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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의 스리위자야 침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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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촐라의 스리위자야 침공은 11세기에 촐라 왕조가 동남아시아의 스리위자야를 공격한 사건이다. 이 침공은 당시 해상 강국이었던 스리위자야의 해상 패권을 종식시키고 동남아시아 지역의 세력 구도를 변화시켰다. 촐라의 공격은 스리위자야의 수도 팔렘방을 기습하여 약탈하고 주요 도시들을 파괴했으며, 스리위자야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로 인해 스리위자야는 자바의 카후리판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고, 촐라의 영향력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 촐라의 지배는 수십 년간 지속되었으며, 이 기간 동안 타밀인들은 말라카 해협을 식민화하고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촐라의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스리위자야는 멸망하고 지역 왕국들이 부상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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촐라의 스리위자야 침공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1030년경 라젠드라 촐라 1세의 영역
1030년경 라젠드라 촐라 1세의 영역
시기1025년–1026년
장소스리위자야(Srivijaya)의 수마트라(Sumatra) 팔렘방(Palembang)과 말레이 반도(Malay Peninsula) 케다(Kedah)
결과촐라 제국의 승리
결과 상세스리위자야 내 촐라의 영향력 확대
마하라자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의 생포
스리위자야 만달라 체제의 해체
교전 세력
교전국 1촐라 제국
교전국 2스리위자야
지휘관 및 지도자
촐라 제국라젠드라 1세
비마시난
아마라부장간 디바카라
카루나아카란
스리위자야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
사마라 비자야퉁가바르만
전력
촐라 제국촐라 해군
촐라 육군
스리위자야스리위자야 해군
스리위자야 육군
관련 전투
관련 전투라젠드라 1세의 동남아시아 원정

2. 배경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은 역사적으로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에, 촐라의 스리위자야 침공은 매우 이례적인 사건이었다.[39]

스리위자야는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 등 주요 해상 요충지를 통제하며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교역 제국이었다. 말라카 해협 북서쪽 입구는 말레이 반도의 케다와 수마트라섬의 판나이가 통제했고, 멜라유 왕국(잠비)과 팔렘방은 동남쪽 입구와 순다 해협을 통제했다. 스리위자야는 해상 무역 독점을 통해 자국 해역을 통과하는 선박에게 자국 항구 정박을 강요하거나 약탈의 위험을 감수하게 했다.[11]

촐라는 농업과 대외 무역에서 모두 이득을 얻었다. 촐라의 항해 활동은 때때로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해외 무역과 정복으로 이어졌다.[12]

촐라 해군 원정의 이유는 불분명하다. 역사학자 닐라칸타 사스트리는 스리위자야가 중국과의 촐라 무역을 방해하려 했거나, 라젠드라가 자신의 통치에 명성을 더하기 위해 ''디그비자야''(세계 정복)를 확장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16] 또 다른 이론은 크메르 제국의 수르야바르만 1세가 탐브랄링가 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라젠드라 촐라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탐브랄링가 왕국이 스리위자야 왕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등 지정학적 및 외교적 요인이 침공의 동기가 되었다고 가정한다.[13][14]

2. 1. 인도-동남아시아 관계

고대 인도와 동남아시아 지역은 대체로 우호적이고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해 왔으며, 촐라의 스리위자야 침공은 이례적인 사건이었다.[39] 9~10세기, 스리위자야는 벵골팔라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860년에 작성된 날란다 비문에는 스리위자야 마하라자 발라푸트라가 팔라 제국 날란다 마하비하라에 수도원을 헌정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라자라자 1세 통치 기간 동안 스리위자야와 촐라 왕조의 관계는 우호적이었다. 1006년, 샤일렌드라 출신 스리위자야 마하라자인 마라비자야퉁아바르만은 나가파티남 항구에 수도원 추다마니 비하라를 건설하였다.[32] 그러나 라젠드라 1세 통치기에는 스리위자야 침공으로 양국 관계는 악화되었다.[33]

2. 2. 촐라 제국의 팽창

9세기10세기스리위자야벵골팔라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기원 860년의 날란다 비문에는 스리위자야의 마하라자 발라푸트라가 팔라 영토에 있는 날란다 마하비하라에 수도원을 봉헌했다는 기록이 있다. 스리위자야와 남인도촐라 왕조 사이의 관계는 라자 라자 촐라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우호적이었다. 서기 1006년, 샤일렌드라 왕조 출신의 스리위자야 마하라자인 마라비자야퉁가바르만 왕은 나가파티남의 항구 도시에 추다마니 비하라를 건설했다.[9] 그러나 라젠드라 촐라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촐라가 스리위자야 도시를 공격하면서 관계가 악화되었다.[10]

촐라는 농업과 대외 무역 모두에서 이득을 얻었다. 촐라의 항해 활동은 때때로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해외 무역과 정복으로 이어졌다.[12]

촐라 해군 원정의 이유는 불분명하다. 역사가 닐라칸타 사스트리는 이 분쟁이 스리위자야가 특히 중국과의 촐라 무역을 방해하려 했거나, 라젠드라가 자신의 통치에 명성을 더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자신의 ''디그비자야''(세계 정복)를 확장하려는 열망에서 비롯되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16] 또 다른 이론은 지정학적 및 외교적 요인이 침공의 동기가 되었다고 가정한다. 크메르 제국의 수르야바르만 1세는 탐브랄링가 왕국에 대항하기 위해 라젠드라 촐라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3] 이에 탐브랄링가 왕국은 스리위자야 왕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에게 도움을 요청했다.[13][14]

2. 3. 스리비자야의 해상 패권

스리비자야는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이라는 주요 해상 요충지를 통제하며 강력한 해군력을 갖춘 교역 제국이었다. 말라카 해협의 북서쪽 해로는 말레이 반도 쪽의 케다와 수마트라섬 쪽의 판나이가 통제했고, 멜라유 왕국의 잠비팔렘방은 말라카 해협 동남부 해로와 순다 해협을 통제했다. 이들은 해상 무역을 독점하여, 이 수로를 통과하는 교역선은 항구를 방문하거나 약탈당해야 했다.[35]

3. 침공

촐라의 침공은 매우 신속하게 진행되어 스리위자야가 제대로 대비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11세기에 촐라 해군은 강력하게 성장했지만, 스리위자야의 해군력은 상대적으로 약화된 상태였다.[38] 촐라 함대는 인도양을 건넌 후 수마트라 서해안의 바루스 항구에서 보급을 받고, 남쪽으로 항해하여 순다 해협으로 진입했다.[24]

말라카 해협 북서쪽 입구를 방어하던 스리위자야 해군은 촐라 군대가 남쪽에서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촐라 군대는 수도 팔렘방을 기습 공격하여 약탈하고 왕궁과 사원을 파괴했다. 탄자부르 비문에는 라젠드라 1세가 상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 왕을 생포하고 스리위자야의 보물을 약탈했다는 기록이 있다.[39]

촐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여러 도시를 약탈했지만, 점령 지역을 통치하지는 않았다. 촐라 함대는 몬순을 이용해 빠르게 이동했고, 스리위자야는 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24][40] 결국 촐라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고 스리위자야는 해상 독점권을 잃었다.[36][37][41][42]

3. 1. 촐라의 기습 공격

촐라의 침공은 스리위자야가 대비하지 못할 만큼 신속하게 이루어졌다. 11세기에 촐라 해군은 강력했지만, 스리위자야의 해군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다.[38] 인도 선박들은 벵골만을 가로질러 아체의 람우리나 말레이반도의 케다 항구에 들른 후에 말라카 해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러나 촐라 해군은 수마트라 서안으로 곧바로 항해하였다. 수마트라 북부 서안에 위치한 바루스 항구는 당시 타밀 교역 조합에 속하였고, 인도양 항해가 끝난 이후 물자와 식량을 재공급하는 항구 역할을 하였다. 이후 촐라 해군은 수마트라 서안을 따라 남쪽으로 항해하였고 순다 해협으로 항해하였다.[24]

스리위자야 해군은 케다와 말라카 해협 북서부 입구 주변 지역을 보호하였고, 촐라 군대가 남쪽 순다 해협으로부터 올라온다는 것을 완전히 몰랐다. 최초로 약탈당한 스리위자야의 도시는 바로 수도인 팔렘방이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으로 인해 촐라 군대는 팔렘방을 약탈하였고, '카다투안(Kadatuan, 동남아시아 도서부에 있었던 준자치 도시국가)'의 왕궁과 수도원들을 약탈하였다. 타밀어로 된 탄자부르 비문에는 라젠드라 1세가 상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을 생포하였고, 스리비자야의 보석으로 치장된 화려한 개선문(war gate)인 비드야다라 토라나(Vidhyadara Torana) 등 엄청난 보물을 노획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39]

촐라 군대는 빨리 움직이면서 스리비자야의 도시들을 약탈했지만, 이들의 침공은 점령된 도시들에 대한 행정 지배로 이어지진 않았다. 촐라 함대는 동남아시아의 몬순을 타고 한 항구에서 다른 항구로 신속히 움직였던 것으로 보인다. 스리위자야의 만달라가 방어를 대비하거나 재조직하거나 원조를 제공하거나 보복하지 못하였다는 점에서, 신속한 이동으로 예상치 못한 공격을 가하는 전술은 촐라의 승리의 비밀이었을 수 있다.[24][40] 전쟁은 촐라의 승리로 끝났고 스리비자야는 대패하여 스리비자야의 해양 독점은 종결을 고하였다.[36][37][41][42]

3. 2. 주요 도시 약탈

촐라 군대는 스리비자야의 수도 팔렘방을 기습 공격하여 약탈했다. 이 과정에서 '카다투안(Kadatuan)'이라 불리는 왕궁과 수도원들이 파괴되었다.[39] 타밀어로 된 탄자부르 비문에 따르면, 촐라의 왕 라젠드라 1세는 상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 왕을 생포하고 스리비자야의 보석으로 장식된 개선문인 비드야다라 토라나(Vidhyadara Torana)를 포함한 막대한 양의 보물을 노획했다고 한다.[39]

촐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스리비자야의 여러 도시들을 약탈했지만, 점령한 도시를 영구적으로 지배하지는 않았다. 촐라 함대는 동남아시아의 몬순을 이용하여 빠르게 이동하며 약탈을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스리비자야의 만달라는 이러한 신속한 공격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방어, 지원, 보복을 위한 준비를 할 수 없었다.[24][40]

3. 3. 촐라의 전술

촐라 군대는 스리위자야가 대비할 틈을 주지 않고 매우 빠르게 공격했다. 11세기에 촐라 해군은 강해졌지만, 스리위자야의 해군은 약했다.[38] 촐라 해군은 인도양 항해가 끝난 후 보급을 위해 수마트라 북부 서안의 바루스 항구를 이용했다. 이후 수마트라 서안을 따라 남쪽으로 이동하여 순다 해협으로 들어갔다.[24]

스리위자야 해군은 케다와 말라카 해협 북서쪽 입구 주변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에, 촐라 군대가 남쪽 순다 해협에서 올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촐라 군대는 먼저 수도인 팔렘방을 공격하여 약탈하고 왕궁과 수도원을 파괴했다. 탄자부르 비문에는 라젠드라 1세가 상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 왕을 사로잡고, 스리위자야의 보석으로 장식된 개선문 등 많은 보물을 빼앗았다고 기록되어 있다.[39]

촐라 군대는 빠른 속도로 스리위자야의 도시들을 약탈했지만, 점령한 도시를 다스리지는 않았다. 촐라 함대는 동남아시아의 몬순을 이용하여 빠르게 이동한 것으로 보인다. 스리위자야의 만달라는 방어 준비, 지원, 보복 등을 할 시간이 없었다. 이러한 빠른 기습 공격이 촐라의 승리 비결이었다.[24][40] 이 전쟁은 촐라의 승리로 끝났고, 스리위자야는 크게 약화되어 해상 독점권을 잃었다.[36][37][41][42]

4. 결과

촐라의 침공과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의 체포, 그리고 주요 도시들의 파괴는 스리위자야를 혼란과 무질서의 상태로 몰아넣었으며, 사일렌드라 왕조의 몰락을 가져왔다. 15세기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1025년의 원정 이후 라젠드라 1세는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의 딸인 오낭 키우와 결혼하였다.[43][44]

이 침공으로 인해 스리위자야는 카후리판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 평화 협상은 팔렘방의 함락에서 벗어나 아이를랑가의 궁정으로 피신한 스리위자야의 공주이자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의 딸에 의해 중재되었다. 그녀는 아이를랑가의 왕비가 되어 다르마프라사도퉁가데비라는 이름을 얻었고, 1035년 아이를랑가는 그녀를 위해 스리위자야스라마라는 불교 사찰을 건립하였다.[40]

촐라의 침공은 스리위자야의 해상 패권을 약화시켰고, 카후리판 왕국과 케디리 왕국과 같은 농업 기반의 지역 왕국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스리 데바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여 교역을 재개하였고, 1028년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40] 1028년에서 1077년 사이에 스리위자야의 사절단이 중국을 방문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스리위자야 만달라의 쇠퇴를 보여준다. 1025년은 스리위자야가 멸망한 해로 추정된다.[45] 12세기에 중국 문헌에 여전히 '삼불제(三佛齊)'가 등장하지만, 이는 멜라유 왕국을 지칭하는 것으로 '삼불제점비국(三佛齊占卑國)'으로 표기되었다. 스리위자야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1030년 또는 1031년에 세워진 촐라의 탄조르 비문에서 발견된다.[46]

촐라의 스리위자야 지배는 수십 년간 지속되었다. 중국 문헌에는 '삼불제주련국(三佛齊注輦國)'이 언급되는데, 이는 케다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삼불제주련국'은 1077년, 1079년, 1082년, 1088년, 1090년에 중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촐라는 타밀족이 지배하는 말라카 해협 지역에 왕세자를 두었던 것으로 추정된다.[46]

타밀족의 말라카 해협 식민화는 한 세기 동안 지속된 것으로 보인다. 촐라는 수마트라 북부와 말레이 반도에 여러 비문을 남겼다. 타밀족의 영향은 조각이나 불교 건축과 같은 예술 작품에서 발견되며, 이는 상업 활동보다는 정부 활동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수마트라 북부와 말레이 반도에 대한 촐라의 지배력은 12세기에 약화되었으며, 1120년경에 쓰여진 타밀 시 칼링아투파라니에는 쿨로퉁가 1세가 카다람(케다)을 파괴했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후 케다는 인도 문헌에서 사라졌다.[46]

4. 1. 스리비자야의 쇠퇴

촐라의 스리위자야 침공으로 마하라자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이 체포되고 수도를 포함한 주요 도시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지도자를 잃은 스리위자야는 혼란에 빠졌다. 이는 사일렌드라 왕조의 종말을 초래했다. 15세기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1025년 원정에 성공한 후 라젠드라 1세는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의 딸 오낭 키우(Onang Kiu)와 결혼했다.[43][44] 이 침공으로 스리위자야는 자바의 카후리판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평화 협상은 팔렘방의 함락과 파괴에서 간신히 도망쳐 동자바의 아이를랑가 왕의 궁정으로 피신한 스리위자야 공주이자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의 딸이 중재했다. 그녀는 다르마프라사도퉁가데비(Dharmaprasadottungadevi)라는 이름으로 아이를랑가의 왕비가 되었고, 1035년 아이를랑가는 스리비자야스라마(Srivijayasrama)라는 불교 사찰을 지어 왕비에게 헌사하였다.[40]

촐라의 침공은 스리위자야의 해상 패권을 크게 약화시켜, 카후리판 왕국과 그 계승 국가인 케디리 왕국 등 농업 기반의 지역 왕국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스리 데바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여 교역 활동을 이어갔으며, 1028년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40] 그러나 1028년 '삼불제(三佛齊)'가 중국에 사신을 보낸 것은 팔렘방을 수도로 한 스리위자야가 아니라, 잠비(Jambi)를 수도로 한 멜라유 왕국이었다.[46] 1028년에서 1077년 사이에 스리위자야 사절단이 중국에 오지 않은 것은 스리위자야가 쇠퇴했음을 의미한다. 1025년에 스리위자야가 멸망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45] 12세기 중국 문헌에는 여전히 삼불제(三佛齊)가 등장하지만, 이는 멜라유 왕국을 의미하며, 삼불제점비국(三佛齊占卑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스리위자야(Sriwijaya) 혹은 스리비자야(Srivijaya)에 대한 언급은 1030년 혹은 1031년에 세워진 촐라의 탄조르(Tanjore) 비문이 마지막이다.[46]

촐라의 스리위자야 지배는 수십 년 동안 이어졌다. 중국 문헌에는 '삼불제주련국(三佛齊注輦國)'이 언급되는데, 이는 케다를 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삼불제주련국은 1077년, 1079년, 1082년, 1088년, 1090년에 중국에 사절단을 보냈다. 촐라는 타밀인이 지배하는 말라카 해협에 왕세자를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46]

타밀인의 말라카 해협 식민화는 한 세기 동안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촐라는 수마트라 북부와 말레이 반도에 여러 비문을 남겼다. 타밀족의 영향은 조각이나 불교 건축 등 예술 작품에서 발견될 수 있으며, 상업보다는 정부 활동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수마트라 북부와 말레이 반도에 대한 촐라의 통제는 12세기에 약화되었으며, 1120년경에 지어진 타밀인의 시 칼링아투파라니(Kalingatupparani)에는 쿨로퉁가가 카다람(Kadaram), 즉 케다를 파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케다는 인도 문헌에서 사라졌다.[46]

4. 2. 지역 왕국들의 부상

촐라의 침공으로 스리위자야의 힘이 약해지면서, 카후리판 왕국과 그 뒤를 이은 케디리 왕국처럼 농업을 기반으로 하는 지역 왕국들이 성장하게 되었다.[40] 스리 데바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여 교역을 이어갔고, 1028년에는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40]

4. 3. 스리비자야 이후

촐라의 침공으로 사일렌드라 왕조가 몰락하고 지도자가 사라진 스리위자야는 혼란에 빠졌다. 15세기 말레이 연대기에 따르면, 1025년 원정에 성공한 라젠드라 촐라 1세는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의 딸 오낭 키우와 결혼했다.[43][44] 이 침공으로 스리위자야는 자바의 카후리판 왕국과 평화 조약을 맺어야 했다. 상그라마 비자야퉁가바르만의 딸이자 스리위자야의 공주가 평화 협상을 중개했고, 아이를랑가의 왕비가 되어 다르마프라사도퉁가데비로 불렸다. 1035년, 아이를랑가는 왕비를 위해 스리위자야스라마라는 불교 사찰을 지었다.[40]

촐라의 침공은 스리위자야의 힘을 약화시켜, 카후리판 왕국과 케디리 왕국처럼 농업 중심의 지역 왕국들이 성장하게 했다. 스리 데바가 새로운 왕으로 즉위하여 교역을 재개하고 1028년 중국에 사신을 보냈다.[40] 그러나 1028년 중국에 사신을 보낸 '삼불제(三佛齊)'는 팔렘방의 스리위자야가 아니라 잠비의 멜라유 왕국이었다.[46] 1028년부터 1977년까지 스리위자야는 중국에 사절단을 보내지 않아, 스리위자야의 만달라가 사라졌음을 알 수 있다. 1025년에 스리위자야는 멸망한 것으로 보인다.[45] 12세기 중국 문헌에 나오는 '삼불제'는 멜라유 왕국을 가리키며, '삼불제점비국(三佛齊占卑國)'으로 표기되어 있다. 스리위자야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1030년 또는 1031년 촐라의 탄조르 비문에 나타난다.[46]

라젠드라 1세가 스리위자야에 불교 사원을 건립하는데 필요한 세입 징수를 선언한 헌장

5. 촐라의 지배와 영향



촐라는 수십 년 동안 스리위자야를 지배했다.[46] 중국 문헌에 등장하는 '삼불제주련국(三佛齊注輦國)'은 케다를 가리키며, 1077년부터 1090년까지 여러 차례 중국에 사절단을 보낸 기록에서 촐라의 영향력을 확인할 수 있다.[46] 촐라는 말라카 해협 지역에 타밀인 통치자를 임명하여 영향력을 유지하려 했다.[46]

타밀인의 영향은 한 세기 동안 지속되었으며, 조각, 불교 건축 등 예술 분야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46] 이는 단순한 상업적 교류를 넘어선 정부 차원의 활동이었다. 그러나 12세기경 촐라의 통제력은 약화되었고, 1120년경 타밀 문헌 칼링아투파라니(Kalingatupparani)에는 쿨로퉁가 1세가 카다람(케다)을 파괴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케다는 인도 문헌에서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46]

참조

[1] 서적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https://books.google[...] Editions Didier Millet
[2] 간행물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3] 간행물 Trade and Trade Routes in Ancient India
[4] 간행물 Buddhism, Diplomacy, and Trade: The Realignment of Sino-Indian Relations 600-1400
[5] 간행물 Power and Plenty: Trade, War, and the World Economy in the Second Millennium
[6] 간행물 "Al-Hind: The Making of the Indo-Islamic World, Vol. I, Early Medieval India and the Expansion of Islam: 7th-11th centuries"
[7] 간행물 Ancient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8] 간행물 Atisa and Tibet: Life and Works of Dipamkara Srijnana
[9] 서적 The CōĻas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Madras
[10] 간행물 Power and Plenty: Trade, War, and the World Economy in the Second Millennium
[11] 논문 State formation and the evolution of naval strategies in the Melaka Straits, c. 500-1500 CE 2013-10
[12] 서적 Societies, Networks, and Transitions: A Global History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06-12-27
[13] 논문 Khmer Commercial Development and Foreign Contacts under Sūryavarman I Brill Publishers 1975-10
[14] 논문 The Overseas Expeditions of King Rājendra Cola Artibus Asiae Publishers 1961
[15] 논문 State formation and the evolution of naval strategies in the Melaka Straits, c. 500-1500 CE https://www.jstor.or[...] 2013
[16] 서적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https://books.google[...]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17] 서적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https://books.google[...] Editions Didier Millet
[18] 간행물 Southeast Asia: Past and Present
[19] 간행물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20] 간행물 Buddhism, Diplomacy, and Trade: The Realignment of Sino-Indian Relations
[21] 간행물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22] 서적 Singapore and the Silk Road of the Sea, 1300-1800 NUS Press
[23] 서적 Ancient Southeast Asia Routledge 2017
[24] 서적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https://books.google[...] Editions Didier Millet
[25] 간행물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26] 간행물 Trade and Trade Routes in Ancient India
[27] 간행물 Buddhism, Diplomacy, and Trade: The Realignment of Sino-Indian Relations 600-1400
[28] 간행물 Power and Plenty: Trade, War, and the World Economy in the Second Millennium
[29] 간행물 "Al-Hind: The Making of the Indo-Islamic World, Vol. I, Early Medieval India and the Expansion of Islam: 7th-11th centuries"
[30] 간행물 Ancient Indian History and Civilization
[31] 간행물 Atisa and Tibet: Life and Works of Dipamkara Srijnana
[32] 서적 The CōĻas https://archive.org/[...] University of Madras
[33] 간행물 Power and Plenty: Trade, War, and the World Economy in the Second Millennium
[34] 서적 Societies, Networks, and Transitions: A Global History https://books.google[...] Cengage Learning 2006-12-27
[35] 논문 State formation and the evolution of naval strategies in the Melaka Straits, c. 500-1500 CE 2013-10
[36] 논문 Khmer Commercial Development and Foreign Contacts under Sūryavarman I Brill Publishers 1975-10
[37] 논문 The Overseas Expeditions of King Rājendra Cola Artibus Asiae Publishers 1961
[38] 저널 State formation and the evolution of naval strategies in the Melaka Straits, c. 500-1500 CE https://www.jstor.or[...] 2013
[39] 서적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Chola Naval Expeditions to Southeast Asia https://books.google[...]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2009 2012-04-23
[40] 서적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https://books.google[...] Editions Didier Millet
[41] 서적 Southeast Asia: Past and Present
[42] 서적 Early kingdoms of the Indonesian archipelago and the Malay Peninsula
[43] 서적 Buddhism, Diplomacy, and Trade: The Realignment of Sino-Indian Relations
[44] 서적 Nagapattinam to Suvarnadwipa: Reflections on the Chola Naval Expeditions to
[45] 서적 Singapore and the Silk Road of the Sea, 1300-1800 NUS Press
[46] 서적 Ancient Southeast Asia Routledge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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