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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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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149년부터 기원전 148년까지 벌어진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간의 전쟁이다. 이 전쟁은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로마가 마케도니아를 네 개의 자치령으로 분할한 것에 대한 마케도니아인들의 불만과 안티고노스 왕조의 후계자를 자칭한 안드리스쿠스의 등장으로 발발했다. 안드리스쿠스는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며 마케도니아를 장악했으나, 로마의 개입으로 인해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배하고 체포되었다. 이 전쟁의 결과로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으며, 로마는 동지중해 지역에서의 패권을 더욱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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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필리포스 6세 안드리스코스
안드리스쿠스 주화, 로마 데나리우스 위에 덧찍힘
분쟁 명칭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
전쟁의 부분마케도니아 전쟁
시기기원전 150년 – 기원전 148년
장소마케도니아
결과로마의 마케도니아 합병
교전 세력 1로마 공화정, 아탈루스 왕국, 아카이아 동맹
교전 세력 2마케도니아 왕국, 트라키아 동맹군, 카르타고
지휘관 1P.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탈나, 퀸투스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지휘관 2안드리스쿠스, 테레스 3세, 바르사바스
명분안드리스쿠스의 마케도니아 왕위 주장
전투

2. 배경

로마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갈등은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215년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고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과 겹치는 시기였다. 이 전쟁은 결정적인 승패 없이 끝났지만, 이후 로마는 필리포스 5세의 야심을 경계하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요청으로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여 필리포스 5세를 제압했다.

필리포스 5세의 아들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가 왕위에 오르면서 마케도니아의 세력이 다시 강성해지자, 로마는 이를 경계하며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일으켰다. 이 전쟁에서 로마는 페르세우스를 물리치고 마케도니아 왕국을 멸망시켰다.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4개의 자치령으로 분할하고, 다시는 강성해지지 못하도록 여러 제약을 가했다.

2. 1.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97년)

로마 공화국마케도니아의 긴장은 기원전 215년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고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시작된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1] 이 전쟁은 제2차 포에니 전쟁의 부차적인 사건으로, 결정적인 승패 없이 끝났다.[1] 카르타고와의 전쟁이 끝난 직후, 로마는 필리포스 5세의 야심을 두려워한 여러 그리스 폴리스와 도시 국가들로부터 도움을 요청받았다. 로마는 이 요청에 동의했고, 필리포스 5세가 로마의 조건을 거부하자 기원전 200년부터 197년까지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벌여 그를 물리쳤다.[2] 이 전쟁의 결과로 필리포스 5세는 많은 영토와 명성을 잃고 로마의 요구를 따라야 했다.[2]

2. 2.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71년 ~ 기원전 168년)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171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로마 공화정과 마케도니아 왕국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으로 안티고노스 왕조가 지배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마케도니아는 4개의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1]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군은 로마군에 패배했고, 페르세우스는 포로로 잡혀갔다. 이로써 로마는 그리스 세계의 유일한 패권 세력이 되었다.[1]

2. 3.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상황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기원전 168년) 이후, 안티고노스 왕조가 지배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했고, 마케도니아는 4개의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1]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부활을 막기 위해 가혹한 조치를 취했다.[1] 마케도니아는 로마에 공물을 바치는 네 개의 공화국, 즉 '메리데스'로 분할되었고, 이들은 무역과 상호 작용에 제한을 받았으며, 광산 사용과 군사력 보유도 금지되었다.[1]

그러나 로마가 기원전 167년에 모든 군대를 철수시킨 후에도, 마케도니아에서는 왕정에 대한 갈망이 지속되었다.[1] 비록 일부 규정이 완화되어 기원전 158년부터 광산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마케도니아 분할을 포함한 여러 제약으로 인해 불만은 계속되었다.[1] 이는 옛 안티고노스 왕좌를 노리는 자가 나타날 여지를 남겼다.[1]

3. 안드리스쿠스의 등장과 마케도니아 왕위 주장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4개의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 약 20년 후인 기원전 149년,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왕 페르세우스의 아들이라 자칭하는 안드리스쿠스가 나타나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선언했다.[1]

안드리스쿠스는 자신이 페르세우스의 아들 필리포스라고 주장하며 마케도니아 왕위를 요구했다. 그는 초기에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결국 로마에 의해 진압되었다.

3. 1. 안드리스쿠스의 초기 활동

시리아의 데메트리우스 1세, 그는 사칭자에게 군사적 지원을 거부하고 로마로 보냈다.


기원전 154/153년경, 안티고노스 왕조와 닮은 외모를 가진 그리스인 안드리스쿠스는 자신이 페르세우스의 아들 필립이라고 주장하며 나타났다. 그는 비밀리에 양부모에게서 자랐다고 주장했다.[1] 이 젊은이의 출신은 불분명하지만, 고대 자료에 따르면 그는 낮은 신분으로 소아시아 북서부의 아이올리스 아드라미티움 출신이라고 한다.[2] 그는 "자신의" 왕위를 주장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마케도니아로 들어갔지만, 네 개의 고객 공화국 중 세 개의 연합군에 의해 거부당했다.[3]

이후 그는 시리아로 가서 셀레우코스 왕조의 군주 데메트리우스 1세 소테르의 용병으로 입대했고,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의 주장에 대한 소문이 퍼지자, 그는 데메트리우스 1세 소테르에게 자신의 왕위를 되찾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안티오크 인구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데메트리우스 1세는 그를 돕는 대신 체포하여 로마로 보냈다.[1] 로마 원로원은 그를 가볍게 여겨 이탈리아 도시로 추방했다. 그는 곧 이탈리아에서 탈출하여 그리스 세계로 도망쳤지만, 로마인들은 그를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았다.[1]

그는 밀레투스로 가서 자신의 주장을 더욱 발전시키려 했고, 상당한 관심을 끌었다. 밀레투스의 지도자들은 그를 체포하고 로마 사절들에게 조언을 구했는데, 사절들은 그를 경멸하며 풀어주는 것이 안전하다고 말했다. 풀려난 후 그는 페르가몬으로 가서 페르세우스의 전 첩이었던 칼리파에게 돈과 왕실의 표식을 받았다. 그곳에서 그는 비잔티움으로 가서 호의적인 환영을 받았고 상당한 추종자와 동조자를 얻었다.

3. 2. 트라키아의 지원

안드리스쿠스는 트라키아에서 동맹을 얻는 데 성공했다. 특히 오드리시아 왕국의 테레스 3세는 그에게 군대를 지원했다.[3] 이 병력을 바탕으로 안드리스쿠스는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초반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3] 그러나 마케도니아 기병대 사령관 텔레스테스가 상당수의 기병대를 이끌고 로마군에 투항하면서 전세가 기울었다.

4. 전쟁의 경과

기원전 149년, 안드리스쿠스는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왕 페르세우스의 아들 필리포스를 자칭하며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는 스트리몬 강 유역 전투에서 승리하여 옛 왕도 펠라를 포함한 마케도니아 전역을 장악하고 마케도니아인들의 왕으로 인정받았다.[1] 이후 테살리아를 공격하였으나,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이끄는 테살리아인과 아카이아 동맹 병력에 의해 저지되었다.[1]

로마는 프라에토르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탈나를 파견하였으나, 탈나는 안드리스쿠스에게 패배하고 전사하였다.[1] 이로 인해 안드리스쿠스는 테살리아를 다시 침공하여 대부분을 파괴하고 정복하였다.[1]

로마는 퀸투스 카아이킬리우스 메텔루스를 파견하여 반격에 나섰고, 기원전 148년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안드리스쿠스를 격파하였다.[1] 안드리스쿠스는 로마군에 체포되었고, 메텔루스는 이 공로로 '마케도니쿠스'라는 칭호를 받았다.[1] 이 전투는 팔랑크스가 사용된 마지막 전투로 기록되어 있다.

4. 1. 마케도니아 점령

안드리쿠스는 기원전 149년 봄, 스트리몬 강 유역에서 마케도니아 공화국 군대를 상대로 전투를 벌여 크게 이기고 스트리몬 강 서쪽의 모든 마케도니아를 정복했다. 여기에는 옛 왕도인 펠라가 포함되었는데, 그는 이곳을 점령하고 필리포스라는 통치명을 사용했다.[1] 이후 마케도니아인들은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2] 그 이유는 백성들이 군주제를 원했고, 인위적인 분열과 속국 공화국들의 분쟁을 없애고 싶어했기 때문이다.[3]

트라키아 펠타스트, 기원전 5-4세기. 트라키아군은 안드리쿠스 군대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다.

4. 2. 로마의 개입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은 평화적 해결을 협상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이 시점에서 로마가 평화적 해결의 가능성을 믿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거나,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의 해결책에 전념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1] 그러나 스키피오의 외교적 시도는 실패했는데, 이는 로마가 안드리스쿠스의 요구, 즉 통일된 마케도니아의 왕으로 인정해 달라는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2] 대신, 스키피오는 군사 행동에 의존하여 이미 싸우고 있던 테살리아인과 아카이아 동맹 병력을 소집하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그는 안드리스쿠스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막을 수 있었다.[3] 그럼에도 로마 사령관은 원정군이 테살리아의 상당 부분을 이미 정복하면서 상황이 심각해짐에 따라, 사칭자를 막기 위해 직접적인 군사 개입이 필요하다고 원로원에 보고했다.



스키피오의 보고에 대한 대응으로, 원로원은 프라에토르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탈나를 군단을 지휘하고 군사력으로 상황을 해결하도록 임명했다. 탈나는 아마도 그리스 병력의 지원을 받았고, 2~3개월 동안 상황을 안정시켰다. 그러나 그는 안드리수스를 과소평가한 것으로 보이며, 안드리수스의 군대가 즉위 이후 급격히 증가하여 마케도니아인과 트라키아인 부대가 포함되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탈나가 테살리아를 통해 마케도니아를 침공하려 하자 기원전 149년 말 또는 148년 초에 마케도니아 국경 근처의 특정되지 않은 장소에서 안드리수스에 의해 가로막혔다. 전투의 세부 사항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탈나는 죽고 그의 군대는 거의 전멸했으며, 생존자들은 밤을 틈타 탈출했다.

4. 3. 안드리스쿠스의 승리와 로마의 위기



안드리스쿠스는 스트리몬 강 유역 전투에서 승리하고, 옛 왕도인 펠라를 포함한 스트리몬 강 서쪽의 마케도니아 전역을 장악했다.[1] 이 승리로 마케도니아인들의 충성을 얻었으며, 군주제를 갈망하던 백성들은 그를 왕으로 받아들였다.[1] 반면, 이웃 그리스인들은 안드리스쿠스가 마케도니아인들에게 열광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에 놀라움을 표했다.[1] 이후 안드리스쿠스는 테살리아를 공격했고, 테살리아 동맹은 아카이아 동맹에 도움을 요청했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되었으나, 로마가 안드리스쿠스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아 실패했다.[1] 스키피오는 테살리아인과 아카이아인 병력을 소집하여 안드리스쿠스의 진격을 일시적으로 저지했으나, 상황이 심각해지자 로마 원로원에 군사 개입을 요청했다.[1]

로마 원로원은 프라에토르 푸블리우스 유벤티우스 탈나에게 군단을 지휘하여 상황을 해결하도록 했다.[1] 그러나 탈나는 안드리수스를 과소평가했고, 기원전 149년 말 또는 148년 초 마케도니아 국경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여 전사했다.[1] 이 전투는 로마가 헬레니즘 세력과의 전투에서 겪은 최악의 패배 중 하나였다.[1]

탈나의 패배는 로마에 큰 충격을 주었고, 안드리스쿠스의 인기는 더욱 높아졌다. 그는 테살리아를 다시 침공하여 대부분을 파괴하고 정복했다. 카르타고는 안드리스쿠스와 동맹을 맺고 지원을 약속했다.[1]

4. 4.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의 반격

로마는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를 파견하여 반격을 시작했다. 메텔루스는 페르가몬 함대의 지원을 받으며 마케도니아를 압박했다.[1] 이 전투는 마케도니아인들이 왕의 주장이 아무리 약하더라도 새롭게 부활한 군주제에 헌신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2]

마케도니아의 승리는 로마와의 협상을 통한 평화에 대한 희망이 끝났음을 의미했다. 로마는 이러한 패배를 좌시할 수 없었고, 마케도니아를 완전히 멸망시키기로 결심했다.[3] 안드리수스는 친로마 세력에 대해 가혹하고 잔혹한 조치를 취하며 테러와 탄압을 자행했다.[2]

4. 5. 제2차 피드나 전투 (기원전 148년)

기원전 148년, 퀸투스 카아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안드리스쿠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을 격파했다.[1] 이 전투의 결과로 안드리스쿠스는 로마군에 붙잡혔고, 메텔루스는 ‘마케도니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1]

이 전투는 역사상 팔랑크스가 사용된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다.[1]

5. 전쟁의 종결과 로마의 마케도니아 통치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4개의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 기원전 149년, 안드리스쿠스가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선언하며 로마에 맞섰으나, 기원전 148년 퀸투스 카아이킬리우스 메텔루스에게 패배했다. 이 승리로 메텔루스는 '마케도니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후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146년에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같은 해, 로마는 카르타고코린토스를 파괴하며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확립하였다.

5. 1. 안드리스쿠스의 체포와 처형

안드리스쿠스는 트라키아에서 다시 군대를 모으려 했으나 메텔루스에게 패배하여 체포되었다.[1] 그는 로마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5. 2. 마케도니아 속주화

기원전 149년, 안드리스쿠스가 로마에 자립을 선언하고 전쟁을 일으켰으나, 기원전 148년 퀸투스 카아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에 패배하였다. 이로써 안티고노스 왕조의 부활은 좌절되었다.

전쟁 2년 후인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1] 같은 해, 로마는 카르타고코린토스를 파괴하며 지중해 세계의 패권을 확립하였다.

6. 결과 및 영향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결과 안티고노스 왕조마케도니아 왕국은 소멸하고 마케도니아는 4개의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 약 20년 후인 기원전 149년, 안드리스쿠스가 마케도니아의 독립을 선언하며 전쟁이 발발했다. 초반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기원전 148년 퀸투스 카아이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피드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안드리스쿠스는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는 팔랑크스가 사용된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다.[1]

전쟁 2년 후인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는 로마 속주가 되었다.[1] 같은 해 로마군은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이끄는 카르타고루키우스 뭄미우스가 이끄는 코린토스와의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6. 1. 로마의 패권 강화

기원전 148년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제2차 피드나 전투에서 안드리스쿠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을 격파하면서, 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에서 로마가 승리했다. 이로써 로마는 동지중해 지역에서 확고한 패권을 확립하였다.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고,[1] 메텔루스는 이 승리로 '마케도니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1]

같은 해, 로마는 아카이아 전쟁에서도 승리하여 그리스 전역을 장악했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카르타고를, 루키우스 뭄미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코린토스를 파괴했다.

6. 2. 마케도니아의 변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안티고노스 왕조가 멸망하고 마케도니아는 4개의 자치령으로 분할되었다. 기원전 149년,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지막 왕 페르세우스의 아들 필리포스를 자칭한 안드리스쿠스가 마케도니아의 왕을 칭하며 로마로부터 독립을 선언했다. 안드리스쿠스는 초기에는 성공을 거두었지만, 기원전 148년 퀸투스 카에킬리우스 메텔루스가 이끄는 로마군에게 피드나 전투에서 패배하고 붙잡혔다. 이 전투는 팔랑크스가 사용된 마지막 전투로 알려져 있으며, 메텔루스는 이 공으로 '마케도니쿠스'라는 칭호를 얻었다.[1]

전쟁 2년 후인 기원전 146년, 마케도니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1] 이로써 마케도니아는 자유를 잃었지만, 왕정 붕괴 이후의 혼란은 종식되었다. 로마의 통치는 마케도니아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왔지만, 한편으로는 가혹한 세금과 착취로 이어지기도 했다.

참조

[1] 문헌 Florus
[2] 서적 In the Name of Rome 2004
[3] 문헌 Pausani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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