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포 (촉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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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주포는 촉한 건국 후 남중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이다. 223년 장가군승 겸 태수였던 그는 옹개의 반란에 호응하여 스스로 태수를 칭하며 촉에 반기를 들었다. 제갈량은 남정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고 마충을 장가군 태수로 임명했다. 소설 《삼국지연의》에서는 맹획, 옹개, 고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으며 제갈량의 이간계에 빠져 고정과 악환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223년(건흥 원년) 장가군승(牂牁郡丞) 겸 태수로 재직하던 중 반란을 일으켰다.[1] 225년 제갈량이 친히 남정을 행하면서 마충을 장가군으로 보내 평정하였다.[2]
소설 《삼국지연의》에서 주포는 장가태수로 등장한다. 225년 맹획, 옹개, 고정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동참하지 않은 영창태수 왕항을 공격한다. 남만왕 맹획의 선동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포는, 남만 정벌에 나선 제갈량의 이간계에 빠진 고정과 그의 부장 악환에게 습격을 당해 목숨을 잃는다.
[1]
서적
馬忠伝
2. 생애
촉한을 건국한 유비가 사망한 후, 남중 지방(익주 남부의 4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 중 한 명이다.
강가군(牂牁郡)의 군승이었으나, 먼저 반란을 일으킨 유력자 옹개에 호응하여, 건흥 원년(223년) 여름에 스스로 태수를 칭하며 촉에 반기를 들었다.[1] 이전부터 월수군에서 촉에 반항적인 태도를 취하던 고정도, 같은 시기에 다시 반란을 일으켰다(「후주전」).
주포가 반란을 일으킨 이유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제갈량은, 익주 종사 상방(상기)을 파견했다. 상방은 익주 남부 일대에서의 순찰 중에, 주포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주부를 추궁하여 참수했다. 이 때문에 주포는 이에 분노하여, 상방을 살해한 후, 상방이 반란을 꾀했기 때문에 살해했다고 무고했다. 이 심상치 않은 사태를 깨달은 제갈량은, 주포를 회유하기 위해 상방의 아들들을 참수하고, 그의 동생 4명을 월수군으로 유배하여 사과했지만, 그래도 주포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후주전」이 인용한 『위씨춘추』).
다만, 배송지는 "상방(상기)이 주포에 의해 무고되었다면, (제갈량 등) 위정자는 당연히 이 사태를 예상했을 것이고, 왜 무고한 (상방의 아들) 처형을 명하여, 사악한 무리들을 기쁘게 할 필요가 있는가. 이것은 (후세의) 지어낸 이야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제갈량은, 옹개 등을 지원하는 오에 등지를 보내, 외교 관계를 회복시킨 후(「등지전」), 건흥 3년(225년) 3월에 직접 군을 이끌고 남중으로 원정했다(「후주전」・「제갈량전」).
제갈량이 이회의 군과 합류하자(「이회전」), 팽창한 촉군 앞에서 옹개 등은 동요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고정의 부하가 옹개를 살해했다(「여개전」). 고정 또한 제갈량 등의 군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마침내 주포의 군세도 구축되어, 같은 해 가을에 제갈량은 남중 4군을 평정하고(「제갈량전」・「후주전」), 강가 태수에는 마충을 임명했다(「마충전」).[2]
2. 1. 반란 전 상황
당초 주포가 다른 마음이 있다는 말을 들은 익주종사(―從事) 상방(常房) 혹은 종사 촉군의 상기(常頎)가 그 주부(主簿)를 심문하다 죽이자 반란에 동참하였다.[3] 《위씨춘추》 기록에 따르면 주포가 열 받아서 되려 상방이 역심을 품었다고 무고하고는 주륙하였다. 제갈량은 주포를 달래기 위해 상방의 아들들도 마저 주살하고 네 아우는 월수(越巂)로 귀양보냈다.[3] 이 내용은 《삼국지》에는 없으며 배송지도 거짓이라 하였다. 사실 이미 월수군은 각각 고정의 차지였으므로, 태수가 월수군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상방의 아우들을 월수로 귀양 보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3] 《화양국지》에는 파견온 상기를 죽이는 대목만 있을 뿐 이 일화는 없다.
촉한을 건국한 유비가 사망한 후, 남중 지방(익주 남부의 4군)에서 반란을 일으킨 인물 중 한 명이다. 익주군(益州郡)의 토호 옹개가 이미 오나라에 귀부하여 촉나라에 대항하고 있었는데 주포는 마음을 돌리지 않고 옹개에게 호응하였다.[3]
강가군(牂牁郡)의 군승이었으나, 먼저 반란을 일으킨 유력자 옹개에 호응하여, 건흥 원년(223년) 여름에 스스로 태수를 칭하며 촉에 반기를 들었다.[1]
2. 2. 반란과 최후
223년(건흥 원년), 장가군승(牂牁郡丞) 겸 태수로 재직하던 주포는 옹개에 호응하여 스스로 태수를 칭하며 촉에 반기를 들었다.[1] 225년 제갈량은 남정을 통해 반란을 진압하였고, 마충을 장가군으로 보내 평정하였다.[2]
제갈량은 익주 종사 상방(상기)을 파견했는데, 상방은 주포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여 그의 주부를 추궁하여 참수했다. 주포는 이에 분노하여 상방을 살해한 후, 상방이 반란을 꾀했기 때문에 살해했다고 무고했다. 제갈량은 주포를 회유하기 위해 상방의 아들들을 참수하고, 그의 동생 4명을 월수군으로 유배하여 사과했지만, 주포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다만, 배송지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제갈량은 오에 등지를 보내 외교 관계를 회복시킨 후, 225년 3월에 직접 군을 이끌고 남중으로 원정했다. 제갈량이 이회의 군과 합류하자 옹개 등은 동요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 고정의 부하가 옹개를 살해했다. 고정 또한 제갈량 등의 군에게 패배하여 처형되었다. 주포의 군세도 구축되어, 같은 해 가을에 제갈량은 남중 4군을 평정하고 강가 태수에는 마충을 임명했다.[2] 정사 《삼국지》에는 주포의 최후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정황상 제갈량의 남정 과정에서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3. 《삼국지연의》에서의 묘사
4. 평가
5. 같이 보기
참조
[2]
서적
華陽国志
[3]
서적
위씨춘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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