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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소양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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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소양왕은 혜문왕의 서자로, 기원전 307년에 즉위하여 55년간 재위한 진나라의 군주이다. 그는 연나라 인질 생활을 거쳐 조 무령왕의 도움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외삼촌 위염의 지원을 받아 권력을 강화했다. 소양왕은 재위 기간 동안 위염, 백기 등을 등용하여 군사력을 강화하고, 초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등 진나라의 부강을 이끌었다. 그는 칭제를 시도하고, 동주를 멸망시키며 통일의 기반을 다졌지만, 만년에는 정책적 실수를 저질렀으며 백기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등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은 진나라가 전국 시대 말 군사 강국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증손자 영정의 중국 통일의 기반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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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소양왕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왕위 계승진나라의 왕
통치 기간기원전 307년 – 기원전 251년
이전진 무왕
섭정위염
이후진 효문왕
출생일기원전 325년
사망일기원전 251년 (73–74세)
영 (嬴)
이름직 (稷)
왕조진나라
아버지진 혜문왕
어머니선태후
배우자야양후
당태후
자녀태자 도
진 효문왕
시호소양왕 (昭襄王)
기타 정보
영직 (嬴稷)
아버지혜문왕
후임자효문왕
시호소양왕
재위 기간기원전 306년 ~ 기원전 251년
출생일기원전 325년
사망일기원전 251년
추가 정보
지양
이미지
완벽귀조를 다룬 석조 부조에서 [[인상여]]가 [[화씨벽]]을 들고 있는 모습과 [[무씨사당]] 석조 부조의 [[진 소양왕]]
인상여가 화씨벽을 다루는 모습과 무씨사당 석조 부조의 진 소양왕, 진석색에서 추출한 그림.

2. 생애

무왕에서 소양왕으로의 왕위 계승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소양왕은 재위 초기에 왕실 내부의 반발을 억누르고 왕권을 확립하는 데 힘을 기울여야 했다. 기원전 305년에는 서장(庶長) 장(壯)의 모반에 연루된 대신과 제후들을 모두 처형했고, 이때 혜문왕의 왕비인 혜문후도 목숨을 잃었으며, 무왕의 왕비인 도무왕후는 위나라로 돌아갔다.[7] 기원전 301년에는 형제인 촉후(蜀侯) 휘(煇)가 반란을 일으키자 사마착을 보내 이를 평정했다.[7]

소양왕은 아직 법적으로 성년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전통적으로 20세에 해당), 그의 어머니인 선태후섭정이 되었다. 선태후는 동생들인 위염과 미융(羋戎), 그리고 두 아들 공자 이(公子悝)와 공자 불(公子巿)의 지원을 받았으며, 이 네 명을 통틀어 "사귀(四貴)"라고 불렀다.

2. 1. 출생과 즉위 과정

혜문왕선태후 사이에서 서자로 태어났다. 기원전 307년 이복형 무왕이 갑작스럽게 죽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다.[7] 무왕은 힘겨루기를 좋아하여 역사(力士)인 맹설과 청동으로 된 큰 솥을 들다가 정강이뼈가 부러져 왕위에 오른 지 4년 만에 22살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7] 무왕에게는 아들이 없었고, 당시 연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이복동생 영직이 왕위를 이어야 한다는 얘기가 나왔다.[7]

영직은 당시 연나라에 있었지만, 나라 무령왕의 도움으로, 대군의 재상 조고(趙固)에 의해 연나라와 조나라를 거쳐서 진나라에 귀국할 수 있었다.[7] 진나라 신하들이 반대하는 가운데, 위염 등 신하들의 지원으로 이복형 무왕의 뒤를 이어 왕으로 즉위하였다.[7]

영기(嬴稷)는 기원전 325년에 혜문왕의 낮은 서열의 후궁 중 한 명인 미팔자(羋八子)에게서 태어났다. 영기는 ''서출'' 신분이었기에 왕위 계승에서 우선순위가 낮았고, 미성년자였기에 봉토를 받지 못했다. 당시 진나라는 능력주의 제도를 채택하여 왕자들조차 국가 봉사를 통해 스스로 토지를 획득해야 했다. 그는 어릴 때 정치적 인질로 연나라로 보내졌는데, 이는 주(周) 왕조 시대에 제후국들 사이에서 흔히 행해지던 외교 관행이었다.

기원전 307년, 영기의 이복 형인 무왕은 주 왕성에서 무력을 과시하기 위해 무거운 청동 솥을 들어 올리려다 정강이뼈가 부러져 예기치 않게 사망했다. 무왕은 젊은 나이에 자식 없이 죽었기에 진나라는 계승 위기에 놓였고, 여러 왕자들이 왕위를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영기는 여전히 연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일반적으로 왕위 계승 후보로 여겨지지 않았다. 그러나 조 무령왕은 이 상황을 이용하여 서쪽 이웃 국가의 국내 정치에 개입하기로 결정했다. 무령왕은 대군의 재상 조고에게 영기를 연나라에서 몰래 빼내 조나라 영토로 데려가도록 명령한 후, 그를 진나라로 돌려보내 왕위를 다투도록 지원했다. 더욱이 영기의 외삼촌 위염은 상당한 진나라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이었고, 조카의 정치적 반대자들을 대부분 제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로 인해 영기는 18세의 나이로 진 소양왕(秦昭襄王)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2. 2. 초기 통치와 왕권 강화

기원전 306년, 진 소양왕이 즉위한 첫 해, 우승상 감무의 조언을 받아들여 무수 지역을 한나라에 반환했다. 그러나 향수와 공손석은 이에 반대하며 감무를 험담했고, 감무는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 제나라로 망명했다.[1]

기원전 305년, 소양왕의 이복 형인 공자장(公子壯)과 공자옹(公子雍)은 쿠데타를 일으키려 했다. 이들은 1년 전 왕위 계승을 다투던 경쟁자였으며, 혜문후(고 무왕의 어머니)와 도무왕후(무왕의 아내, 위나라 공주)를 비롯하여 소양왕의 즉위를 반대하는 수십 명의 귀족 및 조정 대신들과 함께 했다. 그러나 이 반란은 위염에 의해 즉시 진압되었고, 위후를 제외한 모든 공모자들이 처형되었으며, 위후는 위나라로 추방되었다. 이 사건으로 반대 세력이 제거되면서 소양왕의 왕위는 굳건해졌다.[2] 같은 해, 소양왕은 성인식을 치르고 친정을 시작했다.[2]

소양왕 초기에는 촉리질, 감무, 향수, 向壽|향수중국어 등이 정무를 보았다.[3]

소양왕 원년(기원전 306년), 초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여 옹 지역을 포위하자, 한나라는 공중|zh|韩侈중국어을 보내 진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감무는 소양왕에게 한나라를 구원하여 초나라를 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조언했다. 이후 한나라는 장취|zh|張翠중국어를 진나라에 파견하여 위급함을 알렸고, 소양왕과 감무는 군사를 내어 한나라를 구원했다.[4]

감무는 제나라로 도망칠 때 소대를 만나 진나라로 복귀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소대는 소양왕에게 감무가 진나라의 지리를 잘 알고 있어 위험한 인물이라고 말하며, 상경의 벼슬을 내려 그를 맞이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그러나 감무는 소양왕의 제안을 거절하고 제나라에 머물렀으며, 결국 위나라에서 사망했다.[5]

2. 3. 주요 정책과 업적

기원전 288년, 제나라 민왕과 함께 각각 서제(西帝)와 동제(東帝)를 칭하기도 했다.[1] 소양왕은 점령 지역에 군(郡)·현(縣)을 설치하고 죄수들을 사면해 이주시키면서 본격적으로 영토 확장에 나섰다.[2] 기원전 286년에는 죄수들을 사면해 하동(河東)으로 이주시켰고 이듬해 9개의 현을 설치했다.[2]

소양왕은 범저를 등용하여 중앙집권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범저는 "옛날 하·은·서주 삼대가 멸망한 이유는 군주가 정치를 신하에게 모두 맡겼기 때문입니다."라고 주장하며, 소양왕에게 권력을 집중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에 소양왕은 선태후를 폐하고, 위염의 재상 직을 면했다. 또한 위염·경양군·고릉군·화양군 등을 진나라 국내인 함곡관 밖으로 추방했다. 범저는 재상이 되어 식읍으로 응(應)에 봉해져 응후(應侯)로 불렸다.

소양왕은 백기, 위염 등 유능한 인재를 등용해 군사력을 강화하고 영토를 확장했다.[1]

연도주요 사건
기원전 293년백기를 좌리로 승격시키고 한나라와 위나라를 쳐서 이궐 전투에서 24만 명을 베는 전과를 올리고 5개 성을 함락시켰다.[7]
기원전 292년위염이 병으로 재상을 사임, 객경 촉수를 재상으로 삼았다가 다음 해 파면하고 위염을 다시 재상으로 삼았다. 위염은 양 땅에 봉해져 양후(穣侯)라고 불렸다.
기원전 290년위나라를 공격, 위나라가 하동(河東) 땅, 사방 400리를 바치며 강화를 요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위염은 위나라의 하내를 공략하여 60여 개의 성을 함락시켰다.
기원전 289년사마착과 백기에게 명하여, 원(垣), 하옹(河雍), 결교(決橋)를 공격하여 이들을 점령했다.
기원전 283년위를 공격하여 위의 안정(安城)을 빼앗고, 대량으로 향했지만, 연과 조가 위를 지원했으므로 진군은 철수했다.
기원전 280년사마착에게 명하여 농서에서 군대를 출동시켜 촉으로 나가 초(楚)를 토벌했다(검중 전투). 백기에게 명하여 조를 토벌, 대(代)와 광랑성(光狼城)을 함락시켰다.
기원전 279년초나라의 언(鄢)과 등(鄧)을 점령하고 죄수들을 이주시켰다.[2]
기원전 278년초나라의 도성인 영(郢)을 점령해 그곳에 남군을 설치했다.[2]
기원전 277년초나라의 무군(巫郡)과 강남(江南)을 점령해 그곳에 검중군(黔中郡)을 설치했다.[2]
기원전 264년한나라를 공격해 9개의 성을 점령했다.[2]
기원전 262년한나라의 성 10개를 빼앗았다.[2]
기원전 259년조나라를 공격해 피뢰(皮牢)를 점령했고, 한나라를 공격해 태원(太原)을 평정하고 상당 지역을 모두 빼앗았다.[2]
기원전 257년장당(張唐)으로 하여금 위나라를 공격하게 해서 영신중(寧新中)을 점령해 그곳의 명칭을 안양(安陽)으로 고쳤고, 황하(黃河)에 처음으로 다리를 놓았다.[2]
기원전 256년장군 규(摎)를 보내 한나라의 양성(陽城)과 부서(負黍) 지역을 빼앗았고, 조나라를 공격해 20여 개의 현을 점령했다.[2]



초나라의 서쪽 영토 대부분을 빼앗은 소양왕은 뒤이어 위나라, 한나라, 조나라 정벌에 나섰다.[2] 주나라를 멸망시켰고,[1] 동쪽으로 영토를 크게 넓혀서 진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는 기초를 닦았다.[1]

3. 주변국과의 관계

진 소양왕 시대에 진나라는 주변국들과 잦은 전쟁을 벌이며 영토를 확장했다.

초나라와는 기원전 279년부터 전쟁을 벌여 언·영 전투에서 승리하고, 기원전 278년에는 수도 영을 함락시키는 등 큰 타격을 입혔다. 춘신군의 외교적 노력으로 일시적인 평화 관계를 맺기도 했다.[1]

한나라위나라는 진나라의 지속적인 공격으로 많은 영토를 빼앗기고 국력이 약화되었다. 기원전 293년 이궐 전투에서 대패한 이후, 진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를 상대로 꾸준히 영토를 확장했다. 다음 표는 주요 사건을 연도별로 정리한 것이다.

연도국가주요 사건 및 결과
기원전 293년한, 위이궐 전투 대패, 24만 명 사망[1]
기원전 292년 ~ 기원전 273년위, 한여러 도시 점령, 영토 할양[1]
기원전 264년 ~ 기원전 262년백기의 활약, 상당군 지역 분리[1]
기원전 256년, 기원전 254년한, 위장군 료(摎)의 활약, 위나라 복속[1]



조나라와는 기원전 282년부터 잦은 충돌이 있었고,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조나라 군대 40만을 생매장하는 대승을 거두어 조나라의 국력을 크게 쇠퇴시켰다.[1] 린상여의 활약으로 외교적 위기를 모면하기도 했다.[1]

제나라와는 맹상군을 둘러싼 갈등이 있었으나, 기원전 284년 5개국 연합군을 이끌고 제나라를 공격하여 큰 타격을 입혔다. 이후 제나라는 진나라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1]

기원전 256년, 소양왕은 서주를 멸망시키고 난왕을 폐위함으로써 879년간 존속했던 주나라를 멸망시켰다. 구정을 진나라로 가져와 왕권의 정통성을 확보하려 했다.[1]

3. 1. 초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279년, 소양왕은 백기에게 명하여 초나라를 공격했다(언·영 전투). 백기가 이끄는 진나라 군대는 초나라 내륙으로 진격했고, 적은 병력에도 불구하고 수공을 이용하여 을 점령했다. 그리고 죄수들을 사면하여 이 지역으로 이주시켰다.[1]

기원전 278년, 백기는 초나라의 수도 영을 점령하고, 초나라 선왕의 능묘가 있는 이릉을 불태운 후, 경릉까지 진격했다. 언·영 지역에는 남군이 설치되어 진나라의 영토가 되었다. 초나라의 경양왕은 진나라 군대의 공격을 피해 진으로 도망쳤다. 이 공로로 백기는 무안군에 봉해졌다.[1] 기원전 277년에는 촉군 태수 張若|장약중국어에게 명하여 초나라를 정벌하여 무군 및 강남을 점령하고, 진나라의 영토로 검중군으로 삼았다.[1]

남방의 강대국이었던 초나라는 진나라에게 많은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다.

기원전 276년, 소양왕은 백기에게 초나라에 이어 위나라를 정벌하도록 명했다. 백기는 위나라의 2개 성을 점령하는 등 위나라 정벌에서도 활약했다.[1]

기원전 275년, 위염에게도 위나라를 정벌하도록 명했고, 위나라의 수도 대량까지 육박하여 위나라 장수 폭연의 군대를 격파하여 도망하게 했다. 그 기세를 몰아, 이듬해 기원전 274년에는 객경 공손호양에게도 위나라를 정벌하도록 명하여 위나라의 권·채양·장사의 땅을 점령했다.[1]

기원전 273년, 위나라 장수 망묘의 군대를 격파하고, 13만 명의 수급을 거두었다(화양 전투). 전국 칠웅의 하나로 꼽히던 위나라는 크게 쇠퇴했다.[1]

같은 해, 진나라에 복종하지 않는 조나라를 백기에게 명하여 정벌했다. 백기는 조나라 장수 가언과 싸워, 그 병사 2만 명을 강에 수장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어서 소양왕은 정벌한 위나라를 신하로 삼고, 백기에게 명하여 본격적인 초나라 정벌에 나서려고 했다.[1]

진나라에 사신으로 온 초나라의 춘신군은 이를 듣고 소양왕에게 상소를 올렸다. 춘신군은 "지금 천하에는 진나라와 초나라보다 강한 나라는 없습니다. 왕께서 초나라를 정벌하려 하시나, 이는 마치 두 마리의 호랑이가 서로 싸우는 것과 같아, 모두 상처를 입게 되어 좋은 계책이라 할 수 없습니다. 또한 대왕께서는 천하의 땅을 영유하시고, 위력은 여기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위력을 보존하고, 인의의 길을 두텁게 하시면, 옛날의 삼황과 오패와 어깨를 나란히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오히려 초나라와 화친하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말했다.[1]

소양왕은 춘신군의 의견을 받아들여 출병을 중단하고 초나라와 화친했다. 그 후 초나라는 인질로서 태자 완(후의 고열왕)과 춘신군을 진나라에 보냈고, 진나라와 초나라 두 강대국 사이에는 잠시 동안 다툼이 없었다.[1]

3. 2. 한나라, 위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293년, 백기는 이궐 전투에서 한나라와 위나라 연합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다. 이 전투에서 연합군 24만 명이 사망하고, 연합군 총사령관 공손희가 처형되는 등 진나라가 크게 승리했다.[1]

이후 진나라는 지속적으로 한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했다.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연도국가주요 사건 및 결과
기원전 292년위나라위성, 원읍 점령[1]
기원전 291년한나라, 엽 점령[1]
기원전 290년위나라, 한나라위나라로부터 400리의 하동 지역, 한나라로부터 200리의 무수 지역 할양[1]
기원전 289년위나라61개 마을 점령[1]
기원전 288년-동쪽 다섯 국가의 연합 위협으로 일시 후퇴[1]
기원전 287년위나라신원, 곡양 점령[1]
기원전 286년위나라옛 수도 안읍 점령[1]
기원전 283년위나라조나라와 연합하여 안성 점령, 위나라 수도 대량 근처까지 진격[1]
기원전 276년 ~ 기원전 273년위나라여러 도시 점령, 많은 병력 살상. 위나라는 남양 할양하며 휴전 요청[1]
기원전 268년위나라회성 점령[1]
기원전 266년-위나라 출신 범저가 진나라 재상으로 등용, "원교근공(遠交近攻)" 전략 제시[1]
기원전 264년한나라백기가 형성 등 9개 성 점령, 5만 명 살상. 태항산 남부 경로 봉쇄[1]
기원전 262년한나라백기야왕 점령, 상당군 지역을 한나라 본토에서 분리[1]
기원전 256년한나라장군 료(摎)가 양성과 부서 점령, 4만 명 살상[1]
기원전 254년위나라장군 료(摎)가 오성 점령, 위나라 복속[1]



이러한 지속적인 정벌을 통해 진나라는 한나라와 위나라의 영토를 크게 잠식하고 국력을 약화시켰다.

3. 3. 조나라와의 전쟁

기원전 282년부터 기원전 280년까지 진나라는 조나라를 여러 차례 공격하여 석성(石城), (藺), 리시(離石), (祁), 광랑성(光狼城) 등의 도시를 점령하고 2만 명을 살해했다. 조나라는 인질을 보내고 점령된 도시를 돌려받는 대가로 땅을 할애하는 데 동의했다. 몐츠에서 열린 휴전 회담에서 소양왕은 조 혜문왕을 굴욕시키려 했지만, 린상여가 진왕을 해칠 기세로 위협하자 물러섰다.[1]

기원전 273년, 위나라와 조나라가 연합하여 한나라의 화양(華陽)을 공격했을 때, 진나라는 한나라를 지원하여 위나라 군사 13만 명을 격파하고 2만 명의 조나라 군사를 황하에 빠뜨려 죽였다. 기원전 269년, 조 혜문왕은 이전의 약속을 어기고 인질을 보내지 않고 땅도 할애하지 않았다. 이에 진나라는 조나라를 공격하여 알여(閼與)를 포위했지만, 조나라 장군 조사(趙奢)가 진나라 군대를 매복 공격하여 크게 격파하면서 포위는 풀렸다. 기원전 265년, 진나라는 다시 조나라를 공격하여 세 개의 도시를 점령했고, 조 혜문왕은 제나라의 지원을 얻기 위해 아들을 제나라에 보내야 했고, 결국 진나라 군대는 철수했다.[1]

기원전 260년, 진 소양왕은 왕흘에게 한나라를 공격하여 상당 땅을 점령하도록 했다. 그러나 상당 백성들은 진나라 대신 조나라에 항복했고, 조나라는 군사를 보내 장평에 주둔시켰다. 왕흘은 조군을 공격했지만, 조나라 장군 염파는 굳게 지키기만 할 뿐 응전하지 않았다.[1]

범저의 계략으로 조나라 효성왕은 염파를 해임하고 조괄을 장군으로 삼았다. 진나라는 이 소식을 듣고 비밀리에 백기를 상장군으로 삼고 왕흘을 부장으로 삼았다. 조괄은 즉시 진군을 공격했지만, 백기는 패주하는 척하며 복병을 숨겨두었다. 조군은 진나라 복병에 의해 군량 수송로가 끊겼다.[1]

소양왕은 백성에게 작위 1급을 내리고 15세 이상을 징발하여 장평으로 보내 조나라의 원군과 군량 수송로를 더욱 차단했다. 조군은 46일 동안 굶주렸고, 서로를 죽여 인육을 먹는 참혹한 상황에 이르렀다. 조괄은 정예 병사들과 함께 돌파하려 했지만, 진나라 군대의 화살에 맞아 죽었다. 조군 40만은 백기에게 항복했지만, 백기는 조군을 속여 구덩이에 몰아넣고 생매장했다.[1]

장평 전투로 인해 조나라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다.[1]

3. 4. 제나라와의 관계

기원전 299년, 소양왕은 맹상군을 재상으로 삼기 위해 진나라로 초청했으나, 맹상군이 제나라에 충성한다는 신하들의 말을 듣고 가택 연금했다. 맹상군은 소양왕의 후궁에게 뇌물을 바쳐 풀려났고, 기원전 298년 제나라의 재상이 된 후 제, 한, 위 연합군을 이끌고 진나라를 공격했다. 연합군은 함곡관을 돌파하고 옌스까지 진격했으며, 진나라는 이전에 점령했던 영토를 반환하는 조건으로 휴전을 맺어야 했다.[1]

기원전 288년, 소양왕은 제 민왕과 함께 "황제(帝)" 칭호를 사용하며 조나라를 공격하려 했으나, 소진의 설득으로 제 민왕이 황제 칭호를 포기하고 다른 나라들과 동맹을 맺자 소양왕도 황제 칭호를 포기했다. 이와 동시에 제나라는 송나라를 정복하려 했고, 이는 다른 국가들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1]

기원전 284년, 소양왕은 연나라 장군 악의가 이끄는 진, 연, 조, 위, 한의 5개국 연합군을 보내 제나라를 공격했다. 6개월 만에 임치를 포함한 70개 이상의 도시가 함락되었고, 제 민왕은 초나라 동맹군에게 살해당했다. 제나라는 거와 즉묵 두 도시만 남기고 5년간 포위되었으나, 전단이 즉묵에서 불타는 소를 이용한 전술로 연합군을 격파하고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았다. 그러나 제나라는 이전의 힘을 회복하지 못했고, 더 이상 진나라에 위협이 되지 못했다.[1]

소양왕 6년(기원전 301년), 소양왕은 맹상군에게 회견을 요청했고, 맹상군은 진나라로 가려 했으나 소대의 간언으로 그만두었다. 소양왕 9년(기원전 298년), 제 민왕은 맹상군을 진나라로 보냈다.[2]

소양왕은 맹상군을 재상으로 예우했으나, 맹상군이 제나라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라는 신하의 말을 듣고 암살하려 했다. 소양왕 10년(기원전 297년), 맹상군은 식객들의 도움으로 제나라로 도망쳤다(계명구도).[2]

소양왕 11년(기원전 296년), 제나라 재상이 된 맹상군은 제, 한, 위를 주력으로 하고 조(에 병합되었던 중산)·송의 군과 합세하여 진나라를 공격했다. 진나라는 함곡관에서 패했다(염씨의 싸움 또는 오국공진의 싸움).[2]

소양왕은 패전 후 누완에게 하동 땅을 떼어 제, 한, 위와 강화하려 했으나, 공자지의 진언을 받아들여 하북 및 봉릉 땅을 주고 화해했다.[2]

소양왕 22년(기원전 285년), 몽무를 등용하여 제나라를 토벌하게 했다. 같은 해, 소양왕은 삼진(한(韓)·위(魏)·조(趙)) 및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토벌하여, 제수의 서쪽에서 제나라를 격파했다(제서 전투).[2]

3. 5. 동주 멸망

기원전 256년, 서주 무공(西周武公)은 다른 국가들과 동맹하여 진나라가 양성을 공격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이에 대한 보복으로 진 소양왕은 장군 구(Jiu)를 파견하여 서주를 침공했고, 왕성으로 성공적으로 진입했다. 무공은 함양으로 끌려가 용서를 빌었고, 모든 영토를 바쳤다. 난왕과 무공은 그해 말에 사망했고, 그 후 서주의 공작인 문공(西周文公)은 단호취 (憚狐聚)로 유배되었다.[1] 주 왕실이 권력을 잃었고 난왕이 후계자 없이 사망했기 때문에 동주 왕조는 멸망했고, 879년간 존속했던 주 왕조는 종말을 맞이했다.[1] 남은 동주 역시 7년 후, 소양왕의 손자인 진 장양왕의 통치 기간 동안, 동주 경공이 다른 국가들과 반(反) 진나라 동맹을 결성하려 하자 진나라 재상 여불위에 의해 기원전 249년에 정복되었다.[1]

주나라 왕실은 주 난왕 시기에 하남(河南)과 공(鞏) 지역에 분봉되어 세워진 서주국(西周國)과 동주국(東周國)으로 분열되어 있었다.[1] 난왕은 서주 무공에 의존해 왕위를 유지했으나, 서주 무공이 진나라에 항복하고 영토를 넘기면서 주나라는 멸망했다.[1] 소양왕은 주나라 왕권을 상징하는 보물인 구정을 진나라로 가져왔다.[1]

4. 평가

진 소양왕은 55년간 재위하며 동주 시대에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1] 만년에는 수많은 정책적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은 진나라가 전국 시대 말기에 군사 강국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의 치세 동안 확립된 전략적 우위는 증손자 영정이 이끄는 중국 통일의 길을 열었다.[1]

범저는 자신의 재산을 나누어주고 은혜와 원한에 보답했다. 왕계를 하동 군수로, 정안평을 장군으로 천거했다. 정안평이 조나라에 항복하자 범저는 처분을 청했지만, 소양왕은 그를 감쌌다.[1] 왕계가 제후들과 내통하여 처형되자 범저는 우울해했다. 채택은 범저에게 은퇴를 권했고, 범저는 채택을 소양왕에게 천거하여 객경으로 삼게 했다. 이후 범저는 병을 핑계로 재상에서 물러났다.[1]

4. 1. 긍정적 평가

진 소양왕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은 전국 시대 말기에 진나라를 군사 강국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그의 치세 동안 확립된 전략적 우위는 증손자 영정이 이끄는 중국 통일의 길을 열었다.[1]

만화 및 애니메이션 킹덤에서 그는 "전쟁의 신"으로 묘사되었으며, 백기, 왕흘, 왕예, 요, 사마착, 호상 등 6명의 최정예 장군과 함께 진나라를 이끌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1]

4. 2. 부정적 평가

기원전 260년 장평 전투에서 나라 포로 40만 명을 생매장하는 등 잔혹한 행위를 저질렀다. 이는 소양왕의 명령에 따른 것으로, 그의 잔인함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또한, 소양왕은 잦은 전쟁을 일으켜 백성들을 고통에 빠뜨렸다. 그의 재위 기간 동안 진나라는 끊임없이 주변국을 침략하여 영토를 확장했지만, 이 과정에서 수많은 백성들이 징집되어 목숨을 잃거나 부상을 입었다. 이러한 과도한 전쟁 수행은 백성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고, 진나라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요인이 되었다.

4. 3. 종합적 평가

秦昭襄王|진 소양왕중국어은 55년간 재위하며 동주 시대에 가장 오랫동안 통치한 군주 중 한 명이었다. 만년에 수많은 정책적 실수를 저질렀지만, 그의 공격적인 영토 확장은 진나라전국 시대 말기에 군사 강국으로 자리 잡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1] 그의 치세 동안 확립된 전략적 우위는 증손자 영정이 이끄는 중국 통일의 길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1]

만화 및 애니메이션 킹덤에서 秦昭襄王|진 소양왕중국어은 "전쟁의 신"으로 묘사되었으며, 백기를 포함한 6명의 최정예 장군과 함께 진나라를 이끌고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벌였다.[2]

5. 가족 관계

wikitext


  • 아버지: 진 혜문왕
  • 어머니: 선태후 (미팔자(羋八子))
  • 처첩
  • * 왕후: 엽양후 (초나라 사람)
  • * 후궁: 당태후 (진나라 사람, 당팔자(唐八子), 진 효문왕 즉위 후 당태후)
  • 자녀
  • * 장남: 도태자
  • * 차남: 진 효문왕
  • * 딸: 창평군의 어머니 (진나라에 인질로 온 초 양왕태자(훗날 초 고열왕)과 결혼)


진 소양왕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아버지진 혜문왕
어머니선태후미팔자(羋八子)
왕후엽양후초나라 사람
후궁당태후진나라 사람, 당팔자(唐八子), 효문왕 즉위 후 당태후
장남도태자
차남진 효문왕
창평군의 어머니진나라에 인질로 온 초 양왕태자(훗날 초 고열왕)과 결혼


6. 대중문화 속 소양왕


  • 2004년 드라마 ''전국''에서 바오구어안이 연기했다.
  • 2015년 드라마 ''미월전''에서 주이룽이 연기했다.
  • 2017년 드라마 ''대진제국 3''에서 장보가 연기했다.
  • 만화 및 애니메이션 《킹덤》에서 "소왕/조왕"으로 알려졌으며, 전쟁의 신으로 묘사되었다. 그는 매번 경쟁 왕국과의 전투를 이끌었으며, 경쟁 국가와의 전쟁을 자유롭게 수행할 수 있는 독립적인 장군인 "육대장군" 군사 시스템을 진나라에 구축했다.[4]

참조

[1] 서적 The Northern Frontier in Pre-Imperial China//The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China
[2] 웹사이트 雲夢秦簡「編年記」について https://spc.jst.go.j[...]
[3] 서적 戦国策
[4] 서적 史記
[5] 서적 史記
[6] 서적 竹書紀年
[7] 뉴스 '[중국 천하통일 20] 진 소양왕,범저의 ‘원교근공책’ 얻다' http://kor.theasian.[...] 아시아기자협회 20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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