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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 (진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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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백기는 중국 전국 시대 진나라의 장군으로,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발휘하여 여러 전투에서 승리하며 영토 확장에 기여했다. 그는 이궐 전투, 영(초) 점령, 화양 전투, 장평 전투 등 주요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포로 40만 명 이상을 생매장한 잔혹함으로 인해 비판을 받았다. 말년에는 권력 다툼에 휘말려 자결했으며, 후세에는 군사적 능력과 함께 잔혹함의 상징으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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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 (진나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백기 (명나라 그림)
존칭무안군
이름백기
로마자 표기Bai Qi
출생기원전 332년경
사망기원전 257년
출생지미현
사망지두우
별명인도 (人屠)
별명 (번역)인간 도살자
다른 이름공손 기 (公孫起)
군사 경력
소속진나라
복무 기간기원전 294년 ~ 기원전 257년
최종 계급상장군
주요 참전 전투/전쟁이궐 전투
장평 대전

2. 생애

백기는 소양왕 시대 진나라의 장군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며 진나라의 영토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주요 활동은 다음과 같다.

연도 (기원전)주요 활동 및 전투비고
294년좌서장에 임명되어 한의 신성을 공격했다.
293년좌경으로 진급하여 이궐 전투에서 한나라와 위나라 연합군을 격파했다.24만 명 참수, 위나라 장수 공손희 사로잡음, 5개 성 함락.
292년대량조에 임명되어 위나라를 공격하여 61개 성을 함락시켰다.
278년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인 을 함락시켰다(언·영 전투).이 공으로 무안군 칭호를 받음.
273년위나라의 화양을 공격하여 한나라·위나라·조나라 연합군을 격파했다(화양 전투).13만 명 참수, 조나라 장수 가언의 병사 2만 명 황하에 수장.
264년한나라의 형성을 공격하여 5개 성을 함락시키고 5만 명을 참수했다(형성 전투).
260년장평 전투에서 조괄이 이끄는 조나라 군대를 대파했다.40만 명이 넘는 조나라 포로를 생매장했다.[25][26]



장평 전투 이후, 백기는 조나라 수도 한단 공격을 주장했으나 재상 범저의 견제로 무산되었다. 이후 소양왕이 다시 한단 공격을 명했을 때는 전황이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병을 핑계로 출전을 거부했다. 기원전 259년 왕릉과 기원전 258년 왕흘이 이끄는 진나라 군대가 한단 공격에 실패하자, 백기는 소양왕의 거듭된 출전 명령에도 응하지 않았다. 이는 소양왕의 분노를 샀고, 결국 기원전 257년 왕명을 거역했다는 죄목으로 사사되었다. 자결 직전, 백기는 장평에서의 포로 학살을 언급하며 자신의 죽음이 마땅하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진나라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사당을 세워 제사 지냈다.

2. 1. 출신

백기는 미읍(郿邑) 출신으로 용병(用兵)에 능하였다.[28]

그의 정확한 출신에 대해서는 여러 기록이 존재한다. 《신당서》 재상세계표에 따르면, 그는 진 목공(穆公) 시대의 장군 백을병의 후손이다.[29] 또한 《신당서》 권75 하에는 백을병이 송나라 출신의 진나라 관료였던 간숙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5]

한편 당나라(唐) 시대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자신의 저서 《고공현령백부군사장(故鞏縣令白府君事狀)》에서 다른 설명을 제시한다. 백거이에 따르면 백기는 초나라(楚) 평왕의 손자이자 초 혜왕 시대에 반란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자살한 공족 백공 승의 후손이며, 미성 씨족의 백씨 가문 출신이라는 것이다.[6][7] 백공 승의 아들이 진나라로 망명하여 대대로 장수가 되었고, 이로부터 백씨 성이 유래했다고 전한다.[30]

2. 2. 초기 활약과 이궐 전투

기원전 294년(진 소양왕 13년), 백기는 좌서장에 임명되어 한나라의 신성을 공격했다.[31]

기원전 293년(소양왕 14년), 백기는 좌경으로 진급하여 소양왕의 외삼촌인 위염의 추천으로 상수(向壽)를 대신하여[32] 한나라위나라의 연합군을 공격했다. 이궐(현재 허난성 뤄양 동남쪽 룽먼)에서 벌어진 이궐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여 24만 명의 목을 베거나 학살하고,[33][8] 위나라 장수 공손희를 사로잡았으며 5개의 성을 함락시켰다.[33] 이 공로로 백기는 국위로 승진하였고, 이후 황하를 건너 한나라의 안읍 동쪽 지역을 점령하여 간하에 이르렀다.

이궐 전투 당시의 자세한 상황은 기록이 부족하지만, 《전국책》에 따르면 당시 한나라와 위나라는 서로 눈치를 보며 적극적으로 싸우려 하지 않았다. 백기는 이러한 상황을 이용하여 군대를 나누어 거짓으로 한나라 군대를 공격하는 척하다가, 갑자기 위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격파했다. 위나라 군대가 무너지자 한나라 군대도 스스로 붕괴하였고, 백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북쪽으로 달아나는 적군을 추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34] 또한 《전국책》에서는 이때 백기에게 패한 위나라 장수의 이름을 서무라고 기록했으며,[35] 이궐 전투 이후 진나라 군대가 주나라까지 공격하자 주나라 왕이 직접 위나라로 가서 구원을 요청해야 했다고 전한다.[36]

기원전 292년(소양왕 15년), 백기는 대량조로 승진했다. 같은 해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61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2. 3. 위나라 정벌과 원성 점령

기원전 292년 (소양왕 15년), 백기는 좌서장에서 대량조(大良造)로 승진했으며, 위나라를 공격하여 크고 작은 61개 성을 빼앗았다. 기원전 291년(소양왕 16년)에는 객경(客卿) 사마조(司馬錯)와 함께 위나라의 원성(垣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다만, 《사기》 백기왕전열전의 기록은 다른 기록과 일부 차이를 보인다. 《사기》 진본기에서는 기원전 292년(소양왕 15년)에 백기가 위나라의 원(垣)을 빼앗았다가 다시 돌려주었다고 기록했으며,[37] 기원전 289년(소왕 7년)에 진나라가 위나라를 공격하여 61개 성을 빼앗았다고 하였다.[38]

2. 4. 초나라 정벌과 영성 함락

기원전 279년(소양왕 28), 백기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鄢)과 등(鄧) 지역의 5개 성을 빼앗고, 죄인들을 사면하여 이곳으로 이주시켰다. 수경주에 따르면, 이때 백기는 서산(西山)의 장곡(長谷)에서 물을 끌어와 초나라 언성의 동북쪽 모서리를 무너뜨리는 수공(水攻)을 사용했다. 이 공격으로 수십만 명의 백성이 물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고, 그 자리에 큰 연못이 생겼다고 전해진다. 당시 성 동쪽에는 시체가 썩는 냄새가 진동하여 이 연못을 "취지(臭池)"라고 부르게 되었다.[39]

기원전 278년(소양왕 29), 백기는 다시 초나라를 공격하여 수도인 을 함락시키고, 초나라 왕실의 조상 묘역이 있는 이릉을 불태웠다. 이후 동쪽으로 진격하여 경릉(竟陵)에 이르렀다. 수도를 빼앗긴 초 경양왕은 영을 버리고 동쪽의 진(陳)으로 도읍을 옮겼다. 진나라는 점령한 영 지역에 남군을 설치했다.[33]

이듬해인 기원전 277년(소양왕 30), 백기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무안군이라는 작위를 받았다.[33]

다만, 영성 함락 이후의 정벌 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사기 백기왕전열전에는 백기가 초나라의 무군(巫郡)과 검중군(黔中郡)을 공격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기 진본기에서는 촉군 태수였던 약(若)이 무군과 강남(江南)을 점령하고 검중군을 설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2. 5. 삼진(三晉)과의 전쟁

기원전 294년 (소양왕 13년), 백기는 좌서장에 임명되어 한나라의 신성(新城)을 공격했다. 기원전 293년 (소양왕 14년)에는 좌경으로 진급하여 한나라와 위나라의 연합군을 상대로 이궐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는 현재 허난성 뤄양 동남쪽 룽먼(龍門) 근처에서 벌어졌으며, 백기는 총 24만 명을 참수하고 위나라 장수 공손희(公孫喜)를 사로잡았으며 5개 성을 함락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8] 이듬해인 기원전 292년 (소양왕 15년)에는 대량조에 임명되어 위나라를 다시 공격하여 크고 작은 61개 성을 함락시켰다.

기원전 276년 (소양왕 31년), 백기는 위나라를 공격하여 2개 성을 빼앗았다. 기원전 273년 (소양왕 34년)에는 다시 위나라를 공격하여 화양(華陽, 현재 정저우 남쪽)을 점령하고 위나라 장수 망묘(芒卯)를 달아나게 했다. 이 화양 전투에서 백기는 위나라, 조나라, 한나라 삼진(三晉)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그 장수들을 포로로 잡았으며 총 13만 명의 목을 베었다.[40][10] 또한 조나라 장수 가언(賈偃)과 싸워 그 병졸 2만 명을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40][10]

기원전 264년 (소양왕 43년), 백기는 한나라의 형성(陘城, 현재 산서성 곡옥현)을 공격하여 5개 성을 함락시키고 5만 명의 목을 베었다.[11] 기원전 263년 (소양왕 44년)에는 한나라의 남양(南陽) 태행산(太行山) 지역을 공격하여 한나라 수도와 상당 지역 간의 교통로를 차단했다.

2. 6. 조나라 정벌과 장평대전

기원전 262년, 진나라의 공격을 받던 한나라상당 지역은 결국 조나라에 투항하기로 결정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261년, 조나라는 명장 염파장평에 파견하여 진나라 군대와 대치하게 했다.[42] 기원전 260년 4월, 진나라 장수 왕흘이 상당을 점령하자 그곳 주민들은 조나라로 피난했다.

진나라 군대는 공세를 강화하여 6월에는 조나라 군영 두 곳을 함락시키고 교위 네 명을 사로잡았으며, 7월에는 다시 조나라 보루를 공격하여 교위 둘을 추가로 사로잡았다. 그러나 조나라 총사령관 염파는 섣불리 싸우려 하지 않고, 보루를 견고히 쌓으며 방어를 강화하는 지구전 전략을 고수했다.[43]

상황이 장기전으로 흐르자, 진나라 측에서는 "진나라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마복군 조사의 아들인 조괄이 장수가 되는 것이다"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 소문을 믿은 조 효성왕은 결국 염파를 해임하고, 실전 경험이 부족한 조괄을 새로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44] 진나라는 조나라의 지휘관이 조괄로 교체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하자, 비밀리에 백기를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하고 왕흘을 부장으로 삼았다. 동시에 군대 내에 백기가 상장군이 되었다는 사실을 누설하는 자는 참수하겠다는 엄격한 함구령을 내렸다.

전장에 도착한 조괄은 즉시 군대를 출동시켜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다. 백기는 의도적으로 패배하여 달아나는 척하며 조나라 군대를 유인했다. 조나라 군대는 진나라의 보루까지 추격했지만, 견고한 방어선을 뚫지 못했다. 그 사이 백기는 기병 2만 5천 명을 동원하여 조나라 군대의 퇴로를 차단하고, 다른 기병 5천 명으로 조나라 군대의 보루 사이를 끊어 군대를 둘로 분열시키고 보급로를 완전히 차단했다. 전세가 불리해진 조나라 군대는 보루를 쌓고 수비하며 구원병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진 소양왕은 조나라의 보급로가 끊겼다는 보고를 받고 직접 하내 지역까지 와서 백성들에게 작위를 한 등급씩 올려주고, 15세 이상의 남자를 모두 징집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의 구원병과 보급로를 철저히 차단했다.

결국 기원전 260년 9월, 46일 동안 포위된 조나라 군대는 극심한 굶주림에 시달려 서로를 죽여 잡아먹는 참혹한 상황에 이르렀다. 탈출을 위해 군대를 넷으로 나누어 4~5차례 진나라 보루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조괄이 직접 정예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나섰으나, 진나라 군사가 쏜 화살에 맞아 전사했다. 총사령관을 잃은 조나라 군대는 결국 진나라에 항복했다.[45] 이 전투가 바로 장평 대전이다.

장평 대전에서 승리한 백기는 항복한 조나라 병사들의 수가 너무 많아 관리하기 어렵고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어린 병사 240명을 제외한 40만 명이 넘는 포로들을 모두 생매장하는 잔혹한 결정을 내렸다.[25][26][16] 백기는 이 기세를 몰아 조나라를 완전히 멸망시키려 했으나, 당시 진나라 재상이었던 범저는 백기의 공적이 지나치게 커져 자신의 지위를 위협할 것을 우려했다. 범저는 진나라 군대가 지쳤으니 휴식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진 소양왕을 설득했고, 결국 진나라는 조나라의 공격을 중단하고 영토 일부를 받는 조건으로 화의를 맺었다.[17] 백기는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공격을 중단했으며, 진나라로 돌아가는 길에 병을 얻었다.

2. 7. 포로 학살과 몰락

장평대전에서 패하여 백기에게 항복한 조나라 군사는 40만 명에 달했다. 백기는 이들을 살려두면 훗날 반란의 위험이 있다고 판단하여, 거짓말로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였다. 이때 나이가 어린 병사 240명만을 살려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이 학살로 장평대전에서 죽은 조나라 군사는 총 45만 명에 이르렀고, 조나라 전체가 큰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1995년, 중국 산서성 고평시(高平市) 영록촌(永祿村)에서는 장평대전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적이 발견되었다. 이곳에서는 사람 뼈가 집단으로 매장된 구덩이 10여 개가 확인되었는데, 각 구덩이에는 20세에서 45세 사이 남성 약 130명의 유골이 있었다. 발견된 유골 중에는 넓적다리뼈에 화살이 깊게 박힌 것, 머리뼈가 둔기에 맞아 함몰된 것, 목이 잘린 것, 칼자국이 남은 것 등 잔혹한 학살의 증거들이 발견되었다.[46]

장평대전에서 대승을 거둔 백기는 전쟁으로 진나라의 국력이 소모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세를 몰아 조나라를 계속 공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원전 259년(소양왕 48년), 진나라는 실제로 조나라를 공격하여 피뢰(皮牢), 태원(太原), 상당(上黨) 등 여러 지역을 점령했다. 위기감을 느낀 한나라와 조나라는 소대(蘇代)에게 많은 예물을 주어 진나라 재상 범수(范睢)를 설득하도록 했다. 소대는 범수에게 "만약 진나라가 조나라를 멸망시키면 백기의 공이 커져 삼공의 지위에 오를 것이고, 이는 범수의 입지를 위협할 것"이라고 말하며, 조나라로부터 땅을 받고 화친하여 백기가 더 이상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 말에 넘어간 범수는 소양왕에게 진나라 군대가 지쳤으니 한나라와 조나라로부터 땅을 받고 군대를 쉬게 하자고 건의했다. 소양왕이 이를 받아들여 정월에 백기와 군대를 철수시켰고, 이 일로 백기는 범수와 사이가 나빠졌다.

얼마 후, 군대를 재정비한 소양왕은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백기는 이를 반대했다. 소양왕이 이전에는 국력이 피폐했을 때도 전쟁을 주장하더니 왜 지금은 반대하냐고 묻자, 백기는 장평대전 이후 큰 고난을 겪은 조나라 군신과 백성들의 단결력이 오히려 강해졌고, 연나라, 위나라, 제나라, 초나라 등 다른 제후국들도 조나라를 도울 가능성이 높아 지금 조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어렵다고 답했다.

기원전 258년 9월, 소양왕은 결국 오대부(五大夫) 왕릉(王陵)에게 조나라 수도 한단을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이때 백기는 병을 앓고 있어 참전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기원전 258년 정월까지 왕릉은 한단을 함락시키지 못했고, 진나라는 증원군을 보냈으나 왕릉은 교위 5명을 잃는 등 피해만 입고 성과를 내지 못했다. 이때 백기의 병이 낫자 소양왕은 왕릉 대신 백기를 장수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백기는 오랜 전쟁으로 진나라 역시 피해가 크며, 지금 조나라와 다른 제후국들이 연합하여 반격해 온다면 진나라 군대가 반드시 패할 것이라며 재차 공격을 반대했다. 소양왕이 듣지 않자 범수를 보내 출전을 설득했지만, 백기는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

당시 범수가 백기를 질책하며 과거 이궐 전투, 언영 전투, 장평대전에서의 승리를 언급하며 "이전의 전적이 신과 같은데 어찌 조나라를 이기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하자, 백기는 "과거의 승리는 초자연적인 힘이 아니라 상황 판단에 따라 승리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덕분"이라 반박했다. 그는 오히려 장평대전 직후 조나라를 멸망시킬 기회를 놓쳐 그들의 단결력을 키우고 다른 제후국들이 개입할 시간을 벌어준 것이 패착이었다고 주장하며 범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결국 진나라는 왕릉 대신 왕흘(王齕)을 장수로 삼아 8~9개월간 한단을 공격했지만 여전히 함락시키지 못했다. 그 사이 초나라의 춘신군과 위나라의 신릉군이 수십만 대군을 이끌고 진나라 군대를 공격했고, 진나라 군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소식을 들은 백기는 "진나라 왕께서 나의 계책을 듣지 않으시더니 지금 어찌 되었는가?"라고 말했다고 한다.[47] 이 말을 전해 들은 소양왕은 크게 분노하여 직접 백기를 찾아가 강제로 출전시키려 했으나, 백기는 "차라리 무거운 죄를 짓고 죽임을 당할지언정, 치욕스러운 패장이 될 수는 없다"며 끝까지 병을 핑계로 거절했다.[47] 이후 범수가 다시 한번 출전을 요청했지만 백기는 응하지 않았다.

기원전 257년, 소양왕은 마침내 백기를 파면하여 사오(士伍, 일반 병사)로 강등시키고 음밀(陰密)로 유배를 보냈다. 그러나 이때 백기는 병이 깊어 유배지로 떠나지 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범수가 "백기가 다른 나라로 망명하여 장수가 되면 진나라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고 소양왕에게 진언했다. 이 말을 들은 소양왕은 결국 두우(杜郵)에서 백기에게 자결을 명령했다.[19] 죽기 직전, 백기는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런 최후를 맞는가?"라고 탄식하다가, 이내 "아니다, 나는 본래 죽어 마땅하다. 장평 전투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속여서 모두 생매장했으니, 그것만으로도 죽을 죄를 지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0] 그의 죽음을 진나라 백성들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각지에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3. 평가

전한 시대의 역사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백기를 진나라의 대표적인 명장으로 평가했다. 그는 백기가 "적을 잘 헤아려 변화에 맞추어 무궁하고 기발한 계책을 내었으니 그 명성이 천하를 떨게 했다"고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응후 범저와의 갈등으로 인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점을 들어 왕전과 함께 "각자 단점이 있었다"고 지적하며 능력과 한계를 동시에 지닌 인물로 보았다.

사마천 외에도 여러 인물이 백기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했다. 소려(蘇厲)는 서주의 왕에게 진나라가 나라와 나라를 격파하고 나라 북부 영토를 빼앗은 것이 모두 백기의 공이라며, 그가 용병(用兵)에 능할 뿐 아니라 천명(天命)까지 지녔다고 말했다. 또한 소대는 백기가 진나라를 위해 70여 개의 성을 빼앗고 남쪽으로 언(鄢)·영(郢)·한중(漢中)을 평정했으며, 북쪽으로 조괄의 군대를 격파한 공적은 주공(周公)·소공(召公)·태공망(太公望)보다도 뛰어나다고 평가했다.

남조 시대의 문인 주흥사는 《천자문》에서 "기전파목(起翦頗牧) 용군최정(用軍最精)"이라 하여, 전국 시대에 백기가 왕전, 염파, 이목 등과 함께 군사를 가장 잘 부린 인물 중 하나로 꼽았다.

백기가 죄 없이 죽었다고 여겨졌기에,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겨 그의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3. 1. 긍정적 평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백기를 "적의 능력을 헤아려 계략을 바꾸고, 기묘한 계책을 무수히 냈다. 그의 위세는 천하를 진동시켰다"고 평가하며 그의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높이 샀다. 또한 열전 말미에서는 백기가 매우 유능한 장군이었음을 인정하면서도, 범저의 견제를 피하지 못한 점을 지적하며 왕전과 함께 능력과 결점을 동시에 지닌 인물로 평가했다.

훗날 조위의 장군 등애가 모함을 받아 죽기 전에 자신의 처지를 백기에 빗대어 한탄했다는 기록이 『삼국지』에 남아 있는데, 이는 백기가 뛰어난 능력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이유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로서 후대에까지 널리 인식되었음을 보여준다.

3. 2. 부정적 평가

사마천은 『사기』 열전 말미에 백기에 대해 "(매우 유능한 장군이었지만 측근인) 범저의 미움을 피할 수 없었다"고 기록하여, 왕전과 함께 뛰어난 인물이면서도 결점 역시 있었던 인물로 평가했다. 훗날 조위의 장군 등애가 참언을 듣고 살해되기 전에 자신을 백기에 비유하며 신변의 위기를 깨달았다는 기록이 『삼국지』에 있다.

4. 후세에 미친 영향

(내용 없음)

4. 1. 문화적 영향

백기는 때때로 중국 사찰이나 도교 사찰의 문신으로 이목과 함께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백기는 군사적 능력보다는 그의 잔혹함으로 더 강하게 기억되는 인물이다. 오늘날 고평 전투가 벌어졌던 고평(옛 장평) 지역에는 '백기육(白起肉)'이라는 이름의 전통 두부 요리가 전해진다.[21] 이는 백기의 잔혹성을 음식 이름에 빗댄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백기가 자신의 잔혹한 행위에 대한 업보를 받았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예를 들어, 동주열국지에는 당나라 시대에 등에 '백기'라는 글자가 문신처럼 새겨진 소가 벼락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다.

고평 전투의 격전지였던 고평 인근에서는 당시 학살된 병사들의 유골이 발견되었고, 지금도 계속 발견되고 있다. 당 현종은 이곳에서 수습된 유해들을 모아 그 위에 사당을 세우기도 했다.[22][23]

5. 기타

(내용 없음)

5. 1. 대중문화


  • 2012년 텔레비전 드라마 대진제국 2: 연맹에서는 孙霆|쑨팅중국어이 백기를 연기했으며, 2017년 속편 대진제국 3에서는 邢佳栋|싱자둥중국어이 연기했다.
  • 2015년 드라마 미월전에서는 曾虹畅|쩡훙창중국어이 성인 백기를 연기했다. 어린 시절은 杨砚铎|양옌둬중국어(9세 백기)와 裘慕遠|추무위안중국어(15세 백기)이 각각 연기했다.
  • 만화 킹덤에서는 이전 세대 "진나라 육대 장군"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일본식 이름인 "하쿠 키"(ハク キ일본어)로도 알려져 있다. 작품 내에서 백기는 당대 최고의 전술가 중 한 명이자 중국에서 가장 두려운 장군 중 한 명으로 묘사된다. 특히 악명 높은 장평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45만 명의 조나라 병사들을 처형하고 생매장한 인물로 그려진다.
  •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삼국지 11에서는 특별 캐릭터로 등장하는 32명의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이다. 게임 내에서 백기는 한신과 더불어 모든 캐릭터 중 가장 높은 군사 지휘 능력치를 가지고 있다.
  • 塚本靑史|츠카모토 세이시일본어가 쓴 소설 《백기》가 河出書房新社|카와데 쇼보 신샤일본어에서 1998년 출간되었다.
  • 王欣太|왕흔태중국어의 만화 달인전 - 구만리를 바람에 날리다 - (双葉社|후타바샤일본어, 2013년~)에도 등장한다.

참조

[1] 문서 Vol. 05 of ''Shiji'' indicated that Bai Qi died in the 12th month of the 50th year of the reign of [[King Zhaoxiang of Qin]]; this corresponds to 6 Jan to 3 Feb 257 BCE in the proleptic Julian calendar. In the modified ''Zhuanxu'' calendar used in this era, the 50th year of King Zhaoxiang's reign began on 07 November 258 BCE and ended on 26 October 257 BCE in the proleptic Julian calendar. However, Bai Qi's biography in vol. 73 of ''Shiji'' indicated that he died in the 11th month of the same year; this corresponds to 7 Dec 258 BCE to 5 Jan 257 BCE in the proleptic Julian calendar.
[2] 서적 Strategies of the Warring States
[3] 웹사이트 How many people had Bai Qi killed http://news.ifeng.co[...]
[4] 서적 Thousand-Character Classic
[5] 문서 《新唐书·卷七十五下·宰相世系表》记载西乞术、白乙丙为孟明視之子,而《史记·卷五·秦本纪》则记载西乞术、白乙丙是蹇叔之子,所以省略前段争议资料不用。
[6] 문서 《太原白氏家状二道·故巩县令白府君事状》:白氏芊姓,楚公族也。楚熊居太子建奔郑,建之子胜居于吴楚间,号白公,因氏焉。楚杀白公,其子奔秦,代为名将,乙丙已降是也。裔孙白起,有大功于秦,封武安君。后非其罪,赐死杜邮,秦人怜之,立祠庙于咸阳,至今存焉。及始皇思武安之功,封其子仲于太原,子孙因家焉,故今为太原人。
[7] 문서 《史记·卷六十六·伍子胥列传》:叶公闻白公为乱,率其国人攻白公。白公之徒败,亡走山中,自杀。
[8] 웹사이트 Bai Qi 白起 (www.chinaknowledge.de) http://www.chinaknow[...]
[9] 문서 Hawkes, 162
[10] 문서 史記·卷七十二·穰侯列傳
[11] 문서 史記·卷七十三·白起王翦列傳
[12] 서적 Modern Chinese History:春秋战国 https://books.google[...] liping guo 2024-05-01
[13] 서적 The Political History of the Spring and Autumn Period and the Warring States Period https://books.google[...] 2024-05-01
[14] 서적 Historical Records 史记: The First and Most Important Biographical General History Book in China https://books.google[...] Deeplogic 2024-05-01
[15] 서적 信陵君(英文版) https://books.google[...] 露露 2024-05-01
[16] 서적 The Grand Historian
[17] 웹사이트 Minister Fan Ju http://www.scopsr.go[...] 2018-12-24
[18] 서적 The Grand Historian
[19] 서적 The Grand Historian
[20] 웹사이트 An Exceptional Marshal and God of War - Bai Qi https://www.chinafet[...]
[21] 블로그 就是俺们这里的:高平烧豆腐 http://blog.sina.com[...]
[22] 웹사이트 长平古战场 2022-01-13
[23] 웹사이트 Battlefield of Changping http://www.sx.xinhua[...]
[24] 문서 『[[戦国策]]』「趙策」の巻十八趙一、巻二十趙三による。
[25] 문서 『史記』の捕虜の生き埋めに関する記述は誇大なものであると長年考えられてきたが、[[1995年]]5月の長平の古戦場における発掘調査でそれと思われる人骨が大量に出土し、多くの研究者を驚かせた。
[26] 문서 永禄第一尸骨坑の発掘レポートによれば発掘済第一坑の屍体数は130人程度、ほかに18坑を発見、調査中である http://www.shanximus[...]
[27] 문서 《전국책》 권18 조책1 〈진왕위공자타〉 ; 《전국책》 권20 조책3 〈평원군청풍기〉
[28] 문서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29] 문서 《신당서》 권75下 재상세계표5下
[30] 문서 《전당문》 권680 〈고공현령백부군사장〉
[31] 문서 《사기》 권5 진본기,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32] 문서 《사기》 권72 양후열전
[33] 문서 《사기》 권5 진본기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15 육국연표
[34] 문서 《전국책》 권33 중산책 〈소왕기식민선병〉
[35] 문서 《전국책》 권2 서주책 〈소려위주군〉
[36] 서적 전국책 권2 서주책 〈서무패어이궐〉
[37] 서적 사기 권5 진본기
[38] 서적 사기 권44 위세가
[39] 서적 수경주 권28
[40]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15 육국연표
[41] 서적 사기 권78 춘신군열전 ; 사기 권40 초세가
[42] 서적 사기 권15 육국연표 (사기 권43 조세가,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등에서는 염파가 장평에 파견된 시기를 기원전 260년이라 하였다.)
[43]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44] 서적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45] 서적 사기 권81 염파인상여열전 ; 사기 권15 육국연표
[46] 간행물 〈長平之戰遺址永祿1號屍骨坑發掘簡報〉 山西省考古研究所 1996
[47] 서적 전국책 권33 중산책 〈소왕기식민선병〉 ; 사기 권73 백기왕전열전
[48] 서적 사기 권130 태자공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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