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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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육항은 오나라의 장군으로, 육손의 아들이자 손책의 외손자이다. 20세에 아버지 육손이 사망한 후 건무교위에 임명되어 무창에 주둔했으며, 손권의 심문을 받으면서도 조리 있게 답변하여 신임을 얻었다. 그는 건흥 연간에 분위장군으로 임명되었으며, 제갈탄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정북장군으로 승진했다. 이후 서릉독, 진군장군, 서릉도독을 역임하며 형주 방어에 힘썼고, 272년 서릉 전투에서 보천을 격파했다. 육항은 대사마와 형주 자사를 거쳐 274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죽음은 오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는 정치 활동을 통해 부패 척결을 위해 노력했으며, 진나라의 양호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여 양륙지교라는 고사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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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항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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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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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육항 |
원어 이름 | 陸抗 |
로마자 표기 | Ruk Hang |
자 | 유절 |
생몰 | 226년 ~ 274년 8월 또는 9월 (48세) |
출생지 | 양주 오군 오현 |
사인 | 병사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육손 |
어머니 | 오 손책의 딸 손씨 부인 |
배우자 | 장승의 딸 장씨 부인 |
자녀 | 육안 (280년 3월 22일 사망) 육경 육선 육기 육운 육단 |
관직 | |
주요 관직 | 대사마 형주목 |
봉호 | 강릉후 |
경력 | |
초기 경력 | 분위장군 (奮威將軍) |
승진 | 정북장군 (征北將軍) |
추가 승진 | 진군장군 (鎮軍將軍) |
최종 직위 | 대도호 (大都護) 형주목 (荊州牧) 대사마 (大司馬) |
활동 시기 | |
소속 세력 | 오 |
주요 전투 | 서릉 전투 양양 전투 |
기타 정보 | |
시호 | 무후 |
2. 생애
육손의 차남이자 손책의 외손자인 육항은 삼국 시대 손오의 장수이자 정치가였다. 손책은 동오의 창업 황제인 손권의 형이자 선임자였다.
245년 육손이 사망하자 육항은 건무교위(建武校尉)에 임명되어 부친이 지휘하던 5,000명의 병사를 관할하게 되었다. 육항은 부친의 관을 무창(현재의 어저우, 후베이성)에서 고향인 오군(현재의 쑤저우, 장쑤성)으로 옮겨 장례를 치른 후, 오나라 수도인 건업(현재의 난징, 장쑤성)으로 가서 손권에게 문안 인사를 했다. 손권은 육항에게 육손이 저질렀다고 주장되는 20가지 죄목 목록을 보여주며 질문했고, 육항은 진실되게 답변하여 손권의 분노를 점차 가라앉혔다.[4]
257년, 조위의 장군 제갈탄이 수춘 삼반을 일으키고 오나라에 지원을 요청하자, 손량은 육항을 시상(柴桑, 현재의 장시성구장시 부근)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갈탄을 지원하게 했다. 비록 이 반란은 위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육항은 전투에서 일부 위나라 군대를 격파하여 '정북장군'(征北將軍)으로 승진했다.[7]
259년, 손휴 재위 기간 동안 육항은 '진군장군'(鎭軍將軍)으로 임명되어 서릉(현재의 후베이성이창시 부근)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의 관할 지역은 관우의 얕은 물에서 백제성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했다. 260년, 손휴는 그에게 임시 황제 권한을 부여했다.[8]
264년 손휴가 사망하고 손호가 즉위하자 육항을 진군대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이주(益州牧중국어)가 오나라 영토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명목상 이주 자사로 임명했다. 270년 사적이 사망한 후, 손호는 육항에게 신릉(信陵중국어), 서릉(西陵중국어), 이도(夷道중국어), 낙향(), 그리고 공안 현의 군사 업무를 관할하게 했으며, 행정 중심지는 낙향(현재 후베이성 송쯔시 동쪽)에 두었다.[9]
273년 육항은 대사마 겸 형주목이 되었으나, 274년 병이 들어 사망했다.[32]
2. 1. 초기 행적
육손이 죽었을 때 육항은 20살이었으며, 형 육연(陸延)은 요절했으므로 건무교위(建武校尉)에 임명되어 아버지 육손이 남긴 병사 5천 명을 통솔하게 된다.[4] 손권(孫權)은 양축(楊竺)이 육손을 모함한 20가지 일을 육항에게 묻고, 빈객을 금했다. 그러나 육항은 일마다 조리있게 대답하여, 손권은 점차 의혹을 떨쳐내었다.[4]246년, 육항은 중랑장(中郎將)으로 승진했고, 제갈각과 자리를 바꿀 것을 명령받았다. 그는 무창을 떠나 시상(현재의 지우장, 장시성)으로 이동하고, 제갈각은 그 반대로 이동하게 되었다. 육항은 떠나기 전에 성벽을 수리하고 거주지를 개조했으며 과수원은 그대로 두었다. 제갈각이 시상에 도착했을 때, 육항이 그를 위해 잘 관리된 거주지를 남겨둔 것을 보고 놀랐다. 또한 그는 자신이 시상을 떠날 때 시상 주둔지가 좋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부끄러움을 느꼈다.[5]
251년, 육항은 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건업으로 갔다. 그의 상태가 호전되어 떠날 준비를 하자 손권이 그를 배웅하러 왔다. 손권은 눈물을 흘리며 "이전에는 중상모략을 믿고 네 부친의 선의의 충고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네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네 부친에 대한 혐의가 담긴 모든 문서를 불태워 아무도 그것을 볼 수 없도록 하겠다."라고 말했다.[6]
252년 손권이 사망하고 그의 막내아들 손량이 오나라 황제로 즉위했다. 손량은 즉위 후 육항을 '분위장군'(奮威將軍) 칭호의 장군으로 승진시켰다.[7]
2. 2. 형주 방어
245년(적오 8년), 육손이 죽었을 때 육항은 20살이었으며, 형 육연(陸延)은 요절했으므로 건무교위(建武校尉)에 임명되며 아버지 육손이 남긴 병사 5천 명을 통솔하게 된다. 손권(孫權)은 양축(楊竺)이 육손을 모함한 20가지 일을 육항에게 힐문하고 빈객을 금했지만, 육항은 일마다 조리있게 대답하여 손권은 점차 의혹을 떨쳐내었다.[7] 246년(적오 9년), 입절중랑장이 되어 제갈각(諸葛恪)과 함께 시상에 주둔했다. 251년(태원 원년), 서울로 가 병을 치료하고 돌아가는데, 손권은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옛날 자신이 육손을 참언을 믿지 못하고 의심한 것을 후회했다.[7] 252년(건흥 원년) 분위장군이 되었다.[7] 그는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당시 촉을 삼켜 더욱 커진 사마씨의 위(魏)가 빈번하게 전투를 걸어온 형주를 수비하는 중책을 맡게 된다.[7] 그는 공을 세워도 교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으며, 이는 백성들에게 큰 지지를 얻게 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7]257년(태평 2년), 위나라의 제갈탄(諸葛誕)이 권신 사마소(司馬昭)에 반기를 들며 막내아들 제갈정(諸葛靚)을 오나라에 인질로 보내고 구원군을 요청했다.[7] 사마소는 종회(鍾會)와 자신이 직접 대군을 이끌고 수춘을 공략하려 들었다.[7] 육항은 시상독이 되어 수춘에 이르러 위군을 격파하고 정북장군으로 옮겼다.[7] 같은 해 수춘에서 위의 제갈탄이 반란을 일으켜 오에 항복을 요청하며 원군을 요청했을 때, 육항은 시상의 독에 임명되어 구원을 위해 수춘으로 향했다. 육항은 위의 편장군과 아문장을 격파한 공적으로 정북장군으로 승진했다.[43]
252년 손권이 사망하고 그의 막내아들 손량이 오나라 황제로 즉위했다. 손량은 즉위 후 육항을 '분위장군'(奮威將軍) 칭호의 장군으로 승진시켰다.[7] 257년, 오나라의 라이벌 국가 조위의 장군 제갈탄은 수춘 삼반을 일으키고 오나라에 지원을 요청했다.[7] 손량은 육항을 시상(柴桑, 현재의 장시성구장시 부근) 지역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갈탄을 지원하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수춘으로 가도록 명령했다. 비록 이 반란은 결국 위나라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지만, 육항은 전투에서 일부 위나라 군대를 격파했다. 그의 노고를 인정하여 오나라 정부는 그를 '정북장군'(征北將軍)의 지위로 승진시켰다.[7]
253년(건흥 2년), 제갈각이 주살되자, 아내가 그의 조카였기 때문에 이혼했다.[42]
주이가 위 대군 앞에서 패전을 거듭한 후, 총대장인 손침에게 불려 갔다. 육항은 경계하도록 충고했지만, 주이는 이를 듣지 않고 결국 손침에게 살해되었다.[43]
259년(영안 2년) 손휴의 시대가 되어, 진군장군에 임명되어 서릉과 관우뢰에서 백제성까지의 지역에서 군사의 총 지휘를 맡게 되었다.[8][44] 259년, 손휴 재위 기간 동안 육항은 '진군장군'(鎮軍將軍)으로 임명되어 서릉(西陵, 현재의 후베이성이창시 부근)을 관할하게 되었다. 그의 관할 지역은 관우의 얕은 물에서 백제성에 이르는 지역을 포함했다. 260년(영안 3년), 손휴는 그에게 임시 황제 권한을 부여했다.[8][44]
264년(영안 7년), 전년에 촉한이 위의 공격으로 항복했다. 촉과 동맹 관계에 있던 오는, 보협에게 원군을 보낸다고 칭하며 영안성(백제성)을 공격하게 했지만, 촉의 구 장수였던 라헌에게 패했다. 같은 해 2월, 육항은 그 원군으로 3만을 이끌고, 보협·유평·성만 등과 함께 영안성을 포위했지만, 라헌의 저항 앞에 반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가을 7월, 위의 사마소가 파견한 형주자사호열의 원군이 도착했기 때문에, 영안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44]
손호 시기가 되자, 종형인 육개가 좌승상이 되어 보좌했다. 269년(건형 원년)에 육개는 사망했지만, 많은 유능한 인재[45]와 함께 종제인 육희·육항을 중용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육개의 죽음 후, 생전의 육개를 증오했던 손호는 그 가족을 박해하려 했지만, 육항의 힘을 두려워하여, 육항이 살아있는 동안은 그것을 감행할 수 없었다고 한다.[46]
270년(건형 2년) 여름 4월[44], 대사마인 시적이 사망하고, 육항이 도독 서릉·이도·신릉·낙향·공안에서의 제반 군사의 총 지휘를 맡게 되었다.[44]
육항은 도하에서의 행정에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듣고, 상소를 올려 17개 조항의 방책을 진언했다고 한다. 또한, 손호의 총신인 하정이나 환관 등이 전횡하는 것을 듣고, 간언의 상소를 올렸다.
2. 3. 서릉 전투
봉황 원년(272년) 8월[47], 서릉독 보천이 오나라에 반기를 들고 진(晉)에 항복했다. 육항은 오언 등을 이끌고 서릉성으로 급히 향했다. 여러 장수들은 원군이 오기 전에 공격할 것을 권했지만, 육항은 서릉성의 방어와 장비가 과거 자신이 정비했기 때문에 공격의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그는 장기전이 될 것이라고 판단하여 광대한 이중 포위진을 구축하고, 성내의 군대와 진나라 원군에 대비했다. 이 작업은 병사들에게 큰 부담을 주었기에, 여러 장수들은 조속히 공격하여 함락시켜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육항은 한 번만 공격을 허락했지만, 성과는 없었고 결국 여러 장수들은 육항의 명령에 따랐다.진나라 거기장군 양호가 강릉에 침공할 움직임을 보이자, 부장들은 강릉 방어를 제안했다. 그러나 육항은 "강릉은 방비가 굳고, 식량도 확실히 갖춰져 있다. 만약 함락되더라도 적은 그 성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서릉을 빼앗기면 남방의 이민족에게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의 우려를 생각하면, 강릉을 버리고라도 서릉에 대처해야 한다"고 하며 움직이지 않았다.[17]
육항은 강릉독 장수에게 성 주변 수로를 막아 적의 공격과 아군의 이탈을 막도록 했다. 양호가 배를 이용하여 강릉으로 식량을 운송하려 하자, 육항은 여러 장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강릉 수비 장수에게 제방을 끊어 수송 수단을 차단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진군은 배 대신 수레를 사용하게 되었고, 수송에 큰 손실을 입었다.[18]
이후, 진나라 파동감군 서윤이 수군을 이끌고 건평으로 향하고, 형주자사 양조의 군대가 서릉에 이르렀다. 대치 중에는 반란군이 나타나는 사태도 일어났다. 하지만 육항은 이러한 위기에 잘 대처하여 막아내고, 양호와 서윤의 움직임을 부장들에게 봉쇄시키는 동안, 스스로 서릉의 양조 군대를 크게 격파했다. 양조의 패배를 알게 된 진군은 서릉 구원을 포기하고 퇴각했다. 육항은 고립된 서릉성에 총공격을 가하여 함락시키고, 반란을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보천과 그 일족, 간부급 무장 및 군관은 처형되었지만, 그 외 수만 명에 달하는 장졸은 사면했다. 반란을 진압한 육항은 서릉성을 수리한 후, 낙향으로 귀환했다. 큰 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전혀 자랑하지 않았기 때문에, 장병들은 이전보다 더욱 육항을 존경했다.[20]
2. 4. 대사마 임명과 죽음
봉황 2년(273년) 봄, 육항은 대사마 겸 형주목이 되었으나, 이듬해 여름 병이 들었다. 임종 때까지도 손호에게 글을 올렸다.결국 그는 274년 죽었고, 기둥이 무너진 걸 안 진나라 익주자사 왕준은 오나라를 칠 것을 권하여 오나라는 결국 멸망하게 된다.[32][33]
3. 정치 활동
육항은 오나라와 진나라 간의 끊임없는 전투로 백성들이 고통받는 시기에 손호에게 상소를 올렸다.[31] 그는 《역경》을 인용하며, 시세 변화에 적응하고 타인의 결점을 간파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육항은 상 탕왕이 부패한 하 왕조에 대항하여 일어섰고, 주 무왕이 폭군 상 주왕을 타도한 역사적 사례를 언급하며, 손호에게 군사력 강화, 국력 증진, 농업 진흥에 집중할 것을 촉구했다. 또한, 관리들의 직무 수행, 문관 제도, 백성들의 평안 문제 등을 지적하며, 포상과 처벌의 신중함, 관리들 간의 도덕적 가치 장려, 인(仁)으로 나라를 다스릴 것을 강조했다.[31]
건흥 2년(제갈각 주살), 제갈각의 조카였던 육항의 아내는 이혼했다.[42]
태평 2년(수춘에서 위의 제갈탄의 반란), 제갈탄이 오나라에 항복을 요청하며 원군을 요청했다. 육항은 시상의 독에 임명되어 구원을 위해 수춘으로 향했고, 위의 편장군과 아문장을 격파한 공적으로 정북장군으로 승진했다. 이때, 주이가 위나라 대군 앞에서 패전을 거듭한 후, 총대장인 손침에게 불려 갔다. 육항은 주이에게 경계하도록 충고했지만, 주이는 이를 듣지 않고 결국 손침에게 살해되었다.[43]
영안 2년(손휴 즉위), 육항은 진군장군에 임명되어 서릉과 관우뢰에서 백제성까지의 지역에서 군사의 총 지휘를 맡게 되었다. 영안 3년에는 가절을 받았다.
영안 7년, 전년에 촉한이 위의 공격으로 항복했다. 촉나라와 동맹 관계에 있던 오나라는 보협에게 원군을 보낸다고 칭하며 영안성(백제성)을 공격하게 했지만, 촉나라의 구 장수였던 라헌에게 패했다. 같은 해 2월, 육항은 그 원군으로 3만을 이끌고 영안성을 포위했지만, 라헌의 저항에 반년이 지나도록 함락시키지 못했다. 같은 해 가을 7월, 위의 사마소가 파견한 형주자사호열의 원군이 도착했기 때문에, 영안성의 포위를 풀고 퇴각했다.[44]
손호 시기, 육항의 종형인 육개가 좌승상이 되어 보좌했다. 건형 원년 육개가 사망했지만, 많은 유능한 인재[45]와 함께 종제인 육희·육항을 중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육개가 죽은 후, 생전에 육개를 증오했던 손호는 그 가족을 박해하려 했지만, 육항의 힘을 두려워하여 육항이 살아있는 동안은 감행하지 못했다.[46]
건형 2년 여름 4월[44], 대사마인 시적이 사망하고, 육항이 도독 서릉·이도·신릉·낙향·공안에서의 제반 군사의 총 지휘를 맡게 되었다.
3. 1. 17가지 정책 제안
陸抗|육항중국어은 오나라 정부의 정책에 많은 결함이 있다고 걱정하여 손호에게 상주문을 올렸다.[10] 그는 상주문에서 현재 오나라가 처한 상황을 전국 시대와 초한 쟁패 때보다 더 복잡하다고 진단하며, 외부 동맹 부재, 내부 역량 부족, 비효율적인 정책, 백성 통치의 어려움 등을 지적했다.[11] 육항은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17가지 정책 변경을 제안했으나,[11] 이 제안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유실되었다.[12]3. 2. 부패 척결 노력
관리 하정(何定)이 권력을 남용하고 환관이 국정에 간섭하자, 육항은 손호에게 상주를 올려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13]서릉 전투 이후 육항은 도호로 승진했다. 악주 무창의 좌부독 설영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손호에게 상소를 올려 설영을 변호했다.[28]
육항은 손호의 총신인 하정이나 환관 등이 전횡하는 것을 보고, 간언의 상소를 올렸다.
4. 평가
습조치는 『한진춘추』에서 진 문공, 목자(穆子), 섭부(葉符), 악의 등의 사례를 들어 군사력뿐만 아니라 덕(德)의 중요성을 강조했다.[23] 그는 군사력으로 다른 사람을 위협하는 대신, 도덕과 문명으로 그들을 얻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고 보았다.[24]
진수는 《삼국지》에서 육항에 대해 "국가에 충성하고 신실했으며, 아버지와 매우 흡사하게 재능이 뛰어나고 유능했다. 훌륭한 도덕적 품행을 지녔으며, 세부 사항을 소홀히 하지 않으면서 전반적인 상황을 잘 처리하여 큰 업적을 이룰 수 있었다"라고 평했다.[38] 또한 "몸을 잘 다스렸고, 선견지명을 가지고 있었으며, 아버지의 유풍을 잘 계승했다. 일족의 가풍을 지키고 행동에서는 아버지보다 조금 부족한 점이 있었지만, 훌륭하게 가업을 완수했다"라고 평했다.
당나라 사관은 육항을 아버지 육손과 함께 중국 역사상 64명의 명장 중 하나로 선정했다 (무묘육십사장).
4. 1. 긍정적 평가
육항은 유비의 사위이자, 오나라의 명장이었던 육손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육손이 손권에게 받은 불신과 의심 속에서도, 육항은 침착하게 해명하여 손권의 오해를 풀게 했다.[42] 이러한 모습은 훗날 그가 보여줄 뛰어난 자질과 성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손권은 육항의 아버지 육손에게 참언을 믿고 신의를 저버린 것에 대해 후회하며, 육항에게 사과의 뜻을 전하기도 했다.[43] 이는 육항 가문에 대한 손권의 신뢰가 회복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건이다.
육항은 촉한이 멸망한 후, 오나라의 국경을 지키는 중책을 맡았다. 특히 서릉 전투에서는 뛰어난 전략과 지휘력으로 진나라의 침공을 막아내고 반란을 진압하는 큰 공을 세웠다.[44] 이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능력을 입증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과 병사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또한, 육항은 군사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백성을 생각하는 어진 마음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는 잇따른 전쟁으로 피폐해진 나라의 상황을 걱정하며 국력 회복을 위한 정책을 제안하기도 했다.[48] 이러한 모습은 그가 단순한 장수가 아니라, 나라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참된 지도자였음을 보여준다.
육항은 도독, 대사마, 형주목 등 오나라의 최고위 관직을 역임하며, 뛰어난 군사적 업적과 더불어 훌륭한 인품을 보여주었다. 그의 이러한 면모는 후세에까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다.
4. 2. 부정적 평가
동진의 시중 하충은 "육항은 '존재하면 오나라가 존재하고, 죽으면 오나라가 망한다'라고 말할 만한 존재였다"라고 평했다.[1]육항이 보천을 항복시켰을 때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였다. 도리에 통달한 인물들은 그러한 방식을 비난하며, 자손들이 반드시 이 일에 대한 응보의 재앙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1] 육기가 주살당하고, 육씨 일족에게는 후계가 없어진 것은 이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1]
손혜는 주탄에게 보낸 편지에서 마원이 벼슬길에 나아가면서 섬겨야 할 주군을 잘 골랐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알고 있지만, 육씨 세 사람은 모두 폭정이 횡행하는 조정에 출사하여 그 몸이 죽임을 당하고 명예도 훼손될 줄은 생각지도 못한 일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했다.[1] 이 내용은 왕은의 『진서』에도 기록되어 있다.[1]
5. 가족 관계
육항은 274년 가을, 8월 20일에서 9월 17일 사이에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육언이 그의 작위를 물려받았다.[33] 육언과 그의 동생들인 육경, 육현, 육기, 육운은 아버지의 군대를 함께 지휘하며 오나라의 장군으로 복무했다. 육항에게는 육운보다 어린 육단이라는 아들이 또 있었다.
6. 기타
육항은 서진의 양호와 적대 관계였지만, 서로를 인정하며 개인적인 우정을 쌓았다. 《진양추》에 따르면, 둘은 춘추 시대의 자산과 기찰의 우정에 비견될 만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내면 양호는 의심 없이 마셨고, 육항이 아플 때 양호가 보낸 약을 육항 또한 의심 없이 복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의 관계를 춘추 시대의 화원과 자반의 관계에 비유하기도 했다.[21]
《한진춘추》는 이들의 우정을 더 자세히 묘사했다. 양호는 진나라 영토로 돌아간 후 도덕과 문명을 장려하여 오나라 백성들에게 감명을 주었다. 육항은 오-진 국경 주둔군에게 "만약 그들이 덕으로 통치하고 우리가 폭군처럼 나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싸우지 않고도 전쟁에서 질 것이다. 국경을 잘 지키고 사소한 문제로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오-진 국경은 양측이 데탕트를 실천하여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소가 실수로 국경을 넘어가면 상대방은 소 주인이 국경을 넘어 소를 찾는 것을 허용했고, 국경에서 사냥을 할 때 부상자가 발생하면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냈다. 육항이 병에 걸려 양호에게 약을 요청하자 양호는 직접 약을 준비하여 보내면서 믿고 복용하라고 전했다. 육항의 부하들은 양호를 의심했지만, 육항은 양호를 믿고 약을 복용했다. 손호는 오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에 대해 듣고 육항을 꾸짖었지만, 육항은 "시골 농부도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정부 관리인 내가 아니겠는가."라며 당당하게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22]
동진 손성의 『진양추』나 습조치의 『한진춘추』에 따르면, 육항과 양호는 이러한 행동은 각자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 정치적인 대립 속에서도 개인적인 신뢰와 우정을 나눈 두 사람의 관계는 '양륙지교'라는 고사성어로 남아, 오늘날까지도 정치적 신념을 초월한 인간적인 교류의 중요성을 보여주는 예시로 회자되고 있다.
6. 1. 양호와의 관계
양호와 육항은 서로 대립하는 관계였지만, 《진양추》에 따르면 둘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들의 우정은 춘추 시대의 자산과 기찰의 우정에 비유되었다. 육항이 양호에게 술을 보내자 양호는 의심 없이 마셨고, 육항이 병에 걸리자 양호는 약을 보냈고 육항 또한 의심 없이 복용했다. 당시 사람들은 이들의 관계를 춘추 시대의 화원과 자반의 관계에 비유했다.[21]《한진춘추》는 이들의 우정에 대해 더 자세히 묘사했다. 양호는 진나라 영토로 돌아간 후 도덕과 문명을 장려하여 많은 오나라 백성들이 감명을 받았다. 육항은 오-진 국경 주둔군에게 "만약 그들이 덕으로 통치하고 우리가 폭군처럼 나라를 다스린다면, 우리는 싸우지 않고도 전쟁에서 질 것이다. 국경을 잘 지키고 사소한 문제로 분쟁을 일으키지 않기를 바란다."라고 말했다.
오-진 국경은 양측이 데탕트를 실천하여 평화와 안정을 누렸다. 소가 실수로 국경을 넘어가면 상대방은 소 주인이 국경을 넘어 소를 찾는 것을 허용했고, 국경에서 사냥을 할 때 부상자가 발생하면 안전하게 집으로 돌려보냈다. 육항이 병에 걸려 양호에게 약을 요청하자 양호는 "이 약은 품질이 좋습니다. 제가 직접 준비했습니다. 당신이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직접 복용해보지 않고 당신에게 보냅니다."라고 말했다. 육항의 부하들은 양호가 해칠 것을 우려했지만, 육항은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손호는 오나라와 진나라 사이의 평화로운 관계에 대한 소식을 듣고 육항을 꾸짖었지만, 육항은 "시골 농부도 약속을 지켜야 하는데, 하물며 정부 관리인 내가 아니겠는가. 내가 덕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양호와 극명한 대조를 이룰 것이다. 이것은 양호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는다."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육항과 양호의 행동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두 사람이 각자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다하지 못한다고 믿었다.[22]
동진 손성의 『진양추』나 습조치의 『한진춘추』에 따르면, 육항은 진나라의 양호와 적이지만 서로를 인정하는 사이로, 평소 교류를 맺고 술이나 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더욱이 국경 지대에서는 불필요한 싸움을 일으키지 않고, 서로 선행을 하는 행동을 했다고 한다. 손호는 이를 수상히 여겨 육항을 추궁하기도 했지만, 육항은 당당하게 반론했다고 한다. 다만, 세상에서도 양자가 신하로서의 절조를 잃었다고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었다고 한다. 이 고사에서, 어떠한 정치적인 선입견에도 얽매이지 않는 사적인 교우를 나타내는 '''양륙지교'''라는 성어가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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