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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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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손룡은 전국 시대의 사상가로, 평원군의 식객으로 활동하며 정치적 조언을 하기도 했다. 그는 명가 학파의 대표적인 인물로, '백마비마설'과 같은 독특한 논리로 유명하다. '백마비마설'은 '백마는 말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통해 개념의 내포와 외연의 차이를 강조하며, 현대 논리학의 유형 이론과 유사한 면모를 보인다. 또한 '견백론'을 통해 감각 경험과 추상적 개념 사이의 관계에 대한 철학적 고찰을 제시했다. 그의 사상은 궤변으로 치부되기도 하지만, 현대에는 논리적 분석과 개념 구분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적 시도로 재해석되기도 한다. 공손룡의 사상은 『공손룡자』를 통해 전해지며, 『사기』, 『장자』, 『여씨춘추』 등 다양한 문헌에서도 그의 활동과 사상이 언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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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혜시는 전국 시대 위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로, 공손룡과 함께 명가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동일성과 차이의 상대성을 논하는 역설적인 주장을 펼쳤고, 장자와 교류하며 서로의 사상에 영향을 주었으며, 위나라 혜왕과 양왕을 섬겨 재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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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손룡
기본 정보
이름공손룡
원어 이름公孫龍
로마자 표기Gongsun Long
자병(子秉)
출생기원전 320년경
사망기원전 250년
활동 시대중국 철학 고대 시대
학파명가
주요 저서《공손룡자(公孫龍子)》

2. 생애 및 활동

조나라 평원군식객으로 활동하며 여러 조언을 남긴 기록이 『사기』 평원군우경열전과 『여씨춘추』 심응람음사편 등에 남아 있다. 특히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 이후, 우경이 평원군의 영지를 늘리도록 왕에게 건의하려 하자, 공손룡은 이것이 오히려 평원군에게 불리할 수 있다고 조언하여 이를 막았다.

또한 그는 연나라 소왕과 조나라 혜문왕에게 전쟁을 멈출 것을 주장하는 등 사상가로서도 활동했으며, 백마비마설과 견백론 같은 독자적인 논리를 펼쳤다. 그러나 음양가 사상가 추연과의 논쟁 이후 평원군의 신임을 잃고 조나라를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1. 평원군과의 관계

평원군식객 중 한 명으로 활동하며 여러 차례 조언을 남겼으며, 그 내용은 『사기』 평원군우경열전과 『여씨춘추』 심응람편 등에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는 진나라에게 크게 패배하여 수도 한단이 포위될 위기에 처했다. 당시 조나라의 재상이었던 평원군은 초나라의 춘신군과 위나라의 신릉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동의를 얻었고, 기원전 258년 연합군의 도움으로 진나라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

이후 조나라의 학자이자 정치가인 우경은 평원군이 신릉군의 도움을 받아 한단을 구한 공로를 내세워, 왕에게 평원군의 영지를 더 늘려주도록 건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소식을 들은 공손룡은 그날 밤 평원군의 집으로 달려가 우경의 의견에 반대했다. 공손룡은 "평원군께서 재상이 되고 영지를 얻은 것은 뛰어난 능력이나 공적 때문이 아니라 왕의 친척이기 때문입니다."라고 지적하며, "만약 능력이나 공적을 내세워 영지를 더 받으려 한다면 오히려 불리해질 수 있습니다."라고 덧붙였다. 또한 "설령 영지를 더 받게 된다 하더라도, 이는 우경이 자신의 공으로 삼으려는 의도일 것입니다."라고 주장했다. 평원군은 공손룡의 조언을 받아들여 우경의 제안을 거절했다.

2. 2. 사상가로서의 활동

여씨춘추』에 따르면, 공손룡은 연나라의 소왕에게 언병(偃兵, 전쟁을 멈춤)을 설파하였다. 이후 나라로 가 평원군식객이 되었고, 혜문왕에게도 '언병'과 겸애(兼愛, 차별 없는 사랑)를 주장했다. 이는 묵가의 사상과 유사한 면모를 보여준다.

『공손룡자』에는 그의 주요 사상이 담겨 있는데, 대표적으로 백마비마설(白馬非馬說)과 견백론(堅白論)이 있다. '백마비마설'은 "흰색이라는 개념과 말이라는 개념이 합쳐진 '백마'는 '말'이라는 개념과 다르다"는 주장이다. '견백론'은 "희고 단단한 돌이 있을 때, 눈으로는 흰색만 알 수 있고 손으로는 단단함만 알 수 있으므로, 희다는 개념과 단단하다는 개념은 동시에 인식될 수 없다"는 논리이다.

한비자』 외저설 좌상편에는 아설이라는 인물이 '백마비마설'을 이용해 백마를 타고 관문을 통과할 때 말 통행세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다른 기록에는 공손룡 자신도 비슷한 시도를 했다는 설이 있다.

사기』 평원군우경열전에 따르면, 음양가추연이 조나라에 왔을 때 평원군 앞에서 공손룡의 '백마비마설' 등을 현실과 동떨어진 쓸모없는 논의라고 비판하며 자신의 '지도'(至道) 설을 펼쳤다. 이 일로 공손룡은 평원군의 신임을 잃고 조나라를 떠나게 되었다.[10] 그 후의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3. 주요 사상

공손룡의 주요 사상은 명가(名家) 학파 내에서도 명(名)과 실(實)의 관계에 대한 가장 "심오하고 체계적인" 분석으로 평가받는다. (쑨전빈 교수)[4] 그의 연구는 단순히 철학적 탐구를 넘어 통치자들의 관심을 끌며 당시 사회 질서 유지와도 연관성을 가졌다.[4] 다만, 펑유란이나 채드 한센과 같이 그의 사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학자들도 있다.

공손룡의 논증 방식은 후대에 이르러 상반된 평가를 받기도 했는데, 일부는 이를 정교한 논리적 담론으로 보았지만, 다른 일부는 궤변에 가깝다고 비판하기도 했다.[5]

그는 여러 편의 짧은 논문(論|룬zho, 담론 또는 대화)을 남겼으며, 각 편은 대략 300자 정도로 이루어져 있다.[6] 주요 저작으로는 다음이 있다.


  • "사물을 가리킴에 대하여"(指物論|지우 룬zho): 지칭과 지시 대상, 즉 명칭과 그 대상 사이의 관계를 다룬다.
  • "변화의 이해에 대하여"[7](通變論|퉁볜 룬zho)
  • "경도와 백색에 대하여"[7](堅白論|젠바이 룬zho): 단단하고 하얀 돌의 예시를 통해 속성의 독립성을 논증한다.
  • "이름과 실체에 대하여"[7](名實論|밍스 룬zho)
  • "자취의 창고"(跡府|지푸zho)

3. 1. 백마비마설(白馬非馬說)

(내용 없음)

3. 2. 견백론(堅白論)

'견백론'(堅白論|Jiānbái Lùn중국어)은 공손룡이 단단하고 하얀 돌의 예시를 바탕으로 집필한 논문이다.[7] 이 주장은 단단하고 하얀 돌이 있을 때, 우리의 감각 경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논의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돌을 손으로 만질 때는 그것이 단단하다는 촉각적 정보만을 얻을 수 있으며, 하얗다는 시각적 정보는 알 수 없다. 반대로 눈으로 볼 때는 돌이 하얗다는 것만 인지할 수 있고, 그것이 얼마나 단단한지는 알 수 없다. 공손룡은 이를 통해 '단단함'(堅)이라는 속성과 '하얌'(白)이라는 속성은 서로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동시에 인식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감각 경험의 한계를 지적하고, 사물의 속성을 나타내는 개념들이 서로 독립적임을 강조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3. 3. 지물론(指物論)

지물론(指物論|지물 룬zho)은 공손룡이 저술한 짧은 논문 중 하나이다.[6] 이 글은 '지칭(사물을 가리킴)'과 '실체(사물 자체)', 즉 명칭(이름)과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논의를 다룬다. 공손룡은 이 글에서 언어의미와 지시 기능에 대해 탐구하며, 때로는 수수께끼처럼 느껴질 수 있는 독특한 철학적 고찰을 제시한다.

4. 평가 및 영향

공손룡의 명실(名實)에 대한 연구는 명가(名家) 학파 내에서 중요한 논의를 촉발했으며, 그의 사상은 사회 질서 유지와도 연관 지어 해석되기도 한다.[4] 그러나 그의 논증 방식에 대해서는 후대에 이르러 진지한 논리적 탐구라는 긍정적 평가와 단순한 궤변이라는 비판적 시각이 공존하고 있다.[5]

4. 1. 현대적 재해석

쑨전빈 교수는 공손룡의 명실(名實)에 대한 연구를 명가(名家) 학파 내에서 가장 "심오하고 체계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공손룡은 당시 통치자들의 관심을 받았으며, 그의 연구는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문제와도 연관성을 지닌다.[4] 한편, 펑유란이나 채드 한센과 같은 학자들은 공손룡의 사상에 대해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했다.

공손룡의 연구는 후대에 이르러 다양한 시각에서 평가받고 있다. 일부 학자들은 그의 주장을 진지한 논리적 탐구로 간주하는 반면, 다른 이들은 단순한 궤변으로 치부하기도 한다. 또한, 이 두 가지 측면이 혼재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존재한다.[5]

4. 2. 비판적 시각

공손룡의 연구는 어떤 이들에게는 진지한 논리적 담론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다른 이들에게는 궤변의 작품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이 둘의 조합으로 평가받는다.[5]

5. 등장 문헌

공손룡의 사상과 행적은 그의 핵심 저작으로 알려진 『공손룡자』 외에도 다양한 고대 문헌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 『공손룡자』: 「적부」 편에는 공자의 후손 공천과의 만남과 "백마비마" 논변에 대한 일화가 실려 있다. 공손룡은 초공왕과 공자의 고사, 윤문의 설화를 들어 공천의 이해를 바로잡으려 했다. (상세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 열자』: 「중니」 편에는 도가 사상가 위모가 공손룡의 학설을 옹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은경순 석문에 따르면 공손룡의 는 '자병'(子秉)이었다. (상세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 『장자』: 「추수」, 「서무귀」, 「천하」 등 여러 편에서 공손룡을 언급한다. 위모와의 대화, 혜시와의 대화 속 네 학파 중 하나('병')로 지목되는 내용, 변자의 대표 인물로 거론되는 내용 등이 있다.[11] (상세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 회남자』: 「제속훈」, 「도응훈」, 「전언훈」(詮言訓) 등에서 그의 학설이나 일화("목소리가 크다"는 제자 이야기 등)가 소개된다.[12][13] (상세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 여씨춘추』: 「유시람 청언」, 「심응람 심응」, 「심응람 음사」, 「심응람 응언」 등에서 연나라 소왕이나 나라 혜문왕에게 '언병'(偃兵, 전쟁을 멈춤)이나 '겸애'를 설파한 기록, 평원군에게 조언한 내용, 공천과 '장삼아' 등에 대해 토론한 내용 등이 실려 있다.[14][15] 고유 주석에서는 그를 나라 사람으로 기록했다.[15] (상세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 사기』: 「맹자순경열전」에는 조나라에서 "견백동이변"을 설파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평원군우경열전」에는 평원군에게 진언하고 추연에게 비판받아 조나라를 떠난 이야기가 담겨 있다. 『사기집해』에 인용된 『별록』에는 추연의 비판 내용이 더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상세 내용은 아래 문단 참고)
  • 전국책』: 「조책」에는 『사기』 「평원군우경열전」과 유사하게 평원군에게 진언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 『공총자』: 「공손룡」 편에서 그에 대해 다루고 있다.
  • 염철론』: 「잠석」 편에 공손룡의 발언이 인용되나, 공자의 제자인 다른 공손룡의 발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6]
  • 법언』: 「오자」 편에 "공손룡은 궤변을 늘어놓았다..."(公孫龍詭辭數萬以為法...)라는 언급이 있다.
  • 논형』: 「안서」 편에 "공손룡은 견백론을 지었다..."(公孫龍著堅白之論...)라는 언급이 있다.
  • 중론』: 「고위」 편에서 언급된다.
  • 문심조룡』: 「제자」 편에서 언급된다.
  • 기타 실전된 문헌의 인용: 『예문류취』 권66 등에 인용된 『장자』 실문(佚文), 『태평어람』 권390에 인용된 『설원』 실문, 『신서』 「잡사 2」 등에는 "양군출렵"(兩君出獵) 설화가 실려 있다.[17] 또한 『초학기』 권7에 인용된 『칠략』[18], 『백공육첩』 권9에 인용된 『신론』 등에는 아설과 유사한 출관 설화가 전해진다.

5. 1. 『공손룡자』

『공손룡자』는 춘추전국시대 제자백가명가를 대표하는 사상가 공손룡의 저작으로 알려진 문헌이다. 쑨전빈 교수는 공손룡의 명칭과 실체(名實)에 대한 연구를 명가 학파 내에서 가장 "심오하고 체계적인" 것으로 높이 평가한다. 공손룡은 통치자들의 주목을 받았으며, 그의 사상은 사회 질서 유지와도 연관성을 지닌다.[4] 그러나 펑유란이나 채드 한센 등 일부 학자들은 다른 해석을 제시하기도 한다.

『공손룡자』는 여러 편의 짧은 논문(論|lùn중국어, 담론 또는 대화)으로 구성된 것으로 보이며, 각 논문은 약 300자 정도의 분량이다.[6] 이 책에 담긴 공손룡의 논변은 어떤 이들에게는 진지한 논리적 탐구로, 다른 이들에게는 궤변으로, 또 어떤 이들에게는 이 두 가지 측면이 혼재된 것으로 평가받는다.[5]

현재 전해지는 『공손룡자』에는 다음과 같은 주요 논변들이 포함되어 있거나 포함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지물론 (指物論): 指物論|Zhǐwù Lùn중국어. '사물을 가리킴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사물을 지칭하는 명칭(名)과 그 명칭이 가리키는 실제 대상(實) 사이의 관계를 탐구하는 수수께끼 같은 논의이다.
  • 견백론 (堅白論): 堅白論|Jiānbái Lùn중국어. '단단함과 희고 흼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단단하면서 동시에 흰 돌을 예로 들어, '단단함'이라는 속성과 '흼'이라는 속성이 어떻게 공존하는지, 그리고 우리가 이를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대해 논한다.[7]
  • 백마비마론 (白馬非馬論): '흰 말은 말이 아니다'라는 명제로 가장 널리 알려진 논변이다. 이는 단순히 궤변적인 주장이 아니라, '흰 말'이라는 구체적인 개념과 '말'이라는 일반적인 개념의 차이를 분석하며 명칭과 실체의 관계를 엄밀하게 따지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공손룡자』 적부 편에서 공자의 후손인 공천이 이 논변에 대해 납득할 수 없다고 말하는 내용이 나온다.
  • 명실론 (名實論): 名實論|Míngshí Lùn중국어. '명칭과 실체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명칭과 그것이 가리키는 실체 사이의 관계를 규명하려는 논의이다.[7]
  • 통변론 (通變論): 通變論|Tōngbiàn Lùn중국어. '변화의 이해에 대하여'라는 의미로, 사물의 변화와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7]
  • 적부 (跡府): 跡府|Jifǔ중국어. '자취의 창고'라는 의미로, 공손룡의 행적이나 일화들을 모아 놓은 부분으로 추정된다. 현존하는 편에는 공자의 후손인 공천이 공손룡의 문하생이 되려 했으나 "백마비마" 논변을 납득하지 못하자, 공손룡이 초나라 초공왕과 공자의 "초궁초득" 고사 및 윤문의 일화를 들어 공천의 잘못된 이해를 지적하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5. 2. 기타 문헌

여씨춘추』의 여러 편에는 공손룡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유시람 청언」과 「심응람 응언」에는 연나라 소왕에게 '언병'(偃兵, 전쟁을 멈춤)을 설파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심응람 심응」에 따르면, 이후 나라 평원군의 식객이 되어 혜문왕에게 '언병'과 '겸애'를 설파했는데, 이는 묵가 사상의 특징으로 여겨진다. 「심응람 음사」에는 조나라가 위나라를 진나라로부터 지킨 일로 진나라가 항의하자, 평원군에게 이를 물리칠 방법을 조언했다는 내용과, '장삼아' 혹은 '장삼이'라는 학설을 두고 공천과 토론했다는 내용이 있다.[14] 또한 「심응람 응언」의 고유 주석에 따르면 공손룡은 나라 사람이라고 한다.[15]

한비자』 외저설 좌상편에는 아설이라는 인물이 백마를 타고 관문을 지나려 할 때, "백마비마설"을 이용해 말 통행세를 내지 않으려 했으나 결국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다른 기록(『초학기』 권7 인용 『칠략』[18], 『백공육첩』 권9 인용 『신론』 등)에서는 공손룡 자신도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전해진다.

사기』 「평원군우경열전」에 따르면, 음양가추연이 조나라에 와서 평원군 앞에서 공손룡의 "백마비마설" 등을 쓸모없는 이론이라 비판하고 '지도(至道)'를 설파하자, 공손룡은 평원군의 신임을 잃고 조나라를 떠났다고 한다.[10] 이후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이 열전에는 평원군에게 진언하는 모습도 기록되어 있다. 『사기집해』에 인용된 『별록』에는 추연의 비판 내용이 더 자세히 실려 있다. 또한 『사기』 「맹자순경열전」에는 조나라에서 "견백동이변"(堅白同異辯)을 설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열자』 「중니」편에서는 도가 사상가 위모가 "백마비마설"을 포함한 공손룡의 여러 학설을 옹호하는 내용이 나온다. 은경순의 석문에 따르면 공손룡의 는 '자병'(子秉)이었다고 한다.

『장자』에서도 공손룡에 대한 언급이 여러 차례 등장한다.

  • 「추수」편에서는 공손룡이 위모에게 장주의 사상에 대해 가르침을 청하지만, 위모는 "우물 안 개구리" 비유를 들며 그의 편협함을 지적하고 가르침을 거절하는 장면이 묘사된다.[11]
  • 「서무귀」편의 성현영 주석에 따르면, 장주와 혜시의 대화에 등장하는 네 학파("···병") 중 '병'(秉)은 공손룡의 를 가리키며, 그의 학파를 뜻한다고 한다.[11]
  • 「천하」편에서는 변자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으로 거론된다.[11]


회남자』에서도 그의 학설이 언급된다.

  • 「제속훈」에서는 그의 학설이 언급되며, 허신의 주석에 간략한 해설이 덧붙여져 있다.[12]
  • 「도응훈」에서는 "목소리가 크다"와 같이 한 가지 재능만 가진 인물도 제자로 받아들였다는 일화가 소개된다.[13]
  • 「전언훈」(詮言訓)에도 언급이 있다.


전국책』 「조책」에도 『사기』 「평원군우경열전」과 유사하게 평원군에게 진언하는 내용이 실려 있다.

『공총자』 「공손룡」편에서도 그에 대해 다루고 있다.

염철론』 「잠석」편에는 공손룡의 발언이 인용되어 있다. 다만, 같은 편에 '자석'(子石)이라는 이름도 보여, 공자의 제자인 공손룡의 발언일 가능성도 제기된다.[16]

법언』 「오자」편에는 "공손룡은 궤변을 늘어놓았다..."(公孫龍詭辭數萬以為法...)라는 언급이 있다.

논형』 「안서」편에는 "공손룡은 견백론을 지었다..."(公孫龍著堅白之論...)라는 언급이 있다.

중론』 「고위」편에서도 언급된다.

문심조룡』 「제자」편에서도 언급된다.

『예문류취』 권66 등에 인용된 『장자』 실문(佚文), 『태평어람』 권390에 인용된 『설원』 실문, 『신서』 「잡사 2」 등에는 "양군출렵"(兩君出獵) 설화가 실려 있다.[17]

참조

[1] Encyclopedia Gongsun Long Encyclopedia of China
[2] 서적 Liu 2004, p. 336
[3] 서적 McGreal 1995, p. 31
[4] 서적 Zhenbin Sun 2015. p24 Language, Discourse, and Praxis in Ancient China
[5] 학술지 Humor in Ancient Chinese Philosophy University of Hawaiʻi Press
[6] 웹사이트 Pointing and Things school-names/pointin[...]
[7] 학술지 Controversy over Language: Towards Pre-Qin Semiotics http://homepage.ntu.[...] Tamkang University
[8] 서적 概説 中国思想史 ミネルヴァ書房
[9] 웹사이트 『史記』平原君虞卿列傳 http://ctext.org/shi[...]
[10] 웹사이트 『史記』平原君虞卿列傳 http://ctext.org/shi[...]
[11] 서적 荘子 全訳注 下 講談社〈講談社学術文庫〉
[12] 웹사이트 淮南鴻烈解二 第162頁 (圖書館)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s://ctext.org/li[...] 2021-02-15
[13] 서적 淮南子 中 明治書院〈新釈漢文大系 55〉
[14] 서적 呂氏春秋 明治書院〈新編漢文選〉
[15] 웹사이트 呂氏春秋四 第73頁 (圖書館) - 中國哲學書電子化計劃 https://ctext.org/li[...] 2021-02-13
[16] 서적 塩鉄論 漢代の経済論争 平凡社東洋文庫
[17] 학술지 雄略紀5年「葛城山の猟」の出典 https://hdl.handle.n[...]
[18] 위키문헌 初學記/卷第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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