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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컨스터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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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존 컨스터블은 1776년 영국 서퍽주에서 태어난 낭만주의 화가로, 부유한 곡물 상인의 아들이었다. 그는 로열 아카데미 스쿨에서 미술을 공부했으며, 자연을 직접 관찰하여 풍경화를 그리는 독자적인 화풍을 발전시켰다. 컨스터블은 '건초 수레', '데드햄 계곡'과 같은 작품을 통해 자연의 아름다움을 묘사했으며, 특히 하늘과 빛의 변화를 섬세하게 표현했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에서 먼저 인정을 받았으며, 바비종파와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는 왕립 예술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837년 심부전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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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컨스터블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존 컨스터블, 다니엘 가드너 작, 1796년
존 컨스터블, 다니엘 가드너 작, 1796년
본명존 컨스터블
출생일1776년 6월 11일
출생지잉글랜드 서퍽주 이스트 버골트
사망일1837년 3월 31일
사망지잉글랜드 런던
국적영국
분야풍경화
사조낭만주의
대표 작품건초 마차
데덤 계곡
배우자마리아 엘리자베스 비크넬 (1816년 결혼, 1828년 사망)
안장 장소런던 햄스테드 세인트존 교회
미술 아카데미 회원
왕립 아카데미 회원RA
발음
기타 정보

2. 초기 생애

upright


존 컨스터블은 서퍽주 스터 강(River Stour)에 있는 이스트 버골트(East Bergholt) 마을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곡물 상인이었던 아버지 골딩 컨스터블은 이스트 버골트에 있는 플랫퍼드 밀(Flatford Mill)과 에식스(Essex)에 있는 데덤 밀(Dedham Mill)을 소유했다.

젊은 시절, 컨스터블은 주변 서퍽과 에식스 시골에서 아마추어 스케치 여행을 했는데, 이는 훗날 그의 예술 작품 상당 부분의 소재가 되었다. 그는 수집가인 조지 보몬트 경(Sir George Beaumont, 7th Baronet)을 만났는데, 보몬트 경은 그에게 클로드 로랭의 '하갈과 천사(Hagar and the Angel)'를 보여주었고, 이는 컨스터블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 이후 미들섹스(Middlesex)의 친척들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전문 화가인 존 토마스 스미스(John Thomas Smith, 1766–1833)를 만났는데, 스미스는 그림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지만 동시에 직업 화가가 되기보다는 아버지의 사업에 남아 있을 것을 권했다.

1806년 컨스터블은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두 달 동안 여행했다.[18] 그는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찰스 레슬리(Charles Leslie)에게 산의 고독함이 자신의 기분을 억누른다고 말했으며, 레슬리는 "그의 성격은 특히 사교적이었고, 아무리 장엄한 자연 경관이라도 인간과의 연관성이 풍부하지 않으면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마을, 교회, 농가와 오두막이 필요했습니다."라고 기록했다.[19]

컨스터블은 겨울에는 런던에서, 여름에는 이스트 버골트에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했다. 1811년 그는 처음으로 솔즈베리의 존 피셔(John Fisher, Anglican bishop)와 그의 가족을 방문했는데, 이 도시의 솔즈베리 대성당과 주변 풍경은 그의 대표작들의 영감이 되었다.

위벤호 공원(1816년). 워싱턴 국립 미술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컨스터블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스스로는 따분하게 여겼지만 많은 훌륭한 초상화를 남겼다. 그는 종종 종교 그림도 그렸지만, 존 워커(John Walker)는 "컨스터블의 종교 화가로서의 무능함은 과장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라고 평했다.[20]

컨스터블은 시골 저택 그림을 그려 수입을 얻기도 했다. 1816년, 그는 프랜시스 슬레이터 리보(Francis Slater Rebow) 장군으로부터 그의 시골 집인 '위벤호 공원'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21] 리보 장군은 또한 알레스퍼드 홀(Alresford Hall) 부지에 있는 낚시 별장의 작은 그림도 의뢰했는데,[21] 이 그림은 현재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22] 컨스터블은 이러한 의뢰로 받은 돈을 마리아 빅넬(Maria Bicknell)과의 결혼 자금으로 사용했다.[21] 이 시기 컨스터블의 그림, 특히 1816년 작품인 '밀밭'은 세부 묘사가 풍부한 목가적인 시골 풍경을 담고 있다.[23]

2. 1. 어린 시절과 교육

존 컨스터블은 1776년 6월 11일 잉글랜드 서퍽주 이스트 버골트에서 골딩 컨스터블과 앤 (와츠) 컨스터블 사이에서 태어났다.[6] 그의 아버지 골딩 컨스터블은 부유한 곡물 상인으로, 이스트 버골트에 있는 플랫퍼드 밀과 에식스에 있는 데덤 밀을 소유했다.[7] 골딩 컨스터블은 '텔레그래프'라는 작은 배를 소유하여 스터 강 하구를 통해 런던으로 곡물을 운반했다.[7] 그는 런던 차 상인인 아브람 뉴먼의 사촌이었다.

컨스터블은 둘째 아들이었지만, 형은 지적 장애가 있어 그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10] 그는 래번햄의 기숙 학교에 잠시 다닌 후,[8] 에식스 주 데덤에 있는 낮 학교에 다녔다.[9] 학교를 졸업한 후 컨스터블은 가업인 곡물 사업에 종사했지만, 결국 그의 남동생 아브람이 제분소 운영을 맡게 되었다.[10]

컨스터블의 어린 시절 집 자리 표시판


젊은 시절, 컨스터블은 서퍽과 에식스 시골 지역을 아마추어 스케치 여행을 다녔는데, 이 풍경들은 훗날 그의 작품 대부분의 소재가 되었다.[11] 그는 "밀 댐에서 빠져나오는 물소리, 버드나무, 오래되고 썩은 판자, 미끈미끈한 기둥과 벽돌,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라고 말하며 이 풍경들이 자신을 화가로 만들었다고 회고했다.[12] 그는 수집가인 조지 보몬트 경을 만나 클로드 로랭의 '하갈과 천사'를 보게 되었고, 이는 그에게 큰 영감을 주었다.[13] 이후 미들섹스의 친척들을 방문했을 때, 그는 전문 화가인 존 토마스 스미스를 만났다. 스미스는 컨스터블에게 그림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지만, 동시에 직업 화가가 되기보다는 아버지의 사업을 도울 것을 권했다.

1799년, 컨스터블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미술가의 길을 걷도록 허락받았고, 소액의 용돈을 받게 되었다. 그는 로열 아카데미 스쿨에 수습생으로 입학하여 인물 수업과 해부학 해부를 받았고, 옛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모방했다.[14] 이 시기 그에게 영감을 준 화가로는 토마스 게인즈버러, 클로드 로랭, 피터 폴 루벤스, 안니발레 카라치, 야코프 반 레이스달 등이 있었다.[14] 그는 또한 시와 설교를 폭넓게 읽었고, 훗날 뛰어난 언변을 가진 화가로도 알려졌다.

1802년, 그는 그레이트 말로우 육군 사관학교(현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사관학교)의 그림 교사직을 거절했는데, 이는 당시 로열 아카데미 학장이었던 벤자민 웨스트가 그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조언했기 때문이었다. 그해 컨스터블은 존 던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문 풍경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

그의 초기 스타일은 신선한 빛, 색상, 터치 등 성숙한 작품에서 나타나는 많은 특징들을 보여주며, 특히 클로드 로랭의 구성적 영향을 받았다.[16] 컨스터블의 일반적인 주제는 일상 생활의 장면이었는데, 이는 야생의 풍경과 폐허에 대한 더 로맨틱한 비전을 추구하던 당시에는 유행하지 않았다. 그는 때때로 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803년, 그는 로열 아카데미에 그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4월, 그는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 런던에서 딜까지 항해하는 동인도 회사의 배 '쿠츠'호에 거의 한 달 동안 승선하여 남동쪽 항구들을 방문했다.[17]

2. 2. 화가로서의 결심

존 컨스터블은 1799년 아버지를 설득하여 미술가의 길을 걷도록 허락을 받았고, 소액의 용돈을 받으며 로열 아카데미 스쿨에 수습생으로 입학했다. 그곳에서 인물 수업과 해부학 해부를 받았고, 옛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모방했다. 이 시기 컨스터블에게 영감을 준 화가로는 토마스 게인즈버러, 클로드 로랭, 피터 폴 루벤스, 안니발레 카라치, 야코프 반 레이스달 등이 있었다.[14] 그는 시와 설교도 폭넓게 읽었으며, 훗날 언변이 뛰어난 화가로도 알려지게 되었다.

1802년, 컨스터블은 그레이트 말로우 육군 사관학교(현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 사관학교)의 그림 교사직을 거절했다. 당시 로열 아카데미 학장이었던 벤자민 웨스트는 이 직책이 그의 경력에 종지부를 찍을 것이라고 조언했다.[15] 그 해, 컨스터블은 존 던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문 풍경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컨스터블의 초기 스타일은 성숙한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선한 빛, 색상, 터치 등의 많은 특징을 이미 보여주고 있었으며, 클로드 로랭을 비롯한 옛 거장들의 구성적 영향을 받았다.[16] 그는 일상 생활의 장면을 주로 그렸는데, 이는 야생의 풍경과 폐허에 대한 낭만적인 비전을 추구하던 당시에는 유행하지 않는 주제였다. 그는 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나기도 했다.

1803년, 컨스터블은 로열 아카데미에 그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4월에는 동인도 회사의 배 '쿠츠(Coutts)'호에 한 달 가까이 승선하여 런던에서 딜까지 항해하며 동남쪽 항구들을 방문했다.[17]

1806년, 컨스터블은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두 달 동안 여행했다.[18] 그는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찰스 레슬리에게 산의 고독함이 자신의 기분을 억누른다고 말했으며, 레슬리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컨스터블은 겨울에는 런던에서, 여름에는 이스트 버골트에서 그림을 그리는 생활을 했다. 1811년, 그는 처음으로 솔즈베리의 존 피셔와 그의 가족을 방문했는데, 솔즈베리 대성당과 주변 풍경은 그의 가장 위대한 그림들의 영감이 되었다.

생계를 위해 컨스터블은 초상화도 그렸는데, 스스로는 따분하게 여겼지만 많은 훌륭한 초상화를 남겼다. 그는 종종 종교 그림도 그렸지만, 존 워커에 따르면 "컨스터블의 종교 화가로서의 무능함은 과장해서 말할 수 없다."[20]

또 다른 수입원은 시골 저택 그림이었다. 1816년, 컨스터블은 프랜시스 슬레이터 리보 장군으로부터 그의 시골 집인 '위벤호 공원'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21] 장군은 또한 알레스퍼드 홀 부지에 있는 낚시 별장의 작은 그림도 의뢰했는데,[21] 이 그림은 현재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22] 컨스터블은 이러한 의뢰로 받은 돈을 마리아 빅넬과의 결혼 자금으로 사용했다.[21] 이 시기 컨스터블의 그림, 특히 1816년 작품인 '밀밭'은 세부 묘사가 풍부한 목가적인 시골 풍경을 담고 있다.[23]

3. 화가로서의 경력

존 컨스터블은 풍경화가로서 꾸준히 경력을 쌓았다. 1802년 그레이트 말로우 육군 사관학교(현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 사관학교)의 그림 교사직을 거절했는데, 이는 왕립예술원(RA) 학장이었던 벤자민 웨스트가 그의 경력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조언했기 때문이었다.[15] 같은 해, 컨스터블은 존 던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문 풍경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밝혔다.[15]

초기에는 옛 거장들의 영향을 받았지만, 자신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을 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클로드 로랭의 구성적 영향을 받았으며, 일상생활의 장면을 주로 그렸는데, 이는 당시 유행하던 낭만적인 풍경과는 다른 것이었다.[16] 1803년 로열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전시하기 시작했고,[17] 1806년에는 레이크 디스트릭트를 여행하기도 했다.[18] 생계를 위해 초상화와 종교 그림도 그렸지만,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20]

1816년 프랜시스 슬레이터 리보 장군으로부터 위벤호 공원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고,[21] 이 그림은 현재 워싱턴 국립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컨스터블은 이 의뢰로 받은 돈을 마리아 빅넬과의 결혼 자금으로 사용했다.[21]

1819년, 첫 번째 주요 그림인 ''흰말''을 친구 존 피셔에게 100기니(화폐)에 팔았다.[32] 이 그림의 성공으로 왕립예술원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33] 이후 '6피트 그림' 시리즈를 그리게 되었다. 이 시리즈는 그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건초 수레''(1821)는 파리 살롱에서 샤를 10세로부터 금메달을 받기도 했다.[40] ''수문''은 1824년에 전시되어 첫날 150기니(화폐)에 팔렸는데,[43] 이는 컨스터블의 작품 중 유일한 경우였다.[44]

3. 1. 초기 작품 활동

존 컨스터블은 서퍽 주(Suffolk) 스터 강(River Stour)에 있는 이스트 버골트(East Bergholt) 마을에서 태어났다.[6] 그의 아버지는 부유한 곡물 상인이었으며, 이스트 버골트에 있는 플랫퍼드 밀(Flatford Mill)과 에식스(Essex)에 있는 데덤 밀(Dedham Mill)의 소유주였다.[7] 컨스터블은 부모의 둘째 아들이었지만, 그의 형은 지적 장애를 갖고 있었고, 존은 아버지의 사업을 물려받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래번햄(Lavenham)의 기숙학교에 잠깐 다닌 후,[8] 에식스 주 데덤에 있는 낮 학교에 다녔다.[9] 컨스터블은 학교를 떠난 후 곡물 사업에 종사했지만, 그의 남동생 아브람이 결국 밀 운영을 맡았다.[10]

젊은 시절, 컨스터블은 주변 서퍽과 에식스 시골에서 아마추어 스케치 여행을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예술 작품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11] 그는 자신의 말로 이러한 풍경들이 "나를 화가로 만들었고, 나는 감사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밀 댐에서 빠져나오는 물소리, 버드나무, 오래되고 썩은 판자, 미끈미끈한 기둥과 벽돌, 나는 그런 것들을 좋아한다."[12] 그는 수집가인 조지 보몬트 경(Sir George Beaumont, 7th Baronet)과 만나게 되었는데, 보몬트 경은 그에게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의 귀중한 작품인 '하갈과 천사(Hagar and the Angel)'를 보여주었고, 이는 컨스터블에게 영감을 주었다.[13] 나중에 미들섹스(Middlesex)의 친척들을 방문하는 동안, 그는 전문 화가인 존 토마스 스미스(John Thomas Smith, 1766–1833)를 만나게 되었는데, 스미스는 그림에 대한 조언을 해주었지만 동시에 직업적으로 미술을 하기보다는 아버지의 사업에 남아 있을 것을 권했다.

1799년, 컨스터블은 아버지를 설득하여 미술 경력을 쌓도록 허락을 받았고, 골딩은 그에게 소액의 용돈을 주었다. 그는 로열 아카데미 스쿨(Royal Academy Schools)에 수습생으로 입학하여 인물 수업과 해부학 해부를 받았고, 옛 거장들의 작품을 연구하고 모방했다. 이 기간 동안 그에게 특히 영감을 준 작품들에는 토마스 게인즈버러(Thomas Gainsborough), 클로드 로랭, 피터 폴 루벤스(Peter Paul Rubens), 안니발레 카라치(Annibale Carracci), 야코프 반 레이스달(Jacob Isaakszoon van Ruisdael)의 그림이 있었다.[14] 그는 또한 시와 설교를 폭넓게 읽었고, 나중에는 뛰어난 언변의 화가로 입증되었다.

1802년 그는 그레이트 말로우 육군 사관학교(현 샌드허스트 왕립 육군 사관학교(Royal Military College, Sandhurst))의 그림 교사직을 거절했는데, 이는 당시 RA의 학장이었던 벤자민 웨스트(Benjamin West)가 그의 경력의 끝을 의미할 것이라고 조언했던 결정이었다. 그 해, 컨스터블은 존 던손(John Dunthorne)에게 보낸 편지에서 전문 풍경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분명히 했다.

그의 초기 스타일은 신선한 빛, 색상, 터치 등 성숙한 작품과 관련된 많은 특징들을 가지고 있으며, 그가 연구했던 옛 거장들, 특히 클로드 로랭의 구성적 영향을 보여준다.[16] 컨스터블의 일반적인 주제인 일상 생활의 장면은 야생의 풍경과 폐허에 대한 더 로맨틱한 비전을 추구했던 시대에는 유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때때로 더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1803년, 그는 로열 아카데미에서 그림을 전시하기 시작했다. 4월에는 중국으로 출발하기 전 런던에서 딜까지 항해하는 동안 동남쪽 항구들을 방문했던 동인도 회사(East Indiaman)의 배 '쿠츠(Coutts)'호(1797 EIC ship)에 거의 한 달 동안 승선했다.[17]

1806년 컨스터블은 레이크 디스트릭트(Lake District)를 두 달 동안 여행했다.[18] 그는 그의 친구이자 전기 작가인 찰스 레슬리(Charles Leslie)에게 산의 고독함이 그의 기분을 억누르고 있다고 말했다.

컨스터블은 겨울에는 런던에서, 여름에는 이스트 버골트에서 그림을 그리는 일상을 채택했다. 1811년 그는 처음으로 솔즈베리(Salisbury)에 있는 존 피셔(John Fisher, Anglican bishop)와 그의 가족을 방문했는데, 이 도시의 대성당과 주변 풍경은 그의 가장 위대한 그림들 중 일부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컨스터블은 초상화를 그렸는데, 그는 초상화를 따분하게 여겼지만, 많은 훌륭한 초상화를 제작했다. 그는 종종 종교 그림도 그렸지만, 존 워커(John Walker)에 따르면 "컨스터블의 종교 화가로서의 무능함은 과장해서 말할 수 없습니다."[20]

또 다른 수입원은 시골 저택 그림이었다. 1816년, 그는 프랜시스 슬레이터 리보(Francis Slater Rebow) 장군으로부터 그의 시골 집인 '위벤호 공원(Wivenhoe Park, Essex)'을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았다.[21] 장군은 또한 알레스퍼드 홀(Alresford Hall) 부지에 있는 낚시 별장의 작은 그림을 의뢰했는데,[21] 현재는 빅토리아 국립 미술관(National Gallery of Victoria)에 있다.[22] 컨스터블은 이러한 의뢰로 받은 돈을 마리아 빅넬(Maria Bicknell)과의 결혼 자금으로 사용했다.[21] 컨스터블의 이 시기 그림은 특히 1816년 작품인 '밀밭(The Wheat Field)'처럼 세부 묘사가 풍부한 목가적인 시골 풍경으로 가득 차 있다.[23]

3. 2. 결혼과 가정 생활

1809년부터 콘스터블은 마리아 엘리자베스 빅넬과 어린 시절부터 깊은 사랑을 키워왔다. 1816년, 40세가 된 콘스터블은 마리아와 결혼하고자 했으나, 마리아의 할아버지이자 이스트 버골트의 교구목사인 르후드 박사는 콘스터블 가문을 사회적으로 낮게 여겨 반대하며 마리아에게 상속을 포기하라고 위협했다. 마리아의 아버지 찰스 빅넬은 조지 4세와 해군성의 변호사[24]였기에 마리아의 상속 포기를 꺼렸다. 마리아는 존에게 돈 없이 결혼하면 그림 경력을 쌓을 기회를 잃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골딩과 앤 콘스터블은 결혼을 승낙했지만, 콘스터블이 재정적으로 안정될 때까지 지원할 여력은 없었다. 그들이 잇달아 사망한 후, 콘스터블은 가업의 5분의 1을 상속받았다.

1816년 콘스터블이 그린 마리아 빅넬. 테이트 브리튼(Tate Britain).


1816년 10월,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St Martin-in-the-Fields)에서 존과 마리아의 결혼식(피셔가 주례)이 열렸고, 그들은 피셔의 사택에 머물며 남부 해안으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웨이머스와 브라이턴(Brighton)의 바다는 콘스터블에게 밝은 색채와 활기찬 붓놀림이라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하게 했다. 동시에 그의 예술에는 더 넓은 감정의 범위가 표현되기 시작했다.[25]

3. 3. '6피트 그림' 시리즈

컨스터블은 그림을 그려 생계를 유지했지만, 1819년에야 비로소 찰스 로버트 레슬리가 "여러모로 컨스터블이 그린 그림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묘사한 그의 첫 번째 중요한 그림인 ''흰말''을 팔았다.[31] 이 그림(액자 제외)은 친구 존 피셔에게 100기니라는 상당한 가격에 팔렸고, 컨스터블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수준의 재정적 자유를 얻게 되었다.[32]

''흰말''은 컨스터블의 경력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는데, 이 그림의 성공으로 그는 왕립예술원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33] 이는 스터어 강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를 그린 6점의 거대한 풍경화 시리즈, 즉 '6피트 그림들'(크기에서 따온 이름)로 이어졌다. 작품의 엄청난 크기는 경쟁이 치열한 아카데미 전시회에서 컨스터블이 주목을 받는 데 도움이 되었다.[34] '19세기 유럽에서 제작된 가장 복잡하고 강렬한 풍경화'로 여겨지는[35] 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경력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시리즈에는 다음 작품들이 포함된다.

그 다음 해, 그의 두 번째 6피트 그림인 ''스트랫퍼드 밀''이 전시되었다.[36] 더 이그재미너지는 이 그림을 "우리가 영국인이 그린 그림 중에서 본 것 중 가장 정확한 자연의 모습을 담고 있다"고 묘사했다.[36] 이 그림은 성공을 거두어 충실한 존 피셔가 100기니에 구입했는데, 그는 그 가격이 너무 낮다고 생각했다.[38] 피셔는 변호사이자 친구인 존 펀 티니를 위해 이 그림을 구입했다.[36] 티니는 이 그림을 너무나 좋아해서 컨스터블에게 짝 그림을 그려달라고 100기니를 더 제안했지만, 컨스터블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36]

''건초 수레'' (1821). 런던 내셔널 갤러리.


1821년,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건초 수레''가 왕립예술원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이 그림은 구매자를 찾지 못했지만, 당시의 중요 인물들, 그중 프랑스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와 작가 샤를 노디에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감상했다.[40]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에 따르면, 제리코는 컨스터블의 그림에 "매우 놀라서" 프랑스로 돌아왔고,[40] 노디에는 프랑스 화가들도 로마 여행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연을 관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0] 이 그림은 결국 1824년 영국-프랑스 상인 존 애로스미스가 ''데드햄 근처 스터어 강의 풍경''과 함께 구입했다.[37] 컨스터블은 ''야머스 부두''라는 소형 그림을 추가로 제공하여 총 250파운드에 판매되었다.[37] 두 그림 모두 그 해 파리 살롱에 전시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건초 수레''는 샤를 10세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다.[40]

들라크루아는 그의 저널에 컨스터블의 색채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그가 초원의 녹색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색조에 적용될 수 있다."[41] 들라크루아는 애로스미스 갤러리에서 컨스터블의 그림을 본 후 1824년 작품인 ''시오스섬의 학살''의 배경을 다시 그렸는데,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42]

''수문'' (1824). 개인 소장.


몇 가지 일들이 겹치면서 ''수문''은 1823년 전시회에 맞춰 완성되지 못했고, 훨씬 작은 ''주교의 정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이 컨스터블의 주요 출품작이 되었다.[36] 이것은 피셔가 컨스터블에게 그림값을 보낸 후에 발생했을 수 있다.[36] 이는 그를 재정적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림을 완성하도록 격려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36] 따라서 ''수문''은 다음 해에 더 큰 주목을 받으며 전시되었고, 전시 첫날 150기니에 팔렸는데,[43] 이는 컨스터블의 작품 중 유일하게 그런 경우였다.[44] ''수문''은 스터어 시리즈 중 유일한 세로 풍경화이며, 컨스터블이 두 가지 이상의 버전을 그린 유일한 6피트 그림이다. 현재 '포스터 버전'으로 알려진 두 번째 버전은 1825년에 그려졌고, 전시회에 보내기 위해 화가가 보관했다.[44] 세 번째 풍경 버전인 ''보트가 수문을 지나가는 모습''(1826)은 현재 왕립예술원 소장품이다.[45] 컨스터블의 마지막 작품인 ''뛰는 말''은 스터어 시리즈 중 컨스터블 생전에 팔리지 않은 유일한 6피트 그림이었다.[46]

3. 4. 프랑스에서의 인정

1821년,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건초 수레''가 왕립예술원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구매자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화가 테오도르 제리코와 작가 샤를 노디에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이 그림을 감상했다.[40]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에 따르면, 제리코는 컨스터블의 그림에 "매우 놀라서" 프랑스로 돌아왔고,[40] 노디에는 프랑스 화가들도 로마 여행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연을 관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0] 결국 1824년 영국-프랑스 상인 존 애로스미스가 ''데드햄 근처 스터어 강의 풍경''과 함께 ''건초 수레''를 구입했다.[37] 컨스터블은 ''야머스 부두''라는 소형 그림을 추가로 제공하여 총 250GBP에 판매했다.[37] 두 그림 모두 그 해 파리 살롱에 전시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건초 수레''는 샤를 10세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다.[40] 이후 ''건초 수레''는 수집가 헨리 본이 구입하여 1886년 내셔널 갤러리에 기증했다.

들라크루아는 그의 저널에 컨스터블의 색채에 대해 "그가 초원의 녹색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색조에 적용될 수 있다."라고 적었다.[41] 들라크루아는 애로스미스 갤러리에서 컨스터블의 그림을 본 후 1824년 작품인 ''시오스섬의 학살''의 배경을 다시 그렸는데, 이는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42]

3. 5. 후기 작품 활동과 죽음

컨스터블은 그림으로 생계를 유지했지만, 1819년이 되어서야 첫 번째 대작 ''흰말''을 팔았다.[31] 이 그림은 친구 존 피셔에게 100기니에 팔렸고, 컨스터블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재정적 자유를 얻게 되었다.[32] ''흰말''의 성공으로 그는 왕립예술원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33] 이는 스터어 강을 배경으로 한 6점의 거대한 풍경화 시리즈, 즉 '6피트 그림들'로 이어졌다.[34] 이 작품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의 경력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 시리즈에는 ''스트랫퍼드 밀''(1820), ''건초 수레''(1821), ''데드햄 근처 스터어 강의 풍경''(1822), ''수문''(1824), ''뛰는 말''(1825)이 포함된다.[31]

1821년,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건초 수레''가 왕립예술원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이 그림은 구매자를 찾지 못했지만, 테오도르 제리코와 샤를 노디에를 포함한 몇몇 사람들이 감상했다.[40] 외젠 들라크루아에 따르면, 제리코는 컨스터블의 그림에 "매우 놀라서" 프랑스로 돌아왔고,[40] 노디에는 프랑스 화가들도 로마 여행에 의존하기보다는 자연을 관찰해야 한다고 제안했다.[40] 이 그림은 결국 1824년 영국-프랑스 상인 존 애로스미스가 ''데드햄 근처 스터어 강의 풍경''과 함께 구입했다.[37] 컨스터블은 ''야머스 부두''라는 소형 그림을 추가로 제공하여 총 250파운드에 판매했다.[37] 두 그림 모두 파리 살롱에 전시되어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건초 수레''는 샤를 10세로부터 금메달을 수여받았다.[40]

들라크루아는 그의 저널에 컨스터블의 색채에 대해 "그가 초원의 녹색에 대해 말하는 것은 모든 색조에 적용될 수 있다."라고 적었다.[41] 들라크루아는 애로스미스 갤러리에서 컨스터블의 그림을 본 후 1824년 작품인 ''시오스섬의 학살''의 배경을 다시 그렸는데, 그는 그것이 자신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42]

''수문''은 1824년에 전시되어 첫날 150기니에 팔렸다.[43] 이는 컨스터블의 작품 중 유일한 경우였다.[44] 컨스터블의 마지막 작품인 ''뛰는 말''은 스터어 시리즈 중 컨스터블 생전에 팔리지 않은 유일한 6피트 그림이었다.[46]

1824년부터 1828년까지 컨스터블은 아내의 건강을 위해 가족과 함께 브라이턴에 거처를 마련했다.[2] 이 기간 동안 컨스터블은 대규모의 스터어 지방 풍경화에서 해안 풍경화로 전환했다.[49] 그는 브라이턴이 그림의 소재로 적합한지 확신하지 못했지만,[50] 6피트 크기의 대형 캔버스 작품을 계속 그렸다.[50]

컨스터블은 생전에 영국에서 20점의 그림만을 판매했지만, 프랑스에서는 불과 몇 년 만에 20점 이상을 판매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작품을 홍보하기 위해 국제적인 여행 초청을 모두 거절했다.[20] 1825년, 아내의 건강 악화, 브라이턴 생활의 불편함, 그리고 많은 미결제 의뢰 건들로 인해 애로스미스와 다툼을 벌여 프랑스 판매처를 잃었다.

''헤일리 성'' (1829). 예일 영국미술센터.


'체인 피어, 브라이턴'은 그가 브라이턴을 소재로 한 유일한 야심찬 6피트 크기의 그림으로, 1827년에 전시되었다.[53] 컨스터블 부부는 마리아의 건강을 위해 5년 동안 브라이턴에 머물렀지만, 소용이 없었다.[53] 1828년 1월 일곱 번째 아이를 낳은 후 그들은 햄프스테드로 돌아왔고, 마리아는 11월 23일 41세의 나이로 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54] 깊은 슬픔에 잠긴 컨스터블은 그의 형 골딩에게 "나는 매시간 내가 떠나보낸 천사를 잃은 것을 느낀다. 하나님만이 나의 아이들이 어떻게 자랄지 아실 것이다...세상의 모습은 나에게 완전히 바뀌었다"라고 썼다.[55]

그 후 그는 검은 옷을 입고 "우울함과 불안한 생각에 시달렸다". 그는 남은 생애 동안 일곱 아이들을 혼자 돌보았다. 찰스 골딩 컨스터블만이 자손을 남겼다.[56]

마리아가 죽기 직전 그녀의 아버지도 사망하여 그녀에게 20000파운드를 남겼다. 컨스터블은 그 돈을 가지고 그의 풍경화 몇 점의 메조틴트 제작에 돈을 썼다. 컨스터블은 데이비드 루카스와 긴밀하게 협력했는데, 그중 하나는 컨스터블이 연필과 물감으로 수정한 13단계의 교정 과정을 거쳤다. 컨스터블은 "루카스는 나의 결점 없이 나를 대중에게 보여주었다"고 말했지만, 그 사업은 재정적으로 성공하지 못했다.[58]

''초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 (1831). 테이트 브리튼.


이 기간 그의 예술은 이전 단계의 평온함에서 더욱 깨지고 강조된 스타일로 변화했다.[54] 그의 마음의 혼란과 고뇌는 후기 6피트 걸작인 ''헤일리 성''(1829)[54]과 ''초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1831)에서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는 52세이던 1829년 2월 왕립예술원 회원으로 선출되었다. 1831년에는 왕립예술원 방문자로 임명되었는데,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것 같다.

그는 풍경화의 역사에 대한 공개 강연을 시작했는데, 저명한 청중들이 참석했다. 왕립 연구소의 일련의 강연에서 컨스터블은 세 가지 논제를 제시했다. 첫째, 풍경화는 시적인 것뿐만 아니라 과학적이기도 하다. 둘째, 상상력만으로는 현실과 비교할 만한 예술 작품을 만들어낼 수 없다. 셋째, 위대한 화가는 스스로 가르친 적이 없다.

그는 또한 단순한 "모방"이라고 생각한 새로운 고딕 리바이벌 운동에 반대했다.

1835년 왕립예술원 학생들을 위한 그의 마지막 강연에서 그는 라파엘로를 칭찬하고 아카데미를 "영국 미술의 요람"이라고 불렀는데, "매우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59] 그는 1837년 3월 31일 밤 심부전으로 사망했으며, 런던 햄프스테드의 세인트 존-앳-햄프스테드 교회 묘지에 마리아와 함께 묻혔다.

4. 예술적 특징과 영향

컨스터블은 전통적인 풍경화 기법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 세계를 구축했다. 그는 1802년 존 던손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처음 시작했던 것과 같은 고상한 정신으로 자연을 묘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지만, 오히려 나의 작품이 다른 사람들의 작품처럼 보이도록 노력했습니다…자연주의 화가에게는 충분한 공간이 있습니다. 오늘날의 큰 악덕은 브라부라(bravura), 즉 진실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하려는 시도입니다."라고 밝히며, 자연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드러냈다.[15]

그의 초기 스타일은 성숙한 작품에서 나타나는 신선한 빛, 색상, 터치 등의 특징을 이미 보여주고 있으며, 클로드 로랭을 비롯한 옛 거장들의 구성적 영향을 반영하고 있다.[16] 그는 당시 유행하던 낭만적인 풍경 대신 일상 생활의 장면을 주로 그렸다.

아내의 사망 이후, 그의 예술은 이전의 평온함에서 벗어나 더욱 격정적이고 강조된 스타일로 변화했다.[54] 그의 마음속 혼란과 고뇌는 후기 대표작인 ''헤일리 성''(1829)[54]과 ''초원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1831)에 잘 나타나 있으며, 이 작품들은 그의 가장 표현력이 풍부한 작품으로 손꼽힌다.

컨스터블은 자신의 재능을 '스터 강에 있는 모든 것' 덕분이라고 여겼지만, 전기 작가인 앤서니 베일리는 그의 예술적 발전이 그의 부유한 친척인 토마스 앨런의 영향과 그가 컨스터블에게 소개한 런던 인맥 덕분이라고 보았다.[61]

컨스터블은 생전에 영국에서 20점의 그림만을 판매했지만, 프랑스에서는 불과 몇 년 만에 20점 이상을 판매했다.[20] 그의 작품은 테오도르 제리코외젠 들라크루아와 같은 동시대 프랑스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으며, 바비종파와 19세기 후반 프랑스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4. 1. 자연주의 화풍

컨스터블은 당시 주류 예술 사조였던, 상상력을 통해 그림을 구성하는 방식에 조용히 반기를 들었다. 그는 레슬리에게 "자연에서 스케치를 하려고 앉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림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60]

컨스터블은 평생 동안 후원자와 왕립 예술 아카데미 전시회를 위한 "완성된" 그림을 제작했지만, 현장 연구라는 형태의 끊임없는 새로움은 그의 작업 방식에 필수적이었다. 그는 공식을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못했다. 그는 "세상은 넓고, 하루도 같지 않고, 두 시간도 같지 않으며, 창세 이후로 나무의 잎 두 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진정한 산물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진정한 산물은 서로 모두 다릅니다."라고 썼다.[62]

컨스터블은 완성된 그림에 앞서 구성을 미리 테스트하기 위해 자신의 풍경화에 대한 많은 대형 예비 유화 스케치를 그렸다. 그의 자유롭고 활기찬 붓놀림이 특징인 이러한 대형 스케치는 당시 혁명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예술가, 학자 및 일반 대중의 관심을 계속 끌고 있다. 예를 들어, 유화 스케치인 ''말의 도약''과 ''건초차''는 같은 주제를 다룬 컨스터블의 완성된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와 표현력을 전달한다. 아마도 컨스터블 작품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도 유화 스케치는 회고적으로 그를 아방가르드 화가, 풍경화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가져갈 수 있음을 보여준 화가로 드러낸다.

''스톤헨지'' (1835).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컨스터블의 수채화도 당시로서는 매우 자유로웠다. 거의 신비로운 1835년의 ''스톤헨지''는 이중 무지개를 배경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채화 중 하나로 여겨진다.[62] 1836년에 전시했을 때, 컨스터블은 제목에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였다. "황량하고 끝없는 황야에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스톤헨지의 신비로운 기념물은 과거 시대의 사건과 현재의 용도와 관련이 없으며, 모든 역사 기록을 넘어 전적으로 알 수 없는 시대로 당신을 되돌려 줍니다."[63]

대형 유화 스케치 외에도 컨스터블은 대기 조건 기록에 더욱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풍경과 구름에 대한 수많은 관찰 연구를 완성했다. 그의 물리적 효과의 힘은 그가 런던에서 전시한 대형 그림에서도 때때로 분명히 나타났다. 예를 들어, ''체인 피어'', 1827는 비평가로 하여금 "대기에는 특징적인 습도가 있어서 거의 우산을 쓰고 싶게 만든다"라고 쓰게 했다.[3]

''비구름이 있는 바다 풍경 연구'' (약 1824년). 왕립 예술 아카데미, 런던.


스케치 자체는 1780년경 로마에서 피에르-앙리 드 발랑시앵이 제작한 유화 스케치를 제외하고는 야외에서 주제를 직접 유화로 그린 최초의 작품이었다. 빛과 움직임의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컨스터블은 깨진 붓놀림을 사용했는데, 종종 작은 터치로 더 밝은 부분을 스크러블하여 전체 풍경을 감싸는 반짝이는 빛의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의 모든 연구 중 가장 표현적이고 강력한 작품 중 하나는 1824년 브라이턴에서 그린 ''비구름이 있는 바다 풍경 연구''로, 격렬한 어두운 붓놀림으로 바다에서 폭발하는 적운성 소나기의 즉각성을 포착한다.[52] 컨스터블은 또한 1831년 ''메도우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과 1833년 ''이스트 버골트의 오두막''에서와 같이 무지개 효과를 그리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하늘 연구에 스케치 뒷면에 종종 지배적인 기상 조건, 빛의 방향 및 시간을 적어 놓았는데, 하늘이 풍경화에서 "주요 음표, 규모의 기준 및 감정의 주요 기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64] 그는 이 습관에서 구름 분류에 대한 기상학자 루크 하워드의 선구적인 연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 포스터의 ''대기 현상에 대한 연구''의 컨스터블의 주석은 그가 기상 용어에 정통했음을 보여준다.[65] 컨스터블은 1821년 10월 23일 피셔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많은 하늘 그림을 그렸습니다. 모든 어려움, 그리고 그중 가장 어려운 어려움을 극복할 것입니다."라고 썼다.[66]

컨스터블은 한때 레슬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한정적이고 추상적인 예술은 모든 울타리 아래와 모든 골목길에서 발견되므로 아무도 그것을 주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67] 그는 자신의 정직한 기법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컨스터블의 예술은 테오도르 제리코들라크루아와 같은 동시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비종파와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인상파에도 영감을 주었다.

4. 2. 수채화와 유화 스케치

컨스터블은 완성된 그림에 앞서 구성을 미리 테스트하기 위해 자신의 풍경화에 대한 많은 대형 예비 스케치를 그렸다. 그의 자유롭고 활기찬 붓놀림이 특징인 이러한 대형 스케치는 당시 혁명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예술가, 학자 및 일반 대중의 관심을 계속 끌고 있다. 예를 들어, 유화 스케치인 ''말의 도약''과 ''건초차''는 같은 주제를 다룬 컨스터블의 완성된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와 표현력을 전달한다. 아마도 컨스터블 작품의 다른 어떤 측면보다도 유화 스케치는 회고적으로 그를 아방가르드 화가, 풍경화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가져갈 수 있음을 보여준 화가로 드러낸다.

컨스터블의 수채화도 당시로서는 매우 자유로웠다. 거의 신비로운 1835년의 ''스톤헨지''는 이중 무지개를 배경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채화 중 하나로 여겨진다.[62] 1836년에 전시했을 때, 컨스터블은 제목에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였다. "황량하고 끝없는 황야에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스톤헨지의 신비로운 기념물은 과거 시대의 사건과 현재의 용도와 관련이 없으며, 모든 역사 기록을 넘어 전적으로 알 수 없는 시대로 당신을 되돌려 줍니다."[63]

대형 유화 스케치 외에도 컨스터블은 대기 조건 기록에 더욱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풍경과 구름에 대한 수많은 관찰 연구를 완성했다. 그의 물리적 효과의 힘은 그가 런던에서 전시한 대형 그림에서도 때때로 분명히 나타났다. 예를 들어, ''체인 피어'', 1827는 비평가로 하여금 "대기에는 특징적인 습도가 있어서 거의 우산을 쓰고 싶게 만든다"라고 쓰게 했다.[3]

스케치 자체는 1780년경 로마에서 피에르-앙리 드 발랑시앵이 제작한 유화 스케치를 제외하고는 야외에서 주제를 직접 유화로 그린 최초의 작품이었다. 빛과 움직임의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컨스터블은 깨진 붓놀림을 사용했는데, 종종 작은 터치로 더 밝은 부분을 스크러블하여 전체 풍경을 감싸는 반짝이는 빛의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의 모든 연구 중 가장 표현적이고 강력한 작품 중 하나는 1824년 브라이턴에서 그린 ''비구름이 있는 바다 풍경 연구''로, 격렬한 어두운 붓놀림으로 바다에서 폭발하는 적운성 소나기의 즉각성을 포착한다.[52] 컨스터블은 또한 1831년 ''메도우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과 1833년 ''이스트 버골트의 오두막''에서와 같이 무지개 효과를 그리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하늘 연구에 스케치 뒷면에 종종 지배적인 기상 조건, 빛의 방향 및 시간을 적어 놓았는데, 하늘이 풍경화에서 "주요 음표, 규모의 기준 및 감정의 주요 기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64] 그는 이 습관에서 구름 분류에 대한 기상학자 루크 하워드의 선구적인 연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머스 포스터의 ''대기 현상에 대한 연구''의 컨스터블의 주석은 그가 기상 용어에 정통했음을 보여준다.[65] 컨스터블은 1821년 10월 23일 피셔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많은 하늘 그림을 그렸습니다. 모든 어려움, 그리고 그중 가장 어려운 어려움을 극복할 것입니다."라고 썼다.[66]

4. 3. 후대에 미친 영향

컨스테이블은 상상력을 사용하여 그림을 구성하는 대신 자연 그 자체를 사용하도록 가르치는 예술 문화에 조용히 반기를 들었다. 그는 "자연에서 스케치를 하려고 앉으면, 제일 먼저 하는 일은 그림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을 잊으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했다.[60]

컨스테이블은 평생 동안 후원자와 왕립 예술 아카데미 전시회를 위한 "완성된" 그림 시장을 위해 그림을 제작했지만, 현장 연구라는 형태의 끊임없는 새로움은 그의 작업 방식에 필수적이었다. 그는 "세상은 넓고, 하루도 같지 않고, 두 시간도 같지 않으며, 창세 이후로 나무의 잎 두 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진정한 산물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진정한 산물은 서로 모두 다릅니다."라고 썼다.[62]

컨스테이블은 완성된 그림에 앞서 구성을 미리 테스트하기 위해 자신의 풍경화에 대한 많은 대형 예비 스케치를 그렸다. 그의 자유롭고 활기찬 붓놀림이 특징인 이러한 대형 스케치는 당시 혁명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예술가, 학자 및 일반 대중의 관심을 계속 끌고 있다. 유화 스케치인 ''말의 도약''과 ''건초차''는 같은 주제를 다룬 컨스테이블의 완성된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와 표현력을 전달한다.

컨스테이블의 수채화도 당시로서는 매우 자유로웠다. 거의 신비로운 1835년의 ''스톤헨지''는 이중 무지개를 배경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채화 중 하나로 여겨진다.[62]

대형 유화 스케치 외에도 컨스테이블은 대기 조건 기록에 더욱 과학적으로 접근하기 위해 풍경과 구름에 대한 수많은 관찰 연구를 완성했다. 그의 물리적 효과의 힘은 그가 런던에서 전시한 대형 그림에서도 때때로 분명히 나타났다.

스케치 자체는 야외에서 주제를 직접 유화로 그린 최초의 작품이었다. 빛과 움직임의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컨스테이블은 깨진 붓놀림을 사용했는데, 종종 작은 터치로 더 밝은 부분을 스크러블하여 전체 풍경을 감싸는 반짝이는 빛의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의 모든 연구 중 가장 표현적이고 강력한 작품 중 하나는 1824년 브라이턴에서 그린 ''비구름이 있는 바다 풍경 연구''로, 격렬한 어두운 붓놀림으로 바다에서 폭발하는 적운성 소나기의 즉각성을 포착한다.[52]

그는 하늘 연구에 스케치 뒷면에 종종 지배적인 기상 조건, 빛의 방향 및 시간을 적어 놓았는데, 하늘이 풍경화에서 "주요 음표, 규모의 기준 및 감정의 주요 기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64]

컨스테이블은 한때 "내 한정적이고 추상적인 예술은 모든 울타리 아래와 모든 골목길에서 발견되므로 아무도 그것을 주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67] 그는 자신의 정직한 기법이 얼마나 영향력이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을 것이다. 컨스테이블의 예술은 제리코들라크루아와 같은 동시대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비종파와 19세기 후반의 프랑스 인상파에도 영감을 주었다.

2019년에 고인이 된 극작가이자 시인인 크리스토퍼 프라이의 소지품에서 컨스테이블의 그림 두 점이 발견되었는데, 이 그림은 나중에 경매에서 6만파운드와 3.2만파운드에 팔렸다.[68][69]

5. 주요 작품

컨스터블은 평생 동안 후원자와 왕립 예술 아카데미 전시회를 위한 "완성된" 그림을 그렸지만, 현장 연구를 통해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며 작업 방식에 필수적인 요소로 삼았다. 그는 공식을 따르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세상은 넓고, 하루도 같지 않고, 두 시간도 같지 않으며, 창세 이후로 나무의 잎 두 개도 같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연의 진정한 산물과 마찬가지로 예술의 진정한 산물은 서로 모두 다릅니다."라고 썼다.[62]

컨스터블은 자신의 재능이 '스토어 강에 있는 모든 것' 덕분이라고 여겼지만, 전기 작가인 앤서니 베일리는 그의 예술적 발전이 부유한 친척 토마스 앨런의 영향과 그가 소개한 런던 인맥 덕분이라고 보았다.[61]

컨스터블은 완성된 그림에 앞서 구성을 미리 테스트하기 위해 풍경화에 대한 많은 대형 예비 스케치를 그렸다. 자유롭고 활기찬 붓놀림이 특징인 이러한 대형 스케치는 당시 혁명적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예술가, 학자, 일반 대중의 관심을 끌고 있다. 예를 들어 유화 스케치인 ''말의 도약''과 ''건초차''는 같은 주제를 다룬 완성된 그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활기와 표현력을 전달한다. 유화 스케치는 컨스터블을 ''아방가르드'' 화가, 즉 풍경화를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끈 화가로 평가받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컨스터블의 수채화는 당시 기준으로 매우 자유로웠다. 특히 1835년에 그려진 ''스톤헨지''는 이중 무지개를 배경으로 하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채화 중 하나로 꼽힌다.[62] 1836년 전시 당시 컨스터블은 "황량하고 끝없는 황야에 멀리 떨어져 서 있는 스톤헨지의 신비로운 기념물은 과거 시대의 사건과 현재의 용도와 관련이 없으며, 모든 역사 기록을 넘어 전적으로 알 수 없는 시대로 당신을 되돌려 줍니다."라는 글을 덧붙였다.[63]

대형 유화 스케치 외에도 컨스터블은 대기 조건을 과학적으로 기록하기 위해 풍경과 구름에 대한 수많은 관찰 연구를 완성했다. 그의 물리적 효과에 대한 관심은 런던에서 전시한 대형 그림에서도 나타났다. 예를 들어 ''체인 피어'', 1827는 비평가로 하여금 "대기에는 특징적인 습도가 있어서 거의 우산을 쓰고 싶게 만든다"라고 쓰게 했다.[3]

1780년경 로마에서 피에르-앙리 드 발랑시앵이 제작한 유화 스케치를 제외하면, 컨스터블의 스케치는 야외에서 주제를 직접 유화로 그린 최초의 작품이었다. 빛과 움직임의 효과를 전달하기 위해 컨스터블은 깨진 붓놀림을 사용했는데, 종종 작은 터치로 더 밝은 부분을 스크러블하여 전체 풍경을 감싸는 반짝이는 빛의 인상을 만들어냈다. 그의 연구 중 가장 표현적이고 강력한 작품 중 하나는 1824년 브라이턴에서 그린 ''비구름이 있는 바다 풍경 연구''로, 격렬한 어두운 붓놀림으로 바다에서 폭발하는 적운성 소나기의 즉각성을 포착한다.[52] 컨스터블은 1831년 ''메도우에서 본 솔즈베리 대성당''과 1833년 ''이스트 버골트의 오두막''에서처럼 무지개 효과를 그리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컨스터블은 하늘 연구 스케치 뒷면에 지배적인 기상 조건, 빛의 방향, 시간을 기록했는데, 이는 하늘이 풍경화에서 "주요 음표, 규모의 기준 및 감정의 주요 기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64] 그는 기상학자 루크 하워드의 구름 분류에 대한 선구적인 연구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 포스터의 ''대기 현상에 대한 연구''에 대한 컨스터블의 주석은 그가 기상 용어에 정통했음을 보여준다.[65] 컨스테이블은 1821년 10월 23일 피셔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는 많은 하늘 그림을 그렸습니다. 모든 어려움, 그리고 그중 가장 어려운 어려움을 극복할 것입니다."라고 썼다.[66]

컨스테이블은 레슬리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한정적이고 추상적인 예술은 모든 울타리 아래와 모든 골목길에서 발견되므로 아무도 그것을 주울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67] 그는 자신의 정직한 기법이 제리코, 들라크루아, 바비종파, 19세기 후반 프랑스 인상파에 큰 영향을 주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목제작 연도소장비고
--1802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더 스터어1810필라델피아 미술관[70]
풍경: 두 소년의 낚시1813앵글시 수도원, 캠브리지셔
--1814, 1816년과 1831년 수정예일 영국미술센터, 뉴헤이븐
--1814크라이스트처치 맨션, 이프스위치
--1814–1815보스턴 미술관[71]
골딩 컨스터블의 꽃밭1815크라이스트처치 맨션, 이프스위치
골딩 컨스터블의 채소밭1815크라이스트처치 맨션, 이프스위치
--1816테이트 브리튼, 런던
와이븐호 공원, 에식스1816국립미술관 (워싱턴 D.C.), 워싱턴 D.C.
알레스퍼드 홀 뒤편의 숙소1816빅토리아 국립미술관, 멜버른
두 당나귀1816필라델피아 미술관[72]
웨이머스 만: 보울리즈 코브와 조던 힐1816–17내셔널 갤러리, 런던
--1817카디프 국립박물관
--1819루브르 박물관, 파리
햄프스테드 히스1820피츠윌리엄 박물관, 케임브리지
--1820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1821–22알테 나시오날갈레리, 베를린
솔즈베리 대성당 (주교의 땅에서 본)1823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런던
잠금장치1824개인 소장
브라이턴 해변c. 1824–26더니든 공공 미술관, 더니든
솔즈베리 대성당 (주교의 땅에서 본)1825프릭 컬렉션, 뉴욕시
옥수수밭1826내셔널 갤러리, 런던
데드햄 계곡1828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에든버러
해들리 성1829예일 영국미술센터와 스케치 테이트 브리튼
솔즈베리 대성당 (초원에서 본)1831테이트 브리튼, 런던
리처드 스틸 경의 오두막, 햄프스테드1832예일 영국미술센터
워털루 다리의 개통1832테이트 브리튼, 런던
--1835테이트 브리튼, 런던
무지개가 있는 햄프스테드 히스1836테이트 브리튼, 런던
--1836내셔널 갤러리, 런던
아룬델 밀과 성c. 1836–37톨레도 미술관, 톨레도, OH


5. 1. 그림 목록 (갤러리)

'''브라이턴의 체인 피어'''(Chain Pier, Brighton (painting)), 1826–27년, 캔버스에 유채, 테이트 브리튼, 런던.


찰스 로버트 레슬리는 컨스터블의 첫 번째 주요 그림인 ''흰말''(1819)을 "여러모로 컨스터블이 그린 그림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라고 묘사했다.[31] 이 그림은 친구 존 피셔에게 100기니에 팔렸고, 컨스터블은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재정적 자유를 얻게 되었다.[32] ''흰말''의 성공으로 컨스터블은 왕립예술원 준회원으로 선출되었고,[33] 이는 스터어 강을 배경으로 한 '6피트 그림들' 시리즈로 이어졌다.[34] 이 시리즈에는 ''스트랫퍼드 밀''(1820, 내셔널 갤러리, 런던), ''건초 수레''(1821, 내셔널 갤러리, 런던), ''데드햄 근처 스터어 강의 풍경''(1822, 헌팅턴 도서관 및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군), ''수문''(1824, 개인 소장), ''뛰는 말''(1825, 왕립예술원, 런던)이 포함된다.[31]

1821년, 그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건초 수레''가 왕립예술원 전시회에 출품되었다. 1824년 영국-프랑스 상인 존 애로스미스가 ''데드햄 근처 스터어 강의 풍경''과 함께 구입했고,[37] 컨스터블은 ''야머스 부두''를 추가하여 총 250파운드에 판매했다.[37] 두 그림은 파리 살롱에 전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고, ''건초 수레''는 샤를 10세로부터 금메달을 받았다.[40]

''수문''은 스터어 시리즈 중 유일한 세로 풍경화이며, 두 가지 이상의 버전을 그린 유일한 6피트 그림이다. '포스터 버전'으로 알려진 두 번째 버전은 1825년에 그려졌고,[44] 세 번째 버전인 ''보트가 수문을 지나가는 모습''(1826)은 현재 왕립예술원 소장품이다.[45] ''뛰는 말''은 스터어 시리즈 중 컨스터블 생전에 팔리지 않은 유일한 6피트 그림이었다.[46]

컨스터블의 수채화 ''스톤헨지''(1835)는 이중 무지개를 배경으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채화 중 하나로 여겨진다.[62]

''비구름이 있는 바다 풍경 연구''(1824)는 격렬한 어두운 붓놀림으로 바다에서 폭발하는 적운성 소나기의 즉각성을 포착한다.[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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