿠퍼 해군 장관은 사임했다.
한편, 전쟁을 회피하고 주데텐란트 지역을 획득한 히틀러는, 모험적인 외교를 펼쳐도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에 호소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주데텐란트 병합 직후인 10월 24일에는 폴란드에 자유 도시 단치히 반환 및 폴란드 회랑에 독일이 치외법권을 갖는 통행로 설치를 요구했다. 이후 폴란드 침공 당시에도 히틀러는 영국과 프랑스의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또한 히틀러의 입장은 확고해졌고, 베크 등의 반 히틀러 그룹은 잠복을 강요받았다. 나중에 그들의 그룹은 당국으로부터 검은 오케스트라 그룹이라고 불리며, 1944년7월 20일에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을 발생시키게 된다.
독일에서 수데텐 위기는 이른바 오스터 음모로 이어졌다. 독일 군부 내의 주요 인물들과 ''아프베어'' 부국장 한스 오스터(Hans Oster) 장군은 독일이 감당할 준비가 안 된 전쟁으로 독일을 몰아넣을 위험이 있다고 믿었기에, 정권의 행위에 반대했다. 그들은 음모에 충성하는 병력으로 총리관저를 습격하는 계획을 통해 히틀러와 정권을 전복하는 것을 논의했다.[86]
소비에트 연방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인접국이었으며, 상호 원조 조약을 체결했음에도 불구하고 협정에 거의 관여하지 못했다. 영국 측은 소련을 고려했다고 주장했지만, 소련을 배제하고 추축국과 협상한 영불에 대한 소련 지도부의 불신감은 커졌고, 이후 독소 불가침 조약의 체결로 이어졌다.
폴란드는 테셴 지역을 확보하면서 일시적으로 독일에 우호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단치히 요구는 동맹국인 프랑스마저 독일과의 대결을 우려하여 상호 원조 조약 파기를 제안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음에는 뮌헨 협정을 지지했지만, 10월 19일에는 "뮌헨 협정이 전쟁의 길을 열었다"고 말하며 군사력 확대와 프랑스에 대한 군사 원조 확대 정책을 취하게 된다. 하지만 먼로 독트린의 입장을 취하는 정치인들의 비난을 받아 고립 정책의 지속을 강요받았다.
6. 뮌헨 협정에 대한 평가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헤스턴 비행장과 다우닝가 10번가 앞에서 협정을 발표하며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하고, 이것이 유럽 전체 평화의 서곡이 되기를 기대했다.[88][89]
그러나 윈스턴 처칠은 1938년 10월 5일 하원 연설에서 "우리는 완전하고 무차별한 패배를 겪었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이 협정이 재앙의 시작일 뿐이며, "쓴 잔의 첫 모금"에 불과하다고 경고했다.[90] 처칠은 이미 협정 체결 전인 1938년 8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에게 보낸 편지에서 "영국은 전쟁과 수치심 사이에서 선택을 제안받았다. 영국은 수치심을 선택했고, 전쟁을 얻게 될 것"이라고 예견한 바 있다.[91]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총리가 된 처칠은 협정의 무효화를 추진했다. 1942년 8월 5일, 영국 외무장관 앤서니 이든은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정부의 얀 마사리크에게 각서를 보내, 영국 정부가 더 이상 뮌헨 협정에 구속되지 않으며 전후 국경 결정 시 1938년 이후의 영토 변경을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공식화했다. 마사리크는 이를 환영하며 "이제 우리 두 나라 사이에서 뮌헨 협정은 죽은 것으로 간주될 수 있다"고 화답했다. 같은 해 9월 샤를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 민족 위원회도 뮌헨 협정을 무효로 선언했으며, 이후 이탈리아 정부도 같은 입장을 취했다.
전후 포츠담 협정에 따라 주데텐란트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반환되었고, 이곳에 거주하던 다수의 독일계 주민들은 추방되었다.
이후 '뮌헨'과 '유화 정책'이라는 단어는 국제 정치, 특히 미국과 영국에서 외교적 약점이나 침략자에 대한 굴복을 비판하는 상징적인 용어로 자리 잡았다.[93] 트루먼 대통령은 한국 전쟁 개입을 정당화하며 "세계는 뮌헨에서 안보는 유화 정책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배웠다"고 언급했다.[94] 이후에도 쿠바 미사일 위기, 베트남 전쟁, 이란 핵 협정 협상, 시리아 내전 개입 논의 등 다양한 국제적 위기 상황에서 정치인들은 자신들의 강경 노선을 주장하거나 상대방의 유화적 태도를 비판하기 위해 '뮌헨'을 거론했다.[95][96][97][98][99][100] 학자 프레드릭 로게발과 케네스 오스굿은 '뮌헨'이 미국 정치에서 "가장 불명예스러운 단어"가 되었으며, 때로는 필요한 외교적 타협마저 '유화 정책'이라는 비난으로 가로막는 "뮌헨의 횡포"로 작용하기도 한다고 지적했다.[98] 1972년 뮌헨 올림픽 참사 이후 서독이 아랍-이스라엘 분쟁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자, 이스라엘 측에서는 이를 유화 정책이라며 뮌헨 협정에 빗대 비판하기도 했다.[101]
1973년 서독과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 공화국 사이에 체결된 프라하 조약에서는 뮌헨 협정이 무효임을 명시적으로 선언했다. 다만 협정의 효력 발생 시점에 대한 해석 차이는 있었으나, 1991년 독일-체코 선린 우호 조약에서 프라하 조약의 무효 조항을 재확인하며 논란을 매듭지었다.
결론적으로 뮌헨 협정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저지하지 못하고 오히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처칠은 자신의 저서 『제2차 세계 대전 회고록』에서 유화 정책 대신 조기에 히틀러에 대응했다면 전쟁과 홀로코스트를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06] 당시 주영 소련 대사 이반 마이스키 역시 영국 외무 차관 알렉산더 캐도건에게 협정이 더 큰 분쟁을 야기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한편, 당시 영국의 유화 정책이 단순히 전쟁 회피 목적만이 아니라, 나치 독일보다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주의 확산을 더 큰 위협으로 여겨 독일의 침략 방향을 동쪽으로 유도하려는 의도였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또한 전쟁 준비를 위한 시간 벌기였다는 시각도 있으나, 당시 독일의 재무장은 1935년에 시작되어 아직 미비한 상태였으며[106], 오히려 협정을 통해 체코슬로바키아의 발달된 공업 지대와 우수한 전차(LT-35, LT-38) 및 생산 시설을 확보한 것이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을 결정적으로 강화시켰다는 비판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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