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솔페리노 전투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솔페리노 전투는 1859년 이탈리아 통일을 위한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 중 벌어진 전투로, 프랑스와 사르데냐 연합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상대로 승리했다. 이 전투는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으며, 지휘관들의 미숙한 지휘가 피해를 키웠다. 솔페리노 전투의 참혹한 경험을 목격한 앙리 뒤낭은 국제 적십자 운동의 시작에 영감을 주었고, 이 전투에서 사용된 강선포는 이후 군사 기술 발전에 영향을 미쳤다. 전투 후 체결된 빌라프란카 휴전으로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종결되었고, 이탈리아 통일이 가속화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859년 전투 - 돼지 전쟁
    돼지 전쟁은 1859년 미국과 영국 간 샌환 제도의 영유권 분쟁으로, 돼지 사살 사건으로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지만 외교적 해결을 통해 미국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1859년 이탈리아 - 중앙이탈리아 연합주
    1859년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공국, 교황령의 사르데냐 지지 정권들이 결성한 중앙이탈리아 연합주는 군사 조약 그룹으로, 사르데냐 왕국에 병합되기 전 카를로 본 콤파니 디 몸벨로가 총독을 맡았으며, 프랑스 제2제국의 승인 대가로 사보이와 니스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솔페리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전투 이름솔페리노 전투
일부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
날짜1859년 6월 24일
장소솔페리노, 롬바르도베네토 왕국 (현재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주)
결과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의 승리
영향이탈리아 독립 전쟁 종결
빌라프랑카 휴전 협정
교전 세력
교전국 1프랑스
사르데냐
교전국 2오스트리아
지휘관
지휘관 1나폴레옹 3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지휘관 2프란츠 요제프 1세
병력 규모
병력 1보병 82,935명
기병 9,162명
포 240문
보병 37,174명
기병 1,562명
포 80문
총합: 130,833명
포 320문
병력 2보병 119,783명
기병 9,490명
포 429문
총합: 129,273명
포 429문
사상자
사상자 1프랑스: 사망 3,887명 (장교 117명 포함)
부상 8,530명
실종 1,518명
사르데냐: 사망 691명 (장교 49명 포함)
부상 3,572명
실종 1,258명
총합: 약 28,000명
사상자 2사망 7,679명 (장교 216명 포함)
부상 17,567명
실종 9,290명
총합: 약 40,000명
이미지
솔페리노 전투
솔페리노 전투, 아돌프 이본 그림
솔페리노 전장에 선 나폴레옹 3세
솔페리노 전장에 선 나폴레옹 3세

2. 배경

1859년 3월,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하던 사르데냐 왕국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군대 동원을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도발로 간주, 동원 해제를 요구하며 불응 시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으나 사르데냐는 이를 묵살했다. 결국 4월에 오스트리아는 피에몬테를 침공,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발발했다. 5월에는 프랑스나폴레옹 3세가 플롱비에르 밀약에 따라 프랑스군을 파병하여 사르데냐를 지원했다. 여러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은 점차 밀려났다.[4]

6월 4일 마젠타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군대를 후퇴시켜 재정비하려 했다. 나폴레옹 3세는 이를 추격했으나 따라잡지 못했다. 6월 23일, 오스트리아군은 민치오 강을 건너 솔페리노에 전투태세를 갖췄다. 연합군은 이미 근처에 있었지만 정찰 부족으로 서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특히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군이 여전히 민치오 강 건너에 있다고 오판했다. 6월 24일 새벽, 양군은 예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전투에 돌입했다.[4]

2. 1.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전개

1859년 3월,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사르데냐 왕국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도발 행위로 간주하고, 동원 해제를 요청하였고, 이것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나 사르데냐는 요청을 묵살했다. 같은 해 4월 통첩 시한이 지나자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 령 피에몬테를 침공하여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5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플롱비에르 밀약》에 따라 사르데냐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파견했다. 여러 차례의 전투 결과,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오스트리아군은 점차 밀리기 시작했다.

6월 4일, 마젠타 전투 이후 오스트리아의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군대를 후퇴시켜 전력 재편에 나섰다. 나폴레옹 3세는 적의 재편이 이루어지기 전에 공격하려고 추격했지만, 오스트리아군을 포착하지 못했다. 6월 23일, 어느 정도 재편된 오스트리아군은 민치오 강을 건너 솔페리노를 중심으로 전투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연합군은 이미 근접해 있었지만, 정찰 부족으로 양군 모두 서로를 완전히 포착하지 못했다. 특히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군이 아직 민치오 강 건너편에 있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었다. 6월 24일 새벽, 양군은 예상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서로를 발견하고, 급작스럽게 전투에 돌입했다.

2. 2.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 발발

1859년 3월, 이탈리아 통일을 목표로 사르데냐 왕국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군대를 동원하기 시작했다. 오스트리아는 이를 도발 행위로 간주하고, 동원 해제를 요청하였고, 이것이 수용되지 않을 경우 선전포고를 하겠다는 최후통첩을 했다. 그러나 사르데냐는 요청을 묵살했다. 같은 해 4월 통첩 시한이 지나자 오스트리아는 사르데냐 령 피에몬테를 침공하여 ‘오스트리아-사르데냐 전쟁’(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5월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 3세는 《플롱비에르 밀약》에 따라 사르데냐를 지원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파견했다. 몇 차례의 전투를 거치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는 않았지만 서서히 오스트리아 군대는 밀렸다.[4]

3. 전력

구분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오스트리아군
병력118,600명(뒤낭에 따르면 150,000명)약 100,000명(뒤낭에 따르면 170,000명)
약 400문약 500문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은 프랑스군이 중앙과 우익, 사르데냐군이 좌익을 담당했다. 오스트리아군은 솔페리노를 중심으로 북쪽 가르다호, 남쪽 메도레까지 전선을 구축했다. 솔페리노는 작은 언덕 위의 요충지로 성과 탑이 있었다. 오스트리아군은 구릉에 포병을 배치해 효율적인 포격을 했다.

3. 1. 프랑스-사르데냐 연합군


  • 병력 - 118,600명(뒤낭에 따르면 150,000명)[4]
  • 포 - 약 400문[4]


중앙과 우익은 프랑스군이, 사르데냐군은 좌익을 담당했다. 프랑스군은 신식 강선포를 장비하고 있었는데, 이는 기존의 활강포에 비해 사정거리와 명중률이 뛰어났다.[4]

3. 2. 오스트리아 군대

프란츠 폰 빔펜(Franz von Wimpffen)이 지휘하는 4개 군단(II, III, IX, XI)으로 구성된 제1군과 프란츠 폰 슐릭(Franz von Schlick)이 지휘하는 4개 군단(I, V, VII, VIII)으로 구성된 제2군으로 이루어져 있었다.[4] 병력은 약 100,000명(뒤낭에 따르면 170,000명)이고, 포는 약 500문을 보유하고 있었다. 솔페리노를 중심으로 북쪽 가르다 호수, 남쪽 메돌레에 이르는 전선을 전개하고 있었다. 공방의 초점이 된 솔페리노는 작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로 성과 탑을 보유한 요충지였다. 오스트리아군은 효율적인 포격을 퍼붓기 위해 구릉을 이용하여 대포를 배치했다.

4. 전투

19세기 전투 지도


솔페리노 전투는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의 결정적인 전투였으며, 이탈리아 통일 운동(리스르지멘토)의 중요한 단계였다. 이 전투는 프랑스, 오스트리아, 스페인과 여러 독립 이탈리아 국가들 사이에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를 통일하려는 민족주의적 투쟁의 배경 속에서 벌어졌다. 솔페리노와 산 마르티노 마을 근처, 가르다 호 남쪽, 밀라노베로나 사이에서 벌어진 이 전투에는 오스트리아군과, 그들의 진격을 저지한 프랑스와 피에몬테군이 맞섰다.

1859년 6월 23일 아침, 프란츠 요제프 황제가 도착한 후 오스트리아군은 방향을 바꾸어 키에세 강을 따라 역공을 가했다. 동시에 나폴레옹 3세는 그의 군대에게 진격을 명령하여 예상치 못한 장소에서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피에몬테군이 산 마르티노 근처에서 오스트리아 우익과 싸우는 동안, 프랑스군은 남쪽 솔페리노 근처에서 주요 오스트리아 군단과 격돌했다.[1]

4. 1. 전투의 시작

오전 6시, 프랑스군 우익이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곧 전 전선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양군 지휘부 모두 전선에 존재하지 않았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참모들과 함께 후방 볼타에 있었고, 전투 개시 소식을 받자 즉시 전선으로 향했다.[1] 나폴레옹 3세도 후방 사령부에 있었고, 보고를 받자마자 전선으로 향했지만, 그가 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 30분이 되어서였다.[1]

나폴레옹 3세는 그의 삼촌 나폴레옹 1세처럼 전선을 누비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공격을 지휘했지만, 그의 의식은 오로지 병사들을 전진시키고 돌격시키는 데만 집중되어 전혀 생산적인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1] 반면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황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통일된 지휘를 취할 수 없었다.[1] 20만 군대의 충돌로 이미 상황은 양군 지휘부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양군 모두 만족할 만한 전술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그저 눈앞의 적과 교전하고 있었다.[1]

오후가 되어서야 나폴레옹 3세는 주공을 중앙의 솔페리노에 정하는 것을 생각해냈다.[1] 포병을 집중시켜 솔페리노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고, 그 화력 지원 아래 정예 황제 근위병을 중심으로 한 보병을 투입했다.[1] 오스트리아군의 포화와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황제 근위병은 언덕 하나를 점령했다.[1] 이어서 시가지에도 프랑스 보병이 쇄도하여 양군이 뒤섞인 혼전이 되었다.[1]

오후 2시, 오스트리아군은 시가지에서 후퇴했고,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프랑스군은 솔페리노를 점령하고 전선 중앙에 쐐기를 박았다.[1] 이 무렵 전장 상공에 급속히 먹구름이 몰려왔다. 곧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쳐 양군 모두 화기 사용이 어려워졌다.[1] 나폴레옹 3세는 공격을 계속했고, 진흙탕 속 백병전이 되었다.[1]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솔페리노가 함락된 것으로 이미 패배를 의식하고, 또 자신이 전장의 공포에도 사로잡혀 있었기에 전군의 후퇴를 시작했다.[1] 폭풍우 속의 후퇴는 거의 궤멸과 다름없었고, 오스트리아군의 행방불명자는 수없이 많았다.[1]

솔페리노 전투 전날 피에몬테 진영 사진

4. 2. 혼전 양상

오전 6시, 프랑스군 우익이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곧 전 전선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양군 지휘부 모두 전선에 없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참모들과 함께 후방 볼타에 있었고, 전투 개시 소식을 받자 즉시 전선으로 향했다. 한편 나폴레옹 3세도 후방 사령부에 있었고, 보고를 받자마자 전선으로 향했지만, 그가 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 30분이 되어서였다.[4]

나폴레옹 3세는 그의 삼촌 나폴레옹 1세처럼 전선을 누비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공격을 지휘했지만, 그의 의식은 오로지 병사들을 전진시키고 돌격시키는 데만 집중되어 전혀 생산적인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한편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황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통일된 지휘를 취할 수 없었다. 20만 군대의 충돌로 이미 상황은 양군 지휘부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양군 모두 만족할 만한 전술 행동을 취하지 못한 채 그저 눈앞의 적과 교전하고 있었다.[4]

오후가 되어서야 나폴레옹 3세는 주공을 중앙의 솔페리노에 정하는 것을 생각해냈다. 포병을 집중시켜 솔페리노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고, 그 화력 지원 아래 정예 황제 근위병을 중심으로 한 보병을 투입했다. 오스트리아군의 포화와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황제 근위병은 언덕 하나를 점령했다. 이어서 시가지에도 프랑스 보병이 쇄도하여 양군이 뒤섞인 혼전이 되었다.[4]

오후 2시, 오스트리아군은 시가지에서 후퇴했고,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프랑스군은 솔페리노를 점령하고 전선 중앙에 쐐기를 박았다. 이 무렵 전장 상공에 급속히 먹구름이 몰려왔다. 곧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쳐 양군 모두 화기 사용이 어려워졌다. 나폴레옹 3세는 공격을 계속했고, 진흙탕 속 백병전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솔페리노가 함락된 것으로 이미 패배를 의식하고, 또 자신이 전장의 공포에도 사로잡혀 있었기에 전군의 후퇴를 시작했다. 폭풍우 속의 후퇴는 거의 궤멸과 다름없었고, 오스트리아군의 행방불명자는 수없이 많았다.[4]

4. 3. 프랑스군의 솔페리노 점령



오전 6시, 프랑스군 우익이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공격하면서 전 전선에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양군 최고 지휘관들은 모두 전선에 없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참모들과 볼타에 있었는데, 전투 시작 소식을 듣고 즉시 전선으로 향했다. 나폴레옹 3세 역시 후방 사령부에 있다가 보고를 받고 전선으로 향했지만, 오전 7시 30분에야 도착했다.

나폴레옹 3세는 삼촌 나폴레옹 1세처럼 전선을 누비며 병사들을 격려하고 공격을 지휘했지만, 병력을 전진시켜 돌격시키는 데만 집중하여 생산적인 결과를 내지 못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통일된 지휘를 하지 못했다. 20만 군대의 충돌로 상황은 양군 지휘부도 수습할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러웠고, 양군은 만족할 만한 전술 행동 없이 눈앞의 적과 교전했다.

오후가 되어서야 나폴레옹 3세는 주공을 솔페리노 중앙으로 정했다. 포병을 집중시켜 솔페리노에 맹렬히 포격하고, 그 화력 지원 아래 정예 황제 근위병을 중심으로 보병을 투입했다. 오스트리아군의 포화와 총격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지만, 황제 근위병은 언덕 하나를 점령했다. 프랑스 보병이 시가지로 쇄도하면서 양군이 뒤섞인 혼전이 벌어졌다.

오후 2시, 오스트리아군은 시가지에서 후퇴했고, 프랑스군은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솔페리노를 점령하고 전선 중앙에 쐐기를 박았다.[4] 이 무렵 전장 상공에 먹구름이 몰려오면서 격렬한 폭풍우가 쏟아져 양군 모두 화기 사용이 어려워졌다. 나폴레옹 3세는 공격을 계속했고, 진흙탕 속에서 백병전이 벌어졌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솔페리노 함락으로 패배를 의식하고 전장의 공포에 사로잡혀 전군 후퇴를 명령했다. 폭풍우 속 후퇴는 궤멸과 다름없었고, 수많은 오스트리아군이 실종되었다.

4. 4. 오스트리아군의 후퇴

오후가 되어서야 나폴레옹 3세는 주공을 중앙의 솔페리노에 정하는 것을 생각해냈다. 포병을 집중시켜 솔페리노에 맹렬한 포격을 가하고, 그 화력 지원 아래 정예 황제 근위병을 중심으로 한 보병을 투입했다. 오스트리아군의 포화와 총격으로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황제 근위병은 언덕 하나를 점령했다. 이어서 시가지에도 프랑스 보병이 쇄도하여 양군이 뒤섞인 혼전이 되었다.

오후 2시, 오스트리아군은 시가지에서 후퇴했고, 많은 희생을 치른 끝에 프랑스군은 솔페리노를 점령하고 전선 중앙에 쐐기를 박았다. 이 무렵 전장 상공에 급속히 먹구름이 몰려왔다. 곧 격렬한 폭풍우가 몰아쳐 양군 모두 화기 사용이 어려워졌다. 나폴레옹 3세는 공격을 계속했고, 진흙탕 속 백병전이 되었다. 프란츠 요제프 1세는 솔페리노가 함락된 것으로 이미 패배를 의식하고, 또 자신이 전장의 공포에도 사로잡혀 있었기에 전군의 후퇴를 시작했다. 폭풍우 속의 후퇴는 거의 궤멸과 다름없었고, 오스트리아군의 행방불명자는 수없이 많았다.[1]

4. 5. 산 마르티노 전투

전투 북쪽에서 사르데냐군 4개 사단은 오전 7시경 오스트리아군과 조우했다. 포졸렌고, 산 마르티노, 마돈나 델라 스코페르타를 두고 장기간 전투가 벌어졌다. 베네덱 휘하의 오스트리아 제8군단은 3만 9천 명의 병력과 80문의 대포를 보유하고 있었고, 2만 2천 명의 병력과 48문의 대포를 가진 사르데냐군의 반복적인 공격을 받았다.[5] 오스트리아군은 사르데냐군의 세 차례 공격을 격퇴하고 공격군에게 큰 손실을 입혔다. 그날이 끝날 무렵 베네덱은 오스트리아군 나머지 부대와 함께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저항했다. 오후 8시, 사르데냐군의 네 번째 공격이 마침내 분쟁 중인 언덕을 점령했고, 베네덱은 철수했다.[6] 이 전투에서 사르데냐군의 주요 공헌은 하루 종일 베네덱 군단을 깊이 끌어들여 솔페리노에서 프랑스군의 공격을 받은 부대에 증원군으로 두 개 여단을 파견하는 것을 막은 데 있었다.[7]

5. 결과 및 영향

솔페리노 전투는 이탈리아 통일 운동을 가속화하고, 국제 인도주의 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솔페리노의 앙리 뒤낭


이탈리아 통일 열기는 식지 않았다.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잇따라 반란이 일어났고, 사르데냐는 이 지역들을 합병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카보우르를 다시 총리로 임명하여 프랑스로부터 병합을 승인받기 위한 협상을 진행하게 했다. 카보우르는 승인 대가로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의용군도 시칠리아, 나폴리를 점령했다. 1860년 10월 26일, 가리발디는 테아노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회담을 갖고, 점령지 모두를 사르데냐에 바쳤다(테아노의 악수). 이로써 교황령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 대부분이 통일되었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초대 이탈리아 왕국의 군주가 되었다.

전투의 참상을 목격한 장 앙리 뒤낭은 제네바 협약과 국제 적십자 창설로 이어지는 운동을 시작했다.[10] 국제 적십자 운동은 2009년 6월 23일부터 27일까지 전투 150주년 기념 행사를 개최했다.[11]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은 이 기념 행사에서 "이 전투는 국가들의 국제 사회가 무력 충돌 시 관련된 국제 인도주의법, 특히 1949년 제네바 협약 4개 조약(올해 60주년을 맞이한다)의 수단을 개발하고 채택한 기반이 되었다"는 성명을 발표했다.[12]

2019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수장인 카를 폰 합스부르크와 성 조지 훈장 대표, 솔페리노와 산 마르티노 학회 회장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투가 벌어졌던 옛 전장에서 중요한 추모 행사가 열려 국가 간 평화를 강조했다. 묘지에는 화환이 놓였고 박물관도 기념되었다. 행사 기간 동안 수백 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전투를 재현했다.[13][14]

솔페리노 전투의 전사자들

5. 1. 막대한 사상자

이 전투는 9시간 이상 지속된 매우 격렬한 전투였으며, 양측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솔페리노 전투 사상자
구분오스트리아군연합군
사망2,386명 이상2,492명
부상10,807명12,512명
실종/포로8,638명2,922명
총계약 22,000명약 17,000명



양측에서 부상당하거나 죽어가는 병사들이 총격을 받거나 총검으로 찔렸다는 보고는 공포를 더했다. 결국 오스트리아군은 그들의 위치를 내주어야 했고, 프랑스-피에몬테 연합군은 전술적인 승리를 거두었지만 큰 대가를 치렀다. 오스트리아군은 사각형 요새의 네 개의 요새로 후퇴했고, 전투는 사실상 끝났다.[1]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사용한 강선포는 그 효과를 널리 인정받았고, 이후 각국의 군대는 활강포에서 강선포로 장비를 전환해 나갔다.[1]

5. 2. 빌라프랑카 휴전

솔페리노 전투 직후, 나폴레옹 3세프란츠 요제프 1세는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협상에서 배제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통일 이탈리아가 탄생하면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늘어날 것을 경계하여 적당한 수준에서 강화를 맺고자 했다. 한편, 프란츠 요제프 1세도 헝가리에서 반란의 기미를 감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의 전쟁을 계속 수행할 생각이 없었다.[8]

7월 11일, 빌라프랑카 조약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롬바르디아와 베네토에서 베네치아를 제외한 지역을 사르데냐에 넘겨주고, 이탈리아에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사르데냐 총리 카밀로 카보우르는 조약 내용에 불만이 많았지만, 프랑스의 군사 원조를 잃지 않기 위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휴전 조약을 받아들였고, 카밀로 카보우르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9] 이로써 제2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은 끝이 났다.

5. 3. 이탈리아 통일의 진전



이 전투에서 연합군은 약 17,000명의 사상자를 냈고, 오스트리아군은 약 22,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군을 후퇴시키면서 승리를 선언했지만, 그 대가는 컸다. 양군 지휘부의 서투른 지휘가 이러한 막대한 손실의 큰 원인이었다. 또한,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사용한 강선포는 그 효과를 널리 인정받아, 이후 각국의 군대는 활강포에서 강선포로 장비를 전환해 나갔다.[8]

전투 직후 나폴레옹 3세와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평화 협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당사자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협상에서 배제되었다. 나폴레옹 3세는 통일 이탈리아가 탄생하면 프랑스에 대항할 수 있는 세력이 늘어날 것을 경계하여 적절한 수준에서 강화를 맺고자 했다. 한편, 프란츠 요제프 1세도 헝가리 왕국에서 반란의 조짐이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이탈리아에서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1859년 7월 11일, 빌라프랑카 휴전이 체결되면서 오스트리아 제국은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를 제외한 베네토를 사르데냐에 할양함과 동시에 이탈리아에 대한 불간섭을 약속했다. 사르데냐 총리 카밀로 카보우르는 조약 내용에 불만이 많았지만, 프랑스의 군사 원조를 잃지 않기 위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9]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휴전 조약을 받아들였고, 카밀로 카보우르는 총리직에서 사임했다. 이것으로 제2차 이탈리아 독립 전쟁은 끝이 났다.

그러나 고조된 이탈리아 통일의 기운은 진정되지 않았다.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토스카나 대공국에서 잇따라 반란이 발생했고, 곧 사르데냐는 이러한 여러 지역을 합병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다시 카밀로 카보우르를 총리로 임명하고, 프랑스로부터 병합을 인정받기 위한 협상에 나서게 했다. 카밀로 카보우르는 승인의 대가로 니스와 사보이를 프랑스에 할양했다.

또한 주세페 가리발디가 지휘하는 의용군이 시칠리아, 나폴리를 제압하였다. 1860년 10월 26일, 가리발디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테아노에서 회담을 가지고, 이탈리아 통일을 위해 점령지를 모두 사르데냐에 헌상했다. (테아노의 악수) 따라서 교황령베네치아를 제외한 이탈리아는 대부분이 통일되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는 초대 이탈리아의 군주가 되었다.

5. 4. 군사 기술의 발전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이 사용한 강선포는 그 효과를 널리 인정받았다. 이후 각국의 군대는 활강포에서 강선포로 장비를 전환해 나갔다.[1]

6. 앙리 뒤낭과 국제 적십자 운동

솔페리노 전투의 참상을 목격한 앙리 뒤낭은 저서 《솔페리노의 회상》을 통해 국적에 관계없이 부상자를 치료하는 전문 기관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큰 반향을 일으켜 1863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적십자 운동이 세계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10]

6. 1. 앙리 뒤낭의 참전

솔페리노 전투가 벌어진 그날, 스위스의 은행가 앙리 뒤낭은 사업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를 접견하고 있었다. 전투를 관전하게 된 뒤낭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부상병에 대한 어설픈 응급처치에도 놀랐다. 부상병은 후방인 카스틸리오네로 후송되었지만, 지나치게 수가 많았기 때문에 병원을 대신한 교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뒤낭은 읍민과 함께 부상병 치료에 참여했지만, 많은 병사들이 치료를 한 보람도 없이 죽어 나갔다.

스위스로 귀국한 뒤낭은 카스틸리오네에서의 경험과 솔페리노 전투에 참가한 군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고, 국적에 관계없이 부상자를 치료하는 전문 기관을 만들 것을 호소했다. 한편, 유력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솔페리노의 회상》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뒤낭의 주장을 찬성했다. 1863년, 〈전상 군인 국제 구호위원회〉(이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적십자 운동은 세계로 퍼져 나갔다.[10]

6. 2. 솔페리노의 기억

솔페리노 전투가 벌어진 날, 스위스의 은행가 앙리 뒤낭은 사업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를 만나고 있었다. 전투를 관전하게 된 뒤낭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광경에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부상병에 대한 어설픈 응급처치에도 놀랐다. 부상병은 후방인 카스틸리오네로 후송되었지만, 지나치게 수가 많았기 때문에 병원을 대신한 교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뒤낭은 읍민과 함께 부상병 치료에 참여했지만, 많은 병사들이 치료에도 불구하고 죽어 나갔다.

스위스로 귀국한 뒤낭은 카스틸리오네에서의 경험과 솔페리노 전투에 참가한 군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솔페리노의 기억》이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했고, 국적에 관계없이 부상자를 치료하는 전문 기관을 만들 것을 호소했다. 한편, 유력자의 지지를 얻을 수 있도록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솔페리노의 기억》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뒤낭의 주장을 찬성했다. 1863년, 〈전상 군인 국제 구호위원회〉(이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적십자 운동은 세계로 퍼져 나갔다.

6. 3. 국제 적십자 위원회(ICRC) 창설

솔페리노 전투가 벌어진 날, 스위스의 은행가 앙리 뒤낭은 사업 지원을 요청하기 위해 나폴레옹 3세를 만나고 있었다. 전투를 관전하게 된 뒤낭은 눈앞에서 벌어지는 처참한 광경과 부상병에 대한 어설픈 응급처치에 큰 충격을 받았다. 부상병은 후방인 카스틸리오네로 후송되었지만, 수가 너무 많아 교회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리에 방치되어 있었다. 뒤낭은 읍민과 함께 부상병 치료에 참여했지만, 많은 병사들이 치료에도 불구하고 죽어 나갔다.

스위스로 귀국한 뒤낭은 카스틸리오네에서의 경험과 솔페리노 전투에 참가한 군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책을 출판했고, 국적에 관계없이 부상자를 치료하는 전문 기관을 만들 것을 호소했다. 《솔페리노의 회상》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으며, 많은 사람들이 뒤낭의 주장을 찬성했다. 1863년, 〈전상 군인 국제 구호위원회〉(이후 국제적십자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어 적십자 운동은 세계로 퍼져 나갔다.[10]

참조

[1] 서적 Auf den Spuren des Doppeladlers
[2] 간행물 Der Feldzug des Kaisers Napoleon 3. in Italien im Jahre 1859 Osterreichischen Militarischen Zeitschrift
[3] 서적 The Pursuit of Power: Europe 1815–1914 Penguin
[4] 서적 The Second War of Italian Unification 1859–61 Osprey Publishing
[5] 서적 Il Risorgimento nelle sue fasi di guerra Vallardi
[6] 서적 Storia militare del Risorgimento; guerre e insurrezioni Einaudi
[7] 서적 Storia militare del Risorgimento; guerre e insurrezioni Einaudi
[8] 서적 Italy in the Age of the Risorgimento 1790–1870 https://books.google[...] Routledge
[9] 웹사이트 Napoléon III, Pierre Milza, Perrin edition, 2004 http://www.canalacad[...] 2004
[10] 서적 Above the fray: The Red Cross and the making of the humanitarian NGO sector https://press.uchica[...] University of Chicago Press 2021-06-27
[11] 웹사이트 World Red Cross Red Crescent Day 2009 https://web.archive.[...] 2009-06-25
[12] 웹사이트 Archived copy https://web.archive.[...] 2009-06-25
[13] 뉴스 Il Capo della Casa d’Austria a Solferino e San Martino per ricordare i caduti nel 160° della battaglia Gardanotizi 2019-06-20
[14] 웹사이트 Guerra e pace sotto la torre di San Martino https://www.bresciao[...]
[15] 서적 Solferino 1859, I feriti francesi ricoverati a Manerbio Sardini Editore
[16] 서적 Solferino 1859. Les blessés français soignés à Manerbio Sardini Editore
[17] 웹사이트 日本大百科全書(ニッポニカ)の解説 https://kotobank.jp/[...] コトバンク 2018-02-11
[18] 서적 Auf den Spuren des Doppeladlers
[19] 간행물 Der Feldzug des Kaisers Napoleon 3. in Italien im Jahre 1859 Osterreichischen Militarischen Zeitschrift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