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흥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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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흥 전투는 252년 오나라가 동흥에 댐을 건설하자 위나라가 침공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위나라는 세 방향에서 오나라를 공격했고, 제갈탄과 호준은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동흥을 공격했다. 오나라는 제갈각의 지휘 아래 정봉, 유찬, 여거, 당자 등을 선봉으로 내세워 반격했다. 정봉은 기습 공격으로 위나라 군을 혼란에 빠뜨렸고, 결국 위나라는 패배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 이 전투의 승리로 제갈각은 승상으로 승진했지만, 이후의 실패로 인해 손준에게 살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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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흥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개요 | |
| 전투명 | 동흥 전투 |
| 별칭 | 동관 전투 |
| 시기 | 253년 1월 ~ 253년 2월 |
| 장소 | 안후이성 마안산시 함산현 남서쪽, 동흥 (東興) |
| 원인 | 조위가 오나라 군대가 자국 영토에 들어온 것에 대한 보복 |
| 결과 | 오나라의 전술적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조위 |
| 교전국 2 | 오나라 |
| 지휘관 및 지도자 | |
| 조위 | 사마소 제갈탄 관구검 왕창 호준 환가† 한종† 장특 |
| 오나라 | 제갈각 정봉 여거 당자 유찬 |
| 병력 규모 | |
| 조위 | 70,000명 ~ 150,000명 |
| 오나라 | 40,000명 ~ 200,000명 |
| 관련 전투 | |
| 전역 | 삼국 시대의 전쟁 |
| 전투 상황 | |
| 조위의 패배 및 퇴각 | 제갈탄은 제갈각에게 대패하고 동흥에서 철수 |
2. 배경
211년, 오나라의 시조 손권은 경쟁 군벌 조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안후이성 무위현 북쪽에 위치한 여수에 방어 시설 건설을 명령했다.[3] 230년, 손권은 인근 차오호를 가두기 위해 동흥에 댐을 건설했다.[4] 손권은 252년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 손량이 오나라 황제로 즉위했다. 252년 11월 또는 12월, 오나라 섭정 제갈각은 동흥 댐 건설 공사를 시작하여 댐의 길이를 양쪽 언덕에 연결되도록 늘렸고, 댐 중간에 두 개의 성을 건설했다. 제갈각은 각 성에 1,000명의 병력을 주둔시키고 전단과 유략에게 책임을 맡겼으며, 나머지 병력은 이끌고 돌아갔다.[5][6]
그 당시 북풍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정봉이 이끄는 오나라군은 이틀 만에 전선에 도착하여 서당을 장악했다.[16][17] 겨울이었고 눈이 내리는 가운데, 위나라 장교들은 경계심을 풀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봉은 군대의 규모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갑옷과 투구를 벗고, 극과 창 대신 방패와 칼 등의 짧은 무기만으로 무장하라고 명령했다.[16][17] 위나라 병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웃으며 전투 준비를 하지 않았다. 정봉과 그의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적의 전방 진영을 파괴했고, 여거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오나라 군대가 도착하여 정봉에 합류했다.[18]
오(吳)나라가 동흥 댐 건설 공사를 벌여 자국 영토를 침범하자 위(魏)나라는 모욕감을 느꼈다. 위나라 장군 제갈탄은 섭정 사마사에게 오나라에 대항할 계획을 제안했고, 사마사는 그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였다.[7] 서기 252년 12월 또는 253년 1월, 위 황실은 왕창, 관구검, 제갈탄, 호준에게 세 방향에서 오나라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왕창은 강릉군을, 관구검은 무창(武昌, 현재의 어저우, 후베이성)을 공격할 것이며,[8] 제갈탄과 호준은 7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동흥으로 가서 두 개의 성을 공격하고 댐을 파괴할 것이다.[1][9]
위나라의 공격 소식이 오나라에 전해지자 제갈각은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2] 적에게 저항했다.[9] 호준은 부하들에게 댐으로 가는 부교를 건설하라고 명령했고, 그들을 두 그룹으로 나누어 두 개의 성을 공격하게 했다. 그러나 성들은 높은 지대에 위치해 접근하기 어려웠다.[10]
오나라 장수들은 "적이 태부(제갈각)께서 직접 오신다는 것을 알게 되면, 우리가 해안에 도착했을 때 분명 물러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11] 그러나 정봉만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영토에서 대규모의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들은 허창과 낙양에서 많은 병력을 동원했으므로,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빈손으로 돌아갈 리 없습니다. 적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전투에 대비해야 합니다."[12] 제갈각이 동흥에 도착했을 때, 그는 정봉, 유찬, 여거, 당자를 선봉으로 임명했고,[13] 그들은 산악 지형을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14] 정봉은 "우리가 너무 느리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만약 적이 유리한 지형을 차지한다면, 상대하기 더 어려워질 것입니다."라고 경고했다. 그는 3,000명의 병사를 이끌고 오나라 주력 부대와 다른 경로로 이동했다.[15]
252년 10월, 오나라 황제 손권이 붕어하자, 위나라 정동장군 호준은 관구검, 왕창과 함께 오나라 정벌을 계획하여 상주했다. 오나라 대장군 제갈각은 위나라의 습격을 예상하여 소호 주변 동흥에 있는 제방의 개축을 실시했다. 이 제방은 옛날 오나라 황제 손권이 축조한 것으로, 제갈각은 이를 보강하여 제방의 좌우 산지에 제방을 끼고 두 개의 성을 쌓았다. 또한 전단과 유략에게 각각 1천 명의 병사를 주어 두 성을 지키게 했다.[28][29]
3. 전투의 경과
갑작스럽고 맹렬한 공격에 위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많은 병사들이 부교를 건너려 했지만 다리가 붕괴되면서 물에 빠져 서로 밟고 밟히며 필사적으로 육지로 올라오려 했다.[19] 이 전투에서 위의 군 관리자 환가와[20][21] 위나라 선봉을 이끌었던 오나라 장수 한종이 전사했다.[22][23] 제갈각은 손권의 사당으로 한종의 머리를 보냈다.[22][23]
12월,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사는 진동장군 제갈탄, 호준 등에게 오나라 침공을 명령하고, 안동장군 사마소를 감군으로 따라가게 했다. 제갈탄은 군을 3로로 나누어 진군시켜 예주 제군사 왕창에게는 남군을, 형주 제군사 관구검에게는 무창을 각각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7만 병력을 지휘하여 동흥으로 향했다[30]。 동흥으로 진군한 제갈탄 등은 제방을 무너뜨리기 위해 배를 늘어놓아 부교를 건설하여 건너 제방 위로 진군하여 진을 쳤다. 그리고 전단, 유략이 지키는 제방 좌우의 산지에 구축된 두 개의 성을 공격했지만, 지세가 험했기 때문에 쉽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오나라는 제갈각이 전군의 총지휘를 맡고, 정봉, 유찬, 여거, 당자 등을 선봉으로 동흥으로 군을 진격시켰다. 선봉 부대가 장강을 건너 동흥에 상륙하자, 산악 지대를 통과하여 서쪽으로 향해 상류로 나아가려 했다. 이때, 정봉은 아군 각 군단의 움직임이 늦은 것을 보고, 적에게 선수를 빼앗기지 않도록 신속하게 행군하기 위해 아군과 별도로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적진으로 급행했다. 마침 북풍이 불어 정봉은 배에 돛을 달고 이틀 만에 전장에 도착하여 서당이라는 곳에 진영을 쳤다. 그리고 적진을 시찰하니 눈이 내릴 듯한 추운 날씨여서 적의 무장들이 연회를 열어 완전히 방심하고 있었다. 정봉은 위군의 전위가 얇은 것을 간파하고, 병사들을 고무시키면서 갑옷을 벗기고 투구에 칼만 들게 하여 기습을 감행하여 전위 진지를 궤멸시켰다. 그 때 여거 등이 늦게 전장에 도착하여 함께 공격하여 위군을 대파시켰다.
그 후, 패주한 위군은 황급히 부교로 몰려들었으나 오나라의 주의에 의해 부교가 파괴되어 퇴로를 잃고 대혼란에 빠졌다. 위군은 한종, 환가를 비롯하여 수만 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이 대패로 남군, 무창으로 진군한 위군은 더 이상의 침공을 포기하고 진영을 불태우고 철수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투는 오나라의 대승으로 끝났다.
3. 1. 위나라의 침공
그 당시 북풍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정봉이 이끄는 오나라군은 이틀 만에 전선에 도착하여 서당을 장악했다.[16][17] 겨울이었고 눈이 내리는 가운데, 위나라 장교들은 경계심을 풀고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봉은 군대의 규모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에게 갑옷과 투구를 벗고, 극과 창 대신 방패와 칼 등의 짧은 무기만으로 무장하라고 명령했다.[16][17] 위나라 병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웃으며 전투 준비를 하지 않았다. 정봉과 그의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적의 전방 진영을 파괴했고, 여거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오나라 군대가 도착하여 정봉에 합류했다.[18]
갑작스럽고 맹렬한 공격에 위나라 군대는 혼란에 빠졌다. 많은 병사들이 부교를 건너려 했지만 다리가 붕괴되면서 물에 빠져 서로 밟고 밟히며 필사적으로 육지로 올라오려 했다.[19] 이 전투에서 위의 군 관리자 환가와[20][21] 위나라 선봉을 이끌었던 오나라 장수 한종이 전사했다.[22][23] 제갈각은 손권의 사당으로 한종의 머리를 보냈다.[22][23]
12월, 위나라의 대장군 사마사는 진동장군 제갈탄, 호준 등에게 오나라 침공을 명령하고, 안동장군 사마소를 감군으로 따라가게 했다. 제갈탄은 군을 3로로 나누어 진군시켜 예주 제군사 왕창에게는 남군을, 형주 제군사 관구검에게는 무창을 각각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7만 병력을 지휘하여 동흥으로 향했다[30]。
3. 2. 오나라의 반격
그 당시 북풍이 강하게 불고 있었다. 정봉과 그의 병사 3,000명은 이틀 만에 전선에 도착하여 서당을 장악했다.[16] 겨울이었고 눈이 내렸다. 위나라 장교들은 경계심을 풀고 술을 마시고 있었기에, 정봉은 군대의 규모가 작았음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을 불러 모았다.[17] 그는 군대에 갑옷과 투구를 벗고, 극과 창을 버리고 방패와 칼과 같은 짧은 무기만으로 무장하라고 명령했다. 위나라 병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 웃으며 전투 준비를 거부했다. 정봉과 그의 병사들은 용감하게 싸워 적의 전방 진영을 파괴했다. 바로 그때, 여거 등이 이끄는 또 다른 오나라 군대가 도착하여 적진을 공격하는 정봉에 합류했다.[18]
위나라 군대는 갑작스럽고 맹렬한 공격에 충격을 받아 혼란에 빠졌다. 많은 위나라 병사들이 부교를 건너려고 했지만 주의에 의해 다리가 붕괴되었다.[19] 그들은 물에 빠져 서로 밟고 밟히며 필사적으로 육지로 올라오려고 했다. 환가라는 위의 군 관리자가 전사했다.[20][21] 이 전투에서 위나라 선봉을 이끌었던 오나라 장수 한종도 위나라로 투항했지만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제갈각은 한종의 시신을 참수하여 머리를 손권의 사당으로 보냈다.[22][23]
4. 전투의 결과
왕창과 관구검은 동흥 전투에서 위나라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진영을 불태우고 철수했다.[24] 위나라 조정에서는 많은 관리들이 침략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위나라 지휘관들을 강등시키거나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마사는 "내가 제갈탄의 말을 듣지 않아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이는 내 잘못이다. 장군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라고 말했다.[24][25] 사마사의 동생인 사마소는 이번 군사 작전을 감독했는데,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의 작위가 박탈되었다.[24][25]
반면, 오나라는 위나라 군대가 버리고 간 다량의 장비와 가축을 노획하고 개선했다. 제갈각은 양도후(陽都侯)에 봉해졌으며, 형주와 양주의 자사(牧)로 임명되었고, 금 1,000근, 명마 200필, 비단과 천 각 10,000필을 하사받았다.[26] 정봉은 멸구장군(滅寇將軍)으로 승진했으며,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27] 제갈각은 국내 군사 전반의 지휘를 맡게 되어 승상(丞相)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승리에 기뻐한 제갈각은 다음 해에 주변의 간언을 무시하고 대군을 이끌고 위(魏)를 침공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역병이 대유행하여 매우 많은 병사를 잃었다(합비신성 전투). 이로 인해 제갈각은 인망을 잃어 손준 등의 쿠데타로 인해 살해당하게 된다.
위(魏)에서는, 이 패전의 죄를 여러 장수들에게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조정 내에 있었지만, 사마사(司馬師)는 "간언을 듣지 않고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는 나의 과실이다. 여러 장수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며 그 죄를 스스로 떠맡으려 했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며 그 도량에 복종했다고 한다.
5. 전투의 영향
왕창과 관구검은 동흥 전투에서 위나라가 패배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의 진영을 불태우고 철수했다.[24] 위나라 조정에서는 많은 관리들이 침략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물어 위나라 지휘관들을 강등시키거나 해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마사는 "내가 제갈탄의 말을 듣지 않아 이런 상황이 벌어졌으니, 이는 내 잘못이다. 장군들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라고 말했다.[24] 사마사의 동생인 사마소는 이번 군사 작전을 감독했는데, 작전 실패의 책임을 물어 그의 작위가 박탈되었다.[24][25]
반면, 오나라는 위나라 군대가 버리고 간 다량의 장비와 가축을 노획하고 개선했다. 제갈각은 양도후(陽都侯)에 봉해졌으며, 형주와 양주의 자사(牧)로 임명되었고, 금 1,000근, 명마 200필, 비단과 천 각 10,000필을 하사받았다.[26] 정봉은 멸구장군(滅寇將軍)으로 승진했으며, 도정후(都亭侯)에 봉해졌다.[27] 이 전투의 승리로 제갈각은 국내 군사 전반의 지휘를 맡게 되어 승상(丞相)으로 승진했다. 하지만, 이 전투의 승리에 기뻐한 제갈각은 다음 해에 주변의 간언을 무시하고 대군을 이끌고 위(魏)를 침공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하고, 역병이 대유행하여 매우 많은 병사를 잃었다(합비신성 전투). 이로 인해 제갈각은 인망을 잃어 손준 등의 쿠데타로 인해 살해당하게 된다.
위(魏)에서는, 이 패전의 죄를 여러 장수들에게 물어야 한다는 의견이 조정 내에 있었지만, 사마사(司馬師)는 "간언을 듣지 않고 여기까지 이르렀다. 이는 나의 과실이다. 여러 장수들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라며 그 죄를 스스로 떠맡으려 했기에, 오히려 사람들은 모두 부끄러워하며 그 도량에 복종했다고 한다.
6. 기타
6. 1. 대중문화
코에이의 비디오 게임 시리즈 ''진 삼국무쌍 7''의 일곱 번째 작품에서 동흥 전투는 플레이 가능한 스테이지로 등장한다. 이 전투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제갈탄의 시점에서, 두 번째 부분은 왕원희가 다리를 건너 정봉에게 매복 공격을 받은 제갈탄을 구출하는 내용으로 진행된다. 게임에서는 제갈탄이 동흥의 두 요새를 성공적으로 점령한 것으로 묘사된다. ''맹장전'' 확장팩에서는 정봉의 시점에서 전투를 플레이할 수 있으며, 그의 목표는 산에서 위나라 군을 매복 공격하는 것이다.6. 2. 관련 인물
- 동쪽을 안정시키는 장군(安東將軍) '''사마소'''가 이 작전을 지휘했다.
- 남쪽을 공격하는 선봉 대장군(征南大將軍) '''왕창'''은 강릉을 공격했다.
- 남쪽을 지키는 장군(鎮南將軍) '''관구검'''은 무창(武昌; 현재의 어저우)을 공격했다.
- 동쪽을 공격하는 장군(征東將軍) '''호준'''은 70,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흥을 공격했다.
- 동쪽을 지키는 장군(鎮東將軍) '''제갈탄'''
- 낙안 태수(樂安太守) '''환가'''
- 선봉장이었던 '''한종'''
- 태부(太傅) '''제갈각'''은 4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동흥으로 가서 위나라 군대에 저항했다.
- 챔피언 장군(冠軍將軍) '''정봉'''은 3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위나라 진영을 공격했다.
- 우장군(右將軍) '''여거'''
- 둔기교위(屯騎校尉) '''유찬'''
- '''당자'''
참조
[1]
서적
Sanguozhi
[2]
서적
Sanguozhi
[3]
서적
Sanguozhi
[4]
서적
Sanguozhi
[5]
서적
Sanguozhi
[6]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7]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8]
서적
Sanguozhi
[9]
서적
Sanguozhi
[10]
서적
Sanguozhi
[11]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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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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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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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15]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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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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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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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19]
서적
Sanguoz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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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Sanguozhi
[21]
서적
Sanguozhi
[22]
서적
Sanguozhi
[23]
서적
Sanguozhi
[24]
서적
Jin Shu
[25]
서적
Han Jin Chunqiu annotation in Sanguozhi
[26]
서적
Sanguozhi
[27]
서적
Sanguozhi
[28]
서적
三国志
[29]
서적
三国志
[30]
서적
三国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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