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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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1859년 사르데냐 왕국과 프랑스 제2제국이 오스트리아 제국에 맞서 싸운 전쟁이다. 사르데냐는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패배 이후 프랑스와의 동맹을 통해 통일을 추진했고, 오스트리아를 자극하여 전쟁을 유도했다. 프랑스는 사르데냐를 지원하여 롬바르디아를 확보했으나, 프로이센의 개입을 우려하여 빌라프랑카 휴전을 맺었다. 이 전쟁은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가속화시켰고,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약화시켰으며, 프로이센의 군사 개혁을 이끌어 독일 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주요 전투로는 몬테벨로 전투, 마젠타 전투, 솔페리노 전투 등이 있었으며, 빌라프랑카 휴전과 취리히 조약으로 마무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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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
분쟁 개요 | |
분쟁 명칭 |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
부분 분쟁 | 이탈리아의 통일 및 프랑스-합스부르크 경쟁 |
시기 | 1859년 4월 26일 - 1859년 7월 12일 () |
장소 | 롬바르디아-베네치아, 피에몬테, 오스트리아 해안 지방 |
결과 |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 승리 |
추가 결과 | 빌라프랑카 휴전 협정 |
영토 변화 | 사르데냐 왕국, 롬바르디아를 오스트리아로부터 합병 중앙 이탈리아 연합 주,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 통치 하의 토스카나 대공국, 모데나 공국, 파르마 공국 점령 후 합병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으로부터 사보이와 니스 백국 획득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프랑스 제2제국 사르데냐 왕국 (1720–1861) |
교전국 2 | 오스트리아 제국 |
지휘관 | |
지휘관 1 | 나폴레옹 3세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주세페 가리발디 알폰소 라 마르모라 |
지휘관 2 | 프란츠 요제프 1세 페렌츠 귤라이 막시밀리아노 1세 루트비히 폰 베네데크 카를 폰 우르반 |
병력 규모 | |
병력 1 | 프랑스: 128,000명, 대포 312문 사르데냐: 56,000명, 대포 90문 |
병력 2 | 오스트리아: 198,000명, 대포 824문 |
피해 규모 | |
피해 1 | 프랑스: 사망 또는 부상으로 인한 사망 약 11,000명, 실종 1,128명, 부상 17,054명, 질병 관련 사망 2,040명, 총 25,720명의 사상자 발생 사르데냐: 사망 1,533명, 부상 3,572명, 실종 1,268명, 총 사상자 수 미상 |
피해 2 | 오스트리아: 사망 또는 부상으로 인한 사망 약 23,000명, 총 사상자 수 미상 |
전투 목록 | |
주요 전투 | 몬테벨로 바레세 산 페르모 팔레스트로 투르비고 보팔로라 마젠타 멜레냐노 트레폰티 솔페리노 |
기타 정보 | |
![]() | |
관련 전쟁 | 이탈리아 통일 전쟁 |
프랑스어 명칭 | deuxième guerre d'indépendance italienne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guerre d'Italie de 1859 (1859년 이탈리아 전쟁) campagne d'Italie de 1859 (1859년 이탈리아 전역) |
독일어 명칭 | Zweiter Italienischer Unabhängigkeitskrieg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Sardinische Krieg (사르데냐 전쟁) |
영어 명칭 | Franco-Austrian War of 1859 (1859년 프랑스-오스트리아 전쟁) Austro-Sardinian War of 1859 (1859년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 |
2. 배경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패배한 사르데냐 왕국은 동맹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카보우르 총리는 크림 전쟁 참전 등을 통해 유럽 열강과의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크림 전쟁 이후 파리에서 열린 강화 회의에서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제기하려 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동정적이면서도 오스트리아 제국을 자극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펠리체 오르시니의 나폴레옹 3세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2. 1. 크림 전쟁과 외교적 노력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패배한 후, 사르데냐 왕국은 동맹국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카보우르 총리는 크림 전쟁 참전을 통해 다른 유럽 열강들과 관계를 맺고자 했다. 크림 전쟁 이후 파리에서 열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제기하려 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사르데냐 왕국에 동정적이었으나,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직접적인 분쟁은 피하려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카보우르와의 사적 만남에서 사르데냐를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22]1858년 1월 14일, 펠리체 오르시니가 나폴레옹 3세 암살을 시도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 통일에 대한 폭넓은 지지를 불러일으켰고, 나폴레옹 3세에게도 큰 영향을 미쳐, 이후 혁명 활동을 진압하기 위해 오스트리아에 맞서 사르데냐를 돕기로 결심하게 만들었다. 1858년 7월 21일 플롱비에르레뱅에서 비밀 회담을 가진 후, 나폴레옹 3세와 카보우르는 1859년 1월 28일 오스트리아에 대항하는 비밀 동맹 조약을 체결했다.[4]
카보우르는 오스트리아 제국이 먼저 공격하기 이전까지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을 수 없게 되자, 오스트리아가 국경 지대에서 군사적 행동을 취할 수 있도록 여러 분쟁을 유발했다. 1859년 4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 육군의 완전한 무장해제를 요구했고, 이것이 이행되지 않았을 때, 1859년 4월 29일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와 전쟁을 시작했고, 프랑스 역시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22]
2. 2. 플롱비에르 밀약
1858년 7월 21일, 카보우르는 나폴레옹 3세와 플롱비에르레뱅(Plombières-les-Bains)에서 비밀 회담(플롱비에르 밀약)을 가졌다. 이 밀약을 통해 프랑스는 사르데냐 왕국이 오스트리아로부터 공격받을 경우 군사적으로 지원하고, 그 대가로 사르데냐 왕국은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하기로 했다. 이 동맹은 사르데냐에게는 사보이아 왕가 주도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는데 도움이 되었고, 프랑스에게는 적국인 오스트리아를 약화시킬 수 있는 기회였다.[15]이 밀약은 제1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서 패배한 사르데냐가 동맹국의 필요성을 절감하면서 추진되었다. 사르데냐 총리 카보우르는 크림 전쟁 참전 등을 통해 유럽 열강과의 관계를 구축하려 했다. 크림 전쟁 강화 회의에서 카보우르는 이탈리아 통일 문제를 제기했지만, 영국과 프랑스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펠리체 오르시니의 나폴레옹 3세 암살 미수 사건 이후, 나폴레옹 3세는 이탈리아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고, 결국 플롱비에르 밀약으로 이어졌다.
2. 3. 오스트리아의 최후통첩과 전쟁 발발
카밀로 벤소 디 카보우르 백작은 오스트리아 제국을 자극하여 먼저 공격하게 만들려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는 국경 근처에서 군사 기동을 벌여 오스트리아를 도발했다. 사르데냐 왕국은 1859년 3월 9일 군대를 동원했고, 이에 오스트리아는 1859년 4월 9일 동원령을 내렸다.[4]1859년 4월 23일,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 육군의 완전한 무장해제를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보냈다.[22] 사르데냐 왕국이 이를 거부하자, 오스트리아는 4월 26일 사르데냐에 대한 전쟁을 시작했다.[4] 결국 오스트리아는 4월 29일 사르데냐에 선전포고하여 프랑스가 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15]
프랑스군 첫 부대는 4월 25일 피에몬테에 진입했고, 프랑스는 5월 3일 오스트리아에 선전포고를 했다.[4]
3. 참전 군대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에는 프랑스, 사르데냐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이 참전했다. 각 참전국은 상당한 규모의 군대를 동원했다.
프랑스군은 5개 군단과 제국 근위대로, 사르데냐 군은 5개 사단과 2개의 자원 부대로 구성되었다. 오스트리아 군은 가장 많은 병력을 투입했다.
국가 | 병력 | 기병 | 대포 | 지휘관 |
---|---|---|---|---|
프랑스군 | 17만 명 | 2,000명 | 312문 | 나폴레옹 3세 |
사르데냐 군 | 약 7만 명 | 4,000명 | 90문 |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
오스트리아 군 | 22만 명 | 22,000명 | 824문 | 페렌츠 규라이 |
몰다비아와 발라키아 공국 연합도 프랑스-이탈리아 동맹을 지원하여, 오스트리아 군의 일부를 트란실바니아에 묶어두는 역할을 했다.[5]
3. 1. 프랑스군

프랑스군은 나폴레옹 3세가 직접 지휘했으며, 이탈리아 원정을 위해 프랑스 전체 군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17만 명의 병력, 2,000명의 기병, 312문의 대포를 투입했다. 프랑스군은 5개 군단과 제국 근위대로 구성되었다.
군단 | 지휘관 |
---|---|
제1군단 | 아킬레 바라게이 드일리에르 |
제2군단 |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
제3군단 | 프랑수아 르탱 드 캉로베르 |
제4군단 | 아돌프 니엘 |
제5군단 | 나폴레옹 조제프 샤를 폴 보나파르트 공 |
제국 근위대 | 오귀스트 르노 드 생장 당젤리 |
나폴레옹 3세의 전쟁 참전은 프랑스 국민들의 사기를 높이는 데 성공적이었다.
3. 2. 사르데냐 왕국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국왕과 알폰소 페레로 라 마르모라가 이끄는 사르데냐 군은 약 7만 명의 병력, 4,000명의 기병, 9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다.[5] 5개 사단은 카스텔브루고, 만프레도 판티, 조반니 두란도, 엔리코 찰디니, 도메니코 쿠키아리 장군이 지휘했다.[5] 알프스 사냥꾼과 아펜니노 사냥꾼이라는 두 개의 자원 부대도 참전했다.[5]3. 3. 오스트리아 제국군
페렌츠 규라이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군은 약 22만 명의 병력, 824문의 대포, 22,000명의 기병을 보유하여 병력 면에서 우세했다.[5]3. 4. 기타 세력
몰다비아와 발라키아 공국 연합은 프랑스-이탈리아 동맹을 지원했다. 그 통치자 알렉산드루 이오안 쿠자는 나폴레옹 3세로부터 1만 정의 소총과 탄약을 지원받았다. 나폴레옹 3세는 변치 않는 진심 어린 동정심으로 부쿠레슈티에 군사 고문단을 파견하기도 했다.[5] 이에 고무된 쿠자는 플로이에슈티에 새로운 군사 훈련소를 설립했다.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는 트란실바니아에 3만 명의 병력을 배치해야 했는데, 이는 이탈리아에서 절실히 필요한 병력이었다.[5]4. 주요 전투 및 경과
프랑수아 쉬르탱 캉로베르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철도를 대규모 군사 작전에 이용하여 피에몬테로 신속하게 이동했다. 반면, 오스트리아군은 프랑스군이 도착하기 전에 사르데냐군을 제압하려 했으나, 롬바르디아 주둔 오스트리아군 사령관 율라이 백작은 지나치게 신중한 작전을 펼쳤다. 율라이 백작은 티치노 강 주변을 맴돌다 강을 건너 공격을 시작했지만, 폭우와 피에몬테군의 논 침수 작전으로 진격이 크게 지연되었다.[6]
율라이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은 4월 30일 노바라, 5월 2일 베르첼리를 점령하고 5월 7일부터 토리노로 진격했다. 그러나 알레산드리아와 포 강 주변의 카살레 몬페라토 다리를 강화하려는 프랑코-사르데니아 연합군의 움직임으로 인해 5월 9일 진격을 중단하고 5월 10일 후퇴했다. 나폴레옹 3세는 5월 10일 파리를 떠나 5월 12일 제노바에 상륙하여 5월 14일 알레산드리아에 도착하여 전쟁의 작전 지휘를 맡았다.[6]
이후 몬테벨로 전투, 마젠타 전투, 솔페리노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솔페리노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큰 피해를 입고 사각형 요새로 후퇴했다.[6] 한편, 롬바르디아 북부에서는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알프스 사냥꾼이 바레세와 코모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7]
4. 1. 몬테벨로 전투 (1859년 5월 20일)

몬테벨로 전투는 1859년 5월 20일에 벌어진 전투로, 포레가 이끄는 프랑스 제1군단 소속 사단과 카를 폰 우르반 휘하의 오스트리아 제9군단 간의 전투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군과 사르데냐 기병 연합군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한 첫 번째 주요 전투였다. 드 소나즈가 이끄는 사르데냐 기병대가 도착하자 오스트리아군은 9시간의 전투 후 후퇴했으며, 이는 율라이를 더욱 신중하게 만들었다.[6]
4. 2. 마젠타 전투 (1859년 6월 4일)
프랑수아 쉬르탱 캉로베르 원수가 이끄는 프랑스군은 철도를 군사적으로 이용하여 피에몬테로 진군했다. 6월 초, 율라이 백작은 철도 중심지인 마젠타로 진군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이 전체적으로 분산되어 있었기 때문에 나폴레옹 3세는 티치노 강에서 공격을 가하면서 대부대를 북쪽으로 파견하여 오스트리아군의 측면을 공격했다. 결국, 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였다.[16] 이 전투에서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의 활약이 돋보였다. 이 승리로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은 밀라노를 점령했다.4. 3. 솔페리노 전투 (1859년 6월 24일)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은 솔페리노 부근에서 우연히 마주쳐 혼란스러운 전투를 벌였다. 프랑스 군단 하나가 메돌레에서 오스트리아 군단 3개를 하루 종일 저지하여 솔페리노 주변의 더 큰 전투에 합류하는 것을 막았다. 하루 종일 전투가 벌어진 후 프랑스군은 돌파에 성공했다. 루트비히 폰 베네덱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제8군은 본군과 분리되어 포졸렌고를 방어했는데, 이는 성공적이었지만 솔페리노에서 프랑스군이 돌파한 후 오스트리아군 전체가 사각형 요새로 후퇴했다.[6] 이 전투의 참상은 앙리 뒤낭이 적십자사를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4. 4. 기타 전투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알프스 사냥꾼 부대는 바레세 전투와 산 페르모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했다.[7] 산 페르모 전투에서 카를 폰 우르반을 격파하고 코모에 입성했다.[17]
5. 빌라프랑카 휴전과 취리히 조약
솔페리노 전투 이후 1859년 7월 8일 휴전에 합의했고, 7월 11일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와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1세는 베로나의 빌라프랑카에서 만나 빌라프랑카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나폴레옹 3세가 여러 가지 이유로 이 조약에 서명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사각형 요새지대로 후퇴했는데, 이곳을 점령하는 데는 막대한 비용이 들 것이었다. 그의 프랑스 부재는 국가를 공격에 취약하게 만들었고, 이탈리아에서의 행동은 프랑스에서 비판을 받고 있었다. 또한 카보우르와 피에몬테가 프랑스 군인들의 희생을 통해 너무 많은 권력을 얻는 것을 원하지 않았으며, 독일 국가들의 개입을 우려했다.
휴전 결과, 수도인 밀라노를 포함한 롬바르디아 대부분이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이전되었고, 프랑스는 즉시 이 지역들을 사르데냐에 할양했다. 전쟁 직후 혁명으로 쫓겨났던 중부 이탈리아의 통치자들은 복위될 예정이었다. 11월 11일 취리히 조약이 체결되어 빌라프랑카 휴전의 내용이 재확인되었다.
프로이센 왕국은 전쟁 중 13만 2천 명의 병력을 동원했지만 전투에 참여하지는 않았다. 동원 과정에서 드러난 약점 때문에 프로이센 군대는 군사 개혁을 시작했고,[10] 이는 프로이센이 1866년 오스트리아와 1870-71년 프랑스를 신속하게 승리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프로이센의 지배하에 통일된 독일로 이어졌다.[11]
5. 1. 사르데냐 왕국의 반발과 카보우르의 사임
사르데냐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배후에서 체결한 빌라프랑카 휴전협정은 피에몬테-사르데냐에서 큰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이에 항의하며 카보우르는 사임했다.[8] 그러나 빌라프랑카 조항은 11월 11일 최종 취리히 조약에서 재확인되었지만, 이미 효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피에몬테가 중부 이탈리아 국가들을 점령했고, 이전 통치자들을 복위시키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그렇게 하도록 강제할 의향이 없었기 때문이다.[8]5. 2. 중부 이탈리아 병합과 이탈리아 통일 진전
빌라프랑카 평화 조약은 사르데냐의 동맹국들 몰래 나폴레옹 3세가 체결했기 때문에 피에몬테-사르데냐에서 큰 분노를 일으켰고, 카밀로 카보우르는 항의하며 사임했다. 그러나 이 협정은 1859년 11월 11일 취리히 조약에서 재확인되었지만, 이미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사르데냐 왕국은 중부 이탈리아 국가들을 점령했고 이전 통치자들을 복위시키지 않았으며, 프랑스는 이를 강제할 의향이 없었다.[8]오스트리아는 프랑스가 조약 조항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좌절했다. 오스트리아는 1849년 자유주의 운동 진압 후 승리한 것처럼 보였지만, 유럽 무대에서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는 심각하게 위협받았고 이탈리아 내 영향력은 크게 약화되었다.
1860년 3월 22일, 프랑스와 영국의 승인을 얻어 중부 이탈리아 연합국(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교황령 일부 포함)이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었고, 프랑스는 사보이와 니스를 받았다. 니스를 프랑스에 넘기는 조치는 니스 출신의 이탈리아 국가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이는 가리발디의 시칠리아 원정으로 이어져 이탈리아 통일의 예비 단계를 완료했다.[8] 니스의 프랑스 병합은 니스인 엑소더스 또는 니스 이탈리아인 4분의 1의 이탈리아 이민을 야기했고,[9] 니스 만종을 초래했다.
6. 전쟁의 영향과 결과
빌라프랑카 휴전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에게서 롬바르디아를 할양받아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하였다. 이 과정에서 나폴레옹 3세가 사르데냐를 버리고 맺은 강화는 사르데냐를 격분시켰고, 카브르는 사임했다. 취리히 조약에서 빌라프랑카의 결정이 재확인되었지만, 이미 사문화된 후였다.[18]
전쟁 중 프로이센 왕국은 1859년 13만 2천 명을 동원했지만 참전하지 않았다. 동원 문제가 부각되면서 프로이센군은 군제 개혁을 단행[19]하여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년부터 1871년까지의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신속하게 승리하여 프로이센 주도로 독일 통일을 달성하게 되었다.[20]
6. 1. 이탈리아 통일 운동 가속화
1860년, 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 등 중부 이탈리아 여러 국가에서 국민투표를 거쳐 사르데냐 왕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허가를 받아 이들 국가를 병합했고, 프랑스는 늦게나마 사보이아와 니스를 보상받았다. 니스 출신의 가리발디는 이에 반발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고 사르데냐 왕에게 헌상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성공시켰다.[18]6. 2. 오스트리아 제국의 약화
빌라프랑카 휴전으로 오스트리아와 휴전 협정을 체결한 후, 만토바와 레냐고 요새 주변을 제외한 롬바르디아-베네토 왕국이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할양되었다가 곧바로 사르데냐에 할양되었다. 개전 직후 혁명으로 쫓겨났던 중부 이탈리아 여러 국가의 군주들은 복위될 것으로 결정되었다.[18]나폴레옹 3세가 사르데냐를 버리고 맺은 이 강화는 사르데냐를 격분시켰고, 카브르 자신도 사임했다. 빌라프랑카에서 결정된 사항은 11월 취리히 조약에서 재확인되었지만, 그때는 이미 사문화되어 있었다. 사르데냐는 중부 이탈리아 여러 국가의 군주를 복위시킬 의향이 전혀 없었고, 그 영토를 점령하고 있었으며, 프랑스도 조약 이행을 강요할 의도가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불만을 품었지만 프랑스가 조약을 이행하지 않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1849년 자유주의 운동을 진압했지만, 유럽 열강으로서의 지위는 심각한 도전을 받았고, 이탈리아에서의 영향력도 크게 약해졌다.[18]
이듬해인 1860년, 중부 이탈리아 여러 국가(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국민투표를 거쳐 사르데냐 왕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허가를 받아 이들 국가를 병합했고, 프랑스는 늦게나마 보상(사보이아와 니스)을 받았다. 니스 출신의 가리발디는 반발하여 양시칠리아 왕국을 정복하여 사르데냐 왕에게 헌상함으로써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성공시켰다.[18]
6. 3. 프로이센의 군사 개혁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중 프로이센 왕국은 1859년 13만 2천 명을 동원했지만 참전하지는 않았다. 이 과정에서 드러난 동원 문제로 인해 프로이센군은 군제 개혁을 단행했다.[19] 이 군사 개혁은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년부터 1871년까지 이어진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로이센이 신속하게 승리하는 기반이 되었으며, 나아가 프로이센 주도의 독일 통일을 달성하는 데 기여했다.[20]7. 연표
- 5월 20일 - 프랑스 보병과 사르데냐 기병이 몬테벨로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고, 오스트리아군은 후퇴하였다.
- 5월 26일 - 가리발디의 알프스 사단이 바레세 전투에서 카를 폰 우르반 원수가 이끄는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였다.
- 5월 27일 - 알프스 사단이 산 페르모 전투에서 카를 폰 우르반을 다시 격파하고 코모에 입성하였다.
- 5월 30일 - 프랑스와 사르데냐 연합군이 파레스트로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하였다.
- 6월 4일 - 프랑스군이 마젠타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에게 승리하였다.
- 6월 21일/24일 - 사르데냐군과 나폴레옹 3세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솔페리노 전투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이끄는 군대에게 승리하였다. 앙리 뒤낭이 적십자사를 창설하는 계기가 되었다.
- 7월 11일 - 헝가리 왕국의 혁명에 직면한 프란츠 요제프 1세가 빌라프랑카디베로나에서 나폴레옹 3세와 회담하고 빌라프랑카 휴전을 체결하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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