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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나 디 사보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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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반나 디 사보이아는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과 몬테네그로의 엘레나 공주의 딸로, 불가리아의 차르 보리스 3세와 결혼하여 불가리아의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인 구출을 도왔으며, 전쟁 후에는 이집트와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 조반나 디 사보이아는 다양한 훈장을 받았으며, 이탈리아 아시시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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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나 디 사보이아
기본 정보
조반나 (1937년)
조반나 (1937년)
전체 이름조반나 엘리자베타 안토니아 로마나 마리아
출생1907년 11월 13일
출생지이탈리아 왕국, 로마
사망2000년 2월 26일
사망지포르투갈, 에스토릴
매장지아시시 공동 묘지
왕족 정보
왕가사보이아 가문
아버지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어머니엘레나 델 몬테네그로
배우자보리스 3세 (1930년 결혼, 1943년 사망)
자녀마리야 루이자, 코하리 공주
시메온 2세
왕비
칭호불가리아 왕비
재위 기간1930년 10월 25일 – 1943년 8월 28일

2. 생애

조반나는 이탈리아 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왕비 엘레나 사이에서 넷째 자녀(셋째 딸)로 로마에서 태어나 빌라 사보이아에서 자랐다. 어릴 때부터 정략결혼을 통해 사보이아 가문의 번영을 지탱해야 한다는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1930년 10월, 아시시에서 불가리아 국왕 보리스 3세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가톨릭 의례에 따라 거행되었으며, 베니토 무솔리니도 참석했다. 이 결혼은 이탈리아에 큰 이득을 가져다주지 못했지만, 조반나의 어머니 엘레나가 슬라브인(몬테네그로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불가리아 국민들은 새 왕비를 반겼다. 조반나는 소피아에서 정교회 의례에 따라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지만, 가톨릭 교회는 이에 불쾌감을 표시했다. 결혼 후 조반나는 불가리아식 이름인 '''이오안나'''('''Йоанна''')를 사용했다. 1933년에는 장녀 마리야 루이자가, 1937년에는 장남이자 왕세자인 시메온이 태어났다.

이오안나는 불가리아 왕비로서 자선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소아과 병원에 융자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유대인들을 아르헨티나로 피난시키기 위해 통행 비자를 발급하는 등, 추축국에 기울어지는 남편 보리스 3세에 대한 균형자 역할을 했다. 보리스 3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순종적이지 않았지만, 1943년 8월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귀국한 직후 급사했다. 공식 발표에서는 심장 마비가 사인으로 발표되었지만, 히틀러에 의한 독살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불가리아 내에서 높아졌다. 이오안나의 어린 아들 시메온이 왕위를 계승했고, 보리스 3세의 동생 프레슬라프 공 키릴이 섭정으로 취임했다.

대전 말기, 불가리아는 소비에트의 침공을 받고 쿠데타로 친독 정권이 무너졌다. 섭정 키릴 왕자는 1945년 인민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오안나와 두 아이들은 1946년까지 소피아 교외의 브라나 궁전에 연금되었지만, 공산당 정권은 시메온 2세와 그 가족에게 48시간 이내에 국외로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

이오안나는 아이들을 데리고 부모의 망명지인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도피한 후,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1962년 시메온 2세가 스페인 귀족 출신 Margarita Gómez-Acebo y Cejuela|마르가리타 고메스-아세보 이 세후엘라영어와 결혼하면서, 이오안나는 포르투갈 에스토릴로 옮겨갔다. 불가리아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붕괴된 후인 1993년에 보리스 3세의 묘소를 참배한 것 외에는 불가리아에 거주하지 않고, 이곳에서 생애를 마쳤다.

2000년에 사망하여 아시시에 안장되었다.

2. 1. 어린 시절

어린 시절의 사보이아의 조반나 공주


조반나는 로마에서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과 몬테네그로의 엘레나의 다섯 자녀 중 넷째이자 셋째 딸로 태어났다. 로마 가톨릭 세례를 받을 때 조반나 엘리자베타 안토니아 로마나 마리아라는 이름을 받았다. 그녀의 오빠는 미래의 (그리고 마지막) 이탈리아 국왕인 움베르토 2세였다. 이탈리아 왕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몬테네그로 왕 니콜라 1세의 딸인 엘레나 왕비 사이에서 넷째 자녀(셋째 딸)로 로마에서 태어나 빌라 사보이아에서 자랐다. 조반나는 어릴 때부터 정략결혼의 도구로서 사보이아 가문의 번영을 지탱해야 한다는 자신의 사명을 자각하고 있었다.

2. 2. 불가리아 차리차(여왕)

1930년 10월, 아시시에서 불가리아 국왕 보리스 3세와 결혼했다. 결혼식은 신부의 종교인 가톨릭 의례에 따라 거행되었으며, 국가 지도자베니토 무솔리니도 참석했다. 이 결혼은 결과적으로 이탈리아에 아무런 이득도 가져다주지 못했지만, 조반나의 어머니 엘레나가 슬라브인(몬테네그로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불가리아 국민들은 새 왕비를 반겼다.[1] 조반나는 불가리아 수도 소피아에 도착한 후, 남편의 종교인 정교회 의례에 따라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지만, 가톨릭 교회는 두 번째 결혼에 불쾌감을 표시했다.[1] 결혼 후 조반나는 불가리아어 발음인 '''이오안나'''('''Йоанна''')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1933년에는 장녀 마리야 루이자가, 1937년에는 장남이자 왕세자인 시메온이 태어났다.

이오안나는 불가리아 왕비로서 소아과 병원에 융자하는 등 자선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자 이오안나는 다수의 유대인들을 아르헨티나로 피난시키기 위해 필요한 통행 비자를 발급하는 등, 추축국 쪽에 기울어지는 남편 보리스 3세에 대한 균형자 역할을 했다. 보리스 3세는 겉보기와는 달리 독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에게 순종적이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시작했지만, 1943년 8월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회담하고 귀국한 직후 급사했다. 공식 발표에서는 사인은 심장 마비로 발표되었지만, 히틀러에 의한 독살을 의심하는 목소리가 불가리아 국내에서 높아졌다. 이오안나의 어린 아들 시메온이 왕위를 계승했고, 보리스 3세의 동생이자 친독파로 여겨지던 프레슬라프 공 키릴이 어린 국왕의 섭정으로 취임했다.

대전 말기, 불가리아는 소비에트의 침공을 받고, 쿠데타의 발발로 친독 정권이 무너졌다. 섭정 공 키릴 왕자는 1945년 인민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이오안나와 두 아이들은 1946년까지 소피아 교외의 브라나 궁전에 연금 상태로 놓여 있었지만, 새로 성립된 공산당 정권은 시메온 2세와 그 가족에게 48시간 이내에 국외로 퇴거할 것을 명령했다.[1]

2. 3.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불가리아는 소련에 점령되었다. 키릴 공자는 인민 법정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1] 조반나와 그녀의 아들 시메온은 1946년 9월 15일까지 소피아 근처 브라나 궁전에서 가택 연금 상태로 남아 있었는데, 당시 새로운 공산주의 정부는 1946년 불가리아 공화국 국민 투표 결과 국가가 공화국으로 선포됨에 따라 48시간 안에 국외로 떠나라고 명령했다. 조반나는 프레슬라프의 키릴 공자가 1945년 2월 1일에 처형된 후 불가리아를 떠나기를 원했다.[1]

처음에 조반나는 아버지인 이탈리아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국왕과 합류하기 위해 이집트 왕국알렉산드리아로 피신했다. 이후 조반나와 아들 시메온 2세는 마드리드로 이주했다. 1962년 시메온 2세가 결혼한 후 조반나는 포르투갈 리비에라에 있는 에스토릴로 이사하여 남은 생애를 그곳에서 보냈다. 1993년, 조반나는 잠시 불가리아로 돌아가 보리스 3세의 묘소를 방문하고 그의 심장을 재매장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조반나는 1930년 보리스 3세 국왕과 결혼했던 이탈리아 아시시의 공동 묘지에 묻혔다.

3. 훈장


  • 사보이 왕가: 성 마우리치오와 라자로 기사단 여사[2]
  • 몰타 기사단: 몰타 기사단 명예와 헌신 훈장 3급 대십자 기사[2][3]
  • 두 시칠리아 왕가: 프란치스코 1세 왕립 훈장 대십자 기사[4]
  • 작센코부르크고타-코하리 왕가: 성 알렉산더 왕립 훈장 다이아몬드 대십자 기사, ''1933''[2]
  • 오스트리아 제국 및 왕가: 제국 및 왕립 성모 별 십자 훈장 여사[2]
  • 바이에른 왕가: 테레사 왕립 훈장 특급 훈작 부인[2]
  • 러시아 제국 왕가: 성 카타리나 제국 훈장 특급 대십자 훈장[5]
  • 유고슬라비아 왕가: 성 사바 왕립 훈장 특급 훈작 부인

4. 가계

사보이아의 마르게리타 공주외조부모몬테네그로의 니콜라 1세
밀레나 부코티치증조부모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오스트리아 대공녀 아델라이데친증조부모제노바 공작 페르디난도
작센의 엘리자베스 공주외증조부모그라호보의 대공 미르코 페트로비치-녜고시
아나스타시야 마르티노비치외외조부모보이보드 페타르 부코티치
옐레나 보이보디치


참조

[1] 웹사이트 1946: Истинският референдум https://duma.bg/1946[...] 2021-05-26
[2] 웹사이트 page with the Italian Royal family members' honours http://www.genmareno[...]
[3] 웹사이트 The Royal family attended the reception on the occasion of the Day of St. John the Baptist, patron of the Order of Malta | H.M. King Simeon II http://www.kingsimeo[...]
[4] 웹사이트 In living memory of Her Majesty Giovanna, Queen of Bulgaria and Princess of Savoy | H.M. King Simeon II http://www.kingsimeo[...]
[5] 웹사이트 SAINTANNA.RU | Св. Екатерины http://www.saintanna[...] 2022-05-22
[6] 웹사이트 Н.В. Цар Симеон II | Шефски полкове http://www.kingsimeo[...] 2015-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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