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리위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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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스리위자야는 7세기부터 13세기까지 존재했던 동남아시아의 해상 제국이다.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된 이름으로 "빛나는 승리"를 의미하며, 현재 인도네시아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수마트라, 자바 서부, 말레이 반도 일대를 장악했다. 7세기 당나라 승려 의정의 기록과 석비문, 중국 및 아랍 기록 등을 통해 존재가 확인되며, 팔렘방을 수도로 추정한다. 스리위자야는 해상 무역을 통해 번영하며, 대승 불교의 중심지로서 문화적, 종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11세기 촐라 왕조의 침공과 13세기 싱하사리 왕국 및 마자파히트 왕국과의 갈등을 겪으며 쇠퇴했다. 오늘날 인도네시아에서는 국가적 자부심과 지역 정체성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다양한 문화적 유산과 지명에 그 흔적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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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리위자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 |
|---|---|
| 지도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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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공식 명칭 | 카다투안 스리위자야 |
| 일반 명칭 | 스리위자야 |
| 위치 | 수마트라 섬 |
| 수도 | 팔렘방 |
| 공용어 | 고대 말레이어, 산스크리트어 |
| 종교 | 불교, 힌두교 |
| 정부 형태 | 군주제, 만달라 국가 |
| 역사 | |
| 성립 | 기원전 671년경 |
| 건국 사건 | 다푼타 히앙의 원정과 확장 (크두칸 부킷 비문) |
| 멸망 | 1025년 |
| 멸망 사건 | 촐라의 스리위자야 침공 |
| 이전 | 칸톨리 |
| 이후 | 믈라유 왕국 |
| 통치자 | |
| 칭호 | 마하라자 |
| 다푼타 히앙 스리 자야나사 | 기원전 683년경 |
| 다르마세투 | 775년경 |
| 사마라퉁가 | 792년경 |
| 발라푸트라 | 835년경 |
| 스리 쿠다마니 와르마데와 | 988년경 |
| 경제 | |
| 통화 | 초기 누산타라 동전 |
| 기타 | |
| 관련 항목 | 인도네시아의 역사 싱가포르의 역사 말레이시아의 역사 태국의 역사 |
2. 어원
'''스리비자야'''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한 이름으로, श्रीविजय|Śrīvijayasa이다. ''Śrī''[10]는 "운이 좋은", "번영하는", 또는 "행복한"을 의미하며, 힌두교에서는 신성과 관련된 의미도 지닌다. ''Vijaya''[11]는 "승리하는" 또는 "탁월함"을 의미한다.[12] 따라서 ''Srivijaya''라는 합성어는 "빛나는 승리",[13] "찬란한 승리", "번영하는 승리자", "탁월함의 광채" 또는 간단히 "영광스러운" 등으로 해석될 수 있다.
케두칸 부킷 비석(서기 683년)에 따르면, 스리위자야는 오늘날 팔렘방 부근, 무시 강 유역에 처음으로 건설되었다. 이 비석에는 다푼타 햐엉 스리 자야나사가 '미낭가 탐완'이라는 곳에서 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장소의 정확한 위치는 여전히 논의 중이다. 프랑스 학자 조르주 세데스(George Cœdès)는 스리위자야의 초기 중심지가 팔렘방이라고 주장했고, 피에르-이브 망갱(Pierre-Yves Manguin)도 이를 지지했다. 반면 인도네시아 학자 수크모노(Soekmono)는 팔렘방이 수도가 아니었다고 반박하며, 무아라 타쿠스 사원이 있는 리아우의 캄파르 강 유역을 미낭가 탐완으로 제시한다.[25] 그러나 최근 연구에서는 미낭가 탐완이 남수마트라주 동 오간 코메링 울루 군 쳄파카 지역 미낭가 마을 상류의 코메링 강 유역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26] 코메링 강은 무시 강의 지류이며, 두 강은 팔렘방에서 합류한다.
수마트라에는 425년경까지 불교가 전래되었으며, 이는 이후 스리위자야 문화의 토대가 되었다. 스리위자야의 기원에 대해서는 메콩 삼각주의 푸난 왕국 세력이 이주하여 건국했다는 설 등이 있으며, 670년경 '실리불세(室利佛逝)'라는 이름으로 당과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후 송대 기록에는 '삼불제(三佛齊)'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데, 이는 잠비, 케다, 차이야 등 여러 세력의 연합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20세기 초, 수마트라와 인근 섬들의 비문을 연구한 역사가들은 "스리비자야"라는 용어를 특정 왕의 이름으로 생각했다. 1913년, 금석학자인 H. 케른은 7세기 코타 카푸르 비문(1892년 발견)에 쓰여진 "스리비자야"라는 이름을 처음 확인했다. 그러나 당시 그는 이것이 왕이나 통치자에 대한 존칭인 "스리"를 붙인 "비자야"라는 왕의 이름일 것이라고 추정했다.[14]
또한, 16세기 후반 서자바에서 편찬된 순다어 필사본 차리타 파라햐응안에는 "상 스리 위자야"라는 이름이 언급된다. 이 필사본은 자바에서 통치권을 확보한 산자야 왕자가 말라유와 켈링의 왕 상 스리 위자야와 전투를 벌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15]
이후 현지 석비문, 필사본 및 중국어 역사 기록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면서, 역사가들은 "스리비자야"라는 용어가 특정 왕의 이름이 아니라 정치 체제 또는 왕국 자체를 가리킨다는 결론에 도달했다.[16] 1920년대에는 프랑스 역사학자 조르주 세데스가 『신당서』에 한문으로 "실리불사(室利仏逝)"라고 기록된 국가가 고대 말레이어 비문에 나오는 스리비자야(Sribhoja)일 가능성을 제기하면서 관련 연구가 더욱 진전되었다. 한문 기록에서 "실리불사"는 670년대부터 741년까지 당에 조공한 국가로 나타난다.
3. 역사 기록

스리위자야에 대한 직접적인 고고학적 증거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17] 심지어 왕국이 위치했던 팔렘방 주변 지역에서조차 스리위자야의 역사는 오랫동안 잊혀 있었으며, 이는 주로 외국 학자들의 연구를 통해 다시 알려지게 되었다. 1920년대 프랑스 학자 조르주 꼬데(George Cœdès)가 중국 기록의 '산포치'(Sanfoqi, 三佛齊)와 구말레이어 비문들이 동일한 제국, 즉 '스리보자'(Sribhoja) 또는 '스리보가'(Sribogha)를 지칭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기 전까지는 인도네시아 현지에서도 스리위자야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름이었다.[18][19]
스리위자야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데 사용되는 주요 자료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중국의 역사 기록이며, 다른 하나는 동남아시아 각지에서 발견되어 해독된 여러 비문이다. 특히 7세기 당나라의 승려 의정(Yijing, 義淨)이 671년 스리위자야에 6개월간 머물며 남긴 기록은 당시 왕국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한다. 또한 팔렘방과 방카 섬 등지에서 발견된 7세기의 '시다야트라'(siddhayatra) 비문들 역시 핵심적인 1차 사료로 평가받는다. 이 외에도 자바의 '자바그 왕국'(Zabag kingdom) 전설과 같은 지역 설화나, 인도 및 아랍 문헌에 나타나는 '자바그' 또는 '스리부자'(Sribuza)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들도 스리위자야의 역사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73]
스리위자야 관련 비문들은 대부분 팔라바 문자를 사용한 구말레이어로 작성되었으며, 대표적인 것으로는 케두칸 부킷 비문, 탈랑 투오 비문, 텔라가 바투 비문(Telaga Batu inscription), 코타 카푸르 비문(Kota Kapur inscription) 등이 있다.[20] 이 비문들은 스리위자야의 건국 과정, 영토 확장, 종교(주로 대승불교), 정치 체제, 왕의 업적 등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담고 있다. 예를 들어, 케두칸 부킷 비문은 682년(또는 683년) 다푼타 히양 스리 자야나사(Dapunta Hyang Sri Jayanasa) 왕이 원정을 통해 승리하고 도시를 건설했음을 기념하는 내용을 담고 있으며, 이는 스리위자야의 초기 팽창 과정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이다. 탈랑 투오 비문은 자야나사 왕이 백성들의 복지를 위해 공원을 조성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말레이 반도 중부의 나콘시탐마랏에서 발견된 775년의 산스크리트어 리골 비문(Ligor inscription)은 '샤일렌드라 왕조의 스리위자야 왕'인 비슈누(Vishnu)가 세 개의 사원을 건립했다는 기록을 남겨, 샤일렌드라 왕조와의 관계를 시사한다.
의정은 인도로 불법을 구하러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 모두 스리위자야에 장기간 머물렀다. 그는 671년 광저우를 떠나 20일 만에 '실리불서'(室利佛逝, 스리위자야)에 도착하여 반년 동안 산스크리트어 음운론을 공부했다. 이후 '마라유'(摩羅遊, Melayu, 현재의 잠비 지역 또는 말레이 반도 남부로 추정)와 '갈다'(羯荼, Kedah)를 거쳐 인도로 향했다. 687년 귀국길에 다시 갈다를 거쳐 마라유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스리위자야의 영토가 되어 있었다고 기록했다. 이는 케두칸 부킷 비문의 내용과도 일치하며, 스리위자야가 말라카 해협 일대를 장악했음을 보여준다. 의정은 695년까지 스리위자야에 머물며 불경 번역에 힘쓰고, 『대당서역구법고승전』과 『남해기귀내법전』이라는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스리위자야에는 1,000명이 넘는 승려가 있었고, 불교 연구와 수행 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어 인도의 나란다 승원과 견줄 만한 대승불교 학문의 중심지였다.
스리위자야는 여러 지역과 시대에 걸쳐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기 때문에 역사 연구에 혼란을 주기도 했다.[22] 중국 기록에서는 '산포치'(三佛齊, Sanfotsi/Sanfoqi), '실리불서'(室利佛逝, Shilifoshi/Che-li-fo-che), 또는 그 이전 왕국으로 추정되는 '간타리'(干陀利, Kantoli) 등으로 나타난다.[22][23] 아랍인들은 '자박'(Zabag) 또는 '스리부자'(Sribuza)라고 불렀으며,[22] 크메르인들은 '믈라유'(Melayu)라고 칭했다. 자바인들은 '수와르나부미'(Suvarnabhumi, 황금의 땅) 또는 '수와르나드위파'(Suvarnadvipa, 황금의 섬), '믈라유'(Melayu/Malayu) 등으로 불렀다.[22] 이러한 다양한 명칭은 스리위자야의 광범위한 영향력과 교류 관계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실체를 파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 요인이었다.[24]
20세기에 들어 인도네시아의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네덜란드령 동인도라는 식민 지배 이전에도 자바의 마자파히트 제국과 더불어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제국이 존재했음을 강조하며, 통일된 인도네시아 정체성의 역사적 근거로 삼기도 했다.[18][21]
4. 수도

케두칸 부킷 비석 외에도, 20세기 이후 팔렘방 서쪽 지역에서 진행된 고고학 조사를 통해 많은 유물이 발견되었다. 다량의 중국 도자기, 인도식 회전문양 토기 유적, 부킷 세군탕 언덕의 스투파 유적 등이 발굴되었고, 무시 강 유역에서는 상당수의 힌두-불교 조각상도 발견되었다. 이러한 발견들은 팔렘방이 스리위자야의 중심지였음을 뒷받침한다.[28]
하지만 팔렘방에서는 고대 도시 정착지의 뚜렷한 고고학적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는 무시 강에 자주 침수되는 저지대 평야라는 팔렘방의 환경적 특성 때문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고대 팔렘방 정착지가 나무, 대나무, 짚과 같은 재료로 지어진 수상 가옥들의 집합체였을 것으로 본다. 13세기 중국 문헌인 저우루거(Zhao Rukuo)의 ''주번지''(Zhu Fan Zhi)에도 "삼포지(Sanfo-tsi, 스리위자야) 주민들은 도시 밖 물 위에 갈대를 엮은 뗏목 안에 흩어져 살고 있다"는 기록이 있어 이를 뒷받침한다. 아마도 왕궁(케다투안)과 종교 시설만 육지에 세워지고, 일반 주민들은 무시 강을 따라 수상 가옥에 거주했을 가능성이 높다.[29]
팔렘방이 스리위자야의 중심지였다는 설은 고고학적 증거 부족으로 인해 논란의 여지가 있다. 700년경부터 도시와 같은 정착지를 언급하는 중국 자료와 10~11세기 아랍 여행자들의 기록은 스리위자야 왕국을 명확히 언급하지만, 팔렘방 현지에서의 고고학적 증거는 부족하다. 1975년 베넷 브론슨(Bennet Bronson)과 얀 위세만(Jan Wisseman)은 게딩 수로, 페냐링간 아일 베르시, 사랑 와티, 부킷 세군탕 등 주요 발굴지 조사 결과, 2천년기 중반 이전의 정착지 증거를 찾지 못했다고 발표했다.
이러한 증거 부족의 이유로는 과거 고고학 연구가 예술품과 비문에 집중했던 점, 그리고 정착지 자체의 물리적 흔적이 희미하다는 점이 꼽힌다. 특히 동남아시아 남부 지역의 도시 형태는 중국 중심의 모델과 달라, 배후지가 부족하고 임시적인 주거 형태를 띠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고고학적 가시성이 낮다는 것이다.[30]
이에 베넷 브론슨은 1977년, 섬 동남아시아, 즉 섬과 말레이 반도, 필리핀, 그리고 서부 인도네시아의 해안 지향 국가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추측 모델을 개발했다. 주요 초점은 정치적, 경제적, 지리적 시스템의 관계였다. 이 지역의 일반적인 정치적, 경제적 패턴은 당시 세계 다른 지역과는 무관해 보이지만, 해상 무역 네트워크와의 상관관계에서 높은 수준의 사회경제적 복잡성을 만들어냈다. 그는 1974년 초기 출판물에서 이 지역의 국가 발전은 초기 동남아시아의 다른 지역과는 매우 다르게 발전했다는 결론을 내렸다. 브론슨의 모델은 배수 분지의 수지상 패턴을 기반으로 하며, 그 개방부는 바다로 이어진다. 역사적 증거가 수도를 팔렘방에, 그리고 무시 강, 코메링 강, 오간 강이라는 세 개의 강의 합류 지점에 위치시키므로, 이러한 모델을 적용할 수 있다. 시스템이 적절하게 기능하려면 여러 제약 조건이 필요하다. 육상 운송의 불가능으로 인해 모든 상품의 이동이 수로를 통해 이루어지며, 하천이 형성하는 수지상 패턴과 경제적 패턴이 일치한다. 두 번째는 해외 중심지가 강 어귀에 있는 항구보다 경제적으로 우수하며, 인구 밀도가 더 높고 생산성이 더 높고 기술적으로 더 발전된 경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육지에 대한 제약은 도시 정착지의 발전을 저해한다.[31]
1984년 팔렘방 근처(현재 스리위자야 고고학 공원 지역)에서 촬영된 항공 사진은 고대 인공 운하, 해자, 연못, 인공 섬의 잔해를 보여주어 스리위자야 도시 중심지의 존재 가능성을 높였다. 이 지역에서는 비문 조각, 불교 조각상, 구슬, 도자기, 중국 도자기와 같은 여러 유물이 발견되어 이 지역이 한때 인구 밀도가 높았음을 확인해 준다.[32] 1993년까지 피에르-이브 망갱은 스리위자야의 중심지가 부킷 세군탕과 사보킹킹(현재 인도네시아 남수마트라 팔렘방에 위치) 사이의 무시 강을 따라 있었음을 보여주었다.[12] 팔렘방은 巨港|거항중국어이라고 불리는데, 이는 아마도 한때 위대한 항구였던 역사를 증명하는 것일 것이다.
2021년에 현지 어부들이 보물 사냥꾼으로 변하여 무시 강의 얕은 곳과 강바닥에서 많은 보물이 발견되었다.[33] 이 보물에는 특정 시대의 동전, 금 장신구, 불교 조각상, 보석, 다채로운 구슬 및 중국 도자기 조각이 포함된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제대로 연구하기 전에 현지 보물 사냥꾼들이 국제 골동품상에게 팔아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보물은 즉시 사라졌다.[34] 이러한 발견으로 2021년 무시 강에서 보물 사냥이 벌어졌고, 현지 주민들은 팔렘방과 그 주변의 무시 강 일부 지역에서 활동하는 보물 사냥꾼 그룹을 결성했다.[35] 이러한 보물들은 팔렘방이 실제로 스리위자야의 상업 중심지였음을 확인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5. 역사
스리위자야의 중심지가 어디였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전통적으로 팔렘방이 유력했으나, 최근 잠비의 무아로잠비 사원 유적에서 대규모 유적이 발견되면서 이곳이 초기 중심지였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36][37] 무아로잠비 유적은 12km2에 달하는 광대한 불교 유적으로[38][39], 스리위자야가 중요한 불교 학습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 일부 학자들은 의정 등의 기록과 고고학적 증거를 바탕으로 무아로잠비가 수도로서 더 적합한 환경이었다고 주장한다.[36]
7세기 후반 다푼타 히양 스리 자야나사 왕의 정복 활동으로 스리위자야는 수마트라 남부와 자와 일부까지 세력을 확장하며 빠르게 성장했다. 이 시기 당의 승려 의정이 방문하여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7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스리위자야는 말라카 해협을 중심으로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자와의 샤일렌드라 왕조와 교류하며 대승불교 문화를 융성시키는 황금기를 누렸다.
그러나 10세기 이후 자와의 왕조들과의 경쟁이 심화되어 전쟁으로 이어졌다. 11세기 초에는 남인도 촐라 왕조의 대규모 침공(1017년, 1025년)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등 큰 타격을 입고 국력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했다.[20][61][123][63] 이 침공 이후 스리위자야의 중심지가 잠비로 옮겨갔을 가능성도 제기된다.[70]
13세기에는 자와 싱하사리 왕조의 침공(1275년)을 받았고, 결국 14세기 마자파히트 왕국에 의해 정복당하면서(1377년) 멸망하였다. 스리위자야의 마지막 왕자로 알려진 파라메스와라는 말라카로 피신하여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말라카 술탄국을 건국한 것으로 전해진다.
5. 1. 형성 및 성장 (7세기)
7세기 중반 다푼타 히양 스리 자야나사가 스리위자야를 건국한 것으로 여겨진다(케두칸 부킷 비문). 7세기 후반의 케두칸 부킷 비문, 탈랑 투오 비문, 텔라가 바투 비문, 코타 카푸르 비문 등에 따르면, 스리 자야나사 왕은 2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시드하야트라(Siddhayatra) 원정을 통해 세력을 확장했으며, 당시 스리위자야에서는 대승불교가 행해졌다.
스리위자야는 무역과 정복을 통해 지역 지배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683년 다푼타 히양은 팔렘방과 잠비 왕국(말라유 왕국)을 지배하에 두었다. 686년에는 자와의 '가릉' 왕국을 정복하였다. 코타 카푸르 비문에 따르면, 다푼타 히양 스리 자야나사는 7세기 후반 수마트라 남부 대부분과 방카 섬 인근, 람풍의 팔라스 파세마까지 정복했다. 또한 이 비문은 자야나사가 자바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감행했으며, 이는 서자와의 타루마나가라와 중자와의 칼링가 왕국의 쇠퇴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확장을 통해 스리위자야는 말라카 해협, 자와 해 서부, 그리고 태국 만까지 영향력을 넓히며 해상 무역을 장악하게 되었다. 7세기 후반 중국의 기록에는 수마트라의 두 왕국과 자바의 세 왕국이 스리위자야의 일부로 언급되어 있다. 같은 시기 중국 당의 승려 의정은 인도로 가는 길에 스리위자야에 머물며 당시 상황에 대한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5. 2. 황금기 (8세기-10세기)


8세기 초, 자바 중부에서는 불교를 신봉하는 샤일렌드라 가문이 세력을 키웠으며[51], 이들은 스리위자야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다.[52] 이 시기 스리위자야에서는 대승불교가 크게 융성하였다. 샤일렌드라 왕조는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왕가와 관계를 맺으며 자바 중부 마타람 왕국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다.[40][41] 아랍의 기록에 따르면, 자바의 자바그(Zabag, 샤일렌드라 왕조로 추정)가 스리위자야(Sribuza), 말레이 반도의 칼라(Kalah, 아마도 케다), 수마트라의 람니(Ramni, 아마도 람브리)를 지배했다고 한다.[40][41]
스리위자야는 8세기 동안 말레이 반도로 세력을 확장하여 랑카스카를 복속시켰고[53], 이후 북쪽의 판판과 탐브랄링가까지 영향권 아래 두었다. 이 지역들은 크라 지협을 통한 무역로 통제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775년 왓 세마 무앙에서 발견된 리골 비문에는 스리위자야의 마하라자 다르마세투가 말레이 반도 북부에 보살 파드마파니, 바즈라파니, 그리고 부처를 위한 세 개의 성역 건설을 명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당시 스리위자야의 영향력을 보여준다.[54]
자바의 샤일렌드라 왕조에서는 다라닌드라의 뒤를 이은 사마라그라위라(재위 800~819년 추정)가 있었다. 860년에 작성된 날란다 비문에는 그가 발라푸트라데바의 아버지이며, '샤일렌드라 가문의 보석(Śailendravamsatilaka)'이자 '영웅적인 적을 죽인 자(Śrīviravairimathana)'라는 칭호를 가진 왕(다라닌드라)의 아들로 언급된다. 확장적이었던 다라닌드라와 달리 사마라그라위라는 평화주의적인 성향을 보이며 보로부두르 사원 건설 완공에 집중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라그라위라는 스리위자야의 공주인 타라(Tara)와 결혼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사마라퉁가는 사마라그라위라의 뒤를 이은 샤일렌드라 군주(재위 792년-835년 추정)로 여겨지기도 하지만,[56] 일부 학자들은 그를 만티아시 비문에 언급된 라카이 가룽과 동일시하여 사마라그라위라의 후계자로 보기도 한다. 사마라퉁가 역시 군사적 확장보다는 자바 내 통치 강화와 불교 문화 발전에 힘썼다. 그의 치세 동안인 825년경, 세계적인 대승불교 기념물이자 거대한 석조 만달라인 보로부두르 사원이 완공되었다.[57][20] 이 시기 자바의 샤일렌드라 군주가 스리위자야의 마하라자 지위를 겸하기도 했으며, 스리위자야의 중심지는 팔렘방으로 여겨졌다.[20] 사마라퉁가는 딸 프라모다와르다니를 시바교도인 라카이 피카탄과 결혼시켜 불교와 힌두교 간의 화합을 도모하려 했다. 한편, 9세기 초 크메르 왕자 자야바르만 2세가 샤일렌드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802년 크메르 제국의 독립을 선포하기도 했다.[55]
9세기 중반, 샤일렌드라 왕조 내부의 계승 분쟁이 발생했다. 왕자 발라푸트라데바는 라카이 피카탄과 프라모다와르다니의 통치에 반대했다. 발라푸트라데바와 프라모다와르다니의 관계에 대해서는 발라푸트라데바가 사마라퉁가의 아들이자 프라모다와르다니의 남동생이라는 설과, 사마라그라위라의 아들이자 사마라퉁가의 남동생 즉 프라모다와르다니의 삼촌이라는 설이 있다.[58] 발라푸트라데바는 결국 자바에서 밀려나 수마트라로 건너갔다. 그는 스리위자야 공주였던 어머니 타라(사마라그라위라의 왕비)를 통해 계승권을 주장하며 팔렘방을 중심으로 스리위자야의 새로운 마하라자로 즉위한 것으로 보인다. 860년 인도에서 발견된 날란다 비문은 발라푸트라데바가 자바 샤일렌드라 왕조의 정통 계승자임을 선언하며 그의 통치 정당성을 뒷받침한다.
발라푸트라데바가 권력을 잡는 과도기(820년-850년 사이 광저우 무역 중단 시기)에는 잠비(믈라유 왕국)가 일시적으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하여 853년과 871년에 중국에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다.[59]
발라푸트라데바는 902년 다시 중국에 조공 사절을 파견하며 관계를 회복했고, 당시 약화된 당나라는 스리위자야 사절에게 칭호를 수여했다. 10세기 전반, 당이 멸망하고 송이 건국되는 전환기에 스리위자야는 푸젠의 민 왕국, 광둥의 남한(南漢) 등 중국 남부 세력들과 활발한 해상 무역을 펼치며 경제적 번영을 누렸다. 903년경 아랍의 작가 이븐 루스타는 스리위자야 군주의 막대한 부와 강력한 권세를 기록하며 "그보다 더 부유하고 강력하며 더 많은 수입을 가진 왕은 없다"고 묘사했다. 이 황금기 동안 스리위자야의 주요 도시 중심지로는 팔렘방(특히 부킷 세군탕 인근 카랑아냐르 유적지), 무아로잠비, 케다 등이 번성했다. 중국 측 기록에서는 이 시기 스리위자야를 삼불제(三佛齊)라는 명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5. 3. 자바와의 전쟁 (10세기)

10세기에 들어서면서 수마트라섬의 스리위자야와 자바섬의 마타람 왕국 사이의 경쟁은 더욱 치열해지고 적대적인 양상으로 발전했다. 이러한 갈등의 배경에는 스리위자야가 과거 자바섬에 있던 사일렌드라 왕조의 영토를 되찾으려 했거나, 반대로 마타람 왕국이 지역 내 스리위자야의 지배력에 도전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동자바에서 발견된 안주클라당 비문(Anjukladang inscription)은 937년에 말레이우(스리위자야를 가리킴)가 마타람 왕국을 침공했음을 기록하고 있다. 당시 므푸 신독(Mpu Sindok) 왕이 이끄는 마타람 군대는 안주크 라당(Anjuk Ladang) 마을 주민들의 도움을 받아 스리위자야(수마트라) 군대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승리 기념비(자야스탐바, jayastambha)가 세워졌다.
990년, 이번에는 자바의 다르마왕사 왕이 스리위자야에 대한 대규모 해상 침공을 감행하여 수도 팔렘방을 함락시키려 시도했다. 이 침공 사실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988년, 스리위자야 사절단이 중국 광저우에 도착했으나, 약 2년 뒤 자바의 침공으로 인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소식을 접했다. 992년에는 자바 사절단이 중국 조정에 도착하여 스리위자야와 전쟁 중임을 알렸다. 999년, 중국에 머물던 스리위자야 사절은 참파를 거쳐 귀국하려 했으나, 여전히 본국의 상황이 불안정하다는 것을 알고 다시 중국으로 돌아가 황제에게 자바 침략자들로부터 스리위자야를 보호해 줄 것을 호소했다.[60]
이러한 위기 상황 속에서 스리위자야의 마하라자인 스리 쿠다마니 와르마데와(Sri Cudamani Warmadewa)는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했다. 그는 중국 황제의 환심을 사 정치적 지원을 확보하고자 노력했다. 1003년, 송나라 역사 기록에 따르면 와르마데와 왕은 사절을 보내 중국 황제의 장수를 기원하며 스리위자야에 불교 사원을 건립했다고 보고했다. 또한 황제에게 이 사원의 이름과 종을 하사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기뻐한 중국 황제는 사찰의 이름을 '천년만년 하늘의 축복을 받는다'는 의미의 承天萬壽|승천만수중국어로 지어주고, 직접 종을 주조하여 스리위자야로 보내 사찰에 설치하도록 했다.[60]
결국 스리위자야는 1006년에 자바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스리위자야의 마하라자는 자바 마타람 왕국의 위협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경쟁자를 제거할 계획을 세웠다. 스리위자야는 마타람 왕국 내 루아람(Lwaram) 지역의 통치자(하지, haji)인 우라와리(Wurawari)의 반란을 지원했다. 이 반란은 마타람 궁궐에 대한 기습 공격과 파괴로 이어졌다. 특히 공격은 다르마왕사 왕의 딸 결혼식이 열리는 중에 발생하여, 마타람 조정은 아무런 대비 없이 큰 충격을 받았다. 이 공격으로 다르마왕사가 사망하고 수도가 함락되면서 마타람 왕국은 사실상 멸망했다. 스리위자야의 이러한 개입은 마타람 왕국의 붕괴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후 동자바 지역은 수년간 불안정과 폭력, 황폐화에 시달리게 되었다.[20]
5. 4. 쇠퇴 (11세기-13세기)

스리위자야의 쇠퇴는 외세의 침략과 그로 인한 무역 및 안보 불안정이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 특히 11세기 초 남인도 촐라 왕조의 침공은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1025년, 라젠드라 1세가 이끄는 촐라 함대는 계절풍을 이용한 기습 공격으로 스리위자야의 수도 팔렘방을 포함한 주요 항구 14곳을 약탈했다.[20][61] 이 과정에서 스리위자야의 왕 상그라마 비자요퉁가바르만이 사로잡혔고 막대한 보물이 약탈당했다.[123][63]
촐라 왕조의 침공 원인에 대해서는 스리위자야의 무역 방해에 대한 보복[16], 라젠드라 1세의 군사적 위업 과시[16], 혹은 촐라의 상업적 이익 확보를 위한 선제공격[71] 등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이 침공으로 스리위자야의 해상 패권은 크게 약화되었고, 자바의 카후리판 왕국과 평화 협정을 맺게 되었다. 이 협정은 팔렘방 함락 후 망명한 스리위자야 공주가 카후리판의 아이랑가 왕과 혼인하며 성사되었고, 아이랑가 왕은 1035년 왕비를 위해 '스리위자야스라마'라는 불교 사원을 건립하기도 했다.[64]
촐라의 침공 이후 스리위자야의 중심지가 기존의 팔렘방에서 수마트라 섬의 다른 무역 중심지였던 잠비(믈라유 왕국의 중심지)로 이동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70] 1028년부터 중국 기록에 등장하는 '산포기(Sanfoqi)'가 팔렘방이 아닌 말라유-잠비를 지칭한다는 해석도 이를 뒷받침한다.[73] 일부 학자들은 1025년 촐라의 침공으로 스리위자야가 사실상 멸망했다고 보기도 한다.[72]
촐라 왕조는 이후 수십 년간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 일부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며 간헐적인 군사 개입을 지속했다. 라젠드라 1세의 원정은 당시 말레이 지역에 깊은 인상을 남겨, 그의 이름이 말레이 연대기에 '라자 훌란'으로 기록되기도 했다.[123][65][66][67] 11세기 후반에는 라젠드라 1세의 외손자인 쿨롯텅가 1세가 스리위자야 지역에 개입하여 케다 지역의 질서를 회복시키고 촐라의 영향력을 유지하려 시도했다는 기록도 있으나[20][74][75][76], 12세기경에는 촐라 왕조의 영향력도 점차 약화되었다.[73]
11세기 샤일렌드라 왕조의 쇠퇴와 촐라 왕조의 간섭기 이후 약 150년간 스리위자야의 역사는 명확하지 않다. 12세기 후반, 수마트라 바탕하리 강 유역의 잠비(무아로잠비)를 중심으로 마울리 왕조가 통치하는 믈라유 왕국이 부상했다.[135] 이 믈라유-다르마스라야 왕국은 스리위자야의 계승 국가로 간주되며, 관련된 가장 오래된 기록은 1183년의 그라히 비문이다.
13세기 들어 자바 섬에서는 싱하사리 왕조가 강력한 세력으로 성장하여 수마트라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했다. 1275년, 싱하사리 왕조는 믈라유 왕국을 공격하여 이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다. 이후 자바에서는 마자파히트 왕국이 싱하사리 왕조를 계승하여 더욱 강력한 세력을 구축했으며, 결국 1377년 마자파히트 왕국이 스리위자야의 옛 영토를 정복하면서 스리위자야는 완전히 소멸하였다.
6. 정치와 경제
스리위자야는 동남아시아 역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해상 제국으로, 독특한 정치 구조와 활발한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한 경제 시스템을 통해 번영을 누렸다. 정치적으로는 강력한 중앙 집권 체제보다는 여러 소규모 정치체(케다투안)들이 중심 세력과 느슨하게 연결된 만달라 모델의 형태를 보였다. 경제적으로는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이라는 지정학적 이점을 활용하여 인도와 중국을 잇는 해상 무역을 장악하고 중계 무역의 중심지로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정치적 유연성과 경제적 번영은 스리위자야가 수 세기 동안 동남아시아 해역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유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6. 1. 정치 체제
스리비자야의 정치 체제는 강력한 중앙 집권적 제국이라기보다는, 여러 케다투안(Kedatuan, 소규모 정치체 또는 왕국)들이 연합한 형태인 만달라 모델로 설명될 수 있다.[78] 이는 지배 중심부인 중앙 카다투안 스리비자야 아래 여러 조공국 형태의 케다투안들이 느슨하게 연결된 구조였다.[78]제국은 크게 세 개의 주요 지역으로 조직되었다. 첫째는 팔렘방을 중심으로 한 하구의 수도 지역으로, 마하라자(Maharaja, 대왕)가 직접 통치했다. 둘째는 배후지이자 귀중한 상품의 원천이었던 무시 강 유역이며, 셋째는 경쟁 세력의 중심지가 될 수 있는 다른 하구 지역들이다.[50] 지방의 케다투안들은 지역 다툭(Datu, 족장) 또는 부족장이 다스렸으며, 이들은 스리비자야 마하라자와 동맹 관계를 맺고 있었다.[47][50]
중앙 카다투안과 지방 케다투안 간의 관계는 충성 맹세를 통해 유지되었다. 7세기 팔렘방 사보킹킹에서 발견된 텔라가 바투 비문은 이러한 파숨파한(pasumpahan, 충성 맹세 의식)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비석 상단에는 일곱 개의 나가 머리가 조각되어 있고 하단에는 의식용 액체를 흘려보내는 배출구가 있는데, 이는 스리비자야에 반역하는 자에게 저주를 내리는 의식과 관련이 깊다. 지방 통치자들은 충성을 맹세하고 조공(수입의 일부 납부)을 바치는 대가로 상당한 자치권을 인정받았다.[79] 또한, 각 케다투안의 왕족들은 왕가 간의 결혼을 통해 동맹을 강화하기도 했다. 이러한 관계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역동적이어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방 세력의 위상이 변하거나 중앙 권력에 도전하는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수마트라의 스리비자야 왕가와 자바의 샤일렌드라 왕조 간의 관계 변화는 이러한 정치적 역동성을 보여준다.
텔라가 바투 비문에는 스리비자야의 복잡하고 계층화된 관료 체계를 보여주는 다양한 직책들이 언급되어 있다.[77] 이는 스리비자야가 체계적인 행정 조직을 갖추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스리비자야는 정복과 약탈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기도 했다. 케두칸 부킷 비석에 따르면, 다푼타 히양 스리 자야나사는 684년 '시드하야트라' 여정을 통해 2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해상 정복에 나서 말라유 왕국 등을 복속시켰다.[48][49] 코타 카푸르 비문은 스리비자야가 수마트라 남부 대부분과 방카 섬, 람풍 지역까지 정복했으며, 7세기 후반에는 자바를 상대로 군사 원정을 감행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서자바의 타루마나가라와 중자바의 깔링가 왕국의 쇠퇴와 일치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군사 활동과 더불어 충성 맹세, 동맹 등을 통해 제국은 말라카 해협, 자바 해 서부, 그리고 아마도 태국 만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무역을 통제했다. 지역 항구들은 현지 통치자들이 관리하며 자원을 수집하고 교역을 감독했지만[79],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될 경우 독자적인 무역 관계를 맺으려는 유혹에 빠지기도 했다.[80]
한편, 8세기 후반에는 중앙 자바의 샤일렌드라 왕조가 스리비자야 만달라를 통치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러 아랍 문헌들은 자바의 샤일렌드라 왕조(자바그, Zabag)가 스리부자(Sribuza, 스리비자야), 칼라(Kalah, 말레이 반도의 케다 추정), 람니(Ramni, 수마트라 지역 추정)를 지배했다고 언급한다. 다만 스리비자야의 수도가 자바로 옮겨졌는지, 아니면 단순히 자바의 속국이 되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40][41]
6. 2. 경제 체제
스리위자야는 상업 활동을 통해 성장한 해상 제국이었다. 경제의 핵심은 인도와 중국 사이의 주요 해상 무역로인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을 장악하는 데 있었다.[83] 스리위자야는 이 두 해협을 통제하며 중계 무역의 중심지로 부상했고, 이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아랍의 기록에 따르면, 스리위자야 마하라자의 제국은 매우 광대하여 가장 빠른 배로도 모든 섬을 둘러보는 데 2년이 걸릴 정도였으며, 그 부는 중세 인도의 어떤 왕과도 견줄 만했다고 한다.[83]스리위자야의 경제는 단순히 해협 통제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강 시스템 모델'이라 불리는 방식을 통해 내륙 지역의 생산물 통제와 해상 무역 장악을 동시에 추구했다. 이 모델은 강의 하구 지역을 중심으로, 강 상류 내륙 지역에서 생산되는 상품의 흐름을 관리하고, 이를 통해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국제 무역로까지 지배력을 확보하는 방식이었다.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자바 서부 해안의 주요 강 하구 중심지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했으며, 이는 지역 엘리트인 다툭(datu, 족장)들과의 '충성 서약' 체제, 부의 재분배, 그리고 동맹 관계를 통해 이루어졌다.[84]
팔렘방을 비롯한 스리위자야의 항구는 중요한 중계 무역항 역할을 수행했다. 이곳에서는 지역 내외의 다양한 귀중품들이 모여 거래되고 다른 지역으로 운송되었다. 주요 교역품은 다음과 같다.[85][79]
| 지역 | 주요 교역품 |
|---|---|
| 자바 섬 | 쌀, 목화, 인디고, 은 |
| 수마트라, 말레이 반도 | 알로에, 수지, 장뇌, 상아, 코뿔소 뿔, 주석, 금 |
| 보르네오 | 라탄, 희귀 목재, 장뇌, 보석, 귀금속 |
| 동인도네시아 군도 | 이국적인 새와 희귀 동물, 철, 판단나무(sappanwood), 백단향, 정향, 육두구 등 희귀 향신료 |
| 기타 동남아시아 및 인도 | 후추, 쿠베브(cubeb), 계피 등 다양한 향신료 |
| 중국 | 도자기, 칠기, 금박 직물, 비단, 중국 예술품 |
스리위자야는 이러한 상품들을 중개하며 부를 쌓았지만, 워낙 많은 외국 상품들이 스리위자야를 거쳐 갔기 때문에 어떤 것이 스리위자야 본래의 토착 상품이었는지는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외국 상인들은 각자의 상품을 가지고 스리위자야 항구에 들러 다른 지역 상인들과 교역했으며, 이는 스리위자야가 동남아시아 무역 네트워크의 핵심 허브였음을 보여준다.[85][79] 특히 중국과의 도자기 무역은 매우 활발했으며, 수마트라와 자바 해안에서 발견되는 특정 도자기 파편의 분포를 볼 때, 양국 간에 독점적인 무역 관계가 있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85]
스리위자야는 자체적인 화폐 시스템을 가지고 있었다. 제국의 통화는 금화와 은화였으며, 여기에는 스리위자야가 독점적으로 거래했던 백단향 꽃 이미지와 산스크리트어로 '바라'(vara, 영광)라는 단어가 새겨져 있었다.[79][86] 이 외에도 도자기, 비단, 설탕, 철, 쌀, 건조 갈랑갈, 대황, 장뇌 등 다양한 물품이 교환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79] 일부 아랍 자료에 따르면, 무역과 세금으로 얻은 막대한 이익은 금으로 바뀌어 왕궁의 연못에 숨겨졌다고 한다.[4]
스리위자야는 인도, 중국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와도 활발한 교역 관계를 맺었다. 718년, 마하라자 스리 인드라바르만은 우마이야 칼리파의 칼리프 압드 알-아지즈 이븐 우마르에게 사절을 보내 편지를 전달했으며, 답례로 '잔지'(Zanji, 아프리카 출신 흑인 여성 노예)를 선물 받았다. 이후 724년에는 중국 황제에게 '츠엉치'(Ts'engchi, 잔지의 중국어 표기)를 선물로 보냈다는 기록이 중국 연대기에 남아있다.[87]
9세기와 10세기 아랍 작가들은 스리위자야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지역(알-힌드, al-Hind)의 왕을 세계 4대 왕 중 하나로 간주할 정도로 그 위상을 높이 평가했다.[88][89] 이들 기록은 스리위자야의 왕들이 막강한 군사력과 수많은 군사, 코끼리를 보유했으며, 막대한 금과 은을 소유한 강력한 존재로 묘사하고 있다.[88][89] 당시 아랍 상인들의 기록이 주로 스리위자야에 집중되어 있고 더 동쪽 지역에 대한 정보가 부족하다는 점은, 스리위자야가 동서 교역로를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시사한다.[85]
6. 3. 해상 제국
스리위자야는 말라카 해협과 순다 해협을 장악하며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잇는 해상 교역로를 통제했던 강력한 해상 제국이었다.[83][16] 아랍 기록에 따르면 스리위자야 마하라자의 제국은 매우 광대하여 가장 빠른 배로도 모든 섬을 둘러보는 데 2년이 걸릴 정도였다고 한다.[83] 이 섬들에서는 장뇌, 알로에, 백단향, 정향, 육두구, 카르다몸, 후추와 같은 향신료와 상아, 금, 주석 등이 생산되어 마하라자에게 막대한 부를 안겨주었다.[83]스리위자야는 해상 실크로드의 중요 거점으로서 중국과 인도 사이의 해상 무역뿐만 아니라, 말루쿠 제도의 향신료를 포함한 말레이 제도 내 상품 교역에서도 큰 이익을 얻었다.[79] 특히 중국 송 왕조와의 조공 관계를 통해 무역 특혜를 누렸으며, 이를 통해 얻은 막대한 수입으로 군대를 유지하고 항구를 보호했다.[82][79] 일부 기록에는 해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항구에 쇠사슬을 설치했다는 내용도 있다.[79][90][91]
이러한 해상 지배력 때문에 일부 역사가들은 스리위자야를 탈라소크라시(해양 지배 국가)로 규정하기도 한다.[16] 그러나 스리위자야의 해군력과 해상 패권의 실질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과거에는 스리위자야가 강력한 해군을 바탕으로 해협을 통제했다고 여겨졌으나, 최근 연구들은 이에 의문을 제기한다. 해양 활동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부족하고, 해군에 대한 언급 역시 단편적이다.
케두칸 부킷 비석(683년) 기록에 따르면, 다푼타 히양 스리 자야나사가 이끈 2만 명의 병력 중 배를 이용한 인원은 312명에 불과했고, 1,312명의 육군이 동행했다. 이는 초기 스리위자야 해군이 주로 병력 수송 등 물류 지원 역할을 했음을 시사한다. 8세기 이후 해군 능력이 성장했지만 여전히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을 가능성이 높다. 또한, 스리위자야 관련 기록에서 상선과 군함을 구분하는 용어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는다는 점은 상설 전문 해군 조직이 부재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10세기 이후 자바의 마타람 왕국이나 11세기 촐라 제국과 같은 주변 해양 강국들이 강력한 해군력을 발전시킨 것과 비교할 때, 스리위자야의 해군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990년대 자바의 다르마왕사 왕이 스리위자야를 침공했을 때, 스리위자야 사절단은 자바 해군의 봉쇄로 인해 중국에서 본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기도 했다.[60] 이는 자바 해군이 스리위자야의 해상 통신망을 차단할 만큼 강력했음을 보여준다. 스리위자야의 대응 역시 방어적인 성격이 강했다.[60]
11세기 초, 스리위자야의 해상 방어 능력의 한계가 명확히 드러났다. 1017년부터 1025년 사이, 남인도 촐라 왕조의 라젠드라 촐라 1세는 대규모 해군을 동원하여 스리위자야의 주요 항구들을 급습했다.[20] 촐라 함대는 팔렘방을 포함한 14개 항구를 약탈하고, 스리위자야의 왕 상그라마 비자요퉁가바르만을 사로잡았다.[61][121][122] 이 침공은 스리위자야의 해상 패권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해상 무역보다는 농업에 기반한 케디리 왕국과 같은 내륙 지역 왕국들이 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70]
촐라의 침공 이후, 스리위자야의 중심지는 점차 팔렘방에서 믈라유 왕국의 중심지였던 잠비로 옮겨갔다.[70][73] 12세기 후반의 중국 기록(『영외대답』, 『제번지』)에는 '산포기'(스리위자야 또는 그 후계 세력을 지칭)의 백성들이 해상 전투에 능숙하고, 주변국들이 그 힘을 두려워하며, 통행하는 외국 선박들을 통제했다는 내용이 나온다.[92][93][91] 이는 촐라 침공 이후 변화된 국제 정세와 중국 상인들의 직접적인 동남아시아 해역 진출 증가 속에서, 스리위자야(또는 후계 세력)가 생존을 위해 이전보다 더 적극적인 해군 전략을 구사했음을 시사한다.[92][93][91]
하지만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2세기 이후 말라카 해협 지역에서 스리위자야의 영향력은 점차 약화되었다. 케다, 파항 등 여러 항구 도시들이 중국과 직접 교역하기 시작했고, 잠비와 리고르 등도 독자적인 세력으로 성장했다.[94][95] 1275년 자바 싱하사리 왕국의 침공은 이러한 쇠퇴를 가속화했으며, 결국 스리위자야는 해상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게 되었다.[117][94][95]
7. 문화와 사회
스리위자야 사회는 아랍과 중국의 기록을 통해 수 세기 동안 중요한 무역 중심지였음이 확인된다.[98] 7세기 후반의 고대 말레이어 비문들은 왕을 포함한 고위 관리들이 존재하는 계층적 지도 체계를 보여주며,[98] 대승 불교의 영향을 받은 복잡하고 국제적인 사회가 번성했음을 시사한다.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 사회 계층 구조, 국가 행정 기관의 형성이 특징이었다.[99] 903년경 무슬림 작가 이븐 루스타는 스리위자야 통치자의 막대한 부와 권력에 대해 기록하기도 했다. 당시 주요 도시 중심지로는 팔렘방(특히 세군탕 언덕 지역 근처의 카랑냐르 유적지), 무아르잠비, 케다 등이 있었다.
7. 1. 예술과 문화

스리위자야는 팔렘방을 중심으로 한 무역 중심지이자 밀교 불교의 중심지로서 중요성이 여러 세기에 걸쳐 아랍 및 중국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스리위자야 자체의 역사 기록물인 고대 말레이어 비문은 주로 7세기 후반의 것들이다. 이 비문들은 왕을 포함한 많은 고위 관리들이 존재하는 계층적 지도 체계를 보여준다.[98] 대승 불교의 영향을 받은 복잡하고 계층화된 국제적 사회는 예술, 문학, 문화적 취향과 정교한 의례를 발전시켰다. 이러한 사회 모습은 비문, 외국 기록, 당시 사찰의 부조 연구를 통해 엿볼 수 있다. 뛰어난 예술성은 이 지역에서 발견된 다수의 스리위자야 대승 불교 조각상들을 통해 확인된다. 스리위자야는 사회 구성원의 다양성, 사회 계층의 존재, 국가 행정 기관의 형성을 특징으로 하는 복잡한 사회를 발전시켰다. 금속 세공품은 보석, 화폐, 지위를 나타내는 장식적인 상징물로 사용되었다.[99]
스리위자야의 불교 미술과 건축은 인도 굽타 제국과 팔라 제국 미술의 영향을 받았다. 팔렘방 부킷 세군탕에서 발견된 인도 아마라바티 양식의 불상이 이를 잘 보여준다. 7세기 또는 8세기로 추정되는 이 불상은 무역을 통한 미술, 문화, 사상의 전파를 보여주는 증거이다.[100][79] 또한 태국 남부 차이야 군 지역의 예술에서는 드바라바티 양식과 같은 인도 양식의 영향도 확인된다.[44]
여러 역사적 자료에 따르면, 밀교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은 복잡하고 국제적인 사회가 스리위자야 수도에서 번성했다. 7세기의 탈랑 투오 비석은 공원 조성 행사에서의 불교 의식과 축복을 묘사하고 있으며, 당시 스리위자야 사회에서 자연이 중요하게 여겨졌음을 보여준다.
수마트라와 말레이 반도의 여러 유적지에서는 비로자나불, 보살 관세음보살, 미륵보살과 같은 불교 조각상들이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팔렘방 부킷 세군탕에서 발견된 석조 불상,[103] 남수마트라 무시 라와스(Musi Rawas) 빙인 정굿(Bingin Jungut)의 관세음보살상(8~9세기경, 자바의 샤일렌드라 왕조 양식과 유사), 코메링(Komering)의 9세기 청동 미륵보살상 등이 있다. 잠비의 무아라불리안(Muarabulian)에서는 관세음보살 금상이 발견되었고,[104] 말레이 반도 페락(Perak) 비도르에서는 관세음보살 청동상이,[105] 태국 남부 차이야 군에서도 관세음보살상이 발견되었다.[106] 이러한 유물들의 다양한 재질은 무역을 통한 불교 전파를 뒷받침한다.
경제적, 문화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스리위자야는 수마트라 중심지에 많은 유적을 남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무아로잠비 사원 유적지, 무아라 타쿠스 사원, 바할 사원 등 스리위자야 시대의 불교 사원 유적이 수마트라에서 발견되었다.
현대 말레이어의 전신인 고대 말레이어는 7세기부터 말레이 제도에서 사용되었으며, 이는 자바 등 제도 연안 지역의 비문에서 확인된다. 이 언어는 상인들에 의해 널리 퍼져나가 제도 내의 ''링구아 프랑카''(lingua franca) 역할을 하였다.[101][102][79]
청동기 및 철기 시대 이후, 청동 도구와 보석류가 이 지역 전역으로 유입되었다. 다양한 양식의 팔찌와 구슬은 서로 다른 원산지와 고유한 재료 및 기술을 나타낸다. 중국의 도자기, 토기, 직물, 비단 등의 미술품은 이 지역에서 거래되는 주요 품목 중 하나였으며, 이러한 물품에 담긴 예술 양식의 전파에 기여했다.[79]
7. 2. 종교

스리위자야는 대승불교, 특히 금강승(밀교)의 중요한 중심지였다. 7세기 중국 당나라의 승려 의정은 인도로 가는 길에 스리위자야에 머물렀는데, 그의 기록은 당시 스리위자야의 불교 상황을 잘 보여준다. 의정은 671년 스리위자야의 수도 팔렘방(당시 '보가'(Bogha) 또는 '실리불서'(室利佛逝)로 불림)에 도착하여 6개월간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했고, 687년 귀국길에도 다시 들러 695년까지 머물렀다.[107]
의정에 따르면, 팔렘방에는 1,000명이 넘는 불교 승려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학문 연구와 선행 실천에 힘쓰고 있었다. 스리위자야의 불교 연구 수준은 인도의 날란다 사원에 필적할 정도였으며, 불교의 규칙과 의식도 인도와 거의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의정은 중국 승려가 인도로 불법을 배우러 가기 전에 스리위자야에서 1~2년 머물며 준비하는 것이 좋다고 권하기도 했다.[107] 의정 자신도 스리위자야에 머무는 동안 불경을 번역하고, 『대당서역구법고승전』과 『남해기귀내법전』과 같은 중요한 저술을 남겼다.[111] 스리위자야 왕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자바나 말레이 반도 등지에 불교를 전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8]
스리위자야는 국제적인 불교 학문의 중심지로서 아시아 여러 지역의 순례자와 학자들을 끌어들였다. 인도에서 온 다르마키르티는 스리위자야와 날란다에서 불교 철학을 가르친 저명한 학자였다. 11세기 벵골 출신의 불교 학자 아티샤는 스리위자야에서 수학한 후 티베트로 건너가 금강승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신라를 포함한 한반도의 승려들도 스리위자야를 찾았다.[112]
팔렘방 외에도 수마트라 섬 곳곳에서 스리위자야 시대의 중요한 불교 유적지가 발견되었다. 자비 주 바탕하리 강 유역의 무아로잠비, 리아우 주 캄파르 강 계곡의 무아라 타쿠스, 북수마트라 주 바루문 강과 파나이 강 계곡의 비아로 바할 사원군 등이 대표적이다. 이 유적지들은 당시 불교 승려 공동체(상가)의 중요한 수행 및 학문 중심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태국 남부의 차이야 지역에서도 대승불교의 영향을 받은 스리위자야 시대 예술품들이 발견되어, 이곳이 스리위자야의 중요한 지역 거점이었음을 보여준다.[43][44] 스리위자야에서 발견된 여러 비문의 어휘에는 인도 탄트라 사상이 융합되어 있으며, 이는 통치자를 보살과 동일시하는 관념이 있었음을 시사한다. 이는 동남아시아 역사상 통치자가 종교적 권위를 지닌 인물로 여겨진 최초의 고고학적 증거 중 하나로 평가된다.
한편, 스리위자야에서는 힌두교 역시 공존했다. 수마트라 남부 무시 강의 지류인 레마탕 강 유역에서는 8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건설된 것으로 보이는 벽돌 구조의 힌두 사원 유적인 부미아유 사원이 발견되었다.[114] 이곳에서 발견된 시바 신과 아가스티야 성자 조각상은 9세기에서 10세기경의 양식을 보여준다.[115] 불교가 중심이었던 스리위자야 영역 내에서 힌두 사원이 발견된 것은 두 종교가 비교적 조화롭게 공존했음을 시사한다. 다만, 12세기에서 13세기경에는 부미아유 지역의 신앙이 힌두교에서 밀교적 성격의 불교로 변화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115] 일부 연구자들은 스리위자야가 이웃 지역에 비해 정교한 불교 건축물이나 조각상 같은 예술적 유산을 상대적으로 덜 남겼다고 지적하기도 한다.[113]
8. 역대 왕
체리톨로파모(Che-li-t'o-lo-pa-mo)
실리포시(Shih-li-fo-shih)
우마이야 칼리파국 무아위야 1세 칼리프와 압드 알-아지즈 이븐 우마르 칼리프에게 사절단 파견
류텅웨이궁(Liu-t'eng-wei-kung)
실리포시(Shih-li-fo-shih)
딸 타라는 샤일렌드라 왕조의 사마라퉁가 왕과 결혼하여 발라푸트라데바를 낳음.[140]
남 캄보디아 정복
산포츠(San-fo-ts'i)
날란다 비석(860)
실리후타시아리탄(Si-li-Hu-ta-hsia-li-tan)
실리 우예(Shih-li Wu-yeh)
산포츠(San-fo-ts'i)
샤치(Hsia-ch'ih)
산포츠(San-fo-ts'i)
세리출라우니푸마티안화(Se-li-chu-la-wu-ni-fu-ma-tian-hwa)
산포츠(San-fo-ts'i)
자와의 다르마왕사 왕의 스리위자야 공격, 중국 황제를 위한 사원 건설, 탄자브르 비석 또는 라이덴 비석 (1044), 나가파티남에 촐라 왕조 라자라자 1세의 지원으로 사원 건설
세리말라피(Se-li-ma-la-pi)
산포츠(San-fo-ts'i)
중국 사절단 방문 (1008, 1016)[20]
하치수와차푸(Ha-chi-su-wa-cha-p'u)
산포츠(San-fo-ts'i)
산포츠(San-fo-ts'i)
라자라자 사원의 콜라 비석, 탄자브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