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이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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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이(朱異)는 삼국 시대 오나라의 장군으로, 아버지 주환의 영향으로 낭에 임명된 후 기도위가 되어 군을 지휘했다. 241년 번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편장군이 되었고, 문흠의 거짓 투항을 간파하는 등 활약했다. 252년 동흥 전투에서 위나라 군을 격파하고 진남장군으로 승진했으나, 제갈탄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손침의 미움을 사 258년에 살해당했다.

주이 (삼국지)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이름주이
로마자 표기Ju I
계문(季文)
출신지양주 오군 오현
사망일257년 9월 26일
사망 장소차오후
아버지주환
관직
초기 관직기도위(騎都尉)
승진편장군(偏將軍)
승진양무장군(揚武將軍)
최종 관직진남장군(鎮南將軍), 대도독(大都督)
섬긴 군주
군주손권, 손량
주요 활동
주요 활동동흥 전투 참전 및 전공, 손침에 의해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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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행적

주이는 아버지 주환이 고위 관료였기 때문에 낭(郞)에 임명되었고, 기도위가 되어 주환의 병사를 대신 거느렸다.

241년, 오나라가 위나라를 세 방향으로 공격했을 때 주연을 따라 번성을 공격, 여거와 함께 성의 외곽 방어를 깨트렸다. 비록 주연 군은 사마의의 구원군을 보고 달아나다 대패했으나, 주이는 이 공적으로 편장군이 되었다.

위나라 여강 태수 문흠이 육안에 주둔하며 요새를 구축하고 오나라 사람들에게 망명을 유도하여 피해를 입히자, 주이는 직접 2천 명을 거느리고 문흠의 일곱 주둔지를 격파하여 수백 명을 참수, 양무장군으로 승진했다.

250년 10월, 문흠의 투항 밀사를 받았으나 거짓 투항임을 간파하고 손권에게 보고했다. 손권은 여거에게 2만 명을 주어 주이를 돕고 국경에서 문흠을 기다리게 했으나, 문흠은 투항하지 않았다.

252년, 진남장군으로 승진한 주이는 동흥 전투에서 수군을 지휘하여 위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했다.

257년, 제갈탄의 난을 지원하기 위해 출진했으나, 주태에게 패퇴하는 등 고전을 면치 못했다. 결국 258년, 식량 부족으로 회군하던 중 손침에게 살해당했다.

2.1. 초기 생애 및 경력

朱異중국어주환의 아들이었기 때문에 낭(郞)에 임명되었다. 기도위가 되어 아버지 주환을 대신하여 병사를 거느렸다.

241년, 오나라가 위나라를 세 방향으로 공격했을 때, 주연을 따라 위나라의 번성을 공격했고, 여거와 함께 성의 외곽 방어를 무너뜨렸다. 주연 군은 사마의의 구원군을 보고 달아나다 크게 패했으나, 주이는 이 공로로 편장군이 되었다.

위나라 여강 태수 문흠이 육안에 주둔하며 수많은 요새를 구축하고, 오나라 사람들에게 모반·망명을 유도하여 오나라에 피해를 입히고 있었다. 주이는 직접 2천 명을 거느리고 문흠의 일곱 주둔지를 격파하여 수백 명을 참수했고, 이 공로로 양무장군으로 승진했다.

250년 10월, 당시 양주 자사였던 문흠의 투항 밀사를 받았으나, 거짓 투항임을 간파하고 손권에게 보고했다. 손권은 여거에게 2만 명을 거느리고 주이를 도와 국경에서 문흠을 기다리게 했으나, 문흠은 결국 투항하지 않았다.

2.2. 번성 전투 (241년)

241년, 오나라에서 대규모 군사를 일으켜 위나라를 세 방향으로 공격했다. 이때 주이는 주연을 따라 위나라의 번성을 공격했고, 여거와 함께 성의 외곽 방어를 무너뜨렸다. 그러나 주연 군은 사마의의 구원군을 보고 달아나다가 대패했다. 주이는 이 공로로 편장군이 되었다.

2.3. 문흠과의 대립 (241년 ~ 250년)

적오 4년(241년), 오나라가 위나라를 세 방향으로 공격했을 때 주연을 따라 번성을 공격, 여거와 함께 성의 외곽 방어를 무너뜨렸다. 사마의의 구원군을 보고 오나라 군이 달아나다 대패했으나, 주이는 이 공로로 편장군이 되었다.

위나라 여강태수 문흠이 육안에 주둔하며 요새를 구축하고, 오나라 사람들에게 망명을 유도하여 피해를 입히자, 주이는 직접 2천 명을 거느리고 문흠의 일곱 주둔지를 격파하여 수백 명을 베었고, 양무장군으로 승진했다.

적오 13년(250년) 10월, 문흠의 투항 밀사를 받았으나 거짓 투항임을 간파하고 손권에게 보고했다. 손권은 여거에게 2만 명을 주어 주이를 돕고 국경에서 문흠을 기다리게 했으나, 문흠은 투항하지 않았다.

2.4. 동흥 전투 (252년)

건흥 원년(252년), 주이는 진남장군으로 승진했다. 이해 12월, 위나라에서는 손권이 죽은 틈을 노리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세 방향으로 오나라를 공격했다. 이 중 제갈탄호준은 지난달 오나라의 태부 제갈각이 쌓은 동흥의 두 성을 함락시키려 했다. 주이는 이 싸움에서 수군을 거느리고 위나라의 부교를 공격하여 무너뜨려 위나라 군사를 크게 격파했다.

2.5. 제갈탄의 난 지원 (257년)

태평 2년(257년), 가절을 받고 대도독(혹은 전부독)이 되어, 수춘에서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오나라에 도움을 구한 제갈탄을 돕기 위해 출진했다. 처음에는 3만 명을 거느리고 안풍성에 주둔하며 이미 성 안으로 들어간 문흠을 후원했으나, 위나라의 연주자사 주태에게 양연(陽淵)에서 저지당해 패퇴했다. 다시 손침의 명령으로 정봉·여비(黎斐) 등과 함께 5만 명을 거느리고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도륙(都陸)에 치중을 두고, 장군 임도(任度)·장진(張震)에게 용감한 병사 6천 명을 모아 부교를 건너 보루를 세우도록 했으나, 감군 석포주태의 공격을 받아 깨졌다. 다음에는 공성 무기를 만들어 오목성(五木城)을 쳤으나, 석포·주태에게 또 졌는데다 위나라의 태산태수 호열의 기습을 받아 도륙의 군수 물자가 소실되었다. 주이는 손침에게서 군사 3만을 받아 다시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식량이 부족해 회군했고, 분노한 대장군 손침에게 9월 초하루에 확리(鑊里)에서 살해당했다. 이때 손침은 주이에게 회견을 요청했는데, 주이는 두려움을 품은 육항의 반대를 뿌리치고 의심 없이 손침에게 갔으나, 손침이 다짜고짜 주이를 꿇어앉히고 살해했다.

2.6. 죽음 (258년)

태평 2년(258년) 6월, 손침의 명령을 받고 호림(虎林)에서 출발하여 하구독 손일을 암습하려 했는데, 무창에 이르렀을 때 손일이 이를 알아채고 위나라로 달아났다. 7월에 하구에 이르렀다. 가절을 받고 전부독(손량전에 따른 것으로, 주환전에서는 대도독)이 되어, 수춘에서 위나라에 반기를 들고 오나라에 도움을 구한 제갈탄을 도와 수춘성의 포위를 풀고자 출진했다. 처음에는 3만 명을 거느리고 안풍성에 주둔하며 이미 성 안으로 들어간 문흠을 후원했으나, 위나라의 연주자사 주태에게 양연(陽淵)에서 저지당해 패퇴했다. 다시 손침의 명령으로 정봉·여비(黎斐) 등과 함께 5만 명을 거느리고 위를 공격하였다. 도륙(都陸)에 치중을 두고, 장군 임도(任度)·장진(張震)에게 용감한 병사 6천 명을 모아서 부교를 건너 보루를 세우도록 했으나, 감군 석포와 주태의 공격을 받아 깨졌다. 다음에는 공성 무기를 만들어 오목성(五木城)을 쳤으나, 석포·주태에게 또 졌는데다 위나라의 태산태수 호열의 기습을 받아 도륙의 군수 물자가 소실되었다. 주이는 손침에게서 군사 3만을 받아 다시 싸우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식량이 부족해 회군했고, 분노한 대장군 손침에게 9월 초하루에 확리(鑊里)에서 살해당했다. 이때 손침은 주이에게 회견을 요청했다. 주이는 두려움을 품은 육항의 반대를 뿌리치고 의심 없이 손침에게 갔으나, 손침이 다짜고짜 주이를 꿇어앉히고 살해했다. 이를 두고 위나라의 사마소는 “주이가 수춘에 이르지 못한 것은 주이의 죄가 아닌데, 오나라에서 죽였다.”라고 했다.

3. 평가

진수는 주이가 아버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않은 장군이라고 칭찬하면서도, 여거와 마찬가지로 성격적인 결점이 없는데도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은 시대의 변화에 의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삼국지연의』에서는 패배를 거듭하여 제갈탄을 구원하는 데 실패하고, 손침에게 참수당하는 장군으로만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