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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파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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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짐 파머는 1945년 뉴욕에서 태어난 전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투수이다. 1965년부터 1984년까지 볼티모어 오리올스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1960년대, 1970년대, 1980년대에 걸쳐 월드 시리즈에서 승리한 유일한 투수이다. 그는 세 번의 사이 영 상과 네 번의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했으며, 1990년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은퇴 후에는 방송 해설가로 활동했으며, 조키(Jockey) 속옷 모델로도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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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 파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72년의 짐 파머
1972년
포지션투수
타석우타
투구우투
출생지미국 뉴욕주 뉴욕
데뷔 리그MLB
데뷔일1965년 4월 17일
데뷔팀볼티모어 오리올스
최종 리그MLB
최종일1984년 5월 12일
최종팀볼티모어 오리올스
통계
승패 기록268승 152패
평균자책점2.86
탈삼진2,212
소속팀
선수 경력볼티모어 오리올스 (1965–1967, 1969–1984)
수상 내역
올스타 선정6회 (1970–1972, 1975, 1977, 1978)
월드 시리즈 우승3회 (1966, 1970, 1983)
사이 영 상3회 (1973, 1975, 1976)
골드 글러브4회 (1976–1979)
다승3회 AL 다승 1위 (1975–1977)
평균 자책점2회 AL 평균 자책점 1위 (1973, 1975)
노히트 노런1969년 8월 13일
영구 결번볼티모어 오리올스 No. 22
명예의 전당볼티모어 오리올스 명예의 전당 헌액
명예의 전당 헌액
종류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
헌액 년도1990
득표율92.6% (첫 투표)
선정 방법미국 야구 기자 협회 (BBWAA) 선정
학력
대학교애리조나 주립 대학교

2. 선수 경력

짐 파머는 부드러운 투구 폼과 하이킥으로 유명한 투수였다. 1965년 5월 16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구원 등판하여 메이저 리그 첫 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파머는 양키스 선발 짐 보턴을 상대로 2점 홈런을 쳤다.[15] 파머는 그 시즌을 5승 4패로 마쳤다.

1966년, 볼티모어 오리올스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15승 10패, 평균자책점 3.46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66년 월드 시리즈 2차전에서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6-0 완봉승을 거두며, 월드 시리즈에서 완봉승을 거둔 최연소 투수(20세 11개월)가 되었다. 오리올스는 이 시리즈에서 샌디 쿠팩스, 돈 드라이스데일 등이 버틴 다저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15]

1963년 8월 16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한 파머는 1964년 A급에서 11승 3패, 평균자책점 2.51을 기록했다. 1965년, 19세의 나이로 개막 메이저 리그에 진입, 4월 17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메이저 데뷔하여 주로 구원 등판으로 5승을 기록했다.[15]

2. 1. 유년 시절

짐 파머(제임스 앨빈 파머)는 1945년 10월 15일 뉴욕시 맨해튼에서 태어났다. 2017년 그의 세 번째 부인인 수잔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그의 친부모는 각각 아일랜드 출신 이민자인 마이클 조셉 게런과 메리 앤 모로니였으며, 두 사람은 각각 리트림과 클레어 출신이었다. 조는 결혼한 41세 남성이었고, 메리 앤은 의류 산업에서 일하던 페인스타인 가문의 37세 미혼 가사 도우미였다. 모로니는 아기를 입양 보내면서 뉴욕시 출생 기록에 정보를 숨겼는데, 이 기록에서 파머는 ''''아기 켄네디''', 아버지 모로니, 어머니 켄네디로 기록되었다.[10]

모로니는 엘리스 섬에 등록할 때 기록된 성의 잘못된 철자였으며, 켄네디는 그녀의 여동생 캐서린의 결혼한 이름이었다. 모로니는 훗날 존 레인과 결혼하여 파머의 이복 자매인 패트리샤라는 딸을 낳았고, 패트리샤는 1987년 40세의 나이로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2018년 5월 현재, 파머 부부는 패트리샤 레인의 딸이자 짐 파머의 이종 조카인 킴벌리 휴즈를 찾고 있었다. 게런은 1959년에, 모로니는 1979년에 사망했다.[10]

파머는 태어난 지 이틀 만에 부유한 맨해튼 드레스 디자이너이자 부티크 주인이었던 모 위젠과 그의 아내 폴리에게 입양되었다. 그의 여동생 보니도 위젠 부부에게 입양되었다.[10] 가족의 집사는 어린 짐에게 센트럴 파크에서 야구를 던지는 법을 가르쳤다.[12] 1955년 양아버지의 심근 경색으로 인한 사망 이후, 9살의 짐과 그의 어머니, 여동생은 캘리포니아 비벌리힐스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유소년 야구를 시작했다. 1956년 그의 어머니는 배우 맥스 파머와 결혼했지만, 짐은 1년 후까지 짐 위젠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했다. 리틀 리그 연회에서 상을 받기 직전, 그는 코치들에게 자신을 "제임스 앨빈 파머"라고 불러 달라고 요청했다. 맥스는 "그 모든 세월을 통틀어, 그날 밤은 내 인생 전체에서 가장 하이라이트였다"고 회상했다.[10][11] 맥스는 성격 배우였고, 비슷한 시기에 연예계에서 활동한 같은 이름을 가진 두 남자가 있었다. 짐의 두 번째 아버지였던 맥스는 ''드래그넷'', ''배트 마스터슨'' 및 ''콜게이트 코미디 아워''와 같은 프로그램에서 주로 TV에서 활동했다. 그는 유대인이었고 신발을 팔아 생계를 유지했다.[12] 짐의 아버지로 종종 잘못 언급되는 다른 맥스 파머는 괴물로 여러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키가 약 2.44m 약 5.08cm였으며 나중에 프로 레슬러가 되었고 결국 기독교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짐은 비벌리힐스 양키스에서 야구를 했으며, 투수로 활동하고 외야수홈런을 치기도 했다. 가족은 결국 애리조나 스코츠데일로 이사했고, 짐은 스코츠데일 고등학교에서 야구, 농구, 미식축구를 했다. 그는 이 모든 스포츠에서 올스테이트 영예를 얻었으며, 1963년에는 3.4의 평점 평균으로 졸업했다.[12] 파머는 아메리칸 리전 야구에서도 그의 기량을 보여주었다. 서던 캘리포니아 대학교, UCLA,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는 각각 그에게 전액 장학금을 제안했고, 스탠퍼드 대학교는 부분 장학금을 제안했다.[12]

애리조나 주립 대학교의 바비 윙클스는 파머에게 대학 여름 야구 경기를 더 많이 경험할 것을 제안했고, 파머는 베이신 리그의 위너 피전츠에 합류하기 위해 사우스다코타로 갔다.[13] 팀은 리그 결승까지 진출했고, 파머는 챔피언십 두 번째 경기에서 투구를 하다가 볼티모어 오리올스 스카우트 해리 댈턴의 주목을 받았다.[14][15] 파머에 따르면, 시즌이 끝나자 13개의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MLB) 팀이 그를 영입하려 했지만, 짐 루소(그는 데이브 맥낼리와 부그 파웰을 영입한 스카우트이기도 함)와 오리올스의 짐 윌슨이 그들의 정중한 태도로 그의 부모에게 가장 좋은 인상을 주었다.[16] 파머는 볼티모어와 50000USD에 계약했다.[15]

2. 2. 볼티모어 오리올스 (1965-1984)

짐 파머는 부드러운 투구 폼과 하이킥으로 유명한 투수였다. 1965년 5월 16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구원 등판하여 메이저 리그 첫 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파머는 양키스 선발 짐 보턴을 상대로 2점 홈런을 쳤는데, 이는 그의 통산 3개 홈런 중 첫 번째였다. 파머는 그 시즌을 5승 4패로 마쳤다.

1966년, 파머는 선발 로테이션에 합류하여 15승 10패, 평균자책점 3.46을 기록하며 팀의 리그 우승에 기여했다. 1966년 월드 시리즈 2차전에서는 다저 스타디움에서 로스앤젤레스 다저스를 상대로 6-0 완봉승을 거두며, 월드 시리즈에서 완봉승을 거둔 최연소 투수(20세 11개월)가 되었다. 오리올스는 이 시리즈에서 샌디 쿠팩스, 돈 드라이스데일 등이 버틴 다저스를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1963년 8월 16일, 볼티모어 오리올스와 계약한 파머는 1964년 A급에서 11승 3패, 평균자책점 2.51을 기록했지만, 129이닝 동안 130개의 볼넷을 내주기도 했다. 당시 팜 팀 감독은 칼 립켄 시니어였으며, 훗날 팀 동료가 되는 칼 립켄 주니어와 교류했다. 1965년, 19세의 나이로 개막 메이저 리그에 진입, 4월 17일 보스턴 레드삭스전에서 메이저 데뷔하여 주로 구원 등판으로 5승을 기록했다.

2. 2. 1. 부상과 재기

1967년, 팔 부상으로 어려움을 겪던 파머는 5월 12일 뉴욕 양키스를 상대로 1안타 경기를 펼쳤지만, 5일 뒤 보스턴 레드삭스를 상대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며 마이너 리그로 내려갔다.[18][19] 로체스터 레드윙스 소속으로 버팔로 바이슨스의 조니 벤치에게 만루 홈런을 허용하기도 했다.[20] 그해 오리올스에서 3경기에 더 등판했고,[18] 1968년에는 마이너 리그 10경기 출장에 그치며 오리올스에서 뛰지 못했다.

1968년 9월 웨이버 공시되었고, 한 달 뒤 확장 드래프트에서 캔자스시티 로열스시애틀 파일럿츠로부터 보호받지 못했지만 지명되지 않았다.[22] 이후 파머는 푸에르토리코 윈터 리그에서 뛰던 중 인도신이라는 약물을 사용하며 팔 통증이 사라지고 구속이 회복되는 경험을 했다.[15][24] 파머는 이를 "기적"이라고 표현했다.[15]

1969년, 건강하게 복귀한 파머는 데이브 맥낼리와 마이크 큐엘라가 포함된 오리올스 선발진에 다시 합류했다. 7월에 허리 근육 파열로 6주간 부상자 명단에 올랐지만, 팔 부상은 아니었다.[15][25] 8월 13일, 오클랜드를 상대로 노히터를 달성했는데, 이는 부상자 명단에서 복귀한 지 불과 4일 만이었다.[26] 그해 파머는 16승 4패, 123개의 삼진, 2.34의 ERA, .800의 승률을 기록했다.

2. 2. 2. 전성기 (1970년대)

Jim Palmer영어는 1970년에 20승 10패, 1971년에는 20승 9패를 기록했다. 1972년에는 21승을 거두었고, 1973년에는 22승 9패, 평균자책점 2.40을 기록하며 첫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27] 1974년에는 스프링 트레이닝 중 팔에 문제가 생겨 8주 동안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6월 20일 부상자 명단에 오르기 전까지 7연패를 기록했고, 척골 신경 부상을 진단받았다. 정형외과 의사 로버트 커란은 휴식, 온찜질과 냉찜질 요법, 약물 치료를 처방했다. 수술도 고려되었지만 통증이 완화되어 8월에 다시 투구할 수 있게 되었고, 7승 12패로 시즌을 마쳤다.[28]

1975년에 다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여 23승, 10번의 완봉승(경기당 44개의 안타만 허용), 2.09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여 아메리칸 리그에서 모든 부문 1위를 차지했다. 25경기를 완투했고, 한 경기를 세이브하기도 했으며, 상대 타자들의 타율을 .216으로 묶었다. 7월 28일, 전날 미키 리버스에게 빈볼을 던진 것에 대해 아메리칸 리그 회장 리 맥페일에게 벌금을 받았다. Palmer영어는 그 전날 경기에서 독 엘리스가 레지 잭슨에게 빈볼을 던진 것에 대한 보복이라고 말했고, 엘리스(잭슨을 맞히는 것을 인정하지 않음)가 벌금을 받지 않자 불만을 제기했다.[29][30] 두 번째 사이 영 상을 수상했고, 1976년에도 22승 13패, 2.51의 평균자책점으로 사이영상과 골드 글러브 상을 수상했다. (짐 카트는 14시즌 연속으로 이 상을 수상했고, 내셔널 리그로 이적하여 그 해와 1977년에 이 상을 수상했다.)

1977년 오리올스에서 투구하는 파머


1976년에 185000USD를 벌었던 Palmer영어는 1977년에 연봉 인상을 기대했다. 오리올스는 처음에 200000USD를 제안했지만, Palmer영어는 275000USD를 원했다. 결국 그들은 260000USD의 연봉과 "상당한 기여"에 대한 보너스에 합의했다.[31] 1977년과 1978년에 각각 20승과 21승을 거두었다. 1977년에 20승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리올스는 그에게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을 거의 거부했다.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선수 협회가 Palmer영어의 분쟁에 대해 고충을 제기하고 중재를 위협하자(이는 Palmer영어가 자유 계약 선수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단장 행크 피터스가 물러나 그에게 보너스를 지급했다.[32] 1970년부터 1978년까지 1974년을 제외한 모든 시즌에 20승을 거두었다. 20승을 거둔 8시즌 동안, 그는 매년 에서 319이닝을 투구했고, 4번이나 이닝에서 리그 선두를 달렸고, 2번이나 평균자책점을 기록했다. 그 기간 동안 그는 매년 17개에서 25개의 완투를 기록했다.[33] 비다 블루와 버트 블라일레벤과 같은 자유 계약 선수들이 1979년에 그보다 더 많은 돈을 버는 것에 좌절감을 느낀 Palmer영어는 ''세인트 폴 파이오니어 프레스''(St. Paul Pioneer Press)의 기자에게 "나는 [오리올스]를 트레이드할 때까지 화나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34] 얼 위버 감독은 그의 라커에 "아버지의 날을 축하합니다. 이제 어른이 되세요."라는 메모를 붙였다.[35] "그는 과소평가 받고 있습니다... 그는 투구할 때는 백만 달러의 가치가 있지만 260000USD에 계약했습니다."[35] 결국 불만을 극복했고 팀은 아메리칸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36] 위버는 Palmer영어를 ALCS 1차전에서 에인절스를 상대로 선발 투수로 내정했지만, Palmer영어는 1979년 사이 영 상 수상자인 마이크 플래내건을 선발로 내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위버는 Palmer영어의 경험을 높이 평가했다. 라이언을 상대로 9이닝 동안 3실점하고 승패 없이 물러났고, 경기는 동점으로 끝났다. 오리올스는 10회 존 로웬스타인의 홈런으로 승리했고, 시리즈에서 3승 1패로 승리했다.[37]

1970년 올스타에 처음 선출되어 선발 투수를 맡았다. 20승 10패, 평균자책점 2.71, 리그 최고인 305.0이닝, 5번의 완봉승을 기록했다. 사이 영 상 투표에서는 5위에 올랐다. 1971년에는 개막부터 5연승을 거두는 등 20승 9패, 평균자책점 2.68을 기록했다.

1972년 올스타에서는 두 번째 선발 투수를 맡았다. 21승 10패, 평균자책점 2.07을 기록했다. 1973년에는 7월 27일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전에서 7회까지 무안타로 막고, 8회에 안타를 맞았지만 1안타 완봉승을 거두었다. 10연승을 포함한 22승 9패, 평균자책점 2.40의 성적으로 최우수 평균자책점 타이틀을 획득했다. 사이 영 상 투표에서는 383탈삼진의 메이저 리그 기록을 세운 놀란 라이언을 제치고 첫 수상했으며, MVP 투표에서도 잭슨에 이어 2위에 올랐다.

1974년에는 첫 개막전 선발 투수를 맡았지만, 도중 7연패를 당하는 등 부진했다. 6월부터 약 2개월간 이탈도 있었고 7승 12패로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으로 마쳤다. 1975년에는 부활하여, 모두 리그 최고인 23승(11패), 평균자책점 2.09, 10번의 완봉승을 기록하며, 캣피쉬 헌터와 함께 첫 최다승, 2년 만의 최우수 평균자책점을 획득했다. 2년 만의 사이 영 상을 수상했다. 1976년에는 22승 13패, 평균자책점 2.51, 리그 최다인 315.0이닝의 성적으로 2년 연속 최다승, 사이 영 상, 첫 골드 글러브를 획득했다. 1977년 올스타전에서 3번째 선발 투수를 맡았다. 20승 11패, 평균자책점 2.91, 리그 최다인 22번의 완투, 319.0이닝의 성적으로, 데니스 레너드 등 2명과 함께 3년 연속 최다승을 기록했다.

1978년 올스타에서는 2년 연속 4번째 선발 투수를 맡았다. 5월 20일부터 4번의 완봉승을 포함한 7연승, 후반에도 7연승을 기록하며 21승 12패, 평균자책점 2.46으로 4년 연속 20승을 달성했다. 1979년에는 부상으로 10승에 그쳤다.

2. 2. 3. 1980년대와 은퇴

1980년부터 1985년까지 파머는 팔의 피로와 잦은 부상에 시달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투수진에 안정적인 베테랑의 존재감을 불어넣었다.[38] 1981년, 파머는 더그 드신세스가 타이거스와의 경기에서 앨런 트래멜의 라인 드라이브 타구를 놓친 후 그와 불화를 겪었다.[38] 드신세스에 따르면, 파머는 그 플레이 이후 "나에게 욕설을 퍼붓고 손을 허공에 휘둘렀다"고 한다.[38] "저런 공은 잡아야 한다"고 파머는 신문에 말했다.[38] "더그는 공 앞에 나서는 것을 꺼려한다."[38] "짐 파머가 다른 사람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지 알고 싶다"고 드신세스는 응수했다.[38] "누구에게나 물어봐라. 모두 질렸을 것이다. 우리는 24명의 선수로 구성된 팀인데, 한 명의 프리마돈나가 있다. 그는 항상 다른 사람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38] 그 불화는 6월까지 이어졌고, 웨버는 "나는 걱정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3루수는 투수가 조금 더 잘해주기를 바라고, 투수는 3루수가 조금 더 잘해주기를 바란다. 우리 모두 더 잘하고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재판관이 그 둘을 모두 내게 맡겼다."[38] 파머는 결국 그 분쟁에 대해 브룩스 로빈슨을 탓했다.[39] "브룩스가 역대 최고의 3루수가 아니었다면, 나머지 오리올스 선수들은 브룩스의 반경 안에 있는 모든 공이 완벽하게 판단되고, 완벽하게 수비되고, 완벽하게 던져져서, 거의 모든 상대 타자를 (완벽하게) 아웃시키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39]

파머가 5번의 선발 등판에서 6.84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한 후, 단장 행크 피터스는 "파머는 다시는, 절대, 오리올스 유니폼을 입고 선발 등판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지쳤다."[40][41]라고 발표했다. 웨버는 파머를 불펜으로 옮겼지만, 팀에 또 다른 선발 투수가 필요했기에, 그는 6월에 파머를 다시 선발 로테이션에 투입했다.[42] 그 직후, 파머는 11연승을 거두었다.[42]

파머의 마지막 메이저 리그 승리는 주목할 만했다. 그는 1983년 월드 시리즈 3차전에서 마이크 플래너건을 구원 등판하여, 필리스의 스타 선수들로 구성된 타선을 상대로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오리올스의 승리에 기여했다.

파머가 1966년 첫 월드 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이후 1983년 우승까지 17년의 기간은 메이저 리그 역사상 한 투수가 월드 시리즈에서 첫 승과 마지막 승을 거두는 데 걸린 가장 긴 기간이다. 그는 또한 메이저 리그 야구 역사상 3개의 다른 시대에 월드 시리즈 경기에 승리한 유일한 투수가 되었다. 또한, 파머는 오리올스 역사상 6번의 (1966년, 1969년, 1970년, 1971년, 1979년, 1983년) 월드 시리즈 출전에 모두 출전한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파머는 1983년 챔피언십 팀에서 이전에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한 유일한 오리올스 선수였다. 그는 1984년 시즌 중 볼티모어에서 방출된 후 은퇴했다. 그는 268승 152패의 통산 승패 기록과 2.86의 평균자책점을 기록하며 은퇴했다. 파머는 1990년, 자격 첫 해에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파머의 등번호 "'''22'''".
볼티모어 오리올스의 영구 결번으로 1985년 지정.


은퇴 다음 해인 1985년 9월 1일에 파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파머의 등번호 『'''22'''』는 오리올스의 영구 결번으로 지정되었다.

1990년에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09년


1991년 45세의 나이로 복귀를 목표로, 친정팀 오리올스의 스프링 트레이닝에 초청 선수로 참가했다. 오픈전에도 등판했지만 쇠퇴는 역시 있었고, 복귀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현재는 ABC 등 방송국의 MLB 중계 해설을 주로 활동하고 있다.

연도소속팀경기선발완투완봉무4구승리패배세이브홀드승률타자투구 이닝피안타피홈런볼넷고의4구사구탈삼진폭투보크실점자책점평균자책점WHIP
1980BAL343340116100--.615959224.023826740310920108993.981.39
19812222501780--.467532127.1117144612353160533.751.28
198236328211551--.750920227.01952263141032185793.131.14
19831411000540--.55633076.286111900341142364.23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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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각 연도의 '''굵은 글씨'''는 리그 최고 기록
  • 다승왕: 3회 (1975년 - 1977년)
  • 최우수 방어율: 2회 (1973년, 1975년)

2. 3. 은퇴 이후

선수 생활 동안 짐 파머는 1978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980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1982년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오클랜드와 캔자스시티의 1981년 아메리칸 리그 디비전 시리즈, 1981년 월드 시리즈의 ABC 중계 방송에서 컬러 해설을 맡았다.

1985년부터 1989년까지 파머는 알 미카엘스, 팀 맥카버와 함께 ABC에서 중계팀을 구성했다. 파머는 1985년 월드 시리즈에서 해설을 맡았는데, 원래는 미카엘스, 그리고 전년도 ALCS에서 함께 일했던 하워드 코셀과 팀을 이룰 예정이었다. 맥카버는 코셀이 ABC 스포츠 팀을 비판하는 책('나는 게임을 해본 적이 없다')을 출간한 후 막판에 코셀을 대신하여 월드 시리즈에 투입되었다. 파머, 미카엘스, 맥카버 팀은 이후 1986년 올스타전 (그 해 파머는 ALCS에서 미카엘스와 함께 작업했고, 맥카버는 키스 잭슨과 함께 ABC의 내셔널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 중계를 맡았다), 1987년 월드 시리즈, 1988년 올스타전 및 그 해의 NLCS 중계를 맡았다.

파머는 로마 프리에타 지진이 발생한 1989년 10월 17일 샌프란시스코의 캔들스틱 파크에 있었다.[43] 1989 시즌 이후 ABC는 야구 중계 계약을 CBS에 잃었다. 파머는 그 해 정규 시즌 중계 약 10회 출연과 포스트 시즌 몇 차례 출연으로 ABC에서 35만달러를 벌었다.[44]

1990년,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파머가 메이저 리그 감독으로 일하는 것을 고려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대신 파머는 ESPN의 분석가로, WMAR-TV 및 홈 팀 스포츠를 통해 중계되는 오리올스 경기의 방송인으로 활동했다.[44]

1991년, 파머는 오리올스에서 컴백을 시도했다. 그는 1996년 자신의 저서에서 "나는 놀란 라이언이 야구에, 또는 조지 블란다가 미식축구에 어떤 존재였는지 내가 그렇게 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다"고 밝혔다.[45] 비용 절감을 시도하던 ESPN은 그에게 연봉 삭감과 3년 계약을 제안했다. 파머는 더 적은 연봉으로 1년 계약을 하겠다고 밝혔지만, ESPN은 거절했다. 파머는 스프링 트레이닝 기간 동안 "방송 환경이 내 마음에 더 들었다면 오늘날 여기에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정말 나의 주요 동기였고, 더 이상 그런 의무가 없다는 사실이었다"고 말했다.[46]

파머의 스프링 트레이닝 훈련을 취재한 ''스포츠 일러스트레이티드''의 리처드 호퍼는 파머의 컴백이 전적으로 돈 때문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어떤 자만심이 개입되어 있다고 의심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썼다.[47] 호퍼는 파머가 "비웃음이나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데 실패했다. 그는 엄청난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으며,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가 연습 마운드에 누구와 함께 서든, 그의 포수 외에는 다른 포수들의 글러브에서 더 큰 팝 소리가 들린다"고 말했다.[47] 파머는 나중에 "나는 더 이상 시속 95마일을 던질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고는 시속 80마일이었다."[45]

컴백 시도 중 마이애미 대학교에서 훈련하던 파머는 마이애미 코치인 라자로 콜라조에게 다가갔다. 콜라조는 그에게 "그런 투구 메커니즘으로는 명예의 전당에 절대 들어갈 수 없을 겁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파머는 "나는 이미 명예의 전당에 있다"고 대답했다.[47] 파머의 투구 동작을 개선하기 위해 콜라조와 파머는 파머가 공을 던질 때 무릎이나 발을 의자에 올려놓는 등의 독특한 훈련을 했다.[47]

스프링 트레이닝 경기에서 2이닝 동안 5개의 안타와 2실점을 기록한 후, 그는 영구적으로 은퇴했다. 파머는 경기 전 몸을 풀다 햄스트링이 파열되었다고 말하며 "계속하고 싶지 않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럴 수 없다"고 말했다. "어제 다리에서 삐끗하는 소리가 들렸다. 좋지 않은 소리였다. 그게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만, 내 테니스 게임에 큰 지장을 줄 것 같다."[48]

1994년부터 1995년까지 짐 파머는 ABC로 복귀하여 (이번에는 베이스볼 네트워크(The Baseball Network)라고 불리는 메이저 리그 베이스볼, ABC, NBC 간의 수익 분배 합작 투자를 통해) 다시 팀 맥카버, 알 마이클스와 함께 중계를 맡았다. 1995년에는 파머, 맥카버, 마이클스가 재결합하여 올스타전, NLDS 3차전인 신시내티와 로스앤젤레스의 경기, NLDS 4차전인 애틀랜타와 콜로라도의 경기, NLCS 1~2차전, 월드 시리즈 1, 4~5차전을 중계했다. 파머, 맥카버, 마이클스는 또한 전년도 월드 시리즈를 ABC에서 중계할 예정이었으나, 파업으로 인해 포스트 시즌 전체가 취소되면서 기회를 얻지 못했다. 현재 그는 MASN에서 오리올스 경기 텔레비전 중계의 컬러 해설자로 활동하고 있다.

2012년 7월, 파머는 자신의 사이 영 상 트로피 3개와 골드 글러브 상 4개 중 2개를 경매에 부쳤다. 그는 "현재 내 인생에서 손주들의 교육에 더 신경 쓰고 싶다"고 말했다. 파머는 또한 자폐증을 앓는 십 대 의붓아들이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하며 "나의 우선순위가 바뀌었다"고 언급했다. 파머는 과거에 낭포성 섬유증 기금 마련 행사를 위해 사이 영 상 트로피 중 하나를 경매에 부쳤는데, 그는 "낙찰자가 그것을 위해 3.9만달러를 지불했지만 가져가지 않았다. 그건 그 행사를 위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3. 주요 기록 및 수상


  • MLB 올스타전 6회 선정 (1970년 - 1972년, 1975년, 1977년, 1978년)
  • 다승왕 3회 (1975년 - 1977년)
  • 최우수 평균자책점 2회 (1973년, 1975년)
  • 사이 영 상 3회
  • 골드 글러브 4회
  • 노히트 노런 1회 (1969년 8월 13일, 대 오클랜드 애슬레틱스전)

연도구단투수(P)
경기자살보살실책병살수비율


4. 기타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에 파머는 조키(Jockey) 브랜드 남성용 브리프(속옷)의 대변인 및 속옷 모델이었다.[52] 그는 이 회사의 전국 인쇄 광고와 텔레비전 광고에 출연했으며, 뉴욕시의 타임스 스퀘어와 기타 주요 도시의 빌보드 광고에도 등장했다.[52] 그는 자신의 속옷 포스터 판매 수익금을 모두 낭포성 섬유증 재단에 기부했다.[52]

1992년부터 1999년까지 그는 전국의 텔레비전에서 전국적인 주택 담보 대출 및 담보 대출 회사인 더 머니 스토어의 광고에 자주 출연했다.[52] 그는 주기적으로 비타민 및 기타 건강 관련 제품 광고에 출연했다.[52] 파머는 또한 메릴랜드주 에지우드에 있는 Nutramax Laboratories에서 제조한 관절 건강 보조제인 Cosamin DS를 대표한다.[52]

그는 또한 중부 대서양 지역에 위치한 지역 체인 자동차 대리점인 Nationwide Motors Corp.의 대변인이었다.[52] 그는 현재 전국적인 "고 콜레스테롤 퇴치" 캠페인의 대변인이다.[52] 또한, 파머는 재정적 및 의료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 메이저 리그, 마이너 리그, 니그로 리그 선수들을 돕기 위해 설립된 501(c)(3) 비영리 단체인 야구 지원 팀의 자문 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52]

1963년 고등학교 졸업 직후, 파머는 1964년 수전 라이언과 결혼했다.[53] 그는 라이언과의 사이에서 제이미와 켈리라는 두 딸을 두었다.[53] 파머는 라이언이 야구 팬이 아니었다고 회상했다. "그녀는 뜨개질 도구와 야구를 훨씬 더 싫어하는 친구를 경기에 데려오곤 했어요."[53]

2007년, 파머는 자폐증을 앓는 성인 아들을 둔 수전 얼과 재혼했다.[54] 파머 부부는 플로리다주 팜 비치와 캘리포니아주 코로나 델 마르에 집을 가지고 있다.[54] 2006년, 파머는 메릴랜드주 리틀 이탈리아, 볼티모어에 펜트하우스 콘도미니엄을 구입했으며, 오리올스 중계를 위해 볼티모어에 있을 때 사용한다.[54]


  • 애칭 "'''케이크(Cakes)'''"는 등판일 아침 식사로 반드시 팬케이크를 먹는 것에서 유래했다.

  • 현역 시절 감독 얼 위버와의 불화는 유명하며, 위버는 "파머 때문에 이렇게 백발이 되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 선수 생활 말년에 팀 동료가 된 칼 립켄 주니어와는 오랜 친교가 있다. 신인 시절 립켄의 아버지 칼 시니어가 감독을 맡았던 A급 마이너 팀에서 뛰었는데, 그때 어린 시절의 립켄을 본 적이 있다. 이 인연으로 고등학생 시절의 립켄을 상대로 스프링 트레이닝에서 파머가 던지고, 립켄이 타격을 한 적도 있다.

  • 잘생긴 외모로 속옷 제조사 광고에 출연한 적이 있었다[59]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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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뉴스 Mike Cuellar, Star Pitcher for Orioles, Dies at 72 https://www.nytimes.[...] The New York Times 2010-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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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뉴스 '재계약' 커쇼, LAD 13번째 영구결번 사실상 확정... '162G 시즌' 우승반지 이제 딱 하나 남았다 https://m.sports.nav[...] 스타뉴스 2024-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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