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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다나가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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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찬다나가르는 인도 웨스트 벵골 주에 위치한 도시로, 다양한 어원 설이 존재하며, 과거 프랑스 식민지였던 역사를 가지고 있다. 1696년 프랑스 동인도 회사에 의해 도시 이름이 처음 언급되었으며, 1730년 조제프 프랑수아 뒤플렉스가 총독으로 임명된 이후 번성하여 벵골 지역의 중요한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다. 1757년 영국에게 점령당한 후 프랑스, 영국 간의 지배가 반복되다 1816년 프랑스에 반환되었고, 1950년 인도 정부에 의해 통제된 후 1954년 웨스트 벵골 주에 통합되었다. 현재는 인도-프랑스 양식의 건축물과 강변 산책로, 박물관, 교회 등 관광 명소가 있으며, 자가다트리 푸자 축제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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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명칭

찬다나가르(Chandannagar)라는 이름은 '도시'를 의미하는 '나가르(nagar)'와 다른 요소가 결합된 것이다. 벵골어 '찬드(chand)'는 '달'을 의미하며, 후글리 강둑의 굽은 모양을 빗댄 것일 수 있다. 또는 '찬단(chandan)'은 '백단향'을 의미하는데, 이 도시가 한때 백단향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현지 전승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찬디(Chandi)'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전에는 벵골어 '파라스(Faras)'('프랑스')와 '당가(danga)'('땅')를 합쳐 '파라스당가(Farasdanga)'로 알려졌다. "샹델나고르"는 프랑스어 표기 및 읽기에 따른 것이며, 현지어로는 "초돈노고르"(벵골어) 또는 "찬단나가르"(힌디어)이다. 호를 그리듯이 굽은 강가의 모습 때문에 "의 도시"라는 설과, 백단 거래가 활발했던 것에서 "백단의 도시"라는 설 등이 있다.

2. 1. 어원

찬다나가르(Chandannagar)라는 이름은 '도시'를 의미하는 '나가르(nagar)'와 다른 요소가 결합된 것이다. 벵골어 '찬드(chand)'는 '달'을 의미하며, 후글리 강둑의 굽은 모양을 빗댄 것일 수 있다. 또는 '찬단(chandan)'은 '백단향'을 의미하는데, 이 도시가 한때 백단향 무역의 중심지였다는 현지 전승과 관련이 있을 수 있다. '찬디(Chandi)'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전에는 벵골어 '파라스(Faras)'('프랑스')와 '당가(danga)'('땅')를 합쳐 '파라스당가(Farasdanga)'로 알려졌다. "샹델나고르"는 프랑스어 표기 및 읽기에 따른 것이며, 현지어로는 "초돈노고르"(벵골어) 또는 "찬단나가르"(힌디어)이다. 호를 그리듯이 굽은 강가의 모습 때문에 "의 도시"라는 설과, 백단 거래가 활발했던 것에서 "백단의 도시"라는 설 등이 있다.

3. 역사

찬다나가르는 식민지 시대에 생겨났으며, 찬디망갈과 마나사망갈 카브야와 같은 중세 벵골어 텍스트에 이 도시가 언급되지 않는다는 사실로 증명되었다. 역사가들은 프랑스가 이 지역의 다양한 작은 지역을 합병하여 도시를 건설했다고 생각한다. 합병된 세 개의 주요 마을은 남쪽의 곤돌파라, 북쪽의 보로, 서쪽의 칼리사니였다. "찬데르나가르"라는 이름은 1696년 프랑스 동인도 회사 임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처음 발견되었는데, 찬데르나가르에 파견된 프랑스 관리인 앙드레 프랑수아 데스랑드와 팔레가 보냈다.[3]

프랑스 동인도 회사의 초대 이사인 부로-데스랑드는 1688년 이 지역을 장악하고 공장을 건설하기 위해 무굴 수바다르에게 40,000 코인을 지불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 토지를 소유한 최초의 프랑스인은 1673~74년에 보로 키상간지에 있는 13 아르팡의 토지를 401 타카에 매입한 뒤 플레시스였다.[3]

프랑스 식민지로서의 찬다나가르의 번영은 곧 시작되었다. 당시 회사 설립에는 1명의 이사, 1개의 의회를 구성하는 5명의 구성원, 15명의 상인과 가게 주인, 2명의 공증인, 2명의 신부, 2명의 의사, 1명의 수트라다르가 있었다. 육군은 130명의 보병으로 구성되었으며, 그 중 20명은 토착 인도인이었다. 포르 드 오를레앙은 1696~97년에 건설되었으며 프랑스 및 영국군보다 더 잘 방어되었다. 초기 성공 이후 프랑스 무역은 이사들의 느슨한 정책으로 인해 쇠퇴했다.[3]

1730년 조제프 프랑수아 뒤플렉스가 도시의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2,000채 이상의 벽돌집이 도시에 세워졌고 상당한 해상 무역이 이루어졌다. 당시 도시의 인구는 약 라크 (100,000)에 달했으며 콜카타라는 신생 도시는 찬다나가르의 가난한 사촌으로 여겨졌다. 뒤플렉스 시대부터 1756년까지 찬다나가르는 벵골에서 유럽 상업의 주요 중심지였다. 이 도시는 아편, 인디고, 실크, , 로프, 설탕 등을 포함하는 번성하는 무역 중심지를 가지고 있었다. 찬다나가르의 고급 의류는 유럽으로 수출되었다.[3]

찬다나가르와 콜카타 1900.


1757년 영국 해군의 찬다나가르 점령.


찬다나가르 해안가, c. 1850


당시 이 도시를 번창하게 만든 주요 인물 중 한 명은 인드라나야란 차우드리였다. 그는 17세기 말 제소르에서 고아로 와서 외할아버지의 집에서 보호받았다. 그는 자신의 부지런함으로 회사에서 일자리를 얻은 후 회사의 급성장하는 무역과 관련하여 엄청난 재산을 얻었다. 동인도 회사가 1756년 포위 공격 이후 그의 집을 압수했을 때, 그의 집에서만 650만 루피 상당의 현금과 보석이 확보되었다. 그가 세운 크리슈나 사원인 난다둘랄 사원은 그가 엄청난 재산을 숨겨두었다고 알려진 비밀 금고를 여전히 보관하고 있으며, 이 재산은 나중에 영국 장군 로버트 클라이브에 의해 회수되었다. 크리슈나나가르, 나디아의 마하라자 크리슈나 찬드라는 종종 그에게 돈을 빌리러 오곤 했다.[3]

1756년 프랑스와 영국 사이에 전쟁이 발발했고, 영국 동인도 회사의 로버트 클라이브 대령과 영국 해군의 찰스 왓슨 제독은 1757년 3월 23일 찬다나가르를 폭격하여 점령했다. 그 후 도시의 요새와 많은 집들이 파괴되었고, 찬다나가르의 상업 중심지로서의 중요성은 강 아래에 위치한 콜카타의 중요성에 가려졌다. 찬데르나가르는 1763년 프랑스에 반환되었지만, 나폴레옹 전쟁 중인 1794년 영국에 의해 다시 점령되었다. 이 도시는 1816년 프랑스에 반환되었으며, 주변 영토의 앙클라브도 함께 반환되었다. 이 도시는 퐁디셰리의 총독의 정치적 통제를 받아 1950년까지 프랑스령 인도의 일부로 통치되었다. 1900년까지 이 도시의 이전 상업적 중요성은 사라졌고, 인구 25,000명(1901년)의 콜카타의 조용한 교외에 불과했다. 그러나 깨끗하고 넓은 간선 도로와 강둑을 따라 많은 우아한 주거지로 유명했다.[3]

인도의 다른 3개의 프랑스 행정 식민지와 마찬가지로 찬데르나가르는 프랑스 통제 퐁디셰리의 관할 하에 있었다. 전체 프랑스령 인도에는 단 한 명의 총독만 있었다. 그는 퐁디셰리의 주요 도시에 거주했으며, 때때로 다른 식민지를 방문했다. 각 식민지에는 총독 산하에 한 명의 행정관이 있었다. 이곳에는 법원과 치안 판사가 있었지만, 세션 재판을 위해 퐁디셰리에서 별도의 판사가 오곤 했다. 항소를 제기하기 위한 고등 법원이 퐁디셰리에 있었다. 수집소, 교육부, 주택부 등은 모두 퐁디셰리의 해당 부서에 속했다. 프랑스에서 온 한 명의 검사가 매년 모든 업무를 검사하기 위해 이곳을 방문하곤 했다. 콜카타에 거주하는 프랑스 영사는 찬데르나가르의 행정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다.[3]

이전에는 정부가 도시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한 부대의 세포이를 유지했다. 찬데르나가르는 1743~45년 동안 2개 보병 사단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조약 조건에 따라 15명 이상의 병사를 유지할 수 없었다.[3]

이 지역의 법률은 구체적이지 않았으며, 모든 프랑스 식민지와 관련하여 법률이 동일했으며, 특별 법령은 프랑스 내무부 장관에 의해 작성되었다. 프랑스 의회에서 데퓌테와 상원 의원들 중에서 프랑스령 인도의 시민과 대표가 각 의회에서 한 명의 대표를 선출했다.[3]

인도인이 프랑스 의회에서 자리를 얻은 적은 없었지만, 찬데르나가르의 시민들은 그 자리에 선출될 권리가 있었다.[3]

1880년 8월 1일 시가 이곳에 설립되었다. 샤를 드메인이 초대 시장이 되었다.[3]

영국령 인도의 등기소와 같은 ''노타이어''라는 선서 임명 직책이 있었다. 유언장, 매매, 양도, 부채 및 채무 또는 혼전 계약과 같은 모든 증서는 그에 의해 등록되었다.[3]

사법 시스템은 도시에서 몇 건의 사형 선고를 내리기도 했다. 처음으로 이 형이 집행된 것은 1883년 1월 26일이었고, 스크. 압둘 판자리와 히루 바그디라는 두 사람이 사형을 선고받았다. ''단두대''는 사형을 집행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1895년 7월 22일에 도시에서 마지막으로 사용되었다.[2][4][5]

찬다나가르의 자가다트리 푸자(Jagaddhatri Puja)의 역사는 알려져 있지 않다. 크리슈나나가르에서 자가다트리 푸자가 시작된 것은 1762년이었다. 인드라나라얀 초우드후리(Indranarayan Choudhury)는 1756년에 사망했다. 인드라나라얀 초우드후리는 결코 찬다나가르에 자가다트리 푸자를 도입하지 않았다. 인드라나라얀 초우드후리는 찬다나가르의 자신의 집에서 자가다트리 푸자를 거행했는데, 당시 크리슈나찬드라(Krishnachandra)는 인드라나라얀 초우드후리에게 돈을 빌리러 오곤 했다. 크리슈나찬드라의 아버지는 영국 감옥에 갇혀 두르가 푸자(Durga Puja)를 한 번 놓치게 되자 크리슈나나가르에서 자가다트리 푸자를 시작했다.[17] 한 번은 크리슈나찬드라의 배가 약한 바람 때문에 자가다트리 푸자 시간에 맞춰 크리슈나나가르에 도착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나바미(navami) 날 니추파티(Nichupatty)의 가트(Ghat)에서 푸자를 거행했다. 여신이 찬다나가르에서도 푸자로 자리 잡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고, 그는 매년 영구적으로 푸자를 올릴 수 있도록 기금을 남겼다.

1780년 제임스 오거스트 히키(James August Hickey)의 ''벵골 가제트(Bengal Gazette)''는 이 나라 최초의 신문이었다. 이 신문은 자가다트리 푸자에 대해 침묵했다. 그러나 '인도의 친구들(Friends of India)'은 1820년에 공동체 자가다트리 푸자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찬데르나가르의 공동체 자가다트리 푸자 날짜는 1790년이었다. 당시 로버트 클라이브(Robert Clive)는 찬데르나가르의 락슈미간지(Lakhsmiganj)를 '벵골의 곡창'이라고 불렀다. 락슈미간지의 초울파티(Chaulpatty, 쌀 시장)에서 열리는 자가다트리 푸자는 고대 공동체 자가다트리 푸자의 역사적인 예시일 것이다. 찬데르나가르의 자가다트리 푸자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한다.[3]

3. 1. 프랑스 식민지 시대

3. 2. 인도와의 통합

인도는 194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6] 1948년 6월, 프랑스 정부는 찬다나가르 주민의 97%가 인도의 일부가 되기를 희망한다는 국민투표를 실시했다.[6]
1948년 6월 국민투표일
1950년 5월, 프랑스는 인도 정부가 찬다나가르에 대한 ''사실상'' 통제권을 갖도록 허용했으며, 1951년 2월 2일 공식적으로 이 도시를 인도에 양도했다.[6] ''법률상'' 양도는 1952년 6월 9일에 이루어졌다.[6] 주민들은 퐁디셰리에 거주하는 사람들처럼 프랑스 국적을 유지할 수 있는 선택권을 받았다.[6] 1954년 10월 2일, 찬다나가르는 웨스트 벵골 주에 통합되었다.[7]
찬다나가르 시립 법인 지도

4. 지리

스트랜드 로드에서 바라본 후글리강의 모습


찬다나가르는 북위 22.87도, 동경 88.38도에 위치해 있으며 평균 해발고도는 10m이다.

찬다나가르는 주로 칼리사니(서쪽), 곤달파라(남쪽), 보로(북쪽)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곤달파라, 누탄 텔리갓, 바라삿, 테마타, 하트콜라, 다이복파라, 파드리파라, 랄바간, 바라바자르, 바그바자르, 파토고라, 칼리사니, 나바그람, 팔파라, 우르디바자르, 룩스미군즈, 보로 판차난탈라, 보로 챔파탈라, 탈당가, 하리드라당가 등이 있으며, 바즈라, 반다그람 등은 도시 경계 근처의 마을과 같은 지역이다.

도시는 북쪽으로 친수라, 남쪽으로 바드레스와르, 동쪽으로 후글리 강, 서쪽으로 다니아칼리와 접해 있다.

4. 1. 위치

찬다나가르는 에 위치해 있으며 평균 해발고도는 10m이다.

찬다나가르는 주로 칼리사니(서쪽), 곤달파라(남쪽), 보로(북쪽)의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곤달파라, 누탄 텔리갓, 바라삿, 테마타, 하트콜라, 다이복파라, 파드리파라, 랄바간, 바라바자르, 바그바자르, 파토고라, 칼리사니, 나바그람, 팔파라, 우르디바자르, 룩스미군즈, 보로 판차난탈라, 보로 챔파탈라, 탈당가, 하리드라당가 등이 있으며, 바즈라, 반다그람 등은 도시 경계 근처의 마을과 같은 지역이다.

도시는 북쪽으로 친수라, 남쪽으로 바드레스와르, 동쪽으로 후글리 강, 서쪽으로 다니아칼리와 접해 있다.

5. 관광 명소

찬다나가르의 건물들은 퐁디셰리(현재 푸두체리) 및 인도의 다른 옛 프랑스 거류지와 유사한 인도-프랑스 양식의 건축 양식을 띄고 있다.[10] 이러한 건물들은 대부분 낡아서 복원이 필요하다.[11]

찬다나가르 스트랜드


찬다나가르 스트랜드의 야경


강변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는 길이가 약 700m, 폭이 7m이며, 시계탑이 있는 포트 도를레앙 등 역사적으로 중요한 건물들이 많이 있다. 이곳은 현지인과 관광객 모두에게 인기 있는 장소이며, 비베카난다 만디르(명상 센터)가 있다.

1961년에 설립된 찬다나가르 박물관은 영불 전쟁에 사용된 대포, 18세기 목가구 등 프랑스 골동품 컬렉션을 자랑한다.[12] 이 연구소는 정규 강좌를 통해 프랑스어를 가르치고 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프랑스에서 싸우다 사망한 찬다나가르 거주민 조겐드라 나트 센의 유품도 보관하고 있다.[12] 박물관은 목요일과 토요일에 휴관한다.

찬다나가르 성심 교회는 프랑스 건축가 자크 뒤샤츠가 설계하고 1884년 1월 27일 폴 괴탈스에 의해 봉헌되었다.[13] 2세기가 넘는 역사를 지닌 이 교회는 프랑스 시대의 건축미를 보여주며, ''생 루이 교회'' 유적 또한 관광 명소이다.

프랑스 묘지에는 150개의 묘가 있으며, 그랜드 트렁크 로드 맞은편 랄 디기(큰 호수)에 위치한다. 프랑스 찬단나가르의 창시자인 뒤플레시스의 묘와 아미타브 고쉬의 소설 굶주린 조수에 언급된 헨리 "스톰" 피딩턴의 묘가 있다.[14]

파탈 바리 또는 지하 저택


1937년에 바스티유 감옥 함락을 기념하기 위해 건설된 문에는 프랑스 혁명의 구호인 "자유, 평등, 박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가 새겨져 있다.[15]

파탈 바리(지하 저택)는 건축학적으로 뛰어난 건물로, 우기에는 건물 하층부가 물에 잠긴다. 라빈드라나트 타고르는 이 건물을 자주 방문하고 칭찬했으며, 자신의 소설에도 언급했다. 사회 개혁가 이슈와르 찬드라 비디아서가르도 이 건물에 머물렀다.

1740년에 인드라나라얀 로이초우두리가 지은 난다둘랄 사원은 고대 인도 조각의 훌륭한 예를 보여준다. 칼리, 시바 등 여러 신들에게 헌정된 사원들이 있으며, 도 양식으로 지어졌다.

하리하르 세트가 건축하여 찬다나가르 시민들에게 기증한 건물은 극장 홀과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지역에서 최초의 건물이었다. 프랑스어, 영어, 벵골어로 된 방대한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보바자르(Boubazar)에 위치한 사원은 브라민 파라(Brahmin para) 근처, 기차역 서쪽에 위치하며, 지역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숭배한다.

자간나트 경의 사찰은 '라테르 사닥'에 위치하며, 마하프라부 차이타냐가 생전에 이곳을 방문했다고 전해진다. 현재 차토파디야이 가문이 관리하고 있다.

찬다나가르 기차역 서쪽에 위치한 KMDA 공원은 2002년에 개장한 인기 있는 공원 및 소풍 장소이다.

만쿤두 근처 기차역 서쪽에 위치한 망고 정원은 현재 개인 소유로 유지 관리되고 있으며, 2009년부터 운영되어 온 인기 있는 피크닉 장소이다.

하트콜라, 찬다나가르의 부바네스와리 푸자


찬다나가르에서 가장 오래된 자가다트리 푸자. 여신은 "아디 마"로 알려져 있습니다.

6. 문화 행사

슈라바나 달에는 부바네슈와리 푸자가 하트콜라에서 한 달 동안 열린다.

11월, 디왈리 열흘 후에는 바드레스와르와 만쿤두를 포함한 도시 전체에서 자가다트리 푸자가 열린다. 이 조각상들은 콜카타에서 열리는 두르가 푸자보다 거의 3배나 더 크다. 판차미부터 다샤미까지 이 지역 전체는 찬다나가르 현지 제조업체에서 만든 조명으로 밝혀진다. 다샤미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모든 주요 푸자 위원회는 리우 삼바 축제 다음으로 세계 최대 규모의 행렬에서 테마를 가진 조각상을 가져온다. 이곳에서 가장 오래된 푸자 중 일부는 300년 이상(아디 마)에서 1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자갓다트리 푸자는 이 지역의 주요 사회 문화 행사로, 웨스트 벵갈 주 전역에서 엄청난 인파를 끌어 모읍니다.

자가다트리 푸자 기간 중 찬다나가르 조명

7. 교통

7. 1. 도로

찬다나가르는 콜카타에서 국도 제6호선/그랜드 트렁크 로드(도시 중앙을 통과) 또는 델리 로드(도시 서쪽 경계 통과)를 통해 도로로 37km 떨어져 있다. 개인 버스 2번(춘추라 법원 - 닥시네스와르)은 그랜드 트렁크 로드를 따라 찬다나가르를 경유한다.[16] 새로 건설된 철도 건널목의 고가교는 찬다나가르시의 동서부를 쉽게 연결해준다. 콜카타와 찬다나가르 사이에는 택시와 자가용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7. 2. 철도

찬다나가르 기차역이 이 지역을 운행한다. 동부 철도의 하우라-바르다만 간선에 있는 하우라역에서 출발하는 통근 열차가 매우 자주 운행된다.(최대 운행 빈도는 10~12분마다 1대) 몇몇 주요 급행 및 여객 열차가 이곳에 정차한다. 하우라에서 철도로 약 33 km 떨어져 있으며, 각 역에 정차하는 통근 열차는 약 50~55분 정도 소요된다. 많은 통과 열차(주로 분기역에서만 정차하는 열차)도 이곳에 정차하는 경향이 있다.

7. 3. 버스

찬다나가르는 봉쇄 기간 이후 버스로 잘 연결되어 있다. 매일 웨스트 벵골 교통 공사 소속 버스 두 대가 에스플러네이드 버스 정류장에서 찬다나가르로 출발하며, 한 대는 아침, 다른 한 대는 저녁에 출발한다. WBTC 버스 외에도 콜카타와 찬다나가르를 연결하는 많은 사설 버스가 있다.

7. 4. 항공

가장 가까운 공항은 콜카타의 덤덤/콜카타 공항에 있으며, 이곳은 인도와 세계 주요 도시와 연결되어 있다. 찬단나가르는 이 공항에서 도로로 40km 떨어져 있다.

7. 5. 수상 교통

웨스트 벵골 주 정부(웨스트 벵골 주 교통 공사)는 후글리 강(갠지스 강)을 건너 자가달로 가는 강 서비스를 운영하며, 찬다나가르콜카타, 그리고 벨루르 사이에도 운행한다.

8. 교육

찬다나가르 정부 대학교


찬다나가르에는 스리 아우로빈도 비디야만디르, 펄 로사리 학교(CBSE), 아다르사 시크샬라야(WBBSE, WBCHSE) 등 여러 학교가 있다.[19] 찬다나가르 카나이랄 비디야만디르는 영어 부문(WBBSE, WBCHSE)과 프랑스어 부문(WBBSE)으로 나뉘어 운영된다. 이 외에도 두르가 차란 락시트 방가 비디얄라야(WBBSE, WBCHSE), 프라바르탁 비디야르티 바반(WBBSE), 갠지스 구루쿨[18](남녀공학)(ICSE + ISC), 칼리사니 비디야 만디르(WBBSE), 나루아 시크샤 니케탄(WBBSE) 등이 있다.

모던 퍼블릭 스쿨, 바쿤다(남녀공학), 찬다나가르 성 바오로 학교, 리시 아우로빈도 발-켄드람, 비디얄랑카(남녀공학), 비베카난드 지혜 미션(남녀공학)과 같은 학교도 운영 중이다. 찬다나가르 방가 비디얄라야(WBBSE, WBCHSE), 니리티야 고팔 모델 고등학교(WBBSE)도 있다.

생 조셉 여자 중고등학교[19], 크리슈나 바비니 나리 시크샤 만디르(서벵골 중등 교육 위원회, 서벵골 고등 교육 위원회), 성 안토니 고등학교(서벵골 중등 교육 위원회, 서벵골 고등 교육 위원회), 랄 바간 발리카 비드야라야(서벵골 중등 교육 위원회) 등도 있다.

우샹기니 발리카 비드야라야(서벵골 중등 교육 위원회, 서벵골 고등 교육 위원회), 프라바르탁 나리 만디르(서벵골 중등 교육 위원회), 인두마티 여자 고등학교(서벵골 중등 교육 위원회), 칼리사니 나리 시크샤 만디르(서벵골 중등 교육 위원회), 갠지스 구루쿨[18](남녀공학)(인도 중등 교육 인증 위원회 + 인도 학교 인증 위원회), 볼라나트 다스 발리카 비드야라야, 모던 공립학교, 바쿤다(남녀공학), 리시 아우로빈도 발-켄드람, 비드얄랑카(남녀공학) 등도 있다.

대학교 및 전문대학으로는 찬다나가르 정부 칼리지(부르드완 대학교), 칼리사니 마하비디얄라야(부르드완 대학교), 찬다나가르 여성 교육 연구소 (대학원)(부르드완 대학교), 여성 폴리텍 칼리지, 시르 J. C. 보스 공과대학(만쿤두) 등이 있다.

9. 인구 통계

2011년 인도 인구 조사에 따르면 찬다나가르의 총 인구는 166,867명으로, 이 중 남성은 84,009명(50.3%), 여성은 82,858명(49.7%)이었다. 6세 미만 인구는 11,826명이었다. 찬다나가르의 총 문맹 퇴치 인구는 139,005명으로, 6세 이상 인구의 89.65%를 차지했다.[20]

2011년 기준으로 찬다나가르 시에서는 벵골어 사용 인구가 88.09%로 가장 많았다.[21] 그 뒤를 이어 힌디어 8.1%, 우르두어 2.83%, 오디아어 0.31%, 텔루구어 0.25% 순으로 나타났으며, 기타 언어 사용 인구는 0.28%였다.[21]

9. 1. 언어



2011년 기준으로 찬다나가르 시에서는 벵골어 사용 인구가 88.09%로 가장 많았다.[21] 그 뒤를 이어 힌디어 8.1%, 우르두어 2.83%, 오디아어 0.31%, 텔루구어 0.25% 순으로 나타났으며, 기타 언어 사용 인구는 0.28%였다.[21]

10. 저명한 출신 인물


  • 라다나트 시크다르는 인도의 수학자이자 에베레스트 산의 높이를 계산한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22]
  • 카나이랄 dutta는 벵골 혁명가이자 순교자이다.[22]
  • 라쉬 베하리 보스는 벵골 혁명가이다.[22]
  • 모틸랄 로이는 벵골 혁명가, 언론인, 정신적 지도자이다.[22]
  • 쉬리쉬 찬드라 고쉬는 벵골 혁명가이다.[22]
  • 만드라 나트 나약은 벵골 혁명가이다.[22]
  • 바사비 팔은 프랑스어 교수이다.[22]
  • 타파스 폴은 벵골 배우이자 국회의원이다.[22]
  • 이샨 포렐은 인도 19세 미만 및 벵골(CAB) 크리켓 선수이다.[22]

11. 음식

찬다나가르는 자체적으로 유명한 쫄보라 톨숏 손데시(Jolbhora Talsash Sondesh)로 유명하다.

쫄보라 톨숏 손데시

참조

[1] 웹사이트 Base Map of Kolkata Metropolitan area http://www.cmdaonlin[...] Kolkata Metropolitan Development Authority 2007-09-03
[2] 뉴스 Buildings in former French colony await restoration https://www.thehindu[...] 2019-02-07
[3] EB1911
[4] 뉴스 Love heritage? Fund restoration https://www.thehindu[...] 2018-01-27
[5] 웹사이트 Kolkata to Chandannagar: The French life https://www.livemint[...] 2017-11-09
[6] 웹사이트 Treaty to confirm the Cession of Chandernagore https://mea.gov.in/b[...] 2021-09-11
[7] 서적 Dictionary of Historical Places, Bengal, 1757 – 1947 Primus 2024-04-05
[8] 웹사이트 District Statistical Handbook 2014 Hooghly http://wbpspm.gov.in[...] Department of Statistics and Programme Implementation, Government of West Bengal 2018-10-03
[9] 웹사이트 Hooghly District Police http://www.policewb.[...] West Bengal Police 2017-06-20
[10] 뉴스 French and Dutch push for heritage project https://timesofindia[...] 2013-11-23
[11] 웹사이트 Chandernagore's French Correction https://www.telegrap[...] 2017-12-31
[12] 뉴스 Leeds remembers its forgotten Indian war hero http://timesofindia.[...] 2015-07-17
[13] 서적 Hooghly Jelar Purakirti West Bengal State Archeology
[14] 뉴스 Restoration at French Cemetery http://www.telegraph[...] 2013-10-23
[15] 뉴스 Next Weekend you can be at Chandannagar http://www.telegraph[...] 2012-03-04
[16] 웹사이트 List of State Highways in West Bengal http://www.wbtraffic[...] West Bengal Traffic Police 2016-10-15
[17] 서적 Offering Flowers, Feeding Skulls : Popular Goddess Worship in West Bengal: Popular Goddess Worship in West Bengal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004-07-09
[18] 웹사이트 Ganges Gurukul, ICSE, Co-Ed English Medium School http://www.gangesgur[...] 2016-10-07
[19] 웹사이트 Official Website of St. Joseph's School https://rangandatta.[...] 2015-08-26
[20] 웹사이트 2011 Census – Primary Census Abstract Data Tables http://censusindia.g[...] Registrar General and Census Commissioner, India 2016-06-15
[21] XLSX 2011 census data https://censusindia.[...]
[22] 웹사이트 Confluence of French and Bengali culture. | Heritage & People of Chandernagore https://heritagechan[...] 2016-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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