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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프랑크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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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프랑크 왕국은 843년 베르됭 조약으로 프랑크 왕국이 분열되면서 로타르 1세에게 주어진 영토로 성립되었다. 북해에서 지중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으나, 다양한 민족 구성과 지리적 불리함으로 인해 동프랑크 왕국과 서프랑크 왕국에 비해 약세를 보였다. 855년 로타르 1세의 사후 프륌 조약에 따라 세 아들에게 분할되었고, 이후 로타링기아의 분할과 이탈리아 왕위 계승 분쟁을 거치며 여러 차례 국경이 변동되었다. 결국 신성로마제국에 흡수되었으며, 15세기에 부르군트 공작이 옛 중프랑크 왕국의 영역과 유사한 영지를 지배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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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프랑크 왕국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도
중프랑크 왕국 843년 지도
중프랑크 왕국 (녹색)
기본 정보
공식 명칭Francia media
일반 명칭중프랑크 왕국
존속 기간843년 ~ 855년
수도아헨
면적350,000 km²
공용어중세 라틴어
통용어고대 네덜란드어
고대 프리지아어
고대 프랑스어
고대 오크어
고대 저지 독일어
고대 고지 독일어
갈로-이탈리아어
종교가톨릭 (국교)
게르만 종교
현재 국가벨기에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슬로베니아
스위스
화폐데나리우스
정치
정치 체제군주제
국왕로타르 1세 (처음이자 마지막)
국왕 재임 기간843년 ~ 855년
역사
건국베르됭 조약 (843년)
멸망프룀 조약 (855년)
이전 국가프랑크 왕국
계승 국가로타링기아
프로방스 왕국
이탈리아 왕국
기타
로마자 표기regnum Francia media
프랑스어 표기Francie médiane
독일어 표기Mittelreich
기타 표기Lotharii Regnum

2. 성립 배경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경건왕 루트비히의 아들들 간 상속권 다툼은 중프랑크 왕국 성립의 배경이 되었다. 루트비히 1세 사후, 장남 로타르 1세는 제국 단독 상속권을 주장했으나,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이 이에 반발하여 퐁트누아 전투에서 로타르 1세를 격파했다. 결국 843년 베르됭 조약을 통해 프랑크 왕국은 셋으로 나뉘었고, 로타르 1세는 중프랑크 왕국을 차지했다.

2. 1. 프랑크 왕국의 분열

프랑크 왕국의 왕이자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경건왕 루트비히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장남 로타르 1세, 둘째 피핀, 셋째 독일왕 루트비히를 얻었고, 두 번째 결혼에서 막내 대머리왕 카를을 얻었다. 이 중 피핀은 838년에 사망하여 경건왕 루트비히가 사망한 840년에는 3명의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 루트비히가 살아있을 때에도 상속권 문제로 반란을 일으켰던 세 아들은 아버지 사후 다시 권력 다툼을 벌였다. 장남 로타르 1세가 제국의 단독 상속권을 주장하자, 독일왕 루트비히와 대머리왕 카를이 이에 대항하여 로타르 1세를 공격했다. 841년 로타르 1세는 퐁트누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패배하였고, 그 결과 843년 베르됭 조약을 맺어 동생들의 권리를 인정해야 했다. 이로써 프랑크 왕국은 3개의 왕국으로 해체되었고, 패배한 로타르 1세에게는 제국 가운데의 길고 좁은 땅만이 남겨졌다. 이것이 중프랑크 왕국이다. 그러나 로타르 1세는 장남으로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위와 형제들 왕국에 대한 명목상의 지배는 유지했기 때문에, 중프랑크 왕국에는 로마아헨 등 상징적으로 중요한 지역이 포함되었다.

3. 지리적 특징 및 민족 구성

중프랑크 왕국은 북쪽의 북해에서 시작하여 유럽 대륙을 길게 가로질러 남쪽의 지중해까지 뻗어 있었다. 라인강스헬더강 사이의 프랑크 왕국 영토로, 프리슬란트, 니더란트, 라인란트, 옛 부르군트 왕국의 영역(오늘날 부르고뉴는 제외), 프로방스, 북부 이탈리아를 포함했다.

이러한 지리적 위치로 인해 중프랑크 왕국의 민족 구성은 다양했다. 독일 민족 중심의 동프랑크 왕국과 프랑스 민족 중심의 서프랑크 왕국과 달리, 중프랑크 왕국은 특정 민족이 주도하지 못했고 문화적 일체성도 약했다.

중프랑크 왕국은 북쪽의 프리슬란트에서 남쪽의 이탈리아 북부까지 이어졌으며, 프로방스를 통해 리구리아 해와 리옹 만에 접했고, (현재의) 베네토를 통해 아드리아 해로 진출할 수 있었다. 중프랑크 왕국의 영토는 약 30만~35만 km2였다.

중프랑크 왕국의 지리적 위치는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과 같은 강한 이웃 국가들에 비해 불리했다. 중프랑크 왕국의 주요 국경은 서프랑크 왕국과 동프랑크 왕국과 접해 있었고, 나머지 국경은 고립되었으며 규모도 작았다. 당시 다른 국가와 접한 국경은 교황령, 베네벤토, 베네치아와 같이 무역이나 발전의 문화가 형성되지 않은 국가들과의 국경뿐이었다. 이 때문에 중프랑크 왕국은 비잔티움 제국이나 불가리아와 같은 다른 국가들과 무역을 할 수 없었다. 게다가 유럽 내 중프랑크 왕국의 위치는 주권을 위태롭게 했다. 특히 서프랑크 왕국이나 동프랑크 왕국이 중프랑크 왕국을 공격할 경우, 국경선의 길이 때문에 방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는 메르센 조약에서 일어난 일과 유사하다.

4. 프륌 조약과 왕국의 분열 (855년)

경건왕 루트비히의 죽음으로 프랑크 왕국이 셋으로 분열되며 성립한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르 1세의 죽음으로 또다시 셋으로 분열되어 해체된다.

855년 9월 19일, 프륌 수도원에 머무르던 로타르 1세의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이 임박하자, 그는 자신의 중프랑크 왕국을 셋으로 나누어 세 아들들에게 물려주었다. 이를 프륌 조약이라 한다.[1] 로타르 1세는 프륌 조약 10일 후인 855년 9월 29일에 사망한다.

프륌 조약에 따라 로타르 1세의 장남 루트비히 2세는 황제 칭호와 이탈리아 왕국을, 막내 샤를은 부르군트와 프로방스 지역을 물려받았다. 차남 로타르 2세는 알프스 북쪽의 광대한 영토를 물려받았는데, 이 지역은 그의 이름을 따서 "로타링기아"라고 불리게 된다.

프륌 조약으로 왕국이 해체되며 생긴 중프랑크 왕국의 세 계승 국가들은 이후 짧은 기간 더 존속하다가 서로 다른 시기에 소멸된다.

4. 1. 루트비히 2세의 이탈리아 왕국

로타르 1세 황제는 855년 프륀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이하며 프륀 조약을 통해 중앙 프랑크 왕국을 세 아들에게 분할 상속했다. 장남 루트비히 2세는 850년 공동 황제로, 855년 단독 황제로 즉위하였으며, 로마스폴레토까지 남쪽으로 확장된 이탈리아 북부 지역을 상속받았다. 이 지역은 결국 이탈리아 왕국이 되었다.[1]

루트비히 2세가 875년에 죽자 이탈리아 왕위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관은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카를에게 넘어갔다. 대머리왕 카를이 죽자 이탈리아 왕위는 동프랑크 왕국의 카를만에게 넘어갔다.

4. 2. 로타르 2세의 로타링기아 왕국

로타르 1세의 차남 로타르 2세는 알프스 이북의 중프랑크 왕국 영토 대부분을 상속받아 로타링기아를 다스렸다. 이 지역은 오늘날 독일의 프리슬란트, 라인란트 지역과 네덜란드, 벨기에를 포함하며, 프랑스 로렌 지방의 어원이 된다. 로타르 2세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칭호는 받지 못했지만, 아헨 등 중프랑크 왕국의 핵심 지역을 다스렸다.[1]

855년 로타르 1세는 프륀 수도원에서 임종을 맞으며 프륀 조약을 통해 중앙 프랑크 왕국을 세 아들에게 분할했다. 이 중 알프스 산맥 북쪽 대부분(오늘날 네덜란드, 서부 라인란트, 프랑스독일 국경 지역, 서부 스위스)은 로타르 2세에게 돌아갔고, 그의 이름을 따 로타링기아가 되었다.

4. 3. 샤를의 프로방스 왕국

로타르 1세의 막내 아들 샤를은 부르고뉴 왕국(상 부르고뉴와 하 부르고뉴)와 프로방스를 상속받았다.[1] 이때 샤를이 상속받은 부르군트에는 옛 부르군트 왕국의 대부분 지역이 포함되었고, 나머지 지역은 오늘날 프랑스에서 부르고뉴라 부르는 지역으로, 이미 843년 베르됭 조약 때부터 서프랑크 왕국령이었다.[1]

샤를이 863년에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두 형이 왕국을 나누어, 부르군트 북부 일부 지역은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에게, 남부의 넓은 지역과 프로방스는 루트비히 2세에게 양도되었다.[1] 그러나 875년에 루트비히 2세가 죽자 남부 부르군트와 프로방스는 다시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카를에게 양도되었다.[1]

5. 로타링기아의 분할과 메르센 조약 (870년)

843년과 870년의 분할


869년 로타르 2세가 사망했을 때, 그의 유일한 상속자는 그의 형제 루트비히 2세였다. 그러나 루트비히 2세가 바리 토후국과 전투 중이었기 때문에, 870년 메르센 조약에 의해 로타링기아는 그의 삼촌인 샤를 대머리왕과 루이 독일왕 사이에 분할되었다.[1] 루이 독일왕은 쥐라 산맥 북쪽의 상부 부르고뉴(부르고뉴 트랑쥐란) 지역을 차지했고, 나머지는 샤를 대머리왕에게 돌아갔다.

6. 이탈리아 왕위 계승 분쟁

875년, 로타르 1세의 아들이자 이탈리아의 왕이었던 루트비히 2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 이탈리아 왕위와 황제 지위를 둘러싼 분쟁이 발생했다. 루이 독일왕의 장남인 바바리아의 카를만이 이탈리아의 후계자로 지명되었으나, 교황 요한 8세서프랑크 왕국의 샤를 대머리왕을 지지했다.[1] 혼란과 갈등 끝에 샤를 대머리왕이 이탈리아를 차지했다. 카를만은 876년 바바리아 왕위에 올랐고, 877년 이탈리아 왕위를 주장하며 이탈리아를 침략했으나, 880년 후사 없이 사망하여 그의 왕국은 동생인 뚱보왕 샤를에게 돌아갔다. 샤를은 881년 교황 요한 8세에 의해 황제로 즉위했다.[1]

7. 프로방스와 부르군트의 운명

프로방스의 샤를이 863년에 후사 없이 죽자 그의 두 형이 왕국을 나누었다.[1] 로타링기아의 로타르 2세는 부르군트의 북부 일부 지역을, 이탈리아 왕 루트비히 2세는 남부의 넓은 지역과 프로방스를 양도받았다.[1] 그러나 875년에 루트비히 2세가 죽자 남부 부르군트와 프로방스는 다시 서프랑크 왕국의 대머리왕 카를에게 양도되었다.[1]

879년 보소가 하부르군트 왕국을 세우면서 부르군트와 프로방스는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 보소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1]

8. 카를 3세의 통일과 재분열

870년 메르센 조약으로 로타링기아가 재분할된 이후, 프랑크 왕국은 복잡한 상속 관계로 여러 번 분열과 통합을 반복했다. 879년 서프랑크 왕국의 귀족 보소는 부르군트와 프로방스 지역을 지배하며 하부르군트 왕국을 세웠다.[1]

로타링기아 서쪽 지역은 879년 동프랑크 왕국의 루트비히 3세에게 넘어갔고, 880년 리베몽 조약으로 확정되었다. 이후 로타링기아 전체는 동프랑크 왕국에 속하여 로타링기아 공국이 되었다.

882년, 동프랑크 왕국의 뚱보왕 카를 3세는 형제들의 사망으로 동프랑크 왕국을 통합하고, 서프랑크 왕국의 왕위까지 계승하면서 884년, 보소의 하부르군트 왕국을 제외한 프랑크 왕국 전체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887년 카를 3세는 조카 아르눌프에게 폐위되어 동프랑크 왕국을 잃었고 왕국은 다시 분열되었다. 888년 카를 3세가 사망한 후, 벨프 왕가의 루돌프 1세는 북쪽에 상부르군트 왕국을 건국했다.

9. 소멸과 그 이후

880년 리베몽 조약으로 로타링기아 전체가 동프랑크 왕국에 흡수되었다. 이후 오토 1세 때인 951년 이탈리아를 얻었고, 1033년 콘라트 2세에 의해 부르군트 왕국이 신성로마제국의 일부가 된다.[1]

15세기에 부르군트 공작은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에서 상부르군트에서 니더란트에 이르는 많은 영지를 지배했는데, 이는 옛 중프랑크 왕국의 영역과 흡사했다. 그러나 부르군트 공작 용담공 샤를이 새로운 중프랑크 왕국을 건설하려던 야심찬 계획은 낭시 전투 (1477)에서 그가 전사하면서 좌절되고 말았다.

10. 역대 군주

이름재위 기간비고
로타르 1세843년 - 855년신성 로마 제국 황제 겸 중프랑크 왕. 그의 사후 중프랑크 왕국은 해체됨.
루트비히 2세855년 - 875년로타르 1세의 장남, 이탈리아 왕신성 로마 제국 황제
로타르 2세855년 - 869년로타르 1세의 차남, 로타링기아 왕
샤를855년 - 863년로타르 1세의 막내아들, 프로방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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