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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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171년부터 기원전 168년까지 로마 공화정과 마케도니아 왕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로마는 일리리아와의 전쟁 승리를 통해 발칸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고, 마케도니아의 페르세우스 왕은 로마의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며 군사력을 증강했다.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을 받은 로마는 마케도니아에 선전포고하며 전쟁이 시작되었다. 초기 전투에서 마케도니아가 우위를 점했지만, 기원전 168년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가 승리하면서 전쟁은 로마의 승리로 끝났다. 이 전쟁으로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며, 헬레니즘 세계에서 로마의 패권이 확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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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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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
일부 | 마케도니아 전쟁 |
기간 | 기원전 171년 – 기원전 168년 |
장소 | 테살리아 고대 마케도니아 일리리아 |
결과 | 마케도니아의 네 개의 속국 공화국으로 분할, 로마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로마 공화정 |
교전국 2 | 아탈로스 왕국 |
교전국 3 | 테살리아 |
교전국 4 | 아카이아 동맹 파견대 |
교전국 5 | 아이톨리아 동맹 파견대 |
교전국 6 | 기타 그리스 동맹국 파견대 |
교전국 7 | 마케도니아 왕국 |
교전국 8 | 오드뤼시아 왕국(트라키아) |
교전국 9 | 크레타 용병 |
교전국 10 | 에피로스(기원전 170년부터) |
교전국 11 | 아이톨리아 동맹 파견대 |
교전국 12 | 아타마니아 |
교전국 13 | 일리리아 왕국 |
교전국 14 | 기타 그리스 동맹국 파견대 |
지휘관 및 지도자 | |
로마 공화정 |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기원전 171년)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기원전 170년)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기원전 169년)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기원전 168년) 에우메네스 2세 (페르가몬) |
마케도니아 왕국 | 페르세우스 코티스 4세 (오드뤼시아 왕국)(트라키아) 겐티우스 |
규모 | |
교전 세력 1 | 알 수 없음 |
교전 세력 2 | 알 수 없음 |
피해 규모 | |
로마 공화정 | 알 수 없음 |
마케도니아 왕국 | 에피로스인 15만 명 노예화 |
2. 역사적 배경
로마 공화정은 일리리아와의 두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면서 아드리아해와 그리스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기원전 229년 마케도니아의 왕이 된 필리포스 5세는 자신의 세력권에 서서히 침투하는 로마에 대해 위기감을 느꼈다. 제2차 포에니 전쟁이 발발하자, 필리포스 5세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로마의 영향력을 아드리아해와 그리스에서 몰아내려 했다. 한니발이 자마 전투에서 로마에 패배하고 카르타고가 항복한 이후에도 필리포스 5세는 로마와 계속 전쟁을 벌였지만,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크게 패배하면서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후 필리포스 5세는 로마의 동맹국이 되어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하는 등 친로마 정책을 펼쳤다.
기원전 179년 필리포스 5세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왕위를 계승했다. 페르세우스는 셀레우코스 4세 필로파토르의 딸 라오디케와 결혼하고, 자신의 딸을 비티니아의 프루시아스 2세와 결혼시키는 등 동맹을 강화했다. 또한, 로마의 동맹 부족인 사파이의 왕 아브루폴리스를 공격하여 영토에서 몰아내는 등 로마와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페르세우스는 오드뤼사이 왕국의 왕 코티스 4세와 동맹을 맺고 군대를 증강했다. 그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사절을 보내 지지를 확보하려 했으며, 로마에 의존하기 싫어하는 그리스인들의 지지를 얻었다. 페르세우스의 선전과 정치적 책략은 그리스 내 친로마 파벌과 친페르세우스 파벌 간의 격렬한 분쟁을 야기했다.
기원전 173년 초, 로마는 아이톨리아와 마케도니아에 사절을 보냈으나 페르세우스를 만나지 못했다. 로마는 페르세우스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고 의심했다. 델포이에서 열린 아이톨리아 의회에서 로마 사절은 양측에 전쟁을 자제할 것을 요청했고, 인질 교환을 통해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후 로마 사절은 펠로폰네소스반도로 가서 아카이아 동맹 의회를 소집, 마케도니아 왕의 영토 접근을 금지하는 법령을 유지한 것을 칭찬하고 로마가 페르세우스를 적으로 간주한다고 강조했다. 테살리아와 페라이비아에서는 부채 문제로 격렬한 갈등이 발생했고, 로마는 사절을 보내 부채 문제를 해결하며 상황을 완화하려 했다.
페르가몬의 에우메네스 2세는 로마 원로원에서 페르세우스가 즉위한 날부터 전쟁을 준비해 왔다고 주장하며, 페르세우스의 동맹 강화와 군사력 증강을 비난했다. 에우메네스 2세의 연설 며칠 후, 원로원은 페르세우스로부터 사절단을 받았으나, 그들의 주장을 믿지 않았다. 원로원은 페르세우스가 로마에 앙심을 품고 있다고 판단하고 전쟁을 준비했다. 페르세우스는 에우메네스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이는 로마가 전쟁을 선포하는 구실이 되었다.
가이우스 발레리우스 라이비누스는 로마로 돌아와 에우메네스의 주장을 지지하고, 페르세우스가 로마 대사들을 독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결국, 페르세우스는 공공의 적으로 선포되었고, 원로원은 전쟁을 결정, 아폴로니아에 군대를 파견했다.[10]
2. 1. 로마와 마케도니아의 관계 악화
로마 공화정은 일리리아와 두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여 아드리아 해와 그리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다. 기원전 229년 마케도니아 국왕으로 즉위한 필리포스 5세는 점차 자신의 세력권으로 침투해오는 로마에 위기감을 느꼈다.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을 틈타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아드리아 해와 그리스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을 없애고자 했다. 한니발이 자마 전투에서 패배하고 카르타고가 항복한 후에도 로마와 계속 싸웠으나, 퀴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완패하여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후 로마의 동맹국이 되어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하는 등 친로마 정책으로 전환했다.기원전 179년 필리포스 5세가 사망하고 페르세우스가 마케도니아 왕위를 계승했다. 페르세우스는 필리포스 시대의 친로마 노선을 수정하고, 트라키아인 방어를 명분으로 군사력을 증강했으나, 이는 그리스와 주변국에 위협을 주었다. 동쪽으로 세력 확대를 꾀하던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세력 부활과 그리스 영향력 확대를 막고자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기원전 171년 마케도니아에 선전 포고하고 발칸 반도를 침공했다.
2. 2. 로마의 개입과 전쟁 선포
로마 공화국은 일리리아와 두 차례 전쟁에서 승리하며 아드리아 해와 그리스에 영향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기원전 229년 마케도니아 국왕으로 즉위한 필리포스 5세는 자신의 세력권에 점차 침투하는 로마를 경계했다. 카르타고와 로마 간 제2차 포에니 전쟁 발발을 기회로 필리포스는 카르타고와 동맹을 맺고, 아드리아 해와 그리스에 대한 로마의 영향력을 없애려 했다. 한니발이 자마 전투에서 로마에 패배하고 카르타고가 항복한 후에도 로마와 계속 싸웠지만, 퀴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완패하여 평화 조약을 맺었다. 이후 로마의 동맹국이 되어 로마-시리아 전쟁에서 로마를 지원하는 등 친로마 정책으로 전환했다.기원전 179년 필리포스 5세가 사망하고 페르세우스가 마케도니아 왕위를 계승했다. 페르세우스는 필리포스 시대의 친로마 노선을 수정하고, 트라키아인 방어를 명분으로 군사력을 증강했다. 이는 그리스와 주변국에 위협이 되었다. 동방으로 세력 확장을 꾀하던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부활과 그리스 영향력 확대를 막고자 페르가몬 왕국의 지원 요청을 받아들여 기원전 171년 마케도니아에 선전 포고하고 발칸 반도를 침공했다.
3. 전쟁의 경과
리비우스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가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보이오티아인들을 상대로 여러 도시를 약탈하는 잔혹 행위를 저질렀다고 기록했다. 가이우스 루크레티우스는 더욱 무자비하고 탐욕스러웠으며, 리비우스는 그를 "동맹국에게 압제적이고, 적의 눈에는 비열하다"라고 묘사했다.[29] 기원전 170년의 집정관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는 에피루스를 거쳐 마케도니아로 진군하려 했으나 패배했다. 그는 테살리아를 통해 비밀리에 진군했지만, 페르세우스는 그의 움직임을 예상했다.[30] 칼키스(에우보이아의 주요 도시)에서 로마로 사절단이 와서 가이우스 루크레티우스와 루키우스 호르텐시우스의 만행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고, 루크레티우스는 벌금을, 호르텐시우스는 노예 석방 명령을 받았다.[31]
기원전 169년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마케도니아 전쟁을 담당하게 되었다.[34] 테살리아 산맥의 눈으로 마케도니아가 보호받자, 페르세우스는 로마에 자유 통행을 허가한 일리리아인들을 공격했다.[36] 그는 우스카나를 점령하고 주민들을 노예로 팔았다.[36]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일리리아에서 패배 후 에피루스 요새를 공격했지만, 페르세우스에게 격퇴당해 많은 병력을 잃었다.[38]
이른 봄,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는 암브라키아에 상륙, 테살리아로 이동 후 올림포스산을 넘어 마케도니아로 가는 영웅적인 행군을 감행했다.[40] 당황한 페르세우스는 디움 주민들을 피드나로 이주시키고 조각상을 옮겼다.[41] 퀸투스 마르키우스는 진군하여 아가세를 항복시켰지만, 식량 부족으로 디움으로 돌아갔고, 로마 함대는 도착했으나 수송선이 남쪽에 있었다.[42]
피굴루스는 테살로니카 해안 약탈 후 카산드라를 포위했지만 실패했다.[43] 멜리보이아에서 로마군은 마케도니아군에 공격받고 퇴각했다.[44] 비티니아와 로도스 대사들이 평화 제안을 위해 로마로 왔으나, 로도스는 전쟁 방해를 주장하며 전쟁 지속 시 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해 오만하다는 평가와 함께 페르세우스와의 공모 의심을 받았다.[45] 아에밀리우스는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보내 로마에 반기를 든 도시들을 약탈하게 했다.[91]
마케도니아와 일리리아에 사절단이 파견되었다. 리비우스에 따르면, 원로원은 로마 무기가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마케도니아인과 일리리아인의 자유를 결정했다. 마케도니아의 광산 운영 및 왕실 영지 임대 계약, 국민 의회는 폐지되었다. 마케도니아는 4개 공화국으로 분할, 자체 의회를 가지고 로마에 조세 절반을 바치게 되었으며, 일리리아에도 동일 규정이 적용되었다.[92]
아에밀리우스는 도시 대표들을 암피폴리스에 모아 왕실 재무부 상환을 통보했다. 마케도니아인들은 자유를 얻어 농지, 도시 유지, 관리 선출이 가능해졌다. 4개 칸톤 분할, 조세, 결혼 및 토지 소유 금지, 금/은 광산 채굴 금지(철/구리 광산은 허용)가 발표되었다.[93] 로마는 친로마 파벌 지원으로 그리스 통제력을 강화했고, 페르세우스 지원자들은 로마에서 변호해야 했다.[94] 아에밀리우스는 페르세우스 지원 일리리아 지역을 황폐화시켰다.[95]
3. 1. 초기 전투 (기원전 171년 ~ 169년)
비티니아가 중립을 선언한 것을 제외하고, 셀레우코스 제국이나 아카이아 동맹 등 주변국 대부분은 로마의 우방이었다. 그 해 집정관 중 한 명인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가 군대를 이끌고 페르세우스와 싸웠지만, '''칼리니쿠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3,000명 이상의 병사(전사 2,500명, 포로 600명)를 잃었다.[12] 페르세우스는 로마에 평화 조약을 체결하고자 했지만, 로마는 이를 거부했다. 기원전 170년, 집정관 아울루스 호스틸리우스 만키누스가 마케도니아를 침공했지만, 페르세우스 군은 다시 이들을 격퇴하였다. 로마 측은 마케도니아에 대한 공격을 포기했고, 마케도니아 침공은 실패로 끝났다.기원전 169년,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은 로마의 집정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템페 계곡 근교에서 포위했지만, 완전한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이 시점에서 마케도니아는 거듭된 로마의 개입을 물리치고, 디온 등의 종교 도시를 포함한 요충지를 장악하여 그리스에 침투하는 데 성공했다. 페르세우스는 같은 헬레니즘 왕조인 셀레우코스 제국과 페르가몬 왕국에 마케도니아에 협력하도록 요청했으나 실패했다. 단, 일리리아 왕 Gentius|겐티우스영어의 지지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13]
3. 2.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의 지휘
기원전 168년, 로마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동생인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마케도니쿠스를 집정관으로 선출했다. 아이밀리우스는 즉시 군대를 이끌고 두 방면으로 작전을 개시했다.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이하 코르쿨럼)을 부대장으로 하는 소대(보병 8,200명, 기병 120기)를 파견했다. 코르쿨럼은 아드리아해안을 따라 야간진군을 해 마케도니아 서부에 진입한 후 북동부의 피티온으로 이동하여 마케도니아를 배후에서 습격하고자 했다.[110]그러나 로마의 탈영병에 의해 이 움직임은 사전에 감지되었고, 페르세우스는 12,000명의 별동대를 보내 코르쿨럼 군을 요격하도록 했다. 페르세우스 자신은 피드나 근교 평원 남쪽에 있는 카테리니 근처에 진을 쳤다.[110]
아이밀리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브린디시를 통해 그리스 본토에 상륙했다. 마케도니아를 목표로 발칸반도를 북상하다가 중간에 마케도니아 군을 물리치고 로마 본군으로 향하던 코르쿨럼이 이끄는 별동대를 합류시켰다. 로마군은 카테리니에 진을 치고 있는 마케도니아 군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로마군은 올로크루스(Olocrus) 산의 서쪽에 진을 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기 전에 월식이 있었다. 아이밀리우스는 로마 병사들에게 당일 월식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사전에 알렸기 때문에 로마군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마케도니아 군은 월식이 왕국의 종말을 알리는 징조로 여겼고 사기가 떨어졌다.[111]
3. 3. 피드나 전투 (기원전 168년)
기원전 168년 6월 22일 오후, 훗날 피드나 전투라고 불리게 된 전투가 시작되었다.[104] 전투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마케도니아 편에서 싸우던 트라키아 병사들이 로마군의 도발에 넘어갔다는 이야기가 있다.[105]양측의 군대 규모는 큰 차이를 보였다. 로마군은 2개 군단으로 이루어진 약 29,000명(보병 24,500명, 기병 4,500명)이었던 반면, 마케도니아군은 팔랑크스 21,000명을 포함한 약 44,000명의 대군이었다. 그러나 기병의 수는 거의 비슷했다.
로마군은 2개 군단을 중앙에 배치하고, 측면에는 라틴족, 이탈리아인, 그리스인 등으로 구성된 보조군을, 그리고 가장 오른쪽에는 전투 코끼리 22마리와 로마 기병 부대를 배치했다. 마케도니아군은 팔랑크스 부대를 중앙에 두고, 마케도니아 근위 부대 3,000명을 좌익에, 경장 보병 부대나 여러 나라에서 온 용병 부대, 그리고 동맹국인 트라키아 보병을 팔랑크스 양쪽에 배치했다. 페르세우스가 직접 이끄는 신성 부대(Sacred Squadron)와 마케도니아 기병 부대, 트라키아의 오드뤼시아 기병 부대는 가장 오른쪽에 배치되었다.
양 군의 격돌은 오후 3시경에 이루어졌으며, 먼저 마케도니아군의 팔랑크스가 로마군 진지를 향해 천천히 거리를 좁혀갔다. 아이밀리우스는 팔랑크스의 전진에 따라 각 부대에 최소한의 대응만 하면서 후퇴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초기 단계에서는 로마군이 마케도니아군에게 패주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어서 팔랑크스는 로마군 진지가 있는 오로클루스 산기슭까지 전진했지만, 이 단계에서 밀집 대형이 기본인 팔랑크스는 대형이 무너진 상태였다. 아이밀리우스는 단창을 던진 후 로마 군단에게 밀집 상태가 무너져 틈이 생긴 팔랑크스의 틈을 노려 측면 공격을 지시했다. 로마군이 가진 장검과 중장비는 팔랑크스가 가진 단검과 경갑을 쉽게 무너뜨렸고, 팔랑크스는 무너지기 시작했다.[106]
팔랑크스가 무너지는 것을 보고 승패가 결정되었음을 깨달은 페르세우스는 아직 전투에 참여하지 않았던 신성 부대 및 기병 부대와 함께 도망쳤다. 페르세우스와 기병 부대가 전장에서 물러난 후에도 마케도니아 보병 부대와 팔랑크스는 로마군과 계속 싸웠지만, 3,000명의 근위 부대를 포함한 25,000명의 병사가 죽거나 다쳤고, 로마 측은 1,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기록했다고 전해진다. 실제 전투는 약 1시간이었지만, 해가 질 때까지 마케도니아군에 대한 소탕 작전이 계속되었다. 이 전투에는 아이밀리우스의 아들이자 스키피오 가의 양자가 된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참전했다고 전해진다.[104]
4. 전쟁의 결과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이후 로마는 헬레니즘 세계에서 더욱 강력한 패권을 쥐게 되었다. 전쟁의 승리로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했다.[92]
로마는 마케도니아와 일리리아의 자유를 선언하며, 로마의 무력이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이는 로마의 자긍심을 높이고 선전 수단으로 활용되었다.[92] 그러나 실제로는 마케도니아의 풍부한 자원을 통제하고, 정치적 안정을 꾀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마케도니아의 광산 운영과 왕실 영지 임대 계약은 폐지되었고, 로마의 세금 징수관에게 넘어갔다. 마케도니아의 국민 의회는 폐지되었으며,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어 각자 의회를 가지고 로마에 조세를 바치도록 했다.[92]
로마는 그리스 내에서 친로마 파벌을 지원하여 영향력을 강화했다. 페르세우스를 지원했던 인사들은 로마로 소환되어 재판을 받아야 했다.[94]
퀸투스 마르키우스는 로마 함대를 이끌고 테살로니카, 아이니아, 안티고네아, 팔레네 (칼키디키) 등 해안 지역을 약탈했다.[43] 또한, 에우메네스 2세, 프루시아스 1세와 연합하여 카산드라를 포위 공격했으나, 도시 수비대와 마케도니아 함선의 저항으로 실패했다.[43]
비티니아와 로도스는 평화를 제안하기 위해 로마에 사절을 보냈다. 비티니아는 페르세우스에게 평화 중재를 약속했다고 주장했고, 로도스는 전쟁으로 무역이 방해받고 식량이 부족해졌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로마 원로원은 이들의 제안을 오만하다고 여기고 거부했다.[45]
아에밀리우스는 아들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를 보내 로마에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킨 도시들을 약탈하게 했다.[91] 또한, 나시카와 퀸투스 파비우스 막시무스 아에밀리아누스를 보내 페르세우스를 도왔던 일리리아 지역을 황폐화시켰다.[95]
4. 1. 마케도니아 왕국의 멸망
페르세우스는 왕도 펠라까지 달아났지만, 주민들은 그를 내쫓았다. 사모트라키섬으로 도망갔지만, 결국 아이밀리우스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167년 아이밀리우스의 로마 개선식에서 페르세우스는 수갑과 족쇄가 채워진 채 로마를 끌려다녔다.[107] 개선식이 끝난 후 투옥되었다가 아이밀리우스의 지원으로 얼마 지나지 않아 풀려나 알바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108]마케도니아 왕국에 가담한 도시는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중립을 지키며 마케도니아를 지원하지 않았던 이피로스도 공격받아 시민 약 150,000명이 노예로 끌려갔다.[109] 이 전쟁으로 안티고노스 왕조가 지배하는 마케도니아 왕국은 소멸하였고, 4개의 자치령으로 해체되었다. 20년 후인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에서 반란(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나 진압되었다. 기원전 146년에는 4개의 자치령도 폐지하고 로마의 속주(마케도니아 속주)로 편입했다.
피드나 전투는 알렉산드로스 3세로부터 뿌리를 가진 팔랑크스를 로마군이 유연한 전술로 물리친 승리로 간주되지만, 페르세우스의 전술 실패와 로마군과의 교전을 회피한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유약한 자세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피드나 전투에서 로마군의 보병부대가 정면에서 팔랑크스를 격파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4. 2. 로마의 헬레니즘 세계 패권 장악
피드나 전투는 알렉산더 3세로부터 이어져 온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 전술을 로마군이 유연한 전술로 물리친 전투로 평가받는다.[42] 그러나 일각에서는 페르세우스의 전술적 실패와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소극적인 태도가 패배의 원인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4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전투에서 로마군 보병 부대가 정면에서 팔랑크스를 격파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42]이 전투의 결과, 안티고노스 왕조가 지배하던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4개의 자치령으로 해체되었다.[42]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에서 반란(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지만 진압되었고, 기원전 146년에는 4개의 자치령마저 폐지되어 로마의 속주(마케도니아 속주)로 편입되었다.[42]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풍부한 광산 운영 계약과 왕실 영지 임대 계약을 폐기하고, 세금 징수관에게 넘겼다.[92] 이는 "법의 권위와 백성의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로마의 이익을 위한 조치였다.[92] 또한, 마케도니아의 국민 의회를 폐지하여 "선동가"가 대중을 선동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92] 마케도니아는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었고, 각 공화국은 자체 의회를 가졌지만 왕에게 바치던 조세의 절반을 로마에 바쳐야 했다.[92]
로마는 승리를 이용하여 그리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친로마 파벌을 지원하고, 페르세우스를 지원했던 사람들을 로마로 보내 재판을 받게 했다.[94] 리비우스는 친로마 파벌이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오만해졌다"고 기록했다.[94]
4. 3. 전후 처리와 영향
페르세우스는 사모트라키섬으로 도망쳤으나 결국 아이밀리우스에게 항복했다. 기원전 167년 아이밀리우스의 로마 개선식에서 페르세우스는 족쇄가 채워진 채 로마를 끌려다녔고, 투옥되었다가 풀려나 알바에서 여생을 보냈다.[49]마케도니아 왕국에 가담한 도시는 약탈당하고 주민들은 노예가 되었다. 중립을 지켰던 이피로스도 공격받아 약 150,000명의 시민이 노예로 끌려갔다.[49] 안티고노스 왕조의 마케도니아 왕국은 멸망하고 4개의 자치령으로 해체되었다. 기원전 148년 마케도니아에서 반란(제4차 마케도니아 전쟁)이 일어났으나 진압되었고, 기원전 146년 4개의 자치령은 폐지되어 로마의 속주(마케도니아 속주)로 편입되었다.[49]
피드나 전투는 로마군이 알렉산더 3세의 팔랑크스를 격파한 것으로 평가되지만, 페르세우스의 전술 실패와 마케도니아 기병대의 소극적인 자세 때문이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로마 보병 부대가 정면에서 팔랑크스를 격파했음은 분명하다.[49]
페르세우스는 탐욕으로 인해 겐티우스와의 동맹, 에우메네스 2세와의 평화 협상, 갈리아 용병 고용 기회를 모두 잃었다.[49],[52],[53] 특히, 겐티우스에게 약속한 은 탈렌트를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동맹을 잃었고,[49] 에우메네스 2세에게는 평화 중재 대가로 막대한 돈을 요구받았으나 제대로 지불하지 않아 협상에 실패했다.[52] 갈리아 용병들에게도 약속한 급여를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 불만을 품고 떠나게 만들었다.[53]
로마 원로원은 마케도니아인과 일리리아인이 자유로워야 한다고 결정하여 로마의 무기가 자유를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는 로마의 자긍심을 높이고 선전 수단으로 활용되었다.[92] 마케도니아의 광산 운영 계약과 왕실 영지 임대 계약은 폐기되고 로마의 세금 징수관에게 넘어갔다. 마케도니아 국민 의회는 폐지되었고, 마케도니아는 4개의 공화국으로 분할되어 각자 의회를 가지고 로마에 조세를 바치게 되었다.[92]
로마는 친로마 파벌을 지원하여 그리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친로마 파벌은 페르세우스를 지원했던 사람들을 로마에 대한 적대감을 조장한다고 주장하며 명단을 제시했고, 이들은 로마로 가서 자신을 변호해야 했다.[94]
아에밀리우스는 에피루스의 도시들을 약탈하도록 허가했다. 70개 도시가 약탈당하고 성벽이 철거되었으며, 150,000명이 노예로 전락했다. 병사들은 전리품 분배에 불만을 품기도 했다.[97]
5. 주요 인물
겐티우스는 일리리아의 왕으로, 15,000명의 병력을 리수스에 집결시켰다.[54] 그의 형제 카라반티우스는 보병 1,000명과 기병 50명을 이끌고 카비족을 제압하려 했고, 겐티우스는 로마 동맹 도시 바사니아를 포위했다.[54]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는 로마군을 이끌고 게누수스 강 근처에 진을 쳤고, 프라에토르 루키우스 아니키우스는 보병 2,000명과 파르티니아 기병 200명을 이끌고 합류했다.[55] 겐티우스는 스코드라로 도망쳤으나, 루키우스 아니키우스와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로마로 보내졌다.[55]
5. 1. 로마 측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기원전 171년 집정관으로, 마케도니아를 담당하여 군대를 이끌고 페르세우스와 싸웠으나, '''칼리키누스 전투'''에서 패배하여 3,000명 이상의 병사(전사 2,500명, 포로 600명)를 잃었다.[12][22]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는 기원전 169년 집정관으로, 마케도니아 전쟁을 담당했다.[34]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마케도니아 군은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가 이끄는 로마 군을 템페 부근에서 포위했지만, 완전한 승리로 이어지지는 못했다.[101]
루키우스 아이밀리우스 파울루스는 기원전 168년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마케도니아를 담당했다.[47] 아이밀리우스는 피드나 전투에서 승리하여 전쟁을 결정적으로 종결시켰다. 그는 신중하게 원정을 준비하고, 군대와 함대를 사찰했으며, 필요한 사항, 동맹국의 충성 여부, 적대적인 국가, 페르세우스의 군대 현황, 그리고 병참에 대해 보고하도록 위임을 요청했다.[47] 그는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을 부대장으로 하는 별동대를 파견하여 마케도니아 배후를 공격하게 했다.[101]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스키피오 나시카 코르쿨룸은 아이밀리우스의 부장으로, 병사 8,200명과 기병 120명으로 구성된 별동대를 이끌고 밤 사이에 아드리아 해 해안을 따라 진군하여 마케도니아 서부에 나타난 후, 북동부의 피티온으로 이동하여 후방에서 마케도니아를 공격할 태세를 보였다.[101]
5. 2. 마케도니아 측
필리포스 5세가 죽고 그의 아들 페르세우스가 마케도니아 왕위를 계승했다.[12] 페르세우스는 필리포스 5세의 친로마 정책을 버리고 반(反) 로마 정책을 추진하며 군사력을 강화했다. 이는 그리스와 주변 국가에 위협을 주었다.[13]페르세우스는 그의 모든 군대를 키티움에 집결시켰다. 그는 39,000명의 보병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그 중 절반은 팔랑크스(중보병)였다. 이 군대에는 3,000명의 크레타인, 3,000명의 아그리아네스, 파이오니아(왕국)와 파르스트리모니아(현대 불가리아의 스트루마 강 주변의 트라키아 지역) 출신 3,000명, 3,000명의 트라키아인, 2,000명의 갈리아인, 3,000명의 마케도니아 기병, 1,000명의 트라키아 기병, 그리고 다양한 그리스 국가에서 온 500명이 포함되었다.[17]
제3차 마케도니아 전쟁 초기, 마케도니아는 칼리키누스 전투에서 로마 군에 승리하고,[13] 기원전 170년에는 로마의 공격을 격퇴하는 등[13] 유리한 고지를 점했다. 기원전 169년에는 퀸투스 마르키우스 필리푸스가 이끄는 로마 군을 템페 부근에서 포위하기도 했다.[34]
페르세우스는 셀레우코스 제국과 페르가몬 왕국에 협력을 요청했지만 실패했다.[51][52] 그러나 일리리아 왕 겐티우스의 지지를 얻는 데는 성공했다.[13] 하지만 겐티우스는 로마와의 전쟁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고, 페르세우스는 겐티우스에게 약속한 자금 지원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아 동맹 관계가 약화되었다.[49]
페르세우스는 탐욕으로 인해 갈리아 용병을 고용할 기회를 잃었다.[53] 발칸 반도에 살던 갈리아 보병과 기병대가 페르세우스에게 돈을 받고 용병으로 봉사하겠다고 제안했지만, 페르세우스는 그들의 요구를 거절하고 일부만 고용하려 했다. 이로 인해 갈리아인들은 불만을 품고 떠나면서 트라키아의 일부를 황폐하게 만들었다.[53]
6. 평가와 논란
페르세우스는 피드나 전투에서 패배한 후 기병대와 함께 펠라로 도망쳤다. 리비우스는 기병대가 온전하게 살아남았다고 기록했지만, 플루타르코스는 보병들이 기병들을 겁쟁이라고 비난하며 그를 말에서 끌어내리려 했다고 전한다.[80][81] 그는 암피폴리스를 거쳐 사모트라케 섬으로 피신했다.[80][81]
플루타르코스는 페르세우스가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였다고 비판했다. 그는 크레타인들에게 알렉산더의 금 식기를 돌려달라고 요청했지만, 약속한 돈보다 적게 지불하고, 심지어 친구들에게 돈을 얻기도 했다.[83] 결국 디오스쿠리 신전으로 도망쳤지만, 로마 해군 사령관 그나이우스 옥타비우스의 압박과 측근들의 배신으로 항복했다.[83][85][86][87]
페르세우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개선식에 끌려다녔고, 알바 푸켄스에 억류되어 여생을 마쳤다.[89][90] 이러한 페르세우스의 행적은 그의 리더십 부족과 도덕적 결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전투에서 도망치고 부하들을 제대로 대우하지 않았으며 탐욕스러운 모습을 보인 점은 비판받을 만하다.
6. 1. 군사적 측면
기원전 168년 6월 22일 오후, 피드나 전투가 시작되었다. 전투 시작 계기는 명확하지 않지만, 마케도니아 편이었던 트라키아 병사들이 로마군의 도발에 넘어갔다는 설이 있다.[104][105]로마군은 2개 군단, 약 29,000명(보병 24,500명, 기병 4,500명)이었다. 마케도니아군은 팔랑크스 21,000명을 포함한 약 44,000명으로, 기병 수는 비슷했지만 전체 병력은 마케도니아가 훨씬 많았다.
로마군은 2개 군단을 중앙에, 측면에는 라틴, 이탈리아, 그리스 보조군(아우크실리아)을, 최우익에는 전투 코끼리 22마리와 기병을 배치했다. 마케도니아군은 팔랑크스를 중앙에, 근위 부대 3,000명을 좌익에, 경보병과 용병, 트라키아 보병을 팔랑크스 양 측면에 배치했다. 페르세우스가 이끄는 신성 부대, 마케도니아 기병, 트라키아 오드뤼시아 기병은 최우익에 있었다.
오후 3시경, 마케도니아군 팔랑크스가 로마군 진지로 접근했다. 아에밀리우스는 최소한의 응전만 하며 후퇴하라는 신호를 보냈고, 초기에는 로마군이 패주하는 듯했다.
팔랑크스는 오로클루스 산기슭까지 전진했지만, 밀집 대형이 무너진 상태였다. 아에밀리우스는 투창(필룸)을 던진 후, 틈이 생긴 팔랑크스를 측면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로마군의 장검과 중장비는 팔랑크스의 단검과 경장비를 쉽게 무너뜨렸고, 팔랑크스는 무너지기 시작했다.[106]
페르세우스는 신성 부대, 기병과 함께 도망쳤다. 마케도니아 보병과 팔랑크스는 계속 싸웠지만, 근위 부대 3,000명을 포함해 25,000명이 죽거나 다쳤다. 로마군은 1,000명 정도의 사상자를 냈다. 실제 전투는 약 1시간이었지만, 해질 때까지 마케도니아군 소탕이 계속되었다. 스키피오 아에밀리아누스도 이 전투에 참전했다고 한다.[104]
이 전투에서 로마군의 유연한 전술과 마케도니아군의 경직된 팔랑크스 전술이 극명하게 대비되었다. 특히, 마케도니아군 지휘부는 팔랑크스의 약점을 보완하지 못하고, 로마군의 전술 변화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등 전략적 실책을 보였다. 이는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군사적 전문성과 유연한 대응 능력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6. 2. 정치적 측면
로마는 팽창 정책을 펼치며 헬레니즘 세계를 지배하려 했고, 이 과정에서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마케도니아 왕국이 멸망하고 로마가 패권을 장악하면서 헬레니즘 세계는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로마는 마케도니아를 네 개의 공화국으로 분할하고, 각 공화국에 자체 의회를 두게 했으며, 왕에게 내던 세금의 절반을 로마에 바치도록 했다.[92] 이는 로마가 헬레니즘 국가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하려는 의도를 보여준다.로마는 마케도니아의 풍부한 광산 운영 계약과 왕실 영지 임대 계약을 폐기하고, 로마의 세금 징수관에게 넘겼다.[92] 이는 마케도니아인들의 경제적 자립을 막고 로마에 대한 의존성을 심화시키는 조치였다. 또한, 로마는 마케도니아의 국민 의회를 폐지했는데, 이는 "선동가"가 대중을 선동하여 로마가 부여한 자유를 "위험하고 치명적인 방종"으로 바꿀 수 있다는 핑계였다.[92] 하지만 실제로는 마케도니아인들의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로마에 대한 저항을 막으려는 의도였다.
로마는 친로마 파벌을 지원하여 그리스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했다. 로마의 지지자들은 그리스 전역에서 회의에 참석하여 페르세우스를 지원했던 사람들을 비난하고, 로마에 대한 충성을 유지하려면 그들을 짓밟아야 한다고 주장했다.[94] 이는 로마가 헬레니즘 세계의 내정에 간섭하고, 자신들의 이익에 맞는 세력을 키우려는 패권주의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로마의 패권주의와 그로 인한 헬레니즘 국가들의 몰락은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될 수 있다. 로마는 헬레니즘 국가들의 자유와 자립을 억압하고 경제적으로 착취했으며, 이는 헬레니즘 세계의 다양성과 발전을 저해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6. 3. 사회문화적 측면
로마군 사령관 아에밀리우스는 로마로 돌아가는 길에 에페이로스를 약탈하라는 원로원의 허가를 받았다. 원로원은 그의 군대에게 페르세우스 편에 섰던 에페이로스의 도시들을 약탈하도록 허가한 것이었다.[97] 각 도시에는 백부장이 파견되어 에페이로스인들이 자유롭게 될 것이므로 로마 수비대를 철수시키러 왔다고 알렸다. 또한 각 도시의 지도자들을 소환하여 도시의 은과 금을 지정된 장소로 가져오라고 지시했다.[97]70개 도시에 병력이 파견되었고, 이들은 같은 날 각 도시에 도착하도록 조정되었다. 귀금속이 수집된 후 병사들은 도시를 약탈했고, 도시 성벽은 철거되었다. 이 과정에서 15만 명의 에페이로스 주민들이 노예로 전락했다.[97] 전리품은 엄청났으며, 판매 수익의 일부는 군인들에게 돌아갔는데, 기병에게는 400denarii, 보병에게는 200denarii가 지급되었다.[97] 병사들은 마치 "마케도니아 전쟁에 전혀 참여하지 않은 것처럼" 페르세우스의 왕궁에서 나온 전리품을 분배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었다고 한다.[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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