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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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최능진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광복 후 경무부 수사국장을 역임했으나, 이후 파면 및 제헌 국회의원 선거 후보 등록 말소, 이승만 대통령 당선 무효 소청, 혁명의용군 사건 연루 등을 겪었다. 1951년 이적 혐의로 총살되었으나, 2015년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최능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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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2.1. 해방 이전

최능진은 1899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1928년 2월 9일 흥사단 제14회 뉴욕대회에서 '운동회'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1929년 귀국 후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1932년 평양축구단을 창설, 경평축구를 정례화하는 등 민족정신을 고취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되어 2년형을 선고 받았다.

2.2. 광복 직후

1945년 8·15 해방 직후 평남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부장으로 활동했다. 1945년 9월께 소련의 탄압을 피해 월남한 뒤 미군정에 의해 경무부 수사국장으로 발탁됐다.

2.3. 경무부 수사국장 파면 (1946)

1946년 12월 2일 조병옥 경무부장은 최능진 수사국장에게 경찰 사기 진작 및 명령 계통 확보에 유해하다는 이유로 사직을 요구하며 파면했다. 이에 최능진은 12월 5일 조병옥에게 공개서한을 보내, 조병옥이 탐관모리에 전념하고 있으며, 자신의 파면 사유는 조병옥과 함께 유흥을 즐기지 않고, 사기 전과자와 친일파를 고위직에 채용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순수한 독립운동가를 배척하는 것에 동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조병옥이 건국 과정에서 민족 전체의 복리보다 개인의 영달을 추구하며, 영남 폭동 사건에 대한 책임감이 없고, 범죄 수사 책임자로서 자신의 정당한 직무 수행을 방해했다고 비판했다. 특히, 조병옥이 명령에 불복한 유일한 사례는 김주조 석방 운동을 거부한 것이라고 언급하며, 조병옥에게 8.15 이전의 애국자 조병옥으로 돌아갈 것을 충고했다.

12월 6일 조병옥은 최능진의 공개서한에 대해 해명하며, 최능진이 파면된 후에도 직장을 나가지 않아 축출했으며, 서한 문제에 대해서는 미군 3인으로 구성된 사문위원회에서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김주조 석방 운동에 대해서는 최능진에게 요청한 적이 없고, 참페니 대좌를 통해 보석 의견서를 낸 적이 있을 뿐이며, 물질적인 것은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또한, 전과 3범을 고위직에 임명했다는 것과 1천2, 3백만 원의 거금을 받았다는 것은 알지 못하는 사실이라고 해명했다.

12월 7일 장택상 수도경찰청장은 조병옥을 옹호하며, 최능진이 편파적인 경찰 행정을 강행해 왔다고 비판했다. 그는 조병옥이 좌익이나 우익에 편향된 언사를 한 적이 없다고 주장하며, 최능진이 좌익에 대한 탄압을 강요했다고 주장했다.

12월 13일 최능진은 다시 성명서를 발표하여, 장택상의 주장은 좌익 진영에 대한 추파에 불과하며, 자신은 재직 시 민족 분열을 조장하는 극좌, 극우를 탄압했다고 반박했다. 또한, 조병옥과 장택상이 경찰 행정을 한민당의 지시에 따라 자행해 왔다고 비판하며, 조병옥 이하 부정 경찰관의 총퇴진을 주장했다. 일제 전직자 퇴진 문제에 대해서는, 애국자가 많지만, 일본 황실 번영을 기원하던 일부 친일파들이 민중 지도자가 될 수 없으므로, 고위직에서 제거하고 하부 조직에만 기술자로 남겨 민주 경찰 진영을 정비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병옥이 반대했다고 밝혔다.

최능진은 이전 성명서의 내용과 아서원 회담 내용을 부연 설명했다. 그는 전과 3범인 이해진을 전남 감찰관으로 임명한 후 경성에 주재시킨 것, 경찰관이 이모의 향응에 의해 가옥 명도에 불법 가담한 사실, 전 조선군 정원 참모장의 주구이자 친일파인 이종회(풍촌유)로 하여금 11개 공장 관리 운영 자금으로 1천3백만 원을 융자하게 한 것, 한공안과장 피소 건, 김주조 사건 등을 상세히 언급하며 조병옥의 비리를 폭로했다. 아서원 회담에서는 장택상과 서울 시내 전 총독부 보안과원, 현 사찰과장인 최운진, 전 부산서 고등주임으로 현 본정서장인 이구범 등의 파면을 약속했으나, 장택상이 배신했다고 주장했다.

1946년 12월 24일 최능진은 명예훼손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었다.

2.4. 제헌 총선 후보등록 말소 및 서울시 선거위원 총사직 사태 (1948)

1948년 4월 20일 보도에 따르면, 동대문 갑구의 선거 등록 마감일인 4월 16일까지 이승만 1인만이 등록을 마쳤다. 최능진은 이승만 지지 청년들에게 추천서를 탈취당했다는 이유로 불충분한 추천서를 가지고 등록하려 했으나, 동대문구 선거위원회는 선거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이유로 등록 접수를 거절했다. 그러나 서울시 선거위원회는 최능진의 등록을 4월 21일 오후 7시까지 연기했고, 최능진은 4월 20일 오후에 등록 수속을 완료했다. 이에 대해 최능진이 자유 분위기를 방해했다는 주장은 근거가 없으며, 서울시 선거위원회가 선거법을 어기고 등록 마감 후 116시간이나 연기한 것은 자유 분위기를 역이용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1948년 4월 30일 보도에 따르면, 최능진은 4월 13일 창신동 서부동회 투표구사무소에서 등록 증명을 요구했으나, 담당 직원이 없어 다음 날 다시 오기로 했다. 4월 15일, 최능진은 미군인을 대동하고 다시 등록 증명을 요구했다. 4월 16일 오후 6시 50분경, 최능진은 군정장관 부관이라고 하는 미국인을 동반하고 동대문 갑구 선거위원회를 찾아와 추천서를 탈취당했다는 구실로 93매의 추천장을 제시하며 4월 18일 오정까지 분실한 118매의 추천장을 제출하지 못하면 무효라는 각서를 쓰고 접수를 강요했다. 동 선거위원장은 개인 자격으로 가수리했으나, 그날 밤 위원회는 비법이라 판단하여 접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4월 17일, 상부 위원회의 지시로 4월 18일 오정까지 기다렸으나, 최능진의 대리인은 약속한 서류를 제출하지 못한다고 통고했다. 4월 18일, 서울시위원회는 4월 21일 오후 7시까지 입후보 등록 서류를 접수할 것을 동대문 갑구 선거위원회에 지시했고, 이에 반발한 선거위원 전원은 총사직했다. 4월 19일과 4월 20일, 최능진은 순경 2명을 대동하고 유권자 집을 방문하며 추천서와 등록 증명을 받아 동구 선거위원회 간사에게 등록 서류를 접수하게 했다. 4월 26일, 기자협회는 장택상 수도청장을 만나 최능진의 추천서와 등록 증명을 받는 과정에서 경찰관을 대동한 사실을 질문했고, 서울시장의 요청으로 경찰관을 파견했다는 사실과 윌리엄 F. 딘 군정장관의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1948년 5월 8일, 국회선거위원회는 최능진의 후보 등록을 말소했다.

2.5. 서재필 추대 운동 (1948)

1948년 흥사단 계열 인물들과 함께 서재필 추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6월 18일 보도에 따르면, 최능진, 안동원, 백인제, 노진설, 이용설, 김붕준, 여항렬, 정인과 등 흥사단 간부로 지목되는 인물들이 서재필 박사 추대 문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독립협회확대준비회의를 열었다. 이들은 서재필 박사에게 보내는 원문을 결정하여 전달할 예정이었으며, 이는 앞으로 수립될 정부에 서재필 박사를 참여시키기 위한 공작으로 보인다는 관측도 있었다.

2.6. 이승만 당선무효 소청 (1948)

1948년 9월 15일, 국회 선거심사위원회는 최능진의 이승만 당선무효 소청을 각하하였다. 그 이유는, 선거법 제51조는 당선인 결정의 잘못을 주장하여 갱정을 청구하는 당선소송을 허용하는 규정이나, 1948년 5월 10일 서울시 동대문갑 선거구에서 당선인으로 결정된 이승만은 같은 해 7월 20일 국회에서 대한민국 대통령에 선거되어 이미 취임 절차를 마쳤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헌법 제53조 제3항, 국회법 제71조 제1항에 의하여 국회의원 지위에서 당연 퇴직되었고, 해당 선거구는 궐원 상태가 되었음이 명백하므로, 재선거 이외에 궐원에 대한 보충 수속을 예정하지 않은 선거법에서 이미 궐원이 된 선거구에 대해 당선 결정 당시의 사실을 가지고 그 효력을 논하는 것은 소청의 정당한 이익이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2.7. 혁명의용군 사건 (1948)

1948년 '혁명의용군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을 선고받았다.

2.8. 이적 혐의로 총살 (1951)

1951년 1월 20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는 최능진의 활동이 국방경비법 제32조(이적죄)에 해당한다며 사형(총살형)을 선고하였다. 1월 24일 민주신보 종군기자는 최능진 사건을 보도하며 "최능진(54)은 6·26사변 이후 갖은 부역행위를 감행하여 세인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바, 지난 23일 하오 3시경 (중략) 드디어 총살형을 언도하였으며"와 같이 보도하였다. 1951년 2월 11일 경북 달성군 가창면에서 처형당했다. 당시 최능진을 조사한 방첩대(CIC)는 일제 관동군 헌병 오장 출신인 김창룡이 이끌고 있었다고 한다.

1993년 독립운동가인 최능진의 유가족들이 “부친을 독립운동가로 서훈해 달라”며 국가보훈처에 진정을 냈지만, 국가보훈처는 “이적죄 등으로 처형된 경력이 있어 서훈은 불가하다”는 회신 답변을 했다. 2013년 8월 26일 보도에 따르면, 보훈처는 진실화해위원회가 헌법기관이 아니기 때문에 법원 판결이 있어야 한다며 서훈을 미뤘다. 결국 2011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재심 신청을 냈다. 그런데 법원에서는 처음 판결한 곳에서 재심을 해야 한다며 대전 고등군사법원으로 넘겼다. 현재 일반법원과 군사법원 중에서 어디서 재심을 다룰 것인지를 검토하고 있는 상태다.

3. 국방경비법 위반 재심 무죄

최능진은 1951년 1월 20일 육군중앙고등군법회의에서 국방경비법위반(제32조 이적죄) 죄로 사형(총살형)을 선고받고, 1951년 2월 11일 형이 집행되었다.

군법회의는 최능진이 1950년 7월경 북한군 점령 하의 서울에서 민족진영 인사들을 규합하여 '즉각 정전, 평화호소대회'를 추진한 것 등을 국방경비법위반으로 보았다. 검찰관은 최능진이 수감자들에게 인민군 협력 맹서 취지의 자수서를 제출하게 하고, 대한민국 국회의원들에게 적에게 부역할 것을 촉진하였으며, 김일성에게 '평화호소대회'를 건의하고 UN에 즉각 정전과 연립정부수립을 요청하려 하였고, 성남호텔을 서울시 인민위원회에 제공하였으며, 민주청년동맹에게 금 1만 원을 제공하였다고 주장했다.

2006년 최능진의 아들 최만립은 진실ㆍ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실규명을 신청했다. 2009년 진실화해위는 최능진 사건을 '진실규명'으로 결정하며, 당시 군법회의는 헌법상 설치 근거가 없고 법관으로 구성되지 않아 판결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또한 최능진의 행위가 지나치게 편향적으로 해석되어 사실관계가 왜곡되었다고 보았다.

2015년 8월 27일 서울중앙지법은 재심 재판에서 공소사실이 범죄의 증명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며 최능진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4. 가족 관계

아버지 최경흠과 형제 최능찬, 최능현, 최능익이 있었다. 아내 이풍옥과의 사이에서 최필립(장남), 최만립, 최봉립, 최화선, 최자립 등을 두었다. 손자 최우석은 조선일보 기자이다.

5. 평가