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젠 들라크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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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외젠 들라크루아는 1798년 프랑스에서 태어난 낭만주의 화가이다. 신고전주의 화가에게 사사받았으며, 1822년 살롱에 입선하며 화가로 데뷔했다. 대표작으로는 《단테의 배》, 《키오스 섬의 학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등이 있으며, 이국적인 풍경과 인물을 담은 작품도 다수 제작했다. 들라크루아는 1832년 모로코를 방문하여 오리엔탈리즘 화풍을 개척했으며, 룩셈부르크 궁전, 파리 시청 등 공공 건물의 벽화 작업에도 참여했다. 그는 표현적인 붓놀림과 색채 연구를 통해 인상주의에 영향을 미쳤고, 이국적인 취미는 상징주의에 영향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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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젠 들라크루아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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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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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페르디낭 빅토르 외젠 들라크루아 |
출생일 | 1798년 4월 26일 |
출생지 | 프랑스 일드프랑스 발드마른주 샤랑통생모리스 |
사망일 | 1863년 8월 13일 |
사망지 | 프랑스 파리 |
국적 | 프랑스 |
분야 | 회화, 석판인쇄 |
사조 | 낭만주의 |
대표작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키오스섬의 학살 |
묘소 | 페르 라셰즈 묘지 |
서명 | [[File:Delacroix autograph.svg|center|frameless|upright]] |
발음 | |
영어 발음 | IPA: /ˈdɛləkrwɑː/, /ˌdɛləˈkrwɑː/ |
프랑스어 발음 | IPA: |
2. 생애
1798년 파리 근교 샤랑통(현재의 생모리스)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샤를-프랑수아 드라크루아는 외교관이었지만, 빈 체제의 프랑스 대표로 알려진 탈레랑이 친아버지라는 가설이 있으며, 이는 상당한 근거가 있다.[47]
신고전주의 화가 피에르-나르시스 게랭(Pierre-Narcisse Guérin)에게 그림을 배워 1822년 『단테의 배』로 앙투안-장 그로의 추천을 받아 살롱(관전)에 입선했다. 1824년 살롱에는 『키오스 섬의 학살』을 출품했는데, 이 작품은 1822년에 실제로 일어난 사건을 소재로 하여 찬반 양론을 불러일으켰다. 그로는 이 작품을 "회화의 학살이다"라고 혹평했지만, 결국 정부에 매입되었다.
1830년 7월 혁명을 계기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제작했다.[48] 이 그림은 그의 초상화와 함께 구 프랑스 프랑 100프랑 지폐에 그려지기도 했다.
1832년 프랑스 정부의 외교 사절단의 기록 화가로 모로코를 방문했다. 1834년의 『알제리의 여인들』은 모로코 여행 당시의 데생을 바탕으로 제작한 것이다. 1830년대 이후 룩셈부르크 궁전, 파리 시청 등 정부 관련 대건축의 장식을 많이 맡았으며, 1863년 사망할 때까지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계속했다. 그의 아틀리에 겸 자택은 현재 국립 외젠 드라크루아 미술관이 되어 있다.
2. 1. 초기 생애

외젠 들라크루아(Eugène Delacroix)는 1798년 4월 26일 파리 근교 일드프랑스의 샤랑통 생모리스(생모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니는 가구 제작자 장-프랑수아 외뱅(Jean-François Oeben)의 딸인 빅투아르 외뱅(Victoire Oeben)이었다.
그는 그보다 훨씬 연상인 세 명의 형제자매가 있었다. 샤를-앙리 들라크루아(Charles-Henri Delacroix)는 나폴레옹 군대에서 장군으로 승진했고, 앙리에트는 외교관 레이몽 드 베르니낙 생모르(Raymond de Verninac Saint-Maur)와 결혼했다. 앙리는 6년 후 태어났으며, 1807년 6월 14일 프리틀란트 전투(Battle of Friedland)에서 전사했다.[6]
의학적인 이유로 외젠의 법적 아버지인 샤를-프랑수아 들라크루아(Charles-François Delacroix)는 외젠이 태어날 당시 생식 능력이 없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 가족의 친구이자 샤를 들라크루아의 후임 외무장관이었던 탈레랑(Talleyrand)은 외젠과 외모와 성격이 닮았고, 자신을 외젠의 친아버지로 여겼다.[7] 빈 체제의 프랑스 대표로 알려진 탈레랑이 친아버지라는 가설은 상당한 근거가 있다.[47] 탈레랑은 익명의 여러 의뢰를 통해 외젠을 지원했다.[8] 화가로서의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그는 탈레랑의 보호를 받았는데, 탈레랑은 왕정 복고와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국왕을 차례로 섬겼고, 궁극적으로 프랑스의 대영제국 대사를 역임했으며, 나중에는 나폴레옹 3세(Napoleon III)의 이복형제이자 탈레랑의 손자이며 프랑스 하원의 의장이었던 샤를 오귀스트 루이 조제프 드 모르니(Charles Auguste Louis Joseph, duc de Morny)의 보호를 받았다. 그의 법적 아버지인 샤를 들라크루아는 1805년에 사망했고, 어머니는 1814년에 사망하여 16세의 외젠은 고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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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초기 교육을 루이 르 그랑 고등학교(Lycée Louis-le-Grand)와 루앙의 피에르 코르네유 고등학교에서 받았다.[9] 그는 고전을 탐구했고, 그림으로 상을 받았다. 1815년 그는 피에르-나르시스 게랭(Pierre-Narcisse Guérin) 밑에서 자크-루이 다비드(Jacques-Louis David)의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훈련을 시작했다. 신고전주의 화가 피에르-나르시스 게랭(Pierre-Narcisse Guérin)에게 사사했다.[48]
2. 2. 초기 작품 활동
들라크루아의 그림 ''키오스 학살''은 1823~1825년 그리스 내전 당시 노예로 끌려갈 그리스 민간인들의 죽음을 보여준다.[12] 이 그림은 그가 그린 여러 현대 사건 그림 중 하나로, 터키, 영국, 러시아, 프랑스 정부에 대항하는 그리스 독립 전쟁에서 그리스를 지지하는 공식 정책을 표현하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새로운 낭만주의 양식의 선두 주자로 당국에 의해 빠르게 인정받았고, 이 그림은 국가에 의해 구매되었다. 하지만 그의 고통에 대한 묘사는 논란이 되었는데, 영웅적인 사건이나 다비드의 ''호라티우스의 맹세''처럼 용감하게 칼을 든 애국자들이 아니라 재난만이 묘사되었기 때문이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그림의 절망적인 어조를 비난했고, 화가 앙투안 장 그로는 이 그림을 "예술의 학살"이라고 불렀다.[11]죽은 어머니를 껴안고 있는 유아의 묘사에서 보이는 비통함은 특히 강력한 효과를 가져왔지만, 이 세부 묘사는 들라크루아의 비평가들에 의해 예술에 부적합하다고 비난받았다. 존 컨스터블의 그림과 리처드 파크스 보닝턴의 수채화 스케치와 그림을 감상한 후, 들라크루아는 하늘과 먼 풍경에 자유롭게 그린 광범위한 변화를 가했다.[13]
들라크루아는 그리스의 독립 전쟁을 지지하는 두 번째 그림을 제작했는데, 이번에는 1825년 터키군에 의한 미솔롱기 함락을 언급하고 있다.[14] 이 그림 ''미솔롱기 폐허 위의 그리스''는 우의적인 그림에 적절한 색채의 절제를 보여주며, 그리스 의상을 입고 가슴을 드러낸 여성이 끔찍한 광경 앞에서 간청하는 몸짓으로 팔을 반쯤 들고 있다. 그리스인들은 터키인에게 항복하기보다는 자살하고 도시를 파괴하기로 선택했다. 바닥에는 손이 보이는데, 잔해에 깔린 시체이다. 이 그림은 미솔롱기 시민과 폭정에 맞선 자유 사상에 대한 기념비로 기능한다. 들라크루아는 그리스에 대한 동정심뿐만 아니라 그가 매우 존경했던 시인 바이런 경이 그곳에서 사망했기 때문에 이 사건에 관심을 가졌다.[2]


1825년 영국 여행 중에는 토마스 로렌스와 리처드 파크스 보닝턴을 방문하였고, 영국 회화의 색채와 기법은 그의 유일한 전신 초상화인 ''루이-오귀스트 슈비터의 초상화''(1826~1830)에 대한 자극을 주었다. 거의 같은 시기에 들라크루아는 수많은 주제의 낭만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그중 많은 작품들은 30년 이상 그의 관심을 끌었다. 1825년까지 그는 셰익스피어를 삽화한 석판화를 제작했고, 그 후 곧 괴테의 파우스트를 소재로 한 석판화와 그림을 제작했다. ''자우르와 하산의 전투''(1826)와 ''앵무새를 든 여인''(1827)과 같은 그림들은 폭력과 관능이라는 주제를 소개했는데, 이는 반복되는 주제가 될 것이다.[15]
이러한 다양한 낭만적인 요소들은 ''사르다나팔의 죽음''(1827~1828)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의 죽음은 색채, 이국적인 의상, 비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감정적으로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사르다나팔의 죽음''은 포위된 왕이 그의 명령에 따라 그의 하인들, 첩들, 동물들을 죽이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문학적 출처는 바이런의 희곡이지만, 이 희곡에는 첩들의 학살에 대한 언급은 없다.[16]
사르다나팔의 차분한 초연함은 이 시기 유럽의 낭만주의 이미지에서 익숙한 자세이다. 수년 동안 다시 전시되지 않은 이 그림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죽음과 욕망이 얽힌 끔찍한 환상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목이 잘릴 위기에 처한 나체 여성의 몸부림인데, 이 장면은 최대의 효과를 위해 전경에 눈에 띄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구성의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이국적인 색채는 그림을 동시에 기쁘고 충격적으로 보이게 한다.
다양한 낭만주의적 관심사는 다시 ''리에주 주교의 살해''(1829)에서 종합되었다. 이 작품 또한 문학적 출처, 이번에는 스콧을 차용하여 중세 시대의 한 장면, 즉 그의 포로인 윌리엄 드 라 마르크가 주최한 난교 중에 살해된 리에주 주교 루이 드 부르봉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들라크루아가 루앙과 웨스트민스터 홀의 사법궁전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거대한 둥근 천장 내부를 배경으로, 드라마는 밝게 빛나는 식탁보 주변에 조직된 키아로스쿠로(명암 대비법)로 전개된다. 1855년 한 비평가는 이 그림의 생생한 기법을 "그림보다는 덜 완성되었지만, 스케치보다는 더 완성된, ''리에주 주교의 살해''는 화가에 의해 붓으로 한 번 더 칠하면 모든 것을 망칠 그 최고의 순간에 남겨졌다"고 묘사했다.[17]
2. 3. 낭만주의 운동
1825년 영국 여행 중 토마스 로렌스와 리처드 파크스 보닝턴을 방문한 경험은 영국 회화의 색채와 기법에 영향을 주어 그의 유일한 전신 초상화인 ''루이-오귀스트 슈비터(Louis-Auguste Schwiter)의 초상화(Portrait of Louis-Auguste Schwiter)''(1826~1830)를 탄생시켰다. 이 시기 들라크루아는 다양한 주제의 낭만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그중 다수는 30년 이상 그의 관심을 끌었다. 1825년까지 셰익스피어를 삽화로 한 석판화를 제작했고, 이후 괴테의 파우스트(Goethe's Faust)를 소재로 한 석판화와 그림을 제작했다. ''자우르와 하산의 전투(The Combat of the Giaour and Hassan)''(1826)와 ''앵무새를 든 여인(Woman with Parrot)''(1827)과 같은 그림들은 폭력과 관능이라는 주제를 다루었는데, 이는 이후로도 반복되는 주제가 된다.[15]이러한 낭만적인 요소들은 ''사르다나팔의 죽음(The Death of Sardanapalus)''(1827~1828)에서 하나로 합쳐졌다. 들라크루아가 그린 아시리아 왕 사르다나팔(Sardanapalus)의 죽음은 색채, 이국적인 의상, 비극적인 사건들로 가득 찬 감동적인 장면을 보여준다. 이 그림은 포위된 왕이 그의 명령에 따라 하인들, 첩들, 동물들을 죽이는 것을 수동적으로 지켜보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문학적 출처는 바이런의 희곡이지만, 이 희곡에는 첩들의 학살에 대한 언급은 없다.[16]
사르다나팔의 차분한 초연함은 이 시기 유럽 낭만주의 이미지에서 익숙한 자세이다. 수년 동안 다시 전시되지 않은 이 그림은 일부 비평가들에게 죽음과 욕망이 얽힌 끔찍한 환상으로 여겨져 왔다. 특히 충격적인 것은 목이 잘릴 위기에 처한 나체 여성의 몸부림인데, 이 장면은 최대의 효과를 위해 전경에 눈에 띄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구성의 관능적인 아름다움과 이국적인 색채는 그림을 동시에 기쁘고 충격적으로 보이게 한다.
낭만주의적 관심사는 ''리에주 주교의 살해(The Murder of the Bishop of Liège)''(1829)에서 다시 종합되었다. 이 작품은 문학, 특히 스콧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중세 시대의 한 장면을 묘사한다. 윌리엄 드 라 마르크(William de la Marck)에게 살해된 리에주 주교 루이 드 부르봉(Louis de Bourbon, Bishop of Liège)의 모습을 담고 있다. 들라크루아가 루앙(Rouen)과 웨스트민스터 홀(Westminster Hall)의 사법궁전(Palais de Justice) 스케치를 바탕으로 한 거대한 둥근 천장 내부를 배경으로, 드라마는 밝게 빛나는 식탁보 주변에 조직된 키아로스쿠로(명암 대비법)로 전개된다. 1855년 한 비평가는 이 그림의 생생한 기법을 "그림보다는 덜 완성되었지만, 스케치보다는 더 완성된, ''리에주 주교의 살해''는 화가에 의해 붓으로 한 번 더 칠하면 모든 것을 망칠 그 최고의 순간에 남겨졌다"고 묘사했다.[17]
thumb'' (1830), 루브르 박물관, 파리]]
들라크루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은 1830년에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다. 이 작품은 주제와 기법의 선택에서 낭만주의적 접근 방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의 차이점을 보여준다. 제리코의 낭만주의와도 다르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구성을 더욱 생생하게 전체적으로 느꼈고, 인물과 군중을 유형으로 생각했으며, 공화국의 자유라는 상징적인 인물로 그들을 지배했다.[18]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무기를 들고 삼색기 아래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며 전진하는 파리 시민들의 모습을 담고 있다. 들라크루아는 당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자유의 정신에 대한 낭만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켰지만,[18] 실제 사건, 즉 샤를 10세에 대한 1830년 혁명(루이 필립 1세를 권력에 올리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을 찬양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의지와 성격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19]
프랑스 정부가 이 그림을 구입했지만, 1832년에는 관리들이 자유를 찬양하는 것이 너무 선동적이라고 판단하여 공개적으로 전시하지 않았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라크루아는 여전히 벽화와 천장화에 대한 많은 정부 위임을 받았다.[21]
1848년 혁명 이후,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마침내 전시되었다. 현재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으며, 2012년 12월부터 2014년까지는 파드칼레 랭스의 루브르 랭스 박물관에 전시되었다.[22]
오른쪽에서 권총을 높이 들고 있는 소년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가브로슈 캐릭터의 영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23]
2. 4. 중기 작품 활동: 북아프리카 여행과 그 영향
1832년 들라크루아는 외교관 샤를-에드가르 드 모르네(Charles-Edgar de Mornay)와 함께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했다. 이는 프랑스가 알제리를 정복한 직후 모로코로 파견된 외교 사절단의 일환이었다. 그는 예술 공부보다는 파리의 문명에서 벗어나 더 "원시적인" 문화를 보기 위해 이 여행을 떠났다.[18] 그는 결국 북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배경으로 하거나 그들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100점이 넘는 회화와 그림을 제작하여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새로운 개인적인 장을 추가했다.[31] 들라크루아는 사람들과 그들의 옷차림에 매료되었으며, 이 여행은 그의 미래 회화 주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북아프리카인들이 그들의 복장과 태도에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 사람들과 시각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은 바로 여기에, 하얀 담요로 자신을 감싸고 카토나 브루투스처럼 보이는 아랍인들에게 있습니다...[18]
그는 알제에서 ''알제의 여인들(Women of Algiers in their Apartment)''(1834)에서처럼 몇몇 여성들을 비밀리에 스케치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의 가림을 요구하는 이슬람 규칙 때문에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해줄 무슬림 여성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Jewish Wedding in Morocco)''(1837–1841)의 주제처럼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여성들을 그리는 것은 덜 문제가 되었다.
탕헤르에 있는 동안 들라크루아는 사람들과 도시에 대한 많은 스케치를 했고,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이 주제로 돌아왔다.[33] 낭만적 열정의 구현인 동물들은 ''마구간에서 싸우는 아랍 말(Arab Horses Fighting in a Stable)''(1860), ''사자 사냥(The Lion Hunt)''(1856년과 1861년 사이에 그려진 여러 버전이 있음), ''아랍인이 말에 안장을 얹다(Arab Saddling his Horse)''(1855)와 같은 그림에 통합되었다.
2. 5. 후기 작품 활동: 벽화 작업과 말년
1833년부터 들라크루아는 파리의 공공 건물 장식을 위한 많은 의뢰를 받았다. 그 해 그는 부르봉 궁의 하원 의원실에 있는 살롱 뒤 루아 작업을 시작했는데, 이 작업은 1837년까지 완료되지 않았고, 여성 화가 마리-엘리자베트 블라보-불랑제와 평생의 우정을 시작했다.[36] 그 후 10년 동안 그는 부르봉 궁 도서관과 룩셈부르크 궁 도서관 모두에서 그림을 그렸다. 1843년 그는 생드니 뒤 생삭르망 교회에 대형 <피에타>를 장식했고, 1848년부터 1850년까지는 루브르 박물관의 아폴론 회랑 천장을 그렸다. 1857년부터 1861년까지는 파리 생-술피스 교회의 샤펠 데 잔주에 있는 프레스코화 작업을 했는데, 여기에는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 "용을 죽이는 성 미카엘", "성전에서 헬리오도루스를 쫓아내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36] 이러한 의뢰는 그가 파올로 베로네세, 틴토레토, 루벤스와 같은 자신이 존경하는 거장들처럼 건축 환경에서 대규모로 구성할 기회를 제공했다.이 작업은 힘들었고, 이 기간 동안 그는 점점 더 허약해지는 체질에 시달렸다. 1844년부터 파리의 집 외에도 샹프로사의 작은 오두막에서도 살았는데, 시골에서 휴식을 취했다. 18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그는 가정부 잔느-마리 르 기유의 충실한 간호를 받았는데, 그녀는 그의 사생활을 열심히 보호했고, 그의 헌신은 그의 생명과 말년까지 계속 일할 수 있는 능력을 연장했다.[37]
1862년 들라크루아는 국립미술협회 설립에 참여했다. 그의 친구인 작가 테오필 고티에가 회장이 되고, 화가 아이메 밀레가 부회장을 맡았다. 들라크루아 외에도 위원회는 카리에르-벨뢰즈와 푸비 드 샤반 화가들로 구성되었다. 출품자들 중에는 레옹 보나, 장-바티스트 카르포, 샤를-프랑수아 도비니, 귀스타브 도레, 그리고 에두아르 마네가 있었다. 1863년 사망 직후, 이 협회는 들라크루아의 회화와 석판화 248점에 대한 회고전을 조직했고, 더 이상 전시회를 열지 않았다.
1862년에서 1863년 겨울은 들라크루아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다. 그는 심한 인후염으로 고통받았고 계절이 지나면서 악화되었다. 샹프로사 여행 중 기차에서 친구를 만나 대화 후 기진맥진했다. 6월 1일 그는 의사를 만나러 파리로 돌아왔다. 2주 후인 6월 16일 그는 호전되어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7월 15일에는 다시 의사를 만날 정도로 병이 악화되었고, 의사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 그는 과일만 먹을 수 있었다. 들라크루아는 자신의 상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유언장을 작성하여 친구들에게 선물을 남겼다. 그는 신뢰하는 가정부 제니 르 기유에게 생활비를 충분히 남겨주면서 작업실의 모든 것을 팔도록 명령했다. 그는 또한 그의 얼굴의 어떤 묘사도 "죽음의 가면이든 그림이든 사진이든 금지합니다. 명백하게 금지합니다."라는 조항을 삽입했다.[38] 8월 13일 들라크루아는 제니의 곁에서 사망했다.[39] 그는 파리 페르 라셰즈 묘지에 묻혔다.
그의 집은 예전에는 마른 강 운하를 따라 있었지만, 현재는 파리에서 독일 중부로 가는 고속도로 출구 근처에 있다.
3. 작품 세계
들라크루아는 종교, 신화, 문학, 역사뿐만 아니라 현실의 풍속, 인물, 풍경, 정물 등 다양한 소재를 작품에 담았다. 유화, 데생, 수채화, 파스텔화, 판화 등 방대한 양의 작품을 제작했으며, 예술에 대한 깊은 생각과 관찰을 일기, 평론, 편지 등에 기록했다. 그의 작품에는 자연을 통해 현실을 초월한 진실 속에 존재하는 인간의 모습과 영웅적인 모습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이 담겨 있다.[53]
윌리엄 셰익스피어, 바이런의 문학 작품과 미켈란젤로의 예술성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 또한, 음악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을 느껴, 1855년에는 "음악이 불러일으키는 감동과 비교할 만한 것은 없다. 음악은 비할 데 없는 감정의 뉘앙스를 표현한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생-술피스 교회에서 작업하는 동안에는 음악이 그를 그림에 영감을 주는 "흥분" 상태에 빠뜨렸다고 한다. 쇼팽의 가장 멜랑콜리한 연주곡이나 베토벤의 "田園" 작품과 같이, 들라크루아는 종종 음악으로부터 가장 큰 감정과 영감을 얻었다. 그는 쇼팽과 친구가 되어 초상화를 그렸고, 그의 일기에서 쇼팽을 자주 칭찬했다.[34]
보들레르는 "들라크루아는 열정에 열정적으로 사랑에 빠져있었으나, 열정을 표현하는 데에는 가능한 한 명료하고 냉정하게 결연했다."라고 평했다.[56]
대표작으로는 《히오스섬의 학살》,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단테의 배》 등이 있다.
1864년 그의 작품 경매에서는 회화 853점, 파스텔화와 수채화 1525점, 드로잉 6629점, 석판화 109점, 스케치북 60권이 넘는 등 총 9140점의 작품이 들라크루아의 작품으로 인정받았다.[40] 그는 "색깔은 항상 나를 사로잡지만, 드로잉은 나를 사로잡는다."라고 말하며 드로잉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들라크루아는 여러 자화상과 동료 화가인 슈비터 남작의 초상화, 바이올리니스트 니콜로 파가니니에게서 영감을 받은 작은 유화, 프레데리크 쇼팽과 조르주 상의 겹친 초상화인 프레데리크 쇼팽과 조르주 상의 초상 등 기억에 남는 초상화들을 그렸다. 때로는 순수한 풍경화(''디에프의 바다'', 1852년)와 정물화(''가재가 있는 정물'', 1826-27년)를 그리기도 했는데, 이 두 작품 모두 그의 인물화 작품에서 볼 수 있는 화려한 기교를 보여준다.[41]
한편, 들라크루아의 스케치는 작가 동정을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있다. 1966년 존슨의 논문[50]은 제자 피에르 안드리우의 제르망토 성 회랑 천장화 중 하나인 "케레스를 찬양하여"(1866년)를 다루었다. 이 논문은 코펜하겐 국립 미술관의 펜 스케치 등, 지금까지 파리 구 시청 1층 "평화의 방" 천장화를 위한 들라크루아의 스케치로 여겨져 왔던 몇몇 작품을 제자 안드리우의 습작으로 규정했다. 들라크루아 사후, 그의 아틀리에에 남아 있던 작품들 중 가짜 아틀리에 도장이 확인되는 한편,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그의 스케치 대부분이 미술 시장에 유통되었기 때문에, 현재는 루브르 박물관을 비롯한 각지의 미술관에서 들라크루아의 스케치에 대한 재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많은 연구 과제를 남기고 있다.
3. 1. 다른 화가들과의 관계
테오도르 제리코의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요절을 애도했다. 아카데미 드 보자르에 들라크루아가 입회를 허락받았을 때, 낭만주의의 대표 주자 들라크루아와 견줄 만한 신고전주의의 주도자 도미니크 앵그르는 "나는 이 어리석은 세기와 결별하고 싶다."라고 말했다.[50] 극적인 화면 구성과 화려한 색채 표현은 르누아르와 고흐 등 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들라크루아의 표현적인 붓놀림과 색의 광학적 효과에 대한 연구는 인상주의자들의 작업에 영향을 끼쳤고, 동시에 이국적 취미에 대한 열정은 상징주의 운동의 예술가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주요한 라이벌인 도미니크 앵그르의 신고전주의적 완벽주의와는 대조적으로, 들라크루아는 루벤스의 예술과 베네치아 르네상스의 화가들에게서 외곽선의 명료성과 세밀하게 본을 뜬 형태보다는 그들의 색과 운동에 대한 강조에서 영감을 얻었다.[54] 테오도르 제리코의 친구이자 정신적인 상속자로서 들라크루아는 자주 난폭함을 보여주는 "장엄의 힘"에 대한 강한 동일시를 공유했던 바이런에게서도 영감을 얻었다.[55]
1862년 들라크루아는 국립미술협회 설립에 참여했다. 그의 친구인 작가 테오필 고티에가 회장이 되고, 화가 아이메 밀레가 부회장을 맡았다. 들라크루아 외에도 위원회는 카리에르-벨뢰즈와 푸비 드 샤반 화가들로 구성되었다.
3. 2. 들라크루아의 일기
들라크루아의 일기는 1822년에 시작되어 1824년에 중단되었다가 1847년에 재개되어 1863년 그가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이 일기는 들라크루아의 문필 중 대표작이다. 일기에는 회화, 시, 음악에 대한 고찰과 조르주 상드, 조제핀 드 포르주 여남작, 쇼팽, 샤브리에 등과의 논의가 기록되어 있다. 이 일기는 단순히 화가의 일상생활이나 걱정거리뿐만 아니라 19세기 중반 파리 생활에 대한 증언이기도 하다.[42]들라크루아의 일기는 1893년 Plon 출판사에서 출판되었고, 같은 출판사에서 1932년 개정판, 1980년에는 위베르 다미슈의 서문을 붙인 재편집판이 출판되었다. 2009년에는 원고의 수정과 최근 발견을 바탕으로 증보한 미셸 아누쉬의 방대한 비평판이 조제 코르티 출판사에서 간행되었다.
들라크루아는 미술 사전 초고(안 라뤼 편집, 출판)와 회화에 관한 글도 남겼다.
4. 주요 작품
제목 | 제작 연도 | 소장처 | 이미지 |
---|---|---|---|
단테의 배 | 1822년 | 루브르 박물관 | -- |
히오스섬의 학살 | 1823년 ~ 1824년 | 루브르 박물관 | -- |
묘지의 고아 | 1824년 | 루브르 박물관 | -- |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 | 1826년 | 보르도 미술관 | -- |
이교도와 하산의 싸움 | 1826년 | 시카고 미술관 | --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 루브르 박물관 | -- |
리에주 주교의 암살 | 1829년 | 루브르 박물관 |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0년 | 루브르 박물관 | -- |
어미 호랑이와 장난치는 새끼 호랑이 | 1831년 | 루브르 박물관 | -- |
알제의 여인들 | 1834년 | 루브르 박물관 | |
프레데리크 쇼팽의 초상화 | 1838년 | 루브르 박물관 | -- |
묘지에 있는 햄릿과 호라티오 | 1839년 | 루브르 박물관 | -- |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 1841년 | 루브르 박물관 | -- |
측근에게 둘러싸인 모로코의 술탄 | 1845년 | 오귀스탱 미술관 | -- |
지옥의 변방 | 룩셈부르크궁 도서실 |
4. 1. 회화
들라크루아는 생애 동안 수백 점의 회화 작품을 제작했으며, 특히 기독교에 대한 강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24] 그는 파리 생쉴피스 교회의 생탕주 교회당을 포함한 여러 종교 그림 의뢰를 받았다.[25] 그의 종교화와 화풍은 의뢰의 요구에 따라 크게 달라졌다.[26] 그의 종교 작품 중 일부는 여러 버전으로 그려졌는데,[27] 예를 들어 ''갈릴리 호수의 그리스도''가 있다. 들라크루아의 ''피에타''(예수의 죽음 후 성모 마리아가 예수를 애도하는 그림)는 빈센트 반 고흐에 의해 다시 그려지기도 했다.[28]
들라크루아는 그의 그림을 통해 종교를 반영했으며, 그의 종교 작품은 종종 성경 본문에 대한 미묘한 세부 사항을 보여준다.[29] 무신론자 또는 불가지론자로 여겨지지만, 그의 일기와 그림은 예술을 통한 영성에 대한 개방성과 수용성을 보여준다.[30][24]
1832년 들라크루아는 외교관 샤를-에드가르 드 모르네(Charles-Edgar de Mornay)와 동행하여 스페인과 북아프리카를 여행했다. 이는 프랑스가 알제리를 정복한 직후 모로코에 대한 외교 사절단의 일환이었다. 그는 주로 예술을 공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파리의 문명에서 벗어나 더 "원시적인" 문화를 보길 바라며 여행했다.[18] 그는 결국 북아프리카 사람들의 삶을 배경으로 하거나 그들의 삶에서 영감을 받은 100점이 넘는 회화와 그림을 제작하여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새로운 개인적인 장을 추가했다.[31]
thumb
들라크루아는 사람들과 그들의 옷차림에 매료되었고, 이 여행은 그의 미래 회화의 주제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는 북아프리카인들이 그들의 복장과 태도에서 고대 로마와 그리스 사람들과 시각적으로 동등하다고 믿었다. 그는 알제에서 ''알제의 여인들''(1834)에서처럼 몇몇 여성들을 비밀리에 스케치하기는 했지만, 일반적으로 여성의 가림을 요구하는 이슬람 규칙 때문에 그를 위해 포즈를 취해줄 무슬림 여성을 찾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모로코의 유대인 결혼식''(1837–1841)의 주제처럼 북아프리카의 유대인 여성들을 그리는 것은 덜 문제가 되었다.

탕헤르에 있는 동안 들라크루아는 사람들과 도시에 대한 많은 스케치를 했고, 그는 생애 마지막까지 이 주제로 돌아왔다.[33] 낭만적 열정의 구현인 동물들은 ''마구간에서 싸우는 아랍 말''(1860), ''사자 사냥''(1856년과 1861년 사이에 그려진 여러 버전이 있음), ''아랍인이 말에 안장을 얹다''(1855)와 같은 그림에 통합되었다.
1830년에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들라크루아의 가장 영향력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주제와 기법의 선택에서 낭만주의적 접근 방식과 신고전주의 양식의 차이점을 강조한다. 덜 명확하게는, 테오도르 제리코의 낭만주의, 예를 들어 ''메두사의 뗏목''과도 다르다.
thumb'' (1830), 루브르 박물관, 파리]]
아마도 들라크루아의 가장 유명한 그림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무기를 들고 삼색기 아래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며 전진하는 파리 시민들의 잊을 수 없는 이미지이다. 들라크루아는 당시 사건에서 영감을 받아 자유의 정신에 대한 낭만적인 이미지를 불러일으켰지만,[18] 실제 사건, 즉 샤를 10세에 대한 1830년 혁명(다른 왕 루이 필립 1세를 권력에 올리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을 찬양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의지와 성격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인다.[19]
프랑스 정부가 이 그림을 구입했지만, 1832년에는 관리들이 자유를 찬양하는 것이 너무 선동적이라고 판단하여 공개적으로 전시하지 않았다.[20] 그럼에도 불구하고 들라크루아는 여전히 벽화와 천장화에 대한 많은 정부 위임을 받았다.[21]
루이 필립 왕의 통치가 끝난 1848년 혁명 이후, 들라크루아의 그림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새로 선출된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 (나폴레옹 3세)에 의해 마침내 전시되었다. 그것은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다만 2012년 12월부터 2014년까지는 파드칼레 랭스의 루브르 랭스 박물관에 전시되었다.[22]
오른쪽에서 권총을 높이 들고 있는 소년은 때때로 빅토르 위고의 1862년 소설 ''레 미제라블''의 가브로슈 캐릭터의 영감이 된 것으로 여겨진다.[23]
'''주요 작품'''
제목 | 제작 연도 | 소장처 | 이미지 |
---|---|---|---|
단테의 배 | 1822년 | 루브르 박물관 | -- |
히오스섬의 학살 | 1823년 ~ 1824년 | 루브르 박물관 | -- |
묘지의 고아 | 1824년 | 루브르 박물관 | -- |
미솔롱기의 폐허 위에 선 그리스 | 1826년 | 보르도 미술관 | -- |
이교도와 하산의 싸움 | 1826년 | 시카고 미술관 | -- |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 루브르 박물관 | -- |
리에주 주교의 암살 | 1829년 | 루브르 박물관 | |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 1830년 | 루브르 박물관 | -- |
어미 호랑이와 장난치는 새끼 호랑이 | 1831년 | 루브르 박물관 | -- |
알제의 여인들 | 1834년 | 루브르 박물관 | |
프레데리크 쇼팽의 초상화 | 1838년 | 루브르 박물관 | -- |
묘지에 있는 햄릿과 호라티오 | 1839년 | 루브르 박물관 | -- |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플 입성 | 1841년 | 루브르 박물관 | -- |
측근에게 둘러싸인 모로코의 술탄 | 1845년 | 오귀스탱 미술관 | -- |
지옥의 변방 | 룩셈부르크궁 도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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