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의 칼럼
1. 개요
철의 칼럼은 스페인 내전 발발 직후 발렌시아 지역의 아나키스트들에 의해 결성된 민병대였다. 이들은 공화파 정부 수호보다는 민중 혁명 보호와 확산에 집중했으며, 감옥 습격 및 사법 기록 파기 등 과격한 행동으로 논란을 일으켰다. CNT-FAI로부터 무기 지원을 거부당하고 공산주의 세력과 갈등을 겪었으며, 자유지상주의 공산주의를 강요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1937년 3월, 군사화 정책에 따라 제83 혼성 여단 등으로 재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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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의 좌익 무장 단체 -
국제여단
국제여단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고자 50여 개국에서 온 약 32,000명의 외국인 의용군으로 결성되어 주요 전투에 참전했으나, 불간섭 위원회의 철수 요구로 1938년 해산되었다. -
아나키스트 조직 -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
사파티스타 민족해방군은 멕시코 치아파스 주에서 활동하는 원주민 무장단체로, 1994년 무장봉기를 통해 멕시코 정부의 불평등에 저항하며 토지 개혁과 자치권을 요구하고, 대안세계화 운동과 연계하여 비폭력적 저항과 정치적 운동을 지속하고 있다. -
아나키스트 조직 -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
일본 아나키스트 연맹은 1946년 설립되어 '반권력', '무지배'를 기치로 활동하며 전후 일본 아나키즘 운동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나, 이념적 분열과 정치적 좌절로 1969년 해산한 아나코-생디칼리즘 계열의 단체이다.
2. 역사
스페인 내전 발발 직후인 1936년, 발렌시아 지역의 아나키스트들인 라파엘 마르티, 호세 펠리세르, 페드로 펠리세르, 엘리아스 만사네라, 호세 세가라 등이 중심이 되어 철의 칼럼을 결성했다. 이들은 멕시코 혁명의 혁명가 판초 비야에서 이름을 따 '판초 비야'라는 별명을 사용하기도 했다.
철의 칼럼은 공화국 정부 수호보다는 민중 혁명을 보호하고 확산시키는 데 주력했다. 초기에는 발렌시아의 산 미겔 데 로스 레예스 감옥을 파괴하고 죄수들을 석방하는 등 과격한 활동을 벌였는데, 이 과정에서 합류한 일부 죄수들의 행위로 인해 부정적인 평판이 형성되기도 했다. 이러한 활동 방식과 CNT-FAI의 정부 참여 결정에 대한 반대 등으로 인해 CNT 중앙 조직과 갈등을 겪으며 무기와 보급품 지원을 거부당하기도 했다.
주로 테루엘 전선에서 활동했으며, 활동 과정에서 공산주의 계열 부대나 아살토 경비대(제2공화국 무장경찰) 등 다른 세력과 파벌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철의 칼럼은 정부의 민병대 군대화 방침에 다른 어떤 민병대보다 오랫동안 저항했다. 철의 칼럼의 대표는 CNT 회의에서 "군대화가 모든 것을 정리한다고 믿는 동지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것은 무엇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상등병, 하사관, 장교, 아카데미 졸업장 그리고 전쟁의 문제에 완전히 쓸모 없는 것들에 반대하며, 우리는 그 자체의 조직으로서 군사 구조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군대화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결국 1937년 3월 군대화를 수용하여 제83 혼성 여단으로 개편되었고, 일부 대원들은 제82 혼성 여단이나 제84 혼성 여단으로 흩어졌다.
2.1. 결성 초기 활동과 논란
철의 칼럼은 공화국 정부를 수호하는 것보다 민중 혁명을 보호하고 이를 확산시키는 데 더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목표 아래 초기 활동 중 하나로 발렌시아에 위치한 산 미겔 데 로스 레예스(San Miguel de los Reyes) 감옥을 습격하여 죄수들을 석방시키고, 사법 기록 보관소를 불태웠다. 석방된 죄수 다수가 철의 칼럼에 합류했지만, 일부는 개인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활동하여 철의 칼럼 전체에 부정적인 평판을 안기기도 했다.
이러한 과격한 활동 방식과 죄수들의 합류 문제, 그리고 철의 칼럼이 CNT-FAI(전국노동자연맹-이베리아 아나키스트 연맹)의 공화국 정부 참여 결정에 공개적으로 반대한 점 등으로 인해, CNT-FAI 중앙 조직은 철의 칼럼을 비판하고 무기와 보급품 지원을 거부했다. 이로 인해 철의 칼럼은 필요한 물자를 자체적인 몰수 활동이나 지역 위원회의 원조에 의존해야만 했다.
철의 칼럼에 합류한 한 탈옥수는 당시 상황에 대해, 자신과 같은 죄수들이 부당하게 투옥되었다가 아나키스트 동지들에 의해 해방되었으며, 이후 철의 칼럼에 합류하여 파시스트에 맞서 싸웠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신들이 필요한 무기와 식량을 스스로 확보해야 했고, 정부나 위원회로부터 '통제 불능' 집단으로 취급받았다고 언급했다. 또한, 자신들이 지나온 마을에서 구체제를 타파하고 노동자들에게 부를 돌려주는 등 혁명적 활동을 수행했지만, 외부로부터는 제대로 된 지원이나 이해를 받지 못했다고 덧붙였다.
철의 칼럼은 활동 과정에서 공산주의 계열 부대나 아살토 경비대(Assault Guards, 제2공화국 무장경찰)와 같은 다른 세력들과 파벌 싸움에 휘말리기도 했다. 특히 베나구아실(Benaguasil) 마을에서는 지역을 통제하던 공산주의자들과 무력 충돌이 발생했으며, 이 과정에서 양측 모두 사상자가 발생하자 정부는 철의 칼럼을 공격하기 위해 비행기를 동원하기도 했다.
2.2. 아라곤 전선
1936년 8월 8일, 철의 칼럼 소속 8개의 세기(민병대 약 800명)가 발렌시아를 출발하여 테루엘로 향했다. 이들은 두 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이동했다. 먼저, 라파엘 마르티가 이끄는 알코이 그룹은 약 150명의 민병대로 구성되어 발렌시아를 떠나 사군토를 경유하며 100명의 지원병을 추가로 받았다. 이들은 테루엘 주의 사리온에 도착했을 때 약 400명으로 늘어났으며, 이곳에서 국민주의자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막아냈다. 동시에 호세 펠리세르가 지휘하는 또 다른 민병대 그룹도 400명의 지원병과 함께 발렌시아에서 출발했다.
초기에는 제대로 된 조직 없이 전투에 임하여 사상자가 발생하는 등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후 세기 단위로 부대를 편성하면서 전열을 정비했다. 1936년 8월 말에는 전선이 안정되었고, 철의 칼럼은 약 1,600명의 민병대와 600명의 정규 군인을 합쳐 총 2,200명 규모의 병력을 유지했다. 1936년 10월 경에는 병력이 약 12,000명(겨울철에는 최대 20,000명까지 증가)으로 크게 늘어났으나, 무기는 주로 알베레다 병영 공격 시 확보한 소형 화기뿐이어서 실제로 무장한 인원은 3,00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지원병들은 라스 살레사스 병영에 머물거나 각자의 집에서 소집을 기다리는 상태였다.
2.3. 자유지상주의 공산주의 강요 논란
철의 칼럼은 민병대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유지상주의 공산주의를 강요하려 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전선에서 활동하지 않는 민병대는 테루엘 지역에서 농업 집단을 확장하는 데 주력했다. 집산주의는 토레스-베네디토 칼럼과 같이 집단 농장을 옹호했던 다른 칼럼에서도 추진되었으나, 철의 칼럼은 두루티 칼럼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전쟁 민병대이자 혁명 조직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이들은 회의록 작성, 신문("사격선") 발행, 선언문 배포 등을 통해 후방에서의 행동을 설명하고 노동자와 농민에게 자신들의 결정과 움직임을 정당화하고자 했다. 철의 칼럼 스스로 하나의 공동체로 여겨지기도 했다.
1936년 9월과 10월, 무기와 탄약 부족으로 수백 명의 칼럼 민병대원들이 이를 구하기 위해 후방으로 이동했다. 후방에 도착한 이들은 체포 및 수색을 시도하는 법 집행 기관과 마찰을 빚었으며, 이러한 도발에 무력으로 대응했다. 발렌시아와 카스테욘에서는 법원을 습격하여 사법 기록을 파기하고, 시의회를 습격하여 재산 기록을 파기했으며, 심지어 사라고사 의회에서 합의된 CNT의 교도소 반대 원칙을 이행하려는 펠리세르의 주도에 따라 산 미겔 데 로스 레예스 교도소를 공격하여 수감자들을 석방했다. 카스테욘에서는 약 65명의 우익 및 파시스트 수감자가 칼럼에 의해 총살되었고, 비나로스에서는 고발이나 재판 없이 이송된 수감자 16명을 처형했다. 또한 무기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후방에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인민 반파시스트 경비대(GPA)로부터 소총과 기관총을 압수하기도 했다. 10월 2일에는 레가스피 호 선창에 있던 수감자들을 파테르나 피카데로로 끌고 가 처형했다.
당시 CNT는 공화 정부 참여 협상을 진행 중이었기에, 이러한 행동을 협상에 대한 보이콧으로 간주하여 칼럼을 부인하고 관련 선전전에 대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공산주의 및 공화주의 언론은 철의 칼럼에 대한 수많은 비난을 퍼뜨렸고, 이는 "공식" 아나키스트 언론에 의해 반박되지 못했다. 칼럼에 동조하는 아나키스트 언론 역시 공화주의 측의 검열로 인해 입장을 표명하기 어려웠다.
10월 29일, 인민 반파시스트 경비대(GPA)가 습격 과정에서 아나키스트 티부르시오 아리자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토레스 베네디토, 철의 칼럼, CNT 13 칼럼이 공동으로 조직한 장례 행렬이 발렌시아 자치 정부 청사 근처를 지날 때, 자치 정부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중무장 상태였다. 행렬이 스페인 공산당(PCE) 본부가 있는 테투안 광장에 도착했을 때, 마드리드에서 돌아온 공산당 대대를 중심으로 무장한 공산주의자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아나키스트에 항의하던 한 젊은 공산주의자가 시위대에 접근해 총격을 가했고, 이는 곧이어 다른 총격과 기관총 사격으로 번지며 광장은 혼란에 빠졌다. 약 30분간 지속된 전투로 5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이 중 49명은 CNT 소속), 약 30명이 사망했다.
사건 직후 테루엘의 군대를 발렌시아로 소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은 해당 대대, GPA, 그리고 약 300명의 군사 훈련을 받은 젊은이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CNT 위원회는 칼럼 책임자들을 질책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하며 PCE와의 정면 대결을 피했다. 이는 당시 정부 참여 협상이 마무리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PCE와의 마찰을 극도로 꺼렸기 때문이다.
2.4. 후방에서의 과격 행동과 CNT와의 갈등
1936년 9월과 10월, 무기와 탄약 부족으로 수백 명의 철의 칼럼 대원들이 보급품을 찾아 후방으로 이동했다. 후방에 도착한 이들은 체포와 수색을 시도하는 법 집행 기관에 의해 괴롭힘을 당했으며, 이러한 도발에 직면하여 칼럼은 무력으로 대응했다.
발렌시아와 카스테욘에서는 사법 기록을 파기하기 위해 법원을, 재산 기록을 파기하기 위해 시의회를 습격했다. 또한, 사라고사 의회에서 결정된 CNT의 합의 사항 중 하나였던 교도소 반대 원칙에 따라, 펠리세르의 주도로 산 미겔 데 로스 레예스 교도소를 공격하여 수감자들을 석방시켰다. 이 과정에서 카스테욘에서는 약 65명의 우익 및 파시스트 성향 수감자들이 철의 칼럼에 의해 총살되었고, 비나로스에서는 별다른 고발이나 재판 없이 이송된 수감자 16명이 처형되었다. 칼럼은 무기를 확보하기 위해 후방에서 무기를 보관하고 있던 인민 반파시스트 경비대(GPA)로부터 소총과 기관총을 압수하기도 했다. 1936년 10월 2일, 칼럼 민병대는 레가스피(Legazpi) 호 선창에 수감되어 있던 이들을 파테르나의 피카데로(Picadero)로 이송하여 처형했다.
당시 CNT는 공화 정부 참여를 협상 중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철의 칼럼의 과격한 행동을 자신들의 계획에 대한 보이콧으로 간주하고 공식적으로 부인했다. CNT는 칼럼에 대한 부정적인 선전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공산주의 및 공화주의 언론은 칼럼에 대한 수많은 비난을 퍼뜨릴 수 있었다. 아나키스트 언론은 공화국 측의 검열로 인해 이러한 비난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10월 29일, 인민 반파시스트 경비대(GPA)가 습격 과정에서 아나키스트 티부르시오 아리사(Tiburcio Ariza)를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토레스-베네디토 칼럼, 철의 칼럼, CNT 13 칼럼이 공동으로 아리사의 장례식을 조직했다. 장례 행렬이 발렌시아 자치 정부 청사 인근을 지나 스페인 공산당(PCE) 본부가 위치한 테투안 광장에 도착했을 때, 마드리드에서 복귀한 PCE 대대가 무장한 채 매복하고 있었다. 한 젊은 공산주의자가 군중을 향해 총을 발사한 것을 시작으로 총격전이 벌어졌고, 기관총까지 동원된 전투는 약 30분간 지속되었다. 이 충돌로 약 30명이 사망하고 56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부상자 중 49명은 CNT 소속이었다.
사건 직후 테루엘 전선의 부대를 발렌시아로 소환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으나, CNT 중앙 위원회는 더 큰 충돌을 피하기 위해 칼럼 책임자들을 꾸짖는 선에서 사태를 수습했다. 이는 당시 정부 참여 협상을 마무리 짓고 있던 CNT 지도부가 PCE와의 관계 악화를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2.5. 군대화
1936년 11월, 국민파 군대가 마드리드에 근접하면서 공화파 정부가 발렌시아로 대피했을 때, 철의 칼럼이 통제하던 타란콘을 지나던 몇몇 장관들이 체포되어 굴욕을 당하고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 그해 말까지 발렌시아는 공화파 관리들과 지도자들의 피난처가 되었다. 12월 중순, 철의 칼럼을 포함한 민병대들은 테루엘 공격에 소집되었고, 철의 칼럼은 푸에르토 에스칸돈을 공격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 전투는 공화파의 포병 지원 부족, 제공권 활용 미숙, 그리고 인접 전선에서 적의 증원을 차단하지 못한 점 때문에 성과 없이 끝났다.
철의 칼럼은 정부의 민병대를 정규군으로 전환하려는 계획, 즉 군대화에 다른 어떤 민병대보다 오랫동안 저항했다. 이러한 저항의 이유는 철의 칼럼 구성원이 쓴 Un día tormentoso y nublado(슬프고 흐린 날)이라는 글과 CNT 회의에서 철의 칼럼 대표가 한 발언에서 잘 드러난다.
: "군대화가 모든 것을 정리한다고 믿는 동지들이 존재하지만, 우리는 이것은 무엇도 해결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상등병, 하사관, 장교, 아카데미 졸업장 그리고 전쟁의 문제에 완전히 쓸모 없는 것들에 반대하며, 우리는 그 자체의 조직으로서 군사 구조를 받아 들이지 않을 것이다."
군대화에 더 우호적인 다른 전선의 대표들이 파견되어 철의 칼럼 민병대원들을 설득하려 했다. 마리아노 바스케스와 후안 가르시아 올리버 같은 CNT 지도부 인사들도 중재를 시도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철의 칼럼은 같은 의견을 가진 다른 칼럼들과 함께 군대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아나키스트 칼럼 전체 회의를 소집했다. 전원 회의 결과, 군사화는 피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거의 모든 아나키스트 민병대가 군사화에 동의하게 되었다. 이후 한 달 동안 칼럼 내부에서는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고, 이 과정에서 자발적으로 떠나거나 추방되는 인원도 발생했다. 그러나 결국 철의 칼럼은 자체적으로 군사화를 결정했다. 이를 위해 전선에서의 교대가 필요했다.
1937년 3월 둘째 주, 철의 칼럼은 전선에서 물러났고, 같은 해 4월 1일에 군사화되어 제83 혼성 여단으로 재편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전에 칼럼의 대표였던 많은 구성원들이 장교가 되었다. 또한 칼럼의 일부 구성원들은 제82 혼성 여단 및 제84 혼성 여단과 같은 다른 혼성 부대에 합류하기도 했다.
철의 칼럼의 한 익명 구성원은 Protesta ante los libertarios del presente y del futuro sobre las capitulaciones de 1937(1937년 항복에 대한 현재와 미래의 자유주의자들에 대한 항의)라는 글을 통해 군사화 결정과 당시 CNT 지도부의 타협적인 태도를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