짐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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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짐리-림은 기원전 18세기 마리의 왕으로, 야흐둔-림의 아들이거나 손자였다. 그는 샴시-아다드 1세 치세에 얌하드로 망명했다가, 샴시-아다드 1세 사후 바빌론의 함무라비의 지원을 받아 마리 왕위를 되찾았다. 짐리-림은 약 15년간 통치하며 유프라테스강과 하부르강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했고, 궁전을 확장하는 등 도시를 번영시켰다. 그는 함무라비와 동맹을 맺었으나, 이후 관계가 악화되어 기원전 1762년 함무라비에게 정복당하고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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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마-아닷은 샴시-아다드 1세의 아들로, 정치적 결혼을 통해 동맹을 시도했으나 아버지의 통제와 형제 간의 갈등, 행정 업무 소홀 등으로 비판받았으며 군사적 잔혹성을 보이기도 했다. - 기원전 18세기 통치자 - 함무라비
함무라비는 기원전 1792년 메소포타미아를 통일한 아모리인 출신 바빌론 왕으로, 함무라비 법전을 제정하여 법치주의를 강조하고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으나 사후 제국은 쇠퇴했다. - 기원전 18세기 통치자 - 공갑
폭군으로 알려진 공갑은 미신 숭배와 기괴한 행동으로 제후들의 이반을 초래했으며, 용을 기르려다 실패한 일화와 함께 그의 시대부터 하나라의 세력이 쇠퇴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짐리-림 | |
---|---|
개요 | |
군주호 | 마리 왕 |
재위 기간 | 기원전 1775년경 - 기원전 1761년 |
인물 정보 | |
아버지 | 야흐둔 림 |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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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 왕국 | |
위치 | 유프라테스 테르카 투투울 |
주요 시설 | 왕궁 |
역대 왕 | |
초기 왕조 | 야기드 림 야흐둔 림 야스마흐 아닷 짐리 림 |
왕비 | 시브투 |
고고학적 발견 |
2. 생애
짐리-림은 마리의 왕 야흐둔-림의 아들이거나[2] 손자[3]였다. 야흐둔-림은 마리를 강대국으로 만들었지만, 아시리아의 왕 샴시-아다드 1세와의 전쟁에서 점차 밀렸고, 결국 부하에게 배신당해 암살당했다. 이로 인해 마리는 아시리아 군대에 점령되었고, 짐리-림은 마리를 탈출하여 서쪽의 대국 얌하드(알레포)의 왕 야림-림 1세에게 망명했다. 짐리-림은 그곳에서 야림-림 1세의 딸과 결혼하여 얌하드의 후원을 받으며 왕위를 되찾을 기회를 노렸다.[1]
아시리아의 샴시-아다드 1세가 사망(기원전 1776/1775년경)하자, 짐리-림은 얌하드의 야림-림 1세의 도움을 받아 야스마-아다드를 몰아내고 마리의 왕위를 되찾았다.[4][5][6] 그는 약 15년 동안 마리를 통치하면서 유프라테스강과 하부르강 계곡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해 활발한 정복 활동을 펼쳤다. 그는 당시 가장 컸을 것으로 추정되는 왕궁을 확장했는데, 지상층에 260개가 넘는 방이 있었고, 다른 왕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 궁전은 바빌론의 함무라비에 의해 파괴되었다.[8]
짐리-림은 얌하드(알레포와 주변 지역)의 공주 십투와 결혼했으며, 여러 부인을 통해 적어도 8명의 딸을 두었다. 그의 딸들 중 여럿은 지역 도시의 통치자들과 결혼했고, 다른 두 명은 여사제가 되었다. 왕과 딸들 사이의 편지는 짐리-림이 여성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음을 보여준다. 그는 안다리그 왕국과 불안정한 관계를 맺어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했다. 또한, 병아리 샐러드, 튀긴 메뚜기, 그리고 많은 양의 사막 송로버섯과 같은 진미가 제공되는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
기원전 1781년, 샴시-아다드 1세가 죽고 아시리아가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짐리-림은 바빌론 제1왕조의 왕 함무라비의 지원을 받아 마리를 공격하여 야스마흐-아다드로부터 마리의 왕위를 되찾았다. 그는 마리의 행정 기구를 정비하고, 아무르계 유목민 부족을 여러 개 참여시키는 동시에 적대적인 부족을 쳐서 마리를 다시 강대국으로 만들었다.
짐리-림은 한동안(아마 기원전 1764년경) 엘람, 에슈눈나, 라르사와의 전쟁에서 함무라비와 동맹을 맺었다.[10] 짐리-림은 함무라비의 원정에 병력을 지원했으며, 두 사람은 활발한 외교적 접촉을 유지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엘람이 패배한 후, 메소포타미아 왕들 사이의 위태로운 세력 균형을 유지할 외부 세력은 사라졌다. 바빌론의 라르사 정복 이후 짐리-림과 함무라비 간의 동맹은 악화되었다.[1] 기원전 1762년, 함무라비는 이전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마리를 정복하고 약탈했다(비록 도시가 싸움 없이 항복했을 수도 있지만). 이 시점에서 짐리-림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2. 1. 가계와 망명
짐리-림(아카드어: 𒍣𒅎𒊑𒇷𒅎|Zi-im-ri Li-imak)은[1] 마리의 왕 야흐둔-림의 아들[2] 또는 손자[3]였다.야흐둔-림이 자신의 측근에게 암살당하면서 궁정 쿠데타가 발생하자 짐리-림은 인근의 얌하드 왕국(할레프, 알레포)으로 도망쳐야 했다. 마리는 에칼라툼의 왕 샴시-아다드 1세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는 자신의 아들 야스마-아다드를 왕위에 앉혔다.
짐리-림은 야므하드의 수무-에푸 치하에서 망명 생활을 하였고, 마리의 왕좌에 대한 정당한 상속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되어 알라라크의 봉신 통치자가 되었다.
아버지 야흐둔-림은 마리를 유력한 국가 중 하나로 만들었지만, 아시리아의 왕 샴시-아다드 1세와의 싸움에서 점차 열세에 몰렸다. 그리고 야흐둔-림은 부하의 배신으로 암살당했고, 마리는 아시리아 군에 의해 정복되었다. 짐리-림은 마리를 탈출하여 서쪽의 대국 얌하드(알레포)의 왕 야림-림 1세에게 망명했다. 거기서 야림-림 1세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얌하드의 후원을 받아 기회를 엿보았다.
2. 2. 마리 왕위 복귀와 통치
아시리아의 샴시-아다드 1세가 사망(기원전 1776/1775년경)하자, 짐리-림은 얌하드의 대왕 야림-림 1세의 도움을 받아 야스마-아다드를 몰아내고 마리의 왕위를 되찾았다.[4][5][6]짐리-림은 약 15년 동안 마리를 통치하며 유프라테스강과 하부르강 계곡을 따라 인근 지역에서 권력을 확립하기 위해 광범위하게 원정을 벌였다. 그는 당시 가장 컸을 수도 있는 도시의 왕궁을 확장했는데, 지상층에 260개 이상의 방이 있었고, 다른 왕들의 부러움을 샀다. 이 궁전은 바빌론의 함무라비에 의해 파괴되었다.[8]
짐리-림의 사생활은 마리의 국가 기록 보관소에 보존된 점토판을 통해 부분적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얌하드(알레포와 주변 지역)의 공주 십투와 결혼했으며, 여러 부인을 통해 적어도 8명의 딸을 두었다. 그의 딸들 중 여러 명은 지역 도시의 통치자들과 결혼했고, 다른 두 명은 여사제가 되었다. 왕과 그의 딸들 사이의 서신은 짐리-림이 여성들을 높이 평가하고 그들이 결정을 내리는 데 유능하다고 여겼다는 증거를 제공한다.
그는 안다리그 왕국과 불안정한 관계를 맺었고, 그와 싸우기도 하고 때로는 동맹을 맺기도 했다.
그는 병아리 샐러드, 튀긴 메뚜기, 그리고 많은 양의 사막 송로버섯과 같은 진미가 제공되는 호화로운 연회를 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
기원전 1781년, 샴시-아다드 1세가 죽고 아시리아가 에슈눈나와의 싸움으로 혼란에 빠진 틈을 타, 짐리-림은 바빌론 제1왕조의 왕 함무라비의 지원을 받아 마리를 공격하여 샴시-아다드 1세의 아들 야스마흐-아다드로부터 마리의 왕위를 되찾았다. 그는 마리의 행정 기구를 정비하고, 아무르계 유목민 부족을 여러 개 참여시키는 동시에 적대적인 부족(비누 야미나족 등)을 쳐서 마리를 다시 유력한 국가 중 하나로 끌어올렸다.
2. 3. 함무라비와의 관계와 마리의 멸망
짐리-림은 더 넓은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한동안(아마 기원전 1764년경) 엘람, 에슈눈나, 라르사에 대한 전쟁에서 함무라비와 동맹을 맺었다.[10] 짐리-림은 함무라비의 원정에 병력을 지원했으며, 두 사람이 광범위한 외교적 접촉을 유지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엘람이 패배한 이후, 메소포타미아 왕들 사이의 위태로운 세력 균형을 유지할 외부 세력은 더 이상 없었다. 짐리-림과 바빌론의 라르사 정복 이후 함무라비 간의 동맹은 악화되었다.[1] 기원전 1762년, 함무라비는 이전의 동맹에도 불구하고 마리를 정복하고 약탈했다(비록 도시가 싸움 없이 항복했을 수도 있지만). 이 시점에서 짐리-림은 역사에서 사라졌고, 살해된 것으로 추정된다. 테르카는 하나 왕국의 새로운 중심지가 된다.
기원전 1766년경, 바빌론의 왕 함무라비는 동쪽의 에슈눈나, 남쪽의 라르사를 강적으로 삼고, 여러 이민족의 공격을 받아 마리에 여러 차례 군사 원조를 요청했다. 짐리-림은 이에 응하여 야르하드 왕 야림림 1세로부터 군사를 얻어 30,000명의 원군을 바빌론으로 보냈다. 이 시기의 바빌론의 적은 에슈눈나, 그리고 그 동맹국 엘람 등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때 보내진 병력의 반환을 짐리-림이 요구했을 때 함무라비는 "적의 상황을 알 때까지 빌려두고 싶다"며 바빌론에 장기간 머물게 했다. 또한 마리에도 바빌론에서 원군이 보내졌지만 부대 파견이 늦어지는 경우가 많아, 그에 대해 마리 측이 항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함무라비는 라르사를 멸망시켰다(기원전 1763년). 이후 바빌론은 에슈눈나나 아시리아, 구티인의 연합군과 싸웠다. 에슈눈나는 그 전까지 마리에 여러 번 공격을 가했고, 짐리-림은 함무라비를 지원했다는 서한이 발견되었다. 이 안에서 짐리-림은 함무라비에게 에슈눈나를 지배해야 한다고 권하고 있다.
하지만 점차 함무라비가 마리와의 동맹을 중시하지 않게 된 듯한 기록이 나타난다. 바빌론에 파견된 짐리-림의 사절이 야르하드의 사절보다 낮은 대우를 받고, 축연에 동석하는 것을 허락받지 못했다며 항의하고, 다시 축연에 참석하는 등의 사건도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외교 관계는 마리에서 발견된 다수의 점토판 문서로 밝혀졌지만, 바빌론 측의 기록이 부족하여 함무라비가 실제로 어떻게 느끼고 생각했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빌론의 강대화와 에슈눈나의 약화에 따라 바빌론에게 마리의 중요성이 감소한 것은 확실한 것으로 보인다. 기원전 1761년, 함무라비는 짐리-림과의 오랜 동맹 관계를 파기하고 마리를 공격하여 정복했다. 짐리-림의 그 후의 행방은 알려져 있지 않다.
마리는 이후 함무라비에게 반란을 일으켰지만 진압되어 파괴되었다. 이로 인해 수메르 시대 이래 여러 차례 유력국으로 번영했던 마리의 역사도 종말을 맞이했다. 마리 시에는 그 후에도 사람들이 살았지만, 중요한 거점으로 사료에 나타나는 일은 없어졌다.
3. 외교 정책과 국제 정세
그는 더 넓은 무대에서 활동했으며 한동안 (아마 기원전 1764년경) 엘람, 에슈눈나, 라르사에 대한 전쟁에서 함무라비와 동맹을 맺었다.[10] 짐리-림은 함무라비의 원정에 병력을 지원했으며, 비록 두 사람이 광범위한 외교적 접촉을 유지했지만, 실제로 만난 적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말리 유적에서는 그가 주변 동맹국이나 동맹국에 파견한 대사 등과 주고받은 편지가 대량으로 발견되어, 그의 치세에서의 말리(그리고 간접적으로 바빌론이나 얌하드 등의) 외교 정책을 상세히 알 수 있다. 특히, 왕위를 되찾을 때 지원을 받은 얌하드와 바빌론은 동맹국으로서 다양한 교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편지 중에는 짐리림의 신하가 말리에 주변의 유력 인물이 모였을 때 행한 연설이 기록되어 있다.
…… 혼자서 충분히 강력한 왕은 없다. 10명 또는 15명의 왕이 바빌론의 함무라비에게 따르고, 그와 비슷한 수의 왕이 라르사의 림신 1세, 에슈눈나의 이바르피엘 2세, 카트나의 암투피엘을 따르고 있다. 그리고 얌하드의 야림림에게는 20명의 왕이 따르고 있다……
이 연설은 주로 자국 주변의 유목민과 도시의 왕들을 향해 말리 또한 유력국 중 하나임을 어필하기 위해 행해졌다고 하며, 당시의 세력 균형의 정세를 설명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또한 여기서 아시리아가 샴시 아다드 1세의 사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국 중 하나로서는 계산되지 않게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참조
[1]
논문
Un nouveau nom d'annee du regne de Zimri-Lim?
1958
[2]
논문
The king and I. A Mari king in changing perceptions
[3]
서적
Mari in Retrospect: Fifty Years of Mari and Mari Studies
Eisenbrauns
[4]
논문
Biblical Archaeologist Update: Zimri-Lim Takes the Grand Tour
1984-12
[5]
논문
Thoughts of Zimri-Lim
1984-06
[6]
논문
Zimri-Lim's March to Victory
1972
[7]
간행물
On the Author of the Epic of Zimrī-Līm and Its Literary Context
2015
[8]
간행물
The Palace of Zimri-Lim at Mari
1984
[9]
논문
Truffles roasting in the evening fires: Pages from the history of desert truffles
http://fungimag.com/[...]
2008
[10]
서적
King Hammurabi of Babylon
https://archive.org/[...]
Blackwell Publish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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