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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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기원전 200년부터 기원전 197년까지 로마 공화국과 마케도니아 왕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배경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차지하려 하면서 로도스와 페르가몬이 로마에 지원을 요청하면서 시작되었다. 로마는 필리포스 5세의 팽창 정책에 개입하여 아오스 전투에서 승리하며 전쟁의 주도권을 잡았다. 이후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마케도니아를 격파하고, 플라미니누스의 평화를 통해 그리스의 자유를 선포했다. 하지만 로마는 전략적 요충지에 주둔군을 유지하며 영향력을 행사했고, 이 전쟁은 아이톨리아 전쟁과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으로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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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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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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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97년 |
장소 | 그리스 |
결과 | 로마의 승리 |
영토 변화 | 마케도니아가 그리스 남부, 트라키아, 아나톨리아의 모든 소유지와 속국을 포기함. |
교전 세력 | |
지휘관 및 지도자 | |
마케도니아 | 필리포스 5세 |
2. 배경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어린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비밀 협약을 맺었다. 필리포스 5세는 트라키아와 다르다넬스 해협 주변의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점령해 나갔고, 이에 로도스와 아탈로스 왕조는 위협을 느꼈다.
기원전 201년, 필리포스 5세는 소아시아에서 군사 작전을 펼쳐 사모스 섬을 포위하고 밀레토스를 점령했다. 또한 카리아를 침공했으나,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연합 함대에 의해 바르길리아에서 봉쇄되어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로도스와 페르가몬은 필리포스 5세를 견제하기 위해 당시 지중해에서 강력한 세력으로 부상하고 있던 로마 공화국에 도움을 요청했다.[2]
2. 1. 로마의 부상과 헬레니즘 세계의 변화
기원전 204년, 이집트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 필로파토르가 사망하면서, 여섯 살 된 그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5세와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는 어린 왕을 이용하여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를 차지하기로 결정하고 비밀 협약을 맺었다. 필리포스는 먼저 트라키아와 다르다넬스 해협 근처의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에 관심을 가졌다. 키오스와 같은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한 그는 이 지역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로도스와 페르가몬을 경계했다.기원전 201년, 필리포스는 소아시아에서 작전을 펼쳤다. 프톨레마이오스 도시 사모스를 포위하고 밀레토스를 함락시켰다. 이것은 다시 로도스와 페르가몬을 당황하게 했고, 필리포스는 후자의 영토를 초토화시킴으로써 응대했다. 그 후 필리포스는 카리아를 침공했지만, 로도스와 페르가몬은 바르길리아에서 함대를 성공적으로 봉쇄하는 데 성공했다. 필리포스 군은 보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나라에서 겨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이 시점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기는 했지만, 여전히 필리포스를 두려워하던 로도스와 페르가몬은 지중해에서 강력한 국가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던 로마에게 지원을 요청했다.[2]
2. 2. 필리포스 5세의 팽창 정책 (기원전 204년 ~ 기원전 201년)
기원전 204년,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프톨레마이오스 4세가 사망하고, 6세의 프톨레마이오스 5세가 왕위를 계승하였다. 마케도니아 왕국의 필리포스 5세는 셀레우코스 제국의 안티오코스 3세와 공모하여 이 어린 왕의 약점을 틈타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차지하고 세력 범위를 정하는 비밀 협정을 맺었다. 필리포스는 우선 트라키아와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의 그리스 독립 도시들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키오스를 비롯한 몇몇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 지역에 역시 관심을 가진 로도스와 아탈로스 왕조는 이에 우려를 갖게 되었다.기원전 201년, 필리포스 5세는 소아시아에서 작전을 시작하여,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지배하의 사모스 섬의 도시를 공격하고 밀레토스를 점령했다. 로도스와 아탈로스 왕조는 더욱 불안감을 느꼈지만, 필리포스 5세는 페르가몬의 영토에서 약탈 행위를 자행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이어서 카리아를 침략했지만, 로도스와 페르가몬은 협력하여 바르길리아에서 그의 함대를 저지하고, 그의 육군이 부족한 보급으로 겨울을 나도록 만들었다.
이 시점에서 로도스와 페르가몬은 필리포스에게 우위를 점했지만, 여전히 필리포스 5세를 두려워했다. 이 때문에 지중해 지역에서 급속히 세력을 확대하고 있던 로마 공화국에 지원을 요청했다.[2]
3. 로마의 개입 (기원전 201년 ~ 기원전 200년)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에 승리한 직후였다. 이 시점까지 동지중해에 대한 로마의 관심은 높지 않았다. 일리리아를 둘러싸고 필리포스 5세와 로마가 싸운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결정적인 전투 없이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조약으로 종료되었다. 최근 필리포스의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의 활동은 로마에 직접적인 우려를 불러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호소를 받아들여 그리스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해 3명의 대사를 파견했다.
이후의 내용은 "로마의 참전 결정", "로마의 외교적 노력과 최후통첩" 등의 하위 섹션을 통해 이미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으므로, 여기서는 간략하게 요약만 제시한다.
로마 특사들은 아테네에서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로도스 외교 사절을 만나면서,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에 선전포고를 하고 필리포스 5세가 아티카를 침공하는 상황을 맞이했다. 로마는 마케도니아 장군에게 그리스 도시들의 평화를 요구하고, 아테네, 로도스, 페르가몬, 아이톨리아 동맹을 로마 동맹으로 삼아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배제하려 했다. 필리포스 5세는 로마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아비두스를 포위하는 등 군사 행동을 계속했고, 로마는 두 번째 최후통첩과 함께 일리리아에 군대를 상륙시켜 전쟁 의지를 분명히 했다. 폴리비오스는 아비두스 포위전에서 필리포스 5세의 잔혹 행위를 언급하며 그의 악명을 강조했다.[58]
3. 1. 로마의 참전 결정
기원전 205년,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을 종식시킨 포이니케 조약 체결 이후, 로마 공화정은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승리하였으나, 지중해 동부 지역 문제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필리포스 5세의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의 군사 활동은 로마에 직접적인 위협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 명의 특사를 그리스에 파견하여 상황을 조사하게 했다.[58]특사들은 아테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필리포스와 전쟁을 할 명분을 거의 찾지 못했다. 그러나 아테네에서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로도스 외교관들을 만났고, 때마침 아테네가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상황이 바뀌었다. 필리포스 5세는 군대를 보내 아티카를 침공했고, 로마 특사는 마케도니아 장군과 회담을 갖고 그리스 도시들의 평화를 유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들은 아테네, 로도스, 페르가몬, 아이톨리아 동맹을 로마의 동맹으로 삼아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이전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해결하고자 했다. 마케도니아 장군은 아테네 영토에서 철수했고, 로마의 최후통첩은 필리포스 5세에게 전달되었다.[58]
필리포스 5세는 로마의 최후통첩을 거부하고 아테네 공격을 재개하는 한편, 다르다넬스 해협에서 군사 행동을 시작하여 아비두스를 포위했다. 기원전 200년 가을, 로마 특사는 필리포스 5세에게 두 번째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 내용은 그리스 국가를 공격하거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영토를 점령하지 말고, 로도스 및 페르가몬과 중재하라는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로마 군대가 일리리아에 상륙하면서, 로마가 필리포스 5세와의 전쟁 의지를 확고히 했음이 명백해졌다. 필리포스 5세는 자신이 포이니케 조약을 위반하지 않았다고 항의했지만 소용없었다.[58]
폴리비우스에 따르면, 아비두스 포위 공격 중에 필리포스 5세는 포위된 사람들에게 항복하거나 자결할 수 있도록 3일의 시간을 주겠다고 통보했다. 아비두스 시민들은 도시의 모든 여성과 아이들을 죽이고, 귀중품을 바다에 던진 후 마지막 한 명까지 싸웠다. 이는 필리포스 5세가 그리스 도시 정복 과정에서 저지른 잔혹 행위에 대한 악명을 보여주는 사례이다.[58]
기원전 200년 3월 15일, 새로운 집정관인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가이우스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로마에서 집무를 시작했다. 술피키우스는 백인회를 소집하여 마케도니아와의 전쟁을 제안했으나, 백인회는 전쟁 피로를 이유로 거의 만장일치로 전쟁을 거부했다.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술피키우스는 두 번째 회의에서 백인회를 설득하여 전쟁에 찬성하도록 투표하게 했다.[4] 이후 술피키우스는 병력을 모집하여 브룬디시움으로 떠났고, 제2차 포에니 전쟁 참전 용사들을 군대에 추가한 후 아드리아 해를 건너 아폴로니아에 상륙했다. 로마 해군은 코르키라에 배치되었다.[5]
3. 2. 로마의 외교적 노력과 최후통첩
로마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카르타고를 상대로 승리하였다. 당시까지 로마는 지중해 동부 문제에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필리포스 5세에 대항한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일리리아 문제와 관련이 있었으며, 기원전 205년 〈포이니케 조약〉으로 해결되었다. 필리포스가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 벌인 활동은 로마 공화정과 직접적인 관련은 없었다. 그럼에도 로마는 로도스와 페르가몬의 요청을 받아들여 세 명의 특사를 그리스 문제에 파견했다. 이들은 아테네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필리포스와 전쟁을 해야 할 이유를 거의 찾지 못했다. 아테네에서 그들은 페르가몬의 아탈로스 1세와 로도스의 외교관을 만났다. 동시에 아테네는 마케도니아에 전쟁을 선포했고, 필리포스는 아티카를 침공했다. 로마 특사는 마케도니아 장군과 회담을 갖고 마케도니아에 그리스 도시들을 평화롭게 남겨두라고 촉구했다. 아테네, 로도스, 페르가몬, 아이톨리아 동맹을 로마 동맹국으로 선택하고 마케도니아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최근 전쟁으로 인한 피해를 해결하고자 했다. 마케도니아 장군은 아테네 영토에서 철수하고, 로마의 최후통첩을 필리포스 왕에게 전달했다.필리포스는 봉쇄를 뚫고 귀국했지만, 로마의 최후통첩을 거부했다. 그는 아테네 공격을 재개하고, 다르다넬스에서 또 다른 군사행동을 시작하여 중요한 도시인 아비도스(en)를 포위했다. 기원전 200년 가을, 로마 특사는 이곳에 두 번째 최후통첩을 보냈다. 특사는 그리스 국가를 공격하거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영토를 점령하지 말고, 로도스와 페르가몬과 중재하라고 촉구했다. 로마가 필리포스와 전쟁을 할 의도가 명확해졌고, 동시에 로마 군대가 일리리아에 상륙하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필리포스가 로마와 체결한 평화 협정을 위반한 것이 없다는 필리포스의 항의는 무의미했다.
폴리비오스에 따르면 아비두스를 포위 공격할 때, 필리포스는 참을성이 없어졌고, 포위된 사람들에게 성이 함락될 것이며 자살하거나 항복하기를 원한다면 3일의 시간을 주겠다고 전언을 보냈다. 시민들은 즉각 도시의 모든 여성과 아이들을 죽이고, 귀중품을 바다에 던지며 마지막 사람까지 싸웠다. 이 이야기는 필리포스가 그리스 도시 정복을 통해 마케도니아의 힘과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노력을 하면서 이 기간에 벌여온 잔학 행위에 대한 악명을 증명한다.[58]
4. 전쟁의 경과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97년)
기원전 200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가 이끄는 로마군은 필리포스 5세에게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기원전 199년에는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가 지휘권을 이어받았으나, 그는 부하들의 반란에 직면해야 했다. 기원전 198년, 빌리우스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에게 지휘권을 넘겼고, 플라미니누스는 이전과는 다른 전략을 펼치는 장군이었다.
플라미니누스는 30세가 채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그리스 문화 애호가(필헬레니즘)라고 칭했다. 그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새로운 로마 정책을 도입했다. 이전까지 로마는 필리포스에게 그리스 남부 도시들을 공격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그리스의 평화' 정책을 펼쳤다. 그러나 플라미니누스는 이제 남부 그리스 도시에서 모든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마케도니아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그리스인을 위한 자유'를 주장했다.
기원전 198년, 플라미니누스는 필리포스를 상대로 강력한 작전을 펼쳐 테살리아에서 몰아냈다. 아오우스 전투에서 필리포스에게 승리하여 테살리아로 퇴각시켰다. 전통적으로 마케도니아에 우호적이었던 아카이아 동맹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인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의 성공은 아카이아 동맹이 친 마케도니아적인 입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아르고스와 같은 일부는 여전히 필리포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필리포스는 평화 조약을 맺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로마에서 선거가 진행되는 결정적인 시기에 플라미니누스에게 제의를 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사령관직이 연장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는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필리포스와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자신이 로마로 소환되어야 한다면 마케도니아와 빠른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사령관직이 연장된다면 협상을 중단하고 필리포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198년 11월, 플라미니누스와 필리포스는 로크리스의 니케아에서 만났다. 플라미니누스는 모든 동맹국들이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진행 절차를 연장시켰다. 그는 필리포스가 그리스 전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를 되풀이했다. 필리포스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 정복한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리스 전역에서의 철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플라미니누스는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라며 필리포스를 설득하여 로마 원로원에 특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필리포스는 그의 충고를 따랐지만, 플라미니누스는 자신의 사령관직이 연장되었고, 로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마케도니아와의 협상에 성공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로마가 뜻대로 일이 진행되는 것을 보고, 아카르나니아를 제외한 다른 동맹국들은 필리포스를 떠났다. 이 때문에 그는 25,000명의 용병을 고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원전 197년 6월,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플라미니누스의 군대는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격파했다. 이 전투는 전쟁의 결과를 결정지었으며, 필리포스는 로마의 조건대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4. 1. 초기 로마의 군사 작전 (기원전 200년 ~ 기원전 199년)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는 필리포스 5세에게 거의 전진하지 못했고, 그의 후계자인 푸블리우스 빌리우스는 부하들의 반란을 처리해야 했다.[19] 기원전 198년, 빌리우스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다.이때 술피키우스는 일리리아의 세만강 유역에 확고한 기반을 다졌다.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 휘하의 군대가 마케도니아 서부 국경을 습격하여 안티파트레아와 코드리온을 포함한 여러 도시를 점령하거나 파괴했다. 이 원정 이후 술피키우스는 플루라투스 3세 휘하의 일리리아인, 바토 휘하의 다르다니아인, 아미난데르 휘하의 아타마네스로부터 충성을 받았다. 필리포스, 술피키우스, 아테네인들의 외교적 노력은 아이톨리아 동맹에 집중되었는데, 이 동맹은 로마를 지지하는 듯했지만 이 단계에서는 중립을 유지했다.[13]
기원전 199년 봄, 술피키우스는 서부 마케도니아와 경계를 이루는 지역을 점령한 일리리아 부족인 다사레티의 영토를 통해 군대를 동쪽으로 이끌었다. 필리포스는 2만 명의 보병과 4천 명의 기병을 모아 페르세우스와 함께 북쪽에 주둔시켰던 병력을 소환하여 서쪽으로 진군했다. 그는 술피키우스의 진영이 내려다보이는 아타쿠스 근처 언덕에 야영했다. 일련의 결정적이지 못한 소규모 전투(그중 하나에서 필리포스가 거의 포로로 잡힐 뻔했다) 이후 다르다니아인들이 북부 마케도니아를 침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졌고, 마케도니아인들은 밤에 비밀리에 철수했다.[14] 술피키우스는 이 사실을 깨닫고 펠라고니아를 통해 추격하여 필리포스가 에오르다이아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길을 강행했다. 술피키우스는 에오르다이아를 유린한 다음 남쪽의 엘리메이아를 유린했고, 그 후 할리아크몬 강 계곡을 따라 오레스티스까지 가서 켈레트룸과 펠리온을 정복한 다음 기지로 돌아갔다.[15] 필리포스는 군대를 분할하여 북쪽으로 군대를 파견하여 다르다니아의 침공에 대처하게 했는데, 그들은 그렇게 했고, 자신은 남쪽으로 향했다.
육상전이 시작될 무렵, 로마 함대는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의 지휘하에 코르키라를 떠나 말레아 곶을 돌아 헤르미오네 근처에서 아탈루스 왕과 합류했다. 연합 함대는 이후 안드로스 섬에 있는 마케도니아 군사 기지를 공격하여 페르가몬을 위해 점령했다. 이사와 로도스에서 추가 선박이 합류한 함대는 북쪽 할키디케 반도로 향했지만 카산드레이아 공격은 완전히 실패했다. 그들은 북부 에우보이아로 후퇴하여 또 다른 주요 마케도니아 해군 기지인 오레우스를 포위 공격하여 점령했다. 이제 가을이 다가오고 항해 시즌이 끝나가면서, 함대 병력은 고향 항구로 흩어졌다.[16]
이러한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톨리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다모크리토스는 로마 측에 참전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아미난데르 왕과 함께 마그네시아와 페르하에비아를 침공한 후 테살리아를 황폐화시켰다. 그곳에서 필리포스가 갑자기 나타나 그들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그는 아이톨리아 도시인 타우마키를 한동안 포위했지만 겨울이 다가오자 포기를 하고 철수했다. 그는 겨울을 보내며 군대를 훈련하고 특히 아카이아 동맹과 외교를 벌였다.[17]
4. 2. 플라미니누스의 등장과 전략 변화 (기원전 198년)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는 기원전 198년에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의 뒤를 이어 로마군 지휘권을 넘겨받았다. 그는 이전 지휘관들과는 완전히 다른 유형의 장군이었다.플라미니누스는 30세도 되지 않았지만, 스스로를 그리스 문화 애호가(필헬레니즘)라고 공언할 정도였다. 그는 전쟁 승리를 위한 새로운 로마 정책을 도입했다. 이전까지 로마는 필리포스에게 그리스 남부 도시들을 공격하지 말 것을 요청하는 '그리스의 평화' 정책을 펼쳤지만, 플라미니누스는 남부 그리스 도시에서 모든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마케도니아에 국한되어야 한다는 '그리스인을 위한 자유' 정책을 주장했다.
기원전 198년, 플라미니누스는 필리포스를 상대로 강력한 작전을 펼쳐 테살리아에서 몰아냈다. 전통적으로 마케도니아에 우호적이었던 아카이아 동맹의 도시들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인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로마의 성공은 아카이아 동맹이 친 마케도니아적인 입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아르고스와 같은 일부는 여전히 필리포스에게 우호적인 입장을 유지했다.
필리포스는 평화 조약을 맺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로마에서 선거가 진행되는 결정적인 시기에 플라미니누스에게 제의를 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었지만, 자신의 사령관직이 연장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는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필리포스와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만약 자신이 로마로 소환되어야 한다면 마케도니아와 빠른 평화 협정을 맺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고, 사령관직이 연장된다면 협상을 중단하고 필리포스에 대한 전쟁을 재개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198년 11월, 플라미니누스와 필리포스는 로크리스의 니케아에서 만났다. 플라미니누스는 모든 동맹국들이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진행 절차를 연장시켰다. 그는 필리포스가 그리스 전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를 되풀이했다. 필리포스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 정복한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그리스 전역에서의 철수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플라미니누스는 고집을 피우고 있는 것은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라며 필리포스를 설득하여 로마 원로원에 특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필리포스는 그의 충고를 따랐지만, 플라미니누스는 자신의 사령관직이 연장되었고, 로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마케도니아와의 협상에 성공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4. 3. 해상 전투와 동맹국의 역할
필리포스 5세는 그리스에서 সক্রিয়적인 동맹이 거의 없었지만, 로마에 대한 환상도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제1차 마케도니아 전쟁 때 로마군의 잔혹함을 기억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도시 국가들은 전쟁의 추이를 관망했다. 처음 2년 동안 로마의 작전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 막시무스는 필리포스에게 거의 전진하지 못했고, 그의 후계자인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는 부하들의 반란을 처리해야 했다. 기원전 198년, 빌리우스는 티투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에게 지휘권을 넘겼는데, 그는 이전의 지휘관들과는 다른 인물이었다.플라미니누스는 30세가 되지 않았으며, 스스로를 열렬한 친(親)헬레니스트라고 공표했다. 그는 전쟁 승리를 위한 새로운 로마 정책을 도입했다. 이전까지 로마는 필리포스에게 그리스 남부 도시들을 공격하지 말 것을 요청했을 뿐이었지만(‘그리스의 평화’), 플라미니누스는 이제 필리포스가 남부 그리스 도시에서 모든 수비대를 철수시키고 마케도니아에 국한해야 한다고 요구했다(‘그리스인을 위한 자유’).
기원전 198년, 플라미니누스는 필리포스를 상대로 강력한 작전을 벌여 테살리아에서 물러나게 했다. 전통적으로 마케도니아에 우호적이었던 아카이아 동맹의 도시들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인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필리포스를 상대로 한 로마의 성공은 그들에게 친 마케도니아적인 입장을 포기하게 했다. 아르고스인들과 같은 일부는 여전히 친 필리포스 입장을 견지했다.
필리포스는 평화 조약을 맺겠다는 의지를 표했지만, 로마에서 선거가 진행되는 결정적인 시기에 플라미니누스에게 제의를 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었지만, 사령관직이 연장될지는 미지수였다. 그는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필리포스와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198년 11월, 플라미니누스와 필리포스는 로크리스의 니케아에서 만났다. 플라미니누스는 모든 동맹국들이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필리포스가 그리스 전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를 되풀이했다. 필리포스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 정복한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플라미니누스의 제안을 오래 끌 수는 없었다. 플라미니누스는 필리포스를 설득하여 로마 원로원에 특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필리포스는 그의 충고를 따랐지만, 플라미니누스는 자신의 사령관직이 연장된 것을 알게 되었고, 로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마케도니아와의 협상에 성공적으로 개입하여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
로마가 원하는 대로 상황이 전개되자, 아카르나니아를 제외한 필리포스의 몇 안 되는 동맹들도 그를 포기했다. 필리포스는 25,000명의 용병을 고용하여 군대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197년 6월, 테살리아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플라미니누스의 군대가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물리치면서 전쟁은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했다. 필리포스는 로마의 조건대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육상전이 시작될 무렵, 로마 함대는 루키우스 아푸스티우스의 지휘하에 코르키라를 떠나 말레아 곶을 돌아 헤르미오네 근처에서 아탈루스 1세와 합류했다. 연합 함대는 안드로스 섬에 있는 마케도니아 군사 기지를 공격하여 페르가몬을 위해 점령했다. 이사와 로도스에서 추가 선박이 합류한 함대는 북쪽 할키디케 반도로 향했지만 카산드레이아 공격은 실패했다. 그들은 북부 에우보이아로 후퇴하여 또 다른 주요 마케도니아 해군 기지인 오레우스를 포위 공격하여 점령했다. 가을이 다가오고 항해 시즌이 끝나가면서, 함대 병력은 고향 항구로 흩어졌다.[16]
이러한 해상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아이톨리아 동맹의 스트라테고스인 다모크리토스는 로마 측에 참전할 때라고 판단했다. 그는 아미난데르 왕과 함께 마그네시아와 페르하에비아를 침공한 후 테살리아를 황폐화시켰다. 그곳에서 필리포스가 갑자기 나타나 그들의 군대를 완전히 격파했다. 그는 타우마키를 포위했지만 겨울이 다가오자 포기를 하고 철수했다. 그는 겨울을 보내며 군대를 훈련하고 특히 아카이아 동맹과 외교를 벌였다.[17]
이러한 해상 작전이 진행되는 동안, 루키우스 퀸크티우스 플라미니누스가 로마 함대를 장악하고 아테네로 항해했다. 그는 에우보이아 근처에서 아탈로스 왕국 및 로도스 함대와 합류했다. 치열한 전투 끝에 에레트리아가 함락되었고, 카리스토스는 항복하여 에우보이아 섬 전체가 로마의 통제하에 들어갔다. 함대는 아티카를 돌아 켄크레아이로 돌아와 코린토스를 포위했다.[30]
그곳에서 루키우스, 아탈로스, 로도스인, 그리고 아테네인들은 아카이아 동맹에 사절을 보내 로마 측에 참전하도록 했다. 동맹은 시키온에서 회의를 열어 대응 방안을 결정했는데, 이는 매우 논쟁적이었다. 아카이아인들은 여전히 스파르타와 전쟁 중이었고 마케도니아와 동맹 관계에 있었지만, 새로운 최고 행정관인 아리스테에누스가 친로마적이었고 로마는 코린토스 시를 동맹에게 주겠다고 약속했다. 아르고스, 메갈로폴리스, 디메의 대표자들은 필리포스와 강한 유대 관계를 맺고 있었기 때문에 회의에서 떠났다. 나머지 회의 참석자들은 반 마케도니아 동맹에 합류하기로 투표했다.[31]
아카이아군은 코린토스를 포위하는 다른 군대에 합류했지만, 보이오티아에서 필로클레스가 지휘하는 1,500명의 마케도니아 증원군이 도착하자 치열한 전투 끝에 포위 공격을 포기해야 했다.[32] 코린토스에서 필로클레스는 도시의 친마케도니아 세력에 의해 아르고스를 장악해 달라는 요청을 받았고, 그는 싸움 없이 이를 수행했다.[33]
4. 4.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와 전쟁의 종결 (기원전 197년)
플라미니누스는 필리포스를 상대로 적극적인 작전을 펼쳐 테살리아에서 물러나도록 했다. 전통적으로 마케도니아에 우호적이었던 아카이아 동맹의 도시들은 스파르타와의 전쟁으로 인해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필리포스를 상대로 한 로마의 성공은 그들이 친 마케도니아적인 입장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아르고스와 같은 일부는 여전히 친 필리포스 입장을 견지했다.[37]필리포스는 평화 조약을 맺겠다는 의지를 보였지만, 로마에서 선거가 진행되는 결정적인 시기에 플라미니누스에게 제의를 했다. 플라미니누스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싶었지만, 사령관직 연장 여부가 불확실했다. 그는 선거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필리포스와 협상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198년 11월, 플라미니누스와 필리포스는 로크리스의 니케아에서 만났다. 플라미니누스는 모든 동맹국들이 협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필리포스가 그리스 전역에서 철수해야 한다는 요구를 되풀이했다. 필리포스는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 정복한 모든 것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플라미니누스는 그리스 도시 국가들이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고 설득하며 로마 원로원에 특사를 파견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필리포스는 그의 충고를 따랐지만, 플라미니누스는 자신의 사령관직이 연장된 것을 알게 되었고, 로마에 있는 그의 친구들이 마케도니아와의 협상에 개입하여 전쟁을 지속할 수 있게 되었다.[38]
결국, 필리포스는 용병군 25,000명으로 군대를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기원전 197년 6월, 테살리아의 키노스케팔라이 전투에서 플라미니누스의 군대가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 팔랑스를 물리치면서 전쟁은 결정적인 국면을 맞이했다. 필리포스는 로마의 조건대로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41]
봄이 시작되자 플라미니누스와 아탈루스는 보이오티아 동맹을 연합에 가입시키기 위해 테베로 갔다. 플라미니누스가 2,000명의 병력을 몰래 도시에 투입했기 때문에 동맹 의회는 로마 연합에 가입할 수밖에 없었다. 의회에서 아탈루스 왕은 연설을 하던 중 갑자기 뇌졸중을 겪어 신체의 한쪽이 마비되었다. 그는 결국 페르가몬으로 후송되었고, 그해 말에 사망했다.[39]
기원전 197년 6월, 플라미니누스는 엘라테이아에서 테르모필레를 거쳐 북쪽으로 진군했다. 그 과정에서 아이톨리아, 크레테의 고르틴, 아폴로니아, 아타마니아의 병력이 합류했다. 필리포스는 테살리아로 남쪽으로 진군했고, 두 군대는 페라이 근처에서 서로 마주보고 진을 쳤다. 양 군대는 스코투사 주변 언덕으로 이동했다. 상대 군대의 병력이 키노스케팔레 언덕에서 접촉하여 전면적인 전투로 이어졌다. 전쟁의 결정적인 교전이었던 이 전투에서 플라미니누스의 로마 군단은 필리포스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를 격파했다. 필리포스 자신은 말을 타고 도망쳐 생존자들을 모아 마케도니아로 철수했다. 필리포스는 로마의 조건에 따라 평화를 구걸해야 했다.[41]
5. 플라미니누스의 평화
기원전 198년 겨울, 필리포스 5세가 평화 의사를 밝히면서 협상이 시작되었다. 기원전 198년 11월, 니카이아에서 양측이 만났다. 필리포스 5세는 배에서 내려 해변에서 플라미니누스와 동맹국들을 만나는 것을 거부하고 배 위에서 연설했다. 플라미니누스는 모든 동맹국이 협상에 참석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회의를 지연시켰고, 필리포스 5세에게 그리스, 일리리아, 소아시아에서 모든 수비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이에 동의할 수 없었고, 로마 원로원에 사절단을 보내도록 설득되었다.[34]
로마에 도착한 사절단에게 원로원은 "그리스의 족쇄"인 데메트리아, 칼키스, 코린토스를 넘겨줄 것을 요구했지만, 필리포스 5세의 사절들은 이에 동의할 권한이 없다고 주장하여 전쟁이 계속되었다.[34]
폴리비오스와 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이 협상은 플라미니누스에 의해 조작되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선거가 진행 중이었고, 플라미니누스는 전쟁을 끝낸 공로를 인정받고 싶어했지만 자신의 지휘권 연장 여부를 알 수 없었다. 그는 지휘권이 연장될 때까지 협상을 지연시켰고, 로마에 있는 친구들을 통해 원로원 회의를 무산시켰다.[35]
이후 필리포스 5세는 아르고스를 스파르타의 나비스에게 넘겨 군대를 자유롭게 하려 했으나, 나비스는 도시에서 혁명을 일으켰다. 미케네에서 플라미니누스, 아탈로스 1세, 아카이아 동맹과 회의를 연 나비스는 아카이아 동맹 공격을 중단하고 로마군에 병력을 제공하기로 합의했다.[36]
5. 1. 강화 조약의 내용
정전이 선언되고, 템페 계곡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필리포스 5세는 그리스 전체에서 철수하고,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 정복한 영토를 포기하기로 동의했다.[45] 아이톨리아 동맹은 필리포스 5세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지만, 플라미니누스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조약은 비준을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47] 로마 원로원은 전쟁 배상금 지불과 해군 항복을 조건으로 추가했다.기원전 196년, 최종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필리포스 5세는 유럽과 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에 주둔한 모든 수비대를 철수시켜야 했으며, 이 도시들은 자유롭고 자치적인 도시가 되어야 했다. 필리포스 5세는 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절반은 즉시 지불하고 나머지는 10년에 걸쳐 씩 분할 지불해야 했다. 그는 기함을 제외한 모든 해군을 항복해야 했고, 그의 군대는 최대 5,000명으로 제한되었으며, 코끼리를 포함할 수 없었고, 로마 원로원의 허가 없이 국경 밖으로 이끌 수 없었다.[48]
그해 이스트미아 제전에서 플라미니누스는 제전에 참석하여 기뻐하는 그리스 대중에게 ‘그리스인들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마케도니아가 차지했던 전략 도시(코린트, 할키스, 데메트리아스)에 주둔군을 유지했고, 기원전 194년까지 군대를 완전히 철수시키지 않았다.
5. 2. 그리스의 자유 선언
정전이 선언되고, 템페 골짜기(en)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되었다. 필리포스 5세는 그리스에서 완전히 철수하고, 정복했던 트라키아와 소아시아 땅을 포기하기로 합의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필리포스 5세에게 영토를 할양하라고 요구했지만, 플라미니누스는 이를 거부했다. 이 조약은 비준을 받기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원로원은 전쟁 배상금 지불과 해군 항복을 조건으로 추가했다. 기원전 196년, 강화 조약이 발효되었고 그 해 이스토미아 축제에서 플라미니누스는 "그리스의 자유"를 선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는 마케도니아 측의 전략상 중요한 도시인 코린토스, 칼키스, 데메트리아(en)에 기원전 194년까지 주둔을 계속했다.

기원전 196년 5월 이스토미아 경기에서 플라미니누스는 경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환호 속에 '그리스인의 자유'를 선포했다. 로마인들은 코린토스, 칼키스, 데메트리아와 같이 마케도니아에 속했던 주요 전략적 도시에 주둔군을 유지했으며, 군단은 기원전 194년까지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플라미니누스의 선포문에는 이 조항이 적용되는 필리포스의 통제하에 있던 공동체 목록이 포함되었지만, 로마인들은 곧 일반적으로 그리스 자유의 보호자 역할을 맡았다. 그리스 자유의 수사는 로마인들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즉시 사용되어 다른 곳에서의 외교 및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했으며, 기원전 195년에 시작된 나비스 전쟁은 겉으로는 아르고스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6. 전쟁의 결과 및 영향
테살리아에서의 원정 기간 동안, 아카이아, 아카르나니아, 카리아에서 세 차례의 다른 원정이 벌어졌고, 모든 곳에서 마케도니아 군대는 패배했다.
펠로폰네소스에서 안드로스테네스는 6,000명의 마케도니아 군대를 이끌고 코린토스를 출발하여 펠레네, 플리우스, 클레오나이, 시키온의 영토를 약탈했다. 아카이아 동맹의 장군 니코스트라토스는 5,000명의 병력을 소집하여 코린토스로 돌아가는 길목을 막고 마케도니아 군대를 세부적으로 격파했다.[42]
아카르나니아에서는 키노스케팔레 전투 이전에 로마 측으로 전환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동맹 의회는 아이톨리아인에 대한 적대감 때문에 결국 이를 반대했다. 루키우스 플라미니누스는 아카르나니아의 수도 레우카스를 공격했으나 함락이 어려웠다. 그러나 도시 내부 배신자들의 도움으로 결국 함락되었다. 키노스케팔레 전투 소식이 전해진 직후, 나머지 아카르나니아인들은 항복했다.[43]
소아시아에서 로도스인들은 4,500명의 용병(대부분 아카이아인) 부대를 이끌고 로도스 페라이아를 탈환하기 위해 카리아로 진군했다. 알라반다에서 그 지역의 마케도니아 군대와 전투가 벌어졌고, 로도스인들이 승리했다. 로도스인들은 이후 페라이아를 탈환했지만 스트라토니케아를 점령하는 데는 실패했다.[44]
휴전이 선언되었고, 템페 계곡에서 평화 협상이 열렸다. 필리포스 5세는 그리스 전체에서 철수하고 트라키아와 소아시아에서 정복한 영토를 포기하기로 동의했다.[45] 필리포스는 협약 직후 다르다니아족의 상부 마케도니아 침공에 대처하기 위해 급히 떠나야 했다.[46]
조약은 비준을 위해 로마로 보내졌다. 전쟁을 연장하려는 마르쿠스 클라우디우스 마르켈루스 당선 집정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로마 부족회는 만장일치로 평화를 결정했다. 원로원은 최종 평화 조건에 대해 조언하기 위해 푸블리우스 술피키우스 갈바와 푸블리우스 빌리우스 타풀루스를 포함한 10명의 위원을 보냈다.[47]
기원전 196년 봄, 필리포스 5세와 최종 평화 조약이 체결되었다. 필리포스는 유럽과 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에 주둔한 모든 수비대를 철수시켜야 했으며, 이 도시들은 자유롭고 자치적인 도시가 되어야 했다. 필리포스는 1,000탈렌트의 전쟁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는데, 절반은 즉시, 나머지는 10년에 걸쳐 50탈렌트씩 분할 지불해야 했다. 그는 기함(旗艦)을 제외한 모든 해군을 항복해야 했고, 군대는 최대 5,000명으로 제한되었으며, 코끼리를 포함할 수 없었고, 로마 원로원의 허가 없이 국경 밖으로 군대를 이끌 수 없었다.[48]
초기 평화 협상에서 플라미니누스와 아이톨리아 동맹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 아이톨리아 동맹은 플라미니누스가 받아들일 수 있는 것보다 더 가혹한 평화 조건을 필리포스에게 부과하고, 이전에 테살리아에서 지배했던 여러 도시들의 반환을 원했지만, 플라미니누스는 이를 지지하지 않았다.[50] 아이톨리아 동맹은 로마가 "그리스의 족쇄"에 수비대를 유지하고 마케도니아를 그리스의 지배자로 대체하려 한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51] 로마에 대한 아이톨리아 동맹의 적대감은 기원전 196년 델포이 암피크티오니 회의에서 로마 위원 10명 중 한 명에게 공개적으로 드러났다.[52] 이 갈등은 결국 기원전 191년 아이톨리아 전쟁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196년 5월 이스토미아 경기에서 플라미니누스는 경기에 참석한 사람들의 환호 속에 '그리스인의 자유'를 선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인들은 코린토스, 칼키스, 데메트리아스와 같이 마케도니아에 속했던 주요 전략적 도시에 주둔군을 유지했으며, 군단은 기원전 194년까지 완전히 철수하지 않았다.
이러한 자유 부여의 범위는 완전히 명확하지 않았다. 플라미니누스의 선포문에는 이 조항이 적용되는 필리포스 5세의 통제하에 있던 공동체 목록이 포함되었지만, 로마인들은 곧 일반적으로 그리스 자유의 보호자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스 자유의 수사는 로마인들과 그 동맹국들에 의해 즉시 사용되어 다른 곳에서의 외교 및 군사적 행동을 정당화했으며, 기원전 195년에 시작된 나비스 전쟁은 겉으로는 아르고스의 자유를 위한 것이었다.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의 초기 배경은 안티오코스 3세와 필리포스 5세의 동맹이 프톨레마이오스 5세에 대항한 것이었고, 전쟁이 그리스에서 격화되는 동안 안티오코스 3세는 파니움 전투에서 시리아 주둔 프톨레마이오스 군대를 격파했다. 필리포스 5세가 한때 프톨레마이오스 통치하에 있던 소아시아의 공동체에 대한 권리를 포기했기 때문에, 안티오코스 3세는 이제 그들을 차지하기 위해 소아시아로 진격했다.[56] 이로 인해 발생한 갈등은 기원전 192년에 로마-셀레우코스 전쟁의 발발로 이어지게 된다.
7. 한국사와의 비교 및 역사적 교훈
제2차 마케도니아 전쟁은 한국사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강대국 간의 갈등과 그 속에서 약소국이 겪는 어려움이라는 측면에서 비교해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마케도니아 왕국과 로마 공화정 간의 전쟁은 주변 국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약소국들은 강대국의 세력 다툼에 휘말려 자국의 이익을 지키기 어려웠다. 이는 한국사에서 고조선, 삼국시대, 고려, 조선 등이 중국의 여러 왕조와 주변 유목 민족의 침략에 맞서 싸워야 했던 상황과 유사하다.
역사적 교훈으로는, 강대국 간의 갈등 속에서 약소국은 생존과 번영을 위해 끊임없이 외교적, 군사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내부 분열은 외부의 침략에 취약하게 만들 수 있으므로, 국론 통일과 국가 정체성 확립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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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문헌
"[[\u30dd\u30ea\u30e5\u30d3\u30aa\u30b9]]\u300e[[\u6b74\u53f2 (\u30dd\u30ea\u30e5\u30d3\u30aa\u30b9)|\u6b74\u53f2]]\u300fXVI 30\u201331"
[58]
문헌
Polybius, Histories XVI 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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