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여단
1. 개요
국제여단은 1936년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외국인 의용군이다. 프랑스 공산당의 요청으로 시작되어 코민테른의 지원을 받아 모병이 이루어졌으며, 50여 개국에서 약 32,000명이 참여했다. 국제여단은 마드리드 공방전, 하라마 전투, 과달라하라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전했으나, 불간섭 위원회의 철수 요구에 따라 1938년 해산되었다. 해산 이후에도 일부 대원들은 스페인에 남아 싸웠으며, 종전 후에는 각자의 모국에서 다양한 평가를 받았다. 동독, 체코슬로바키아 등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파시즘에 맞선 영웅으로 칭송받았고, 일부 서방 국가에서는 감시를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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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명칭 | 스페인어: Brigadas Internacionales 영어: International Brigade (국제 여단) |
|---|---|
| 표어 | 당신과 우리의 자유를 위하여! |
| 기간 | 1936년 9월 18일 ~ 1938년 9월 23일 |
| 국가 | 알바니아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 미국 아일랜드 유고슬라비아 영국 벨기에 캐나다 쿠바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멕시코 아르헨티나 네덜란드 외 다수 |
| 소속 | 코민테른 스페인 제2공화국 |
| 역할 | 준군사조직 |
| 종류 | 보병 |
| 규모 | 40,000 ~ 59,000명 |
| 주둔지 | 알바세테 |
| 사령관 | 앙드레 마티 |
|---|---|
| 주요 지휘관 | 만프레드 슈테른 한스 카흘레 루이지 롱고 카롤 슈비에르체프스키 톰 윈트링엄 로버트 헤일 메리먼 잘카 마테 빌헬름 자이저 빌 알렉산더 벨리 데디 |
| 참전 | 스페인 내전 마드리드 전투 로페라 전투 하라마 전투 과달라하라 전투 세고비아 공세 우에스카 공세 브루네테 전투 벨치테 전투 테루엘 전투 아라곤 공세 카스페 전투 에브로 전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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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의 외인의용병 -
아일랜드인 여단 (스페인 내전)
아일랜드인 여단은 오언 오더피의 주도로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장군을 지지하며 국민 정부군에 합류한 아일랜드 출신 자원병 군사 조직이었으나, 훈련 부족과 여러 문제로 하라마 전투에서 큰 손실을 입고 해산되어 군사적 기여는 미미했고 귀국 후 정치적 입지가 약화되었다. -
반프랑코주의 -
전국노동총연맹
전국노동총연맹은 1910년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창립된 아나키즘-생디칼리즘 노동조합으로, 억압적인 정부 기관에 속하지 않은 모든 이에게 개방되어 노동 해방과 상호 부조를 추구하며 아나키스트 공산주의 사회를 목표로 하고, 스페인 내전 당시 자치적인 사회 운영을 시도했으나 프랑코 정권 하에서 탄압받았고 민주화 이후 노동총연맹과 분열되었으며 현재는 국제노동연맹의 회원으로 활동한다. -
스페인의 좌익 무장 단체 -
철의 칼럼
철의 칼럼은 스페인 내전 초기 발렌시아에서 결성된 아나키스트 무장 조직으로, 사회 혁명을 통한 민중 권력 확대를 목표로 파시즘에 대항했으나, CNT-FAI와의 갈등, 무기 부족, 정부의 군사화 시도, 과격한 행보 등으로 어려움을 겪고 논란이 되었다.
2. 설립과 지원
1936년 8월, 영국 작가이자 군사 이론가인 톰 윈트링엄은 스페인에 다녀온 후 외국 공산당을 이용해 자원병을 모집하자고 처음 제안했다. 이후 같은 해 9월, 스페인 공산당은 스페인 내전에서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외국인 의용군을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이 요청은 프랑스 공산당을 통해 소련에 전달되었고, 코민테른 서유럽 선전부 책임자인 빌리 뮌젠베르크는 모리스 토레즈의 제안으로 보이는 이 아이디어를 소련 코민테른에 정식으로 제기하며 서방측에 의용군 지원을 요청했다. 보안 조치로, 공산주의자가 아닌 자원병은 먼저 내무인민위원회(또는 제1국) 요원의 보안 심문을 거쳐야 했다.
9월 말, 프랑스 공산당과 이탈리아 공산당은 스페인 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한 의용군 파견을 결정했다. 이탈리아 공산청년회 전임 서기장이었던 루이지 롱고는 가능한 최대의 지원을 스페인 정부에 약속한다. 소련 역시 러시아 내전 참전 경험이 있는 예비역 적군의 지원을 약속했다. 처음에는 당시 스페인의 총리였던 스페인 사회노동당의 지도자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가 소련의 직접적인 군사 개입을 거부했으나, 내전 초기 프랑코 군의 공세가 거세지자 입장을 바꾸어 10월 22일 소련 측 의용군 파견을 최종 승인했다. 그러나 소련은 영국과 프랑스와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불간섭 조약에서 공식적으로 탈퇴하지는 않았다.
국제여단 모병의 주요 중심지는 프랑스 파리였으며, 소련의 카롤 "발터" 스비에르체프스키Кароль Сверчевский러시아어 장군이 감독했다. 1936년 10월 17일, 이오시프 스탈린은 호세 디아스에게 보낸 공개 서한을 무도 오브레로에 게재하며 "스페인의 파시스트 반란은 스페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진보적 인류가 당면한 문제"라고 주장하며 코민테른을 비롯한 전 세계에 지원을 호소했다. 곧 여러 국가에서 공산주의 활동가들이 온건 사회주의자 및 자유주의자 그룹과 연합하여 반파시스트 "인민 전선" 민병대를 결성했으며, 이들 대부분은 코민테른의 통제하에 있거나 영향을 받았다. 동남유럽 지역의 의용군 모집은 훗날 원수 요시프 브로즈 티토로 널리 알려진 유고슬라비아인 요시프 브로즈가 파리에서 담당하여 자금, 여권 등을 지원했다.
모집된 의용군들은 열차나 선박을 이용하여 프랑스를 거쳐 스페인의 알바세테 주에 위치한 기지로 보내졌다. 많은 이들이 스스로 스페인으로 향하기도 했다. 초기에는 의용군들의 계약 조건이나 참전 기간 등이 명확히 정해지지 않아 혼란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1937년 5월 30일에는 마르세유에서 스페인으로 자원병 200~250명을 태우고 가던 프랑스 여객선 시우다드 데 바르셀로나가 말그라트 데 마르 해안에서 국민파 잠수함의 어뢰 공격을 받아 침몰하여 최대 65명의 자원병이 사망하는 비극도 있었다.
국제여단 결성은 공산주의자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지만, 아나키즘 세력은 코민테른 주도의 움직임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초기에는 국경을 통제하던 아나키스트들이 공산주의자 자원병의 입국을 거부하라는 지시를 받기도 했으나, 항의가 이어지자 결국 통과를 허용했다. 그럼에도 스페인의 민주주의를 지켜야 한다는 공감대 속에서 약 500명의 아나키스트 의용군도 스페인으로 향했다.
알바세테는 곧 국제여단의 본부이자 주요 보급 기지가 되었다. 이곳은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주요 인물 3인방이 운영했는데, 프랑스 공산당의 앙드레 마르티가 총사령관, 이탈리아 공산당의 루이지 롱고(가명 '갈로')가 감찰관(부사령관), 이탈리아의 생디칼리즘 노동운동가 주세페 디 비토리오(가명 '니콜레티')가 정치위원을 맡았다. 군복은 프랑스 공산당에서 지원하였다. 여단은 스페인 공화군의 기본 군사 부대인 혼성 여단으로 편성되었으며, 엄격한 군사 규율 하에 몇 주간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국제여단에는 파시즘으로부터 민주공화국을 지키려는 다양한 배경의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뿐만 아니라,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자, 실업자, 모험가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헤밍웨이, 조지 오웰, 존 콘퍼드 등 많은 지식인과 예술가들도 참전하여 전투 경험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소련으로 망명했던 약 500명의 공산주의자들도 스페인으로 보내졌는데, 이 중에는 제1차 세계 대전 경험이 풍부한 군사 지도자들("클레버" 슈테른, "고메즈" 자이서, "루카스" 잘카, "갈" 갈리치 등)도 포함되어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전체 자원병 중 약 1/4은 유대인이었으며, 폴란드 대대 내에는 1925년 폴란드에서 사망한 젊은 유대인 공산주의자 나프탈리 보트윈의 이름을 딴 유대인 중대가 결성되기도 했다.
3. 참여 국가 및 인원
국제여단에는 스페인 내전 당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지원하기 위해 세계 50여 개국에서 모인 약 32,000명에서 40,000명 (일부 추산은 연인원 6만 명)의 의용군이 참여했다. 이들은 주로 파시즘에 반대하는 이상주의적 동기나 민주주의 수호, 혁명적 대의 실현 등을 위해 자원했다. 참여자 중 약 60~85%는 각국의 공산당원이었으며, 사회 계층별로는 노동자가 약 80%, 지식인 및 학생이 약 20%를 차지했다.
주요 모집 센터는 파리에 있었으며, 코민테른이 조직과 운영에 깊이 관여했다. 앙드레 말로, 어니스트 헤밍웨이 등 일부 저명한 문화인들도 전쟁에 참여하거나 관련 활동을 벌였다.
다음은 주요 참여 국가별 의용군 규모 추정치이다. 다만, 자료마다 집계 방식이나 기준이 달라 약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 국가 | 추정 인원 | 비고 |
|---|---|---|
| 프랑스 | 8,962–9,000 | |
| 이탈리아 | 3,000–3,350 | 가리발디 대대 등 활동. |
| 독일 및 오스트리아 | 3,000–5,000 | 역사가 앤터니 비버(Antony Beevor)는 독일인 2,217명, 오스트리아인 872명을 언급. 오스트리아는 1938년 독일에 병합(안슐루스). 오스트리아 저항 운동 문서 센터에는 오스트리아인 1,400명의 이름이 기록됨. 텔만 대대, 한스 바임러 대대 등 활동. |
| 폴란드 | 3,000–5,000 | 폴란드 출신 이민자(주로 프랑스, 벨기에 거주)가 약 75% 차지. 벨라루스인, 우크라이나인, 유대인 자원병 포함 (유대인은 '폴란드인' 자원병의 약 45% 추정). 돔브로프스키 대대, 미체비츠 대대 등 활동. |
| 미국 | 2,341–2,800 |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조지 워싱턴 대대 등 활동. |
| 영국 | 2,500 | 영국 대대 활동. 영연방 국가 출신 다수 포함. |
| 벨기에 | 1,600–1,722 | |
| 체코슬로바키아 | 1,500–2,200 | 체코슬로바키아 자원병 중 독일계 약 20%, 헝가리계 약 11% 포함. 토마스 마사리크 대대 등 활동. |
| 유고슬라비아 | 1,500–2,095 | 주로 자코비치 대대, 디미트로프 대대 등 활동. 훗날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된 요시프 브로즈가 파리에서 모집 지원. |
| 캐나다 | 1,000–2,000 | 매켄지-파피노 대대 활동. |
| 헝가리 | 528–1,500 | 라코시 대대 활동. |
| 쿠바 | 1,101 | |
| 아르헨티나 | 740 | |
| 네덜란드 | 628–700 | |
| 덴마크 | 550 | 약 220명 전사. |
| 스웨덴 | 500–1,000 | 스칸디나비아 출신 포함. |
| 루마니아 | 500 | |
| 불가리아 | 400–462 | 디미트로프 대대, 데바 블라기에프 대대 등 활동. |
| 스위스 | 408–800 | 스위스 정부는 중립 정책에 따라 참여를 금지하고 귀국 후 처벌. 2009년 복권됨. |
| 리투아니아 | 300–600 | |
| 아일랜드 | 250 | 코놀리 부대가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 소속으로 참전. |
| 노르웨이 | 225 | 약 100명 전사. |
| 핀란드 | 225 | 핀란드계 미국인/캐나다인 포함, 약 70명 전사. |
| 에스토니아 | 200 | |
| 그리스 | 160–400 | 디미트로프 대대 등 활동. |
| 포르투갈 | 134 | 다수는 국제여단 대신 공화국군에 직접 합류. |
| 룩셈부르크 | 103 | |
| 중화민국 | 100 | 대부분 해외 화교 출신. |
| 멕시코 | 90 | |
| 키프로스 | 60 | 영국 대대, 링컨 대대 등에서 활동. |
| 오스트레일리아 | 60 | 약 16명 전사. 영국 대대 등에서 활동. |
| 필리핀 | 50 | |
| 알바니아 | 43 | 주로 가리발디 대대에서 활동. |
| 코스타리카 | 24 | |
| 뉴질랜드 | 12–20 | 영국 대대 등에서 활동. |
| 기타 | 1,122 | 일본 출신도 소수(1명~수 명) 참여한 것으로 알려짐. |
국제여단은 마드리드 공방전, 하라마 강 전투 등 주요 전투에 참여하여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 및 이들을 지원한 나치 독일과 파시스트 이탈리아 군대와 싸웠다. 이 과정에서 약 1만 명 이상이 전사하고 많은 부상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4. 주요 임무
스페인 내전 발발 이후인 1936년 9월, 스페인 공산당은 공화국 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외국인 의용군 파병을 요청했다. 이 요청은 프랑스 공산당을 통해 소련에 전달되었고, 코민테른은 빌리 뮌젠베르그를 통해 서방 국가들에 의용군 지원을 호소했다. 공산주의자가 아닌 지원자는 내무인민위원회의 보안 심사를 거쳐야 했다. 초기에는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소련 측 의용군 파견을 거부했으나, 전황이 급박해지자 10월 22일 이를 수용했다.
국제여단의 주요 임무는 파시즘 세력에 맞서 스페인 제2공화국을 수호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 파리에서 모병이 이루어졌고, 소련의 카롤 스비에르체프스키( Кароль Сверчевский러시아어 ) 장군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공개 서한을 통해 스페인 내전이 인류 전체의 문제임을 강조하며 국제적인 지원을 촉구했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와 같은 인물들이 동남유럽 지역의 모병을 담당하기도 했다. 모인 의용군들은 스페인 알바세테로 집결하여 훈련을 받고 전선에 투입되었다.
국제여단에는 공산주의자뿐만 아니라 파시즘에 반대하는 다양한 배경과 이념을 가진 사람들이 자원했다. 아나키즘 세력은 초기에는 회의적이었으나 스페인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약 500명이 합류했으며, 윈스턴 처칠의 조카 에스먼드 로밀리와 같은 자유주의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조지 오웰 같은 지식인들도 참여했다.
알바세테에 설치된 사령부를 중심으로, 국제여단은 국적 및 언어별로 부대를 편성하여 운영되었다. 이들은 마드리드 공방전, 하라마 전투, 과달라하라 전투, 에브로 전투 등 스페인 내전의 주요 전투에 참여하여 공화국 군대를 지원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내전 중반 이후에는 형식상 스페인 육군의 외인 부대 신분으로 편입되기도 했다. 국제여단의 지도부는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앙드레 마르티(총사령관), 루이기 롱고(부사령관), 귀세페 디 비토리오(정치위원) 등으로 구성되었다.
4.1. 마드리드 공방전 (1936년 10월 ~ 1939년 3월)
1936년 10월 중순, 프랑코가 이끄는 국민군은 스페인 중부를 빠르게 장악하며 수도 마드리드로 진격했다. 진격 속도가 매우 빨라, 10월 18일 공화국 정부의 라르고 카바예로 총리가 이예스카스의 공화군 지휘관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전화를 받은 것은 이미 그 도시를 점령한 프랑코군 지휘관일 정도였다. 위기를 느낀 공화국 정부는 10월 18일 밤, 각국에서 온 의용군으로 구성된 혼성여단을 창설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국제여단 제11연대와 제12연대가 정식으로 공화국 군대에 편입되었다.
프랑코군은 이전까지의 전투 경험을 바탕으로 마드리드를 쉽게 함락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그러나 10월 26일 벌어진 첫 전투에서 국제여단은 소련 붉은 군대로부터 지원받은 T-26 전차를 앞세워 반격에 나섰다. 예상치 못한 전차 공격에 프랑코군 보병은 후퇴했고, 모나스테리오 기병대대는 큰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로 T-26 전차 부대 지휘관 파벨 아르만은 공화국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모로코 출신 병사들로 구성된 프랑코군의 레굴라르 분견대가 화염병으로 공격해오면서 소련제 전차 역시 상당한 손실을 입었다.
1936년 11월, 아나키즘 성향의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자연맹(CNT)과 이베리아 아나키즘 연맹(FAI)은 스페인 사회노동당 정부와 협력하기로 결정했다. 이전까지 CNT와 FAI는 아나키즘 입장에서 스페인 제2공화국 역시 국가 권력의 일부로 보았고, 사회노동당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인 노동자총연맹(UGT) 조합원들이 CNT로 이탈할 것을 우려하여 협력을 주저했다. 그러나 프랑코군의 마드리드 공격이 임박하자, CNT는 정부 내 4개 부서의 장관직을 할당받는 조건으로 사회노동당과의 연립 정부 구성에 합의했다. 이로써 마드리드 방어를 위한 공동 전선이 형성되었다. 당시 국제여단에는 제1차 세계대전이나 아일랜드 독립전쟁 등에서 전투 경험을 쌓은 베테랑 의용군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11월 초, 프랑코군은 마드리드를 포위했다. 프랑코는 "11월 7일 마드리드에서 미사를 드리겠다"고 공언하며 함락에 대한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11월 8일, 에밀리오 클레이버 장군이 이끄는 제11 국제여단(파리 코뮌 대대, 돔브로프스키 대대, 앙드레 마르티 대대, 영국인 기관총 부대) 소속 1,900명의 병력이 포위된 마드리드에 도착하여 카사 데 캄포 공원에서 첫 전투를 치렀다. 이후 제12 국제여단(텔만 대대, 가리발디 대대, 루이즈 미셸 대대, 차파예프 대대, 앙리 베이유망 대대)이 증원되고, 약 6,000명의 아나키스트 의용군도 방어에 합류했다. 11월 19일, 아나키스트 의용군과 국제여단 제11연대는 프랑코 측 스페인 외인부대와 나치 독일의 콘도르 사단이 점령하고 있던 마드리드 대학 구역을 공격했다. 대포와 폭격기의 포화 속에서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졌고,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전투 와중에 아나키스트 의용군의 저명한 지도자 부에나벤투라 두루티가 총격을 입고 다음 날 사망하는 비극이 있었지만, 공화군은 대학 구역에서 프랑코 파시스트 군대를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결국 11월 23일, 프랑코군은 카사 데 캄포 외곽까지 물러나며 마드리드 점령을 일시적으로 포기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국제여단 역시 병력의 절반 가량이 사상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
1936년 12월 13일, 프랑코군은 다시 마드리드 진입을 시도했다. 독일제 1호 전차와 이탈리아의 안살도 전차를 앞세운 약 18,000명의 병력이 코루나 가도를 따라 공격해왔으나, 소련 붉은 군대 장교들이 지휘하는 국제여단과의 격렬한 교전 끝에 또다시 격퇴되었다. 소련 군사 고문단 소속 드미트리 파블로프의 지휘 아래 국제여단은 프랑코군의 공세를 막아냈고, 프랑코군은 마드리드 점령을 다시 한번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마드리드는 스페인 내전이 프랑코군의 승리로 끝날 무렵까지 국제여단과 공화군의 통제 하에 남게 되었다.
마드리드 공방전에서 국제여단이 거둔 성과는 분명 값진 것이었지만, 그들의 역할은 코민테른과 스페인 제2공화국에 의해 선전 목적으로 다소 과장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공화국을 지지했던 영국 대사 헨리 칠턴 경은 마드리드 방어가 오직 국제여단의 힘만으로 이루어진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마드리드를 방어한 약 4만 명의 공화군 병력 중 국제여단 소속은 약 3천 명 정도였으며, 공화군 전체의 피해 역시 막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제여단이 파시즘에 맞서 마드리드를 지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4.2. 하라마 전투 (1937년 2월)
1937년 2월 6일, 말라가가 함락된 후, 국민군은 마드리드 남쪽의 마드리드-안달루시아 도로를 따라 공격을 개시했다. 국민군은 XV 국제여단이 방어하고 있던 작은 마을 시에포주엘로스로 빠르게 진격했다. 당시 XV 국제여단은 영국 대대(영연방 및 아일랜드인), 디미트로프 대대(주로 발칸 반도 출신), 2월 6일 대대(벨기에 및 프랑스), 캐나다의 매켄지-파피노 대대, 그리고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 코놀리 대대로 알려진 독립적인 아일랜드 부대도 전투에 합류했다.
1937년 2월 11일, 하라마 전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국민군 여단은 XIV 국제여단 소속 앙드레 마르티 대대의 초병들을 기습적으로 제거하고 하라마 강을 건넜다. 가리발디 대대가 맹렬한 사격으로 저지하려 했으나, 다른 지점에서도 국민군은 비슷한 전술로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다음 날인 2월 12일, XV 국제여단의 영국 대대가 국민군의 집중 공격 대상이 되었다. 영국 대대는 7시간 동안 격렬한 포화 속에 놓였으며, 이 지역은 이후 "자살 언덕"(Suicide Hill)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날 전투로 영국 대대원 600명 중 225명만이 생존했다. 특히 한 중대는 국민군 병사들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항복하는 척 접근하여 기습하는 속임수에 넘어가 점령당하기도 했다.
2월 17일, 공화군은 반격을 시작했다. 2월 23일과 27일에는 국제여단도 반격에 가담했으나, 포병 지원 부족 등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에이브러햄 링컨 대대는 큰 압박 속에서 120명이 사망하고 175명이 부상을 입는 피해를 겪었다. 사망자 중에는 아일랜드의 시인 찰스 도넬리와 레오 그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일랜드 시인 찰스 도넬리는 하라마 리버 밸리라는 하라마 강 전투에 대한 노래를 지었다.
하라마 전투는 양측 모두에게 막대한 피해를 남겼다. 국민군 약 2만 명, 공화국군 약 2만 5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된다. 전투는 결국 어느 한쪽의 결정적인 승리 없이 교착 상태에 빠졌고, 양측은 하라마 강 전선에 참호를 파고 정교한 방어 시스템을 구축하며 대치하게 되었다. 소스에 따르면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양측 모두 패배했다"고 평가된다.
한편, 국제 사회의 움직임도 있었다. 1937년 2월 22일, 국제 연맹의 불개입 위원회는 스페인 내전에 대한 외국인 지원병의 참전을 금지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4.3. 과달라하라 전투 (1937년 3월)
1937년 3월 9일, 베니토 무솔리니가 국민군(반란군) 지원을 위해 파견한 이탈리아군 4개 사단(리토리오 사단, "검은 셔츠" 사단, "검은 불꽃" 사단, "검은 화살" 사단)과 국민군 1개 사단, 모로코인 중심의 부대가 마드리드 북동쪽 80km 지점의 과달라하라를 공격했다.
이에 맞서 공화국 측의 엔리케 리스터 장군은 4개 사단으로 제4군단을 편성하여 과달라하라 외곽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다음 날인 3월 10일, 국제여단 소속의 가리발디 대대(이탈리아인 중심)를 선두로 한 공화국군은 진격 중이던 이탈리아군을 기습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가리발디 대대의 의용병들은 이탈리아어로 이탈리아 병사들에게 "우리는 가리발디 대대다"라고 외쳤고, 이에 많은 이탈리아 병사들이 투항했다. 또한 이탈리아군의 보급 부대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지원한 폴리카르포프 I-16 전투기와 투폴레프 SB 폭격기의 공중 공격을 받아 격퇴되었다.
이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은 2,000명의 전사자와 300명의 포로를 내고 다량의 문서를 남긴 채 후퇴했다. 다음 날 스페인 공화국 정부는 이탈리아가 스페인 내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사실을 국제 연맹에 공식 보고했다.
이 전투 이후 프랑코는 이탈리아군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 않았으며, 국민군은 마드리드 공략을 잠시 보류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마드리드는 내전이 끝날 무렵까지 공화국 정부의 통제 하에 남게 되었다.
4.4. 기타 전투
1937년 2월 6일, 말라가 함락 이후, 국민군은 마드리드 남쪽의 마드리드–안달루시아 도로를 공격했다. 국민군은 XV 국제여단이 지키고 있던 작은 마을인 시에포주엘로스로 빠르게 진격했다. XV 국제여단은 영국 대대(영연방 및 아일랜드인), 디미트로프 대대(다양한 발칸 반도 국적), 2월 6일 대대(벨기에 및 프랑스), 캐나다 매켄지-파피노 대대와 에이브러햄 링컨 여단으로 구성되었다. 이후 코놀리 대대로 알려진 독립적인 80명의 아일랜드 부대도 참전했다. 대대는 특정 국적으로만 구성되는 경우는 드물었고, 대부분 여러 국적이 혼합되어 있었다.
하라마 전투에서 국제여단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 1937년 2월 11일, 국민군 여단은 XIV 국제여단의 앙드레 마르티 대대를 기습 공격하여 초병들을 제거하고 하라마 강을 건넜다. 가리발디 대대는 맹렬한 사격으로 진격을 저지했으나, 다른 지점에서는 국민군이 같은 전술로 강을 건너는 데 성공했다. 2월 12일, XV 국제여단의 영국 대대는 집중 공격 대상이 되어 7시간 동안 격렬한 포화 속에 놓였고, 이 지역은 "자살 언덕"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날 전투 후 영국 대대 600명 중 225명만이 생존했다. 심지어 한 중대는 국민군이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접근하는 속임수에 넘어가 점령되기도 했다. 2월 17일 공화군이 반격을 시도했고, 2월 23일과 27일에도 국제여단이 교전에 참여했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특히 링컨 대대는 포병 지원 없이 큰 압박을 받아 120명이 사망하고 175명이 부상을 입었다. 사망자 중에는 아일랜드 시인 찰스 도넬리와 레오 그린도 포함되었다. 양측 모두 막대한 사상자를 냈고, "양측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양측 모두 패배했다"는 평가처럼 사실상 어느 쪽도 확실한 승리를 거두지 못한 채 전투는 교착 상태에 빠졌으며, 양측은 참호를 파고 정교한 참호 시스템을 구축했다. 전투 중인 1937년 2월 22일, 국제 연맹의 불개입 위원회는 외국인 지원병 참전을 금지하는 조치를 시행했다.
국제여단이 참여한 마지막 주요 전투 중 하나는 1938년 7월 25일부터 11월 말까지 이어진 에브로 전투였다. 이 전투가 한창이던 1938년 10월, 불개입 위원회는 국제 여단의 철수를 요구했다. 공화국 정부의 후안 네그린 총리는 국민주의자 측 외국 군대의 철수와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의 무기 금수 조치 해제를 유도하기 위해 1938년 9월 21일 국제 연맹에서 국제여단 해산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외교적 노력은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에브로 전투에서 공화군은 초반 공세를 펼쳤으나 프랑코 국민전선군의 대규모 반격에 밀려 큰 패배를 당했고, 이는 바르셀로나 방면 공화국 군대의 붕괴로 이어졌다. 철수 결정 당시 공화국 측에는 약 10,000명의 외국인 자원병이 있었던 것으로 추산되며, 국민주의자 측에는 약 50,000명의 외국인 징집병(모로코인 30,000명 제외)이 있었다. 국제여단원 중 상당수는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헝가리 등 권위주의적 우익 정부 치하의 국가 출신 망명자나 난민이었기에 안전하게 귀국할 수 없었다. 이들 중 일부는 명예 스페인 시민권을 받고 인민군 부대에 통합되었고, 나머지는 각자의 나라로 송환되었다. 벨기에와 네덜란드 출신 자원병들은 외국 군대 복무를 이유로 시민권을 박탈당하기도 했다.
5. 해산
1938년 9월 21일, 후안 네그린이 이끄는 스페인 제2공화국 정부는 국제여단의 해산을 공식적으로 명령했다. 당시 전황은 프랑코가 이끄는 반란군에게 유리하게 기울고 있었으며, 국제 연맹 역시 해산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또한, 스탈린 치하의 소비에트 연방도 나치 독일과의 복잡한 정치적 관계 속에서 국제여단의 철수를 지시했다. 공화국 정부의 이러한 결정은 프랑코 반란군을 지원하는 외국 세력(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등)의 철수를 유도하고, 영국, 프랑스 등 서방 민주주의 국가들이 공화국에 대한 무기 금수 조치를 해제하도록 설득하려는 외교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해산 결정 이후에도 약 1만 명의 의용병들은 스페인에 남아 공화국을 위해 종전까지 싸움을 이어갔다. 이들 중 절반 이상은 나치 독일, 파시스트 이탈리아, 헝가리 등 고국으로 돌아갈 경우 정치적 박해가 예상되는 파시즘 정권 하에 있던 국가 출신의 망명자 또는 난민들이었다. 이들에게는 스페인 시민권이 부여되었으며, 공화국 군인과 동일한 급료를 받으며 공화국 인민군 부대에 통합되었다.
6. 전후 상황
스페인 내전이 국민파의 승리로 끝나자, 국제여단 참전 용사들은 처음에는 역사적으로 "잘못된 편"에 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들의 모국 대부분이 우익 정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예를 들어 프랑스에서는 인민 전선 정부가 실각한 상태였다)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이 국가들 대부분이 곧 국민파를 지원했던 추축국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벌이게 되면서, 여단원들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수호자로서, 파시즘의 위험을 예견하고 이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로 인해 생존자 중 상당수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도 활약하며 약간의 영광을 누렸지만, 공산주의와 연관되어 있다는 인식 때문에 그 명성은 곧 희미해졌다.
전후 국제여단 전투원 중 일부는 각국에서 정치, 군사, 안보 분야의 고위직에 올랐다.
| 이름 | 주요 직책 | 국가 | 재임 기간 (참고) |
|---|---|---|---|
| 코차 포포비치 | 부통령 | 유고슬라비아 | 1966–1967 |
| 메흐메트 셰후 | 총리 | 알바니아 | 1954–1981 |
| 페렌츠 뮌니흐 | 총리 | 헝가리 | 1958–1961 |
| 하인리히 라우 | DWK 의장 | 동독 | 1948–1949 |
| 페트레 보릴라 | 부총리 | 루마니아 | 1954–1965 |
| 유게니우시 시르 | 부총리 | 폴란드 | 1959–1972 |
| 고구 러둘레스쿠 | 부총리 | 루마니아 | 1963–1979 |
| 피에트로 넨니 | 부총리 | 이탈리아 | 1963–1968 |
| 로드롤류브 촐라코비치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총리 | 유고슬라비아 | 1945-1948 |
| 카를로 루카노프 | 외무장관 | 불가리아 | 1956-1962 |
| 요세프 파벨 | 내무장관 | 체코슬로바키아 | 1968 |
| 게오르기 바실리치 | 장관 | 루마니아 | |
| 에르뇌 게뢰 | 내무장관 등 | 헝가리 | |
| 막스 바체 밀리치 | 장관 | 유고슬라비아 | |
| 에리히 밀케 | 국가보안부 장관 | 동독 | 1957-1989 |
| 하인츠 호프만 | 국민군 사령관 (국방장관) | 동독 | 1960-1985 |
| 프리드리히 디켈 | 내무장관 | 동독 | 1963-1989 |
| 루 리히트펠트 | 장관 | 수리남 (네덜란드령) | |
| 아르만도 페델리 | 상원의원 | 이탈리아 | 1948–1958 |
| 레몽 기요 | 상원의원 | 프랑스 | 1959–1977 |
| 오귀스트 르쾨르 | 하원의원 | 프랑스 | 1945-1955 |
| 아리스토데모 마니에라 | 하원의원 | 이탈리아 | 1948-1958 |
| 페르디난트 코조프스키 | 국회 의장 | 불가리아 | 1950–1965 |
| 잭 존스 | 일반 노동자 연맹 사무총장 | 영국 | 1969-1978 |
=== 국가별 상황 ===
==== 캐나다 ====
매켄지-파피노 대대 생존자들은 캐나다로 돌아온 후 종종 RCMP의 조사를 받았고, 취업이 거부되었다. 많은 "Mac-Pap" 참전 용사들이 제2차 세계 대전에 자원했지만, 일부는 공산주의적 배경 때문에 "정치적으로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었다.
1995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캐나다 군인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온타리오 주의사당 근처에 세워졌다. 2000년 2월 12일, 조각가 잭 하먼의 작품인 청동 조각상 "공화국의 정신"이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의사당 부지에 설치되었다. 2001년,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캐나다 참전 용사 중 생존자들은 오타와의 그린 아일랜드 공원에 자국의 국제여단 병사들을 기리는 기념비를 헌정했다.
==== 동독 ====
동독에서 국제여단 참전 용사들이 누린 명성은 다른 어떤 국가와도 비교하기 어려울 정도로 높았다. 1945년 이후, 그들은 모든 공산주의 국가에서 파시즘에 맞선 자유 투사로 칭송받았지만, 동독의 경우 다른 공산주의 국가들과 달리 내세울 만한 독자적인 저항 서사가 부족했기 때문에, 스페인 내전 투사들의 영웅담은 동독 건국 신화의 중심적인 요소가 되었다. 1950년대 초의 파벌 숙청은 체코슬로바키아 등에서보다 독일 참전 용사들(예: 프란츠 다렘, 빌헬름 자이서)에게 훨씬 덜 영향을 미쳤지만, 일부 여단원들은 스탈린주의 하에서 정치적 부침을 겪기도 했다.
다른 공산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국제여단 참전 용사들, 일반적으로 Spanienkämpfer독일어로 불리는 이들은 권력 구조에서 과도하게 대표되었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세 개의 군사 및 안보 요직을 차지했다: 하인츠 호프만은 국민군 사령관, 에리히 밀케는 국가보안부(슈타지) 수장, 프리드리히 디켈은 내무부 장관이었다. 많은 이들이 군대와 보안 분야에서 다른 주요 직책을 맡았으며, 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에도 10명의 전직 국제 여단원이 진입했다. 일부는 잠시 머물렀지만(예: 안톤 아커만, 다렘, 자이서), 일부는 수십 년 동안 활동했다(예: 파울 베르너, 쿠르트 하거, 알프레드 노이만). 수많은 전직 전투원들이 언론계에서도 높은 직책을 맡았다. 동독 정부에서 고위직에 오른 참전 용사들의 목록은 수백 명에 달한다.
국제 여단에 대한 독일의 참여는 동독 붕괴까지 동독의 이념적, 역사적 뼈대로 남아 있었다. 동독은 공식적으로 “국제 여단의 독일어 사용 부대가 미래 동독의 군대의 핵을 대표했다”고 인정했다. 루트비히 렌의 책은 표준 작품이 되었고 때로는 필독서가 되었다. 수많은 거리, 학교, 다리, 공장 및 군대 부대가 Spanienkämpfer독일어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고, 1968년에는 동베를린에 기념비가 헌정되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자원 봉사자들은 “국가 자체의 경직성을 반영하는 판지 인물”처럼 묘사되기도 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며칠 전인 1989년 11월 5일, 숙청되었던 참전 용사 발터 얀카는 도이체스 테아터에서 자신의 회고록을 낭독하는 공개 행사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이 행사는 라디오로 생중계되었고 나중에 텔레비전으로 방영되었다.
==== 체코슬로바키아 ====
대부분의 체코슬로바키아 의용군은 내전 후 프랑스에 남았다. 1939-40년에는 많은 사람들이 망명 정부가 모집한 군대에 입대했다. 이후 그들의 운명은 다양했다. 일부는 영국에서 모집된 체코슬로바키아 부대에서 복무했고, 일부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으며, 일부는 고국으로 돌아갔고, 일부는 강제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다.
재건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španěláci'로 알려진 국제여단원들은 참전 용사 권리를 부여받았다. 그들은 공산당(KSČ)이 통제하는 권력 구조(군대, 공공 질서, 안보, 정보)에서 과도하게 대표되었다. 요세프 파벨과 같은 일부는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를 실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보안 기관을 통제하는 핵심 인물인 '보안 5인'은 전직 국제여단원들로 구성되었다: 파벨, 호프만, 흐로마드코, 발레슈, [[:cs:Osvald Závodský|자보츠키]. 일부는 차관으로 승진했다(아르투르 런던, 두페크, 후셰크, 프란티셰크 크리에겔).
그러나 1950년대 초, 급격한 정치적 숙청의 물결이 전직 국제여단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거의 모든 사람이 직위를 잃었고 많은 사람이 혹독한 심문을 받았다. 블라스타 베셀라는 감옥에서 사망했으며, 고문 가능성이 제기된다. 1952년 오토 실링은 스파이 혐의로 처형되었다.
1956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 이후 정치적 변화에 따라 아직 수감 중이던 사람들은 석방되었고 점차 공공 행정에 재수용되었다. 1960년대는 체코슬로바키아 국제여단 전투원들에게 황금기로, 파시즘에 맞선 최초의 투사들이라고 칭송받았다. 일부(홀도슈, 크리에겔, 팔브라)는 언어 능력을 활용하여 쿠바 혁명 이후 쿠바의 고문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정치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 국제여단원들은 공산당 내 개혁주의 세력을 지지하는 경향이 있었다. 몇몇은 최고위직에 올랐는데, 예를 들어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크리에겔은 국민 전선 의장이 되었고, 파벨은 내무부 장관을 맡았다.
1968년 바르샤바 조약군의 침공은 또 다른 하락세를 가져왔다. 최고위직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해임되었지만, 이전과 같은 심한 탄압의 물결은 없었다. 일부는 사임했고(파벨, 홀도슈), 몇몇은 망명했으며(흐로마드코), 일부는 77 헌장 등 반체제 운동에 참여했다(크리에겔). 1989년 벨벳 혁명 이후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는 국제여단 참전 용사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있었지만, 결국 반파시스트 전투원이라는 이미지가 우세하게 자리 잡았다. 2016년 체코 국방부 장관 카렐 퀸은 마지막 생존 국제여단원들에게 기념 메달을 수여했다.
==== 폴란드 ====
1920년 법률에 따라, 국제여단에 자원한 폴란드 시민들은 공식적인 승인 없이 외국 군대에 복무했다는 이유로 자동으로 시민권을 박탈당했다. 공화파의 패배 이후,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모집된 전투원들은 그곳으로 돌아갔다. 다른 사람들은 독일 점령 하의 폴란드에서 친공산주의 유격대 부대에서 복무했고, 일부는 소련으로 가서 그곳에서 결성된 친공산주의 폴란드 군대에서 복무했다.
공산주의 폴란드에서 국제여단 전투원들은 - Dąbrowszczacy폴란드어(돔브로프스키 부대원)로 불리며 - 참전 용사 권리를 부여받았고, 자체 참전 용사 조직을 결성했다. 초기 전후 시대에 그들은 어느 정도 공식적인 칭송을 받았다. 이 집단은 스페인에서 국제여단 부대를 지휘했던 소련군 장성이자 폴란드 국방부 차관이었던 카롤 시비에르체프스키의 지원을 받았다. 일부는 고위 행정직을 맡았지만, 주로 군대와 안보 분야의 권력 구조에서 과도하게 대표되었다. 일부 부서는 군대의 방첩 부서와 같이 그들의 세력이 되었다. 1950년대 초의 숙청 기간 동안에는 정치적 음모 혐의로 투옥되는 경우도 있었으나, 1950년대 중반에 석방되었다.
폴란드에서 국제여단 참여는 "파시즘에 맞선 노동 계급의 무장 투쟁"으로 칭송받았지만, 가장 격렬한 우상화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Dąbrowszczacy폴란드어의 이름을 딴 출판물, 학교 및 거리 등이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반유대주의적인 흐름이 나타나면서 국제여단 자원봉사자들에 대한 관심이 다시 줄어들었고, 많은 유대계 참전 용사들이 폴란드를 떠났다. 공산주의 통치가 끝날 때까지 국제여단 관련 내용은 인정되었지만, 관련 선전은 전시 공산주의 유격대나 소련에서 양성된 폴란드 군대에 대한 경외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기념비는 세워지지 않았다. 동독과 달리, Szyr를 제외하고는 누구도 공산주의 엘리트의 최고위층(PZPR 정치국 위원, 장관)에 진입하지 못했다.
1989년 이후 Dąbrowszczacy폴란드어가 참전 용사 특권을 계속 누릴 자격이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또 다른 문제는 공공 장소에 존재하는 기념물에 관한 것이었다. 국영 기관인 IPN는 폴란드 국제여단 전투원들이 스탈린 정권에 복무했다는 점을 근거로 관련 기념물 철거 등을 주장했다. 그러나 공공 공간 정비의 효율성은 지역 정치 상황에 따라 다르며, 때때로 격렬한 논쟁이 벌어진다. 오늘날까지 폴란드 국제여단 전투원의 역할은 매우 분열적인 주제로 남아 있다. 일부에게는 반역자이고, 일부에게는 영웅이다.
==== 스위스 ====
스위스에서는 공화파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높았지만, 연방 정부는 스위스의 오랜 중립국 정책의 일환으로 전쟁 발발 한 달 만에 모든 모금 및 모집 활동을 금지했다. 약 800명의 스위스 자원병이 국제여단에 합류했으며, 그중 소수의 여성이 포함되었다. 스위스 자원병의 60%는 공산주의자였고, 나머지는 사회주의자, 아나키스트, 반파시스트였다.
약 170명의 스위스 자원병이 전쟁에서 사망했다. 생존자들은 스위스로 돌아와 외국 군 복무 금지 조항을 위반한 혐의로 군사법원의 재판을 받았다. 법원은 약 2주에서 4년의 징역형을 선고했으며, 종종 최대 5년 동안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기도 했다. 이는 형벌 기간이 만료된 후에도 오랫동안 사회적 낙인으로 이어졌다. 역사가 마우로 체루티에 따르면, 자원병들은 다른 민주 국가보다 스위스에서 더 가혹한 처벌을 받았다.
스위스 여단병들이 정당한 대의를 위해 싸웠다는 이유로 그들을 사면하자는 안건이 스위스 연방의회에 여러 번 제출되었다. 1939년 첫 제안은 중립성을 이유로 부결되었다. 2002년, 의회는 스위스 전쟁 자원병에 대한 사면을 다시 거부했다. 2009년 3월, 의회는 마침내 세 번째 사면 법안을 통과시켜 스위스 여단병들을 소급하여 복권시켰다. 당시 생존자는 소수에 불과했다.
2000년에는 스위스 국제여단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제네바에 세워졌으며, 취리히의 폴크하우스 등 다른 곳에도 수많은 현판이 설치되었다. 2003년부터 라쇼드퐁에는 "국제 여단 광장"이 있다. 스위스 자원병의 기억을 기리기 위해 설립된 단체인 IG 스파니엔프라이윌리게는 약 800명의 개인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했다.
==== 영국 ====
해산 당시 305명의 영국 자원병들이 스페인을 떠나 귀국했다. 그들은 12월 7일 런던 시내의 빅토리아 역에 도착했으며, 클레멘트 애틀리, 스태포드 크립스, 윌리 갤러처, 엘렌 윌킨슨 및 윌 로더를 포함한 지지자들의 환영을 받으며 영웅으로 귀환했다.
국제여단 기념 신탁(International Brigade Memorial Trust)은 영국과 아일랜드 출신 의용군을 기리는 활동을 관리하는 등록된 자선 단체이다. 이 단체는 스페인 내전 참전 의용군 기념비 지도를 관리하고, 매년 전쟁을 기념하는 행사를 조직한다.
국제여단의 마지막 생존 영국인인 제프리 서번트(Geoffrey Servante)는 2019년 4월 9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미국 ====
미국에서는 귀환한 지원병들이 FBI에 의해 "시기상조의 반파시스트"로 낙인 찍혔고,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군 복무 중 진급이 거부되었으며, 1947년부터 1957년까지의 적색 공포 기간 동안 의회 위원회에 의해 추적당했다. 시민권 상실 위협은 실행되지 않았다. 1950년대, 냉전이 심화되면서 조지프 매카시 상원 의원이 주도한 매카시즘 광풍 속에서 다수의 전 의용병이 투옥되거나 직장을 잃었다.
=== 비판 및 논란 ===
국제여단은 스탈린의 선전 도구로 이용되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폴란드 출신 유대인 병사 지그문트 스타인은 국제여단에 대해 "혁명이란 말에 담긴 이미지는 공산당의 최악의 거짓말 중 하나이며, 유례없는 사실의 왜곡이다"라고 지적했다.
국제여단에 잠시 참가했던 프랑스 철학자 시몬 베유는 일부 과격한 스탈린주의 의용병들이 파시스트로 간주한 시민들을 무분별하게 살해하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베유에 따르면, 살해 이유로는 파시스트 당원 경력 외에도 과거 POUM과 같은 반스탈린주의 좌파 민병대 소속 경력, 공화파 후퇴 시 동행 거부, 아나키스트 거부 등이 있었으며, 바르셀로나에서는 하룻밤 평균 50명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베유는 "의용병인 지식인들 중 다수는 살인과는 거리가 먼 점잖은 외모였지만, 사제나 파시스트를 몇 명이나 죽였는지를 식사 자리에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하고, 살인을 부추기는 일종의 도취 상태에 있었다"고 증언하며 이러한 경험으로 인해 정치 활동에서 멀어졌다.
또한, 소련이나 동유럽 국가에서도 많은 전직 의용병들이 [[
7. 기념
스페인 내전이 국민파의 승리로 끝난 후, 국제여단 참전 용사들은 처음에는 역사적으로 "잘못된 편"에 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특히 그들의 모국 대부분이 우익 정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들 국가 대부분이 곧 국민파를 지원했던 바로 그 세력(추축국)과 제2차 세계 대전을 벌이게 되면서, 여단원들은 민주주의의 첫 번째 수호자로서, 파시즘의 위험을 예견하고 이에 맞서 싸웠다는 점에서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재평가에도 불구하고, 공산주의와의 연관성 때문에 이들의 명성은 제한적인 측면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국제여단 참전 용사들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기념 사업이 이루어졌다.
1996년 1월 26일, 스페인 정부는 1938년 후안 네그린 총리가 약속했던 대로, 당시 생존해 있던 600여 명의 국제여단 병사들에게 스페인 시민권을 부여했다.
같은 해인 1996년,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인 르포르와 아상시(두 사람 모두 국제여단 자원병의 자녀였다)의 요청에 따라, 당시 프랑스 대통령이었던 자크 시라크가 국제여단에서 복무했던 프랑스인들에게 옛 참전 용사("고참 전투원")의 법적 지위를 부여했다. 이전에는 전 사회주의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을 포함하여 여러 차례 같은 요청이 거부된 바 있었다.
2009년 7월 9일 스페인 정부는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 국제여단의 에이브러험 링컨 여단에 복무하였던 미국인 생존자 25명에게 명예 시민증을 발급하였다.
세계 각국에는 국제여단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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