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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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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거는 오나라의 장군으로, 여범의 아들이며, 손권 시기부터 활약했다. 산월 토벌, 위나라와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으며, 손권 사후 손량, 손준을 보좌했다. 손준 사후, 손침과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자결했다. 사후 손휴에 의해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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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여거
원어 이름呂據
세의(世議)
작위완릉후(宛陵侯)
사망일256년 11월 12일
아버지여범
관직 경력
주요 경력우장군(右將軍)
표기장군(驃騎將軍)

2. 생애

여거는 형이 있었지만 요절했다. 아버지가 오나라의 고관이었기에, 손권에게 어려서부터 낭으로 발탁되었고, 여범의 병세가 심해지자 부군교위가 되어 아버지의 군무를 보좌했다. 황무 7년(228년)에 아버지가 사망하자 안군중랑장으로 승진했다.

산월 토벌에서 두각을 나타냈으며, 그가 공격하면 도적들은 순식간에 패했다고 한다. 반준의 무릉만 토벌에도 종군하여, 여기에서도 공을 세웠다.

와의 싸움에서도 활약하여, 적오 4년(241년)에는 주연의 번성 공략에 종군하여 주이와 함께 성의 외곽을 파괴하고, 귀환한 뒤 편장군이 되었다(작비의 역). 이후 조정으로 옮겨 마한우부독·월기교위가 되었다.

이궁의 변에서는 노왕 손패를 지지했다[3]

적오 13년(250년), 위의 문흠이 거짓으로 투항해 오자, 이를 간파한 주이의 충고를 받아 손권은 여거에게 명하여 2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국경으로 가게 했지만, 문흠은 나타나지 않았다[4]。적오 14년(251년), 장강이 범람하여, 성문까지 물에 잠기는 피해가 발생했으나, 여거 혼자 백성들을 지휘하여 큰 배를 묶어두어 피해를 막기 위해 진력했다. 마침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손권은 이를 기뻐하여 여거를 탕구장군으로 삼았다. 손권이 위독해지자, 태자 우부독에 임명되었으며, 임종 시에는 제갈각, 손홍, 손준, 등윤과 함께 불려 후사를 부탁받았다[5]

손권이 붕어하고, 손량이 즉위하자 우장군이 되었다. 건흥 원년(252년), 위의 호준, 제갈탄이 오나라의 동흥을 공격했을 때, 제갈각의 지휘 아래 정봉, 유찬, 주이 등과 함께 위군을 크게 격파했다(동흥의 전투).

손준이 제갈각을 모살하고 권력을 장악하자, 여거의 환심을 얻기 위해 건흥 2년(253년)에 표기장군으로 승진시키고, 서궁의 일을 맡겼다. 오봉 2년(255년), 위에서 관구검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손준은 이를 기회로 수춘을 침공하는데, 그 때 여거에게 가절을 주었다. 여거는 군세를 이끌고 수춘을 습격하여, 문흠을 항복시켰다. 그 귀환 도중에 위나라 부장 조진과 조우하자, 고정에서 정봉과 함께 조진 등을 격파했다.

태평 원년(256년), 손준은 다시 군사를 북상시켜 위를 공격하려 했지만, 출정 군대를 위해 연회를 베풀고, 수행원 100명 정도를 데리고 여거의 진영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여거가 군을 흐트러짐 없이 통솔하는 모습을 보고, 경계심이 강해져 심장이 좋지 않다고 칭하며 곧바로 물러났다. 여거의 진영에 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손준은 몸에 이상을 느껴 급사하자, 손준의 권력은 사촌 동생 손침이 계승했지만, 여거는 이 조치에 분노하여, 군세를 이끌고 원정지에서 물러나, 여러 장수들과 함께 상소를 올려, 손권으로부터 후사를 부탁받은 신하 중 한 명인 등윤을 승상으로 삼을 것을 상소했다. 그러나 손침은 등윤을 무창으로 내보내 중앙에서 멀리한 후에, 여거의 지휘하에 있던 문흠과 당자 등에게 여거를 칠 것을 조서로 요청했고, 더 나아가 사촌 형 손헌, 정봉, 시관을 여거 토벌을 위해 강도로 향하게 했다. 여거는 부하로부터 위나라에 항복할 것을 권유받았지만, 모반자가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겨 자결했다. 그의 일족도 살해되었다[6]

영안 2년(259년), 손휴는 손침을 주살하고 실권을 되찾았다. 손준·손침 때문에 불의의 죽음을 맞이한 제갈각, 등윤, 여거 등의 명예는 회복되었다. 제갈각, 등윤, 여거 등을 개장하고, 그들 때문에 화를 입어 멀리 유배되었던 자들을 모두 불러들였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여거는 여범의 차남으로, 아버지의 배경 덕분에 낭(郞)으로 임명되며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7] 아버지가 병으로 눕자 부군교위(副軍校尉)가 되어 군사를 통솔했고, 아버지 사후에는 안군중랑장(安軍中郞長)이 되었다.[7]

여거는 산월을 자주 토벌하여 두각을 나타냈다.[7] 황룡 3년(231년)에는 반준의 오계만 토벌에 종군하여 공을 세웠다.[7]

2. 2. 위나라와의 전투

적오 4년(241년), 주연을 따라 번성을 공격하여 주이와 함께 성의 바깥 수비를 깨뜨리는 공을 세우고 편장군이 되었다.[7] 궁정으로 들어와 마한우부독(馬閑右部督), 월기교위(越騎校尉)가 되었다.[7]

적오 13년(250년), 위나라 양주자사 문흠이 거짓 투항을 하여 밀서를 주이에게 보내자, 주이는 이를 의심하여 손권에게 보고했다. 손권은 이를 받아들여 여거에게 2만 군사를 이끌고 주이와 협력하여 문흠을 맞이하게 했으나, 문흠은 결국 투항하지 않았다.[7]

태원 원년(251년) 8월 초하루,[8] 폭풍으로 인해 장강이 넘쳐 성문이 침수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홀로 사람들을 부려 큰 배로 피해를 방지하려 한 것이 손권의 환심을 사 탕위장군(盪魏將軍)이 되었다.[7]

2. 3. 손권 사후

呂據|여거중국어손권이 중병에 빠지자 태자우부독(太子右部督)이 되었다.[7] 태자 손량이 어리므로, 손권은 제갈각, 손홍, 등윤, 손준과 함께 뒷일을 부탁했다.[12] 건흥 원년(손량), 손권이 죽고 손량이 즉위하면서 여거는 우장군(右將軍)이 되었다.[7]

같은 해 11월,[9] 위나라가 오나라를 공격하여 제갈탄호준이 동흥을 공격했다. 여거는 정봉, 당자, 유찬(留贊)과 함께 제갈각의 지휘 아래 위나라 군대를 막았다. 정봉이 선봉에 나서 위나라 군대를 무찌르자, 여거는 후속 부대로 뒤따라가 위나라 군대를 궤멸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10] (동흥 전투) 건흥 2년, 손준제갈각을 죽인 후에는 표기장군(驃騎將軍)이 되었고, 서궁(西宮)의 일을 맡아보았다.[7]

2. 4. 권력 투쟁과 죽음

오봉 2년(255년), 위나라에서 관구검문흠이 반란을 일으키자, 승상 손준은 이 틈을 타 출병하여 여거에게 가절(假節)을 주고 함께 수춘을 습격했다.[7] 그러나 문흠이 패배하고 제갈탄이 수춘성에 입성하면서 손준은 공격을 포기했고, 원정은 실패로 끝났다.[7][9] 귀환 도중 여거는 추격해 온 위나라 장수 조진(曹珍)을 고정(高亭)에서 무찔렀다.[7][9]

태평 원년(256년), 손준은 다시 위나라를 침공하려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급사했다. 사촌 동생인 손침이 손준의 권력을 계승했으나, 여거는 이에 분노하여 문흠, 당자 등과 함께 공동으로 표를 올려 태상 등윤을 승상으로 천거했다. 그러나 손침은 등윤을 대사마로 삼아 무창으로 내보내고, 여거를 제거하려 했다.

손침은 문흠, 유찬, 당자에게 여거를 체포하게 하고, 종형 손헌,[11] 정봉, 시관(施寬)에게 서울의 군대를 이끌고 강도에서 배로 여거를 공격하게 했다. 결국 여거는 신주(新州)에서 사로잡혔고, 주변의 투항 권유에도 불구하고 "반신(叛臣)이 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자결했다.[7][12][9]

3. 평가

진수는 여거를 주이, 주적과 함께 군 지휘관으로서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자이며, 부친과 조상의 공업을 잘 계승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주이와 함께 그들의 부모에게서 보였던 결점은 보이지 않았지만, 시대의 변화(특히, 손준, 손침의 전횡) 때문에 목숨을 잃었다고 평하며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안타까워했다.

4. 친족 관계

여거의 친족 관계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三国志
[3] 서적 三国志
[4] 서적 三国志
[5] 서적 三国志
[6] 서적 三国志
[7] 서적 삼국지
[8] 서적 삼국지
[9] 서적 삼국지
[10] 서적 삼국지
[11] 서적 삼사주전, 주치주연여범주환전
[12] 서적 삼국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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