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도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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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절이도 해전은 임진왜란 시기인 1598년 7월 19일에 이순신이 지휘하는 조선 수군이 거금도 북방 해역에서 일본 수군과 벌인 해전이다. 칠천량 해전 이후 명나라 수군의 소극적인 태도 속에서 이순신은 일본 수군의 공격에 대응하여, 50여 척의 적선을 격침시키는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 해전의 결과로 조선 수군은 고흥반도 서쪽의 제해권을 장악하고, 이후 전황에 유리한 위치를 확보했다. 그러나 난중일기 해당 부분의 망실과 이충무공전서 기록 누락으로 사료가 부족하여, 역사적 평가와 왜곡에 대한 논란이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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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이도 해전 - [전쟁]에 관한 문서 | |
|---|---|
| 절이도 해전 | |
| 분쟁 | 정유재란 |
| 전체 | 정유재란 |
| 날짜 | 1598년 8월 20일 (무술년 음력 7월 19일) |
| 장소 | 전라도 흥양현 금산면 신촌리 (현 고라금해수욕장 일대) |
| 결과 | 조명 연합수군의 승리 |
| 교전 세력 | |
| 교전국 1 | 조선 |
| 교전국 2 | 일본 |
| 지휘관 | |
| 지휘관 1 | 이순신충무공 |
| 지휘관 2 | 도도 다카토라 |
| 병력 규모 | |
| 병력 1 | 조선 수군 판옥선 85척, 협선 85척, 병력 1만 7000명 |
| 병력 2 | 아타케부네 100여 척, 병력 20,000여 명 |
| 군대 | |
| 군대 1 | 조선 수군 |
| 군대 2 | 일본 수군 |
| 피해 규모 | |
| 사상자 1 | 30여명 전사 |
| 사상자 2 | 아타케부네 50여 척 침몰 |
2. 배경
2. 1. 칠천량 해전의 여파
2. 2. 명나라 수군의 참전과 소극적 태도
2. 3. 이순신의 전략과 전술
3. 경과
3. 1. 일본 수군의 서진과 조선 수군의 대응
3. 2. 절이도 해전의 전개
7월 18일 명나라 수군이 도착하고 이틀 뒤, 적함 100여 척이 금당도(고금도와 거금도 중간의 섬)로 침범해 온다는 급보를 접한 이순신은 전함대에 출동태세를 갖추도록 하고 금당도로 전진 결진하여 밤을 새웠다. 그러나 명나라 수군은 합세하지 않고 후행하며 관전하는 자세를 취했다. 7월 19일 새벽, 일본 함대가 거금도(절이도)와 녹도(소록도 근처) 사이로 나오자, 이순신 함대는 거금도 북방 해역에서 해상 요격전을 벌였다. 난중일기의 이 당시 부분이 망실되었고, 이충무공전서에도 이 사실을 기록하지 않고 있지만, 선조수정실록(선조 31년 8월)에는 이순신 함대가 이를 요격하여 적선 50여 척을 격침시킨 것으로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50여 척도 크게 파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전으로 이순신 함대는 고금도에서 거금도까지 지배 해역을 확대하여 고흥반도 이서의 제해권을 장악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이 해전에서 격침 및 대파된 적선 50척에 탑승한 적군을 산정하면 16,000여 명에 이른다. 아군은 함선 손실은 없었지만, 전사상자가 30여 명 발생했다. 1795년에 윤행님(尹行恁)이 편찬한 「이충무공 전서」에는 녹도만호 송여송이 진린에게 적전선 6척과 수급 69개를 상납한 사실이 명기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거금도 앞바다가 적의 시체로 가득 찼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전의 성과로 이순신 함대는 고흥반도까지 완전히 장악하고, 순천만과 남해도의 서측방 광양만을 장악하면 전라도 수역을 확보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위해 명나라 수군과 연합하여 일본의 요새진지인 예교(관음포) 앞 포구에 주박하고 있는 100여 척의 함선을 격침시키면, 고니시는 고립무원이 될 것이고, 한산도 전진기지를 재탈환하여 경상도 해역까지 망라하는 광활한 남해의 제해권을 쥘 수 있을 것이라고 이순신은 생각했다.
그러나 진린이 이를 간파하고 방해하여, 이순신은 여러 번 선조에게 장계를 올려 자신의 심정을 토로하였다. 선조는 명군 경략(총사령관격)에게 건의하여 진린을 육장으로 전임시키고 수군 유격장 계금으로 하여금 명나라 수군과 조선 수군을 통합 지휘토록 하는 고육지책을 구상했으나, 진린의 반발로 시행하지 못했다.
이 해전이 시작하기 며칠 전,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가 되었다 돌아온 김완이 왜 수군의 진격을 알렸다.
3. 3. 명나라 수군의 전과 탈취
4. 결과 및 영향
4. 1. 조선 수군의 제해권 장악
절이도 해전의 승리로 조선 수군은 고금도에서 거금도까지 지배 해역을 확대하고, 고흥반도 이서의 제해권을 장악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명나라 수군의 도움 없이 100척 규모의 일본 함대를 상대로 50여 척을 격침시키는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충무공전서에는 이 사실이 누락되어 있는데, 이는 명나라 군대를 모욕하는 것이 황제를 모욕하는 것이라는 의도적인 누락으로 보인다. 선조수정실록(선조 31년 8월)에는 이순신 함대가 일본 함대를 요격하여 적선 50여 척을 불태웠다는 기록이 명확히 남아있다.이 해전으로 이순신 함대는 고금도에서 거금도까지 지배 해역을 넓혔고, 고흥반도 서쪽의 제해권을 확실하게 장악했다. 격침된 적선 50척과 크게 파손된 50척의 적선에 타고 있던 일본군을 계산하면 16,000여 명에 이른다. 조선 수군은 함선 손실은 없었지만, 30여 명의 전사상자가 발생했다. 1795년 윤행임(尹行恁)이 편찬한 「이충무공전서」에는 녹도만호 송여종이 진린에게 적선 6척과 69개의 수급을 바쳤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거금도 앞바다가 일본군의 시체로 가득 찼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해전 며칠 전 칠천량 해전에서 포로로 잡혔다가 돌아온 김완이 일본 수군의 진격을 알렸다.
4. 2. 이후 전투에 미친 영향
4. 3. 역사적 평가와 논란
4. 3. 1. 사료 부족과 역사 왜곡 문제
절이도 해전은 사료 부족으로 인해 그 상세한 내용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해전 당시의 상황을 기록한 이순신의 난중일기 해당 부분이 망실되어 전해지지 않는다. 또한, 이순신 사후에 간행된 이충무공전서에도 이 해전에 대한 기록이 누락되어 있다.이러한 사료 부족은 절이도 해전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어렵게 만들고, 나아가 사대주의적 역사관에 의해 해전의 의미가 축소, 왜곡되었다는 비판을 낳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이순신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들이 의도적으로 축소, 왜곡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절이도 해전 역시 그 희생양이 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5. 같이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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