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이 디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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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이 디비전은 1976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결성된 포스트 펑크 밴드이다. 섹스 피스톨즈 공연에 영감을 받은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이 결성했으며, 이언 커티스를 영입하여 1978년 조이 디비전으로 이름을 변경했다. 1979년 데뷔 앨범 《Unknown Pleasures》를 발매하며 고딕적인 사운드를 확립했으나, 1980년 이언 커티스의 자살로 인해 해체되었다. 밴드 해체 후 남은 멤버들은 뉴 오더를 결성했다. 조이 디비전은 어둡고 우울한 음악 스타일과 이언 커티스의 가사로 록 음악계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고딕 록 장르의 선구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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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디비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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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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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바르샤바 (1977–1978) |
출신지 | 솔퍼드, 잉글랜드 |
장르 | 포스트 펑크 |
활동 기간 | 1976–1980 |
레이블 | Factory, Enigma, Virgin, Anonymous, Fast Product, Sordide Sentimental1 |
관련 활동 | 뉴 오더 |
웹사이트 | joydivisionofficial.com |
멤버 | |
과거 멤버 | 이언 커티스, 버나드 섬너, 피터 훅, 스티븐 모리스, (자세한 내용은 밴드 멤버 섹션 참고) |
음반 목록 | |
음반 | 조이 디비전 음반 목록 |
2. 역사
1976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을 본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은 "Stiff Kittens"라는 그룹을 결성한다. 이후 이언 커티스가 보컬로 합류하고, 여러 드러머를 거쳐 스티븐 모리스가 합류하면서 밴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초기에는 "Stiff Kittens"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Warsaw"로 밴드명을 바꾸었다. 1977년 5월, 워소는 데뷔 공연을 한다. 1978년, 런던에서 활동하던 밴드 "Warsaw Pakt"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밴드명을 조이 디비전으로 다시 변경한다.
조이 디비전은 맨체스터의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하고, 1979년 데뷔 앨범 『Unknown Pleasures』를 발매한다. 이 앨범은 언론의 호평을 받았으며,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와 같은 포스트 펑크 그룹과 함께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80년 5월, 이언 커티스가 자살하면서 밴드 활동은 중단된다. 이 사건 2개월 후 발표된 두 번째 앨범 『Closer』는 영국 록 음악사의 명작으로 남았다. 이후 1981년에는 『Still』, 1988년에는 『Substance』(1977-1980) 등의 앨범이 발매되었다.
2. 1. 결성 (1976-1978)
1976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섹스 피스톨즈의 공연을 본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은 밴드 결성을 결심한다.[4][5] 섬너는 기타를, 훅은 어머니에게서 돈을 빌려 베이스 기타를 구입했다.[6] 이후 이언 커티스가 보컬로 합류하고, 여러 드러머를 거쳐 스티븐 모리스가 합류하면서 밴드 라인업이 완성되었다.[7]초기에는 버즈콕스의 매니저 리처드 분과 프런트맨 피트 셸리가 제안한 "스티프 키튼스"(Stiff Kittens)라는 이름으로 활동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데이비드 보위의 노래 "바르샤바"(Warszawa)에서 이름을 따 "워소"(Warsaw)로 밴드명을 바꾸었다. 1977년 5월 29일, 워소는 일렉트릭 서커스에서 버즈콕스, 페네트레이션, 존 쿠퍼 클라크의 공연 오프닝 무대로 데뷔했다.
1978년 초, 런던에서 활동하던 밴드 "워소 파크트"(Warsaw Pakt)와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 밴드는 1955년 소설 ''인형의 집(House of Dolls)''에 언급된 나치 강제 수용소의 성 노예 부대에서 이름을 따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으로 밴드명을 다시 변경했다. 이후 조이 디비전은 맨체스터에서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팩토리 레코드와 계약을 맺었다.[11]
2. 2. 전성기 (1979-1980)
1979년, 데뷔 앨범 《언노운 플레저스 (Unknown Pleasures)》가 발매되었다.[13] 프로듀서 마틴 해닛(Martin Hannett)은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크게 변화시켰는데, 초기에는 밴드가 이에 불만을 가졌으나, 2006년 피터 훅은 해닛이 "조이 디비전 사운드를 만들었다"며 긍정적으로 회상했다.[14][15] 앨범 커버는 피터 새빌이 디자인했으며, 그는 이후에도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의 앨범 아트워크를 담당했다.[16]《언노운 플레저스》는 발매 직후부터 호평을 받았다. 초판 1만 장이 판매되었고, 《멜로디 메이커(Melody Maker)》의 존 새비지(Jon Savage)는 이 앨범을 "불투명한 선언문"이자 "올해 최고의 흰색 영국 데뷔 LP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17] 앨범은 영국 음반 차트에서는 최고 71위에 그쳤지만, 인디 차트에서는 첫 주 2위를 기록하고 결국 1위를 차지했다.
1979년 7월 20일, 조이 디비전은 그라나다 TV에 다시 출연했고, 9월 15일에는 BBC2의 《섬씽 엘스》에서 전국 방송에 처음 출연했다. 10월부터는 버즈콕스의 지원 공연을 위한 영국 투어를 시작하여, 멤버들은 직업을 그만두고 밴드 활동에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5] 11월에는 앨범에 수록되지 않은 싱글 "트랜스미션"이 발매되었다. 조이 디비전의 성공은 "회색 오버코트를 입은 강렬한 젊은 남성들"로 묘사되는 충성스러운 팬들을 불러 모았다.
1980년 1월, 밴드는 유럽 순회공연을 가졌지만, 빡빡한 일정 속에서도 커티스는 비교적 적은 수의 발작만을 경험했다. 3월에는 런던의 브리타니아 로우 스튜디오에서 해넷과 함께 두 번째 앨범 《클로저》를 녹음했다.[18] 같은 달, 프랑스의 인디 레이블 소르디드 센티멘탈을 통해 "리히트 운트 블린트하이트" 싱글을 발매했다.
하지만 수면 부족과 장시간 작업은 커티스의 간질을 악화시켰고, 발작은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는 공연 중에도 발작을 일으켰고, 일부 관객들은 이를 공연의 일부로 오해하기도 했다. 밴드는 커티스의 상태를 걱정했고, 커티스는 발작으로 인해 수치심과 우울감을 느꼈다. 1980년 4월 7일, 커티스는 페노바르비톤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다.[5]
이후에도 조이 디비전은 공연을 이어갔지만, 커티스의 건강 악화로 인해 4월의 여러 공연이 취소되었다. 1980년 5월 2일, 버밍엄 대학교에서 열린 공연이 조이 디비전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이 되었으며, 이 공연에서 "세레모니"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주되었다.[19]
해넷의 프로듀싱은 대체로 호평을 받았지만,[20] 훅과 서머는 《클로저》의 프로듀싱에도 불만을 표했다. 특히 훅은 "잔혹 행위 전시회"의 최종 믹싱에서 거친 느낌이 사라진 것에 대해 강한 불만을 드러냈다.
2. 3. 이언 커티스의 죽음과 해체 (1980)
1980년 5월 18일, 미국 투어 출발을 하루 전날인 월요일 새벽, 이언 커티스는 자택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19] 그의 시신은 같은 날 낮에 귀가한 아내 데보라에 의해 발견되었다. 갑작스러운 비극으로 보컬리스트를 잃은 조이 디비전은 활동을 중단했고, 미국 투어도 취소되었다.이언 커티스는 1980년 1월 유럽 투어 때부터 빡빡한 일정으로 인해 수면 부족과 장시간 작업은 커티스의 간질을 악화시켰고, 그의 발작은 거의 통제 불능 상태가 되었다. 그는 종종 공연 중에 발작을 일으켰는데, 일부 관객들은 그것이 공연의 일부라고 생각했다. 발작으로 인해 그는 수치심과 우울감을 느꼈고, 밴드는 커티스의 상태에 대해 점점 더 걱정하게 되었다. 결국 1980년 4월 7일, 커티스는 간질 치료제인 페노바르비톤 과다 복용으로 자살을 시도했다.[5]
유작이 된 싱글 "Love Will Tear Us Apart"는 5월 영국 싱글 차트 13위를 기록했다. 7월에는 두 번째이자 마지막 앨범 『Closer』가 발매되어 영국 앨범 차트 6위까지 상승했다. 연말에는 NME지의 특집에서 올해의 최고 앨범으로 선정되었다.
남은 멤버들은 논의 끝에 음악 활동을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이언 생전에 맺은 "멤버 한 명이라도 빠지면 조이 디비전(Joy Division)이라는 이름으로 밴드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약속[19]에 따라 밴드 이름을 뉴 오더로 변경하고, 보컬은 기타리스트 버나드 섬너가 맡게 되었다. 1980년 9월에는 연기되었던 미국 전역 투어를 강행했다.
후에 뉴 오더는 이언 커티스의 자살 소식을 접했을 당시 심경을 담은 곡 "블루 먼데이"를 발표했다. 해당 싱글은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다.
3. 음악 스타일
조이 디비전의 음악은 펑크 록의 초기 에너지를 기반으로 했지만, 점차 어둡고 내성적인 사운드로 발전했다. 프로듀서 마틴 해닛은 이러한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5]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조이 디비전의 음악이 "절제"되었으며, 베이시스트 피터 훅이 멜로디를 이끌고, 기타리스트 버나드 섬너는 공간을 남겨두는 방식으로 연주했으며, 드러머 스티븐 모리스는 분화구 가장자리를 맴도는 듯한 드럼 연주를 했다고 평가했다.[5] closer 앨범에서 이안 커티스는 낮은 바리톤 음색을 사용했으며, 더 도어스(the Doors)의 짐 모리슨(Jim Morrison)과 비교되기도 했다. 섬너는 신시사이저를, 훅은 6현 베이스를 사용하여 더욱 다채로운 사운드를 만들어냈다.
마틴 해닛은 각 악기, 심지어 드럼 키트의 각 부분까지도 깨끗하게 분리된 사운드를 추구했다.[5] 음악 저널리스트 리처드 쿡은 해닛의 프로듀싱이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28]
이안 커티스는 밴드의 작사를 전담했으며, 그의 가사는 "차가움, 압박, 어둠, 위기, 실패, 붕괴, 통제력 상실" 등을 다루었다.[29] 그는 윌리엄 S. 버로스, J. G. 발라드, T. S. 엘리엇 등의 작가들에게 영향을 받았으며,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프리드리히 니체, 장 폴 사르트르,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헤세 등의 작품을 탐독했다.[30],[31] 커티스는 자신의 가사가 다차원적이며 해석의 여지가 열려 있다고 말했다.[29]
3. 1. 포스트 펑크의 선구자
조이 디비전은 펑크 록의 에너지와 실험 정신을 이어받으면서도, 더 어둡고 내면적인 음악을 추구했다. 이들은 단순한 펑크 록을 넘어, 리듬, 멜로디, 가사, 분위기 등 모든 면에서 독창적인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특히, 마틴 해닛의 프로듀싱은 조이 디비전 특유의 공간감과 분위기를 형성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5]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조이 디비전의 독창성이 "노래가 느려지면서야 비로소 분명해졌고", 그들의 음악이 "절제된" 특징을 띠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레이놀즈에 따르면, "후크의 베이스가 멜로디를 이끌었고, 버나드 서머의 기타는 사운드를 꽉 채우는 대신 빈 공간을 남겼으며, 스티브 모리스의 드럼은 마치 분화구 가장자리를 맴도는 듯했습니다."
1994년, 버나드 서머는 그들의 독특한 사운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저는 리듬과 코드를 담당했고, 후키는 멜로디를 맡았습니다. 그는 제가 기타 사운드를 왜곡시키는 것을 좋아해서 높은 음역대의 리드 베이스를 연주했습니다. 제가 사용하던 앰프는 최대 볼륨에서만 작동했거든요. 후키가 낮은 음역대를 연주하면 스스로 소리를 들을 수 없었습니다. 스티브는 다른 드러머와 다른 자신만의 스타일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에게 있어 밴드의 드러머는 시계와 같지만, 스티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동적이었죠. 밴드의 리듬을 따라갔고, 그게 우리에게 독특한 강점을 주었습니다."[5]
마틴 해닛은 펑크 록이 사운드 공간을 만들기 위한 스튜디오 기술을 거부함으로써 소리적으로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그는 조이 디비전의 레코드에서 더욱 광활한 사운드를 만들고자 했다. 그는 "[조이 디비전은] 프로듀서에게는 선물과 같았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몰랐거든요. 그들은 반박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했다.[5] 그는 각 악기뿐만 아니라 모리스의 드럼 키트의 각 부분까지도 깨끗하고 명확한 "사운드 분리"를 요구했다. 음악 저널리스트 리처드 쿡은 해닛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평가했다.[28]
3. 2. 사운드의 특징
사이먼 레이놀즈(Simon Reynolds)는 조이 디비전의 독창성이 "노래가 느려지면서야 비로소 분명해졌고", 그들의 음악이 "절제된" 특징을 띠게 되었다고 언급했다. 레이놀즈에 따르면, "후크의 베이스가 멜로디를 이끌었고, 버나드 서머의 기타는 사운드를 꽉 채우는 대신 빈 공간을 남겼으며, 스티브 모리스의 드럼은 마치 분화구 가장자리를 맴도는 듯했습니다."[5] closer 앨범까지, 커티스는 낮은 바리톤 음역의 목소리를 사용했고, 더 도어스(the Doors)의 짐 모리슨(Jim Morrison)(커티스가 가장 좋아하는 밴드 중 하나)과 비교되기도 했다.서머는 밴드의 리더 역할을 맡았고, 커티스는 몇몇 녹음된 노래와 공연에서 기타를 연주했다. 커티스는 기타 연주를 싫어했지만, 밴드는 그가 연주하도록 고집했다. 서머는 "그는 매우 기이한 방식으로 연주했고, 우리에게는 흥미로웠습니다. 다른 아무도 이언처럼 연주할 수 없었으니까요."라고 말했다.[5] closer 앨범 녹음 세션 동안 서머는 직접 만든 신시사이저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후크는 더 많은 멜로디를 위해 6현 베이스를 사용했다.
프로듀서 마틴 해닛(Martin Hannett)은 "조이 디비전의 기묘한 공간감을 포착하고 강화하는 데 전념했습니다."[5] 해닛은 개별 악기뿐만 아니라 모리스의 드럼 키트의 개별 부품까지도 깨끗하고 명확한 "사운드 분리"를 요구했다. 모리스는 "일반적으로 그는 잠재적인 싱글로 여기는 트랙에서, 사운드의 겹침을 피하기 위해 각 드럼을 따로 연주하도록 했습니다."라고 회상했다.[5] 음악 저널리스트 리처드 쿡은 해닛의 역할이 "결정적"이었다고 지적했다. 그의 프로덕션에는 "거리의 장치"가 있으며 "사운드는 물리적인 현실의 환영"이다.
1979년 4월부터 첫 번째 앨범 《언노운 플레저스(Unknown Pleasures)》의 녹음을 시작했다. 당시 그들의 연주는 거칠었고 펑크 록(Punk Rock)의 영향을 받았지만, 프로듀서 마틴 해닛(Martin Hannett)의 손길을 거치면서 극적인 변화를 맞이했다. 긴장감 넘치는 분위기와 음울함을 동시에 지닌 포스트 펑크(Post-Punk) 사운드가 완성되었다. 여기에는 이언이 쓴 절망과 고독을 노래한 가사도 크게 기여했다.
3. 3. 가사
커티스는 밴드의 유일한 작사가였다. 그는 곡의 음악이 완성되기 전에 독립적으로 노트북에 가사를 썼다.[30] 음악은 주로 섬머와 훅이 연습 중에 잼을 하면서 작곡했다. 커티스의 가사는 종종 "차가움, 압박, 어둠, 위기, 실패, 붕괴, 통제력 상실"을 언급했다.[29] 1979년, ''NME''의 기자 폴 람발리는 "조이 디비전 음악의 주제는 슬프고 고통스러우며 때로는 매우 슬프다"고 썼다.음악 평론가 존 새비지는 "커티스의 위대한 작사적 업적은 혼란 속 사회의 근본적인 현실을 포착하고 그것을 보편적이면서도 개인적인 것으로 만든 것"이라고 쓰면서 "가사는 분위기와 접근 방식에서 낭만주의와 공상과학 문학에 대한 그의 관심을 반영했다"고 지적했다.[30] 비평가 로버트 팔머는 윌리엄 S. 버로스와 J. G. 발라드가 커티스에게 "분명한 영향"을 미쳤다고 썼고, 모리스는 또한 가수가 T. S. 엘리엇을 읽었다고 회상했다.[31] 데보라 커티스는 또한 커티스가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프리드리히 니체, 장 폴 사르트르, 프란츠 카프카, 헤르만 헤세와 같은 작가들의 작품을 읽었다고 회상했다.[30]
커티스는 자신의 가사의 의미를 설명하려 하지 않았고, 조이 디비전의 발매물에는 가사가 없었다.[29] 그는 팬진 ''Printed Noise''에 "우리는 진정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가사는 해석에 열려 있습니다. 다차원적입니다. 원하는 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른 조이 디비전 멤버들은 당시 커티스 가사의 내용에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고 말했다.[27] 1987년 옵션과의 인터뷰에서 모리스는 "우리는 노래가 일종의 동정심이 있고 우울한 것보다 고무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모두 각자의 의견이 있습니다."라고 말했다.[32] 데보라 커티스는 ''Closer'' 발매와 함께 가수와 가까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의도와 감정이 모두 가사 안에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상했다.
살아남은 멤버들은 커티스의 가사에서 경고 신호를 보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 모리스는 "이안이 죽고 나서야 우리는 앉아서 가사를 들었습니다... '맙소사, 이걸 놓쳤네'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안의 가사를 보고 그가 얼마나 영리하게 다른 사람의 입장에 자신을 놓았는지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가 자신에 대해 쓰고 있다고는 결코 믿지 않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어떻게 그렇게 바보 같을 수 있었을까요? 물론 그가 자신에 대해 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를 붙잡고 '무슨 일이야?'라고 묻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것과 함께 살아야 합니다."라고 말했다.[27]
4. 멤버
- 이언 커티스 (Ian Curtis) - 보컬[5]
- 버나드 섬너 (Bernard Sumner) - 기타, 키보드[5]
- 피터 훅 (Peter Hook) - 베이스[5]
- 스티븐 모리스 (Stephen Morris) - 드럼[5]
이언 커티스 사후, 나머지 세 명은 새 멤버를 영입해 뉴 오더로 활동하게 된다.[5]
4. 1. 주요 멤버
- 이언 커티스 (Ian Curtis) - 보컬 (1976-1980, 사망)
- 버나드 섬너 (Bernard Sumner) - 기타, 키보드 (1976-1980)
- 피터 훅 (Peter Hook) - 베이스 (1976-1980)
- 스티븐 모리스 (Stephen Morris) - 드럼 (1977-1980)
1976년 6월 4일, 오랜 친구였던 버나드 섬너와 피터 훅은 맨체스터의 프리 트레이드 홀에서 열린 섹스 피스톨스의 공연을 관람했다.[65][66] 공연에 큰 충격을 받은 두 사람은 곧바로 밴드 결성을 결심했다. 섬너는 기타, 훅은 베이스를 담당하기로 했고, 보컬에는 이전에 라이브 공연장에서 만났던 이언 커티스가 합류했다. 이후 드러머를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지만, 1977년 8월 스티븐 모리스가 밴드에 합류하면서 멤버 구성이 완료되었다.
4. 2. 초기 멤버
테리 메이슨(Terry Mason영어)은 1976년부터 1977년까지 드럼을 담당했고, 토니 타박(Tony Tabac영어)은 1977년에 드럼을 담당했다. 스티브 브라더데일(Steve Brotherdale영어) 역시 1977년에 드럼을 담당했다.[6]4. 3. 타임라인
5. 영향
조이 디비전은 짧은 활동 기간에도 불구하고, 후대의 음악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올뮤직의 존 부시는 조이 디비전이 "분노와 에너지가 아닌 분위기와 표현을 강조함으로써 포스트 펑크 운동의 첫 번째 밴드가 되었으며, 80년대 우울한 대안 음악의 부상을 예고했다"고 평가했다.[43]
마틴 해닛이 1979년 "고딕풍의 뉘앙스가 있는 댄스 음악"이라고 묘사한 밴드의 어둡고 음울한 사운드는 고딕 록 장르를 예고했다. "고딕"이라는 용어는 원래 1970년대 후반 음악의 "음울한 분위기"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지만, 곧 조이 디비전과 수지 앤 더 밴시즈의 뒤를 이은 바우하우스와 같은 특정 밴드에 적용되었다. 초기 고딕 록 밴드의 표준적인 음악적 특징으로는 "조이 디비전 이후의 고음의 베이스 라인이 선율적인 역할을 맡는 것"과 "거의 오페라틱하고 투테닉하거나, 짐 모리슨과 이언 커티스의 깊고 윙윙거리는 합금과 같은 보컬"이 포함된다.[43]
조이 디비전은 더 큐어와 U2를 포함한 많은 밴드에 영향을 주었다.[48] 1980년 U2의 보컬리스트 보노는 조이 디비전이 "지난 4~5년 동안 가장 중요한 밴드 중 하나"라고 말했다.[49] 조이 디비전은 오케스트럴 매뉴버스 인 더 다크[50]와 티어스 포 피어스[51]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이 디비전을 영향으로 언급하는 다른 아티스트로는 사운드가든[52], 더 프로클레어머스[53], 모과이[54], 허스커 듀[55], 퓨처 아일랜즈[56]가 있다. 래퍼 대니 브라운은 조이 디비전의 노래 제목을 따서 자신의 앨범 "Atrocity Exhibition"이라는 제목을 지었는데, 이 제목은 1970년 J. G. 발라드의 소설집 "The Atrocity Exhibition"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았다.[57][58] 2005년 뉴 오더와 조이 디비전은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9]
조이 디비전이 어린 시절에 큰 영향을 받은 아티스트는 다음과 같다.
6. 유산
조이 디비전의 음악은 여전히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들의 앨범은 록 음악 역사에서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마틴 해닛이 프로듀싱한 밴드의 어둡고 우울한 사운드는 고딕 록 장르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올뮤직의 존 부시는 조이 디비전을 "분노와 에너지가 아닌 분위기와 표현을 강조함으로써 포스트 펑크 운동의 첫 번째 밴드가 되었으며, 80년대 우울한 대안 음악의 부상을 예고했다"라고 평가했다.[43]
이언 커티스의 삶과 죽음은 여러 편의 영화와 책으로 다뤄지면서 그의 예술적 유산은 계속해서 재조명되고 있다. 2002년 영화 "24 Hour Party People"은 팩토리 레코드에 대한 허구적인 이야기를 다루며, 밴드 멤버들은 조연으로 등장한다.[44] 2007년에는 안톤 코르바인이 감독하고 데보라 커티스의 회고록 "Touching from a Distance"(1995)를 바탕으로 한 이언 커티스의 전기 영화 "컨트롤(Control)"이 개봉하여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았다.[45][46] 같은 해, 그랜트 지는 밴드의 다큐멘터리 "Joy Division"(2007)을 감독했다.[47]
조이 디비전은 더 큐어, U2[48], 오케스트럴 매뉴버스 인 더 다크[50], 티어스 포 피어스[51], 사운드가든[52], 더 프로클레어머스[53], 모과이[54], 허스커 듀[55], 퓨처 아일랜드[56] 등 다양한 밴드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1980년 U2의 보컬리스트 보노는 조이 디비전을 "지난 4~5년 동안 가장 중요한 밴드 중 하나"라고 언급했다.[49] 래퍼 대니 브라운은 조이 디비전의 노래 제목이자 J. G. 발라드의 소설집 제목이기도 한 "Atrocity Exhibition"을 자신의 앨범 제목으로 사용하기도 했다.[57][58]
2005년, 조이 디비전은 뉴 오더와 함께 영국 음악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59]
7. 음반 목록
조이 디비전은 정규 앨범의 완성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기존 펑크 록의 관례와 달리 발표된 싱글들은 정규 앨범에 수록하지 않았다.[5]
'''조이 디비전의 음반 목록'''
음반 종류 | 음반명 및 발매일 |
---|---|
정규 음반 | * 언노운 플레저스 (1979년) |
싱글 | * 트랜스미션 (1979년)[5] |
편집 음반 | * 스틸 (1981년) - 미공개곡 모음집[72] |
라이브 음반 | * PRESTON 28 FEBRUARY 1980 (1999년) |
7. 1. 정규 앨범
- Unknown Pleasures (1979년)
- Closer (1980년)
조이 디비전의 데뷔 음반인 《언노운 플레저스 (Unknown Pleasures)》는 1979년 4월 스트로베리 스튜디오에서 녹음되었다.[13] 프로듀서 마틴 해닛(Martin Hannett)은 밴드의 라이브 사운드를 크게 바꾸었는데, 밴드는 처음에는 불만을 가졌지만 2006년 후크는 해닛이 "조이 디비전 사운드를 만들었다"고 회상했다.[14][15] 앨범 커버는 피터 새빌이 디자인했으며, 그는 이후 조이 디비전과 뉴 오더의 앨범 아트워크를 담당했다.[16]
《언노운 플레저스》는 6월에 발매되어 초판 1만 장이 판매되었다. 앨범 발매 후 10월부터는 버즈콕스의 지원 공연을 위한 영국 전역 투어를 시작했다.
7. 2. 싱글
- 트랜스미션 (1979년)[5]
- Atmosphere (1980년)
- Komakino (1980년)
- 러브 윌 티어 어스 어파트 (1980년)
조이 디비전은 정규 앨범의 완성도를 중요시했기 때문에, 기존 펑크 록의 관례와 달리 발표된 싱글들은 정규 앨범에 수록하지 않았다.[5]
7. 3. 편집 앨범
- 스틸 (1981년) - 미공개곡 모음집[72]
- 서브스턴스 1977-1980 (1988년) - 싱글 모음집[73]
- ''Warsaw'' (1994년) - 본래 데뷔 앨범으로 출시할 계획이었던 음반
- ''Permanent'' (1995년) - 베스트 앨범
- ''Heart And Soul'' (2004년) - 미발표 음원을 모은 CD 박스[74]
- ''Let The Movie Begin'' (2006년) - 라이브와 아웃테이크 모음집
- ''The Best Of Joy Division'' (2008년) - 베스트 앨범 + 존 필 세션 라이브
- 컴플리트 BBC 레코딩스 (Joy Division The Complete BBC Recordings) (2000년) - 존 필 세션 전곡 수록
- 마틴 해닛 퍼스널 믹스 (Martin Hannett’s Personal Mixes) (2007년) - 희귀 음원 모음집
- +− 싱글즈 1978-80 (+− Singles 1978-80) (2010년) - 리마스터된 싱글 모음집
- 토탈~베스트 오브 조이 디비전 앤 뉴 오더 (Total – From Joy Division to New Order) (2011년) - 뉴 오더와의 합본 베스트 앨범
7. 4. 라이브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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