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유왕
1. 개요
주 유왕은 서주 시대의 마지막 군주로, 포사를 총애하여 국정을 소홀히 하고 봉화를 남발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잃었다. 결국 신후의 반란과 견융의 침입으로 인해 여산에서 살해당하고 서주는 멸망했다. 이후 폐위되었던 태자 의구가 주 평왕으로 즉위하여 동주 시대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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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8세기 중국 사람 -
제 희공
제 희공은 제나라의 제후로서 주변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송나라와 위나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며 북융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으나, 말년에 후계 구도에 혼란을 야기하다가 재위 33년 만에 사망했다. -
기원전 8세기 중국 사람 -
진 평공
진 평공은 기원전 777년에 즉위하여 23년간 진나라를 다스린 군주로,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진 문공이 즉위하였다. -
기원전 8세기 중국의 군주 -
제 희공
제 희공은 제나라의 제후로서 주변국과 우호 관계를 맺고, 송나라와 위나라 사이의 분쟁을 중재하며 북융의 침입을 격퇴하는 등 활발한 대외 활동을 펼쳤으나, 말년에 후계 구도에 혼란을 야기하다가 재위 33년 만에 사망했다. -
기원전 8세기 중국의 군주 -
진 평공
진 평공은 기원전 777년에 즉위하여 23년간 진나라를 다스린 군주로, 그의 뒤를 이어 아들인 진 문공이 즉위하였다. -
암살된 사람 -
제임스 쿡
제임스 쿡은 18세기 영국의 탐험가이자 해군 장교로서, 세 차례의 태평양 탐험을 통해 뉴질랜드와 오스트레일리아 동부 해안을 탐사하고 지도를 제작하는 등 지리적 발견에 기여했으며 남극권에 진입하고 하와이 제도를 기록했으나, 하와이에서 원주민과의 충돌로 사망했다. -
암살된 사람 -
정여립
정여립은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동인으로 전향하여 이이를 비판하다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간 후 대동계를 결성했으나 반란 혐의로 자결했으며, 기축옥사로 동서인 갈등을 심화시킨 인물이다.
2. 생애
기원전 780년 관중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자 백양보(伯陽甫)는 주나라 멸망의 징조라고 주장했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는 주나라의 국세가 쇠퇴하던 시기였다. 유왕은 포사를 총애하여 결국 나라를 멸망으로 이끌었으며, 봉화를 이용해 제후들을 소집하는 과정에서 신뢰를 잃었다. 결국 신후의 난으로 인해 여산에서 최후를 맞이했고, 이후 주나라는 주 평왕이 즉위하면서 동주 시대로 접어들게 되었다.
2.1. 포사와의 만남과 실정
기원전 780년 관중에서 큰 지진이 발생하자 백양보(伯陽甫)는 주나라 멸망의 징조라고 주장했다. 사서 기록에 따르면 이 시기는 주의 국세가 쇠퇴하던 시기였다. 기원전 779년 포사(褒姒)가 후궁으로 들어와 유왕의 총애를 받았고, 아들 백복(伯服)을 낳았다. 유왕은 정실 왕후였던 신후(申后)와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삼았다.
포사는 평소 잘 웃지 않아, 유왕은 그녀를 웃게 하기 위해 여러 방법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포사가 비단을 찢는 소리를 듣고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유왕은 나라의 비단을 징수해 찢게 했다. 이로 인해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어느 날, 유왕이 실수로 봉화를 잘못 피워 제후들이 집결했다. 이때 포사가 크게 웃자, 유왕은 이후에도 자주 장난으로 봉화를 피웠다. 결국 제후들은 유왕에게 신뢰를 잃었고, 나중에는 봉화를 올려도 제후들이 모이지 않게 되었다. 또한 유왕은 아첨을 잘하는 간신 괵석부(虢石父)를 경으로 임명하여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실정에 더해 폐후 및 폐태자 문제까지 겹치면서, 신나라 신후의 아버지 신후(申侯)는 원한을 품게 되었다. 신후는 서쪽 오랑캐인 견융과 협력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유왕은 봉화를 올려 구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제후들은 유왕에게 오지 않았다.
2.2. 신후의 난과 최후
기원전 780년 관중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백양보(伯陽甫)라는 인물이 주나라 멸망의 징조라고 주장했지만, 사서의 기록에는 주나라의 국력이 쇠퇴하던 시기였음은 확실하다. 포사(褒姒)가 후궁으로 들어와 유왕의 총애를 받았고, 아들 백복(伯服)을 낳았다. 유왕은 정실 왕후인 신후(申后) 및 태자 의구(宜臼)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포사는 잘 웃지 않았기 때문에 유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그녀를 웃기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포사가 비단을 찢는 소리를 듣고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유왕은 나라의 비단을 징수해 찢었다. 이로 인해 천금매소(千金買笑)라는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봉화를 실수로 잘못 피워 제후들이 집결하자 포사가 웃었기 때문에, 유왕은 자주 장난으로 봉화를 피워 제후들의 신뢰를 잃었고, 나중에는 봉화를 사용해도 제후들이 모이지 않게 되었다는 고사가 있다. 또한 유왕은 아첨과 추종에 뛰어난 간신인 괵석부(虢石父)를 경으로 임명해 백성들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실정에 폐후, 폐태자 문제까지 겹쳐 신나라 신후의 아버지인 신후(申侯)는 서쪽 오랑캐인 견융과 협력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이때 유왕은 봉화로 구원을 요청했지만, 이미 제후들 중 유왕에게로 모이는 자는 없었다고 한다.
유왕은 여산에서 살해당하고 포사는 붙잡혀 행방불명이 되어 서주는 멸망했다.
유왕이 사망한 후 제후들과 신후는 폐태자였던 의구를 주 평왕으로 즉위시켜 주나라를 이어가게 했다. 그러나 이 병란으로 인해 호경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평왕은 동쪽의 낙읍(洛邑)으로 천도하여 동주가 시작되었다.
2.3. 동주 시대의 시작
기원전 780년 관중에서 대지진이 발생하자 백양보(伯陽甫)는 주나라 멸망의 징조라고 주장했지만, 사서의 기록에는 주의 국세가 쇠퇴하던 시기였음은 확실하다. 유왕이 사망한 후 제후들과 신후는 폐태자였던 의구를 주 평왕으로 즉위시켜 주나라를 이었다. 그러나 이 병란으로 인해 호경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평왕은 동쪽 낙읍으로 천도하여 동주가 시작되었다. 이는 300년 이상 지속될 춘추 시대의 시작이기도 했다.
3. 평가
기원전 780년 관중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백양보(伯陽甫)라는 인물이 주나라 멸망의 징조라고 주장했지만, 사서의 기록에는 주의 국세가 쇠퇴하던 시기였음은 확실하다. 포사가 후궁으로 들어와 유왕의 총애를 받았고,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유왕은 정실인 신후(申后) 및 태자 의구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포사는 웃지 않았기 때문에 유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웃기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사가 비단을 찢는 소리를 듣고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유왕은 나라의 비단을 징수해 찢었다. 이로 인해 천금매소(千金買笑)란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봉화를 실수로 잘못 피워 제후가 집결하자 포사가 웃었기 때문에, 자주 장난으로 봉화를 피워 제후의 신뢰를 잃었고, 나중에는 봉화를 사용해도 제후가 집결하지 않게 되었다는 고사도 있다.
또 유왕은 아첨과 추종에 뛰어난 간신인 괵석부(虢石父)를 경으로 임명해 백성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실정에 폐후, 폐태자의 일도 있어 신나라 신후의 아버지인 신후(申侯)의 원한을 샀고, 그는 서이 견융과 협력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이때 유왕은 봉화로 구원을 부탁했지만 이미 제후 중에 유왕 밑으로 모이는 자는 없었다고 한다.
3.1. 부정적 평가
기원전 780년 관중에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백양보(伯陽甫)라는 인물이 주나라 멸망의 징조라고 주장했지만, 사서의 기록에는 주의 국세가 쇠퇴하던 시기였음은 확실하다. 포사가 후궁으로 들어와 유왕의 총애를 받았고,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삼았다. 유왕은 정실인 신후(申后) 및 태자 의구를 폐하고 포사를 왕후로, 백복을 태자로 세웠다.
포사는 웃지 않았기 때문에 유왕은 다양한 방법으로 웃기려고 했으나 잘 되지 않았다. 그러나 포사가 비단을 찢는 소리를 듣고 희미하게 미소를 짓자 유왕은 나라의 비단을 징수해 찢었다. 이로 인해 천금매소(千金買笑)란 고사성어가 생겨났다. 봉화를 실수로 잘못 피워 제후가 집결하자 포사가 웃었기 때문에, 자주 장난으로 봉화를 피워 제후의 신뢰를 잃었고, 나중에는 봉화를 사용해도 제후가 집결하지 않게 되었다는 고사도 있다.
또 유왕은 아첨과 추종에 뛰어난 간신인 괵석부(虢石父)를 경으로 임명해 백성의 분노를 샀다. 이러한 실정에 폐후, 폐태자의 일도 있어 신나라 신후의 아버지인 신후(申侯)의 원한을 샀고, 그는 서이 견융과 협력하여 유왕을 공격했다. 이때 유왕은 봉화로 구원을 부탁했지만 이미 제후 중에 유왕 밑으로 모이는 자는 없었다고 한다.
4. 문학 속의 유왕
전통적인 모시(毛詩) 주석에서 소아(小雅)의 "채숙(采菽)"은 주 유왕(周幽王)이 제후들의 존경을 잃고 그들을 굴욕시킨 것에 대한 비판이라고 한다.
사기에 따르면, 포사(褒姒)는 쉽게 웃지 않았다. 여러 방법을 시도했지만 실패한 주 유왕은 총애하는 왕후를 즐겁게 하기 위해 봉화를 올리고 제후들을 속여 견융 유목민이 공격하려는 것처럼 꾸몄다. 제후들은 성에 도착했지만 포사의 비웃음만 샀을 뿐이었다. 주 유왕은 포사를 감동시킨 후에도 경고 봉화를 남용하여 제후들의 신뢰를 잃었다. 최초의 경고 봉화는 한(漢)나라 때 나타났으며, 이 이야기는 꾸며진 것으로 여겨진다. 청화간(清華簡)에서 발굴된 『십년(繫年)』에 따르면, 주 유왕은 신후(申侯)를 공격했고, 신후는 견융과 동맹하여 왕실 군대를 격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