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산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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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직산 전투는 임진왜란 시기인 1597년(게이초 2년) 일본군의 조선 재침략(게이초의 역) 당시, 일본군이 충청도 지역을 평정하려다 명나라 군대와 벌인 전투이다.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한 후 충청도로 진격하여 공주를 점령했으나, 직산에서 명나라 군대의 매복에 걸려 전투가 벌어졌다. 전투 결과, 명군은 일본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수원 방향으로 퇴각시켰다. 이 전투는 일본군이 한성에 가장 근접한 지점이었으며,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나 왜성 축성을 시작했다.

직산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전투 개요
전투명직산 전투
관련 전쟁정유재란
날짜1597년 10월 16일 (음력 9월 7일)
장소직산 (현재의 천안시)
결과양측 모두 퇴각
교전 세력
교전 1명나라
교전 2일본
지휘관 및 지도자
명나라마귀, 뉴보잉, 지에성
일본구로다 나가마사, 모리 히데모토, 시시도 모토쓰구
병력 규모
명나라보병 6,000명, 기병 2,000명
일본30,000명
피해 규모
명나라85명 이상
일본60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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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정유재란이 발발하면서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충청도까지 진출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작전 목표 달성 후에는 성채(왜성)를 쌓고 주둔 부대를 정한 뒤, 나머지 군대는 일본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1597년 7월 16일,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격파한 일본군은 육상에서도 전라도를 향해 진격을 개시했다. 명나라와 조선군은 전라도와 경상도의 경계에 위치한 남원성과 황석산성에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일본군은 좌군과 우군으로 나뉘어 서쪽으로 진격했다. 좌군은 8월 15일 남원성 전투에서 남원성을 함락시켰고, 우군은 8월 16일 황석산성 전투에서 황석산성을 함락시켰다. 이후 양군은 전라도의 중심 도시인 전주를 향해 함께 진격했다. 전주를 지키던 명나라 장수 진우충은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주했고, 일본군은 8월 19일 전투 없이 전주를 점령했다. 이후 여러 장수들은 군사 회의를 열어 전라도와 충청도를 평정하기 위해 각지로 병력을 나누어 진군했다.

3. 전투 과정

일본군은 조총과 활 등을 앞세워 선제공격을 하였으나, 기병을 중심으로 구성된 명군은 돌격전으로 응수, 일본군 상당수가 단병기에 맞아 쓰러졌다. 일본군의 화기 운용 수준은 화력과 명중률에서 기병을 상대하기 상당히 불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빠른 속도로 접근해온 명군에 대하여 근접 대응할 수단이 모두 무용지물이었던 까닭으로 들고 있던 병기를 버리고 퇴각하였다.

충청도 평정을 담당한 일본 우군의 주력은 모리 히데모토(병력 약 25,000명), 가토 기요마사(병력 약 1만 명), 구로다 나가마사(병력 약 5,000명)와 군감 오타 가즈요시, 다케나카 시게토시 등 5명의 장수였다. 이들은 병력 4만여 명을 이끌고 8월 29일 전주를 출발하여 북진, 9월 초 공주에 이르렀다. 일본군은 명군의 저항 없이 공주를 점령했다.

일본군은 공주에서 길을 나누어 가토, 오타의 2개 부대는 우측으로 진격하여 연기를 거쳐 9월 6일 청주에 이르렀고, 히데모토는 구로다 부대를 선봉으로 삼아 전의를 거쳐 같은 날 천안에 도착했다.

한성에서 명나라의 경리 양호는 9월 초하루 평양에서 온 마귀를 재촉하여 일본군의 전진을 막으려 했다. 마귀는 이에 수원에 도착하여 부총병 해생, 유격 우백영, 양등산, 파귀 등 4명의 장수를 시켜 정예 기병 2천 명을 이끌고 6일 직산으로 향하게 했다.

9월 7일 새벽, 구로다 나가마사는 부장 구로다 나오유키, 구리야마 도시야스 등 선봉의 약간의 병력을 먼저 전진시켰다. 나오유키 등은 직산으로 1리 정도까지 전진하여 해가 뜨자 적병이 산야에 가득 차 가까이 접근하는 모습을 보았다. 여러 장수들은 군의를 열고 진퇴를 논의했다. 모야 다케히사는 "적은 많고 우리는 적습니다. 만약 우리가 한 발짝 물러선다면 적은 반드시 추격하여 우리 병사를 전멸시킬 것입니다."라고 발언하자, 여러 장수들도 이를 옳다고 여겨 보병에게 일제히 총을 쏘게 하고, 사졸들은 연기 속에서 함성을 지르며 돌격했다. 명군은 처음에는 상대 군대가 일본군인 줄 모르고 조선군이라고 생각했기에, 공격을 받고도 미처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 명군은 반응하여 일본군과의 전투를 시작했다. 나오유키 등은 이를 기회로 병력을 수습하여 물러났다. 이때 나가마사는 멀리서 총성을 듣고 휘하 3,000명을 이끌고 달려갔다. 구로다 가즈나리는 "선봉이 만약 패한다면 우리 본군도 또한 아마 지탱하기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수하 병력으로 적을 측면에서 공격했다. 고토 모토쓰구는 한 고지를 점령하고 그 부하 병력을 달려가게 하여 적에게 아군의 수효를 헤아리게 하고, 또한 선봉 병력에게 지원을 보냈다.

나가마사는 전장에 도착하자 곧 동쪽 고지에 올라 스스로 적정을 정찰하고, 부대 배치를 다음과 같이 변경했다. 우비 1번대는 모리 도모노부, 구리야마 도시야스, 구로다 도시타카에게 맡기고, 이노우에 구로베, 노무라 이치에몬을 2번대로 그 뒤에 배치했다. 좌비 1번대는 고토 모토쓰구, 구로다 가즈나리가 맡고, 구로다 나오유키, 기리야마 손베에가 2번대로 그 뒤에 배치했다. 나가마사는 스스로 나머지 병력 2,000명을 이끌고 본대가 되었다. 양군은 말단원의 들에서 싸워 분전했지만, 쉽게 승패가 결정되지 않았다.

모리 히데모토는 천안에 있으면서 직산의 급한 소식을 듣고, 즉시 병력을 이끌고 지원하여 선봉 장수 시시도 모토쓰구, 요시미 히로유키 등에게 먼저 진격하게 했다. 모토쓰구 등은 급히 달려가 구로다 부대를 도와 적의 측면에 돌격했다. 이로 인해 명군은 마침내 크게 패하여 수원 방향으로 퇴각했다. 오후 3시쯤, 일본군은 감히 추격하지 않고 병력을 수습하여 천안으로 돌아갔다. 이날 전투에서 일본군 구로다 부대는 29명이 전사했고, 명군은 약 200여 명이 전사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본군 전사 500~600명, 명군도 전사자가 많다는 기사가 있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명군이 자군의 승리로 보고하고 있다.

4. 전투 이후 경과

일본군이 직산에 진출하여 수도에 육박하자 명·조선 연합군은 한강을 방어선으로 삼아 방비를 굳혔다. 그러나 한성에서는 일본군의 접근으로 인해 공황 상태에 빠졌고, 사람들은 도망쳐 거의 무인이 될 정도였다. 이때 명군은 병력이 소수에 불과하여 약체였고, 조선군은 이미 궤멸된 상태였다. 한성은 유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고, 조선의 조정 신하들은 앞다투어 도성을 떠나 피난할 것을 건의했다.

한편 일본 우군은 직산 전투 후 9월 10일 경기도의 안성·죽산까지 전진했다. 이로써 게이초의 역 발동 초부터 정해져 있던 전략 목적이 달성되었다. 이 때문에, 초기의 계획에 따라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의 각 일본군은 각각 반전하여 한반도 남해안으로 돌아와 축성을 시작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일본군의 반전 이유를 알 수 없어 일본군의 함정이 아닌가 의심했다.

한반도 남해안에서 축성을 서두르는 일본군에 대항하여 명·조선 연합군은 반격을 기획하여, 건설 중인 성채군 중 최동단에 위치한 울산성을 목표로 정하고 공격했다. 이 울산성 전투는 12월 22일부터 시작되었지만, 가토 기요마사 등은 성을 굳게 지켰고, 모리 히데모토 등이 구원하여 이듬해 1월 4일 명·조선 연합군을 격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