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시버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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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 시버그는 미국의 배우로, 1957년 영화 《성녀 잔 다르크》로 데뷔하여 《슬픔이여, 안녕》(1958)과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1960)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이후 미국과 프랑스에서 30편 이상의 영화에 출연했으나 흥행작은 많지 않았다. 시버그는 시민권 운동과 흑표당을 지원하여 FBI의 감시를 받았으며, 1970년 임신 중 흑표당 간부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소문으로 고통받았다. 1979년 파리에서 알코올과 바르비투르산염 과다 복용으로 자살한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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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시버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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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진 도로시 시버그 |
출생일 | 1938년 11월 13일 |
출생지 | 미국 아이오와주 마셜타운 |
사망일 | 1979년 8월 30일 (향년 40세) |
사망 장소 | 프랑스 파리 |
사망 원인 | 자살 추정 |
발견일 | 1979년 9월 8일 |
묘지 | 몽파르나스 묘지 |
국적 | 미국 |
직업 | 배우 |
활동 기간 | 1957년 – 1979년 |
학력 | |
모교 | 아이오와 대학교 |
신체 | |
키 | 미제공 |
혈액형 | 미제공 |
가족 관계 | |
배우자 | 프랑수아 모뢰유 (1958년 결혼, 1960년 이혼) 로망 가리 (1962년 결혼, 1970년 이혼) 데니스 베리 (1972년 결혼) |
파트너 | 아메드 하스니 (1979년) |
자녀 | 2명 (1명 사망) |
기타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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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내력
아이오와 주 마셜타운에서 대리 교사였던 도러시 알라인과 약사 에드워드 월드마 시버그 사이에서 태어났다. 오토 프레민저 감독에게 발탁되어 17세 때 《성 잔 다르크》로 데뷔하였다. 1960년 장뤼크 고다르의 첫 감독 작품 《네 멋대로 해라》에 주연으로 출연하였다.
이후 미국과 프랑스에서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큰 흥행작은 없었다.
개인적으로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심취해 전국 유색 인종 향상 협회와 흑표당을 지원했다. 1970년 임신 중 뱃속의 아이가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흑표당 간부의 아이라는 소문이 퍼져 유산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소문을 부정하기 위해 기자 회견에서 유산된 태아의 사진을 스스로 공개하기도 했다.
1979년 8월 실종되었으며, 11일 후 파리 교외의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100] 알코올로 인한 자살로 추정되며, 손에 있던 유서에는 "용서하십시오. 더 이상 제 신경은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쓰여 있었다. 시버그는 현재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혀있다.
1961년에는 일본에 2주 정도 체류했으며, 기모노 차림으로 바둑을 두는 사진이 잡지 「주간 헤이본」 (1961년 3월 발행)에 실리기도 했다.[99]
2. 1. 초기 생애
진 시버그는 아이오와 주 마셜타운에서 대리 교사인 도러시 알라인(Dorothy Arline)과 약사 에드워드 월드마 시버그(Edward Waldemar Seberg) 사이에서 태어났다.[12][13][14] 그녀의 가족은 루터교 신자였으며 스웨덴, 영국, 독일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14][15][16] 시버그는 언니 메리앤과 두 남동생 커트, 데이비드를 두었는데, 막내인 데이비드는 1968년 18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7]그녀의 아버지 쪽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칼슨은 1882년 미국에 도착하여 "신세계에는 칼슨이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웨덴의 물과 산을 기리기 위해 성을 시버그로 바꿨다.[18]
마셜타운에서 시버그는 자신보다 8살 어린 메리 수핀저의 베이비시터를 했는데, 그녀는 무대와 영화 배우 메리 배스 허트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시버그는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아이오와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대신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19]
2. 2. 영화 경력
아이오와 주 마셜타운에서 태어난 시버그는 17세에 오토 프레민저 감독에게 발탁되어 《성 잔 다르크》로 데뷔하였다.[100] 이후 장뤼크 고다르의 첫 감독 작품 《네 멋대로 해라》에 주연으로 출연하며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자유 연애 여주인공으로 성공을 거두었다.이후 미국과 프랑스에서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큰 흥행작은 없었다.[100]
2. 2. 1. 오토 프레밍거와의 만남
오토 프레민저 감독에게 발탁되어 17세 때 《성 잔 다르크》로 데뷔하였다.[17][20] 1956년 10월 21일에 캐스팅되었을 때, 시버그는 여름 극장 공연 단 한 시즌이 유일한 연기 경험이었다.[21] 이 영화는 많은 홍보를 낳았지만, 시버그는 "모든 관심에 당황했다"고 말했다.[20] 엄청난 과대 광고에도 불구하고, 언론에서 "''피그말리온'' 실험"이라고 불렸으며, 영화와 시버그는 모두 좋지 않은 평가를 받았다.[22] 실패에 대해 그녀는 나중에 언론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홍보가 배우가 아니라면 당신을 영화 배우로 만들지 못한다는 매우 현실적인 사실의 가장 훌륭한 예입니다.[17]
또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나는 ''성 잔''에 대한 두 가지 기억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그림에서 화형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비평가들에게 화형당하는 것이었습니다. 후자가 더 아팠습니다. 나는 토끼처럼 두려웠고 그것이 화면에 나타났습니다. 전혀 좋은 경험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대부분의 여배우가 끝내는 곳에서 시작했습니다.[23]
프레밍거는 그녀에게 두 번째 기회를 약속했고,[22] 다음 영화인 ''슬픔이여 안녕'' (1958)에 시버그를 캐스팅했으며, 이 영화는 프랑스에서 촬영되었다. 프레밍거는 언론에 "만약 내가 오드리 헵번 대신 진 시버그를 선택했다면 위험이 덜했을 것이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을 선호한다. [...] 나는 그녀를 믿습니다. 물론, 그녀는 여전히 연기에 대해 배울 점이 있지만, 킴 노바크도 시작할 때 그랬습니다."라고 말했다.[22] 시버그는 다시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고 이 영화는 그녀의 경력을 거의 끝낼 뻔했다.[23]
밀렌느 드몽조는 2015년 파리에서 촬영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 오토는 진에게 큰 기대를 걸었고, ''성 잔''의 실패는 그에게도 타격을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기억하기로는 5편의 영화 계약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그것에 대해 매우 슬퍼했고, 우리가 모두 ''슬픔이여 안녕'' 세트에 도착했을 때, 그녀는 죄책감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었고,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남자, [프레밍거]의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는 두려움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제가 그와 잘 지냈습니다. 저는 조연이었고, 영화의 예상된 성공에 대한 부담이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걱정이 없었습니다. 그가 소리를 지를 때, 저는 돌아서서 [비꼬며] "저런,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안 돼요, 뇌졸중 걸릴 거예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런 말은 그를 진정시켰습니다. 반대로, 진은 그를 두려워해서 그는 그것을 이용했고 결국 그녀에게 매우 심술궂게 굴었습니다.[26]
시버그는 프레밍거와 재협상하여 컬럼비아 픽처스와 장기 계약을 체결했다. 프레밍거는 그녀를 다른 영화에 출연시킬 수 있는 옵션이 있었지만, 그들은 다시 함께 일하지 않았다.
2. 2. 2. 프랑스 누벨바그와 성공
장뤼크 고다르의 첫 감독 작품 《네 멋대로 해라》에 주연으로 등장하여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자유 연애 여주인공으로 성공을 거두었다.[23]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프랑스어 제목: À bout de souffle프랑스어, 1960)에서 장 폴 벨몽도와 함께 주연을 맡아 패트리샤 역을 연기했다. 이 영화는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비평가들은 시버그의 연기를 칭찬했으며, 영화 평론가이자 감독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녀를 "유럽 최고의 여배우"라고 칭찬하기도 했다.[27] 시버그는 자신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관심 없는 사람들"에 대한 영화를 프랑스에서 만들고 있다고 말하며 자신의 캐릭터나 영화 줄거리에 공감하지 못했다.[23]
프랑스에서는 《사랑의 휴일》 (1961)에 출연한 후, 첫 남편 모레유의 감독 데뷔작인 《사랑의 유희》 (1961)에서 주연을 맡았다. 그 당시 시버그는 모레유와 사이가 멀어졌고, 촬영이 "지옥" 같았고 그가 "그녀에게 소리를 질렀다"고 회상했다.[23] 그녀는 《5일간의 연인》 (1962), 《콩고 비보》 (1962), 그리고 스탠리 베이커가 출연하고 콜롬비아를 통해 개봉된 프랑스-미국 영화 《인 더 프렌치 스타일》 (1963)에 출연했다. 또한, 옴니버스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기꾼들》 (1963)과 그녀가 장 폴 벨몽도와 다시 만난 《백파이어》 (1964)에도 출연했다.
2. 2. 3. 할리우드 복귀와 이후 활동
오토 프레민저에게 발탁되어 17세 때 《성 잔 다르크》로 데뷔한 후, 1960년 장뤼크 고다르의 첫 감독 작품 《네 멋대로 해라》에 주연으로 출연했다. 이후 미국과 프랑스에서 30여 편의 영화에 출연했지만 큰 흥행작은 없었다.프랑스 영화 《슬픔이여, 안녕》 촬영 중 첫 남편인 프랑수아 모레유를 만나 프랑스에 정착, 프랑스 누벨바그 영화의 자유 연애 여주인공으로 성공을 거두었다.[23] 장 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에서 장 폴 벨몽도와 함께 주연을 맡아 국제적인 성공을 거두었고, 프랑수아 트뤼포는 그녀를 "유럽 최고의 여배우"라고 칭찬했다.[27] 그러나 시버그는 자신의 캐릭터나 영화 줄거리에 공감하지 못했다.[23]
미국으로 돌아온 그녀는 범죄 드라마 《내 묘비명은 쓰지 말라》 (1960)에 출연했고, 프랑스에서는 《사랑의 휴일》 (1961)에 출연한 후, 모레유의 감독 데뷔작인 《사랑의 유희》 (1961)에서 주연을 맡았다. 당시 시버그는 모레유와 사이가 멀어졌고, 촬영이 "지옥" 같았다고 회상했다.[23]
이후 《5일간의 연인》 (1962), 《콩고 비보》 (1962), 《인 더 프렌치 스타일》 (1963) 등에 출연했다. 또한, 옴니버스 영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기꾼들》 (1963)과 《백파이어》 (1964)에도 출연했다.
시버그는 미국 영화 《릴리스》 (1964)에서 워렌 비티와 함께 출연하여 비평가들로부터 진지한 배우로 인정받았다.[27] 그 후 낭만적인 범죄 드라마 《백만 달러의 도박》 (1965)을 만들기 위해 프랑스로 돌아갔다.
서부 영화 ''마초 캘러한''(1970)과 폭력 범죄 드라마 ''킬! 킬! 킬! 킬!''(1971)에 출연했지만, 두 영화 모두 흥행에 실패했다. 1972년에는 유럽에서 성공했지만 미국에서는 그렇지 못했던 ''갱 워 인 나폴리''에 출연했다.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 ''아메리카의 밤'' (1973)에서 줄리 역으로 시버그를 먼저 생각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아 재클린 비세를 캐스팅했다.[33]
시버그의 마지막 미국 영화 출연작은 TV 영화 ''마우시''(1974)였다. 그녀는 1970년대에 유럽 영화에서 활동을 이어갔으며, ''백마의 여름'' (1975), 남편 데니스 베리와 함께한 ''빅 딜리리움'' (1975), 입센의 ''들오리''를 각색한 ''Die Wildente''(1976)에 출연했다.[34]
시버그가 사망했을 당시, 그녀는 프랑스 영화 ''오퍼레이션 레오파드'' (1980)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이 영화는 피에르 세르장의 저서를 바탕으로 제작되었다.[35] 그녀는 프랑스령 기아나에서 장면을 촬영했고 9월에 추가 작업을 위해 파리로 돌아왔다. 그녀의 사망 후, 이 장면은 배우 밈시 파머와 함께 다시 촬영되었다.[36]
2. 3. FBI COINTELPRO 작전
1960년대 후반, 시버그는 NAACP와 같은 시민 권리 옹호 단체와 아메리카 원주민 학교 그룹에 재정적 지원을 제공했다.[10][37]1968년에 시작된 흑인 해방 및 반전 단체를 폄하하고 비난하기 위한 FBI의 캠페인 일환으로, FBI는 시버그가 흑표당에 기증한 총 10500USD 상당의 기부금에 대해 알게 되었다.[10][37]
J. 에드거 후버의 직접적인 감독하에 시버그에 대한 FBI 작전은 COINTELPRO 프로그램 기법을 사용하여 그녀를 괴롭히고, 위협하고, 명예 훼손하고, 비난했다.[9][10] FBI의 목표는 시버그를 "무력화"하고, "그녀를 당황하게 하고 대중 앞에서 그녀의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것"이었다.[38]


1970년, FBI는 시버그가 임신한 아이가 흑표당의 구성원인 레이먼드 휴이트의 아이라는 허위 이야기를 만들었다.[40][41] 이 이야기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의 조이스 하버에 의해 블라인드 아이템으로 보도되었고,[42][43] ''뉴스위크'' 잡지에도 실렸다.[44] 시버그는 조산했고, 1970년 8월 23일에 약 1.81kg의 여자 아기를 낳았지만, 아이는 이틀 후에 사망했다.[45] 시버그는 고향에서 장례식을 열어 관을 열어놓아 기자들이 아기의 흰 피부를 볼 수 있게 했지만, 나중에 멕시코 학생 혁명가 카를로스 나바라가 실제 아버지였음을 인정했다.[46][47]
시버그와 로맹 가리는 ''뉴스위크''를 명예 훼손 및 비방으로 고소하여 200000USD의 손해 배상을 요구했다. 파리 법원은 ''뉴스위크''가 부부에게 10800USD의 손해 배상을 지불하도록 명령했다.[48]
시버그에 대한 조사는 명예 훼손적인 기사를 게재하는 것을 훨씬 넘어섰다. 그녀는 수년간 공격적인 감시를 받았으며, FBI 파일에 따르면 그녀는 도청되었고, 1980년에는 ''로스앤젤레스 타임스''에 그녀의 스위스 도청 통화 기록이 게재되었다.[39] FBI는 CIA, 비밀경호국 및 군사 정보에 시버그에 대한 파일을 제공했다.
1979년 시버그가 사망한 지 2주 후, FBI는 9년 전에 했던 일을 인정했다.[49][50] FBI 기록에 따르면 리처드 닉슨 대통령은 시버그 사건과 관련된 FBI 활동에 대해 계속 알렸다.[39]
2. 4. 개인사
아이오와주 마셜타운에서 대리 교사인 도러시 알라인(Dorothy Arline)과 약사 에드워드 월드마 시버그(Edward Waldemar Seberg) 사이에서 태어났다.[12][13][14] 그녀의 가족은 루터교 신자였으며 스웨덴, 영국, 독일계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14][15][16] 시버그는 언니 메리앤과 두 남동생 커트, 데이비드를 두었는데, 막내인 데이비드는 1968년 18세의 나이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17]그녀의 아버지 쪽 할아버지인 에드워드 칼슨은 1882년 미국에 도착하여 "신세계에는 칼슨이 너무 많다"라고 말했다. 그는 스웨덴의 물과 산을 기리기 위해 성을 시버그로 바꿨다.[18]
마셜타운에서 시버그는 자신보다 8살 어린 메리 수핀저의 베이비시터를 했는데, 그녀는 무대와 영화 배우 메리 배스 허트가 되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시버그는 연극을 공부하기 위해 아이오와 대학교에 입학했지만, 대신 영화 제작을 시작했다.[19]
1958년 9월 5일, 19세의 시버그는 15개월 전에 프랑스에서 만난 프랑스 변호사 프랑수아 모렐(23세)과 고향 마샬타운에서 결혼했다.[56] 그들은 1960년에 이혼했다. 모렐은 영화계에서 일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소원한 아내를 "사랑의 유희"에서 감독했다. 그는 결혼이 "폭력적"이었고 시버그가 "모든 잘못된 이유로 결혼했다"고 말했다.[23]
프랑스에서 일정 기간 동안 살았던 시버그는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나는 그것을 최대한 즐기고 있어요. 나는 아직 배울 수 있는 나이에 이 경험을 겪을 수 있어서 엄청나게 운이 좋았어요. 그렇다고 내가 여기에 머물 것이라는 의미는 아니에요. 저는 제 일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파리에 있어요. 저는 망명자가 아니에요. 저는 일이 있는 곳으로 갈 거에요. 프랑스 생활에는 단점이 있어요. 그 중 하나는 형식적인 것이죠. 그 시스템은 당신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을 위해 최대한의 자신을 아끼는 것을 기반으로 하는 것 같아요. 아마도 할리우드의 다른 극단적인 것보다 나을 거예요. 할리우드에서는 사람들이 공적인 삶에서 너무 많은 것을 쏟아부어서 가족을 위해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죠. 그래도 미국인이 익숙해지기 어려워요. 종종 저는 점심 식탁에서 흥분하지만, 주최자가 조심스럽게 커피는 다른 방에서 제공될 것이라고 말할 뿐이에요. ... 저는 미국인들의 캐주얼함과 친근함, 사람들을 미소 짓게 만드는 그런 종류의 것을 그리워요. 저는 또한 청바지, 밀크셰이크, 두꺼운 스테이크, 슈퍼마켓도 그리워요.[23]
미국에서 오랜 기간 머물렀음에도 시버그는 평생 파리에 머물렀다. 1961년 그녀는 24살 연상으로 작가 레슬리 블랜치와 결혼한 프랑스 비행사이자 프랑스 레지스탕스 단원이자 소설가 겸 외교관인 로맹 가리를 만났다. 시버그는 1962년 7월 17일 바르셀로나에서 그들의 아들 알렉상드르 디에고 가리를 낳았다.[57] 아이의 출생과 첫 해는 가까운 친구와 친척들에게조차 숨겨졌다. 가리의 블랜치와의 이혼은 1962년 9월 5일에 이루어졌고, 그는 1962년 10월 6일 코르시카에서 시버그와 비밀리에 결혼했다.[58]
가리와의 결혼 생활 동안 시버그는 파리, 그리스, 남프랑스, 마요르카에서 살았다.[59] 그녀는 1968년 9월에 이혼 소송을 제기했고, 이혼은 1970년 7월 1일에 최종 확정되었다. 2009년 현재, 그들의 아들은 스페인에 거주하며 서점을 운영하고 아버지의 문학 및 부동산 자산을 관리하고 있다.[60]
시버그는 워렌 비티 (''릴리스''), 클린트 이스트우드 (''페인트 유어 웨건'') 및 파비오 테스티 (''갱스터 워 인 나폴리'')와 영화 제작자 리카르도 프랑코와 염문설이 있었다고 한다.[61][62][63] 소설가 카를로스 푸엔테스 또한 그녀와 염문설이 있었다고 주장했다.[64]
1969~70년 겨울, 멕시코 두랑고에서 ''마초 칼라한''을 촬영하는 동안, 시버그는 학생 혁명가 카를로스 오르넬라스 나바라와 로맨틱한 관계를 맺었다. 그녀는 1970년 8월 23일 제왕절개로 딸 니나 하트 가리를 낳았다. 아기는 이틀 후인 1970년 8월 25일에 사망했다. 전 남편 가리는 임신에 대한 책임을 맡았지만 시버그는 나바라가 아버지임을 인정했다.[65] 니나는 마샬타운에 있는 리버사이드 묘지에 묻혔다.
1972년 3월 12일, 시버그는 감독 데니스 베리와 결혼했다. 부부는 1976년 5월에 별거했지만, 이혼하지는 않았다.[66] 시버그는 이후 프랑스의 촉망받는 영화 제작자 장 클로드 메세저와 데이트를 했고, 그는 나중에 1981년 여배우에 대한 CBS의 마이크 월리스와의 인터뷰에서 말했다.[55]
1979년, 그녀는 여전히 법적으로 별거 중인 남편 베리와 결혼한 상태에서, 19세의 알제리인 아메드 하스니와 "결혼의 한 형태"를 가졌다.[67] 하스니는 그녀에게 뤼 뒤 바크에 있는 두 번째 아파트를 팔도록 설득했고, 그는 매각 대금(현금으로 약 )을 보관하며 그 돈으로 바르셀로나 레스토랑을 열 것이라고 발표했다.[68] 부부는 스페인으로 떠났지만, 그녀는 곧 파리로 돌아와 혼자였고, 그녀가 심각하게 가정 폭력을 했다고 주장한 하스니로부터 숨어 지냈다.[69]
전국 유색 인종 향상 협회와 흑표당을 지원하는 등 민권 운동과 반전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93] 1970년 임신 중, 뱃속의 아이가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 흑표당 간부의 아이라는 소문이 퍼졌다.[94][95][96][97] 시버그는 유산했으나, 아버지에 대한 소문을 부정하기 위해 기자 회견에서 유산된 태아의 사진을 공개했다.[98]
1979년 8월 실종되었으며, 11일 후 파리 교외의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되었다.[100] 알코올로 인한 자살로 보이며, 손에 있던 유서에는 "용서하십시오. 또 나의 신경은 견딜 수 없습니다."라고 쓰여져 있었다. 시버그는 현재 파리의 몽파르나스 묘지에 묻혀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